『금메달리스트의 조건』
초일류의 심·기·체를 만드는 법
사쿠라이 쇼이치
머리말
2020년, 도쿄에 다시 올림픽이 찾아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으로 도쿄 올림픽 개최는 연기되었다.
올림픽 출전이 결정돼 있던 선수들과 자국에서 열리는 대회를 기대했던 분들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완전히 상업주의에 빠져 버린 오늘날의 올림픽이 연기되든 취소되든 알 바 아니라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옛날과 달리 오늘날의 올림픽은 정치와 경제의 논리에 휩쓸려 철저하게 상업화되었다. 내 눈에는 그 안에서 ‘돈’과 욕망이 소용돌이치고 인간의 추함과 탐욕이 판치는 것처럼 보인다. 텔레비전으로 여러 종목을 보아도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승리지상주의만 두드러질 뿐, 올림픽 헌장이 내세운 본래의 페어플레이 정신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첫 도쿄 올림픽이 열린 1964년,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당시 나는 시모키타자와의 본가에 살고 있었지만 올림픽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직접 관전하러 가지도 않았다. 꼭 보고 싶은 경기나 좋아하는 선수가 없는 내가 올림픽을 보는 것은 축제 소동에 편승하는 듯해서 싫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몸과 마음에 힘이 넘쳤다. “올림픽 전 종목에 출전해서 전부 금메달을 따면 재미있겠는데”라는 시시한 공상도 해 본 적이 있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한때 뒷세계에서 정·재계 거물들을 대신해 거대한 이권이 걸린 마작을 두는 ‘대타 기사’로 약 20년을 살았다. 대타 생활에서 은퇴한 뒤에는 ‘작귀회’라는 마작 도장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진짜 마작을 가르치고 있다.
이 책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을 움직여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날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한 놀이만 골라 했다. 자연 속에서 몸을 쓰며 놀면서 ‘몸을 제대로 움직이는 법’을 익혔고, 그것은 심·기·체 모든 면에서 나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었다. 그래서 작귀회는 마작 도장을 표방하지만, 실제로 하는 일의 절반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대타에서 은퇴한 뒤 다케쇼보의 『근대 마작 골드』 등에 작귀회가 소개되면서, 내 승부론과 살아온 방식을 접한 격투기 선수와 프로 스포츠 선수들이 종종 도장을 찾아오게 되었다. 각 분야 정상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은 아마 내게 ‘20년 무패의 승부론’ 같은 것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장에서 나와 함께 한 것은 ‘몸놀림’이었다. 격투기도, 프로레슬링도, 야구도, 축구도, 탁구도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내가 프로 선수를 상대로 “이렇게 움직여 보면 어때?”라고 가르친다. 나는 10대 시절 어떤 운동부에도 들어간 적이 없다. 내가 직접 해 본 적 없는 종목의 프로 선수들이 찾아오면, 그 세계의 이름난 사람들조차 주저 없이 내게 몸 쓰는 법을 배우러 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수영을 아주 좋아했다. 초등학교 통학로가 전부 물길이었다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나였으니 스무 살 무렵 올림픽 수영에 출전했다면 제법 좋은 성적을 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좋은 길로 갔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은 없다. 격투기, 권투, 유도, 레슬링, 사격, 펜싱, 수영 같은 근대5종에 나가도 재미있었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올림픽 기간에 맞춰 몸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공상도 했다.
2020년을 계기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를 한 권으로 정리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지금도 올림픽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다. “이런 내가 올림픽과 심·기·체에 관해 이야기해도 되는가?” 싶었지만, 다케쇼보와의 오랜 인연에서 나온 부탁이라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이 책에서는 금메달을 딴 사람과 따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서 출발해, 초일류 인물들에게 공통되는 몸의 움직임과 마음가짐, 승부감과 승운에 관한 내 생각을 적었다. 이 책이 올림픽을 보는 사람에게, 혹은 실제로 스포츠를 하며 몸을 움직이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참고가 된다면 기쁘겠다.
제1장 초일류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법
‘인간 본래의 움직임’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 사람은 인품이 좋구나”라고 느껴지는 사람에게서는 거짓 없는 기운이 난다. 거짓이 없으니 인격도 좋다. 친분이 있는 기사 하부 요시하루 씨도 거짓이 없다. 반대로 “내가, 내가” 하며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에게는 거짓이 많다.
프로 스포츠의 세계에서는 치열한 경쟁을 이겨 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프로 선수 중에는 자기주장을 넘어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자한 사람이 많다.
한때 올림픽은 ‘아마추어의 제전’이라 불렸지만, 이제는 상업화가 진행되어 거액이 움직이는 거대한 스포츠 행사가 되었다.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은 돈과 명예를 모두 차지하려고 혈안이 돼 있다. 이제 금메달의 ‘금’은 ‘돈’을 뜻하는 금과 같은 말이 되었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선수 중에도 프로와 다름없거나 그 이상의 보수를 손에 넣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올림픽은 오래전부터 스포츠 행사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를 비추어 왔다. 그렇게 보면 올림픽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스포츠를 이용해 돈을 버는 데 그친다. 스포츠맨십은 온데간데없다. 그래서 나는 올림픽을 깨끗하거나 숭고한 것으로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도 자녀의 머리를 좋게 하거나 몸을 강하게 만든다며 돈을 쓴다. 사회 전체에 “돈이 없으면 머리도 몸도 강하게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만연해 버렸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로 굴러가고, 자본주의란 ‘돈 가진 사람이 이기는 체제’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당연히 스포츠 세계에서도 그런 편향은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그러나 돈을 들여 몸을 강하게 만들고 기술을 향상시키겠다는 출발점부터가 잘못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 본래의 움직임’은 돈으로 얻는 것도, 돈을 내고 배우는 것도 아니다.
내가 몸으로 익힌 ‘인간 본래의 움직임’은 모두 놀이 속에서 배우고 깨우친 것이다. 나무 타기, 물놀이, 씨름, 팽이치기와 딱지치기 같은 놀이를 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 그 움직임을 몸에 스며들게 했다.
이 책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인간 본래의 움직임’을 가능한 한 알기 쉽게 전하려 한다. 하지만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몸의 움직임을 글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인간 본래의 움직임을 익히면 힘을 주지 않고도 빠르게 움직이고 큰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프로 스포츠계를 둘러보면 많은 선수가 온몸에 힘을 잔뜩 주어 큰 힘을 내려고 한다. 그러나 힘이 들어간 데서 나오는 움직임은 모두 가짜다. 그렇게 해서는 빠른 움직임도 큰 힘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몸을 다치게 할 뿐이다.
순수한 놀이 속에서야말로 인간 본래의 움직임을 익힐 수 있다.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 몸을 움직인다는 것
숲에 우거진 나무를 보면 사람들은 줄기와 가지, 꽃이나 열매에 먼저 눈길을 준다. 하지만 내가 나무를 볼 때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뿌리’다. 땅속 깊이 뻗어 나무의 생명을 지탱하는 뿌리. 무슨 일이든 뿌리가 중요하다.
장기의 하부 요시하루 씨나 야구의 이치로 선수처럼 자기 분야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인간으로서의 뿌리가 단단하다. 뿌리가 튼튼하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늘 안정된 성적을 낼 수 있다.
작귀회에서는 예전부터 ‘솔직함과 용기’가 중요하다고 가르쳐 왔다. 뿌리를 단단히 내리는 동시에 솔직함과 용기를 지녀야 한다.
솔직한 사람은 남의 의견을 제대로 들을 줄 아는 귀가 있다. 인간이 성장하는 데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거기에 용기까지 있으면 눈앞의 위험을 ‘무서운 것’에서 ‘즐거운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사람의 성장은 ‘위험이라는 벽’을 몇 개나 넘어섰는가에 달려 있다. 위험을 알면서도 여러 벽을 넘어 본 사람은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놀이 속에서 언제나 위험한 일에 도전했다. 그 결과 나도 모르는 사이 인간으로서의 강함 같은 것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성장에 위험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위험과 무관한 ‘안전지대’에서 자란다.
오늘날의 아이들은 밖에서 노는 일이 극단적으로 줄었다. 도심에는 내 어린 시절과 같은 자연환경도 없다.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던 놀이기구가 공원에서 차례로 철거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위험을 경험하며 강해질 수도, 진짜 움직임을 몸으로 익힐 수도 없다.
앞에서 말했듯 앞으로 스포츠를 하려는 사람들은 돈을 내고 움직임을 배우고, 더 많은 돈을 쓴 사람이 위로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짜 움직임’으로 겨루는 모습을 봐도 나는 즐겁거나 감동적이지 않다. 세계 최고의 스포츠 행사라는 올림픽만큼은 ‘진짜 움직임’을 지닌 사람들이 겨뤄 주었으면 한다.
사람의 성장은 ‘위험이라는 벽’을 몇 개나 넘었는가에 달려 있다.
스포츠의 동작과 ‘몸놀림’의 차이
앞에서 나는 놀이 속에서 인간 본래의 움직임을 익혔다고 말했다. 놀면서도 “잘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 걸까?” 하고 관찰했고, 그 요령을 깨우쳤던 것 같다.
빠르게 나무에 오르기, 먼 곳까지 헤엄치기, 씨름에서 나보다 큰 사람을 이기기. 어떤 움직임에나 요령이 있고 올바른 몸 쓰는 법이 있다. 아마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그런 몸놀림을 익히는 데 능했던 모양이다.
마치다의 작귀회 도장에서는 매일 마작을 두는 것만큼, 때로는 마작보다 더 많이 몸을 쓰며 논다. 요즘은 다 함께 씨름을 자주 하는데, 나는 도장 수련생들과 몸을 맞대면서 “몸놀림이란 이런 거야”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 내가 본능적으로 익힌 몸놀림이다. 그런 감각적인 움직임을 설명해도 좀처럼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도 “왜 그렇게 되는가, 왜 할 수 있는가”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수련생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답이 나오지 않기에 몸놀림이 재미있다고도 할 수 있다. 세상에는 ‘답이 나오는 분야’와 ‘답이 나오지 않는 분야’가 있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단연코 답이 나오지 않는 쪽에 끌렸다. 작귀회에서 계속 마작을 두는 것도 그곳에 답도, 종착점도 없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으로 여러 스포츠를 보아도 내 눈에 “이 사람은 몸을 잘 쓰는구나” 싶은 선수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그 종목에 맞춘 동작’을 할 뿐, 인간이 원래 지닌 힘을 효과적으로 끌어내는 몸놀림을 하지 못한다.
“그럼 동작과 몸놀림은 무엇이 다릅니까?”라고 물어도 나는 그것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이미지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몸놀림이다. 몸놀림을 제대로 쓰면 불리한 상태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모든 스포츠는 자신에게 유리한 상태를 만든 쪽이 이긴다. 스모에서도 맞붙는 순간 자신이 잘하는 자세를 만들려고 샅바를 잡고 손바닥으로 치는 등 부산하게 움직인다. 요즘 스모는 예전과 달리 첫 맞부딪침에서 승부의 향방이 거의 정해진다. 그래서 보고 있어도 몹시 싱겁다.
몸놀림이 있으면 상당히 불리한 상황도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다. 옛 스모에 서로 샅바를 잡는 요츠즈모가 많았던 것은 선수들이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 뒤집는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자, 네가 좋아하는 자세로 해 봐”라며 일부러 자신을 불리하게 두고 그곳에서 승기를 찾는다. 스포츠뿐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진정한 강함’을 지닌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처럼 승부를 마음 깊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몸놀림’이 있으면 불리한 상황도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다.
상대를 받아 내는 벽과 빈틈을 찌르는 발놀림
스모를 보고 있으면 강한 선수에게는 ‘벽’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육중한 바위 같은 벽이 아니라 유연하고 품이 깊은 벽이다. 좋은 벽을 가진 선수는 상대가 어떤 식으로 공격해도 부드럽게 받아 낸다. 정면을 의식한 벽도 있고 옆면을 의식한 벽도 있다. 두 가지를 모두 지닌 선수는 드물다. 내가 기억하는 한 도치와카 시대의 두 요코즈나, 도치니시키와 와카노하나가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벽을 만들려면 무엇보다 하체가 단단해야 한다. 스모에서는 발놀림도 중요하지만, 먼저 벽이 튼튼하지 않으면 씨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야구 수비의 기본 자세도 스모에서 ‘핫케요이’를 외칠 때의 자세처럼 균형 잡힌 자세가 이상적이라고 한다. 종목은 달라도 기본은 여러 곳에서 서로 통하는 모양이다.
스모뿐 아니라 유도와 레슬링처럼 상대와 몸을 밀착해 겨루는 종목에서는 자기 벽을 확실히 가지는 일이 중요하다.
반면 권투나 펜싱처럼 상대와 거리를 두고 싸우는 종목에서는 ‘벽을 만든다’는 감각과 동시에 그 종목에 알맞은 기본 자세와 발놀림이 중요하다.
권투나 펜싱을 보면 팔과 손, 즉 글러브나 검에 시선이 가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두 종목에서 중요한 것은 발놀림이다. 발놀림으로 상대의 빈틈을 찌르고 일격을 가한다. 권투나 종합격투기를 보아도 강한 선수는 모두 발놀림이 좋다.
구기 종목 중 탁구와 테니스 역시 발놀림의 비중이 매우 크다. 발로 상대를 끌어낸 뒤 상대가 받아치기 어려운 공간으로 공을 보낸다. 상대의 사각에 공을 찔러 넣는 기술에서는 상체보다 하체의 움직임이 훨씬 중요하다.
상체의 동작만 눈에 들어오기 쉬운 스포츠도 발놀림에 주목해서 보면 또 다른 세계가 보일 것이다.
유연하고 품이 깊은 벽을 만드는 동시에 발놀림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옛사람들은 근육에 의존하지 않는 힘의 사용법을 알았다
어릴 적부터 스모를 아주 좋아한 나는 지금도 텔레비전 중계를 자주 본다. 축구와 야구를 비롯해 여러 프로 스포츠를 중계하지만 솔직히 어느 것도 그다지 재미가 없다. 보면서 “오, 이 선수는 괜찮은데”라고 느끼게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내가 텔레비전으로 보는 스포츠는 이제 스모 정도만 남았다.
하지만 요즘은 그 스모조차 전반적으로 재미가 없다. 마지막 날에 만원 사례 현수막이 걸리기도 하지만, 내게는 어딘가 부족한 스모뿐이다.
요코즈나 하쿠호는 2019년 가을 대회 첫날 평마쿠 선수에게 금성을 내주고 일찌감치 휴장했다. 요코즈나 재위 10여 년 동안 쌓인 피로가 몸 곳곳의 고장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그러나 하쿠호가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요즘 스모는 모두가 평범한 마쿠우치 선수인 듯한 상태다. 수준 낮은 경기가 매 대회 반복된다.
아사쇼류와 하쿠호가 양대 요코즈나로 경쟁하던 시대는 그래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내 관전 역사를 돌아보면, 앞서 말했듯 1950년대에 ‘도치와카’라 불리며 스모를 달군 두 요코즈나 도치니시키와 와카노하나 쪽이 경기 내용은 압도적으로 재미있었다.
그 시절 요코즈나들은 지금과 달리 힘에 의존하지 않았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는 말을 몸으로 보여 주듯 상대의 힘을 거꾸로 이용해 씨름판에 굴려 버리는 탁월한 기술이 있었다.
힘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스모에서는 서로 샅바를 잡는 요츠즈모보다 밀어붙이기와 손바닥 치기를 많이 쓰는 오시즈모가 주류가 되었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선수들이 날마다 정면으로 부딪치고 때리니 부상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전쟁 전 도호쿠 지방에서 짐을 나르던 ‘온나초모치’라는 여성들은 한 포대에 60킬로그램인 쌀가마를 다섯 개, 합계 300킬로그램이나 등에 졌다고 한다. 실제 사진도 남아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나 “정말?” 하고 놀라겠지만, 당시 여성들이 특별한 괴력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전쟁 전까지의 일본인은 자기 힘을 최대한 끌어내는 몸의 움직임과 처신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현대인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사이 ‘인간 본래의 움직임’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쌀가마를 멘 여성뿐 아니라, 전철을 타고 지방에서 채소를 잔뜩 짊어지고 와 팔던 행상 아주머니도 있었다. 도쿄 기바 일대에는 바다나 강에 떠 있는 통나무 위에 올라 그것을 회전시키며 자유자재로 다루는 장인들도 있었다. 옛 일본인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몸놀림을 하고 있었다.
현대인은 문명의 혜택 속에서 ‘인간 본래의 움직임’을 잃었다.
‘한입을 더하는’ 감각이 움직임을 근본부터 바꾼다
나는 수련생들에게 몸의 움직임을 가르칠 때 “거기서 ‘한입’을 더하는 거야”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한입’은 여유라고 해도 좋고, 맛에 작은 변화를 더하는 미묘한 조절이라고 해도 좋다. 수련생들과 씨름하며 몸놀림을 가르칠 때 “그곳에서 한입을 더해”라고 말하지만, 내가 정말 가르치고 싶은 움직임은 좀처럼 전달되지 않는다.
감각이 좋은 수련생은 내가 가르친 몸놀림을 순간적으로 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한 번 성공했다고 “다시 한번 해 봐”라고 하면 하지 못한다.
왜 한 번 해낸 몸놀림을 연달아 하지 못할까.
그들이 몸놀림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한 번 성공한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재현하려 하기에 되지 않는다. 몸놀림은 무의식중에 이루어지는 인간 본래의 움직임이다.
현대인이 본래의 몸놀림을 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부분이 세상의 당연한 것과 상식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는 정보든 돈이든 ‘많이 가진 것’을 좋다고 여긴다. 사람들은 “갖고 싶다, 갖고 싶다” 하며 필요 없는 것까지 끌어안고 산다. 늘 배가 꽉 찬 상태라 민첩하고 임기응변 있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처럼 꽉 찬 상태에 여유를 주는 것이 ‘한입을 더한다’는 감각이다. 팽팽하게 찬 위장을 ‘배부름 여덟 할’의 감각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 내가 말하는 ‘한입’이다.
현재 미국 프로레슬링 단체 WWE에서 활약하는 나카무라 신스케 선수와는 그가 일본에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
신스케가 처음 도장을 찾은 것은 2003년 섣달그믐에 열린 격투기 대회 『Dynamite!!』에서 알렉세이 이그나쇼프와 싸운 뒤 얼마쯤 지난 때였다. 그의 움직임을 보니 상대를 차거나 태클을 걸 때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본래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한입에 상대를 덥석 먹으려 하지 말고, ‘조금만 한입 먹겠습니다’ 하는 감각으로 발차기를 넣으면 돼.”
발차기를 할 때 “상대를 쓰러뜨리겠다”고 생각하면 몸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간다. 이상한 긴장이 생기면서 상대에게 가는 충격도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러니 한입 먹는 정도의 감각으로 발을 슥 내밀면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지 않고 다리도 채찍처럼 휘어, 자신이 원래 지닌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쓰러뜨리겠다, 이기겠다는 욕심이 불필요한 긴장을 낳고 상대에게 가는 충격을 절반으로 줄인다.
‘한입’의 감각을 익히면 100퍼센트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
수련생들에게 몸놀림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한입’이라는 감각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가족이나 친구가 먹는 것이 맛있어 보여 먹어 보고 싶을 때 사람들은 흔히 “한입만 줘”라고 한다. 내가 몸놀림을 설명할 때 쓰는 ‘한입’도 대체로 같은 뜻이다.
내가 “움직여 봐”라고 하면 거의 모든 수련생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크게 움직인다. 그럴 때 나는 “아주 조금만 움직임을 더하면 돼”라는 뜻으로 “거기서 한입을 넣어 봐”라고 말한다.
대단한 힘을 내려고 하면 몸에 힘이 들어가 본래 지닌 100퍼센트의 힘이 오히려 절반으로 줄어든다. 가진 힘을 모두 내려면 “전력을 다하겠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조금 해 볼까” 하는 정도로 움직이는 것이 알맞다. 이 ‘한입’의 감각을 잡으면 자신이 지닌 힘의 100퍼센트를 넘어서는 힘도 낼 수 있다.
앞서 말한 프로레슬러 나카무라 신스케 선수는 몸놀림을 배우러 여러 번 나를 찾아왔다.
그가 무릎차기를 배우러 왔을 때 나는 “나한테 무릎차기를 해 봐”라고 했다. 신스케가 온 힘을 다해 찼지만 위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무릎의 방향과 각도 같은 작은 요령을 알려 주고 여러 번 시험하게 하면서 “있는 힘껏 차지 마. 한입을 넣는 감각으로 차는 거야”라고 가르쳤다.
그러자 그의 발차기는 처음과 완전히 다른, 위력이 넘치는 기술로 변했다. 상대는 일류 프로레슬러다. 더구나 ‘한입’의 감각까지 잡자 파괴력이 커져, 받아 내는 나도 솔직히 조금 아팠다. 한창 현역인 프로레슬러의 발차기를 받아 주는 일흔이 넘은 노인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때 가르친 무릎차기는 지금 ‘킨샤사’, 일본에서는 ‘보마예’라고 불리는 그의 필살기가 된 모양이다.
큰 힘을 내고 싶다면 ‘있는 힘껏’이라는 생각을 당장 버리고 ‘한입’, 즉 아주 조금의 감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있는 힘껏’에서 ‘한입’으로 바꾸면 파괴력이 커진다.
초일류 선수는 단숨에 최고 속도에 이른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는 속담은 유도에서 자주 쓰인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 한때 ‘헤이세이의 산시로’라 불린 일본 유도의 고가 도시히코 선수를 떠올린다.
고가의 체중은 70킬로그램대였지만, 1990년 무제한급으로 치르는 전일본 유도 선수권에 출전해 중량급 선수들을 차례로 꺾고 당당히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서는 오가와 나오야에게 아깝게 졌다.
그는 업어치기를 잘했다. 남다른 순발력과 발놀림으로 순식간에 상대 품속으로 뛰어들어 한판 업어치기를 성공시켰다. 상대는 “깨닫고 보니 몸이 공중에 떠 있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1996년 애틀랜타부터 2004년 아테네까지 남자 유도 60킬로그램급 올림픽 3연패를 이룬 노무라 다다히로도 고가처럼 뛰어난 순발력을 지닌 선수였다. 여자 레슬링 63킬로그램급과 58킬로그램급에서 일본 최초이자 세계 여자 선수 최초로 올림픽 4연패를 이룬 이초 가오리의 고속 태클도 “역시 스포츠의 출발점은 달리기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훌륭한 움직임이었다.
고가, 노무라, 이초는 모두 슈퍼 애슬리트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금메달리스트다. 이들에게 공통된 것은 순식간에 최고 속도에 이르는 비범한 순발력과 발놀림이다.
여럿이 무거운 것을 들 때는 흔히 “하나, 둘, 셋” 하고 구호를 맞춘다. 힘을 낼 타이밍을 맞추는 일은 흔하지만 순발력을 겨루는 종목에서는 하나, 둘, 셋을 셀 틈이 없다. 정상급 선수들은 모두 ‘하나’라는 단 한 박자에 최고 속도로 들어가는 체력과 기술을 갖고 있다.
그렇게 되려면 보통 사람을 벗어난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 있으면 오히려 절대로 할 수 없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한입’의 감각이다.
격투기뿐 아니라 구기 종목에도 훌륭한 순발력을 지닌 선수가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 리오넬 메시다. 그는 세계 정상급 순발력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선수가 되었다. 경기 중 많이 달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모두 알다시피 세계 굴지의 골잡이다.
메시가 대단한 것은 폭발적인 순발력에 더해 화려한 발놀림으로 상대의 눈을 죽인다는 점이다. 메시가 공을 잡으면 수비수의 시선이 공으로 쏠린다. 본래 수비수는 공만이 아니라 메시와 주변 상황까지 함께 파악해야 하는데, 그가 공을 잡는 순간 그것이 불가능해진다. 메시에게는 상대를 현혹하는 세계 정상급 발 기술이 있다.
순발력이 필요한 종목에서 세계 정상에 군림하는 선수들은 0에서 단숨에 100으로 가는 힘을 지녔다.
“하나, 둘, 셋”의 ‘하나’에서 최고 기어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초일류 선수다.
진짜 몸놀림은 바람과 물과 대지가 가르쳐 준다
문명의 힘에 물든 현대인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신기하다”거나 “사기다”라는 한마디로 치워 버리기 쉽다.
도장에서 날마다 하는 몸놀림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대체 뭘 하는 거야?” 싶은 일투성이다.
몸놀림을 쓰면 전혀 힘을 주지 않고도 큰 힘을 낼 수 있다. 도장에서 씨름을 하다 보면 깡마른 작은 사람이 체격 좋은 거구를 밀쳐 내거나 내던지는 일이 자주 생긴다. 다만 일시적으로 가능할 뿐, 날이 지나면 다시 원래의 작은 사람으로 돌아가 버린다.
나는 독특한 몸 쓰는 법을 바람과 물, 대지와 나무 같은 대자연,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여러 생물에게서도 배웠다.
사람들은 “바람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나?”, “생물이 무엇을 가르쳐 준다는 건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자연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움직임으로 가르쳐도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오랫동안 함께한 수련생들도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데 일반인이 안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내가 말하는 인간 본래의 움직임은 말로 전할 수도,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다.
요즘 수련생들은 바람이 되거나 마른 잎이 되면서 ‘이치로 따질 수 없는 몸의 움직임’을 즐긴다. 처음에는 내가 “이렇게 바람이 되는 거야”, “이렇게 하면 나뭇잎이 될 수 있어”라고 손수 가르친다. 그러면 바람이 된 수련생이 마른 잎이 된 수련생을 북풍에 날리는 낙엽처럼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한다.
바람이 낙엽을 굴리는 데 힘은 필요 없다. 작은 수련생이 체격 큰 수련생을 아주 쉽게 계속 굴린다. 굴리는 쪽은 “왜 이렇게 간단하지?”라고 생각하고, 굴러가는 쪽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계속 구른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또 “사쿠라이 씨,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설명하고 싶어도 설명할 수가 없다.
대부분은 낙엽을 죽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낙엽은 죽지 않았다. 겨울에 많은 생물에게 온기를 주고, 그 뒤에는 흙으로 돌아가 동식물의 생명을 잇는 영양분이 된다.
“땅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낙엽은 죽지 않았다.”
대자연에서 움직임을 배운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낙엽은 죽지 않았다. 대자연은 인간에게 절대적인 스승이다.
제2장 초일류의 몸을 움직이는 법
붙잡으려 하지 말고 살짝 닿는 감각이 가장 좋다
승리지상주의가 휩쓴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결과가 전부’, ‘이기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 상대에게 이기기 위해서라면 규칙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좋다고 여긴다. 그런 생각을 지닌 어른들뿐이니 아이들도 자신도 모르게 같은 사고방식에 물든다.
경제사회에서는 온갖 경쟁과 싸움이 벌어지지만, 내 눈에는 사람도 회사도 서로 빼앗는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보다 많이 얻은 사람이 승자’라 여기니 남보다 먼저 앞서고 더 많이 가지려고 수많은 사람이 혈안이 된다.
작귀회 수련생들이 마작패를 다루는 모습을 보면 대체로 움직임이 딱딱하다. 쓸데없이 힘을 주어 패를 움켜쥐기 때문이다. 본래 패는 움켜잡는 것이 아니라 살짝 ‘닿는’ 정도의 감각으로 뽑고 버리는 것이 좋다. 하지만 수련생들도 오늘날 사회에서 살아온 아이들이라 ‘움켜쥐고 차지하려는’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동작도 딱딱해진다.
그래서 나는 “패는 닿는 정도의 감각으로 뽑아라”라고 가르친다. 손가락 관절로 움켜쥐지 말고 손가락 안쪽 면으로 살짝 건드리는 감각으로 패를 뽑는다. 그러면 온몸에서 쓸데없는 힘이 빠져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가까워지고, 몸과 생각에도 부드러움이 생긴다.
내가 밤마다 수련생들에게 몸놀림을 가르치는 것도 자연스럽고 부드러우며 매끄러운 움직임을 알게 하고 싶어서다. 순간순간의 변화에 대응하려면 몸과 마음의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모든 것에 살짝 ‘닿는’ 감각이다.
빨리 헤엄치려는 나머지 물을 붙잡으려 하니 흐르듯 헤엄치지 못한다. 빨리 달리려는 나머지 발로 땅을 움켜잡으려 힘을 주니 매끄럽게 달리지 못한다. 긴장은 인간이 원래 지닌 힘을 반감시킬 뿐 아니라 뒤에 큰 피로를 남긴다. 이기는 것과 일등이 되는 데만 집착해서는 일등이 될 수 없고 피로만 쌓인다. “이기고 싶다, 이기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계속 진다는 사실을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한다.
힘이 들어가면 본래의 힘이 절반으로 줄고 피로가 쌓인다.
우사인 볼트는 힘을 빼고 달리기에 빠르다
육상 100미터와 200미터 세계기록 보유자 우사인 볼트는 2017년 런던 세계선수권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의 달리기는 근래 단거리 선수 중 몸을 가장 잘 쓰는 자세였다.
달릴 때의 자세와 슥슥 뻗어 나가는 부드러운 발의 운용까지 모든 것이 자연의 흐름을 따랐다. ‘달린다’기보다 다른 힘에 ‘밀려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인 것은 몸에 힘을 주지 않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치에 맞는 주법이었기에 그 큰 몸을 능숙하게 다루고 세계 최고 선수로 오랫동안 정상에 머물 수 있었다.
볼트는 결승이 아닌 경기에서는 대부분 결승선 직전에 힘을 빼는 것처럼 보였다. 결승조차 “정말 전력으로 달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때가 있었다. 늘 힘을 뺀 채 달렸기에 우리 눈에는 그가 진심으로 달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전력으로 달리겠다”고 생각하면 온몸이 긴장해 굳고 어딘가에 무리가 생겨 100퍼센트의 힘을 내지 못한다. 하지만 볼트처럼 여력을 남기고 달리면 그 여유가 후반 가속을 낳고, 가진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하게 한다.
일본 단거리계에서는 2017년 9초 98의 일본 신기록을 낸 기류 요시히데가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달리기는 볼트나 과거의 칼 루이스와 비교하면 어딘가 무겁게 느껴진다. 아직 몸 어딘가가 굳어 있기에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여력을 남겨 달리면 후반에 가속이 붙어 가진 것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
‘최속의 사나이’ 콜먼의 가장 큰 무기는 허벅지다
올림픽의 꽃이라 할 남자 육상 100미터에서 당시 도쿄 올림픽의 가장 주목받는 선수는 2019년 세계 랭킹 1위 크리스천 콜먼이었다.
이 책을 준비하며 그의 달리기를 영상으로 처음 보았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허벅지로 달린다’고 할 수 있다.
콜먼은 키가 작은 편인데도 보폭이 넓고 여유롭게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무릎 위쪽 허벅지를 능숙하게 쓰기 때문이다. 허벅지를 들어 올리는 각도가 자신의 키에 맞아,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바로 튀어 오르며 다음 걸음으로 넘어간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다.
상체는 다른 흑인 선수들처럼 근육질로 단단하지만 팔 동작을 포함해 허벅지를 제외한 움직임은 모두 덤처럼 보인다. 허벅지를 드는 방식이 이치에 맞고 매우 부드러워 걸음마다 0점 몇 초씩 아낄 수 있고, 그것이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다.
내가 본 2019년 도하 세계육상선수권에서는 콜먼이 금메달, 저스틴 개틀린이 은메달을 땄다. 콜먼은 힘이 들어가지 않고 축도 확실했지만, 개틀린은 축이 흔들려 매우 불안정했다.
콜먼은 당시 금메달에 가장 가까운 남자였다. 잡념과 욕심, 압박에 흔들리지 않고 여유롭게 달리면 도쿄에서도 금메달을 딸 것이라 생각했다.
그 전 올림픽까지 100미터의 영웅은 우사인 볼트였다. 볼트도 콜먼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달리기로 한 시대를 만들었다. 가장 큰 장점은 큰 몸을 살린 역동적인 주법이다.
볼트는 체격과 보폭이 커 경기 전반에는 조금 뒤처지는 듯했지만 후반에 넓은 보폭의 장점이 살아났다. 중반 이후 걸음마다 가속해 결승선에서는 다른 선수들을 멀리 떼어 놓고 압승하는 경기가 많았다.
그 큰 몸으로 강한 경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연성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달리기 덕분이다. 그의 주법은 100미터보다 200미터에서 더 잘 살아났기에 나는 200미터의 볼트를 좋아했다.
콜먼이 허벅지로 달렸다면 볼트는 가슴으로 달렸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상급 선수는 모두 움직임에 여유가 있어 어떤 때도 당황하거나 허둥대지 않고 안정된 성적을 낸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힘 빼는 요령’
작귀회에서는 마작만 두는 것이 아니라 새벽까지 몸을 쓰며 논다. 요즘 자주 하는 것은 동네 야구와 씨름이다.
수련생들의 씨름을 보면 몸 쓰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상체에 의존해 움직인다. 팔로 상대를 밀고 던지려 하니 그렇게 된다. 상대를 던지고 싶다면 사실 의식을 하체에 두는 편이 좋다.
상체 힘에 의존하면 의식이 팔과 손에 집중되어 반드시 힘이 들어간다. 그러니 상대를 던지려 할 때는 발끝 같은 곳에 의식을 둔다. 그러면 긴장이 빠진 만큼 더 큰 힘을 낼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이 바로 내가 말하는 몸놀림이다. 하지만 체육 수업과 스포츠 훈련에서 ‘운동’이라는 동작을 배워 온 수련생들에게는 실행하기 매우 어려운 모양이다.
무거운 물건을 한 손으로 들려 하면 대부분은 그것을 쥐기 위해 손과 팔에 의식을 집중할 것이다. 나는 그럴 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반대편 손에 의식을 둔다. 그러면 무거운 물건이 무겁지 않게 되고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다.
힘을 주어 근육이 떨리거나 몸의 중심이 흔들리는 것은 균형이 무너졌다는 증거이며 온몸이 빈틈투성이가 된다. 대부분은 “힘내자”, “이기자”라는 의식이 너무 강해 스스로 무너진다. 이것이 자멸의 길이다.
걷기, 달리기, 던지기, 들어 올리기처럼 단순한 동작일수록 의식을 다른 곳에 두면 생각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
나도 나이가 들어 이제는 달리지 못하지만, 만약 달린다면 손가락에 의식을 둘 것이다. 발가락이 아니라 달리기와 전혀 관계없는 손가락이다. 그렇게 의식의 위치만 바꾸어도 몸에는 신기한 변화가 생긴다.
의식을 다른 곳에 두면 생각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
100미터 달리기는 서서 출발하는 쪽이 빠르다
오늘날 육상 100미터는 앉은 자세에서 시작하는 크라우칭 스타트가 주류다. 두 개의 스타팅 블록을 양발로 차고 출발하는 방식이다.
나는 어떤 종목이든 인간이 움직일 때 ‘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크라우칭 스타트처럼 몸을 앞으로 숙이면 좋은 축을 만들 수 없다. 출발할 때 양발이 앞뒤로 지나치게 벌어진 것도 내 눈에는 좋은 형태가 아니다. 블록의 반발력을 이용하는 방식도 자연스럽게 달리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연스러운 자세로 달리려면 서서 시작하는 스탠딩 스타트가 가장 좋다. 중·장거리 선수가 출발할 때 취하는 자연스러운 자세다.
출발 순간 곧바로 최고 속도에 이르려면 블록을 이용한 크라우칭 스타트가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축을 안정되게 유지하며 흐름을 타고 달리기에는 스탠딩 스타트가 더 알맞다.
볼트와 칼 루이스 모두 확실한 축을 지녔다. 그러나 좋은 축을 가진 선수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1990년대 200미터와 400미터를 휩쓴 미국의 마이클 존슨이다.
마이클 존슨은 200미터 21연승, 400미터 58연승의 기록을 세웠고 세계선수권에서 여덟 개, 올림픽에서 네 개의 금메달을 땄다.
그의 주법은 뒤로 젖히는 듯 등을 곧게 세운 독특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저렇게 뒤로 젖혀서 어떻게 빨리 달리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좋은 축을 가진 자연스러운 달리기였다.
“앞으로 숙여야 더 빠르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숙이고 달려도 되는 것은 네 발 달린 동물뿐이다. 인간은 두 발로 달린다. 그런데 머리만 앞으로 나와 있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균형이 나쁘다. 균형이 무너진 채 빨리 달릴 수는 없다.
두 출발법 중 무엇이 빠른지는 스타팅 블록을 차는 기술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축을 갖춘 선수는 가속력이 강하므로 스탠딩 스타트가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몸의 움직임은 고정관념과 기존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에 가까운 방향을 찾을 때 활로가 열린다. 크라우칭 스타트는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서 한 선수가 사용하며 퍼졌다고 한다. 그 전까지 모두 스탠딩 스타트를 썼다. 단거리 정상급 선수 중 다시 스탠딩 스타트를 쓰는 사람이 나온다면 나는 크게 주목하고 싶다.
어떤 종목이든 인간이 움직이는 데는 축이 매우 중요하다. 튼튼하고 좋은 축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낳는다.
테니스의 조코비치가 지닌 특별한 ‘축’
내가 몸의 움직임을 설명할 때 자주 말하는 ‘몸의 축’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축은 몸 안을 하나의 기둥처럼 관통하는 척추 같은 것이 아니다. 직선도 아니고 위아래로만 뻗은 것도 아니다. 쉽게 말하면 자이로스코프처럼 360도로 빙글빙글 회전하는 구체 속의 축이라고 할까. 그런 축이 있으면 몸이 어떤 상태에 있든, 어떤 동작을 하든 균형을 잡을 수 있다.
대인 종목의 승부는 결국 서로 이 축을 빼앗고 무너뜨리는 데서 결정된다. 좋은 축을 지닌 사람은 몸 안에 여러 축이 있어 균형이 좋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반대로 단단한 축이 없는 사람은 상대에게 축을 빼앗기기 쉽고 균형도 잘 무너진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정상급 선수는 모두 좋은 축을 많이 갖고 있다.
나는 테니스를 잘 모르지만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노바크 조코비치의 경기를 보고 “좋은 축을 잡고 있구나”라고 느꼈다.
그는 상대의 서브를 기다릴 때의 자세가 매우 좋았다. 맞은편 선수의 자세에서는 좋은 축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조코비치는 유연한 축으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좋은 축이 있으면 전후좌우와 위아래의 모든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으므로 상대가 공을 찔러 넣을 틈이 없다. 텔레비전으로는 잘 전달되지 않겠지만 코트에서 그와 마주 선 선수는 존재감만으로도 상당한 압박을 받을 것이다. 그만큼 자세에 빈틈이 없다. 나중에 수련생에게 물었더니 조코비치는 세계 1위 선수라고 했다. 역시 세계 정상에 선 슈퍼 애슬리트는 축부터 특별하다.
좋은 축이 있으면 빈틈이 없고 전후좌우와 위아래의 모든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다.
일류 선수는 모두 ‘저격수’다
조코비치는 공격도 대단하지만 특히 받아 내는 능력이 좋다. 서브도 좋지만 리턴도 좋다는 뜻이다.
상대 서브를 기다릴 때의 위치 선정이 좋고, 잘게 스텝을 밟아 몸을 흔들며 다음 움직임을 준비한다. 언제든 ‘작은 움직임’에서 ‘큰 움직임’으로 이어 갈 준비가 되어 있기에 어떤 서브에도 대응한다.
작게 발을 움직이며 상대에게 조준을 맞추는 모습은 일격필살의 저격수와 같다. 더 말하자면 사바나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표범처럼 보이기도 한다. 낮은 자세에서 순간적으로 최고 속도에 이르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먹잇감을 잡는다. 코트 위의 조코비치는 저격수이자 표범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서브의 궤적을 읽어 리턴으로 과녁을 맞힌다. 그와 비교하면 어떤 상대도 ‘마구 쏘다 보면 하나쯤 맞겠지’ 하는 성능 낮은 기관총처럼 보인다.
낭비 없이 부드럽게 상대를 포착하는 움직임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테니스뿐 아니라 정상급 선수의 움직임은 모두 아름답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저격수 같은 일격필살의 기술이 있다.
정상급 선수는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한순간에 실행해 일격필살로 끝낸다.
눈에 의존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가 보인다
눈을 감은 채 손바닥을 약간 오므려 눈앞을 가려 보라.
먼저 눈을 확 뜨면 손바닥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손바닥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사물을 구별할 수는 없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이번에는 아주 가늘게 떠 보라. 그러면 손바닥의 주름 같은 것이 서서히 보이지 않는가.
왜 눈을 가늘게 뜨면 주름이 보이는지 나는 눈 전문가가 아니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감지할 때 나는 이 ‘눈을 가늘게 뜨는’ 듯한 감각으로 모든 것을 느끼려 한다.
주변에서 무엇이 벌어지는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감지할 때 시각에만 의존하지 않으면 청각이 또렷해지고 후각과 촉각도 더 잘 작용한다.
사람은 눈앞의 일을 반드시 눈으로 보려 한다. 그러나 시각에 지나치게 기대어 눈앞에 있는 것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오감이 있으니 다섯 감각을 균형 있게 쓰면 주변의 일과 자신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나는 도장에 있을 때 수련생들의 뒷모습만 보거나 패를 놓는 소리만 들어도 “저 탁자는 지금 이런 상황이군”, “저쪽은 저 녀석의 상태가 좋은가 보군” 하고 안다. 도장 밖 거리를 누가 걷는지, 건물 앞에 멈춘 차에서 누가 내렸는지도 동시에 느낀다. 어릴 때부터 시각에만 의존하지 않고 살아온 결과다. 나만 특별히 가진 감각은 아니다. 본래 모든 인간이 지녔지만 현대인이 오감을 닫아 버렸을 뿐이다.
일상에서 주변을 볼 때 시각에만 기대지 말고 오감으로 느끼려 하라. 그러면 시각 이외의 감각이 조금씩 열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그렇게 조금씩 미지의 감각을 익혀 갈 수밖에 없다.
사회 상식대로라면 “사물을 보려면 눈을 써라”라고 하겠지만, 나는 그런 상식과 도덕,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불필요하고 방해되는 것으로 보고 덜어 내며 살아왔다. 방해물을 지워 나가면 사물의 진짜 모습이 떠오른다.
건강이나 취미로 하는 운동도 “이 운동은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방식으로 배운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면 인간 본래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하지 못한다. 군더더기를 모두 덜어 낸 곳에 본래의 움직임이 있다.
세상의 당연함과 상식, 지식과 정보는 인간답게 사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닫혔던 오감이 조금씩 열리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가능해진다는 점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교과서적인 지식에 의존하면 인간 본래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할 수 없다.
‘춤’에는 움직임의 본질이 숨어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을 움직이며 노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움직이고, 몸으로 느끼고, 본능에 가까운 곳에서 선택하고 판단했다. 날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사물의 본질도 보이기 시작했다.
몸의 ‘움직임’을 끝까지 파고들면 결국 ‘춤’에 이른다.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상어나 사바나에서 먹잇감을 쫓는 치타는 흐르듯 이어지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동작을 한다. 인간이 자연의 동물처럼 움직이려 할 때 그 궁극적인 형태는 춤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무용이 있듯 세계에는 각 민족이 긴 역사 속에서 길러 온 춤이 있다. 원시생활을 하던 태고의 인류도 종교의식에서 춤을 췄다고 한다. 일본의 봉오도리도 그런 옛 문화의 흔적이 형태를 바꾸어 전해진 것인지 모른다.
일본 전통예능인 노와 교겐을 보면 옛 일본인이 모두 지녔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진다. 걷기는 동물 움직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자연의 동물은 슥 흐르듯 걷지만 현대인 중에는 쿵쾅거리며 부산하게 걷는 사람이 많다.
노와 교겐의 걸음은 매우 매끄럽고 자연의 움직임에 가깝다. 가부키나 발레를 보아도 같은 느낌이 든다. 중국의 태극권도 무도가 아니라 무용이다. 운동을 끝까지 파고들면 궁극적인 형태는 춤이 된다. 세계 곳곳에서 오래 이어진 춤에는 그런 움직임의 본질이 숨어 있다.
더 빨리 달리고 더 빨리 헤엄치고 싶다면 ‘빠르게 움직이려’ 하지 말고 흐르듯, 춤추듯 움직여 보라. 그러면 움직임의 본질을 조금씩 이해하게 될 것이다.
노와 교겐의 매끄러운 걸음은 자연의 움직임에 매우 가깝다.
무하마드 알리도 춤추고 있었다
세상의 여러 스포츠를 둘러보아도 춤추듯 매끄럽고 부드럽게 몸을 쓰는 종목은 거의 없다.
‘춤추듯 움직인다’는 말을 들으면 전설적인 복서 캐시어스 클레이, 훗날의 무하마드 알리가 떠오른다.
알리는 1960년 로마 올림픽 라이트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따고 4년 뒤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링 위를 가볍게 튀어 다니며 날카로운 펀치를 내는 움직임은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고 표현되었다. 헤비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화려한 풋워크에 전 세계 복싱 팬이 매료됐다.
내가 특히 좋게 본 것은 스텝이었다. 상대에게 달려드는 전진 스텝이 아니라 거리를 만드는 백스텝을 아주 잘했다. 그 백스텝은 방어에 효과적일 뿐 아니라 그 뒤 앞으로 나갈 때의 위력도 배가시켰다.
오늘날 복싱, 특히 중량급에는 알리 같은 스타일의 선수가 거의 없다. 춤추듯 복싱하며 연이어 녹아웃을 만들어 낸 알리는 자연에 가까운 몸의 움직임을 실현한 드문 존재였다.
링 밖에서는 인종차별과도 싸웠다. 반골 정신 그 자체였던 그는 당시 체제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베트남전 징병도 거부했다. 그 때문에 왕좌뿐 아니라 선수 면허까지 박탈당했지만 타고난 반골 정신으로 다시 챔피언에 올랐다. 그는 언제나 분노를 품고 있었다. 마그마처럼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도 그를 움직인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나비처럼 날고 벌처럼 쏜다. 화려한 스텝으로 춤추듯 움직일 수 있으면 강하다.
좋은 복서는 발로 상대의 품속에 슥 들어간다
런던 올림픽 미들급 금메달리스트이자 당시 WBA 세계 미들급 챔피언이던 무라타 료타는 일본을 대표하는 복서였다.
2019년 12월 23일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WBA 세계 미들급 8위 스티븐 버틀러에게 5라운드 2분 45초 TKO승을 거뒀다. 영상을 보니 무라타는 초반부터 몸이 무겁고 움직임도 둔해 보였다.
하지만 서투르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나가는 스타일을 고수하기에 위압감이 있다. 복서에게 위압감은 강력한 무기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프로 챔피언이 된 것도 독특한 위압감 덕분이다.
스텝을 보면 상대 발에 맞추는 데 서툴다. 그래서 상대의 틈을 찌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고 원하는 클린히트를 내지 못한다. 이 발놀림을 조금 더 다듬으면 복싱이 훨씬 좋아질 것이다.
다음 상대로 거론되던 파운드 포 파운드 최강 사울 ‘카넬로’ 알바레스의 움직임도 영상으로 확인했다. 상체, 특히 어깨를 흔드는 방식이 아주 좋다. 무라타와 달리 발놀림도 능숙하다. 펀치와 함께 발이 나가기에 찌르는 듯 날카로운 주먹을 뻗는다.
두 사람의 당시 실력을 비교하면 무라타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몬스터’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이노우에 나오야는 말할 필요도 없이 가볍고 좋은 스텝을 밟는 선수다. 정상급 선수의 공통점인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지녔고 가벼운 스텝과 함께 상대 품속에 슥 들어간다.
2019년 11월 WBSS 결승에서는 전 5체급 챔피언 노니토 도네어와 판정까지 가는 사투를 벌였다.
영상을 보니 1라운드부터 실력 차이가 뚜렷해 언제 이노우에가 쓰러뜨릴지만 남은 듯 상대를 압도했다. 그런데 2, 3라운드부터 그의 움직임이 딴사람처럼 바뀌었다.
2라운드에 도네어의 강력한 왼손을 오른쪽 눈에 맞아 눈가가 찢어졌고, 그 뒤 오른눈에는 사물이 세 겹으로 보였다고 한다. 이상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고 오른눈을 되도록 쓰지 않는 복싱으로 바꿨기에 내 눈에는 딴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강인한 상대를 한쪽 눈만으로 끝까지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펀치뿐 아니라 상대를 피하는 좋은 발놀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 4월 라스베이거스에서 3단체 통합전이 열릴 예정이었지만 코로나로 연기됐다. 예정대로 열렸다면 그는 그 경기에서도 승리해 세계에 ‘이노우에’라는 이름을 다시 알렸을 것이다.
좋은 복서는 발놀림이 좋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도 발로 영광을 붙잡는다.
몸을 잘 다루는 사람은 피로가 잘 쌓이지 않는다
올림픽 출전을 노리는 선수는 하루 연습시간도 길고 피나는 노력으로 목표와 꿈을 이루려 할 것이다.
전력을 다해 연습하면 실력이 늘겠지만 지나치게 혹독한 훈련을 오래 이어 가면 몸과 마음에 피로가 쌓여 실전에서 100퍼센트의 힘을 내지 못한다. 연습으로 심신이 강해진다면 좋다. 그러나 피로가 남은 상태로 연습하는 날이 많을수록 역효과가 날 것이다.
피로를 남기지 않는 훈련을 하려면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기 몸을 확실하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몸을 능숙하게 조절하는 사람은 피로가 쌓이는 움직임을 피할 수 있다. 자기 몸을 잘 다루는 사람은 물건을 던지고 차는 조절 능력도 좋다. 그래서 나는 평소 먼 곳에서 휴지통에 종이뭉치를 던져 넣는 식으로 물건을 던져 보고, 그 결과를 몸의 조절 상태와 심신의 흐트러짐을 아는 지표로 삼는다.
운동한 뒤 “아, 좋은 땀을 흘렸다”고 말한다. 정말 좋은 땀을 내는 운동은 뒤에 피로도 많이 남기지 않는다.
나도 젊을 때는 아무리 몸을 혹사해도 다음 날까지 피로가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일흔 중반이 되자 몸 곳곳에 피로가 남기 시작했다. 원래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이른바 쇼트 슬리퍼라 ‘자면서 회복한다’는 방법을 쓰지 않는다. 그런 생활을 계속했으니 피로가 쌓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나도 몸을 심하게 움직이고도 이튿날 피로가 남지 않을 때가 있다. 바로 ‘좋은 땀을 흘렸을’ 때다.
작귀회에서는 한밤중에 시작한 몸놀이가 새벽까지 이어지곤 한다. 얼마 전에도 아침 일곱 시쯤까지 탁구를 하며 놀아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땀을 흠뻑 흘렸다. 그때의 땀은 나를 상쾌하게 해 주는 좋은 땀이었다.
날마다 고된 연습을 하는 사람은 먼저 심신을 조절하는 기술을 다듬으며 조금이라도 좋은 땀을 흘려야 한다. 그런 하루하루의 축적이 실력을 효율적으로 키운다.
‘좋은 땀’을 흘리며 자기 몸을 능숙하게 조절한다.
각자의 몸에 맞는 각자의 움직임이 있다
마라톤을 보면 선수마다 달리는 자세가 달라 인간의 개성과 버릇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각자가 “어떻게 해야 빨리 달릴까?”를 끝까지 파고든 결과 그 자세에 이르렀겠지만, 달리는 방식이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올림픽 출전을 다투는 정상급 선수의 달리기에는 저마다의 특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야구도 타격 자세와 투구 자세가 다양하다. 세계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의 외다리 타법은 아주 개성적이었고, ‘잠수함 투구’라 부르는 언더스로도 근래 프로야구에서는 드물어졌다. 메이저리그에서 크게 활약한 노모 히데오의 ‘토네이도 투구’도 특징적인 동작으로 주목받았다.
각각의 독특한 자세는 그 선수의 몸에 맞았기에 만들어졌다. 오 사다하루와 노모는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노모의 투구는 프로 입단 당시 “어깨와 허리, 무릎에 부담이 너무 크다”, “낭비가 너무 많다”는 논란을 불렀다.
보통 사람이 흉내 내기 어려운 투구이며 몸의 부담도 일반적인 투구보다 클 것이다. 하지만 노모에게는 그 방식이 맞았다. 그렇기에 직구가 시속 150킬로미터를 넘었고, 초일류 타자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든 낙차 크고 예리한 포크볼을 던졌으며, 10년 넘게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투구는 몸을 비틀고 꼬는 것이라기보다 ‘원운동’을 받아들인 이치에 맞는 움직임이었다.
노모의 성적을 보면 남의 눈에는 몸에 부담을 주는 방식처럼 보여도 본인에게는 전혀 부담이 아니고 오히려 지닌 힘의 100퍼센트 이상을 끌어내는 몸 쓰는 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본인이 “이렇게 던져도 부담이 없습니다”라고 하는데 감독과 코치가 쓸데없이 자세를 고치려 해 어깨와 팔꿈치를 망치고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프로를 떠난 선수도 많을 것이다. 지도자는 기존 관념과 상식에 얽매이지 말고 선수 각각의 신체 특징을 파악해 개성을 살려야 한다.
상식을 벗어난 움직임도 그 사람에게 맞으면 문제없다.
일본인에게 맞는 근육을 붙이는 법이 있다
당시 오타니 쇼헤이는 메이저리그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뛰던 시절 텔레비전으로 보고 몸은 크지만 부드럽고 좋은 움직임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낯선 땅에서도 일본 시절과 다름없는 좋은 성적을 냈다.
한 가지 걱정은 앞서 미국으로 간 많은 선수처럼 서양인 같은 몸을 원해 훈련하다 근육을 지나치게 붙여 다치거나 부상하기 쉬운 체질이 되는 일이다.
서양인과 일본인은 골격도 근육의 질도 다르다. 그런데 서양인에게 맞추려 하니 몸에 무리가 간다. 이치로가 마흔다섯 살까지 현역을 이어 간 것은 자기 몸을 거스르지 않고 일본인에게 맞는 훈련을 꾸준히 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모를 좋아해 대회가 시작되면 자주 중계를 보지만, 요즘은 부상자투성이라 전혀 재미가 없다. 서로 샅바를 잡는 스모가 줄고 충돌하는 밀어붙이기만 늘어난 경기 방식의 변화도 있지만, 힘을 붙이기 위한 근력운동의 변화도 크게 관여했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근육을 붙이면 움직임이 좋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과도한 훈련과 영양 섭취로 근육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움직임은 무거워지고 몸은 굳을 수밖에 없다.
가늘고 유연한 대나무와 야자수가 강풍에도 부러지지 않는 것은 유연하기 때문이다. 줄기가 단단하게 굳으면 곧바로 뚝 부러질 것이다.
메이저리그처럼 강인한 체격의 선수들 사이에 있으면 “나도 몸을 키워야 해”, “힘을 더 길러야 해”라고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는 일본인에게 맞는 근육과 훈련법이 있다. 서양인의 힘에 정면으로 맞서지 말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는 정신으로 일본인만의 장점을 키워야 세계와 겨룰 수 있다.
오타니 쇼헤이의 높은 대응력을 떠받치는 뿌리
오타니가 메이저리그로 옮긴 첫해, 정규시즌 전 시범경기의 타격을 보며 여유로운 ‘좋은 간격’을 잡고 있다고 느꼈다. 젊은 선수는 “반드시 치겠다”며 저돌적으로 되기 쉽지만 그때의 오타니에게서는 그런 힘겨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간격을 유지하며 메이저 투수들의 볼 배합과 구질을 충분히 살피고 자기 타격을 어떻게 맞출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첫해부터 훌륭하게 메이저리그에 적응했다. 그 대응력은 정신과 육체 양쪽에 유연성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아무리 몸과 마음이 유연해도 야구 투수에게 부상은 따라붙는다. 시즌 중 팔꿈치를 다친 그는 시즌이 끝난 뒤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야구에는 몸을 비틀고 꼬는 등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동작이 매우 많다. ‘던지기’는 어깨와 팔꿈치, 손목에 큰 부담을 준다. 아무리 튼튼한 사람도 이런 동작을 하루에 수백 번 반복하면 당연히 몸 어딘가에 이상이 생긴다.
빠른 공을 던질수록 부담은 커진다.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 투수의 부상은 이제 ‘직업병’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른다.
‘좋은 간격’이 유연한 움직임을 낳는다.
도쿄 올림픽에서 주목하고 싶은 두 일본 선수 - 오노 쇼헤이·세토 다이야
여러 메달 후보의 영상을 보며 내가 주목한 사람은 남자 유도 73킬로그램급의 오노 쇼헤이와 남자 수영 개인혼영 200미터·400미터의 세토 다이야였다.
두 사람 모두 20대 중후반, 스포츠 세계에서 기량이 절정에 오르는 세대였다.
오노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땄고 도쿄에서 2연패를 노리고 있었다.
2019년 세계선수권 예선 영상을 보니 그의 가장 좋은 점은 상대 품속에 슥 들어가는 ‘몸의 회전’이 빨랐다는 것이다.
격투 종목에서 상대 품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섭다. 그러나 오노에게는 그런 두려움이 없다. 더구나 장기인 밭다리후리기와 허벅다리걸기를 위해 등을 먼저 보이며 상대 품속으로 들어간다.
승부사가 상대에게 등을 보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금기다.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한판을 따는 유도’를 실현하려고 주저 없이 등부터 상대에게 향한다. 뛰어난 몸의 회전과 늘 겁내지 않고 도전하는 정신력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다.
회전뿐 아니라 허리와 무릎도 아주 능숙하게 쓴다. 허리와 다리를 활용해 날카롭게 회전하며 순식간에 상대를 업는다. 과거 71킬로그램급 금메달리스트 고가 도시히코를 떠올리게 한다.
오노 자신도 2연패를 앞두고 “기본적으로 초공격적인 자세로 한판승을 노리고 싶다. 던지는 유도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근대화된 세계 스포츠 ‘JUDO’가 아니라 오랜 역사가 숨 쉬는 일본의 ‘유도’로 금메달을 따 주었으면 했다.
세토 다이야는 2019년 세계수영선수권 개인혼영 200미터와 400미터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 당시 가장 기세가 오른 수영 선수였다.
개인혼영을 보면 가장 자신 있는 접영에서는 손이 수면을 스칠 듯 물을 젓고, 헤엄에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배영은 몸이 흔들리기 쉬운 영법인데 세토의 몸은 흔들리는 듯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움직임에 흐트러짐이 없어 부드럽게 나아간다.
평영은 팔 동작보다 발차기가 좋다. 킥이 강해 상체가 물 위로 알맞게 솟는다. 2020년 2월 대회에서는 주 종목도 아닌 평영 100미터에서 우승했다고 한다. 이 결과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좋은 흐름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 자유형은 왼손이 중심인 독특한 방식이다. 왼손으로 노를 젓듯 헤엄치며 그 왼팔의 회전도 빠르다. 왼손이 물에서 잘 빠져나오기에 갈수록 회전이 좋아진다. 이는 몸이 유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힘이 들어간 느낌이 전혀 없다. 자연스러운 상태로 물을 타고 헤엄친다. 오노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 줄 것이라 생각했다.
오노는 날카로운 몸의 회전과 정신력으로, 세토는 물을 타는 부드러운 헤엄으로 금메달을 노린다.
천재 수영 선수 마이클 펠프스는 날개를 펼치고 난다
현역 시절 이치로의 움직임에는 내가 좋아하는 ‘원의 감각’이 있었다. 타석에 들어가기 전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에서도 원이 느껴졌다.
원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유연한 선이 원을 이루며 이어지는 움직임이다. 보통 타자는 투수의 공을 ‘점’으로 잡으려 하지만 이치로는 공을 선으로 포착하고 자신의 원운동 안에서 대응했다. 보통 선수에게 없는 감각이 있었기에 그토록 위대한 기록을 세웠을 것이다.
종목은 다르지만 올림픽에서 이치로와 비슷한 원의 움직임을 느낀 선수가 있다. 미국의 수영 선수 마이클 펠프스다.
접영을 보며 유연한 원을 느끼는 동시에 “펠프스는 헤엄치는 게 아니라 날개를 펼치고 날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내 눈에는 그의 양어깨에서 날개가 돋은 듯했다. 드넓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 같았다.
내가 그에게 주목한 것은 나 자신이 어릴 때부터 수영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는 여름마다 날마다 강에서 수영하며 놀았다. 너무 좋아해서 “집에서 학교까지 물길로 이어져 있으면 매일 헤엄쳐 다닐 텐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지금도 여름이면 수련생들과 이즈 바다로 간다. 일흔 중반이 넘어 예전만큼 헤엄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1~2주 머물며 잠수도 하고 매일 바다에서 논다.
고등학생 때는 수영부 선수도 아니면서 대회에 불려 나가 훗날 올림픽 대표가 된 선수를 이기고 우승한 적도 있다. 아내는 “당신은 모터보트보다 빨랐지”라고 말하곤 했다.
그 시절 나는 접영을 해도 ‘헤엄친다’는 감각이 아니라 소금쟁이처럼 ‘수면 위를 미끄러진다’는 감각이었다. 물 위를 미끄러지니 중력도 부력도 관계없었다. 젊어서 몸이 부드럽고 유연하며 체중도 가벼웠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펠프스의 모습을 보며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지금 그때처럼 헤엄치라면 나이가 일흔이 넘은 만큼 어렵다. 당시의 헤엄은 스포츠로 배운 동작도, 어떤 영법을 익힌 것도 아니었다. 놀면서, 물고기의 움직임을 보면서 자연스레 익힌 감각이라 누구에게 가르칠 수도 없다.
펠프스의 영법은 매우 강인해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스포츠와 운동이라는 틀 안에 있으며 내 방식과는 다르다. 내가 익힌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스포츠는 전혀 별개다. 그래서 가르치거나 전하기가 극히 어렵다.
이치로와 펠프스에게는 확실한 ‘원의 움직임’이 있다.
평영을 빠르게 하는 요령
어릴 때부터 익힌 내 독자적인 영법을 그대로 전수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힌트와 조언은 할 수 있다.
평영은 양팔로 물을 젓는 방식이 좋으면 기록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 보통은 팔로 큰 원을 그리며 물을 젓지만 그렇게 해서는 빨리 나아가지 못한다.
아테네와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기타지마 고스케를 보면 팔을 저을 때 가슴까지 물 위로 솟았다.
그렇게 상체를 높이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물을 둥글게 휘젓는 것이 아니라 도중에 팔을 오므리듯 양손을 가슴 아래로 가져오고, 그때 생긴 부력을 추진력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원을 그리듯 젓다가 도중에 팔을 오므리고, 잡은 물을 가슴 아래에서 한꺼번에 밀어낸다. 이것이 평영을 빠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물론 하체의 발차기도 중요하다. 킥은 자유형과 배영에서도 중요하며 특히 무릎부터 발목까지 부드럽게 움직여야 한다.
발차기를 할 때 다리를 부드럽게 쓰는 사람은 물보라도 많이 일지 않고 조용히 흐르듯 나아간다. 반대로 다리가 굳은 사람은 요란하게 버둥거리며 온 힘을 다해 차지만 추진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부드러운 다리 동작은 쉽게 말해 돌고래 꼬리지느러미와 같다. 수영에 돌핀킥이라는 영법도 있지만 일반 발차기를 할 때도 돌고래처럼 매끄럽게 다리를 움직이는 것을 의식하면 좋다.
다리를 부드럽게 쓰면 물보라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흐르듯 나아간다.
제3장 초일류의 승부법
일부러 불리한 자세에서 시작하면 실력이 는다
요즘 유도 경기를 보면 서로 소매와 옷깃을 잡히지 않으려 흥정만 하다가 시간을 허비한다. 아이들이 옷을 잡아당기며 싸우는 듯해 관전하는 사람은 흥이 식는다.
업어치기를 하면서 무릎을 매트에 대고 상대를 던지려는 선수도 많다. 본래 업어치기는 선 채로 던지는 기술이다.
이런 변화를 보면 유도는 우리가 알던 일본의 ‘유도’가 아니라 세계에 보급된 스포츠 ‘JUDO’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씨름이나 몸놀림으로 몸을 움직일 때도, 마작을 할 때도 ‘내가 불리한 자세’에서 시작하기를 좋아한다.
유리한 상태에서 시작하면 아무 재미가 없다. 불리한 상태에서 시작해 대응하는 것이 즐겁다. 그 결과 나도 모르게 여러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선수들은 앞서 말한 유도처럼 먼저 자신에게 유리한 자세를 만들려 한다. 그런 방법만 계속하면 그 정도 수준에서 끝나고 말 것이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남자 유도 무제한급 금메달리스트 야마시타 야스히로는 2회전에서 오른쪽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그래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위기를 넘어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평소 불리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훈련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오른발을 쓸 수 없어도 왼발이 있고, 오른손을 쓸 수 없어도 왼손이 있다. 약점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 밖에 쓸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활용할 방법을 찾는다. 평소 그렇게 훈련하면 결정적인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상대를 제압할 것인가. 그곳에 승부의 묘미가 있고 실력을 키우는 힌트가 숨어 있다.
언제나 유리한 상황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은 스스로 한계를 만든다. 평소 불리한 상황에 대응할수록 실력은 는다.
승리로 이어지는 ‘좋은 거리’란 무엇인가
승부에서 상대와의 ‘사이’는 매우 중요하다. 적당한 거리와 타이밍을 잘 잡는 사람이 승리에 가까워진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기에 늘 누군가와 거리를 맺으며 산다. 태어난 순간 먼저 부모와 관계를 맺고, 그 연결은 형제자매와 친구, 선후배, 스승, 상사와 부하, 배우자, 자녀, 손주로 넓어진다. 늘 누군가와 거리를 조절하며 접촉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리란 곧 접촉이다. 주변 사람과 잘 접촉하는 감각이 있는 사람은 승부에서도 좋은 거리를 잡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화할 때 양쪽이 동시에 말하면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다. 추임새를 넣고,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하고, 의견을 말하면서 여러 간격을 조절해야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진다. 누구와도 이런 거리를 잡는 사람이 접촉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스포츠에서 좋은 거리를 익히려면 언제나 유리한 상태만 찾지 말고 일부러 불리한 상황에서 승부해 보는 것이 좋다.
유도라면 상대가 유리한 맞잡기 자세에서 연습을 시작하거나, 일부러 주로 쓰는 손을 쓰지 않고 기술을 걸어 보며 불리한 자세에 대응하는 법을 익힌다. 그런 훈련을 계속하면 몸이 임기응변으로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상대와의 거리를 잡게 된다. 그것이 점차 좋은 거리로 변한다.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좋은 거리를 지닌 사람은 전설적인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였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말처럼 링 위의 움직임은 정말 나비 같았다. 화려하게 춤추며 상대의 펀치를 계속 피하고, 상대가 지쳤을 때 카운터 한 방으로 끝냈다. 좋은 거리를 잡지 못하면 그런 복싱은 불가능하다.
육상과 수영처럼 속도를 겨루는 종목, 특히 단거리에는 상대와의 거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간격이 있다. 바로 출발, 즉 첫 움직임의 간격이다.
출발 총성이나 버저에 얼마나 잘 맞추는가가 첫 움직임의 간격이다. 정상급 선수들이 모이는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는 그것이 승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경기와 연습뿐 아니라 평소에도 여러 사람과 사물에 알맞은 거리를 맞추려 노력해야 한다.
거리란 자신 이외의 사람과 사물에 맞추는 것이다. “내가, 내가” 하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은 거리를 잘 잡지 못하고, 그것이 초조함과 자멸로 이어져 결국 자기 자세까지 무너뜨린다.
인간관계와 사회에 맞는 거리를 잡는 일이 승부의 좋은 거리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리한 자세에서 시작하는 훈련이 ‘거리’의 감각을 다듬는다.
테니스에서 칠 때 소리를 내는 것은 옳은가
테니스 경기를 보면 공을 칠 때 소리를 내는 선수가 많다. 역도처럼 소리를 내는 종목은 여럿 있지만 테니스만큼 공을 칠 때마다 소리 내는 종목은 드물다.
사람의 몸은 힘이 들어가면 본래의 힘을 내지 못한다. 힘이 들어간다는 것은 몸이 굳는다는 뜻인데, 굳은 몸을 부드럽게 만드는 데 ‘소리’가 매우 효과적이다. 소리를 내면 숨을 내쉬게 되고, 그 행위가 몸에서 힘과 경직을 빼 주기 때문이다.
테니스 선수가 소리를 내는 것은 호흡법의 하나일 것이다. 경기 중 헐떡이며 호흡이 흐트러지면 플레이도 흐트러진다. 그것을 막기 위해 소리를 내며, 플레이의 리듬과 간격에 호흡을 맞춰야 하기에 타격 순간에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본다.
일류 선수는 자신이 칠 때뿐 아니라 상대가 칠 때도 소리 없이 숨을 내쉴 것이다. 내쉰 뒤 곧바로 들이쉬고, 호흡을 멈춘 채 움직이다가 칠 때 다시 내쉰다. 이 리듬을 반복해 호흡의 혼란을 막는다.
가라테와 검도를 보면 소리를 내는 행위에는 ‘기합’을 넣는 뜻도 있다. 목소리로 자신에게 기운을 불어넣는 동시에 글자 그대로 상대와 ‘기운을 맞추는’ 것이다.
상대와 기운을 맞추려면 무엇보다 ‘사이’가 중요하다. 사이를 맞추어야 상대의 움직임에도 제때 맞출 수 있다. 사이가 맞지 않으면 곧 ‘잘못’이 된다. 기합과 마찬가지로 거리도 승부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다만 종목에 따라 기합을 넣으면 상대에게 움직임을 읽히기 쉬워 기척을 지우고 움직여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소리와 기합이 무조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로의 타이밍을 맞추고 거리를 유지한다는 의미의 소리와 기합은 승부에서 충분히 활용할 만하다.
승부에서는 상대와 ‘사이를 맞추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상태를 벗어나려면 의식을 날려라
여러분에게 위기란 어떤 상황인가. 업무에서 큰 실패를 했을 때인가. 외도가 들켰을 때인가. 도박으로 크게 잃어 생활비가 없어졌을 때인가.
위기를 재는 자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한 사람에게는 위기여도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다. 그래도 생사가 걸린 상황은 누구에게나 위기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죽을지도 모르는 때조차 별로 위기라고 느끼지 않았다. 폭포 아래로 떨어져 급류에 휩쓸려 깊은 강바닥으로 끌려갔을 때도 곧바로 빛이 있는 방향을 확인하고 흐름에 맡겨 아주 천천히 올라왔다. 수련생들과 거친 바다에서 잠수하다 큰 바위가 움직이며 발이 끼어 꼼짝도 못 한 적도 있다. 그때도 “수련생이 아니라 나라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나도 여기서 끝나는 건가” 하며 조류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바위가 다시 움직여 발을 뺄 수 있었다.
생사가 걸린 일에도 그다지 당황하지 않는 것은 어릴 때부터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놀이만 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떨어지면 죽을 높이의 다리 난간에 매달리고, 2~3미터짜리 문기둥 꼭대기에서 반대편 기둥으로 뛰어넘고, “오늘은 수영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을 만큼 물이 불어난 거센 강에서 헤엄쳤다. 위험할수록 즐거웠다. 오늘날이라면 “위험한 짓을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라는 신고를 받고 바로 경찰이 올 만한 일투성이였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위험한 일을 하며 놀았기에 보통 사람이 위기와 공포라고 느끼는 일도 “재미있잖아”라고 생각하게 된 듯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머릿속이 하얘질 상황에서도 내가 그러지 않는 것은 현실을 순간적으로 받아들이고, ‘위기다’라는 의식을 날려 버리기 때문이다.
폭포에 빠졌을 때도 어두운 바닥에서 급류에 휘말리면서 밝음과 어둠을 가늠했다. 나는 늘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본다. 자기 상황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시점은 높은 수준에서 경쟁하는 일류 선수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위기다’라는 의식을 날린다는 것은 ‘아프다’고 느낄 일도 순간적으로 ‘아프지 않다’고 전환하는 것이다. 어릴 때 주사만 맞으면 크게 울던 사람도 어른이 되면 울지 않는다. 주사라는 위기를 여러 번 경험하면서 의식을 날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통증을 느껴도 그것을 위기나 공포로 확대하지 않기에 울지 않는다.
언제나 의식을 날릴 수 있으면 머릿속이 하얘지거나 긴장하지 않는다. 그 감각을 가지면 새로운 분야와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의식을 날리려는 순간 오히려 그것을 의식해 긴장하고 힘을 준다. 무의식적인 감각으로 해내기는 매우 어렵다. 이 감각을 얻으려면 나처럼 어릴 때부터 여러 위기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뒤 위험한 놀이를 하기는 어렵지만 위기를 경험할 수는 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스스로 문제에 관여하는 것’이다. 문제와 거리를 두지 말고 주변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해결을 위해 움직인다. 그것을 계속하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해결을 위해 움직이면 위기에 강한 사람이 된다.
위기의 괴력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화재 현장의 괴력’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생명이 걸린 궁지에서 때때로 한계를 넘는 힘을 낸다.
평소 절대 낼 수 없는 힘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오는 것은 그때 몸의 기능과 움직임을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 지배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으로 문명을 발전시킨 인류는 본능보다 이성과 지성을 중시해 왔다. 이성과 지성이 사회를 진화시키는 중요한 것이고, 본능은 야만적이어서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주입됐다. 그래서 현대사회에는 자연을 그대로 느끼며 움직이는 인간 본래의 본능을 닫아 버린 사람이 많다.
그 괴력을 의식적으로 낼 수 있다면 체력이 중요한 스포츠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지로 꺼낼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본능이 지배하는 괴력에는 현대사회가 중시하는 손익도 전혀 관계없다.
“이익이니 노력한다.” “손해니 하지 않는다.” 이런 이해관계와 결과지상주의로만 사물을 보는 선수는 아무리 애써도 인간의 한계를 넘는 힘을 내기 어렵다.
인간이 본래 지녔던 본능에 가까운 힘을 활용하려면 현대인이 닫아 버린 ‘느끼는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나는 예전부터 수련생들에게 ‘감사·감격·감동’이라는 세 가지 ‘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변의 여러 일을 느끼려고 감각을 열고 살면 그것이 감동이 되고, 감격을 낳으며, 주변을 향한 감사로 이어진다.
강해지고 싶다면 손익만 좇지 말고 먼저 느끼는 감각을 넓혀야 한다. 위기의 괴력까지 내지 못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강함은 조금씩 익힐 수 있다.
손익 계산을 멈추고 인간 본래의 ‘느끼는 힘’을 넓혀라.
정말 강한 사람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올림픽 3연패 이상을 이룬 일본인은 세 명이다. 남자 유도 60킬로그램급 노무라 다다히로와 여자 레슬링 55킬로그램급 요시다 사오리가 3연패를 했고, 일본인 중 유일하게 이초 가오리가 여자 레슬링 63킬로그램급과 58킬로그램급에서 4연패를 이뤘다.
금메달 하나도 어려운데 3연패와 4연패는 초인적인 위업이다. 하지만 그들이 강해서 이겼다기보다 주변이 약해서 이긴 경우도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강했기에 연패했다”고 큰소리치는 금메달리스트가 있다면 크게 착각하는 사람이다.
나도 마작 대타로 20년 무패였지만 내가 강해서 계속 이긴 것은 아니다. 상대가 약했고 스스로 무너졌기에 무패로 남았을 뿐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이와사키 교코는 여자 평영 200미터에서 당시 수영 사상 최연소인 열네 살에 금메달을 땄다. 경기 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합니다”라고 말해 단숨에 유명인이 됐다. 하지만 경기 전에는 자신이 우승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이와사키의 상태는 대단히 좋았다. 반대로 우승 후보인 외국 선수들은 긴장해 본래의 힘을 다 내지 못했다. 아직 중학생으로 욕심도, 잃을 것도 없던 그는 본래 이상의 힘을 냈다. 그 차이가 결과로 드러났다.
여러 대회에서 우승해 이름이 알려지면 언론에 자주 나오고 주변의 말이 압박이 된다. 비판뿐 아니라 응원조차 선수에게 압박이 된다. 이름 없을 때 강한 것은 그런 주변의 압박이 없기 때문이다.
장기계에서는 젊은 기사 후지이 소타가 주목받았다. 그 역시 당시에는 욕심 없는 승리를 이어 가는 상태였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진정한 강함에서 나온 결과는 아니다. 진짜 강함은 이름이 알려진 뒤에도 어떻게 이기는가에 달렸다. 여러 영세 칭호를 보유한 하부 요시하루는 진정한 강함을 지닌 드문 존재지만, 그도 “제가 강해서 이겼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스포츠계에서는 탁구의 이토 미마, 히라노 미우, 하리모토 도모카즈, 수영의 이케에 리카코, 축구의 구보 다케후사처럼 10대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그들을 보며 경험의 길이가 장점만이 아니라 단점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 경험으로 젊은 힘을 물리치고 승리를 끌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 속에서 잘못된 생각이 스며들어 사고뿐 아니라 몸의 움직임도 부자연스러워지고 자멸로 이어지기도 한다.
올림픽은 종목마다 참가 연령이 다르지만 언젠가 초등학생 금메달리스트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만큼 욕심 없음은 어떤 의미에서 강하다.
계속 이길 수 있는 것은 주변이 약하고 제멋대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긴 뒤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은 멋없다
탁구의 후쿠하라 아이는 득점하면 “사!”라고 외쳤고, 하리모토 도모카즈는 “초레이!”라는 함성으로 유명하다.
하리모토의 외침은 세간의 평가가 엇갈리며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사람도 많다.
그런 소리는 본인이 상태를 끌어올리고 기합을 넣는 뜻일 것이다. 호불호는 있겠지만 싸우는 사람의 자유이며, 상대를 위협하려는 것이 아닌 한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경기 중 내 눈에 거슬리는 것은 프로야구에서 흔히 보는 껌이다.
쩝쩝 씹는 모습이 내게는 대단히 버릇없어 보인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침을 마음대로 뱉고 해바라기씨 껍질을 사방에 흩뿌린다.
스모 선수가 경기 중 껌을 씹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다른 스포츠를 보아도 경기 한가운데서 뭔가 먹는 종목은 거의 없다. 문화와 역사가 다르다고 하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메이저리거가 퉤퉤 침을 뱉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희는 경기장에 대체 뭘 하러 온 거냐”고 말하고 싶다.
예의 문제라면 이겼을 때의 과한 세리머니와 기쁨도 조금 줄이는 편이 좋다.
열 번 넘게 지던 선수나 팀이 오랜만에 이겼거나 토너먼트와 리그에서 최종 우승했다면 기뻐할 만하다. 그러나 승패를 반반씩 되풀이하는 사람이 이겼다고 지나치게 기뻐하면 “저건 좀 그렇지 않나?” 싶다.
나는 내가 이겼다고 기뻐하거나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다. 그보다 주변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을 때 훨씬 기쁘다.
상대가 있기에 경기를 할 수 있다. 자신이나 자기 팀이 이겨서 기뻐한다면 상대가 좋은 플레이를 했을 때도 똑같이 기뻐하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올림픽 헌장이 말하는 진정한 페어플레이 정신 아닐까.
상대가 좋은 플레이를 했을 때도 똑같이 기뻐하고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기는 것’에 사로잡히면 균형이 무너진다
근대 하계 올림픽 제1회 대회는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렸다.
한때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했지만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이후 상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이제는 스포츠 제전이라기보다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는 거대한 쇼 비즈니스가 되었다.
승부에 손익이라는 경제 관념이 들어오면 승리지상주의가 되어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흐른다.
스포츠맨십과 정반대인, 욕심에 찬 생각은 사고를 편향시키고 사람의 움직임까지 치우치게 한다. 몸과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면 균형이 무너지고 흔들리기 쉬워진다. 그런 상태로 이겨도 나는 전혀 기쁘거나 상쾌하지 않다. 그러나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이기는 일에만 혈안이 된다. 오늘날 스포츠계는 그런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비춘다.
인류 역사에 ‘숫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인간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숫자와 수학이 문명을 발전시키고 큰 혜택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 뒤에서는 무서운 것도 많이 만들어 냈다. 인간은 숫자와 함께 잘못된 방향으로 폭주하고 있다.
단순히 승패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수’라는 욕망이 섞였기에 스포츠계도 경제계나 정치계와 다를 바 없는 추한 싸움을 벌인다.
숫자도 욕심도 손익도 없는 곳에서 순수하게 승부를 즐긴다면 나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쇼 비즈니스가 된 올림픽에 그것을 바랄 수는 없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승리지상주의는 심신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한다. 숫자와 욕심, 손익이 없는 곳에서 순수하게 승부를 즐겨라.
‘멋지게 지겠다’고 생각하며 승부한다
작귀회 수련생에게 “멋지게 이기려 하지 말고 멋지게 지겠다는 생각으로 해 봐”라고 조언했더니 곧바로 연승한 적이 있다.
자존심이 높고 자만하거나 자신을 지나치게 믿는 사람은 내용보다 좋은 결과만 신경 쓰는 경향이 강하다. 그 수련생도 그런 유형이었는데 내 조언으로 마음이 편해졌는지 마작의 내용까지 좋아져 승리를 거두게 됐다.
멋지게 이기려는 사람은 좋은 결과만 원한다. 그 생각이 너무 강해지면 비겁하고 치사한 일도 “이기기 위해서”라며 태연히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승리는 오래가지 않고, 몇 번을 거듭해도 마음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멋지게 져야 할까.
내가 생각하는 멋진 패배는 ‘상대에게는 졌을지라도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지지 않고 승부했다’는 상태다.
나는 자주 ‘패배의 90퍼센트는 자멸’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수많은 승부에서 패배의 90퍼센트는 자멸이 원인이다. 모두 자신에게 지고, 그 결과 승부에서도 진다. 현역 대타 시절에는 “왜 모두 스스로 지는 걸까?”라고 늘 생각했다. 욕심과 자존심, 과신에 사로잡힌 상대들은 내가 무언가 하기도 전에 제멋대로 무너졌다.
나머지 10퍼센트쯤에는 ‘승부에는 졌지만 자신에게 지지 않고 최선을 지키며 끝까지 싸웠다’는 패배가 있다. 자멸하지 않고 끝까지 했으나 결과적으로 졌다. 나는 그런 싸움을 좋아하며 그것을 해낸 사람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성장하고 싶다면 멋진 승리를 구하지 말고 멋지게 지는 것을 구해야 한다.
멋진 패배는 반드시 다음에 활용된다. 자멸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사람은 졌어도 몸과 마음이 단단해지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무언가를 얻는다.
멋지게 이기려는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다. 멋진 패배는 반드시 다음에 살아난다.
긴 승부를 버티려면 ‘시작’의 감각을 반복하라
마라톤은 42.195킬로미터를 달리는 혹독한 경기다.
2020년 도쿄 올림픽 마라톤은 원래 도쿄 도심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이른 아침이라도 한여름 도쿄에서 달리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삿포로로 변경됐다.
2019년 9월 도하 세계육상선수권 마라톤에서 중도 포기자가 속출하자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도쿄도 위험하다고 판단한 조치였다. 원래도 혹독한 경기에 비정상적인 더위까지 더하면 선수가 쓰러지는 것이 당연하다.
마라톤뿐 아니라 한여름 도쿄에서 올림픽을 여는 것부터 무리다. 일본에는 마침 ‘체육의 날’도 있으니 날씨가 온화해지는 초가을에 열면 될 일이다. 하지만 미국 주도로 상업화된 올림픽에 이제 와 그런 말을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마라톤에서는 심신의 강인함뿐 아니라 달리면서 경기 흐름을 읽는 수 싸움도 해야 한다. 약 두 시간 동안 머리와 몸을 전부 쓰며 한순간도 쉴 수 없다.
나도 대타 시절 목숨이 걸린 큰 승부에서는 이틀 내내 마작을 두기도 했다. 걸린 돈과 이권이 커질수록 나타나는 상대 대타의 수준도 높았다. 신경을 극한까지 곤두세운 싸움이 오래가도 약한 소리를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뒷길을 걷는 강자들의 싸움이 이틀간 이어지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런 장기전을 할 때 나는 매번이 늘 시작이라는 감각으로 싸웠다. 열 번을 해도 첫 번째, 백 번을 해도 첫 번째다. 늘 이곳이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전환해 매번 신선한 정신으로 싸울 수 있다.
1960~70년대에 활약하고 올림픽 세 대회에 연속 출전해 멕시코에서 은메달을 딴 마라톤의 기미하라 겐지는 긴 경주를 버티는 요령으로 전봇대 하나하나를 결승선이라 생각하며 달렸다고 한다. 하나를 지나면 다음 전봇대, 그리고 또 다음 전봇대로 목표를 옮기며 마음을 전환했다.
나의 ‘언제나 이것이 시작’이라는 감각과 그의 ‘다음 전봇대까지’라는 생각은 닮았다. 장기전도 중간중간 초기화하고 시작의 감각을 반복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심신도 새로워진다. 긴 일을 해야 할 때 이런 감각을 적용해 보기 바란다.
중간중간 마음을 초기화하면 매번 신선한 정신 상태로 싸울 수 있다.
초반·중반·종반, 각각의 싸우는 법
승부에서는 ‘선행 도주’, ‘선수를 잡은 쪽이 이긴다’고도 한다. 먼저 나가거나 선취점을 얻으면 유리하다는 뜻이겠지만, 경마를 보아도 앞서 달린 말이 반드시 이기지는 않는다. 야구와 축구도 선취점을 얻은 쪽이 늘 이기는 것은 아니며 큰 점수 차로 앞서다가 막판에 역전당하기도 한다.
승부 흐름을 초반·중반·종반으로 나누면, 초반은 상대를 잘 관찰하면서 싸우는 방법을 조정하는 단계다.
컵에 물을 받을 때 갑자기 수도꼭지를 끝까지 열면 물이 세차게 튀어나와 넘친다. 컵을 채우려면 물줄기를 알맞게 조절해야 한다. 초반에는 수량을 조절하는 감각으로 승부에 대처해야 한다.
중반에는 종반을 준비한다는 자세가 좋다. 체력을 모두 써 버리지 말고 상대의 상황과 상태를 살피며 싸우면서 종반의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싸우다 종반을 맞으면 상대의 상태를 판별해 승부를 건다. 이것이 이상적인 진행 방식이다.
하지만 실제 승부는 이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눈앞의 변화에 순간순간 대응해야 한다. 자신이 초반·중반·종반 중 어디에 강한지, 장점과 개성이 무엇인지 아는 일도 중요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초반과 중반, 종반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그때그때 대응하는 것이다. 나도 마작에서 줄곧 그렇게 싸웠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려면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자유로운’ 상태여야 한다. 여기서 자유란 자연스러운 상태다. 늘 자신을 자연스럽게 유지해야 하며, 그러려면 자연의 생물에게서 진짜 움직임, 본래의 움직임을 배워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초반·중반·종반의 구별 없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다.
나쁜 흐름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스포츠를 보면 승부에는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을 정확히 잡아 제대로 대처한 쪽이 승리를 끌어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포츠뿐 아니라 사회에도 흐름이 있다. 유행이 그 대표적인 예다.
오늘날은 디지털 정보가 인터넷을 거세게 오가며 유행의 변화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그런 흐름을 제대로 타면 좋겠지만 많은 사람이 유행과 정보의 탁류에 휩쓸린 듯 보인다.
자신에게 나쁜 흐름이라면 바꿔야 한다. 그러나 바꾸려면 먼저 흐름의 본질을 알아야 하며, 그것은 자연 속에 있다.
바람과 구름, 강물과 조수의 흐름 등 자연의 흐름은 끝없이 많다. 반대로 흐름이 멈추면 자연은 자연이 아니게 된다. 그 안에 사는 우리도 흐름이 멈춘 자연에서는 살 수 없다.
자연의 흐름에 관심을 가지면 바람과 구름을 보고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린다. 그런 깨달음이 또 다른 깨달음을 불러 전에는 보이지 않던 여러 흐름을 느끼게 된다.
나는 집 툇마루에서 햇볕을 쬐며 정원 나무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초겨울 바람에 마른 잎이 한 장씩 떨어지는 모습은 전혀 싫증 나지 않는다. 같은 가지의 잎도 바람에 떨어지는 것이 있고 남는 것이 있으며 끝까지 버티는 것도 있다. 정신을 차려 보면 두세 시간 동안 정원을 바라볼 때도 있다.
자연의 흐름과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승부에서만 깨달음을 얻으려 해도 그렇게 편리하게 되지는 않는다.
야구, 축구, 배구 같은 구기뿐 아니라 육상과 역도 같은 개인 종목에도 흐름이 있다.
흐름은 본인과 주변에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야구에서 투수에게 나쁜 흐름이 생겼다면 원인은 본인이 아니라 볼 배합이 나쁜 포수일 수도, 수비 위치가 잘못된 외야수일 수도 있다. 때로는 경기장 선수뿐 아니라 관중석의 응원단이 나쁜 흐름을 부를 수도 있다.
자신에게 우세하거나 열세인 흐름뿐 아니라 세상에는 다양한 흐름이 있고 원인도 다양하다. 그 무한한 흐름을 얼마나 잡아낼 것인가. 첫걸음은 자연의 흐름을 느끼는 데서 시작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크고 작은 흐름을 읽으려면 자연의 흐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궁지를 벗어나려면 평소와 다른 일을 해 보라
사람은 우세할 때 자연히 공격적이지만 불리하거나 위기에 빠지면 곧바로 소극적이 되어 방어에 들어간다.
모든 승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공격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방어 자세를 취하더라도 마음은 늘 공격하는 쪽에 두어야 한다.
위기 때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 커지면 도망으로 이어져 소극적인 태도가 심해지고 결국 스스로 패배를 부른다. 반대로 지나치게 공격적이면 무모해져 마음만 헛돌고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이 나쁜 흐름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럴 때 나라면 평소와 완전히 반대되는 일을 시도한다. 늘 A라는 방식을 썼다면 일부러 정반대인 B를 해 보고 흐름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는다.
야구라면 늘 배트를 짧게 잡는 타자가 최근 타격이 나쁘다고 할 때 “그럼 길게 잡고 쳐 봐”라고 조언할 것이다. 이것이 반대되는 일을 해 본다는 뜻이다.
평소와 다른 일, 반대되는 일을 하면 나쁜 흐름이 미묘하게 바뀌고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때가 꽤 있다.
이는 잘하는 방식뿐 아니라 서툰 방식도 시도해 본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핵심은 한 가지 방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승부에는 본류와 중류, 지류가 있고 여기서 말한 역류도 있다. 역경이나 막다른 곳에 빠졌을 때 그것을 떠올리기 바란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공격하려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만드는 법
우세하게 경기를 이끌다가 갑작스러운 위기로 마음이 흔들리거나 머릿속이 하얘져 가진 힘의 10분의 1도 내지 못하고 진 사람이 “그럴 때 흔들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곤 한다.
예상하지 못한 불리한 전개를 만나면 “아!” 하고 놀라 생각이 멈출 때가 있다.
예상 밖의 일에 직면했기에 마음이 동요한다. 그렇다면 예상 밖이라고 느끼는 일을 줄이면 된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줄이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평소부터 살아야 한다.
예전에 집 부엌에서 생선을 굽다가 잠옷 소매에 그릴 불이 옮겨붙어 상체까지 탈 뻔했다. 곁에 있던 아내는 내 팔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큰일이야!” 하며 공황에 빠졌다. 나는 “아, 불이 붙었네”라고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당황하지 않은 채 단추를 하나씩 풀어 잠옷을 벗었다. 그대로 둥글게 말아 싱크대 물에 담가 불을 껐다.
아내는 “자기 몸이 타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게 잠옷을 벗어?”라며 신기해했다. 자신의 팔에 불이 붙으면 비명을 지르며 이성을 잃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먼저 “당황해서 벗으면 커튼 같은 곳에 불이 옮겨붙는다”고 생각했다. 가장 움직임이 적은 방식으로 주변에 불이 번지지 않게 벗어야 했다. 팔에서 상체로 불이 번지는 동안에도 단추를 하나씩 풀어 재빨리 옷을 벗고 불을 껐다. 그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선 요리를 계속했다. 당사자는 침착한데 보는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니 마치 서커스 같았다.
내가 공황에 빠지지 않은 첫 번째 이유는 어릴 때부터 위험한 놀이만 해 웬만한 일은 ‘별것 아니다’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늘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엌에서 요리하다 바퀴벌레가 갑자기 나오면 몸을 움츠리거나 비명을 지를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싫어하거나 생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생물이 없고 무엇이든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아무렇지 않다. 바퀴벌레이든 지네든 뱀이든 관계없다. 오히려 “어이,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왔냐” 하며 잡고 싶어진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만들려면 경기 중 위기를 여러 번 경험하는 동시에, 평소부터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바퀴벌레 하나에 놀라서는 그런 마음을 만들 수 없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뜻밖의 불리한 전개를 만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운은 안개처럼 떠다닌다
나는 마작 대타로 뒷세계에서 산 시절이 있다. 그곳에서는 초일류 기업 사장과 거물 정치인 같은 권력자들이 겉세상과 전혀 다른 얼굴로 암약했다.
내 일은 그들을 대신해 마작을 두는 것이었다. 뒷세계 마작에 걸린 돈과 이권은 일반 상식에서 멀리 벗어난, 어떤 의미에서는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다.
“분명 지면 죽임을 당한다.” 그런 목숨 건 큰 승부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나는 타고난 역경 애호가였다. 큰 승부에는 나처럼 패배를 모르는 강자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목숨이 걸렸는데도 그 자리가 즐거워 견딜 수 없었다.
원래 잠을 잘 자지 못하지만 큰 승부 전에는 그 경향이 더 심해지고 식욕도 완전히 사라졌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이삼 일을 보내면 내 안에서 무언가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상태가 되면 몸은 불필요한 것을 전혀 느끼지 않고 마작 탁자에 앉은 네 사람의 흐름만 느꼈다. 승부의 흐름을 오감 전체로 느낄 수 있었다. 운조차 안개처럼 떠도는 것이 보였다.
승부 중 운은 이쪽저쪽으로 떠다녔다. 상대 위에 운이 있으면 “저 녀석, 곧 화료하겠군” 하고 바로 알았다. 그러나 대국을 계속하면 마지막에는 운의 안개가 반드시 내게 왔다.
“아직 승부를 걸 때가 아니다.” 그렇게 판단하면 내게 온 운을 상대에게 내주기도 했다.
마작은 실력 이상으로 운과 우연에 크게 좌우되는 게임이다. 그래서 감각을 날카롭게 갈고 승부의 흐름 속에서 운을 느껴야 했다. 지금 내가 마작 도장의 주인으로 살아 있는 것도 그런 감각이 누구보다 예리했던 덕분일 것이다.
의식이 각성하면 승패를 가르는 운의 흐름까지 보인다.
불안에 대처하는 법
대타 시절 “이 승부에서 지면 사라지겠구나”라고 생각한 큰 승부가 여러 번 있었다. 외부 요인으로 목숨이 걸린 데 더해 나 자신도 “마작에서 지면 죽겠다”고 생각했다.
소년 시절 싸움에서 지는 것은 남자로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남자로서 양보할 수 없는 것’의 연장선에서 어른이 되어 시작한 마작 승부도 물러설 수 없는 것이 됐다. 그래서 지면 정말 죽겠다고 생각했다.
생사가 걸린 승부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따라붙는다. 나도 여러 번 “다음에는 지는 것 아닐까?”라는 불안에 시달렸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오래 머물지 않았고 신기하게 “나라면 괜찮다”는 긍정적인 마음이 솟아났다. 어릴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다음에는 괜찮다’고 마음을 전환하는 일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 덕에 어른이 된 뒤에도 빠르게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불안을 느낀다.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려면 마음을 전환하면 된다. 지금 무언가로 고민하고 불안하다면 전혀 다른 것에 마음을 옮겨 놓아라.
불안에 매달리면 점점 커진다. 전혀 다른 곳으로 마음을 옮겼다가 다시 불안을 바라보면 “생각만큼 큰일은 아니었네”라고 깨닫게 된다.
고시엔 고교야구를 보면 전령 선수가 마운드로 가 투수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럴 때 “오늘 저녁은 뭘까?”, “경기 끝나면 어디로 놀러 가자”처럼 야구와 전혀 관계없는 말을 꽤 자주 한다고 한다.
다른 화제로 바꾸면 마음이 한순간에 전환되고 위기라고 느끼던 불안과 공포도 옅어질 것이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힐 것 같으면 전혀 다른 곳으로 마음을 옮겨라. 그것이 매우 효과적인 대처법이다.
작은 준비가 승부의 미묘한 흐름에 영향을 준다
승자 인터뷰에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오늘은 운이 따랐습니다”라며 실력 이외의 무언가가 도와 이겼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운이 찾아와 승리를 주는 것은 그 결과에 이르는 동안 해 온 여러 일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한 시간 전의 일이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사흘 전에 한 일이 운을 불러 승리를 줄 수도 있다.
경기 중 벌어지는 일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것은 운을 부르는 최소 조건이다. 평소 실전을 준비하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빈틈없이 준비했다고 반드시 운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운의 어려운 점이다.
평소 선행을 쌓았다고 운이 오는 것도 아니다. ‘악운’이라는 말처럼 악인이 행운을 얻는 일도 많다. 운은 그만큼 변덕스럽다.
다만 운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평소 준비를 소홀히 하고 무슨 일에든 제때 맞추지 못하는 사람에게 운은 절대 다가오지 않는다.
나도 나이가 들며 생각과 행동이 뒤처진다고 느낄 때가 많아졌다. 작귀회에서는 매달 한 번 월례회를 열고 나도 마작을 둔다. 뒤처졌다는 느낌이 많았던 달에는 경기를 해도 마이너스 점수로 끝날 때가 있다.
내가 스스로 운을 멀리한 사례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오래전부터 수련생들에게 ‘준비·실행·마무리’라는 말을 강조했다.
무슨 일이든 철저히 준비해야 실행이 있고, 실행한 뒤에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제대로 마무리해야 한다. 그 마무리가 다음 준비로 이어진다. 이 순환을 잘 돌리면 운을 부를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여러분의 준비·실행·마무리는 잘 순환하는가.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기 바란다.
평소 제때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운은 절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페어플레이가 경기를 재미있게 만든다
일본에서 열린 2019 럭비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팀의 쾌진격에 온 나라가 들썩였다.
예선 두 번째 경기인 아일랜드전을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전반에는 세계 2위 아일랜드가 실력을 보이며 우세하게 진행했다.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던 주장 리치 마이클이 등장하자 경기장 전체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는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느끼며 날카롭게 판단해 직접 움직이고, 중요한 지점마다 다른 선수에게 조언했다. 일본의 다른 프로 스포츠에 이만큼 존재감 있고 믿음직한 주장이 있을까. 그라운드에 군림하는 모습은 주장이라기보다 세계를 구하는 용사처럼 보였다.
그가 나오자 일본 대표의 좋은 팀워크가 결속력으로 나타났다. 그대로 흐름을 끌어와 19대 12로 멋지게 역전승했다. 경기장의 분위기는 마치 일본이 결승에서 이긴 듯했다.
축구에서는 승리를 의식하면 막판에 공을 돌리며 시간을 끌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 럭비 대표에게 그런 자세는 없었고 오히려 끝으로 갈수록 더 공격적이었다. 내가 늘 수련생들에게 말하는 ‘결과보다 과정’을 몸으로 보여 주었다. 오랜만에 정상급 스포츠에서 좋은 플레이보다 페어플레이를 느꼈다.
역전당한 아일랜드 선수들이 한 방에 뒤집으려 하지 않고 1센티미터라도 곧게 전진하려 한 방식도 정말 멋졌다. 승자의 뒤에서 멋진 패자의 모습을 보았다.
이겼다고 교만해지지 않고 적을 존중하는 자세도 내가 좋아한다. 럭비야말로 진정한 남자의 스포츠다.
헤드 코치는 관중석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앉아 있을 뿐 지시나 행동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라운드는 선수에게 맡긴다는 럭비 특유의 신뢰감도 좋았다.
세계 축구를 가끔 보면 고액 연봉의 감독이 경기장 옆에서 고급 양복을 입고 감정을 드러내며 소리친다. 야구도 서로 몸에 맞는 공을 던지고 난투극이 다반사다. 아이들에게 추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 무엇이 즐거운가. 정상급 선수라면 언제나 아이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도쿄 올림픽에서는 7인제 럭비가 열린다고 했다. 적은 인원으로 15인제와 또 다른 재미를 보여 줄 것이다. 2021년에는 일본 톱리그를 프로리그로 바꾸려는 구상도 있었다. 국내에서 럭비가 축구와 야구를 밀어내는 날이 와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겼다고 교만해지지 않고 적을 존중한다. 럭비야말로 진정한 남자의 스포츠다.
제4장 초일류의 마음
이치로와 우치무라 고헤이에게는 ‘전체를 파악하는 감각’이 있다
현역 시절 이치로의 움직임에는 유연성이 있었다. 내가 더 좋게 본 점은 단지 몸이 부드러운 데 그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순간에도 늘 다음 동작을 의식하며 경기했다는 것이다.
공이 날아온 뒤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움직일 준비를 하고, 배트를 휘두르기 전부터 타격 순간을 그리며 준비했다. 마작으로 말하면 패를 받은 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배패를 상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는 벤치에 있을 때부터 우익 수비를 하는 감각과 타석에서 칠 모습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 WBC에서 직접 보니 수비 중에도 주자를 보고 외야 펜스와 라인의 위치 관계를 재는 등, 몸은 가만히 있어도 ‘준비’라는 생각은 계속 움직였다.
벤치에서 우익수 자리로 갈 때도 전력질주에 가까운 속도로 달렸다. 다른 선수는 걷거나 달려도 가벼운 조깅 정도였다. 이치로가 그렇게 뛴 것은 늘 ‘달리기’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만 달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없을 때부터 준비한다. 그것이 그런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작귀회에서는 ‘준비·실행·마무리’를 중시한다. 눈앞의 일에 전력을 다하되 실행만 생각하지 않는다. 준비하고, 실행한 뒤 마무리하고, 다시 다음 일을 준비한다. 스포츠와 일도 같고 일상 자체에 이 순환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은 원처럼 이어져 있다.” 이 감각을 가지면 스포츠와 일도 원활하게 돌아간다.
체조의 우치무라 고헤이는 올림픽 개인종합 2연패를 이뤘다. 그는 여섯 종목을 하나씩 분리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 종목을 시작할 때 마지막 착지를 이미 그렸고, 다음 종목과 그다음 종목도 전부 연결해 상상하며 움직였을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없는 전체를 파악하는 감각이 있었기에 전인미답의 일을 이뤘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첫 마루운동은 움직임이 굳어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상급 선수만이 지닌 강한 정신력이 있었다. 서투른 안마를 무난히 마치고, 이어진 링에서는 가능한 한 체력을 아끼는 움직임을 했다.
도마와 평행봉에서도 지친 듯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섯 종목이 끝난 시점에 1위 올레흐 베르냐예우에게 0.901점이나 뒤져 있었다.
최고의 연기를 해야 역전할 수 있다는 긴장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여유롭게 계속했다. 마지막 철봉에서 15.80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기록해 대역전 금메달을 따냈다.
눈앞의 종목만 보지 않고 여섯 종목을 모두 연결해 생각했기에 가능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일류로 남으려면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전체안’이 있어야 하며 우치무라는 분명 그것을 지녔다.
하지만 체조계의 별로 빛난 그도 당시 서른한 살이었다. 초인적인 몸에도 쇠퇴가 보이고 어깨와 허리, 오래된 부상인 양 발목뿐 아니라 몸 곳곳이 비명을 질렀다.
2019년 봄 전일본선수권에서는 뜻밖에 예선 탈락했다. 최근 훈련 영상을 보니 움직임이 완전히 딴사람 같았다. 어깨 부상의 부담이 팔꿈치에도 오는 듯했다. 물구나무 팔굽혀펴기를 하는데 바닥에 댄 양손 간격이 너무 넓었다. 어깨와 같은 너비로 하는 편이 어깨에는 좋다.
오랜 혹사로 상처투성이가 된 몸이 연기된 도쿄 올림픽까지 완전히 회복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육체적 불리함을 극복할 정신력이 있다. 그것이 어디까지 통할지 주목하고 싶었다.
기사로 30년 넘게 승부 세계에서 활약한 하부 요시하루도 몸을 움직이지 않을 뿐 사물을 파악하는 방식은 이치로와 우치무라와 같다.
장기를 둘 때뿐 아니라 사생활을 포함한 모든 시간에 실행을 준비하고 마무리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미묘한 변화에 늘 대응한다. 초일류끼리 겨루는 세계에서는 아주 작은 차이가 승패로 나타난다. 목숨을 거는 듯한 승부를 이어 가면서도 제일선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미세한 차이를 느끼는 섬세함이 있기 때문이다.
승부 세계의 초일류는 승부와 일상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며 산다.
그 세계에서 일류로 남으려면 전체를 조망해 파악하는 ‘전체안’이 있어야 한다.
정체기는 목표가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선수는 수준을 높이려고 연습한다. 하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향상 속도가 느려지는 정체기가 온다. 이는 스포츠뿐 아니라 모든 일과 기술 습득에서 공통으로 일어난다.
왜 성장 중에 반드시 정체기가 찾아오는가. 산을 오르는 일로 생각하면 쉽다.
등산로에 막 들어섰을 때는 오르기도 쉽고 거리도 많이 나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길은 험해지고 속도도 차츰 느려진다. 에베레스트 같은 난코스라면 더 느려진다. 목표로 하는 정상이 높을수록 정체기도 길어진다는 뜻이다.
사람은 정체기에 들어가면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목표 수준이 높을수록 기간은 길어진다. 정체기에 들어갔다면 “이제 목표 수준에 가까이 왔다”고 생각을 바꾸고 한 걸음씩 차분히 성장하면 된다. 속도가 떨어져도 걷기를 멈추지 않으면 정상은 확실히 가까워진다. 초조해하지 말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생각이 중요하다.
목표는 높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착실하게 올라가려면 자신에게 맞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남이 준 목표는 오래가지 않으니 갖지 않는 편이 낫다.
회사에서 상사가 “매출 몇천만!” 같은 목표를 내걸면 자기 실력으로 도저히 닿을 수 없어도 어쩔 수 없이 향해야 한다.
하지만 실력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목표나 남에게 받은 목표는 달성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의욕을 잃기 쉽다.
나는 목표를 가져 본 적이 없다. 굳이 가진다면 사회적 가치를 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나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있고 싶은가’라는 목적의식을 가지면 좋다. 실현 가능한 목적과 목표를 하나씩 넘으면 향해야 할 정상이 보인다.
수준이 높아질수록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속도는 느려진다.
피로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대 과학과 의학에 따른 최신 회복법은 운동 뒤 아이싱으로 빨리 몸을 식히는 것이라고 한다. 스트레칭과 마사지로 혈액순환을 돕는 것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많은 정상급 선수가 쓰는 만큼 그런 방법은 피로를 없애는 데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대적인 회복법에 더해 의식에서 피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흔히 ‘피로를 없앤다’고 생각한다. 제거해야 한다고 여기기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몸과 마음이 정상 상태가 아니게 된다.
격렬한 운동 뒤 하루 이틀 만에 피로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런데도 피로는 없앨 수 있다고 믿기에 언제까지나 정상 컨디션과 먼 상태가 된다.
조금 피곤해도 몸과 마음이 싸울 수 있는 상태라고 인식하려면 ‘피로를 없앤다’는 개념을 근본부터 다시 봐야 한다.
피로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라. 나라면 피로는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피로를 느끼는 방식도 회복되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정상급 선수로 승부 현장에 오래 있고 싶다면 피로 회복보다 몸과 마음이 강인해지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
피로를 받아들이고 넘어선 뒤 다시 새로운 피로에 맞선다. 그 반복으로 육체와 정신이 단단해진다.
나도 이 나이가 되어 겨우 보통 사람처럼 피로를 알게 되었다. 그래도 수련생들과 마작을 한 뒤 아침까지 씨름하고 몸놀림을 가르친다.
피곤한 상태에서도 더 피곤한 일을 하는 것은 즐겁기 때문이다. 모두가 즐기니 나도 즐겁다. 도장이 재미없는 곳이라면 나뿐 아니라 수련생도 굳이 피곤한 일을 계속하지 않을 것이다.
스포츠에서도 평소 연습할 때 ‘즐겁다’고 느낀다면 피로를 받아들일 수 있다. 단단해지려면 힘들고 괴롭다는 부정적인 감각보다 즐겁다는 긍정적인 감각이 중요하다.
피로 회복에 애쓰기보다 몸과 마음이 ‘강인해지는 것’에 중점을 두어라.
‘고정관념’이 아니라 ‘다정관념’을 가져라
한밤중 수련생들과 씨름하면 대부분 몸이 굳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음의 경직과 몸의 경직은 어느 정도 이어져 있으니 그들의 굳은 마음이 몸에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이 넘친다. 더구나 모두 ‘좋은 것’으로 여겨지기에 사람들은 앞장서 공부하고 손에 넣으며 마음을 더욱 굳힌다.
상식과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각종 ‘주의’가 우리 안에 고정관념을 만든다.
‘신념’, ‘한결같음’, ‘노력’처럼 일반적으로 좋은 말과 생각도 마음을 굳게 하는 대표적인 존재다. 사람들은 “주의와 주장을 가져라”, “신념 없는 사람은 안 된다”, “한결같이 힘내라”, “매일 노력하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사회는 마음과 생각이 굳은 사람을 계속 만들어 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눈앞의 것밖에 보지 못한다. 자연과 하나 되어 살던 옛 인류는 눈으로 보는 전방 180도와 보이지 않는 뒤쪽을 청각을 비롯한 오감으로 느끼며 주변 360도를 온몸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안전 제일인 세상에서는 옛날 같은 위험을 느낄 일도 없고, 현대인은 감각적인 주변 시야를 좁힌 채 고정관념으로 눈앞만 좇는다.
몸과 마음을 굳히고 눈앞만 본다. 그런 사람이 여러 가지를 알아차려야 하는 경기와 게임에서 이길 수 있을까.
스포츠와 마작, 인생에서 최선의 길을 찾으려면 무엇보다 유연성과 임기응변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넘치는 ‘마음을 굳게 하는 것’과 거리를 두고, 당연함과 상식을 늘 의심하며 살았다.
그래도 사회에서 사는 한 고정관념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정관념이 하나이기에 마음과 생각이 굳는다면 고정관념을 많이 가지면 된다. 하나가 아니라 백 개를 가지는 것이다. 서로 양립하지 않거나 보는 각도에 따라 모순되어 보이는 것까지 섞여 있으면 더 좋다.
백 개가 지나치다면 열 개나 스무 개도 좋다. 많이 가지면 그것은 ‘고정’관념이 아니라 ‘다정’관념이 된다.
다정관념은 물리적·정신적 시야를 넓힌다. 전에는 하나뿐이라고 생각한 답과 길이 여러 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삶에서 가장 큰 조력자가 될 것이다.
고정관념을 백 개 가지면 물리적·정신적 시야가 넓어져 하나의 관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직감에는 휘어져 오는 ‘곡감’도 있다
하부 요시하루는 2019년 5월 통산 1434승으로 오야마 야스하루의 최고 기록을 넘어 역대 1위가 됐다.
내게 마작이 직감의 승부라면 하부에게 장기는 사고의 승부일 것이다.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상대와 마주 앉아 끝없이 깊이 생각하고 먼 앞을 읽는다. 때로는 천 수 앞까지 읽는다고 한다.
직감으로 살아온 나는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고 머리를 컴퓨터처럼 움직여 승부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의 사고력은 그만큼 대단하다.
나는 수련생들에게 “패를 1초 안에 버려라”라고 가르친다. 장기와 달리 마작에서 계속 생각하면 욕심과 손익 계산, 망설임 같은 잡념이 들어와 우리가 추구하는 좋은 승부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가까운 감각으로 두게 하려고 그렇게 말한다.
내 감각으로 말하면 직감에는 글자 그대로 곧장 느끼는 ‘직감’과, 휘어져 온 것을 느끼는 ‘곡감’ 두 종류가 있다.
곡감은 어떤 것을 뛰어넘거나 돌아서 이쪽으로 온다. 말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에 가깝다.
햇빛은 위에서 곧장 내리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과 땅에 반사되어 우리에게 닿는다. 자연의 바람도 산과 숲의 나무 등 여러 장애물을 거쳐 몸에 닿았다가 다시 흘러간다. 직감은 곧게 느끼는 감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렇게 휘어져 느끼는 곡감도 있다.
곡감이 뛰어난 것은 자연의 생물이다. 암초 뒤에 숨은 물고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천적의 기척도 느낀다. 인간이 잠수해 접근하면 물고기는 그 존재를 위화감으로 포착하고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간다.
태고에 야생동물과 함께 살던 인류는 곡감을 포함한 직감이 날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인공물에 둘러싸여 사는 현대인은 그 감각을 완전히 닫았다.
닫힌 직감을 열고 더 날카롭게 하려면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에 의문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대사회에는 편리한 것이 많지만 그것들이 정말 인간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가. 재산과 정보, 이권은 많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늘리고 쌓고 부유해지는 일이 정말 좋은가.
현대인은 불필요한 것을 잔뜩 지닌 정신의 비만 상태다. 정신의 군살이 직감을 방해하므로 몸에 붙은 불필요한 것을 깎아 내야 한다.
오늘날의 상식은 인간에게 정말 당연한 것인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의문을 품고 자신도 모르게 익힌 군더더기를 덜어 내면 여러 일에서 위화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위화감이 본래의 직감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더 높은 수준으로 가려면 단점에도 대처해야 한다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 강점과 약점이 있다. 근래의 코칭은 단점보다 장점에 초점을 맞추고 장점을 키워 단점을 덮으려는 생각이 주류라고 한다.
인간은 본래 자연의 동물 중에서도 약점을 많이 지닌 생물이다. 그래서 다른 동물보다 뇌라는 무기를 발달시키고 그것을 강점으로 삼아 진화했다.
세상에 단점과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나도 물론 있고, 나이가 들어 예전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약점은 늘어날 뿐이다.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을 노리는 선수라면 단점과 약점이 가능한 한 적은 편이 좋다.
단점은 그 사람의 발목을 잡는 약점이다. 상대와 싸우는데 자기 안에도 발목을 잡는 존재가 있다면 혼자 두 사람을 상대하는 셈이다. 약점이 많을수록 방해물도 늘어나므로 ‘장점만 키운다’는 방법은 수준이 높아질수록 통하지 않는다. 그 길에서 살아남으려면 자기 단점과 마주하고 대처해야 한다.
그렇다고 단점을 전부 없앨 수도, 없앨 필요도 없다. 단점이 있기에 서투른 것과 약점을 알 수 있다. 열 가지가 있다면 여덟 가지는 대처하고 고치되 두 가지는 남겨 두어도 좋다. 부정적인 부분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도 단점을 완전히 잃어서는 안 된다.
단점의 80퍼센트는 고치고 20퍼센트는 남겨 두어야 자신의 약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심·기·체가 갖춰지지 않으면 정상급 선수라 할 수 없다
최근 탁구계는 젊은 선수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한때 젊은 선두주자로 활약한 이시카와 가스미조차 당시 스물일곱 살에 이미 베테랑 대우를 받았으니 세대교체가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다.
‘미우미마’라 불린 히라노 미우와 이토 미마는 2020년에 스무 살이 되었다.
2019년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에서 이토는 하야타 히나와 짝을 이뤄 일본 여자복식 48년 만에 결승에 올랐지만 노련한 중국 조에게 계속 흔들려 은메달에 그쳤다. 영상을 보면 중국 조는 움직임이 적었고 일본 조는 흔들림에 끌려 계속 움직이며 몸의 축이 무너졌다. 경기는 내내 중국의 흐름이었다. 이토의 젊음이 드러난 패배였는지도 모른다.
히라노는 같은 대회 단식 준준결승에서 당시 세계 1위 딩닝을 만났다. 젊은 히라노가 노련한 딩닝에게 완전히 당한 경기였다. 히라노의 머리는 내내 흔들렸고, 몸은 세로뿐 아니라 가로로도 움직였다. 그러니 가진 힘을 충분히 낼 수 없었다.
남자 탁구에서는 ‘초레이’로 유명한 하리모토 도모카즈가 주목받았다. 그는 2018년 월드투어 그랜드 파이널 남자 단식에서 사상 최연소인 열다섯 살 172일에 우승했다. 중학생의 위업은 그야말로 조숙함의 극치다.
탁구는 코트가 좁고 힘보다 민첩함이 중요해 초중학생도 어른을 이길 수 있기에 젊은 선수가 빠르게 올라오는 듯하다. 앞으로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더 어린 선수가 나올 것이다.
하리모토의 경기를 보면 정신적인 약함이 곳곳에 나타난다. 우세할 때는 괜찮지만 불리해지면 불안정함이 얼굴에 드러난다. 몸보다 정신적인 타격을 받기 쉬운 선수다.
탁구는 상대와의 거리가 가까워 몸뿐 아니라 정신적인 흔들기도 승패에 크게 관여한다. 중국의 베테랑은 그런 압박을 잘 건다. 일본의 젊은 선수들은 그 흔들기에 지지 않을 정신력을 길러야 한다.
여자 테니스의 오사카 나오미도 정신이 약한 편이다.
그녀의 눈에는 불쾌감이 드러난다. 어린 시절 당한 괴롭힘 같은 경험이 표정에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곧바로 라켓을 던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물건에 화풀이하는 선수에게 정상급을 자처할 자격은 없다.
인터뷰를 보아도 프로로서의 서비스 정신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상태가 좋을 때는 가끔 재치 있는 말을 하지만 나쁠 때는 정말 불쾌해 보인다. 이렇게 감정이 불안정해서는 정상급 선수라 할 수 없고 정상에 오래 머물기도 어렵다.
몸의 흔들기뿐 아니라 정신적인 흔들기에도 지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정상급 선수다.
‘지기 싫어하는 마음’은 승리에 필요한 자질인가
일류 선수가 되는 데 승부욕이 필수냐고 묻는다면 내 답은 세모다.
프로야구와 J리그 같은 단체 구기든 유도와 복싱 같은 개인 격투기든 유명 선수 중에는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패배의 90퍼센트는 자멸’이다. 마작에서는 승부욕이 너무 강해 물러날 때 물러나지 못하고 연이어 패하며 무너지는 사람을 자주 본다. 승부욕이 강한 사람은 연승하면 들뜨고 계속 지면 지나치게 흥분한다. 어느 쪽이든 냉정함을 잃어 좋은 결과가 오래가지 않는다.
승부에서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무조건 이겨야 직성이 풀리고 무엇이든 1등이 되어야 만족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내가 세모라고 답한 것은 승부욕이 너무 많은 것도, 전혀 없는 것도 좋지 않다는 뜻이다.
“이것만큼은 질 수 없다.” “이 부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그렇게 느끼는 일이나 분야는 인생에 한두 개면 충분하다. 나머지에서 지는 것은 괜찮다. 그 정도 여유를 가진 사람이 더 강해진다.
양보할 부분을 전혀 두지 않으면 패배를 피하려고 나쁜 짓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모든 일에서 지기 싫어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라기보다 “지면 놀 수 없으니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좋아하던 팽이치기와 딱지치기는 지면 중요한 놀이 도구를 상대에게 빼앗겼기에 질 수 없었다.
어릴 때 싸움에서 지는 것은 남자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싸움은 내가 양보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스모를 좋아해 쉬는 시간과 방과 후에 틈만 나면 친구를 불러 씨름했다. 돌이켜 보면 스모도 내게는 싸움의 하나였을 것이다. 싸우면 선생님과 부모에게 혼나지만 씨름은 아무리 해도 혼나지 않았다. 약한 상대에게 이겨 봐야 재미없어 체격 큰 선배에게 도전해 계속 이겼다. 놀이 속에서 “나보다 큰 상대를 쓰러뜨리려면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라고 생각하며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큰 힘을 내는 몸놀림을 익혔다.
승부욕이 너무 크면 좋은 결과를 주지 않는다. 이것만은 지고 싶지 않고 이 부분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한두 개 가지면 된다.
‘여기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한두 개 가질 때 사람은 강해진다.
근성에는 두 종류가 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여자 배구 대표는 ‘동양의 마녀’로 활약해 금메달을 땄다. 선수들은 ‘도깨비 다이마쓰’로 알려진 다이마쓰 히로부미 감독에게 피를 토할 만큼 혹독한 훈련을 날마다 받았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근성론의 대명사가 되어 훗날 스포츠계의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비판받는 일이 많지만 나는 근성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녀도 좋은 근성과 불필요한 근성 두 종류가 있으며, 좋은 근성은 무엇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저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제 노력을 봐 주세요.” 죽을힘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는 감독과 코치에게 그렇게 내세우는 이가 적지 않다. 필사적인 모습을 앞세워 자신을 어필하는 근성은 선수로서보다 인간으로서 좋지 않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근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정신과 삶의 방식이다. 큰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는 땅속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나무가 가지를 뻗고 잎을 무성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대지 깊숙이 단단히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근성은 뒤에서 나무를 떠받치는 뿌리와 같다.
옛 근성론에 물든 사람은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땀과 눈물을 흘리면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못된 노력을 아무리 계속해도 원하는 결과는 없다. 애초에 일본어로 노력(努力)은 ‘애써 힘을 준다’고 쓰므로 내가 말하는 인간 본래의 몸 쓰는 법과는 정반대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자주 말하는 사람은 힘을 주는 일만 계속해 몸과 마음이 굳어 있다. 부드럽게 쓰며 본래의 움직임을 익히려면 ‘노력’이라는 관념을 잠시 옆에 두고 “나는 어떻게 단련해야 성장하는가”를 객관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자신을 키우는 방법을 생각하고 천편일률적인 연습이 아니라 자신만의 궁리를 더한다. 그것이 올바른 노력이며 놀이 감각을 적극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조금 고된 훈련도 놀이 마음을 더하면 즐겁게 할 수 있다. 괴로운 연습을 즐겁게 해내면 실전의 위기에도 여유롭게 대응할 수 있다.
‘노력’이라는 관념을 잠시 옆에 두면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쓸 수 있다.
스파르타식으로는 실력도 늘지 않고 근성도 생기지 않는다
1964년 당시 일본 스포츠계는 스파르타식 지도가 주류였다.
연습 중 잡담과 미소가 금지되고 물도 마실 수 없었다. 지도자는 계속 고함을 질렀고 때리고 차는 방식도 당연한 시대였다.
그것은 전쟁의 영향이었다. 전후 복구와 함께 여러 스포츠가 이루어졌지만 집단을 통솔하는 규율은 전쟁 때와 같은 군대식이었다.
‘동양의 마녀’ 일본 여자 배구팀은 ‘도깨비 다이마쓰’에게 초스파르타식 맹훈련을 받았다. 언론이 이를 다루면서 일본인은 “강해지려면 문답무용의 혹독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쇼와 시대 스포츠계가 스파르타식이었던 배경이다.
헤이세이를 거쳐 레이와가 된 오늘날 그런 지도는 거의 사라진 듯하다. 학생과 선수를 때리면 지도자 자신의 처지가 위험해지므로 그런 일은 드물다. 고함만 치던 방식은 크게 재검토되었고 화내고 꾸짖기보다 칭찬에 중점을 둔다고 한다.
교사는 학생을 존칭으로 부르고, 학생이 아무리 장난스러워도 손을 드는 것은 물론 고함조차 지르지 못한다. 그런 환경에서 기세등등해진 학생은 더 말을 듣지 않는다. 학생들이 돌아다녀 수업이 성립하지 않는 학급 붕괴와, 지도에 막혀 신경증으로 휴직하는 교사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현대 교육을 설명한 것은 옛 스파르타식을 되찾거나 폭력을 찬양하자는 뜻이 아니다.
스파르타식을 없애려고 교육계와 스포츠계가 움직여 왔는데 상황은 정말 개선되었는가. 그 점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교육의 현실을 예로 든 것이다.
옛 스파르타 교육은 선수와 학생을 병사처럼 싸우게 하고 다루려고 사용됐다. 그런 눈에 보이는 폭력은 줄었겠지만,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정신적 폭력이 생겨나고 있다.
오늘날 아이들은 부모에게 공부라는 싸움을 강요받는 듯하다. 표면적으로 교육계와 스포츠계가 온화해졌어도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스파르타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아닐까.
결과지상주의 사회는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가르친다. 의미 있음은 곧 이득이니 아무도 무의미하거나 손해 보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미와 이익만 좇는 사람이 늘어 사회 전체가 나빠졌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면 근성이 생긴다고 믿는 낡은 지도자도 아직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가르쳐도 이익만 좇는 사회에서는 근성이 생기지 않는다. 진짜 근성은 손익과 관계없는 위험을 좇는 과정, 불리함을 짊어진 싸움 속에서 자란다. 그 점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즐거운 연습이 실력을 키운다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자신이 지닌 힘의 40퍼센트 정도만 쓴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됐다고 한다. 나머지 60퍼센트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열쇠가 ‘미소’라고 한다.
평범하게 달릴 때보다 웃으며 달릴 때 기록이 좋아진다. 전문가에 따르면 웃으면 몸이 이완되어 보폭이 넓어지고 더 빨라진다고 한다.
생각의 유연성은 몸에도 영향을 준다. 생각이 부드러운 사람은 움직임도 부드럽고, 생각이 굳은 사람은 동작도 딱딱하고 어색하다. 나는 늘 “유연성이 없으면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대응하려면 이완된 부드러운 상태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일은 잘하게 된다’는 속담이 있다.
좋아하는 일에는 자연히 몰두해 빨리 늘고, 아무리 해도 싫증 나지 않으며 즐겁다. 즐거우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며 표정도 자연스럽게 웃게 된다. 잠재력을 끌어내는 미소는 즐거운 일을 하는 상황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더 빨리 달리게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즐거움은 편안함과 다르다. 사람의 힘을 키우는 것은 편한 길이 아니라 험한 길이다. 아무리 험해도 자신이 바라는 것이 그 앞에 있다면 즐겁게 연습할 수 있다.
즐겁게 연습하려면 확실한 자기 자신이 있어야 한다. 자신감이 없어 남의 영향을 쉽게 받고 주변 의견에 휩쓸리는 사람은 자신만의 즐거운 연습을 하기 어렵다.
확실한 자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소질과 감각 같은 선천적인 부분에 가깝다. 자신이 없는 사람은 위기 때 긴장하고 힘을 주어 스스로 무너진다.
자신을 가진 사람은 예와 아니요라는 이차원에 한 가지를 더한 삼차원적인 감각으로 산다. 그래서 정답과 오답에서 생각을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답과 방법이 있지 않을까”라고 찾는다. 그런 감각이 있으면 위기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자기에게 맞는 올바른 노력을 할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은 잘하게 된다. 이완되고 부드러운 상태가 임기응변의 대응을 낳는다.
‘편안함’과 ‘즐거움’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작귀회 도장 ‘패의 소리’는 평범한 마작장이지만 내 손주와 오래 알고 지낸 편집자의 초등학생 딸 같은 아이들이 자주 찾아와 수련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은 회장과 모두 함께 놀 수 있어 도장이 즐겁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느 시대나 즐거움을 가장 먼저 찾는다. 이는 인류 공통의 진리다.
어른도 즐거움을 가장 먼저 찾으면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어른이 구하는 것은 돈과 권력, 지위와 명예처럼 인간의 삶에 본래 필요 없는 것뿐이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초일류 선수는 이기는 일이 너무 즐거울 것이다. 그래서 지면 죽을 만큼 분하고, 지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연습하며, 다시 이겨 즐거움을 맛본다. 일류일수록 혹독한 훈련을 이어 가는 동기는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목숨을 걸고 세계 최고봉을 노리는 등산가와 혼자 요트로 태평양을 건너려는 모험가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보다 즐거움이 크기에 끝없이 도전한다. 목숨 건 도전이 즐거워 견딜 수 없다. 그 즐거움을 삶의 에너지로 바꾸는 방식은 나도 같다.
내가 말하는 즐거움은 편안함과 다르다. 그 안에는 당연히 고통과 괴로움도 들어 있다. 즐거움을 좇는 길에서 만나는 고통이 자신의 에너지가 되고 벽을 넘는 힘이 된다.
현대인이 원하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편안함이다. 공부해서 좋은 대학과 회사에 들어가면 장래에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배웠기에 목숨 걸고 즐거움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리 재미없어도 편안한 미래를 위해 일한다.
인간으로서의 강함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가운데 자란다. 편안함만 계속 찾으면 점점 약해진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바퀴벌레 따위에 놀라서는 안 된다
긴장을 잘하고 덜렁대는 사람은 압박받는 장면이나 뜻밖의 사태에서 엉뚱한 행동을 하기 쉽다.
“저 사람은 늘 허둥대지.” 여러분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하나둘 있을 것이다.
사소한 일에 공황에 빠지는 사람은 생각에 여유가 없어 금세 허우적거린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도 눈앞에 바퀴벌레가 갑자기 나타나면 태연할 수 있는가. 진정으로 태연자약한 사람은 바퀴벌레는 물론 어떤 사태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현대인은 안심과 안전을 가장 원한다. 어릴 때부터 위험에 뛰어드는 놀이를 좋아한 내 눈에는 오늘날 사람들이 완전히 방어된 무균실에 사는 듯하다. 안전의 울타리에 보호받은 사람이 뜻밖의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당연히 아니다.
등산 중 평탄한 길과 험한 길이 나타나면 대부분은 평탄한 쪽을 고른다. 나는 “이쪽이 재미있겠네” 하며 늘 험한 길을 골랐다.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은 편한 길이 아니라 험하고 고된 길이다.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온 것은 그런 방식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늘 험한 길을 고르는 것은 대부분에게 힘든 삶일지 모른다. 그래도 성장하고 싶다면 평소 조금씩이라도 어려운 길을 선택할 마음을 가져야 한다.
편한 길이 아니라 험하고 어려운 길을 골라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익힐 수 있다.
팀에서 진정한 신뢰를 쌓는 조건
단체 스포츠에서는 기술과 체력뿐 아니라 팀의 결속, 이른바 팀워크가 중요하다.
그 뿌리는 서로 통하는 신뢰감이다. 진짜 신뢰로 이어진 관계는 유연하고 강하다.
겉으로만 친한 무리처럼 서로 봐주는 관계에서는 진정한 신뢰를 만들 수 없다. 진검승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여러 번 함께 넘을 때 신뢰가 자란다.
내가 신뢰를 느끼는 것은 수련생들과 바다에서 잠수할 때다. 작귀회는 여름마다 이즈 바다로 가 1~2주 동안 함께 잠수한다. 해수욕객이 붐비는 모래사장이 아니라 현지인도 잘 가지 않는 바위 해안이다.
거친 바위뿐인 해안에서는 바다에 들어가고 나오는 데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타이밍을 조금만 잘못 잡아도 파도에 몸이 바위로 내던져져 크게 다친다.
수영이 능숙한 사람도, 서툰 사람도 있다. 서툰 사람이 들어가거나 바위로 올라오려 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잘하는 사람들을 주변에 배치해 말하지 않아도 호흡을 맞추며 다치지 않게 돕는다. 큰 소리로 하나하나 지시하지 않고 눈짓과 몸의 움직임만으로 대응한다. 바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나와 수련생 사이에 자란 신뢰가 있기에 가능하다.
그중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샤보’라 불리는 수련생이다.
나는 위험을 좋아해 잠수할 때도 바다가 거칠수록 들어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런 바다에 모두를 데려갈 수는 없다. 육지에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들어가는데, 그때도 샤보만은 말없이 나를 따라온다.
거친 바닷속에는 조류가 소용돌이쳐 거대한 세탁기에 던져진 듯하다. 흰 파도가 끊임없이 내리쳐 물속은 새하얗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도 알 수 없어, 머리와 몸이 암초에 부딪치지 않도록 손발로 주변을 더듬으며 헤엄친다. 그런 가혹한 상황에서도 샤보는 결코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존재가 확실히 느껴진다.
그때 나는 진정한 신뢰가 이런 비일상 속에서 자란다고 확신했다. 진짜 신뢰는 일상생활이 아니라 생명이 위험에 노출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 존재한다.
스포츠 세계에서 그런 신뢰를 쌓을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아무리 서로를 이해해도 친함과 신뢰는 전혀 다르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신뢰는 손익과 욕심, 선악과 세상 상식이 없는 곳에서 자란다.
진정한 신뢰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여러 번 함께 넘으며 자란다.
자연에 맡겨 살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도쿄 올림픽이 열릴 예정이던 2020년 여름 나는 일흔일곱 살을 맞았다. 어느새 그런 나이가 됐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 모르지만 일흔 중반을 넘어서며 해마다 몸이 약해지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수련생들과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것은 대개 새벽부터 아침 사이다. 씨름과 탁구, 몸놀림으로 지친 뒤에는 현관 앞의 작은 턱에도 자주 걸려 넘어진다.
젊은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1센티미터 턱을 넘는 것도 힘들고 신발과 바지를 벗는 평범한 동작도 큰 작업이 됐다.
새벽에 수련생 차로 집에 오다 보면 묵묵히 걷기 운동을 하는 노인을 자주 본다. 건강에 집착하는 그들은 나처럼 작은 턱에 걸리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도 매일 아침 걷고 싶지는 않다. 세상에는 노화 방지가 계속 유행하고 장수 보조제 광고가 넘친다. 그러나 나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것을 거스르는 노화 방지라는 생각은 내 눈에 극히 부자연스럽다. 현관에서 걸리고 바지를 벗기 어려워도 자연의 흐름으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이가 들어 몸이 굳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몸이 굳으면 전에 하던 일을 차츰 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당연한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몸이 움직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은 있을 것”이라며 지금 상태를 즐긴다. 그래서 어딘가 아플 때일수록 수련생들과 씨름하고 싶어진다. 타고난 역경과 불리한 상황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이다.
못하게 되는 일이 늘어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짜증 내고 주변에 화풀이하는 노인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못하는 일이 늘면 “지금까지 이런 일을 평범하게 할 수 있었구나”라며 가능했던 일에 감사하게 된다. 못하게 되는 일을 걱정하고 슬퍼하지 말고,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인간 본래의 삶이다.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두고 지금 상태를 받아들여 즐겨라.
제5장 기억에 남는 메달리스트의 말을 읽다
이 장에서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남긴 명언을 소개하고, 그 말에서 내가 느낀 솔직한 생각을 적겠다. “좋은데” 싶은 말부터 “그건 좀 아닌데?” 싶은 말까지 국내외 여러 선수의 말을 골랐다. 번외로 모험가와 등산가의 말도 실었다.
“지금까지 대체 얼마나 많이 달렸는가. 이제 겨우 42.195킬로미터만 남았다.”
다카하시 나오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여자 마라톤 금메달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강하다
다카하시는 시드니 올림픽 출발 직전 머릿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남은 건 겨우 42킬로미터’라고 생각을 바꾸어 마음을 편하게 하는 뜻과 함께 마라톤을 무척 좋아한다는 마음이 숨어 있다.
그 증거로 금메달을 딴 뒤 기쁜 한편 “몇 달 동안 감독과 스태프 모두가 도와주며 내일도 힘내자는 분위기로 왔는데, 이것이 끝나는 건가”라는 쓸쓸함도 느꼈다고 한다.
혼자 힘으로 강해진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더욱 강해진다. 귀국해 국민영예상을 받으며 “감독님과 영양사, 도와주신 모든 분이 함께 받은 상입니다”라고 말했다. 진정한 정상급 선수는 이런 감사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현역 시절에는 고교 육상부 은사가 준 말도 큰 힘이 됐다. 고토 세이이치의 『리더스 노트』에 나온 말이다.
“아무 꽃도 피지 않는 추운 날에는 아래로, 아래로 뿌리를 뻗어라. 머지않아 큰 꽃이 핀다.”
원래 중거리 선수였던 그녀는 성인이 된 뒤 마라톤으로 전향했다. 전향 후 3년 동안 전혀 두각을 보이지 못해 꺾일 때가 많았지만 이 말을 떠올리며 버텼다.
이는 뿌리를 중시하는 내 생각과도 통한다. 뿌리는 땅 위로 나오지 않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큰 나무일수록 땅속 뿌리도 크고 깊고 강인하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부분에 주목하기 쉽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그녀는 대중의 눈에 닿지 않는 날마다의 고된 훈련을 견뎌 실력을 꽃피웠다.
“처음으로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아리모리 유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마라톤 은메달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 마라톤 동메달
내용과 과정이 좋았다는 뜻이라면 자신을 칭찬해도 좋다
나는 나를 칭찬해 본 적이 없지만 그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결과만 보고 자신을 칭찬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그날 승부의 내용이 좋았고 지금까지 밟아 온 과정이 좋았다는 뜻이라면 괜찮다. 졌지만 지금까지 전력을 다했기에 후회가 없다는 식으로 패배한 자신을 칭찬하는 것도 좋다.
아리모리는 애틀랜타에서 동메달을 딴 직후 이 말에 앞서 “메달 색은 동이지만 끝난 뒤 왜 더 노력하지 못했을까 후회하는 경기는 하고 싶지 않았고,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취지로 말했다. 내용과 과정에 만족한다는 뜻에서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대타 시절 큰 승부에서 이겨도 전혀 기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부끄러웠다. 승부가 끝나면 누구도 만나지 않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전철이 끊긴 시간에는 어두운 밤 철길을 따라 걸어가기도 했다.
작귀회를 만든 지 40년이 넘었다. 지금까지 이어진 것은 내가 아니라 주변에서 애써 준 몇몇 수련생 덕분이다. 그들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다.
작귀회 홈페이지에 날마다 느낀 점을 보고서로 쓰다 보니 6000편이 넘었다. 그래도 내가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좋은 글을 쓰거나 칭찬받으려 한 적도 없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인터넷으로 정보를 내보내지만, 나도 많은 사람에게 글을 읽히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주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내 책과 글을 읽고 힘이나 용기를 얻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큰 착각이다. 내 책을 읽는다고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태어난 뒤 칭찬받을 일은 하나도 하지 않은 내가 아리모리처럼 자신을 칭찬할 수는 없다.
“나는 금메달만 봅니다. 금이 아니라면 꼴찌나 마찬가지입니다.”
오타 유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펜싱 플뢰레 개인 은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펜싱 플뢰레 단체 은메달
결과론이 아니라 과정론으로 말하자
런던 올림픽 직전의 말로, 금메달을 향한 마음이 응축되어 있다. 세계 정상에 가려면 이 정도 마음은 있어야 한다.
베이징에서 은메달이었으니 런던에서는 어떻게든 금을 따고 싶었을 것이다. 그 생각 하나로 4년 동안 연습했을 것이다.
이 발언은 결과론이 아니라 금메달을 목표로 좋은 과정을 밟아 왔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결의였으리라.
오늘날은 모든 것을 결과로 판단한다. 사회 자체가 결과지상주의라 사람이 결과에 집착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세상이기에 나는 과정을 중시하고 싶고, 과정이 좋다면 져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선수가 메달을 따고 “좋은 결과를 냈습니다”라고 말하기보다, 메달을 따지 못했어도 “좋은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기에 납득합니다”라고 말하는 일이 늘면 세상도 조금씩 바뀔 것이다. 결과지상주의 사회에서는 무리한 주문일까.
“이기기 위해서라면 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초 가오리
2004년 아테네·2008년 베이징·2012년 런던·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자유형 레슬링 금메달
이런 시대이기에 이초와 같은 생각이 필요하다
2016년 1월 러시아 국제대회 결승에서 몽골 선수에게 큰 점수 차로 테크니컬 폴패를 당하며 189연승 기록이 멈췄다.
경기 뒤 나온 이 말에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자세가 나타난다.
승리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레슬링을 선택한 결과를 확실히 받아들였다. 그 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전인미답의 올림픽 4연패를 이뤘다.
큰 점수 차로 뒤지면 보통은 큰 기술로 대역전을 노린다. 그러나 그녀는 일부러 작은 점수를 따는 레슬링을 끝까지 유지했다.
분명 그 경기에서 스스로 어떤 과제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 과제대로 경기한 결과 한 점도 따지 못하고 졌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하고 싶은 일을 했으니 결과적으로 져도 괜찮다”는 말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금메달을 딴 뒤 교만해지는 선수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초에게서는 그런 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레슬링에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에 줄곧 호감을 가졌다.
움직임도 좋고 근성도 있으며 심·기·체가 고르게 갖춰졌다. “나는 챔피언이다”라는 생각이 너무 강하면 움직임에 나타나지만 그녀에게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욕심과 압박 같은 군더더기도 별로 없어 보였다.
도쿄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않는다. 이후 어떤 길을 갈지는 모르지만 텔레비전과 광고에 마구 나오는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과정을 중시하는 정신과 지도로 다음 메달리스트를 길러 주기 바란다.
“정말 기분 최고예요.”
기타지마 고스케
2004년 아테네·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평영 100미터·200미터 금메달 외
라이벌도 소중한 동료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테네 올림픽 평영 100미터에서 금메달을 딴 직후의 말로, 그해 신어·유행어 대상에도 뽑혀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다. 젊은 혈기와 유행어였다고 해도 일본 대표가 공식 석상에서 ‘최고’라는 가벼운 표현을 쓰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니고 조금 한심하다.
정상급 선수도 그날 몸 상태에 따라 가볍거나 무겁게 느낄 수 있다. 이날은 상태가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기분 좋게 헤엄쳤고 그 결과 우연히 이겼습니다”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금메달이 기쁘고 상쾌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세계 정상인 만큼 위치에 맞는 발언이 필요하다. 솔직히 그 말에서는 함께 겨룬 선수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다.
결승에는 라이벌도 출전했을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자신도 여기까지 노력할 수 있었다.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면 스포츠맨도, 세계적인 선수도 아니다.
나라면 같은 종목에서 겨루는 모든 선수를 동료라고 느낄 것이다. 겸손하거나 상대를 세워 주고 경의를 표한다는 복잡한 뜻이 아니다. 서로 자극하며 성장하는 동료라는 단순한 감각이다. 라이벌도 끝까지 생각하면 자신을 키워 주는 소중한 동료다.
“주위를 보면서 여유를 가지고 임하는 것, 그것이 집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중이라고 하면 하나에 꽉 파고드는 모습을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넓은 시야로 느긋하게 있는 상태가 이상적입니다.”
무로후시 고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해머던지기 금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 남자 해머던지기 동메달
유연한 발상과 끝없는 탐구심이 힘을 배가한다
이 말은 내가 오래전부터 한 말과 비슷하다. 나는 궁극적인 집중이 ‘원’이라고 생각한다.
한 점에 집중한다는 말은 듣기 좋지만 주변을 보지 못해 실제로는 빈틈투성이다. 진정한 집중은 한 점에 모이는 방식이 아니라 연못에 던진 돌에서 둥근 물결이 퍼지듯 확산하는 방식이다.
무로후시는 금메달리스트인데도 화려함이 전혀 없고 무사도를 탐구하는 사무라이 같은 분위기가 있다.
그는 “메달 색은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그곳을 향해 노력하는 일입니다”라고도 말했다. 나처럼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깨달음과 발견을 얻고 싶은 것이다.
2019년 초 스포츠신문에 ‘오릭스 요시다, 무로후시에게 입문’ 같은 기사가 실렸다. 오릭스 버펄로스의 요시다 마사타카가 그의 지도로 기초 체력 훈련을 했는데 방법이 매우 독특했다.
양손으로 종이풍선을 안고 무릎 부근에 고무 밴드를 착용한 뒤, 허리를 반쯤 숙인 채 풍선을 찌그러뜨리지 않도록 앞뒤로 걷는 훈련이었다.
무거운 물체를 던진 선수가 가벼운 것으로 훈련한다. 이런 역전 발상이 현역 시절의 강함을 말해 준다.
해머던지기는 유럽 선수가 많고 무로후시보다 한두 체급은 큰 선수뿐이다. 체격상 압도적으로 불리한데도 금메달을 땄다. 다른 선수에게 없는 독특한 몸 쓰는 법을 단련으로 익혔다는 증거다.
유연한 축을 만들고 힘을 주지 않고 회전하며, 360도 범위 안에서 힘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 맞춰 해머를 던진다. 금메달의 배경에는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발상과 몸 쓰는 법에 대한 끝없는 탐구가 있었다.
“살아 있는 전설이 되고 싶습니다. 한 번 이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반복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사인 볼트
2008년 베이징·2012년 런던·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100미터·200미터 금메달 외
불필요한 것을 더하지 않고 어떻게 계속 변화할 것인가
일류는 5년 동안 정상에 있고, 초일류는 10년 넘게 정상에 군림한다. 누구보다 강해지기도 어렵지만 강함을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다.
일본의 유도 노무라와 레슬링 요시다가 3연패를 이뤘고, 올림픽 4연패는 당시 세계에서도 이초 가오리, 마이클 펠프스의 남자 개인혼영 200미터, 칼 루이스의 남자 멀리뛰기, 앨 오터의 남자 원반던지기, 파울 엘브스트룀의 남자 요트 핀급 다섯 명뿐이었다.
일류 선수는 정상에 머물기 위해 계속 변한다. 그러나 변화의 노력은 플러스가 될 수도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해 보지 않으면 모르지만 실패가 두려워서는 정상을 지킬 수 없다.
나는 변화하면서 불필요한 것을 더하는 방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프로야구에서 근육을 붙여 힘을 키우려는 선수가 많지만 지나치게 붙여 움직임이 둔해지고 성적이 떨어지거나 부상한다. 근육을 붙이더라도 이 책에서 반복한 ‘한입’의 감각이면 충분하다.
방을 밝히는 형광등은 쓰다 보면 언젠가 끊어진다. 인위적으로 붙인 근육도 혹사할수록 빨리 끊어진다. 자연스럽게 붙은 근육은 오래가지만 억지로 붙인 근육은 빨리 망가진다.
“진검승부에서 이기는 동기보다 내가 세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더 큰 원동력입니다.”
히라노 사야카
2012년 런던 올림픽 여자 탁구 단체 은메달
작은 목표를 하나씩 정성스럽게 해낸다
히라노 사야카와 나는 10년 넘게 알고 지냈다. 첫 만남은 베이징 올림픽 전해인 2007년이었다. 내 승부론에서 무언가 배우고 싶다며 마치다 도장에 왔다.
2016년 은퇴할 때까지 탁구의 ‘탁’ 자도 모르는 나를 라켓까지 들고 여러 번 찾아왔다.
오랜 사이니 평소처럼 사야카 짱이라고 부르겠다. 앞의 말은 은퇴 후에 한 듯한데 “사야카 짱, 말과 행동이 다른 것 아닌가?”라고 말하고 싶다. 그녀치고는 조금 지나치게 멋을 부린 말 같다.
다만 내용 자체는 좋다. 목표는 크지 않아도 된다. 작은 목표를 하나씩 정성스럽게 해낸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과정에서 중도 포기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목표가 너무 크면 망상에 가까워져 실현성이 떨어진다. 분수를 모르는 큰 목표는 과신과 오만으로도 이어지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몸의 움직임이든 목표든 하나씩 ‘처리해 나가는’ 감각이 중요하다. 그것도 능숙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러면 익숙함이 생겨 움직임이 부드러워지고 목표도 순조롭게 달성한다.
지금은 은퇴해 텔레비전 해설자로 활동한다. 탁구계를 곁에서 돕고 싶어 미디어에 나오는 것이겠지만 내 눈에는 조금 좋지 않은 쪽으로 간 듯하다. 탁구를 이용해 사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게 좋아한 것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시기에 활약한 후쿠하라 아이 쪽이 은퇴 후 더 좋은 모습으로 사는 듯 보인다.
사야카 짱은 현역 때 ‘탁구의 귀신’이라 불렸다. 언젠가 또 불쑥 도장에 올 것이다. 그때 다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등산으로 비유하면 산 정상에는 내가 이상으로 삼는 유도가 있었습니다. 말로 표현하면 ‘늘 냉정하고 빈틈이 없으며 기술이 훌륭하게 날카로운 유도가’라고 할까요. 올림픽도 그 이상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금메달을 따고도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야마시타 야스히로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남자 유도 무제한급 금메달
한 길에서 얻은 배움을 다른 길에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야마시타는 현역 시절 203연승을 세운 쇼와 시대의 대표적인 유도가다. 당시에는 일본올림픽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금메달 뒤 한참 지나 한 이 말은 메달이 기쁘지만 자신의 이상에는 전혀 가까워지지 않았다는 솔직한 마음이다.
나는 작귀회에서 ‘작귀류 마작’을 추구하지만 앞으로 아무리 계속해도 어디엔가 도달하거나 완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다 했다”, “통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길은 끝난다. 종착점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각자 자신의 길을 계속 좇는 이유다.
야마시타도 비슷한 마음으로 유도의 길을 끝까지 추구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결승이 떠오른다. 2회전에서 오른발을 다쳤지만 준결승과 결승을 이겨 금메달을 땄다.
결승 상대였던 이집트의 모하메드 라슈완은 부상을 알고도 그곳만 집중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평소처럼 싸웠다. 경기 뒤 페어플레이 정신이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야마시타는 이런 불리함을 짊어진 경기에서도 유도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강함을 익혔을 것이다.
나는 마작의 길을, 그는 유도의 길을 오래 걸었지만 한 가지를 오래 했다고 세상에서 말하는 마니아나 오타쿠가 된 것은 아니다.
하나에 열심히 몰두하면 마니아적인 기질이 되기 쉽다. ‘열광적’이라는 말처럼 한 길에 지나치게 빠지면 광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마작 바보가 아니고 야마시타도 유도 바보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길에서 배운 것이 다른 길에서도 통하는가다. 그 길에서 익힌 승부의 강함을 인생이라는 여정에서도 살려야 한다.
“추위와 더위, 바람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닥칩니다. 강한 것은 강합니다. 그러니 행운도 불운도 없습니다.”
아베베 비킬라
1960년 로마·1964년 도쿄 올림픽 남자 마라톤 금메달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강하다
로마 거리를 맨발로 달려 금메달을 따며 단숨에 유명해진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 아프리카의 대자연에서 태어나 맨발로 뛰어다녔기에 발바닥 피부가 두꺼워졌다고 한다. 자연과 하나 되어 살던 태고의 인류에게는 당연했겠지만 현대인에게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의 말만 보면 대단한 자신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자연 속에서 살았기에 나온 말이라고 느낀다.
태양이 떠 있는 시간과 각도는 날마다 달라지고 날씨도 쉴 새 없이 변한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하며, 자연을 가까이 느끼는 사람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조화롭게 산다.
그러나 현대인은 “비가 오네”, “오늘 바람이 세네” 하며 자연에 불평한다. 자연에 시비를 거는 것은 인간이 모든 면에서 약해졌다는 증거다.
아베베는 자신이 자연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과, 모든 변화를 행운과 불운으로만 정리하는 선진국의 풍조에 한마디 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연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흐름 속에서 사는 사람은 강하다. 동서고금을 통하는 틀림없는 진실이다.
“인간이 어려움에 맞설 때 두려운 것은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믿습니다.”
무하마드 알리(캐시어스 클레이)
1960년 로마 올림픽 남자 복싱 라이트헤비급 금메달
알리는 진정한 두려움을 알았기에 강해졌다
복싱의 전설로 지금도 회자되는 무하마드 알리는 수많은 일화와 명언을 남기고 2016년 세상을 떠났다.
올림픽 뒤 프로로 전향해 은퇴 전까지 세 차례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차지했고 챔피언 방어도 통산 열아홉 번 기록했다.
정상 다툼을 이만큼 경험한 그는 보통 사람은 느끼지 못할 공포를 여러 번 맛봤을 것이다. 이 말은 겁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두려움을 알았기에 나온 말이다.
챔피언 자리에서 떨어지면 평범한 사람이 된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여러 번 맛봤고, 헤비급 복싱은 지극히 가혹해 경기 다음 날 목숨이 붙어 있을 보장도 없다. 챔피언은 관객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공포와 마주하며 링에서 싸운다.
알리는 여러 공포와 싸우며 자신을 믿으면 두려움을 옅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다.
그는 “너무 순조롭게 계속 이기는 복서는 사실 약하다”고도 했다. 여러 벽과 실패를 경험한 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여기서 약하다는 말은 ‘무르다’고 해석해도 좋다.
골프계에서 회복 조짐을 보이던 타이거 우즈도 이 말의 뜻을 잘 알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 순조로우면 인생을 객관적으로 보고 균형을 잡거나 제동을 걸지 못한다. 그러다 작은 걸림돌 하나로 순식간에 늪에 빠져 꼼짝 못 하기도 한다.
욕심은 밑 빠진 양동이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더 많이 원하고, 욕망이 많이 흘러들수록 제어하지 못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돈과 권력, 명예 같은 욕망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 바람과 태양은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욕심에 물들어 자신을 잃을 것 같으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바라보라. 그러면 해야 할 일이 보일 것이다.
“나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은 사실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런 곳까지 가지 않으면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시미즈 히로야스
1998년 나가노 올림픽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500미터 금메달·1000미터 동메달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남자 500미터 은메달
잠재력을 꽃피우려면 위험을 즐겨라
나도 대타 시절 새로운 세계를 엿보고 싶어 늘 자신을 몰아붙였기에 이 말을 잘 이해한다.
계속 몰아붙이면 전에 느끼던 두려움이 재미로 바뀐다. 한계가 점점 높아져 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긴 일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늙으면 자신을 몰아붙일 수도 없다. 젊을 때는 적극적으로 몰아붙이는 편이 좋다. 그것이 즐거움으로 바뀌면 안에 잠든 잠재력이 눈앞에서 꽃핀다.
‘몰아붙인다’는 표현은 부정적이고 비장하며 가혹하게 들려 망설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위험을 즐기자’고 생각하면 된다.
인간은 편안함을 원하는 생물이지만 편한 길만 고르면 잠재력은 계속 닫힌 채다. 일부러 험한 길을 고르는 것이 위험을 즐기며 가능성을 넓히는 삶이다.
“힘들어도 참아야 합니다. 참고 또 참는 겁니다.”
새뮤얼 완지루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마라톤 금메달
승부 세계에서 살려면 근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케냐에서 자란 완지루는 고교 유학으로 일본에 와 본격적으로 마라톤 인생을 시작했다.
베이징에서 우승한 뒤 “일본에서 달리기를 배우며 가장 도움 된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한 답이라고 한다.
혹독한 마라톤을 제압하려면 무엇보다 인내가 필요하다. 세계 대회 정상을 차지하는 일은 평범한 선수가 할 수 없다. 보통 선수는 견디지 못할 수준에서 참아야 한다.
실력이 비슷하면 마지막에는 마음이 강하고 정신이 단단한 쪽이 이긴다. 지기 싫어하는 마음과 근성은 승부 세계에서 살아남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지 않아야 한다.
쇼와 시대 스포츠계에는 스파르타식 지도가 횡행해 근성을 스파르타와 같은 것으로 보았고, 오늘날 교육계에서 근성론은 별로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도 승부 세계에서 근성은 필수다. 내가 알고 지내는 여러 업계의 승부에 강한 사람은 모두 좋은 근성을 지녔다.
근성을 익히는 요령은 단순하다. 늘 어려운 길을 고르면 된다. 험하고 가파른 길을 넘어가면서 몸과 마음의 강인함과 근성이 생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 ‘너는 안 돼’라고 말할 때 한마음으로 해내면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이클 펠프스
2004년 아테네·2008년 베이징·2012년 런던·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 수영 접영 금메달 외
안 되기에 가능성이 있다
2004년 아테네부터 2016년 리우까지 펠프스는 올림픽 메달 28개, 그중 금메달 23개를 따 모두 역대 1위를 기록했다.
다른 선수가 따라갈 수 없는 초인적인 활약이지만 이 말을 보면 그도 금메달을 위해 자신에게 혹독한 훈련을 부과했음을 알 수 있다.
남이 “넌 안 돼”라고 했다고 “나는 안 되는 인간이야”라며 멈추면 거기서 끝이다. 펠프스처럼 분함을 발판 삼아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업종과 스포츠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누구나 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출발해 경험을 쌓으며 능숙해진다. 안 되기에 기회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번외편
“내가 괴로울 때는 경쟁자도 괴롭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공연히 괴로워하며 달리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연스럽고 고요하게 달리며 투지의 불꽃을 더욱 깊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세코 도시히코
마라톤 선수
궁지의 자신을 구하는 사고법
사람은 힘든 일이 생기면 주변을 보지 못하고 “왜 나만”이라는 피해의식을 품기 쉽다.
이 말은 힘들고 괴로울수록 주변을 바라보아야 자기 상황을 냉정하게 다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모든 일에 적용된다. 자신보다 더 심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며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바다에서 동료와 놀다가 나만 다치면 나는 “왜 나만 이런 일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주변 사람이 아니라 내가 다쳐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한다.
재난이 닥쳤을 때 자연스럽게 “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때도 냉정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결국 궁지의 자신을 구한다.
2019년 2월 도쿄 올림픽 메달 후보였던 수영 선수 이케에 리카코가 백혈병 진단을 공개했다.
처음에는 “왜 내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 병을 이겨 내고 2019년 12월 퇴원했다. 그때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했다.
“입원 중 항암 치료로 메스껍고 무기력할 때도 있었지만 ‘괜찮아, 괜찮아. 언젠가 끝나’라며 계속 자신을 격려했습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갑자기 좋아하는 수영장을 떠나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병에 걸렸기에 알게 되고 생각하며 배운 것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녀는 앞에 나타난 벽을 어려움이 아니라 은혜라고 생각했다. 험한 길을 열며 많은 것을 배웠고, 생각을 바꾸어 자신을 구했다.
앞으로 파리 올림픽 출전과 메달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큰 어려움을 극복해 인간으로서 훨씬 성장한 만큼 자신의 꿈과 목표를 이룰 것이다.
“탐험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겁쟁이인 것입니다.”
우에무라 나오미
모험가
진정한 모험가는 자연의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어릴 때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영화 속 타잔이었다. 대자연에서 생물들과 사는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위험한 놀이만 했기에 모험가의 체험기를 읽으면 크게 공감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우에무라가 남긴 말은 모두 의미가 깊다.
탐험가에게 겁쟁이의 자질이 필요하다는 말은 겁보다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자연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 언제나 조심하고 하나씩 신중해야 한다.
그의 신중함을 보여 주는 또 다른 말이 있다.
“아무리 모험을 좋아해도 경험과 기술이 없고 살아 돌아올 가능성도 없는 모험에는 도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험도 용감함도 아니라 무모함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도전이어도 생명을 희생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결과가 같아도 용기와 무모함은 전혀 다르다. 나도 예전부터 “용기와 무모함은 달라”, “무리하는 것은 좋지만 무턱대고 해서는 안 돼”라고 말했다. 대자연은 닥치는 대로 도전해도 통할 만큼 만만하지 않다. 우에무라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이런 말도 남겼다.
“여행을 떠날 때면 어디서 생기는지 모를 불안이 늘 마음속에서 나를 괴롭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투지를 끌어올리고 온몸을 다잡아도 막연한 불안이 가끔 마음을 스칩니다. 이것을 떨치는 방법은 실제로 행동하는 것뿐임을 나는 압니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혹한 환경에서 모험을 반복한 그는 뼛속 깊이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것이다. 정말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모험가에게만 통하지 않는다. 누구의 인생에도 불안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곳에서 멈추면 삶은 나아가지 않는다. 불안해도 한 걸음을 내디뎌야 무언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산에서는 자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사흘 정도라면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야마노이 야스시
등산가
목숨을 걸기에 보이는 세계가 있다
2002년 히말라야 갸충캉 등정을 노리던 야마노이 야스시·다에코 부부는 눈사태에 휘말려 심한 동상으로 손발가락 열 개를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부부를 알게 된 사람도 많겠지만, 야스시는 1990년대에 단독 무산소 등정을 많이 성공시켜 세계 최강의 등반가라 불렸다.
큰 부상 뒤에도 두 사람은 등산을 계속했다. 대자연의 경이에 매료된 삶에 나도 크게 공감한다.
그의 말은 몸이 각성 상태가 되면 평소에는 없는 힘이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나도 대타 시절 큰 승부 전이면 식욕과 수면욕이 사라져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그러면 의식이 점차 깨어나 실전에서도 이삼 일 계속되는 승부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두 사람은 지금도 대자연에 계속 도전한다. 위험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다. 나도 어릴 때부터 떨어지면 죽을 높이에 매달리고 육교 아래를 손만으로 건너는 등 위험한 놀이만 되풀이했다.
위험한 일을 하면 더 위험한 일을 하고 싶어진다. 초등학생 때 학교 계단 위층에서 중간참까지 단숨에 뛰어내리는 일을 반복하다 싫증이 났다. 그래서 중간참 바로 전의 계단에 착지하기로 했다. 계단 폭은 좁고 위에서는 마지막 칸이 보이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길이 험할수록 보람을 느끼며 장애가 늘수록 “좋아, 해 보자”는 마음이 커진다.
그 좁은 칸에 착지하기는 매우 어려워 두 번에 한 번은 발목을 삐었다. 그러면 “좋아, 이 상태로 다시 해 보자”며 더 흥분했다. 삔 곳을 또 삐고 심할 때는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지금도 도전하는 부부의 마음을 아플 만큼 이해한다.
그들이 계속 도전하는 것은 부와 명예 때문이 아니다. 위험에 들어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넘으면 다음 미지의 세계를 보고 싶어진다. 목숨을 걸기에 보이는 풍경, 선택된 사람만 볼 수 있는 세계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
맺음말
2019년 일본 럭비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는 크게 활약해 처음으로 8강에 올랐다.
각국 대표는 경기뿐 아니라 경기 뒤에도 마음에 남는 말을 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승 뒤 남아프리카공화국 라시 에라스무스 감독의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정치적인 문제뿐 아니라 살인 사건도 있습니다. 하지만 럭비를 하는 80분만큼은 ‘국민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해 왔습니다.”
남아공 최초의 흑인 주장 시야 콜리시의 말도 깊이 울렸다.
“어떻게 해서든 우승하고 싶었습니다.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타운십에 사는 사람들, 불법 술집과 클럽에서 마시는 사람들, 노숙자들, 모든 지역의 사람들,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아공의 흑인은 과거 극심한 차별에 시달렸고 지금도 차별과 빈곤으로 신음하는 사람이 많다. 이 말은 시선이 한없이 낮고 가난한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라고 태연히 떠드는 사람은 전혀 믿지 않지만,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나는 조금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선수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보다 많이 빼앗는 것을 유능하다고 여기고, 많은 사람이 남보다 앞서려고 혈안이 된다. 빼앗기 경쟁은 착취하는 쪽과 당하는 쪽이 있어야 성립한다. 현대사회는 날마다 희생자를 만들어 내는 사회다.
세계를 보면 선진국이 여전히 개발도상국을 착취하며 번영한다. 그 뒤에서 남아공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빈곤에 시달린다.
경제와 스포츠 모두 빼앗기 싸움이 된 지금, 올림픽이 진정한 평화의 제전이 되려면 먼저 선진국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정상급 선수들이 적은 적이 아니라 자신을 성장시키는 소중한 존재라고 깨달을 때 스포츠계 전체도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모든 것이 상업주의에 물든 현실에서 내 말이 실현되기는 어렵다. 그래도 한 사람씩 조금만 의식을 바꾸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2019년 럭비 월드컵은 스포츠에 그런 숨은 힘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2020년 4월
사쿠라이 쇼이치
저자 소개
사쿠라이 쇼이치
도쿄 출생. 쇼와 30년대부터 마작 뒷세계에서 승부사로서 재능을 드러냈다. ‘대타 기사’로 20년 무패의 전설을 세워 ‘작귀’라 불렸다. 현역 은퇴 뒤에는 마작을 통한 인간 형성을 목적으로 작귀회를 주재한다. 그의 삶은 많은 책과 극화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저서로 『마작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타법』, 『사람을 꿰뚫어 보는 기술』, 『노력하지 않는 삶』 외 다수가 있다.
『금메달리스트의 조건』 전자책판
2020년 4월 1일 발행
저자 사쿠라이 쇼이치
발행처 다케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