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 짓지 않고 사는 법』
사쿠라이 쇼이치
번역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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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단정적인 어조와 주장은 임의로 완화하거나 덧붙이지 않고 원문 그대로 옮겼다.
===== PDF 1쪽 | 표지 =====
무리 짓지 않고 사는 법
사쿠라이 쇼이치
“고독”이나 “불안” 따위는 신경 쓰지 마라!
작귀류, 강하게 살아가기 위한 49가지 메시지
===== PDF 2쪽 | 속표지 =====
무리 짓지 않고 사는 법
===== PDF 3쪽 | 저작권 안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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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DF 4쪽 =====
이 작품은 이 문고판을 위해 새로 쓴 글입니다.
===== PDF 5쪽 | 머리말 =====
머리말
나는 고독을 몹시 싫어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혼자 있어 봐야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친구들과 함께 놀았다. 나는 언제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작귀회’라는 마작 도장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도장생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넘친다. 밝은 녀석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녀석도 있고, 생각이 유연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고집스러운 녀석도 있다. 성실한 녀석도 있고 불량한 녀석도 있다. 그러나 여러 부류의 사람이 모여 있기에 날마다 새로운 발견이 생긴다. 나는 그런 하루하루가 즐거워 견딜 수가 없다.
그런 환경에서 지낸 덕분에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고맙게도 고독과는 인연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처럼 나는 늘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과 ‘무리 지어’ 다녔다는 뜻은 아니다.
약육강식의 자연계에서 먹이사슬의 밑바닥에 놓인 약한 생물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무리를 이룬다.
아득한 옛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았던 인류의 조상도 무리를 이루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자연계에서 인간은 결코 강한 존재가 아니다.
이처럼 인간의 유전자에는 태고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무리 짓기’의 본능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현대인이 무리를 짓는 까닭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자기 몸을 지키고 생명의 불씨를 이어 가려고 무리 지었던 옛 인류의 그것과는 너무나 멀어졌다.
이 책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현대인의 ‘무리 짓기’는 무언가에 빌붙거나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한 경우가 많다. 자연계 생물이 지닌 본능적인 무리와 비교하면 상당히 이질적인 행동이다.
약한 사람 하나를 표적으로 삼아 떼로 괴롭히는 자들이나, 아첨하며 금붕어 똥처럼 상사를 졸졸 따라다니는 회사원들이나, 현대인 특유의 방식으로 무리 짓는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왜 그런 식으로 무리를 짓는가.
마음이 약해서 생기는 고독과 불안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무리 짓기’는 생명과 맞닿은 곳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행동이 아니다. 모두 욕망과 이해관계, 체면 같은 것에서 비롯된다.
===== PDF 6쪽 =====
욕망과 불안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욕망이 커지면 불안도 그만큼 커진다.
이해관계와 체면에 사로잡히면 집단 안에서 튀는 존재가 되거나 집단 밖으로 밀려나는 일, 다시 말해 고독해지는 일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된다.
내가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온 것은 고독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세상의 상식이나 사회 통념과 되도록 거리를 두고 살았기에 집단에서 벗어나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놓여도 내 안의 고독이나 불안이 필요 이상으로 커지는 일은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서도 아니고, 인간적으로 강해서도 아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다.
“세상이 어떻든 자연의 흐름을 느끼며 본능에 따라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고독사, 고립사, 무연사회처럼 요즘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은 하나같이 차갑고 쓸쓸하다. 무리 속에 있으면서도 늘 고독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틀림없이 많을 것이다. 고독과 고립을 뜻하는 ‘고(孤)’는 앞으로 지금보다 확실히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는 지금보다 약한 사람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무리’는 사람의 마음에 고독을 안겨 줄 뿐, 평안을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孤)’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고독에서 비롯되는 불안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무리 짓지 않고 살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에서는 여러분의 고민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이 문제들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 PDF 7쪽 | 목차 =====
목차
머리말
제1장 인생은 고독에서 배워라
- 이제부터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라
- 전파로 통하지 마라. 살아 있는 몸으로 통해라
- 모르는 것은 억지로 알려 하지 않아도 된다
- 승리의 90퍼센트는 주위 사람들이 제풀에 무너진 결과다
-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으니 언제나 혼자가 된다
-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보다 폐를 끼치는 ‘적당한 온도’를 알아라
- 회사 생활 안에서만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 일체감은 머리가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것이다
- 그 사람은 배신한 것이 아니다. 그저 변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라
- 어설픈 신념이나 자존심을 품으니 일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 결국 인간은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다
- 자기만의 생각을 확실히 지니고, 최소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은 끝까지 지켜라
제2장 고립을 통해 인간을 알다
- 외로운 사람끼리 무리 지을 바에는 차라리 고독하게 지내라
- 부모와 자식 사이의 심리적 연결을 끊으면 고독은 이윽고 고립으로 변한다
- 결혼하면 터무니없이 고생할 것 같은 상대를 골라라
- 친구 관계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는 것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과 같다
- 편리함만 좇지 말고 사람과의 접촉을 소중히 여겨라
- 세상이 가리키는 ‘돌’에 현혹되지 마라
- 남자에게는 남자의, 여자에게는 여자의 영역이 있다
- 자기 인생을 납득하고 싶다면 한 번쯤 ‘독단’을 내려 보라
- 꺼리는 것과 마주하면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다
- 사람을 손쉽게 구할 방법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라
제3장 작귀류 - 불안을 엷게 만드는 법
- 시선을 ‘약한 것’과 ‘작은 것’으로 돌려라
===== PDF 8쪽 | 목차 계속 =====
- 사회를 수평선 위에서 바라보면 주위가 다르게 보인다
- 무언가를 믿고 기대기 때문에 괴로워지고, 심지어 병까지 든다
-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그런 건 알 바 아니다
- 어디에 있든 자신의 전부를 팔아넘기지 마라.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지녀라
- 사랑 같은 것조차 믿어 버리니 인간으로서 외로워지는 것이다
- 편의나 손익 계산을 기준으로 무언가를 고르지 마라
-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존재감은 분명히 있다
- 막다른 상황을 겪으면 ‘진짜 나’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 늘 솔직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틀 밖으로 벗어나도 아무 문제가 없다
제4장 더 편하게 살 수 있다
- 선택지를 줄이면 보이는 것이 있다
- 절친한 친구를 억지로 만들면 괴로운 것은 결국 자신뿐이다
- 싫은 일이 생기면 그와 정반대되는 일을 해 보라
-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자신을 계속 바꾸어라
- 기분이 좋을 때 아이를 꾸짖어라
- 은둔형 외톨이와 니트가 ‘우리보다 더 정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
- 어설프게 가치관을 품지 않으면 일조차 즐거워진다
- 인생은 숫자와 결과가 전부가 아니다
- 긴장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압박을 ‘보람’으로 바꿀 수 있느냐에 달렸다
- ‘이건 싫다’고 느끼는 일부터 얼른 처리하는 습관을 들여라
제5장 자연이 당신을 이끌어 준다
- 요즘 직장인은 똥에 달라붙는 파리와 같다
- 주어진 삶을 버리고 스스로 만들어 내겠다는 의식을 지녀라
-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강인하게 살 수 있다
- 커지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라
- 지금 일본이 곤경에 처한 것은 우리가 뿌린 씨앗 때문임을 알아라
- 인간의 공격성을 인정한 뒤 ‘괴롭힘’이 ‘장난 섞인 관심’이 되도록 의식을 바꾸어라
- ‘멋(粋)’이라는 살아 있는 감각을 되찾아라
맺음말
===== PDF 9쪽 =====
제1장
인생은 고독에서 배워라
===== PDF 10쪽 =====
[고민]
계산적인 인간관계가 지긋지긋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걱정됩니다.
[답]
이제부터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라
대학 시절 마작을 배운 나는 스무 살 무렵부터 마흔 살 무렵까지 약 20년 동안 마작의 뒷세계 프로로 살았다. 권력자들을 대신해 마작을 두는 ‘대타 기사’였다.
대타 기사가 나서는 대국은 동네 마작장에서 벌어지는 마작과 차원이 다르다. 판에 걸리는 돈과 권리는 ‘세상의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것들뿐이었다.
“지면 제거당하겠군.”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승부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런 과거 때문인지 내가 고독 속에서 험난한 싸움을 계속해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즐거운 일’을 찾아 살았다. 그런 나이기에 사실 고독을 몹시 싫어한다. 애초에 인간에게 ‘고독’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까지 생각한다.
지구의 생물 가운데에는 집단으로 사는 것도 있고 홀로 사는 것도 있다. 태고의 인류는 맹수처럼 강하지 않았으므로 어떻게든 집단을 이루어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맹수와 같은 강한 이빨도, 발톱도, 다리 힘도 없었다. 약한 동물이었기에 집단으로 살았다.
그 DNA는 현대인인 우리에게도 착실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고독을 싫어하는 것은 본능에 따른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태고의 사람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대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순한 관계로 집단을 이루었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만들어진 그 옛 ‘무리’는 틀림없이 고독과도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무리’에는 계산은 있어도 본능은 없다. “저 녀석은 이용하기 편하다.” “저 사람은 써먹을 수 있다.” 그런 이해관계만으로 이루어진 무리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본능적인 관계가 부족하다. 그 안에는 목숨을 건 결속력도, 생명을 지켜 내는 끈기도 거의 없다.
바다의 작은 물고기는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떼를 지어 산다.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다가오는 큰 물고기도 잽싸게 피해 간다.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려는 포식자도 먹이가 없으면 죽는다. 그러나 작은 물고기 떼 한가운데로 뛰어들어도 그들은 교묘하게 빠져나갈 뿐이다. 그렇다면 포식자는 어떻게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가.
===== PDF 11쪽 =====
포식자는 물고기 떼를 습격해 사방으로 흩어 놓은 다음,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노린다. 자연계에서 무리를 이루어 사는 생물에게 무리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현대 인간사회의 ‘무리’는 계산만으로 성립한다. 사람은 “여기에 있어 봐야 아무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면 곧 다른 무리로 옮겨 간다.
무리에서 또 다른 무리로. 그런 일만 거듭하면 사람과의 연결이 끊어진다. 설령 어디엔가 속해 있어도 그 사람의 마음은 고독에 지배되고 말 것이다.
계산으로 맺어진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이해관계가 어긋나면 무리는 산산이 흩어지고, 끝내 한 사람 한 사람이 덩그러니 남는다.
계산적인 인간관계에 진저리가 난다면, 당신에게 아직 인간의 ‘본능’이 남아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사회적인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자기 본능이 이끄는 대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무리 짓지 않는 삶이며, 인류가 본디 지니고 있던 ‘무리’의 감각이다.
===== PDF 12쪽 =====
[고민]
휴대전화가 자꾸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습니다.
[답]
전파로 통하지 마라. 살아 있는 몸으로 통해라
디지털이 세상을 휩쓰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아날로그 인간으로 산다. 컴퓨터는 물론이고 휴대전화도 없으며, 다루는 법도 전혀 모른다.
나는 이른바 디지털 기기와 되도록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디지털 기기라는 문명의 이기에 흠뻑 젖어 버리면 내 안의 소중한 감성과 느끼는 힘이 무뎌질 것만 같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기는 분명 편리하다. 그것을 사용해 혜택을 누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편리함에 물드는 동안 인간에게 소중한 것을 잇달아 잃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깨닫지 못한다.
전철을 타면 거의 모든 사람이 문자 메시지라도 보내는지 휴대전화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길을 걸을 때조차 휴대전화를 만지느라 앞도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인간관계가 옅어졌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요즘, 휴대전화에 빠진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늘 ‘누군가와 이어져 있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일 테다. 그래서 답장이 조금만 늦어도 “무슨 일이지?”, “나를 싫어하게 됐나?”, “나만 따돌리는 건 아닐까?” 하며 고독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은 살과 살이 맞닿을 때 비로소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전파’를 통해 이어지려 한다. 그래서는 진정한 인간적 연결을 느낄 수 없다.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 곧 생물이다. 생물은 전파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 당신이 전파 속을 헤매며 고독에 시달린다면, 그 전파와 거리를 두고 ‘자연의 파동’을 느끼면 된다.
‘자연의 파동’이란 자연계가 일으키는 파동과 인간이 일으키는 파동 모두를 뜻한다. 찬란히 쏟아지는 햇빛도,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도 그렇다. 누군가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역시 ‘자연의 파동’이다.
그런 자연의 파동을 몸으로 직접 받아들여라. 그러면 디지털 기기를 쓰느라 굳게 닫힌 당신의 오감도 조금씩 열릴 것이다.
오감이 되살아나면 일상의 미세한 변화도 알아차릴 수 있다. 자연계가 날마다 변하듯 인간의 마음도 끊임없이 변한다.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누군가의 미소에 일어난 미묘한 변화도 분명 알아챌 수 있다.
===== PDF 13쪽 =====
“어라, 평소의 미소와 조금 다른데.”
그렇게 느끼면 상대를 헤아린 행동도 할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배려이며, 거기에서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 생긴다. 전파 속의 배려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디지털 기기에만 의존하면 인간관계는 더욱 희미해질 뿐이다.
휴대전화 가입 회선 수는 2011년에 일본 전체 인구를 넘어섰다고 한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전화 한 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한 사람당 한 대인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의 고독이 가속하듯 깊어진 데에는 디지털 기기의 보급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휴대전화뿐 아니라 인터넷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현실 세계도, 그것을 사용하는 개인의 세계도 아니다. 말하자면 가공의 세계다.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인터넷 사회라는 가공의 세계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려 한다.
앞으로 망상이나 환청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해도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미쳐 망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고, 주위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지금 보는 사람과 사물이 진짜인지 허상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지금 분명히 늘고 있다.
===== PDF 14쪽 =====
[고민]
정보에 어두워 따돌림당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답]
모르는 것은 억지로 알려 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의 사회에는 괴롭힘과 따돌림이 으레 따라다닌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나는 고독을 거의 느껴 본 적이 없다.
일부러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 주위에 친구들이 모였다. 내가 친구들의 원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어느새 내 주위에 원이 생겼고, 정신을 차리면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다.
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판단 기준은 간단했다. ‘재미있는가, 재미없는가.’ 그 두 가지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친구들 한가운데 있었지만 모두를 즐겁게 해 주려고 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즐겁게 앞장서 나가니 친구들이 “쇼짱은 뭘 저렇게 재미있어 하지?” 하며 모여든 것이다.
주위에 사람이 모여도 내가 그대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그립거나 외로웠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재미있고 즐거운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원의 중심에 있었을 뿐이다.
지금도 나는 재미있고 즐거운 일을 늘 찾아다닌다. 그러다 주위 사람들이 함께 웃어 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도 웃고 모두도 웃으면 그 안에 기쁨과 감동을 비롯한 여러 감정이 들어온다. 그것이 또 즐겁다.
나를 둘러싼 동료들과의 일체감은 공감에서 시작해 공명하면서 퍼져 나간다.
결국 동료 의식은 공감과 공명에서 생긴다. 그런 것이 없다면 아무리 새로운 정보를 쥐고 있어도 독선적인 고독의 세계에 빠지고 만다.
전에 아는 사람이 내게 “사쿠라이 회장님은 고독하시군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고독? 지금까지 별로 느껴 본 적이 없는데”라고 대답했다. 다만 요즘은 고독까지는 아니어도 조금은 쓸쓸한 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천 명이 “저쪽이다”라고 말해도 나 혼자 다른 쪽을 바라본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이다. 세상과 다른 시점과 시야를 가짐으로써 나만의 길을 재미있게 개척해 온 면도 있다.
예전에는 주위 사람이 보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일이 즐거웠다. 나는 그런 능력이 원시적인 동물의 능력과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재미와 즐거움보다 “뭐야, 나만 혼자인가? 다른 사람들은 왜 느끼지 못하지?” 하는 한 줄기 쓸쓸함을 느낀다.
===== PDF 15쪽 =====
결국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 같은 감각을 지닌 사람이 주위에 거의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인다’는 말은 한 걸음만 잘못 내디디면 망상이나 오컬트가 된다. 무언가를 본 사람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이 현대 사회다.
예술가나 음악가 중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엿보거나 들리지 않는 소리를 느끼는 능력을 높이겠다며 약물을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는 약물에 의존한 적도 없고,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앞에서 말했듯 그것은 그저 자연과 함께 산다는 감각을 지니다 보니 어느새 몸에 밴 능력이다. 자연계에서 사는 동물이라면 대부분 지니고 있을 능력이다. 야생동물을 생각하면 알 수 있듯, 동물에게는 살아가기 위해 민감해야 할 대상과 전혀 의식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 뚜렷이 나뉘어 있다. 모든 것에 민감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현대인이라는 생물만 온갖 정보에 민감한 것을 고맙게 여기며 그것을 좇는다.
“모르는 것은 몰라도 된다.”
당신이 꼭 이 감각을 지녔으면 한다.
===== PDF 16쪽 =====
[고민]
승부에 강해지려면 고독해야 합니까?
[답]
승리의 90퍼센트는 주위 사람들이 제풀에 무너진 결과다
승부는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것이다. 승부 중에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릴 수 없다. 그렇게 보면 나도 대타 기사 시절에 홀로 승부했지만, 내가 고독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다만 내가 걸은 마작의 길에는 선인이 없었다. 장기나 바둑의 세계에는 수많은 선인이 있어 그들에게서 자기 나름의 걷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본보기로 삼을 사람이 없었다. 혼자 힘으로 내 길을 개척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내 삶이 고독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독감이나 불안에 시달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아무도 걷지 않은 황야를 개척하는 일이 즐거웠다. “오, 이 길은 아무도 걷지 않았군” 하며 재미있어하기까지 했다.
내 대타 기사 시절을 두고 ‘고고한 승부사’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혼자 싸우니 고독하다’는 해석은 너무 안이하다. 그런 사람은 적과 아군의 울타리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일체감’을 모르는 것이리라.
승부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 승부에서 이겼다고 반드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승자가 느끼는 아픔’도 있다. 스모에서도 이긴 선수가 다치는 장면을 흔히 본다. 이겼다고 해서 상처 하나 없는 것은 아니다. 패자에게는 패자의 아픔이 있고 승자에게도 승자의 아픔이 있다.
내가 ‘승자가 느끼는 아픔’을 알게 된 것은 대타 기사가 된 뒤 얼마간 시간이 흐른 서른 살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강함’만을 좇아 승부를 계속했다. 대타 기사가 나서는 대국에는 동네 마작장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강자들이 모였다. 나는 그런 맹자들과 싸우는 일을 괴물 퇴치라도 하듯 즐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가 계속해 온 싸움에 위화감을 느꼈다. 승리한 뒤 맛보던 ‘강적을 쓰러뜨린 기쁨’은 차츰 작아지고, 그보다 ‘패자의 고독과 슬픔’에 눈이 갔다.
승리를 거듭할수록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강해졌다.
“나는 남을 아프게 해 놓고 기뻐하는 것인가?”
===== PDF 17쪽 =====
“다른 형태의 승부도 있지 않을까?”
“이기고 지는 것만이 아닌 삶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날마다 커졌다. 마흔 살 무렵 나는 대타 기사에서 은퇴했다. 승패를 넘어선 ‘승부’를 찾기 위해 작귀회를 세웠다.
이야기를 조금 바꾸겠다. 장기계에서 활약하는 하부 요시하루 명인과는 대담집을 함께 낸 뒤로 교류하고 있다.
그와 이야기하다가 “제 장기는 ‘타력본원’입니다”라는 취지의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 하부 명인도 승부사의 슬픔을 아는구나”라고 느꼈다.
하부 명인이 어떤 의도로 ‘타력본원’이라는 말을 썼는지 그 참뜻은 나도 모른다. 다만 나 역시 대타 기사 시절에 “내가 강한 것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이 제풀에 무너질 뿐이다”라고 늘 느꼈다.
내가 자주 하는 “패배의 90퍼센트는 자멸이다”라는 말은 그런 경험에서 태어났다. 진정한 승부사는 패자의 고독과 슬픔을 아는 사람이다.
===== PDF 18쪽 =====
[고민]
누구와 어디에 있어도 고독을 느낍니다.
[답]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으니 언제나 혼자가 된다
러시아 민화 『바보 이반』에서는 어리석은 농부 이반이 여러 사람에게 속아 넘어갈 뻔하지만, 결국 정직하고 소박한 이반이 가장 행복해진다.
인간에게는 뒷면과 앞면이 있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앞과 뒤를 모두 드러내며 살면 된다. 그런데 사람은 어째서인지 자기 뒷면을 감추려 한다.
겉을 쓸데없는 지식과 기술로 뒤덮어 속을 감추고, 이반을 속이려 한 사람들처럼 영리한 체한다.
영리한 체하다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잃은 사람은 이윽고 ‘불안’에 사로잡힌다. 불안하니 또다시 쓸데없는 지식과 기술을 익히며 ‘불안의 수렁’에 빠진다. 그리고 슬프게도 메워지지 않는 불안을 채우려고 손쉽게 비슷한 사람끼리 무리를 짓는다.
앞과 뒤를 모두 보여 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면 그런 불안과 인연 없이 지낼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살기 어렵게 만든다.
자기 삶이 버겁게 느껴진다면 오늘부터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아가면 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주 간단하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자신에게서 솔직함이라는 향기를 풍기면 스스로도 기분이 좋고, 그 향기를 맡은 좋은 동료도 모여든다. 당연히 아무 의미 없이 무리 지을 일도 사라질 것이다.
사람에게 앞과 뒤가 있듯 비뚤어진 부분도 있고 솔직한 부분도 있다. 비뚤어진 부분을 떼어 내고 되도록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면 적어도 지금보다 훨씬 편하게 살 수 있다.
“어디에 있어도 외톨이다.”
그런 어둠과 고독감으로 괴로운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져라. 그런 다음 주위 사람이 기뻐할 일을 하나라도 더 하라.
혼자가 되는 사람은 대개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아’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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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없앨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외톨이’가 된다.
자아를 지니되 그 안에 ‘타인’을 조금씩 들이고, 타인을 의식하라. 그러면 외톨이의 쓸쓸함도 조금씩 엷어진다.
내성적이고 말주변이 없는 사람은 주위에서 어둡게 보기 쉬우므로 집단 안에서 튀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지구의 생물은 태양의 움직임에 맞추어 산다. 야행성 생물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생물은 태양의 밝음을 누리며 ‘생명’을 이어 간다.
인간도 당연히 지구에서 사는 생물의 한 종류이며 밝음을 찾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본래 ‘어둠’을 찾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주위가 밝으면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그러지 못한다. 이 자연의 섭리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사람’도 어둡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니 더욱 어두워진다. 어두워지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어둡다는 말을 들어도 괜찮습니다. 나는 혼자가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으로서 비뚤어진 생각이며, ‘나만 좋으면 된다’는 자아가 강하게 느껴진다.
‘밝아지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먼저 마음이 향하는 대로 움직여 보라. 그렇게 움직이면 주위가 차츰 밝아지고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일 것이다. 그러면 움직이는 범위도 더욱 넓어진다. 자기 마음에 솔직하게 움직이는 것만이 ‘어둠’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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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부주의해서 늘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칩니다.
[답]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보다 폐를 끼치는 ‘적당한 온도’를 알아라
사람이 고독해지는 까닭은 스스로 혼자만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집단의 원에서 벗어나 외톨이가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지나치게 강해도 고독해진다.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해도 좋지만 남에게만은 폐를 끼치지 마라”라고 가르치곤 한다. 생각해 보면 그 말도 고독을 부추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산다는 것은 반드시 무언가에 폐를 끼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 세상에서 사는 한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다. “나는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잘 생각해 보라. 인간은 자연의 혜택을 받아 살아가므로 그것만으로 이미 자연에 폐를 끼치고 있다.
그렇다고 인간은 어차피 폐를 끼치는 존재이니 “민폐를 좀 끼쳐도 어쩔 수 없지”라고 뻔뻔하게 굴라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만큼 폐를 끼치고 있다’는 정도를 아는 일이다.
거리낌 없이 남에게 폐를 끼치면 그저 ‘민폐’나 ‘몰상식’이 된다. 반대로 “절대로 폐를 끼치지 않겠다”며 남과의 관계를 끊으면 차가운 사람이 되어 혼자 남는다.
“내가 너무 뜨거워진 것은 아닐까? 너무 차가워진 것은 아닐까?” 하고 스스로 ‘민폐의 물 온도’를 살피며 조절하라. 그 균형이 중요하다.
나도 지금까지 여러 사람과 존재에게 폐를 끼쳤다. 그러나 그 경험을 통해 살아가는 데 소중한 것을 배웠다. 학교에서는 지식을 배울 수 있지만 삶에 중요한 것은 그다지 배우지 못한다. 인생의 교훈은 ‘폐를 끼치는 일’을 통해 비로소 깨닫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내 아이에게도 도장생에게도 “남에게 폐 끼치지 마라”라고 말한 적이 없다. 애초에 주위가 폐를 전혀 끼치지 않는 사람뿐이라면 조금도 재미있지 않다.
얼마 전 손주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 부모에게 꾸중을 듣고 풀이 죽어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큰 폐를 끼친 적도 있어. 그것에 비하면 별일 아니야”라고 말해 주었다. 폐를 끼치고도 모르는 체한다면 주의를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가 스스로 ‘잘못했구나’라고 느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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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고령화가 진행되는 일본에서는 ‘고독사’가 문제로 떠올랐다. 이 고독사의 이면에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차가운 감각이 어딘가 작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고독’을 느끼는 것은 노인만이 아니다. 맞벌이 부부가 늘어난 지금은 아이들도 ‘고독’을 품고 산다.
고독이 또 다른 고독을 낳는 악순환 속에서 많은 사람이 고독에 익숙해지고 있다. 고독한 사람이 늘면 사회 전체가 어둡고 차가워진다.
부모가 아이에게 게임기를 사 준들 그것은 아이의 쓸쓸함을 잠시 잊게 할 뿐,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차가운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들은 걸핏하면 무리 지으려 하고 차가운 감각으로 사물을 판단한다. 남을 끌어내리고 발목을 잡는 일은 해도,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던 따뜻함인 ‘서로 양보하는 마음’과 ‘서로 돕는 마음’은 그곳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차가운 사회는 ‘고독사’뿐 아니라 ‘고독한 아이’도 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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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날마다 그저 떠밀려 갈 뿐이라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답]
회사 생활 안에서만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멋을 부리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내 길을 걷기 위해 태어났다. 남이 걸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과 상식, 유행에 휩쓸리며 자신을 하나씩 잃어 간다.
나는 주위 사람들처럼 나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사회적 성공 따위는 내게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인간적으로 성장하느냐를 논하기 전에, 자기를 잃은 채 사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회사원처럼 세상의 흐름에 휩쓸린 사람은 자신이 그 흐름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떠밀려 가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 깨닫지 못한다.
나는 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난 곳에 있으므로 그 흐름이 어떤 모습인지 잘 보인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이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그거 이상하지 않아?”라고 알아차릴 수 있다.
여럿이 함께 무언가를 할 때, 이를테면 작귀회에서 단체로 활동할 때에도 나는 집단 속에 있으면서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지닌다.
단체로 활동할 때 가끔 “일체감을 가져라”라고 말하지만, 늘 일체감을 지닐 필요는 없다. ‘화합’을 지나치게 중시해 ‘전체’만 바라보면 결국 ‘개인’인 자신을 잃는다.
무엇에든 사로잡히는 것은 좋지 않다. 사로잡히기 때문에 고정관념이 생기고, 사람에게서 유연함이 차츰 사라진다.
그러므로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에도 의문을 품는 일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한 ‘일체감’ 역시 그것 하나에만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하나가 될 때의 기쁨은 나도 안다. 하지만 개인으로서 뿔뿔이 흩어지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전체를 지나치게 의식하면 ‘개인’이라는 감각이 엷어지고, 무리에서 벗어나는 데 대한 현대인 특유의 두려움만 마음을 지배한다. 개인의 감각이 엷어진다는 것은 하나의 맛을 죽이는 일이다. 개성은 사람의 맛이다. 여러 맛이 겹겹이 포개질수록 일체감의 맛도 더욱 깊어진다.
질문에 나온 ‘그저 떠밀려 갈 뿐’이라는 느낌은 바로 개인의 감각을 잃어버린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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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서도 단체 경기는 ‘팀워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팀워크는 중요하며 단체로 활동하다 보면 자신을 희생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팀을 위해서”라며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일체감을 우선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는 자신을 잃고, 개인의 ‘맛’도 나오지 않는다.
평소에는 제각기 움직이다가 일체감이 필요할 때 모이면 된다. 여러 맛이 섞이면 집단이 되었을 때 재미있는 맛이 난다. 작귀회도 평소에는 제각각이지만 일체감이 필요할 때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모두 함께 움직인다. 도장생은 저마다 여러 맛을 지니고 있어 모일 때마다 다른 맛을 낸다. 나는 그것이 재미있어 견딜 수 없다.
일체감만으로도 안 되고, 개인만으로도 안 된다.
개인의 맛은 달리 말하면 개인의 ‘빛깔’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일체감은 “개인의 빛깔을 지우고 전체의 색에 맞추어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다채롭기 때문에 여러 맛이 생기는데, 단색으로 만들면 아무 맛도 냄새도 없는 음식을 먹는 듯 심심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맛과 색이 있다. 그 사실을 이해하면 사회는 더욱 재미있는 곳이 되고, 시시한 차별과 괴롭힘도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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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어디에서도 일체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답]
일체감은 머리가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것이다
내 대타 기사 시절을 그린 영화와 만화를 보고 사쿠라이 쇼이치를 외로운 늑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분명 외로운 늑대처럼 살던 순간도 있었겠지만, 내 인생 전부가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에는 외로운 늑대였을지도 모르고, 또 어느 순간에는 양처럼 무리 지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상황에 따라 늑대와 양을 오가는 면이 있다. 계속 늑대인 것도, 언제나 양처럼 무리 지어 있는 것도 아니다. 작귀회의 활동도 똑같다. 도장생이 각자 움직일 때도 있고, 모두가 일체감을 가지고 함께 움직일 때도 있다.
나는 작귀회에서 “고독은 나쁘다. 언제나 일체감을 지녀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을 굳히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각자가 고독과 일체감 사이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움직인다. 거기에서 즐거운 일만 생기는 것은 물론 아니다. 슬픈 일과 괴로운 일도 많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배움이 된다.
집단의 인원이 많을수록 의사를 하나로 모으고 일체감을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도장에서도 일체감을 가져야 할 때 그 흐름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반드시 한두 명은 나온다.
반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일체감을 맞추겠다며 몸이 좋지 않은데도 자기 상태를 뛰어넘어 하나가 되려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나는 늘 “무리하면서까지 일체감을 가지려 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일체감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사소한 일에도 남에게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오히려 고독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일 년 내내 고독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필요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일체감에 맞추는 사람도 있다. 작귀회 도장뿐 아니라 일반 회사와 학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적당히’라는 감각을 조금 더 지녀야 한다.
다만 앞의 사람처럼 주위와 거리를 두고 한결같이 고립되어 있는 이는 성장 환경 속에서 고독의 정도가 깊어진 유형일 것이다.
속마음을 억누르고 겉치레로만 살아온 사람은 대개 고독해지기 쉽다. 부모에게 맞추고 교사에게 맞추며 착한 아이를 연기하다 어느새 고독에 빠져,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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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장에도 가끔 그런 식으로 사회의 ‘무리’에서 고립된 젊은이가 찾아온다. ‘찾아온다’기보다 야자 열매가 어느 섬에 떠밀려 오듯 도장으로 흘러든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가정을 꾸려도, 고독해질 사람은 고독해진다.
나는 그런 젊은이에게 “다 함께 하는 즐거움도 있단다” 같은 말을 건네지 않는다. 실제로 집단 한가운데 던져 놓고 가르친다.
그러면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던 사람도 차츰 “아, 동료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피부로 느낀다. 머리가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것. 그것이 동료와의 일체감을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일체감을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자리에서 꾸밈없는 자신이 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체면과 처지, 손해와 이익을 벗어던진 곳에 꾸밈없는 자신이 있다.
그런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가. 고독에서 빠져나올 열쇠는 바로 거기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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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나를 배신한 친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답]
그 사람은 배신한 것이 아니다. 그저 변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라
믿었던 친구가 다른 사람에게 내 험담을 했다. 혹은 사랑하던 연인이 바람을 피웠다. 그럴 때 사람은 ‘배신당했다’고 느낀다. 신뢰와 애정이 깊을수록 더 깊이 낙담한다.
나는 누군가가 배신에 가까운 일을 해도 원망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배신당했을 때의 충격은 시간이 흐르며 희미해지더라도 ‘배신당했다’는 말은 마음속에 계속 남는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서 ‘배신’이라는 말을 없애 버렸다. 그것도 꽤 젊었을 때였다. “누가 나를 배신해도 나는 남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멋 부린 말은 아니다. 그런 말은 너무 듣기 좋고 지나치게 고상하다.
내가 누군가를 배신하는 ‘배신’도, 누군가가 나를 배신하는 ‘배신’도 모두 내 안에서 지웠다.
그런 생각으로 살면 ‘배신’은 삶에서 배우는 일 하나가 된다.
‘배신’이라는 말을 내 안에서 지우고 나면 누군가에게 배신당했을 때 전과 다른 감각이 생긴다.
“그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가 아니라면 어떤 감각인가.
“그 사람도 그저 변했을 뿐이다”라는 감각이다.
끝까지 파고들면 ‘배신’도 인간에게 일어나는 변화 가운데 하나임을 깨닫는다. 지구의 모든 것은 날마다 변한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모습도 변하고 마음도 변한다.
‘배신’은 날마다 이어지는 변화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믿었는데 배신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난다. 그러지 말고 “믿는 것도 80퍼센트 정도로 해 두자”고 생각했다면 마음은 훨씬 편했을 것이다.
지난해의 당신과 올해의 당신이 완전히 똑같은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체형도 피부도 신체 기능도 마음과 정신도 모두 변했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변하면서 누군가가 변했다고 “저 사람은 변했어. 몹쓸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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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지 않은가. 너무 자기 편한 생각 아닌가.
날씨도 하루하루 크게 변한다. 햇볕이 쨍쨍한 날이 있는가 하면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도 있다. 그렇다고 “제기랄, 비가 오다니! 이 빌어먹을 날씨가 나를 배신했어!”라며 화내고 원망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오늘 나가려고 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하며 마음을 바꿀 것이다.
‘배신’도 그 정도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나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나를 배신하지 마세요”라는 고상한 겉치레의 약속으로 억지 관계를 만들려 하기에 필요 이상으로 낙담하는 것이다.
결국 남이 아무리 말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괴로워하는 나를 구해 주는 것은 믿는 친구도, 신뢰하는 가족도, 떠받드는 신도 아니다. 자기 자신이다.
‘배신당했다’가 아니라 ‘그저 변했을 뿐이다’라고 받아들이면 자신이 구원받는다. 다소 아픔이 남을지는 몰라도 ‘배신당했다’고 계속 생각하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고독감 없이 조금이라도 기분 좋게 살려면 마음과 정신에 부담을 주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마음에 무거운 짐을 얹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변하는 존재다”라고 평소부터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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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실연이나 실패를 좀처럼 떨쳐 내지 못합니다.
[답]
어설픈 신념이나 자존심을 품으니 일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도 이 생각에 동의한다. 다만 내 경우에는 오는 사람을 제법 가려 받는다.
고독이 두려워 떠나는 사람을 붙잡는 것은 미련한 사람이 하는 짓이다. 미련을 끌어안고 있으니 마음도 줄곧 그곳에 사로잡힌다. “미련 많은 성격을 좀처럼 고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고민한다면 ‘미련’이 어디서 오는지 뿌리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미련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의 ‘집착’에서 온다. 그리고 집착은 ‘고정관념’에서 생긴다.
고정관념은 인간을 괴롭히는 가장 큰 것이라고 해도 좋다. 세상이 상식이라 하는 것,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모두가 인간의 고정관념을 만든다.
하지만 고정관념은 부모와 형제, 학교의 영향을 받으며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성가시다. 고정관념을 아예 갖지 않을 수는 없어도 그것이 강해지지 않도록 할 수는 있다.
고정관념을 키우지 않으려면 언제나 “내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하고 자신에게 묻는 일이 중요하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찰 것이다. 바로 그때 “내가 지금 화나는 것은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라고 물어보라.
절친한 친구에게 배신당해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는 까닭은 당신 안에 ‘절친한 친구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 존재’라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배신을 ‘배신’이라고 여기니 피해자가 된 듯한 감각에 빠진다. ‘인간은 변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마음의 상처도 옅게 남는다.
고정관념을 누그러뜨리려면 ‘나는 피해자’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에게 싫은 일을 당해도 “나에게도 저 사람과 같은 면이 있지 않을까?”라고 자신에게 묻는 것이 중요하다. 고정관념을 누그러뜨리는 생각을 계속 지니면 내 안의 집착에도 쉽게 제동을 걸 수 있다.
“신념을 품고 살아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신념 때문에 고정관념이 생기고, 그 결과 집착이 강한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신념 따위가 통하는 경우는 만에 하나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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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집착, 신념과 미련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멋있게 ‘신념’이라고 부르지만 뚜껑을 열어 보면 그 안에 집착과 미련이 가득하지 않은가.
홋카이도 히쓰지가오카 전망대의 클라크 박사 동상은 관광 명소로도 친숙하다. 동상 받침대에는 박사가 남긴 유명한 말 “소년이여, 야망을 품어라”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내게 이 말은 그저 ‘신념’으로 느껴진다. 오히려 나는 “야망 따위를 품으니 인간이 망가지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국정을 맡은 정치가들도 처음 선거에 나섰을 때는 저마다 “나라를 좋게 만들겠다”, “이 도시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큰 뜻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선, 삼선에 성공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굳이 내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정치가는 돈과 이권에 집착하고 기득권을 고집한다. 국민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채 날마다 정국이라는 소극을 벌인다.
큰 뜻, 꿈, 희망. 나는 귀에 듣기 좋은 그런 말을 하나도 믿지 않는다. 시야는 넓혀도 좋지만 큰 뜻과 꿈과 희망을 부풀려서는 안 된다.
집착의 근원이 되는 고정관념은 세상의 상식이 만든다. 세상의 상식은 좋아 보이는 모습과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사람에게 슬며시 다가온다. 그런 거짓투성이의 아름다운 말에 속지 않도록 저마다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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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부부 관계가 식어 버려 혼자가 되고 싶습니다.
[답]
결국 인간은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다
‘고독’의 ‘고(孤)’라는 글자에서는 외톨이가 된 듯한 서글픈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독(独)’에서는 ‘고’만큼 쓸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홀로 있으면서도 어떤 강인함과 적극성을 품은 듯하다.
‘독’이 들어간 말에는 독자(独自), 독학(独学), 독립독보(独立独歩)처럼 ‘혼자 힘으로 살아가겠다’는 적극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 많다.
‘독’이 들어가는 말에 ‘독력(独力)’, 곧 혼자 힘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에서도 혼자 살아가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인간은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폐를 끼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산다고 생각해도 누군가와 무언가에 의지하는 부분이 반드시 조금은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냈다”는 말은 몹시 오만한 생각이다. 나 역시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지만 남과 자연에 폐를 끼치며 살았다.
남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없는 나도 “이건 좀 무겁네”라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때가 있다. 나는 페트병 뚜껑을 잘 열지 못해서 “이것 좀 열어 줄래?”라고 부탁하곤 한다. 그러니 내 인생을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작귀회 도장생들과 어울리다 무언가 알아차리면 “이렇게 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라고 조언한다.
24년 전 작귀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내 안에 ‘내가 가르쳐 주고 있다’는 의식이 적잖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있구나.”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받고’ 있었다. 지금도 도장생과 가족, 손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온갖 것을 받기만 한다.
그래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세상에 나처럼 호강하는 노숙자도 없겠지” 하고 새삼 느낀다.
지금 내 안에서는 내가 주는 것이 20퍼센트, 받는 것이 80퍼센트쯤 된다. 이 생명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받은 것이다. 모든 것을 ‘받은 것, 얻은 것’이라고 여기면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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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는 감사의 마음이 있으면 배가 80퍼센트쯤 찬 듯한 감각, 곧 “지금 상태로도 충분합니다”라는 만족감이 생긴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는 손익을 따져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무슨 일을 해도 ‘해 준다’는 태도를 보인다.
게다가 “해 줬으니 그만큼 돌려줘”라며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사업에서만 대가를 바란다면 그나마 모르겠지만, 이제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내놓아라”라는 등가 관계가 평범한 가정에까지 파고들었다.
부부가 서로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 “육아를 하지 않는다”고 반발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마음 한구석에 ‘해 주고 있다’는 감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고맙다”는 말이 없는 가정만큼 쓸쓸한 곳도 없다.
“상대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다”, “상대를 즐겁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해 주고 있다’가 아니라 ‘한다’는 자발적인 감각이 생긴다.
부부가 그런 감각을 조금씩만 나누어도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싹튼다. 그러면 ‘해 주고 있다’는 차가운 관계에서 ‘한다’는 따뜻한 관계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 PDF 32쪽 =====
[고민]
더러운 방식으로 계속 돈을 버는 회사에서 일하기가 지긋지긋합니다.
[답]
자기만의 생각을 확실히 지니고, 최소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은 끝까지 지켜라
옛날에는 도박을 ‘도(徒, 이타즈라)’라고 불렀다. 도박을 일삼거나 도박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을 ‘박도(博徒)’라고 부르는 것도 이 ‘도(徒)’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도(徒)’는 ‘아다(あだ)’라고도 읽는다. ‘아다’는 무익한 모습, 허술한 모습, 한때뿐이라 덧없는 모습을 뜻한다. 도박은 그야말로 ‘아다’이며 ‘장난(いたずら)’이다.
‘이타즈라’는 한자로 ‘악희(悪戯)’라고도 쓴다. 도박을 나타내는 데 ‘도(徒)’만큼 어울리는 한 글자도 없을 것이다.
물론 나도 마작의 뒷세계 프로로 대타 기사를 하던 때가 있으니 ‘도박꾼’ 가운데 하나였음은 틀림없다.
대타 기사를 하던 시절 나는 평소 신주쿠의 마작장에서 마작을 두었다. 보통 사람과도 자주 쳤지만 겉으로는 번듯한 얼굴을 하고 뒤로는 못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상대하는 일이 많았다.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거드름을 피우는 자, 약한 사람을 속여 돈을 버는 자. 그런 자들이 내 표적이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이나 정의를 전혀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것을 휘두르며 거들먹거리는 자를 보면 가면을 벗겨 주고 싶어진다.
나는 겉은 번듯하지만 실제로는 나쁜 자들에게 ‘장난’을 거는 감각으로 마작을 두었다. 그들에게 악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혼내 주기 위해 장난을 친 것이다.
번듯한 얼굴을 한 자들은 약자를 발판으로 삼아 사회에서 득세한다. 마작장에도 속임수를 써 약자에게 돈을 빼앗는 가짜 강자가 많았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보면 돕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나쁜 줄 알면서 약자를 괴롭히는 인간을 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가짜 강자는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상대만 고른다. 악의를 품고 약자를 학대하는 짓은 사람의 도리에서 크게 벗어난다.
안타깝게도 ‘누구보다 많이 차지한 사람이 이기는’ 경제 사회에서는 승리하려고 필요 이상의 것을 빼앗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눈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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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마작장에서 그런 가짜 강자를 보면 초보자 같은 얼굴로 다가가 ‘장난’을 걸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져 준다. 그러면 상대는 우쭐해져 판돈을 계속 올린다. 판돈이 제법 커졌을 때 나는 단숨에 공세를 펼친다.
마작을 두며 “약자에게는 그 수법이 통할지 몰라도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라고 가짜 강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때는 그런 짓만 했으니 주위가 온통 적이었다. 위험한 일도 꽤 많이 겪었다.
예전에는 나처럼 ‘도(徒)’의 기질을 지닌 사람이 주위에 드문드문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멸종 위기종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야기가 많이 빗나갔다. 존재하기만 해도 진저리 나는 무리 사회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다. 자기 생각에 충실하고, 최소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을 어디에 있든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나는 ‘도(徒)’와 같은 삶이 좋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사람에게는 본래 저마다 걸어야 할 고유한 길이 있다. 언제나 그 사실을 잊지 마라.
그 때문에 주위에서 사람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당신이 강해졌다는 증거라고 생각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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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고립을 통해 인간을 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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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서로를 위로하기만 하는 관계를 계속해도 될까요?
[답]
외로운 사람끼리 무리 지을 바에는 차라리 고독하게 지내라
가끔 “너무나 고독하고 쓸쓸해 견딜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 사람이 실제로 고독을 느끼는 것은 맞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고독’과 ‘고립’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고독이란 스스로 외톨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반면 ‘고립’은 주위에서 밀려난 상태다.
“쓸쓸해 견딜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고독한 것이 아니라 고립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고독과 고립 모두 혼자라는 점은 같다. 사람이 놓이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
쓸쓸함이 강해지면 사람은 병들고, 심하면 미치기도 한다. 작은 쓸쓸함은 다른 여러 것으로 메울 수 있다. 그러나 크게 자란 쓸쓸함은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어 조금은 무서운 존재다.
인간에게는 소망이 있다. 누구나 “내 뜻대로 살고 싶다”, “일이 내 뜻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그러므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크게 낙담한다. 낙담이 클수록 쓸쓸함도 커진다.
일이 뜻대로 되기를 지나치게 바라면,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느끼는 쓸쓸함도 그 크기에 비례해 커질 것이다.
쓸쓸함은 한 번 빠지면 좀처럼 나올 수 없는 밑 빠진 늪과 같다.
아이를 기르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아이의 마음에 쓸쓸함을 조금이라도 넣어 버리면 어른이 되어서도 어딘가에 남는다.
어릴 때 쓸쓸함을 주입받은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에 사로잡힌다. 따라서 주위에도 쓸쓸한 관계가 많아진다.
하지만 쓸쓸한 사람끼리 어울릴 바에는 차라리 고독하게 지내는 편이 낫다. 고독하게만 있으면 그 이상 차가워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쓸쓸한 사람끼리 붙어 다니면 차가움이 더욱 심해진다. 그런 차가운 관계를 아무리 이어 가도 밝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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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에 사로잡히고 자기 안의 차가움도 깨닫지 못한 채 세상의 흐름에 떠밀리는 사람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쓸쓸함이 지나치게 커지면 고립을 피하려고 ‘무리’의 흐름에 맞추게 되고, “무엇이든 주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된다.
자기 자신을 지니고 있으면 주위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요즘은 자신을 갖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 시대다.
자신이 없으니 밖에서 온갖 것을 끌어다 자기 안에 집어넣는다. 지식과 정보를 채우는 데 혈안이 된 사람은 우수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 없을 뿐이다.
당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 곧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자신이 사실로서 존재하니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면 될 뿐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자의식과 이기심은 내세우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자기 자신을 지닌 사람이 거의 없다.
동물 가운데에는 번식기가 되면 몸을 크게 보이거나 색을 바꾸는 종이 제법 많다.
인간도 그 정도로 그치면 좋겠지만 사시사철 쓸데없는 자존심을 두르고 자신을 과장하며 과대평가받기를 바란다. 그런 짓만 하니 언제까지나 자신을 지니지 못하고 쓸쓸한 채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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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가족, 특히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됩니다.
[답]
부모와 자식 사이의 심리적 연결을 끊으면 고독은 이윽고 고립으로 변한다
누구나 어머니의 몸속에서 자라 출산을 거쳐 세상에 태어난다. 따뜻하고 편안했던 모체를 떠나 알 수 없는 바깥세상으로 나온 아기가 처음 느끼는 것은 틀림없이 고독감에서 생기는 ‘불안’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다.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은 의지할 대상이 사라지면 생명이 위협받는다는 뜻이다.
아기라면 의존할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 곧 생명을 잃고 말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 생사와 맞닿은 ‘고독’에 노출된다. 고독과 불안을 느끼는 감각은 태어날 때 입력된 것이다. 불안이 엷어질 수는 있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기는 부모와 형제 같은 가족의 도움을 받아 성장하며, 고독과 불안을 조금씩 덜어 주는 사람 사이의 관계, 이른바 ‘가족 관계’를 배운다. 이것을 인류의 DNA에 새겨진 본능적인 무리의 감각이라고 해도 좋다.
사람이 가장 먼저 배우는 인간관계는 가족과의 관계다. 아이는 스스로 실감하지 못해도 그 감각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아이는 오감을 움직여 어머니가 어디 있는지 늘 살핀다. 어머니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면 불안해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는 울면 누군가가 돌보고 걱정해 준다는 사실을 첫울음을 터뜨린 순간부터 확실히 배운다.
아이는 부모와 형제, 친척, 더 나아가 생활과 관계된 사람들과 이어지며 인간의 따뜻함을 배운다. 그러나 요즘은 부모가 모두 일하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다. 핵가족화도 진행되어 부모와 자녀, 조부모까지 삼대가 함께 사는 가정도 줄었다.
예전이라면 어머니나 조부모가 돌보았을 나이의 아이도 이제는 어린 나이에 보육원 등에 맡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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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기초는 어린 시절 피를 나눈 가족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그 토대를 소홀히 하면 마음속 고독감과 불안이 필요 이상으로 커지고 이후의 인격 형성에도 나쁜 영향을 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부모는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며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아이는 혼자 남는다. 늘 아이를 쓸쓸하게 하는 부모는 그것을 메우겠다며 손쉽게 아이가 원하는 물건을 사 준다.
비디오 게임과 휴대용 게임기가 유행하면서 혼자 노는 아이도 계속 늘고 있다. 외톨이 아이가 이보다 더 많아지면 일본은 어떻게 될까. 적어도 니트와 은둔형 외톨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늘어날 것만은 틀림없다.
평소 아이를 쓸쓸하게 했다면 부모와 자녀가 함께 있는 짧은 시간만이라도 심리적으로 이어져 있어야 한다.
아이에게 무언가를 배우게 하는 부모가 묻는 것은 “이제 할 수 있게 됐니?”, “실력이 늘었니?”처럼 결과를 요구하는 말뿐이다.
그러나 아이와 심리적으로 이어지고 싶다면 성장과 진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피아노를 배운다면 “오늘은 어떤 곡을 쳤니?”, “재미있었니?”처럼 과정을 묻는 것으로 충분하다. 결과만 요구하며 심리적 연결까지 끊어 버리면 아이의 마음은 고독에서 고립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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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이 시대에는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까?
[답]
결혼하면 터무니없이 고생할 것 같은 상대를 골라라
대타 기사 시절의 나는 승부사로서 누구와도,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고 홀로 싸웠다. 말하자면 외로운 늑대 같은 싸움법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것은 그것대로 제법 고되다.
외로운 늑대는 남이 보기에 제멋대로 사는 듯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싸우려면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 책임이다”라는 각오가 필요하다.
각오란 ‘죽음’까지 의식한 마음가짐이다. 그래서 나는 ‘각오’라는 말을 가볍게 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언제나 그 각오를 품고 인생을 걸어왔다.
눈앞에 ‘험한 길’과 ‘편한 길’이 나타나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험한 길을 골랐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험한 길은 고통스럽고 괴로워 되도록 피하고 싶은 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험한 것을 고통이나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았다. ‘나를 성장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마주했다.
요즘 결혼 상대를 고르는 사람은 대부분 “이 여자와 함께하면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기준으로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하면 가장 고생하겠군” 싶은 상대를 골랐다. 물론 지금도 아내와 함께 살며 여러모로 애를 먹고 있다.
나에게 편리한가 불편한가. 그런 선택 기준은 내 안에 전혀 없다. 시련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시련을 ‘살아 있는 배움’이라 여기며 실제로 수많은 시련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배웠다.
누군가의 성공담을 공부하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는 ‘잘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울리는 편이 인생을 걷는 데 필요한 배움과 지혜를 준다.
내가 계속해 온 것은 ‘제로에서 시작하는 배움’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데 기쁨을 느낀다. 이미 있는 것을 더 키우는 일은 대단하지 않다. 그런 방식으로만 살아서는 인간적으로 강해지지 못한다.
“대기업에 들어가 그럭저럭 좋은 생활을 한다”는 삶은 이미 있는 것을 더 키우는 대표적인 예다. 내게는 몹시 따분하고 재미없는 삶이다.
나는 ‘제로를 유로 만드는’ 삶에서 보람을 느끼는 성격이다. 회사에 다닌다면 아마 곧 망할 것 같은 회사를 고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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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할 듯한 회사에서 일하면 제로가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회사를 다시 일으키는 데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 “대기업에 들어가 더 활약하겠다”는 삶에는 조금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무’ 그 자체를 즐기는지도 모른다.
편한 길과 험한 길이 있다면 당신은 험한 길을 고를 수 있는가. 나처럼 험한 길을 고르는 사람은 현대에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나 그보다 오래전에는 험한 길을 택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도 나처럼 험한 길을 고르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다. 다만 그 비율이 예전보다 압도적으로 줄었다.
요즘 세상은 편리함, 이용 가치, 사정의 좋고 나쁨 같은 관계가 지배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그런 관계를 기준으로 선택한다.
“희망을 가져라”, “꿈을 향해 나아가라”라고 멋있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품는다는 말도 뒤집어 보면 “내 뜻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험한 길은 뜻대로 풀리지 않기에 ‘험한 길’이다. 뜻대로 풀리는 길은 ‘편한 길’이다. 이럴 때야말로 고립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험한 길에서 얻은 살아 있는 배움과 경험이야말로 인간의 폭을 넓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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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친구를 많이 사귀어도 혼자라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답]
친구 관계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는 것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과 같다
친구는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억지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많은 친구에게 둘러싸여 남들이 “즐거워 보여 좋겠다”고 생각해도, 실제로 즐거운지는 본인만 안다.
친구 관계에 지친 사람은 고립이 두려워 ‘친구 만들기’라는 이름의 ‘무리 만들기’를 지나치게 한 것일 테다. 자연스럽게 사귀지 않았기에 관계가 짐이 되어 마음을 지치게 한 것이다.
저 사람과 사귀면 이득이고, 이 사람과 사귀면 손해다. 주위를 보면 그런 손익 계산에 따라 사람을 사귀는 이들뿐이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무리’가 존재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런 일이 사업 세계에만 있다면 그나마 낫다. 사생활에서까지 그런 모습이라면 인간관계에 지치는 것이 당연하다.
세상은 먼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좋은 일이야”라고 가르친다. 학교와 부모에게 배우고 주위 사람에게도 배운다. 사람을 사귀는 감각은 자연스럽게 익히면 되는데 ‘가르침’이 생각을 고정하므로 ‘자연스럽게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르치는 일은 참으로 무섭다. 배우는 사람도 그 무서움을 알아야 한다. ‘가르침’ 덕분에 인간이 더 좋아졌는가. 배운 탓에 오히려 비뚤어지는 일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배우는 데 우수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차지해 움직이는 듯하지만 사회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나빠질 뿐이다. 배우는 데 우수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다. 친구 관계에 지쳤다면 한 번 쉬면 된다. 쉰다고 해서 친구 관계를 단번에 끊으라는 뜻은 아니다.
기존의 관계를 모두 끊으면 ‘고립’이 된다. 고독이라면 어느 정도 연결이 남지만 고립은 몸과 마음의 모든 관계가 끊어진 상태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무리에서 조금씩 거리를 두면서도 여전히 이어져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계속하면 된다.
무리 속 친구 관계에 지친 사람은 관계를 지키려고 너무 뜨거워졌다. 뜨거운 물속에서 억지로 견디는 상태다. 더 견디지 못하고 나가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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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많은 사람은 ‘친구가 많으면 좋다’고 생각하므로 뜨거운 상태에 익숙해져 감각이 마비되었다.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좋다고 믿는다. 누구와 누구는 서로 아는데 자기만 모른다는 식의 아무래도 좋은 일에 기를 쓴다.
모든 것에는 ‘알맞은 온도’가 있다. 하지만 감각이 마비된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 지금의 사회도 알맞은 온도를 잃고 폭주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너무 뜨거워 견디지 못하겠다면 물을 조금 부어 온도를 낮추면 될 뿐이다.
친구가 많으면 뜨거운 물이 되고, 한 명도 없으면 얼어붙는다. 그러니 그 사이에서 물의 온도가 알맞아지도록 스스로 조절하면 된다.
또 그런 친구 관계에 ‘자기 편의’가 섞이지 않았는지도 늘 살펴야 한다. 자기에게 편리한 사람만 모으면 결국 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게 되기 때문이다.
작귀회 도장생은 내게 동료지만, 내 편의에 따라 그들을 고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도 알맞은 온도로 어울릴 수 있다.
당신도 자신이 너무 뜨거워지지 않았는지 한 번 살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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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이 시대에 나와 맞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지 너무 불안합니다.
[답]
편리함만 좇지 말고 사람과의 접촉을 소중히 여겨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10년 당시 50세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비율인 생애 미혼율이 남성은 약 20퍼센트, 여성은 약 10퍼센트에 이르렀다고 한다.
남성이 20퍼센트대, 여성이 10퍼센트대에 이른 것은 처음이었다. 약 30년 전 조사와 비교하면 남성은 약 여덟 배, 여성은 두 배 넘게 늘었다고 한다.
남녀 모두 1990년 무렵부터 생애 미혼율이 급상승했다니, 버블 붕괴 뒤 일본 사회가 공동화하면서 그 비율도 높아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본 사회가 텅 비면서 고독하거나 고립된 사람이 늘었고, 지금도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고독한 두 사람이나 고립된 두 사람이 함께해도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이 역시 고립되기 쉬울 것이다. 요즘 젊은이는 그것을 알고 있거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선인들이 무분별하게 뿌린 씨앗 탓에 일본 사회는 황폐한 불모지가 되었다. 좀 더 느긋하고 천천히 씨앗을 뿌렸어야 했다. ‘고도 성장’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당시의 어른들은 제멋대로 굴었다. 자연의 섭리를 보아도 한꺼번에 일을 벌이면 반드시 어딘가에 무리가 생긴다. 지금 일본이 불모지가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당시 어른들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크다. 그래서 손주가 태어났을 때도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오히려 마음은 참회의 감정으로 가득했다. “이런 세상이라 미안하구나”라고.
미혼율이 높아져도 인간에게는 생물로서 ‘유전자를 남기고 싶다’는 본능이 있어 육체는 이성과의 접촉을 원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결혼 상대 찾기에 힘쓰고, 그것을 이용한 결혼 중개 사업도 성립한다.
그런데도 생애 미혼율이 높아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러 이유가 거론되지만 나는 젊은이의 마음속에 있는 고독감과 고립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깨닫지 못하겠지만, 무리 속에 있기에 도리어 선명해지는 고독감과 고립감도 있다.
고독과 고립이 퍼진 사회에서 적어도 자신만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지금의 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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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다시 살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살려면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필수품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빠져 있는 게임까지 포함해 그런 것은 모두 고립의 원인이 된다.
“컴퓨터가 없으면 일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휴대전화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젊은이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누군가와 전파로 이어져 있으니 고독이나 고립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다.
전파로 이어진 관계는 망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실시간으로 말을 주고받아도 진짜 현실이 아니며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고독과 고립을 막으려면 사람이 사람과 직접 만나 접촉하는 기회를 늘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편리함을 좇는 사회는 사람 사이의 접촉을 끊는 것만 만들어 낸다.
“지금 생활을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대로 고립되어 갈 뿐이다. 생활 전부를 갑자기 바꾸기 어렵다는 것은 안다. 그렇다면 전파에 둘러싸인 생활에서 조금씩 거리를 두면 된다.
쉬는 날만이라도 컴퓨터를 끄고 사람을 만나라. 조금 번거롭더라도 인터넷 통신 판매로 사던 물건을 동네 가게에서 사 보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전파에 둘러싸인 삶을 위험하게 여기고 조금씩 움직이면 사회 전체에 퍼진 고독감도 차츰 엷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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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사회에 휩쓸리지 않고 내 길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세상이 가리키는 ‘돌’에 현혹되지 마라
이 책에서 몇 번 이야기했듯 나는 세상이 ‘좋다’고 하는 가치관과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에 의심의 눈을 돌려 왔다.
그래서 내가 고르는 길은 당연히 주위 사람과 달랐다. 길을 고르는 방식보다 땅에 떨어진 돌을 줍는 방식이 달랐다고 하는 편이 알맞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이 돌이 좋습니다”라며 노란 돌이나 갈색 돌을 보여 주어도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다른 돌을 골랐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회가 “이 색이 좋습니다”라고 하면 그대로 따르며, 사회가 정한 좋고 나쁨에 맞는 돌을 줍는다.
이 나라를 움직이는 정치가와 관료는 대중이 무조건 자기 말을 따르기를 바란다. 그래서 대중을 쉽게 조종하려고 정교한 덫과 속임수를 사회 곳곳에 설치한다.
그 덫과 속임수는 “정말 이 돌이면 되는가?”, “이 색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느끼는 생각은 물론 독창성과 창조성까지 가차 없이 빼앗는다. 사람의 기를 꺾는 이 술책에 학교 교육과 언론도 크게 가담한다.
그렇다면 개인에게 심어진 순응성을 없애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요즘 어른들은 사회가 지정한 색의 돌을 열심히 줍는 데서 출발했으므로 애초에 “다른 색의 돌을 줍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나는 사회가 지정한 돌 따위 줍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사실은 자기만 그렇게 생각할 뿐 사회의 틀에 단단히 끼워져 있다. 마치 석가모니의 손바닥 위를 날아다니는 손오공처럼.
그러니 적어도 앞으로 살아갈 아이들은 자기 돌을 주울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색과 모양이어도 좋다. 다만 너무 크면 안 된다.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자기만의 돌이면 된다. 사회가 내미는 돌 따위는 어딘가에 던져 버려라.
“자기만의 돌을 주워라”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은 사회의 법과 질서를 벗어나 고립된 삶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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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말하는 삶은 집단이라는 무리의 틀 안에 계속 갇혀 있는 것도, 줄곧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나왔다가 들어가기를 반복하면 집단의 속사정과 틀의 모양, 나아가는 방향을 알 수 있다. 무리의 안팎을 오가면 사물의 안과 밖, 앞과 뒤도 이해한다. 그러면 무엇에도 사로잡히거나 물들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틀 밖에 있을 때의 나는 둥실 떠 있는 상태다. 흔히 말하는 ‘들뜬 상태’와는 다르다. 들뜬 채 틀 밖에 있으면 소외감을 맛보고 결국 고립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위에서 고립된 것이 아니다. 동료와 가족이 있다. 둥실 떠 있기에 주위의 움직임이 시야에 모두 들어온다. 위에서 전체를 내려다보는 듯해 주위가 잘 보인다.
흔히 “두 발을 땅에 붙여라”라고 하지만,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보다 둥실 떠 있을 때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주위가 잘 보이니 나아갈 길도 잘못 고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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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요즘 ‘남자다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답]
남자에게는 남자의, 여자에게는 여자의 영역이 있다
2012년 5월 패션 잡지 『보그』는 지나치게 마르거나 어린 모델과 앞으로 계약하지 않겠다는 편집 방침을 발표했다. 세계 18개국에서 판매되는 유명 잡지이니 세계 패션계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나는 요즘 여성의 ‘마르고 싶은 욕망’이 너무 지나치다고 걱정해 왔다.
여성만 할 수 있는 출산은 모든 생명에 공통된 소중한 활동이다. 넓은 골반과 풍만한 체형은 아이를 쉽게 낳도록 이끌어진 여성 특유의 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여성의 몸은 날씬하다고 하면 듣기는 좋지만 허리둘레가 가늘어 아이를 낳기 어렵고 어머니답지 않은 몸이 되었다고 나는 느낀다.
패션모델처럼 마른 것이 ‘아름다움’이라 여겨져 젊은 여성은 “마르지 않으면 저 옷을 입을 수 없다”며 먹는 것까지 날마다 신경 쓴다. 그 약점을 파고들어 번성한 것이 다이어트 사업이다.
“날마다 이것을 먹으면 살이 빠집니다”, “매일 계속하면 허리가 가늘어집니다.” 여성은 그런 말에 휘둘렸다. 하지만 시대는 돈다. 한때는 풍만한 여성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앞으로 다시 그런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마르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광고와 그것을 거드는 언론에 속지 마라.
여성이 여성다움을 잃었듯 요즘은 남성이 남자다움을 잃은 상징 같은 ‘초식남’도 등장했다.
오늘날 ‘여자다움’을 말하면 차별이라고 할지 모른다. 남녀평등은 좋은 일이지만 그 뜻을 혼동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나는 늘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태고부터 이어진 인간의 근원적인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자에게는 남자의, 여자에게는 여자의 영역이 있다. 영역을 ‘역할’이라고 받아들여도 좋다. 저마다 역할을 다하면 두 영역이 맞물리고 사회 전체의 균형이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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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즘은 남녀평등의 뜻을 혼동하는 사람이 많아 그 균형이 크게 무너졌다. 그 결과 남존여비가 아니라 ‘여존남비’의 세상이 된 듯하기도 하다. 초식남의 등장은 그런 시대 흐름에 맞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본능에 따라 살았다. 자연계 동물과 가까운 삶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본능이 아니라 상식과 규칙에 따라 살았을 것이다.
본능에는 부성과 모성도 들어 있다. 그것을 소홀히 하고 상식과 규칙만 따르면서 인간에게서 여러 본능이 차츰 사라졌다. 부성과 모성이 없는 가정의 아이는 당연히 그것을 모른 채 자란다. 앞으로는 인간에게 소중한 본능을 잃은 사람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인간의 본능에 뿌리를 둔 ‘다움’을 되찾지 못하면 사회는 고립된 사람만 있는 차가운 곳이 된다. 나는 그것을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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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언제나 제 생각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답]
자기 인생을 납득하고 싶다면 한 번쯤 ‘독단’을 내려 보라
에도 시대 막부는 쇄국 정책으로 약 260년 동안 외교와 무역을 제한했다. 지금 보면 자기 방에 틀어박힌 사람과도 같지만 나는 당시 일본이 ‘고립’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에도 막부는 ‘독자성’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쇄국 중에도 류큐 왕국, 중국, 네덜란드와 무역했다. 해외 문화와 사상을 마구 받아들이면 일본 사회가 크게 흐트러진다. 자국을 지키려고 택한 정책이 쇄국이었다고 나는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내 삶도 상당히 ‘독자적’이다. 나처럼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를 잘 아는 도장생도 그 점을 인정할 것이다.
문화와 말이 다른 이국의 사람과 ‘모두 사이좋게’ 지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 나라를 다스리기도 어려운데 여러 인종과 문화가 뒤섞이면 수습이 되지 않는다. 성장 환경이 다른 사람을 같은 색으로 묶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잠깐 하나가 되어도 조화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유럽연합을 보아도 분명하다.
근래의 세계화로 나라 사이의 연결은 지구 규모가 되었지만, 내 눈에는 세계가 하나로 모인 듯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리한 세계화로 균열이 생겨 경제 위기와 분쟁이 더욱 늘어날 기미가 보인다.
‘세계화’라는 듣기 좋은 말은 교양 있는 사람이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계에 정말 세계화가 필요한가.
‘넓어지고 커지는 것’을 좋다고 여기지 않는 나는 오래전부터 세계화를 수상하게 보았다. 세계 불황과 끝나지 않는 분쟁을 보며 같은 의심을 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일본의 쇄국은 에도 시대 말기 외부 압력으로 끝났다. 그 뒤 일본은 새것을 잇달아 받아들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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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탓에 일본의 ‘독자성’은 크게 사라졌다. 독자성이란 자기 자신을 지니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는 것이다. 세계화가 진행된 지금도 국제사회에서 내정 불간섭 원칙을 쓰는 것은 각국이 여전히 독자성을 소중히 여긴다는 증거다.
앞에서 말했듯 나는 독자적인 삶을 끝까지 걸었다. 인생에는 여러 선택지가 나타나지만 독자적으로 살려면 마지막에는 ‘독단’으로 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내게 닥친 문제를 누구에게 상담한 적이 없다.
물론 일과 가정에서 “의논해서 정합시다”라고 한 경험은 있다. 하지만 “지금 곤란하니 상담해 주세요”라고 한 적은 정말 없다.
내가 독단으로 해 온 것은 타고난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게 했을 때 잘 풀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내 삶을 스스로 납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 독단을 이어 왔다. 앞으로도 바꿀 생각은 없다. 끝까지 생각하면 사람의 삶은 본래 그런 것이 아닐까. 당신에게도 참고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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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직장에 도저히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답] 꺼리는 것과 마주하면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다
사람을 심하게 가리면 결국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아 고립된다. 인간에게는 궁합이 있어 잘 맞는 사람도, 아무리 해도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도 도장생과 일대일로만 사귄다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멀리하면 나도 고립된다. 내가 고립되지 않는 것은 각자와 일대일 관계를 만들려 하지 않고 모두를 ‘동료’로 보기 때문이다.
동료는 하나의 ‘원’이다. 조금 마음이 맞지 않아도 손을 잡고 원을 이루면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혼자 못 하는 일도 동료가 모이면 가능하다. 원의 감각을 지니면 맞지 않는 동료도 꼭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원래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거의 없다. 맞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기는 번거롭지만 그들에게서 여러 가지를 배운다. ‘맞는 사람’이라는 판단은 흔히 자기 편의에서 나온다. 편리한 사람과만 지내서는 배울 것이 별로 없다.
비슷한 사람끼리만 모이는 것이 현대인의 무리다. 그런 곳에는 자극도 배움도 없다. 나는 나와 정반대인 사람들과 주로 어울려 왔다. 젊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꺼리는 것과 마주하면 성장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싫거나 꺼리는 대상도 나는 한 번 몸 안으로 통과시킨다. 내가 ‘흘려보내는 감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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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각 덕분에 맞지 않고 꺼리는 사람과도 어울릴 수 있다. 상대를 한번 몸 안으로 통과시키며 맛보되, 파장이 맞는 사람도 내 안에 가두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낸다. 그러면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나는 예부터 자연 속에서 지내기를 좋아했다. 자연에는 단 1초도 같은 순간이 없다. 아침과 낮과 밤, 사계절에 따라 쉴 새 없이 표정을 바꾼다.
그 변화 속에서 나는 느끼고 알아차리는 힘을 닦았다. 맞고 안 맞음을 따지지 않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자연을 즐기듯 인간의 변화를 즐기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늘 별난 사람에게 흥미를 느낀다. 남들이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할 만한 사람을 보면 한번 내 안으로 통과시켜 보고 싶어진다.
자기 편의만 생각하지 말고 때로는 꺼리는 사람과도 어울려라.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맞는 사람’이 아니라 ‘맞지 않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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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완전히 고립된 친구를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답] 사람을 손쉽게 구할 방법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라
분노와 슬픔, 원한과 시기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기쁨과 즐거움보다 퍼지고 끌어당기는 힘이 강하다. 그것은 밑 빠진 진흙 늪과 같아 발을 들이는 순간 몸이 빨려 들어간다. 사회와 인간관계에서 고립된 사람은 ‘쓸쓸함’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사람에게 다가갈 때는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살려 줘”라는 소리가 들린다고 뛰어들면 구조하려던 사람도 삼켜진다. 남의 쓸쓸함을 공유하려는 것은 친절도 사랑도 우정도 아니다.
도장에는 마음이 병든 사람이 내 도움을 구하러 오기도 한다. 그들은 나를 구세주로 착각하지만 나는 그저 인간이며 평범한 마작장 주인이다. 나는 누구도 구할 수 없다.
누군가를 늪에서 구하려 한다면 기세나 동정, 우정만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구조하러 간 사람까지 조난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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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냉정해져라. 그 사람이 어떤 상황인지 살핀 뒤 밧줄을 던지거나 밖에서 판자를 놓아 주면 된다.
쓸쓸함에 사로잡힌 사람은 ‘고립’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지만 그 때문에 더 깊이 빠진다. 깊이 빠지면 주위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도움을 구하면 나는 스스로 기어 나올 수 있도록 ‘계기’라는 밧줄을 던진다. 말일 수도 태도일 수도 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던지지만 직접 끌어 올리지는 않는다. 빠져나올 수 있느냐는 본인의 힘에 달렸다.
구세주 따위는 세상에 없다. 결국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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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작귀류 - 불안을 엷게 만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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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지위나 직함이 있는 사람의 말을 맹신합니다.
[답] 시선을 ‘약한 것’과 ‘작은 것’으로 돌려라
얼마 전 어느 법회에 참석했을 때다. 스님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살아 있을 때 경을 올리고 많이 베푸십시오”라고 설교했다.
나는 신앙심이 없어 경전을 전혀 모른다. 종교뿐 아니라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은 모두 의심하는 성격이라 “왜 절에 보시해야 하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베풀 수 있는데”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좋다고 여겨졌거나 당연하고 상식적이라 여겨진 것에 사람은 좀처럼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연하다는 것일수록 의심해 왔다. 종교도 수백 년,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으니 옳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긴 역사 속에서 똑같은 잘못을 지겹지도 않게 되풀이하지 않았는가.
살다 보면 누구나 고독과 불안을 느낀다. ‘삶’과 불안은 늘 등을 맞대고 있다. 사람은 그 불안을 지우려고 종교와 신과 부처에 매달린다.
신 앞에서만 착한 사람인 체하고 길에서 노숙인을 보아도 모르는 얼굴을 한다. “노숙인이 된 것은 지금까지 제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마디로 치워 버리는 사람이 세상을 제대로 본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어느 시대든 성공한 사람과 권력자, 체제에 휩쓸리기 쉽다. 불안을 피하고 무리에서 고립되기 싫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지배하는 것일수록 의심하며 “그 때문에 고립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놓치고 잘못 보는 것과 속임수가 보인다.
스님의 설교에 나온 ‘보시’도 세상에 휩쓸리기만 하면 참뜻을 혼동한다. 보시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세상의 약한 쪽, 작은 쪽을 바라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저절로 보인다.
당신의 시선은 ‘약한 것’과 ‘작은 것’을 향하는가. 대중에 휩쓸려 ‘강한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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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것’만 바라보지는 않는가. 강함과 큼에 사로잡히면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만 보게 된다.
진정으로 베풀려면 ‘나쁜 상태’에 놓인 사람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강하고 큰 것에 붙들린 시선은 그들을 놓친다.
죄를 지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처럼 세상에는 나쁜 상태에 놓인 사람이 많다. 학교와 사회는 좋은 것만 보라고 가르치지만 좋은 쪽만 보아서는 진정한 베풂을 행할 수 없다.
경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시대의 총아’라며 칭송받는다. 하지만 그 성공만큼 희생된 사람도 많다. 성공의 규모가 클수록 희생자도 늘어난다.
그런 성공자가 “세상과 사람을 위해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해도 내게는 거짓말처럼 들린다. 의심하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거의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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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사람에게 아첨하거나 반대로 깔보는 버릇을 고치지 못합니다.
[답] 사회를 수평선 위에서 바라보면 주위가 다르게 보인다
교육계는 ‘개성 교육’을 말하지만 개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을 교육으로 키우겠다는 말은 몹시 오만하다. 획일적으로 가르치다가 한 번만 실패해도 ‘못난 인간’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현실이다. 밖에서 보면 어떻게 감히 개성 교육을 말하나 싶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으니 ‘차이’가 생긴다. 차이가 있으면 불평과 불만, 분노도 나오겠지만 바로 그래서 인간관계가 재미있다. 나는 ‘차이는 재미’라고 해석한다.
일본인의 뿌리 깊은 횡렬 의식은 일정한 선에 이르지 못한 사람을 떨어뜨리고, 그 선 위로 크게 나가려는 사람도 떼로 두들겨 끌어내린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으므로 언뜻 나란히 보여도 그 선은 울퉁불퉁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차별이라는 방식으로 평평하게 고치려 한다.
경제 발전을 추구한 일본은 ‘넓고 커지면 좋다’는 생각 아래 세로선으로 사물을 보게 되었다. 학교와 회사는 남보다 앞서고 조금이라도 위로 가기 위한 지식과 기술, 나쁘게 말하면 교활함을 가르친다.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은 사회가 이런 세로선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세로선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차이를 차별이 아니라 재미와 즐거움으로 인정할 수 있다.
차이를 즐기려면 사회를 가로, 곧 평면으로 보라. 그러면 위라 여기던 사람과 아래라 여기던 사람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단해 보이던 사람이 별것 아님을 알고, 깔보던 사람에게 배울 점이 많음을 깨닫는다. 차이를 즐긴다는 것은 그런 시선을 갖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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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생 중에도 남을 깔보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가끔 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본인이 깨닫기를 기다린다. ‘남을 깔보는 사람’을 살아 있는 교재로 삼아 다른 도장생들이 무언가 배우면 된다고 생각한다.
세로선 사고가 몸에 밴 사람에게 가로선을 말해도 이해는 할지언정 고치기는 어렵다. 결국 차별하는 버릇은 본인이 깨달아야만 고쳐진다. 버릇은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고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안을 품으므로 그것을 조금이라도 덜려고 확실한 근거를 찾는다. 정해진 것 안에 있으면 고립되지 않고 안전하며 안심된다. 그런 확실함을 바라는 마음이 고정관념과 마음의 경직을 만든다. 인간은 본래 부드러워야 한다. 유연함은 임기응변의 힘이 되어 마음속 차별의 버릇까지 바로잡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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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계속 짜증이 납니다.
[답] 믿고 기대기 때문에 괴로워지고, 심지어 병까지 든다
늙은 부모를 자녀가 돌보고 베푸는 일을 세상은 ‘효도’라고 부른다. 내게는 자녀가 넷이고 세상 기준으로는 효도를 받아도 될 나이다.
하지만 자녀에게 효도받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생명의 바통을 이을 손주를 만나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효도 따위 하지 마라. 나를 위해 무엇을 하려 들지 마라”라고 말한다.
내가 누워 지내게 되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건강하다. 몸이 움직이는 동안에는 내가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다.
강자가 약자를 돕고 젊은이가 노인을 거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는 약하니 도움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노인이 늘어난 듯하다. 과거의 업적에 매달려 “이만큼 했으니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뻔뻔하게 구는 태도는 좋지 않다.
엔카 가수는 한 곡만 성공하면 평생 먹고산다고 하는데 그것도 과거의 업적에 매달리는 예다.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고 평생 ‘감독’이라 부르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다면 책을 여러 권 낸 나는 작가인가.
나는 나를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저 마작장 주인이다. 책 한 권을 끝내면 그 책과의 일도 끝이다. 아무리 잘 팔려도 업적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
이 나이에도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를 해 주는 것은 내 안의 것을 계속 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나는 생명도 버린다. 지금부터 ‘버릴 준비’를 하는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 효도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녀에게 기대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족과 직원에게 기대고 대출로 돈에까지 기대며 산다.
나는 ‘기대에 숨어 있는 병리’라는 말을 쓰며 도장생에게 “노력이 보상받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해 온 노력은 잊고 살아라. 무엇에도 기대지 마라. 기대하니 괴롭고 병드는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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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친다. 친구와 절친한 친구도 기대하기 쉬운 대상이다. 그러니 배신당하면 크게 낙담하고 고독에 시달린다.
부모가 자녀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녀에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부모 마음이 아니라 자녀에게 기대는 것일 뿐이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기에 재미있다. 뜻대로 되는 일만 바라면 삶은 배신의 연속이 되고 마지막에는 사는 것마저 싫어질 것이다.
예측되는 일에 돈을 거는 사람은 그저 도박꾼이다. 승부사는 그런 것에 기대지 않는다. 기대 속에는 병이 숨어 있음을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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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꾸 신경 쓰입니다.
[답]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그런 건 알 바 아니다
고독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 밑바닥에는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그래서 “미움받기 싫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다”는 마음이 강해져 남의 눈치만 보며 산다.
나는 내 길을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았다. 때로는 스스로 개척하고 때로는 무엇엔가 떠밀리듯 이끌리며 걸었다.
내가 개척한 길은 내 영역이다. 이 삶만은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역 밖의 일은 아무래도 좋다. 남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내 영역 밖의 일은 ‘알 바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회장님은 지금의 지위를 세웠으니 가능한 말입니다. 학교와 회사에서 사는 보통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보통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통 사람 중에도 자기 길을 개척하며 남의 생각은 상관없다고 사는 사람이 있다. 내 주위에도 몇 명 있다.
다만 세상의 풍조로 보면 그런 사람은 매우 적고 남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나도 대타 기사로 뒷골목을 살 때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보잘것없는 마작장을 운영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세상의 밑바닥에서 사는 나도 “알 바 아니다”라고 사니 당신도 조금만 용기를 내면 말할 수 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재미’가 필요하다. 재미를 찾고 즐기는 힘이 갖추어져야 시야가 넓어지고 여유가 생기며 여러 일을 솔직히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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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를 지니면 남의 시선을 덜 의식하는 까닭은 불안이 작아지기 때문이다. 웃음의 반대편에는 불안이 있으므로 불안을 엷게 하려면 재미를 찾아야 한다.
그저 깔깔 웃는다고 불안이 줄지는 않는다. 재미를 찾고 즐기며 주위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어라. 처음부터 전부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여러 일을 재미있어하는 것만으로 불안은 엷어진다.
나는 불안을 느끼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불안은 느껴도 된다. 불안을 통해 여러 대처법을 배우고 인간적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불안을 너무 크게 받아들이면 필요 이상으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기답게 행동하지 못한다.
재미를 지니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많이 노는 일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놀이는 필요하다. 다만 돈을 들이는 어른의 도락이 아니라 돈이 들지 않는 놀이다.
아이와 함께 즐길 만한 놀이를 철저히 하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재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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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상사에게 아첨하는 제 모습이 한심합니다.
[답] 어디에 있든 자신의 전부를 팔아넘기지 마라.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지녀라
작귀회에서 도장생과 두는 마작은 정치색과 경제색을 뺀 마작이다. 20여 년 전 대타 기사였던 나는 악랄하고 더러운 마작에 진저리를 냈다. 다른 마작과 승부의 세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진정한 승부를 탐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작귀회를 열고 먼저 젊은이들의 마작에서 정치와 경제의 이해관계를 빼기 시작했다.
경제 사회에 사는 이상 정치색과 경제색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일부러 그것을 벗겨 낸다. 끈기가 필요한 이 작업은 작귀회를 세운 지 24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된다.
경제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밑바닥에는 이해관계가 있다. 판단 기준은 손해인가 이익인가뿐이다. 인간계보다 자연계에 가까이 살아온 내게 이해관계로 성립한 관계는 몹시 약해 보인다.
회사 안에서만 그런 관계가 있다면 그나마 낫지만 이제는 친구와 가족 관계에도 파고들었다. 작귀회에 오는 젊은이도 그런 관계에 푹 젖어 산 경우가 많아 경제색과 정치색을 벗겨 내기가 쉽지 않다.
손익만으로 움직이는 사람과 세상에 진저리가 났다면 회사 밖에서 이해관계와 무관한 길을 개척하라. 다른 곳에서 진짜 자기 삶을 찾아라. 그것이 삶의 보람으로 이어진다.
먹고살려면 경제 사회에서 이익을 좇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부분을 자신 안에 지니는 일이 중요하다.
회사에서도 이해관계를 벗어난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면 좋다. 그 마음이 없으면 결국 자신을 팔게 된다. 회사에 영혼을 팔고 나면 이해관계에 물든 약한 자신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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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귀회에는 손님을 응대하는 도장생이 몇 명 있다. 나는 그들에게 늘 “손님에게 아첨만은 팔지 마라”라고 말한다.
아첨을 판다는 것은 자신을 판다는 뜻이다. 계속하면 ‘자기 자신’을 잃는다. 경제 사회에 살아도 노동력은 몰라도 마음과 영혼까지 팔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만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
경제 사회의 이해관계와 손익을 떠난 자기 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회사는 그런 곳이다”, “경제 사회는 그런 곳이다”라고 인식한 뒤 자기 나름의 삶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 차츰 개인과 전체의 관계가 보인다. 내가 자주 하는 “개인은 전체이고 전체는 개인이다”라는 말은 경제 사회를 인식한 뒤 생긴 생각이다.
회사는 전체지만 전체는 개인이 모여 성립한다. 그런데 자신을 계속 팔면 자기를 잃고 ‘회사가 전부’라는 사고에 물든다.
‘나, 나’ 하며 개인만 의식하는 삶도, 회사가 인생 전부라며 전체에 물든 삶도 균형을 크게 잃었다. 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균형 있게 기분 좋게 살려면 개인과 전체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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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연인을 믿을 수 없고 쓸쓸하기까지 합니다.
[답] 사랑 같은 것조차 믿어 버리니 인간으로서 외로워지는 것이다
세상이 미치면 그 안의 사람에게도 ‘광기’가 스며든다. 예전에는 보통 사람에게서 그런 광기를 느끼지 못했지만 요즘은 양복 입은 평범한 회사원에게서도 배어 나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전철 안에도 광기를 풍기는 회사원이 가득하다. 괴성을 지르거나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게 타고 있지만 몸 안에 광기가 숨어 있음을 느낀다. 예전에는 한 차량에 한두 명뿐이었다면 지금은 절반을 넘을 때도 있다. 이 비율이 더 늘면 가뜩이나 이상한 세상은 더욱 이상한 곳으로 향할 것이다.
내가 이 나이까지 광기의 세계와 인연 없이 지낸 것은 생각 속에서 ‘믿는다’는 말을 버렸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믿음을 인생을 좋게 만드는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부터 그 말과 의미, 효과를 의심했다.
고정관념은 글자 그대로 사람을 굳힌다. 변화의 연속인 삶에는 부드럽고 임기응변 있게 대응해야 한다. “믿기 때문에 고정관념이 생기고, 믿기 때문에 사로잡혀 필요 이상으로 상처받고 낙담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믿음을 버린 뒤 나는 무엇이든 반신반의한다. 절반은 믿고 절반은 의심한다. 많아도 80퍼센트만 믿고 20퍼센트는 의심한다. 반신반의는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지만 나는 그것이 유연함과 임기응변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믿으며 산 사람은 그것에 배신당하거나 결별하면 깊은 고독에 빠져 “내 인생은 끝났다”고 단정한다. 한 가지가 잘못됐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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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믿어 온 사람은 쉽게 자기 삶까지 망가뜨린다.
‘사랑’도 사람을 믿게 만들어 망가뜨리는 대표적인 말이다. “사랑했는데”, “이만큼 사랑으로 대했는데.” 반신반의했다면 그렇게까지 낙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무언가를 지나치게 믿다가 자멸하듯 망가진다.
“사랑조차 믿지 못한다니 인간적으로 외롭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랑조차 믿어 버리니 인간적으로 외로워지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다. 모두 의심하라는 뜻이 아니라 절반은 믿고 절반은 의심해 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도 의심한다. “이봐, 작귀. 그걸로 괜찮아?” 또 하나의 내가 늘 묻는다.
광기와 거기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에너지는 엄청나게 커서 순식간에 퍼지고 사람을 집어삼킨다. 히틀러를 들지 않아도 독재자가 대량 학살을 벌인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나중에는 누구나 어째서 그런 짓을 했나 생각하지만 당시의 대중은 제어할 수 없는 광기에 삼켜져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이 모든 일도 믿음에서 시작된다. 믿는 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님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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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무슨 일을 해도 후회만 합니다.
[답] 편의나 손익 계산을 기준으로 무언가를 고르지 마라
남이 보기에 내 삶은 모두와 정반대로 나아가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남들이 두세 가지 지점을 짚을 때 나는 그 밖에 다섯세 개를 더 붙잡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빨강, 파랑, 노랑 세 색을 고르면 나는 회색과 검정처럼 그들이 놓치거나 버린 색도 고른다. 모두가 버린 색에서 여러 깨달음을 얻었다.
대부분은 가치관과 편의, 손익으로 색을 고르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손익과 편의로만 고른 것은 아무 맛도 없다. 주위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원해 고른 것과 만나면 나중에 서서히 맛이 난다. 그렇게 길을 찾아 험난함을 맛으로 바꾸었다. 달고 맵고 쓴 길이 있었지만 쓴 길에는 쓴맛의 풍미가 있다.
내 삶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권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내 길을 가는 삶을 납득하며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험한 길을 골라 온 것은 인간으로서의 뿌리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뿌리에는 불안하지 않고 무섭지 않으며 싫은 일을 덜 겪는 쪽으로 가려는 마음이 있다. 내가 왜 다르게 고르는지는 나도 모른다. 뿌리가 다르다고밖에 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위험한 놀이와 다칠지도 모르는 놀이만 했다. 남들이 겁내는 높은 나무에 오르고 물살이 센 곳에서 헤엄쳤다. 우월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더 위험한 것을 원하는 마음에 솔직했을 뿐이다. 목숨을 걸고 놀며 ‘삶’을 실감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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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경험을 거듭하며 ‘사는 지혜’를 익혔다.
어릴 때부터 그런 성질이었기에 험한 길을 고를 수 있었다. 어른에게 갑자기 그렇게 하라고 해도 쉽지 않다. 그런 성질 없이 흉내 내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어 나는 내 방식을 권하지 않는다.
내가 험한 것을 고르는 성질을 기른 데에는 전후라는 시대도 크게 작용했다. 먹고 입을 것이 없고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구분할 수도 없던 시대였다. 나 같은 아이가 많았다.
지금은 먹고 입을 것이 있고 대학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시대에 살면서 후회만 한다면 남과 달라도 자기가 원해 고른 것을 소중히 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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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더 존재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답]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존재감은 분명히 있다
“회장님처럼 존재감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당신에게도 존재감이 분명히 있다”고 답한다. 존재감 없는 사람은 없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는 사람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존재감’을 지녔다.
인간은 동물이며 움직여 생명을 잇는다. 가만히 있어도 몸 안에서는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른다. 움직임이 많아 눈에 띄는 사람을 존재감 있다고 부르지만, 눈에 띈다고 진정 존재감 있는 것은 아니다.
존재감은 안에서 스며 나온다. 좋은 것과 나쁜 것, 강한 것과 약한 것 등 여러 존재감이 합쳐져 그 사람의 존재감이 된다. 정정당당한 것도 있고 교활하고 비겁한 것도 있다.
내게도 좋은 존재감과 나쁜 존재감이 있다. 여러 가지를 지니면서도 그중 좋은 존재감을 되도록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
사람은 움직이고 살아 있기에 존재감이 있다. 움직임의 멈춤은 죽음을 뜻하고 존재감도 사라진다.
하지만 세상에는 살아 있는데도 움직임을 멈춘 사람이 있다. 고정되어 그곳에 멈춘 사람이다.
학교와 회사에서 가르치는 것은 규칙과 설명서에 따른다. 학문과 기계 조작, 작업 순서는 설명서대로 하면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에서 잇달아 나타나는 사고와 장애물, 벽에는 설명서가 없다.
계속 움직여야 존재감과 함께 눈앞의 문제에 대처하는 법도 익힌다. 설명서에 푹 빠진 사람은 정신과 사고가 굳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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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생겨도 임기응변으로 대응하지 못한다.
재빨리 움직이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면 감각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것이 쌓여 그 사람의 존재감으로 나타난다.
업종과 관계없이 설명서 준수가 철저한 체인점에는 어디서나 만들어 낸 미소가 가득하다. 얼굴은 웃어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속은 보이지 말고 웃어라.” 그것이 설명서의 본질일 것이다. 돈을 벌려고 거짓이라도 웃으라고 가르치니 인간의 존재감도 점점 거짓스러워진다.
나는 주위에 감사하는 마음은 있어도 억지웃음을 짓거나 아첨하지 않는다. 그런 부끄러운 짓은 도저히 못 한다.
요즘 일본인은 ‘수치의 문화’를 완전히 잃었다. 서양에는 없고 일본에만 있던 귀중한 것이었다.
올바르고 거짓스럽지 않은 존재감을 지니려면 ‘부끄러움’이라는 감각부터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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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진짜 나’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답] 막다른 상황을 겪으면 ‘진짜 나’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승부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많은 사람은 거의 이길 듯 우세한 때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게는 열세에 몰려 더 물러날 곳 없는 순간이다.
승부는 기본적으로 혼자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가 곁에 있으면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때의 싸움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아 혼자 가는 편이 움직이기 쉽다.
막다른 곳에서는 활활 타는 불길도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화재 현장의 괴력’이라는 말처럼 사람은 몰리면 평소에 없는 힘을 낸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본성이 드러난다. 평소 숨긴 본성도 이성의 굴레가 풀리면 밖으로 나온다. 평소 멋진 말을 해도 막다른 곳에서 한심한 모습을 보이면 소용없다. 평소 잘난 체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모습을 드러내기 쉽다.
해고당하고 허둥대는 사람도 결정적인 순간에 약한 사람이다. 나는 몰릴 때야말로 “좋아, 한번 해 보자”는 의욕이 솟고 온 감각이 깨어난다.
자기를 모르겠다면 막다른 상황을 겪어 보라. 진짜 자신을 알게 된다.
압박받는 자리에서 긴장해 크게 실패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때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할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그 한심한 자신이 진짜 자신이다. 그것과 똑바로 마주해야 더 강하고 단단해진다.
한심한 자신을 보기 싫어 막다른 상황을 피하면 언제까지나 약한 채다. 그래서 나는 소년 시절부터 일부러 자신을 그런 곳에 몰아넣고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라고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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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아를 찾는 여행’을 말하지만 여행에 막다른 상황이 없다면 진짜 자신을 찾을 수 없다.
그런 상황이 흔치 않다고 한다면 곤란과 문제 속으로 뛰어들어라. 인간관계에는 문제가 따르며 회사와 학교에서도 벌어질 것이다.
문제를 보고 모르는 체하지 말고 일부러 끼어들어 해결하라. 처음에는 잘되지 않겠지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거기서 자신을 알고 또 다른 문제에 도전하면 된다.
나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니 배운 것은 모두 ‘독학’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독립한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평생 자립하거나 독립하지 못하고, 무엇을 깨닫지도 못한다. 나는 약한 자신을 알며 그것을 배웠다. 인생에 중요한 ‘자기만의 사는 지혜’는 그렇게 독학으로 붙잡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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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는 제가 두렵습니다.
[답] 늘 솔직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틀 밖으로 벗어나도 아무 문제가 없다
내게는 이메일과 편지로 여러 상담이 온다. 그것을 보며 ‘사람의 고민은 결국 자기가 뿌린 씨앗’이라고 느낀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나쁜 싹’을 키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쁜 싹을 품은 사람이 많고, 그것을 키우면 고민은 늘기만 한다.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은 동심을 떠올리면 나쁜 싹이 크게 자라지 않는다. 동심은 교활하고 비겁한 것을 싫어하며 아무것이 없어도 노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손익만으로 보지 않고 경마장과 경륜장, 파친코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나는 대자연에서 놀아도 그런 곳에서는 놀지 않는다. 그런 내 인생에서 마작은 상당히 이질적이다. 마작은 대표적인 도박이고 ‘어른의 놀이’를 하지 않는 나와 인연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 처음 본 나는 그 이질적인 세계로 뛰어들었다. 잘하는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못하고 익숙하지 않으며 맞지 않는 것에 뛰어드는 것이 내 성질과 인생이다.
마작 속에 들어가 곧 이질적인 것은 마작이 아니라 마작을 하는 인간임을 깨달았다. 알수록 “학교가 가르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싹텄다.
그 뒤 뜻과 흐름이 이끄는 대로 거스르지 않고 계속했다. 남은 도박이라 여기지만 내게 마작은 ‘스승’이며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지금도 마작에서 배운다. 바로 독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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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난 ‘이탈자’다. 회사나 학교에서 벗어났다고 느낀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용기와 솔직함 때문에 벗어났다면 그대로 계속해도 된다. 그러나 비뚤어짐 때문에 벗어났다면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좋은 방식과 나쁜 방식이 있다.
나는 비뚤어져 사회의 틀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타고난 괴짜여서도, 자포자기해서도, 화풀이와 열등감이나 뻔뻔함 때문도 아니다.
늘 솔직한 자신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래서 작은 용기가 생겼고 틀 밖에 나와도 고독하지 않으며 “이것으로 됐다”고 납득했다.
솔직함과 용기를 지니고 사회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세상도 조금 나아질 것이다.
“솔직함과 용기.” 오래전부터 도장생에게 해 온 이 말을 당신에게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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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더 편하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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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여러 가지를 깊이 생각하느라 좋은 선택을 내리지 못합니다.
[답] 선택지를 줄이면 보이는 것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해외의 문화와 학문,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흐름은 전후 더욱 거세졌다. 일본은 경제 부흥을 가장 큰 목표로 내걸고 해외의 지식과 기술, 제도를 탐욕스럽게 흡수했다.
고도 성장기를 거쳐 일본 경제는 되살아났고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가난한 나라에서 풍요로운 나라가 되자 많은 일본인이 기뻐했을 것이다.
종전 직전에 태어난 나는 아무것도 없던 전후 부흥기와 고도 성장기를 몸으로 겪었다. 치솟는 경제 성장에 들뜬 사람들을 보며 “인간도 사회도 이렇게 복잡해졌는데 앞으로 어쩌려는가”라고 느꼈다.
지금 일본의 국가 제도와 경제 구조는 지극히 복잡하다. 옛 무리에는 사냥하는 사람과 보금자리를 지키는 사람 같은 단순한 관계만 있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역할이 복잡하게 얽혔다. 의사가 통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실 한 가닥은 풀기 쉽지만 열 가닥, 스무 가닥이 얽히면 쉽지 않다. 지금 일본은 백 가닥, 이백 가닥이 뒤엉킨 상태다. 정치와 경제가 모두 얽혀 풀 수 없다. 곳곳에서 문제가 터져도 푸는 법을 모르니 방치한다. 연금과 국가 부채만 보아도 분명하며 혼란은 날마다 깊어진다.
복잡해진다는 것은 알기 어려워진다는 뜻이고, 알기 어려우니 귀찮다. 그래서 문제가 손도 대지 않은 채 남는다.
사회가 복잡해지면 인간과 인간관계도 복잡해진다. 세상은 복잡한 것을 고상하게 여겨 사람들이 쓸데없는 지식까지 집어넣으며 스스로 복잡해진다. 인간관계가 옅어지고 고독한 사람이 늘어나는 데에는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풍조도 짙게 비친다.
나는 복잡한 사회와 거리를 두고 단순하게 사는 일을 소중히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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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각하기’ 때문에 복잡해진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지 않고 ‘느끼는 대로’ 살았다. 작귀회에서는 “1초 안에 패를 버려라”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복잡함이 빠지고 느끼는 대로의 단순함이 남는다.
생각에는 망설임과 잡념, 손익 계산이 끼기 쉬워 복잡해진다. 그것을 모두 걷어 내야 단순함이 보인다.
성공한 이들이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 “이렇게 하면 큰돈을 번다”는 책을 내지만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니 사람은 더욱 복잡해진다.
복잡함 뒤에는 반드시 어떤 장치가 숨어 있다. 복잡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단순하게 살아온 내게는 훤히 보인다.
천 개 중 하나를 고르려면 정답 하나를 위해 999번 실패해야 한다. 둘 중 하나를 고르면 잘못도 금방 깨닫고 반성하고 고치기 쉽다. 좋은 선택을 하고 싶다면 선택지를 줄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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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절친한 친구라고 부를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답] 절친한 친구를 억지로 만들면 괴로운 것은 결국 자신뿐이다
일본에는 화합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다고 하지만 지금도 그런 문화가 있는가. 오히려 화합을 깨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건너편 세 집과 양옆 이웃’이라는 말처럼 예전 공동체에는 긴밀한 연결이 있어 그 원을 벗어나서는 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웃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친구가 있는가?”라고 물으면 대부분 있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친구가 없다. 대신 ‘동료’가 있다.
자신과 친구 사이에는 직선, 곧 개인 대 개인의 관계가 있다. 반면 동료의 관계는 ‘원(輪)’이며 그것이 곧 ‘화합(和)’이 된다.
개인의 연결은 같은 가치관과 세대에 한정되어 폭이 좁다. 원의 연결이 되면 단숨에 넓어진다.
손주와 도장생, 일하며 만난 편집자도 내 동료다. 늙거나 젊거나, 영리하거나 어리석거나, 고상하거나 천박하거나, 밝거나 어둡거나 상관없다. 동료의 원은 물 위의 파문처럼 넓어진다. 친구 관계가 현대 사회 특유의 무리를 만든다면 동료 관계는 태고부터 이어진 본능적인 무리다.
친구가 없어 고독하다고 고민한다면 상대에게 직선적이고 확고한 연결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마음은 계절처럼 날마다 변한다. 반년 전과 지금의 마음도 다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으며 그것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
그런데도 마음과 가치관이 맞는다는 확고한 관계만 바라면 “저 사람은 변했다”, “또 배신당했다”며 친구가 줄어든다. 정신을 차리면 혼자이고 기다리는 것은 고독뿐이다.
“절친이니 괜찮다”는 감각은 버려라. 마음이 변해 배신당했다고 낙담하는 정도면 그나마 낫다. 확고한 관계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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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뇌된 상태가 되어 “내 잘못이 아닐까” 하고 자신을 탓하거나, 배신당한 일마저 훌륭하다고 느끼는 위험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친구와 절친을 바랄수록 자신이 괴롭다. 개인을 잇는 직선이 아니라 원을 그리는 동료의 감각을 받아들이면 인간관계는 크게 달라진다.
많은 사람이 인간관계로 고민하는 것은 서로 이해하고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상대를 알고 싶은 까닭도 모르면 불안해서다.
하지만 마음은 변한다. 태양처럼 밝고 알기 쉬울 때도 있고 달처럼 희미할 때도 있다. 달빛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적다. 완전히 어두운데 서로 알려고 하면 정면으로 부딪친다.
나는 인간끼리 서로 이해할 수 없기에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남녀 사이는 더욱 그렇다.
동료라는 감각이 있으면 서로 이해하지 못해도 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원은 당신의 가능성을 더욱 넓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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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주위의 나쁜 감정에 쉽게 끌려가 기분이 상하곤 합니다.
[답] 싫은 일이 생기면 그와 정반대되는 일을 해 보라
몸 상태처럼 기분에도 오르내림이 있다. 몸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지만 기분은 그렇지 않다. 기분을 회복하려면 전환하는 법이 중요하다.
전환이 서툰 사람은 가라앉은 기분을 끌고 다닌다. 도장생 중에도 직장에서 겪은 싫은 일을 그대로 도장에 가져오는 사람이 있다.
작귀회의 마작은 탁자를 둘러싼 네 사람이 좋은 공간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바깥의 나쁜 일을 가져오면 그 흐름이 순식간에 나머지 세 사람에게 퍼져 우리가 지향하는 마작을 둘 수 없다.
사회에서 사는 한 싫고 괴로운 일과 무관할 수 없다. 누구나 낙담하고 가라앉고 기분이 내키지 않을 때가 있다. 나도 기분이 좋고 나쁠 때가 있다.
다만 나는 나쁜 기분을 끌고 다니지 않는다. 나만의 전환법이 있기 때문이다.
기분이 나쁠 때에는 쓸쓸함과 슬픔, 원한과 시기, 자기혐오 같은 나쁜 감정이 나온다. 나쁜 감정은 마음에 쉽게 눌러앉아 잊거나 지우기 어렵다. 그런 감정을 품은 사람끼리 끌어당겨 건강하지 못한 무리를 만들기도 한다.
나쁜 감정에 사로잡히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방법은 단순하다. 나쁜 감정을 느끼면 그와 정반대되는 일을 한다.
쓸쓸하고 슬프면 오히려 평소보다 남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감정을 지우지는 못해도 잠시 잊을 수 있고, 계속하면 차츰 엷어진다.
보통 쓸쓸하고 슬프면 친절함과 재미가 줄어든다. 바로 그때 그것을 밖으로 꺼내라. 반복하면 전환도 능숙해지고 인간적으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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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전환은 흔히 반대되는 일을 할 때 잘 이루어진다. 나쁜 감정에 붙들리는 사람은 자기 기분에만 너무 집중해 전환하지 못한다.
괴로울 때 남에게 화풀이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위의 원에서 벗어나 고립될 것이다.
남에게 싫은 일을 당했다고 똑같이 돌려주면 자신도 그 사람과 같은 ‘싫은 인간’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나는 그런 최악의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배려 없는 일을 당하면 평소보다 더 배려하고, 괴롭고 슬픈 일이 있으면 주위를 밝게 하려고 한다.
그 일을 계속했기에 의미 없이 무리 짓지도 고립되지도 않고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여 즐겁게 산다.
전환을 잘하면 결국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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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회사에서 제멋대로 구는 상사에게 지쳤습니다.
[답]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자신을 계속 바꾸어라
괴롭힘은 아이들 사회에만 있지 않다. 회사와 지역 공동체에서도 누군가를 비방하고 따돌린다. 그런 짓을 지겹지도 않게 반복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무리다.
얼마 전 아는 회사원이 “상사가 나만 미워하고 무슨 일을 해도 트집 잡습니다”라고 상담했다. 그를 야마모토라고 하겠다.
야마모토는 붙임성이 나쁘지 않은데 상사는 여러 부하 중 그만 표적으로 삼는다고 했다. 상사에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야마모토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고 느꼈다.
“당신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원인이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나만 좋으면 된다는 면이 없었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그에게 남을 깔보는 면이 느껴졌다. 어릴 때는 공부 못하는 아이를, 지금은 좋은 회사에 못 들어간 사람을 노력이 부족하다며 깔보았을지 모른다.
남을 깔본다는 점에서 야마모토와 상사는 같은 부류다. 닮은 면이 있어 서로 끌어당긴다. 하늘을 향해 뱉은 침이 그대로 자신에게 떨어지는 관계다.
남을 깔보는 사람은 자신이 무시당하면 지나치게 반응한다. 남에게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사람은 정작 공격에 약하다. 인간은 자기 약점을 숨기려고 남의 약점을 찌른다.
나는 그 사실을 알기에 강해 보이는 사람도 허세를 부릴 뿐임을 금방 알아본다.
“남의 행동을 보고 자신을 고쳐라”라는 말처럼 싫은 일을 당했다고 상대만 탓하고 피해자 의식에 빠져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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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할 수 없다.
“나에게도 그런 면이 있지 않은가?”라고 계속 자문해야 성장한다.
야마모토와 같은 처지의 사람은 많을 것이다. 끈질기게 불평하는 상사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상사의 성격과 자질은 바꿀 수 없다. 상사만이 아니라 자기 이외의 인간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변해야 한다. 왜 나만 공격받는지 원인을 찾아 자신을 개선하라.
나약해서인가, 완고해서인가. 지나치게 적극적이어서인가, 얌전해서인가. 성급히 단정해서인가, 우유부단해서인가. 과거로 돌아가 여러 각도에서 자신을 보면 많은 것이 보일 것이다.
상대를 바꾸려 하면 그는 변하지 않으므로 스트레스와 불만만 쌓인다.
상대를 어쩌려 하지 말고 먼저 자신이 변하라. 이 방식이 통하지 않으면 다른 방식으로 변해 보라. 개선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싫은 상사에 대처하려면 자신부터 계속 바꿀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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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아이의 훈육 문제로 계속 고민합니다.
[답] 기분이 좋을 때 아이를 훈육하라
근래 ‘학대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내가 아이를 기르던 시대에는 없었던 말이라 듣지 못했는지도 모르지만 자녀를 사랑스럽게 여기지 못하거나 훈육을 오해하는 부모가 늘어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본래 부모는 아이를 돕고 위험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그런데 요즘 부모는 오히려 위험한 쪽으로 이끈다.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 두려움을 느끼면 아이는 의지할 존재를 잃고 고립된다. 그런데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두렵게 하는 부모가 많다.
훈육과 학대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래서 훈육은 무섭다.
훈육이니 폭력을 써도 되고 자기 아이니 때려도 된다는 논리는 지극히 난폭하다.
옳고 그름을 가르칠 때 부모는 “머리부터 억누르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부모의 편의가 섞이지 않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부모 편의의 훈육은 대개 위에서 내려다본다. 그래서는 아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한다. 아이의 처지와 같은 눈높이에 서야 가르칠 것이 보인다.
훈육이라고 하면서 기분이 나빠 아이에게 화풀이하지는 않는가. 남편이나 아내와 잘 지내지 못해 짜증이 나 평소라면 화내지 않을 일에 고함친다면 그것은 훈육이 아니라 화풀이다.
맞벌이로 쉴 틈도 없고 부부가 잠깐 마주해도 불평뿐이다. 먹고살려고 일하는 것은 알지만 화풀이로 혼나는 아이는 견딜 수 없다.
그런 일이 계속되면 아이도 부모에게 반발하고 어느새 마음이 통하지 않는, 저마다 고립된 가족이 된다.
그렇다면 언제 훈육해야 하는가. 바로 자기 기분이 좋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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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나쁠 때 아이를 꾸짖으니 고함치고 때로 손찌검도 한다. 그렇게 될 줄 안다면 기분이 나쁠 때는 꾸짖지 말고 좋을 때만 훈육하면 된다.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한 훈육에는 ‘싫은 감정’이 섞인다. 그 감정은 아이에게 전달되어 장래에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애초에 화풀이는 약한 사람이 하는 짓이다. 약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훈육할 때의 마음이 매우 중요하다.
금속인 구리는 전기가 잘 통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싫은 감정과 마음속 악도 주위에 쉽게 전해진다.
반대로 선과 좋은 일은 잘 퍼지지 않는다. “나빠지기는 쉽다”, “추락하기는 쉽다”는 말처럼 인간 사회에서는 긍정은 전하기 어렵고 부정은 전하기 쉽다.
그렇다면 인류가 지구에 나타난 뒤 줄곧 나쁜 쪽으로 향한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에서 쉽게 퍼지는 것은 자연의 흐름에 어긋난 나쁜 흐름뿐이다. 당신도 아이에게 어떤 마음을 전하는지 살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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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아이가 고독한 세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답] 은둔형 외톨이와 니트가 ‘우리보다 더 정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
후생노동성 조사에 따르면 15~34세 무취업자인 ‘니트’의 수는 근래 조금씩 오르내릴 뿐 증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35~49세 무취업자는 늘고 있다. 이른바 중년 니트까지 넣으면 일본의 니트는 분명 증가한다. 은둔형 외톨이와 니트는 더 이상 젊은 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왜 그런 상태가 되었고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약해서다”, “일할 마음이 없을 뿐이다”라고 잘라 말할 수 없다.
“방에서 나갈 수 없습니다”라는 아이에게 나는 먼저 “그럼 계단 중간까지만 가 보면 어때? 아래까지 갈 필요 없어. 싫어지면 곧 방으로 돌아오면 돼”라고 말할 것이다.
세 계단을 내려갈 수 있게 되면 “세 칸이나 갔구나. 다음에는 다섯 칸 가 볼까?” 하며 조금씩 거리를 늘린다.
방에서 한 발도 나오지 못하는 사람에게 바깥은 대모험이다. 엄청난 용기를 내야 계단을 내려갈 수 있다. 우리에게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일은 숨 쉬듯 당연하지만 그들에게는 계단 한 칸조차 몹시 어렵다. 우리의 일상적인 관점에서 하는 조언은 통하지 않는다.
내게는 날마다 상담 이메일과 편지가 온다. 방에서 나오고 싶지만 못 나오는 아이에게 “2층에서 1층도 못 내려와?”라고 해 봐야 소용없다. 한두 걸음이라도 밖으로 나오도록 권한다.
시간이 걸려 1층까지 내려오게 되어도 곧바로 밖에 나가라고 무리시켜서는 안 된다. “잘했어. 무서웠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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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준다. “무서웠어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하면 “그래, 한동안 가지 않아도 돼. 다시 모험하고 싶을 때 가 보렴” 정도로 그친다.
그런 꾸준한 작업을 계속하면 차츰 거리가 늘어 동네 편의점까지 갈 수 있다. 그때도 “무섭지 않았지?”라고 하지 않고 “무서웠지. 잘했어”라고 말한다. 아이가 별로 무섭지 않았다고 할 때 비로소 “그렇지? 그렇게 무서운 일은 아니지?”라고 말한다.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지금은 사회 전체가 미친 시대다. 그런 시대에 은둔형 외톨이가 된 사람은 어쩌면 우리보다 정상적인 신경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서점의 ‘불황에 돈 버는 법’ 같은 책도 결국 사람을 속이고 앞서는 법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텔레비전도 교활한 사람이 올바른 사람을 속이려는 것뿐이며 진실은 하나도 전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은 감각이 마비되어 남을 속이고 기만하면서 영리하게 무리 짓는 것을 똑똑하다고 착각한다. 은둔형 외톨이는 자기 감각을 마비시키는 일을 견디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피해자를 만든 미친 사람들이 버젓이 활보하는 곳이 현대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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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이 주위에 없어 쓸쓸합니다.
[답] 어설프게 가치관을 품지 않으면 일조차 즐거워진다
연예인의 결혼 기자회견에서 “가치관이 같아서”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럴 때마다 “가치관이 같은 사람이 어디 있어”라며 어이없어한다.
개성이 사람마다 다르듯 가치관도 제각각이다. 오래 산 부부도 같지 않고 피를 나눈 부모와 자녀, 형제도 다르다. 2~3년 사귄 연인이 같을 리 없다.
애초에 나는 ‘가치관’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일치하느냐로 사물을 보는 데에는 자신을 고상하게 보이려는 마음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오만이 느껴진다. 가치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이는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깔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잰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치관은 곧 ‘돈에 대한 관점’이며 손익과 편의가 빚어낸다.
내가 그 말을 싫어하는 것은 돈 냄새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사회의 무리도 가치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듯하다.
나는 현대인이 혈안이 되어 모으는 지식과 정보도, 자격증도 없고 학문도 모른다. 요즘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가치를 모르는 남자’다.
그래서 이런 삶을 걸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돈의 가치를 잘 몰랐기에 나로 남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했는가. 인생은 변화와 선택의 연속이므로 나에게도 척도는 있다. 아주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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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가, 재미없는가.
그뿐이다. 태어난 뒤 판단 기준은 오직 그것이었다. 험한 길이고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어도 재미있다고 느끼면 그쪽을 골랐다.
손이 많이 가는 여성을 아내로 고른 것도 “고생하겠군”이라는 생각 뒤에 “무슨 일을 저지를까?”, “나도 온전하지 못할지 모르겠군” 하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 같은 척도지만 내게 모든 것은 어린 시절의 연장이다. 작귀회 활동과 책과 강연,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모두 놀이다. 대타 기사를 한 것도 돈과 명예 때문이 아니라 더 강한 사람과 겨루고 싶어 자연스럽게 그 길로 갔을 뿐이다.
고상한 가치관을 가진 어른은 놀이하는 마음을 잊는다. 그래서 일을 즐기지 못한다. 내가 말하는 놀이는 돈이 들지 않는 놀이를 즐기는 마음이다. 동심으로 돌아가면 업무의 압박도 즐거움으로 바뀌고 좋은 동료도 저절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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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답] 인생은 숫자와 결과가 전부가 아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숫자로 잰다. 회사의 연 매출과 매상, 연봉과 토익 점수. 아이도 날마다 시험 점수로 측정되고 편차치로 미래가 정해진다.
돈이 움직이는 장사 세계가 숫자에 잠기는 것은 어느 정도 어쩔 수 없지만 이제 인간성까지 숫자로 잰다.
학교 성적표와 인사 평가까지 모든 것을 수치화한다. 높으면 우수하고 낮으면 열등하다는 안이한 제도와 숫자에 인간이 얽매이고 조종된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물건과 돈이 실제로 움직이지 않고 숫자만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주식도 키보드를 두드려 거액을 움직이니 금전 감각이 마비되고 게임처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투기 거래를 ‘머니 게임’이라 한다. 세계 불황으로 회사가 망하고 생업을 포기하는 등 부당한 일을 겪는 사람이 많다. 원인 가운데 하나가 가상공간의 머니 게임이며 지나친 자본주의의 폭주는 피해를 더욱 키울 것이다.
나는 예부터 숫자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험과 성적표도 아무래도 좋다. 숫자에 기대지 않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숫자로 참된 인간을 알 수 없다. 시험 점수가 높은 사람과 봉급을 많이 받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진짜 인간성은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곳에 숨는데 대부분은 표면의 숫자로 판단한다. 그래서 겉으로 좋은 사람인 체하는 교활한 자에게 속는다.
숫자에 울고 웃으며 그것이 전부인 세계에 물들면 인간성과 자기 자신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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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사회라는 무리 안에서 사람들은 숫자로 1등을 하려고 앞다툰다.
작귀회에 오는 젊은이도 처음에는 숫자에 사로잡힌 더러운 마작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마작에서 경제색과 정치색을 없애는 시도를 계속한다.
보통 마작은 점봉을 많이 모은 사람이 이기지만 작귀회의 마작은 점수가 높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이 아니다.
경쟁 사회는 ‘결과가 전부’라는 결과 지상주의로 성립한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싸움법은 몹시 비열하고 더럽다.
작귀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결과가 좋아도 과정이 나쁘면 전혀 평가하지 않는다.
네 사람이 점수 1등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공간을 함께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작귀회의 마작을 ‘마작이면서 마작이 아니다’라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생은 계산대로 풀리지 않는다. 숫자에 사로잡혀 살면 자기 힘으로 개척할 수 없다. 숫자와 결과가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넓어지고 지금보다 편하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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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낯선 사람이나 윗사람 앞에서는 긴장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답] 긴장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압박을 ‘보람’으로 바꿀 수 있느냐에 달렸다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가끔은 싫은 일도 한다는 성질이라 마지못해 승낙했다. 내 책을 소개한다기에 함께 만든 편집자도 데려갔다.
방송국 분장실에서 감독과 회의한 뒤 촬영했다. 30분 프로그램인데 세 시간 가까이 찍었다. 좋은 부분만 이어 붙이는 업계이니 어쩔 수 없다. 끝난 뒤 도장생과 편집자와 단골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했다.
그때 편집자가 “회장님은 어디에 있어도 똑같습니다”라고 했다. 분장실에 누워 있을 때와 회의할 때, 촬영할 때와 식사할 때 모두 같은 상태라는 말이었다.
방송에 익숙한 사람도 아닌데 보통이라면 긴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릴 때부터 긴장한 적이 없다.
소년 시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한 놀이를 날마다 해 웬만한 일은 “죽지는 않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긴장하지 않는 정신과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긴장은 단단히 팽팽해진 상태다. 고무풍선은 부풀지만 얇은 유리 풍선이라면 어떨까. 긴장한 사람의 정신은 유리 풍선과 같아 조금만 압력이 가해져도 산산조각 난다.
“너무 긴장해 머릿속이 하얘졌다”는 것은 유리 풍선이 깨진 상태다. 정신이 무너지면 생각할 수 없고 압박이 클수록 그 가능성도 커진다.
긴장을 잘하는 사람은 압박받을 때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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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나는 압박을 ‘보람’으로 바꾼다. 압박받는 자리는 그만큼 큰 책임을 지는 곳이며 선택된 사람만 그 압박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책임이 큰 순간 “좋아, 한번 해 보자”는 마음이 든다. 웬만해서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실패도 전혀 두렵지 않다.
평소보다 ‘좋은 나’를 보이려 하지도 않는다. 방송과 강연에서 긴장하지 않는 것은 좋은 말을 하고 모두를 감동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금방 긴장하는 사람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강박과 자신을 더 좋게 보이려는 허영 때문에 스스로 팽팽해질 뿐 아닐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한때 현대 사회의 무리에서 고립되어도 있는 그대로 살면 언젠가 동료가 모인다. 압박을 보람으로 바꾸고 “실패해도 죽지는 않아”라며 있는 그대로 맞서라. 그것이 중요한 순간을 넘는 데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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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일을 자꾸 미루는 버릇을 고치지 못합니다.
[답] ‘이건 싫다’고 느끼는 일부터 얼른 처리하는 습관을 들여라
“오늘은 하루가 길다”, “오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누구나 느껴 보았을 것이다.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면 길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빠르게 지난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느끼는 방식은 같지 않다. 같은 날도 상황과 환경에 따라 1분, 1초가 크게 달라진다. 시간의 흐름은 모두에게 공통되지 않으므로 느끼고 쓰는 법이 중요하다.
한 시간 걸릴 작업도 서두르면 40분에 끝낼 수 있다고 느꼈다면 그렇게 끝내는 편이 좋다. 한 시간이 있다며 처음 30분을 허비하면 뒤의 30분에 부담이 몰린다.
초조하게 맞추면 일이 거칠어지고 ‘일이 엉성하고 납기가 늦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굳는다.
작귀회에서는 ‘준비·실행·마무리’를 구호처럼 쓴다. 세 가지를 빈틈없이 하면 모든 것에 제때 맞출 수 있다.
나는 한 시간 걸리겠다고 생각하면 40분에 해내겠다고 마음먹는다. 줄였다고 일을 거칠게 해서는 본말이 전도된다. 빠르고 꼼꼼하게 준비·실행·마무리의 순환에 따라 한다.
‘한 시간이나 있다’가 아니라 ‘40분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처음부터 집중하고, 앞에서 힘쓴 만큼 뒤에 여유가 생긴다. 그 여유가 꼼꼼한 작업으로 이어진다.
한 시간에 겨우 끝낸 일과 40분 만에 끝내고 남은 20분을 확인에 쓴 일 중 무엇이 낫겠는가. 답은 분명하다.
작귀회에서는 ‘제때 맞는다’, ‘제때 맞지 않는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모임 시간에 자주 늦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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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나 언제나 일이 늦는 사람은 ‘제때 맞지 않는 일’이 쌓여 인생 자체가 ‘제때 맞지 않는 삶’이 된다. 그러면 집단에 뒤처져 고립될 수도 있다.
나는 늘 도장생에게 “준비·실행·마무리를 제대로 하면 모든 것이 돌아가 제때 맞게 된다. 그것이 인생의 걸음으로도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도장생은 모임 시간에 늦지 않는다. 빠른 사람은 한두 시간, 심지어 세 시간 먼저 모인다.
사고로 전철이 늦고 도로가 막히는 일은 흔하다. “사고 때문에 전철이 늦었습니다”라고 변명할 바에는 30분 먼저 나오면 된다. 제때 맞느냐는 평소 마음가짐에 달렸고, 날마다 쌓인 행동이 제때 맞는 삶을 만든다.
일이 자주 늦는 사람은 ‘싫다’고 느끼는 것부터 얼른 처리하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미루기 때문에 싫은 것이 계속 남고 싫다는 마음도 커진다.
먼저 싫고 귀찮은 것에 손을 대라. 인생에서 제때 맞으려면 거기에서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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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자연이 당신을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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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회사 동료들과 붙어 다닙니다.
[답] 요즘 직장인은 똥에 달라붙는 파리와 같다
자연계에는 몸을 지키려고 무리를 이루는 동물이 많다. 동물의 무리는 종을 이어 가기 위해 본능에서 나온 지혜지만 인간의 무리는 본능과 정반대인 손익 계산에 지배된다.
아무도 해치거나 따돌리지 않는, 손익 없는 본능적인 무리라면 좋겠지만 인간의 무리는 다르다. 자신을 지키려고 모이면서 그 안에서 경쟁하고 누군가를 밀어낸다.
회사와 사적인 친구 관계 모두 내 눈에는 이제 ‘무리 짓기’가 아니라 ‘달라붙기’로 보인다. 무리라는 말도 좋은 뜻은 아니지만 달라붙기보다는 낫다.
사회를 보면 달라붙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러니 아첨을 팔고 비굴하게 구는 일도 아무렇지 않다. 서로에게 달라붙는 데 익숙한 인간은 똥에 달라붙는 파리와 같다.
자본주의 경제는 이익으로 성립한다. 사람들은 이익과 주식에 달라붙어 돈 벌고 앞서려고 혈안이 된다.
회사를 상장하면 큰돈이 들어오고, 가만히 있어도 주식이 움직여 돈을 벌며 맛있는 것을 먹고 미인과도 사귄다.
본래 일은 땀 흘리는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누구나 편하게 돈 버는 생각만 하고, 그것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자로 숭배받는다.
누구나 편하게 돈 벌겠다는 손익 계산에 지배되니 교활하고 더럽고 비겁한 짓도 아무렇지 않다. 심지어 그런 비겁함을 옳다고 여기는 풍조라 더욱 나쁘다.
“한몫 얻고 싶다”는 마음으로 무언가에 달라붙고 그것을 “노력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것이 요즘 보통 직장인의 모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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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무언가에 달라붙어 있음을 아는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살피지 않으면 무리 짓기와 달라붙기의 차이를 알 수 없다.
자연계 생물을 보면 인간 사회가 얼마나 모순되고 불순한지 알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살아 경제에서 강렬한 악취가 나고, 수많은 사람이 눈치도 못 챈 채 달라붙는 모습이 보인다.
경제, 곧 돈에 달라붙은 사람에게 자연계 동물과 같은 일체감은 없다. 그래서 무리 속에 있으면서 모두 어딘가에서 고독하다.
사회의 무리 속에서 고독하다면 적어도 사적인 영역에서는 ‘눈앞의 손익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자신을 지켜 보면 어떨까.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에 사는 한 손익 계산은 반드시 끼어든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도 “그래도 이것만은” 하는 부분을 목숨 걸고 지켜라. 그러면 삶은 지금보다 훨씬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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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평범하게 사는데도 불안만 커집니다.
[답] 주어진 삶을 버리고 스스로 만들어 내겠다는 의식을 지녀라
‘고독’이라는 말은 글자만 보아도 쓸쓸하다. 혼자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중요할지도 모르지만 ‘고(孤)’는 고립이라는 말처럼 주위와의 단절을 나타낸다. 내게 쓸쓸함은 병들고 괴로운 것과 같다. 그래서 고독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요즘 사람은 쓸쓸함과 함께 불안을 품고, 해마다 그 불안이 커지는 듯하다.
세상 곳곳에는 불안을 부추기는 장치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업이다. 안심·안전·안정이라는 말로 파고드는 사업은 사람의 불안을 가장 크게 부추긴다.
“이 음식은 안전합니다”라고 하면 달려들고 나머지는 위험해 보인다. 불안이 커지면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는다. 사업에 능한 사람은 그 약점을 찌른다.
누구나 불안하지만 그것을 증폭시키니 이상해진다. 자연계 동물도 생명이 위험하면 불안해한다. 그러나 불안을 키우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그대로 받아들인다.
자연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음’이 있다. 그것을 섭리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다. 모든 생물은 그 이음에 맞추어 자연의 흐름 속에서 산다. 식물은 태양에 맞춰 광합성하며 씨앗을 이었다. 흐름에 맞추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키고 영역을 넓히려고 자연의 흐름에 거슬러 살았다.
거스르면 여러 이상한 일이 생긴다. 법원과 경찰, 군대의 존재는 인간 사회에 얼마나 이상한 요소가 많은지를 그대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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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도쿄 스카이트리가 생겨 화제가 되었지만 그런 것을 만들고 기뻐하는 사람의 마음을 모르겠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에 맞서고 멀어졌다. 그 결과 마음에는 고독과 불안, 쓸쓸함이 남았다.
인류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며 오히려 생물 중 가장 약하다. 거대한 건물을 만들며 기뻐할 시간에 자기 약함부터 알아야 한다.
약함을 알면 강한 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된다. 불안에 사로잡혔다면 자기 약함을 자각하라. 불안이 엷어질 것이다.
경제 활동이라며 인공물을 계속 만들 바에는 밝음과 웃음을 만드는 편이 훨씬 낫다.
밝음과 웃음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좋은 감정을 만들어 내려는 의식만으로도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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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아무리 이야기해도 동료와 서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답]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강인하게 살 수 있다
누구에게나 고민이 한두 가지는 있다. 세계 불황으로 경제적 고민을 품은 사람도 많겠지만 어느 시대든 가장 큰 문제는 인간관계다.
당신도 인정받고 서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살기 어려우니 이해한다. 하지만 그 마음이 지나치게 강하면 오히려 자신을 괴롭힌다.
고독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서로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생각과 가치관, 취향이 다르므로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연인과 친구에게 배신당해 깊이 낙담하는 것도 그 마음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다.
나는 배신에 가까운 일을 당해도 원망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래 서로 이해할 수 없으며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주위 사람이 달라져도 “그 사람도 변했구나”라고 느낄 뿐이다.
인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계속 변한다. 한순간도 같은 것은 없다.
자연에는 사계절이 있고 날씨도 날마다 바뀐다. 변화가 이어지는 세계에 산다는 사실을 알면 늘 같아 보이는 풍경도 순간마다 달라짐을 깨닫는다.
그러니 인간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정답은 변하지 않는다고 배웠다. 시험에는 정답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에 익숙해지면 자연의 변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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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가지 못한다.
역사에서는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마다 기존 상식이 뒤집힌다. 과학에서도 불가능하다고 여긴 일이 새로운 발견으로 가능해진 예가 많다. 학문의 정답도 변한다.
자연계에서는 1+1이 반드시 2가 되지 않는다. 1×1과 1÷1, 1-1 같은 여러 형태도 있다.
‘사랑’ 하나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며 사랑 자체도 변한다.
하지만 인간은 확실한 근거를 찾는다. 불안정한 변화보다 안정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답은 변하지 않고 사랑도 영원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인간이 타고난 성질이다.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틀리는 것이 당연하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강인하게 살 수 있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동물적 본능은 깨어난다.
변화와 차이가 당연하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세상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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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불안한 현대에는 어떤 의식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까?
[답] 커지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라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뒤 세계 경제의 톱니바퀴는 계속 어긋나 있다. 최근에는 그리스 재정 적자에서 시작된 유로 위기가 세계를 흔든다.
오래 이어진 자본주의와 시장주의는 지나친 이익 지상주의로 변질되었다. 과도기를 맞은 지금 막다른 경제 체제가 세계 곳곳에서 무너지기 시작한 듯하다. 일본도 연금과 부채, 지진과 방사능 오염 등 문제가 산적했다.
그런데 나라를 이끌 정치가는 정치 놀이만 하며 모든 문제를 미룬다. 혼란은 극한까지 깊어졌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와 교육 등 모든 체제가 여기까지 무너지면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
난폭한 말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 사회와 그 안의 체제가 한 번 무너지는 편이 낫다고까지 생각한다.
과거 영토 전쟁의 시대에는 넓힌 사람이 이긴다는 상식이 있었다. 자본주의도 기본적으로 넓고 커진 사람이 이기는 체제다.
“넓어지면 좋다. 커지면 좋다.”
그 생각 아래 모든 것이 경쟁하고 상처를 주며 희생자를 만들어 지금의 세계가 생겼다.
현대 세계는 손쓸 수 없을 만큼 날뛴다. 진심으로 고치려면 뿌리부터 다시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
유럽연합의 위기는 그리스만의 탓이 아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도 경제라는 병을 앓는다.
유럽을 하나로 묶은 주된 이유는 미국에 맞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달러에 맞서 유로를 도입했지만 나라마다 경제와 물가가 달라 적절한 금융 정책을 쓰지 못하고 뒤늦게 대응하는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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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띈다.
한때 세계의 패자였던 유럽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유럽연합을 만들었겠지만 미국과 대등해질 날이 올지도 의심스럽다.
자연의 섭리로 보면 무엇이든 거대해질수록 통제하기 어렵다. 급성장한 기업이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갑자기 커지며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폐해가 여러 문제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과 유럽연합에 맞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자는 구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만들어 세상이 좋아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커지는 일이 아니라 작아지는 일이다. 국가 체제도 더 작아져야 한다. 중앙 권한을 지방으로 옮기는 지방 분권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
규모가 작아질수록 지금까지 손이 닿지 않던 작은 곳까지 닿는다. 그러면 고립되어 어둠으로 내몰린 사람에게도 빛이 비칠 것이다.
‘커지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경제 사회가 만든 그런 속임수에 걸려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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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불황이 오래 이어지는 것은 누구의 탓입니까?
[답] 지금 일본이 곤경에 처한 것은 우리가 뿌린 씨앗 때문임을 알아라
세계 불황에 휩쓸려 경제 사회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많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갑자기 해고된 사람, 아무리 일해도 돈이 모이지 않아 결혼하지 못하는 근로 빈곤층 젊은이. 내일도 알 수 없는 고립된 환경에서 망연자실한 사람이 계속 늘어난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 바꾸면 현재 일본의 상황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역사를 보아도 영원히 번영한 것은 없다. 성장 속도가 빠를수록 붕괴도 빨라진다.
일본 경제는 고도 성장기를 거쳐 버블 시대를 맞았다. 누구나 사회 체제 안에만 있으면 굶지 않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모두가 그 시대가 이상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버블 한가운데 있을 때 더 많은 사람이 “이건 좀 이상하다”고 깨달았다면 경제 추락도 이토록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비참한 처지를 한탄하고 나라와 정치가, 관료를 탓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놓인 원인은 우리가 뿌린 씨앗이다. 먼저 그것을 자각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라와 경제와 회사가 나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괴로운 것은 자신이 뿌린 씨앗에서 당연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당시 어른들이 뿌린 씨앗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그런데 피해자인 체하며 이것저것 탓해 봐야 통하지 않는다.
자기가 씨앗을 뿌렸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다음 일을 생각할 수 있다. 할 일은 간단하다. 그 씨앗 때문에 엉망이 된 풀밭을 한 번 베어 내고 새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풀을 베어 낸 황무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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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를 다시 일구어 씨를 뿌릴 수 있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토록 황폐한 사회에서 새싹을 틔우려면 모든 것을 초기화해야 한다.
다시 잘못된 씨를 뿌리면 도로아미타불이다. 다음에는 쇼와 시대에 뿌린 것과 완전히 다른 새 씨앗을 골라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어른들이 예전에 자기들이 뿌린 씨앗이 잘못됐음을 깨달아야 한다.
250년 넘게 이어진 에도 시대는 서양의 압력과 메이지 유신으로 끝났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좋은 일이었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 씨를 뿌리면 일부만 이득을 보고 나라 전체는 좋아지지 않는다.
사물을 복잡하게 하며 문명과 문화가 발전했을지 모르지만 그런 인공적인 방식은 언젠가 반드시 무리가 온다.
더 단순하고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방식과 생각으로 바꾸지 않으면 인간은 언젠가 지구에서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위기 뒤에 기회가 있다’고 한다. 지금이 위기라면 그 뒤에는 기회가 널려 있다. 그러나 손익에 사로잡힌 썩은 시선으로는 절대로 찾지 못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면 자연에 가까운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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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회사 부하들 사이에서 심한 괴롭힘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답] 인간의 공격성을 인정한 뒤 ‘괴롭힘’이 ‘장난 섞인 관심’이 되도록 의식을 바꾸어라
내가 교사가 된다면 중학교 교사가 되고 싶다. 사춘기와 반항기의 중학생이 10대 중 가장 다루기 어려운 나이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사도 여러 문제로 고생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가장 손이 많이 갈 중학생과 만나고 싶다. 괴로운 일과 편한 일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괴로운 쪽을 고른 내 성질 때문일지도 모른다.
괴롭힘으로 인한 자살과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도 시가현의 한 중학교 사건이 큰 문제가 되었다. 자연이 준 생명을 스스로 버려서는 안 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거나 상담하지 못한 채 괴롭힘으로 고립되어 목숨을 끊은 아이를 누가 탓할 수 있는가.
괴롭힘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근래에는 심각함과 음험함, 잔혹함이 해마다 깊어진 듯하다.
더 심해지고 퍼지는 일을 막으려면 학생을 똑바로 볼 수 있는 교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도자 역할을 할 교사가 한두 명만 있어도 여러 문제에 잘 대처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학교에는 그런 교사가 거의 없다. “괴롭히면 안 된다”고만 해서는 없어지지 않고, 당사자끼리 의논해 해결하라고 해도 해결할 수 없다.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교사는 논외다. 그런 인간은 교직에 있어서는 안 된다.
괴롭힘 문제에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누구에게나 ‘공격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에는 공격성이 있다. 생명은 공격성이 있기에 부모에서 자식으로, 자식에서 손주로 이어져 왔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과 미생물에도 공격성이 있으며 자신과 생명을 지키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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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인다.
의외일지 모르지만 저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공격성의 한 종류라고 본다.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도 공격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랑과 공격성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친절은 받아들이면서 공격성과 폭력은 부정한다. 하지만 공격성을 부정하기만 해서는 괴롭힘이 줄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공격성을 지녔음을 자각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공격성이 왜 괴롭힘과 폭력으로 나타났는가?”
“그것을 다른 형태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뿌리를 묻지 않으면 공격성을 가라앉힐 수 없다. 겉치레의 사랑과 친절로 해결됐다면 괴롭힘은 오래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작귀회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괴롭힘처럼 보일 일을 가끔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 사람의 개성적인 면을 꺼내 모두가 철저히 놀리고 야유하기도 하며, 당사자가 화를 내기도 한다.
저자는 마지막에 그것을 웃음으로 바꾸어 가라앉힌다며, 작귀회에서 하는 일은 괴롭힘이 아니라 장난 섞인 관심이라고 구분한다. 자리를 제대로 이끄는 지도자가 있으면 놀림을 웃음과 즐거움으로 바꾸고, 공격한 사람과 당한 사람도 끝에는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괴롭힘이 아니라 장난 섞인 관심.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 바뀌면 생각도 달라진다. 저자는 음험한 괴롭힘을 줄이려면 그런 사고의 전환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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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제 안에서 활력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답] ‘멋(粋)’이라는 살아 있는 감각을 되찾아라
요즘은 ‘이키(粋), 멋’라는 말을 듣지 못한다. 그것을 몸소 보여 주는 멋진 사람이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 주위에는 그런 어른이 몇 명 있었고 모두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동네에 싸움이 나면 달려오고 축제 같은 행사에서 중심에 서는 것도 그들이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서는 “할 때는 한다”, “자신은 뒷전이다”,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는 각오가 배어 나왔다.
지금의 어른에게서는 그런 각오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멋진 사람이 줄어든 것은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든 채소와 싱싱한 채소, 상할 듯한 생선과 신선한 생선 중 어느 쪽을 먹겠는가. 당연히 생기 있는 쪽이다.
자신을 뒷전으로 미루는 사람은 무언가를 위해 늘 움직이므로 생기가 좋다. 그 ‘생기(活き)’가 곧 ‘멋(粋)’으로 이어진다.
친절하고 영리한 사람은 많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생기가 있는가다.
현대인은 생기를 편리함과 풍요와 맞바꾸었다. 사회는 복잡한 것을 고등하고 상등하다고 여기지만 나는 하등의 상태 그대로가 좋다.
그래서 생기를 편리함과 풍요에 팔지 않고 살아왔다. 휴대전화와 운전면허증도 갖지 않은 것은 내 안의 생기가 사라질 듯했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편리함과 풍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사회에서 활력이 사라지면 그 안의 사람에게서 생기가 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생기 넘치는 아이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두 살쯤까지는 모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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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 살, 네 살이 되어 주위의 말을 이해하면 세상에 물든다. 그렇게 생기 있던 부분이 차츰 더러워진다.
앞에서 말했듯 ‘멋(粋)’은 ‘생기(活き)’이고 ‘삶(生き)’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감각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요즘 사람은 편리한 것에만 의존해 살아 있는 감각과 직접적인 접촉을 잊었다.
휴대전화와 컴퓨터처럼 전기와 전파를 이용하는 기기를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편리한 것이 잇달아 생기는 동안 현대 사회에서 더욱 소중히 해야 할 것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았으면 한다.
나는 편리한 것을 끝내 알지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모두가 알아 버린 꿀맛을 모른 채 죽을 것이다.
고독이라면 고독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으로 좋다. 그런 꿀맛은 알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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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얼마 전 5월 어느 날 손주와 산책을 나갔다. 아무 말 없이 출발했지만 둘이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역 건너편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혼자 꾸리는 장난감 가게가 있다. 낡고 허름한 가게 앞에서 100엔 남짓한 시대에 뒤처진 장난감을 팔았다.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장사가 어려우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됐다. 상점가라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고독한 가게’. 그곳에 가고 싶었다.
“문을 닫았으면 어쩔 수 없지.” 손주와 손을 잡고 거리를 느긋하게 걸었다.
역을 지나 가까이 가니 가게 앞에 장난감이 놓여 있었다. 손주를 데리고 어두컴컴한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잠시 뒤 기척을 느꼈는지 안쪽에서 고독감이 온몸에 밴 할아버지가 불쑥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한번 훑어보고 계산대 앞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오라는 말도 없었다.
안에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햇빛에 바랜 장난감 상자가 늘어서 있었다.
무리에서 떨어진 고독한 할아버지와 시대에 뒤처져 갈 곳을 잃은 장난감. 가게 안의 모든 것이 고독을 두르고 차가워져 있었다.
손주에게 갖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세 가지쯤에 관심을 보이다가 피규어 하나를 골랐다.
“이거 주세요.”
무뚝뚝한 할아버지가 계산하고 포장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포장한 물건을 받을 때 손주에게 “할아버지가 싸 주셨으니 고맙다고 말씀드려”라고 했다.
손주는 “할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고독감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아이의 말과 행동에 담긴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이 차갑게 굳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아주 조금 풀어 준 듯했다.
할아버지는 일어나 가게 앞까지 배웅했다. 우리가 나갈 때 손주와 눈높이를 맞추려고 몸을 낮추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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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와 줘.”
이 장난감 가게에는 구경만 하고 가거나 거들먹거리며 물건을 사는 손님은 있어도, 고맙다고 인사하며 떠나는 손님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뜻밖의 행동으로 고독의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는 아주 잠깐 고독한 세계에서 빠져나온 듯했다.
작은돈을 쓴 쇼핑이었지만 비싼 물건을 살 때보다 더 행복했다.
백화점에서 듣는 기계적인 “어서 오세요”, “고맙습니다”보다 할아버지의 “또 와 줘”라는 말에서 살아 있는 접촉의 따뜻함을 느꼈다.
무리 짓지 않는 삶을 고른 할아버지도 좋아서 고독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리 짓지 않음과 고독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손쉽게 무리 짓는 길을 고른다.
하지만 고독해지지 않으면서 무리 짓지 않는 삶은 존재한다. 내가 이미 증명했지만 답은 하나가 아니다. 그 방법은 사람 수만큼 있다고 해도 좋다.
손주가 할아버지의 차가운 마음을 녹였듯 사람의 마음에 따뜻한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접촉뿐이다. 그 안에 고독하지 않으면서 무리 짓지 않고 사는 길의 힌트가 숨어 있다.
장난감 가게에서 돌아오는 길, 손주와 맞잡은 손은 몹시 따뜻했다. 동네를 산책했을 뿐인데 내 마음도 따뜻함에 감싸였다.
“이런 행복도 있구나.”
함부로 무리 짓지 않고 거의 70년을 살아온 내 마음도 수긍했다.
사쿠라이 쇼이치
===== PDF 114쪽 | 저자 약력 =====
사쿠라이 쇼이치(桜井章一)
도쿄 출생. 대학 시절부터 마작을 시작해 반년 뒤 뒷세계 프로로 데뷔했다. 이후 패배가 허용되지 않는 대타 기사로 20년 동안 무패를 기록하며 ‘작귀(雀鬼)’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그를 모델로 한 소설·극화·영화 등을 통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현재는 마작을 통해 인간의 힘을 단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귀회’를 이끌며 전국에서 모인 젊은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베스트셀러가 된 『사람을 꿰뚫어 보는 기술』, 『지지 않는 기술』(고단샤), 『노력하지 않는 삶의 방식』(슈에이샤), 『역경을 헤쳐 나가는 지혜』, 『마음의 온도는 만능이다』(다케쇼보), 『운을 넘어선 진정한 강함』(니혼지츠교출판사) 등의 저서가 있다.
작귀회 공식 홈페이지: http://www.jankiryu.com/
===== PDF 115쪽 | 판권 =====
『무리 짓지 않고 사는 법』
2012년 9월 25일 초판 발행
2013년 8월 1일 전자판 제1판 발행
저자: 사쿠라이 쇼이치
발행인: 오가와 준
발행처: 소프트뱅크 크리에이티브 주식회사
주소: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 2-4-5, 우편번호 106-0032
전화: 03-5549-1201(영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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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기타무라 야스히로
편집 협력: 하기와라 세이이치로·하세가와 지미
표지 디자인: lil.inc (www.lotus-lab.com)
교정: 도리우미 미에(버드워크)
본문 조판: 아티산컴퍼니 주식회사
이 책에 관한 문의는 고가쿠칸 소프트뱅크 문고 편집부로 서면으로 보내 주십시오.
© Shoichi Sakurai 2012
Printed in Japan
ISBN 978-4-7973-7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