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은 1초면 충분하다』
사쿠라이 쇼이치
※ 원본 PDF 1~97쪽의 일본어 세로쓰기를 오른쪽 열에서 왼쪽 열 순서로 읽고, OCR 오류를 문맥에 따라 교정한 뒤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옮긴 번역문입니다.
※ 원문의 문단과 PDF 페이지 구분을 가능한 한 유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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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쪽 |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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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은 1초면 충분하다』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제 살아남을 수 없다!
‘작귀(雀鬼)’가 처음으로 들려주는,
순간적으로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사고법
사쿠라이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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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쪽 | 속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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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은 1초면 충분하다』
사쿠라이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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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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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문고판을 위해 새로 집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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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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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돌이켜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줄곧 ‘나만의 방식’을 끝까지 관철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언제나 스스로 더 위험한 쪽, 더 위태로운 쪽을 골라 살아왔다.
초등학생 때에는 도심으로 향하는 사철 철교 아래에 매달려 선로 위로 전차가 달리면 어떻게 되는지 시험해 보기도 했고, 급류가 흐르는 강 위에서 맞은편 기슭까지 이어진 가느다란 수도관 위를 건너기도 했다.
왜 그런 일을 했을까? 내 앞에 험한 길과 쉬운 길이 놓였을 때, 어린 나이에도 “험한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장래에 틀림없이 곤란해질 것이다”라고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늘 위험한 길을 골라 걸어왔다.
학교에서는 무엇보다도 ‘공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엉망진창인 주장일지 모르지만,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노는 곳이다”라는 내 지론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학교는 공부하려는 사람에게는 편안한 곳이지만, 공부하지 않고 6년 내내 놀려고 하면 몹시 고된 장소가 된다. 여기에서도 나는 일부러 더 험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6년 동안 계속하기란 어렵다.
당연히 교사들에게 꾸중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혼나도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번 마음속으로 정한 ‘나 자신과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까지 그래도 어떻게든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동안 평범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겪지 않아도 될 수많은 ‘수라장’을 통과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누구나 어릴 때부터 여러 선택을 하고, 나아갈 방향을 정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이다.
되고 싶은 직업을 고르고, 그 일을 위해 필요한 공부를 하고, 들어가고 싶은 기업에 입사했다.
그래서 오늘의 네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너에게 정말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너는 지금까지의 삶을 정말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왔는가.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렸을 뿐은 아닌가. 타협한 적은 없는가. 뜻을 이루지 못해 포기한 적은 없는가.
지금 다니는 회사도, 지금 하는 일도 정말 네가 들어가고 싶어서 택한 회사이고, 어떻게 해서든 하고 싶었던 좋아하는 일인가.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때가 묻은 듯한 느낌’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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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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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처럼 지금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정한 대로 살아왔다면 이 책을 더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며, 네가 정말 그렇다면 애초에 이런 책을 집어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네가 스스로 정한 대로 살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만큼은 어떻게든 스스로 선택하며 단단히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너다운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지, 그 ‘결정하는 법’을 내가 알려주겠다.
먼저 험한 길과 쉬운 길, 또는 그렇게 여겨지는 두 길이 있다면 나처럼 더 험한 길을 골라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길만 골라 걷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험한 길을 걸어야 할 운명을 맞게 된다.
그 길은 가파르고 괴로우며 고통스럽다. 믿었던 것에 배신당하고 누구에게도 상대받지 못한다. 정년퇴직한 뒤 할 일이 전혀 없어 죽기까지 남은 십여 년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회사원의 모습은 그저 애처롭다. 정년 이후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할 일이 없는 인생은 정신적으로 괴롭고 슬픈 여행일 것이다.
게다가 쉬운 길만 골라 온 사람은 막상 험하고 어려운 길과 맞닥뜨리면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한때 일본을 대표했던 일본항공이나 도쿄전력의 현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하고 직함을 잃은 엘리트 사원들에게 무엇이 가능할까.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그들은 그렇게 많은 수가 모여 있어도 결국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이대로라면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도 머지않아 앞서 일어난 원전 사고처럼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해질지 모른다.
“편한 길, 편한 길만 따라가면 반드시 마지막에 고통받게 된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가.
말 그대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반대로 평소 험한 길을 걷고 있으면 온갖 어려운 국면을 만나도 오히려 가볍게 대처할 수 있다. 고통이 어느 순간 즐거움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이를테면 수영할 때 700미터, 1,000미터를 헤엄치는 동안은 힘들지만 1,500미터를 넘긴 무렵부터 갑자기 몸이 편해지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너는 험한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라. 그리고 한번 결정했다면 망설이지 말고 그 길을 나아가라.
그 앞에는 진정한 삶의 기쁨이 틀림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방법이 이 책 안에 있으며, 내가 보기에는 결단이란 것은 ‘1초’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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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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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 문장의 이어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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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 목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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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은 1초면 충분하다』 목차
들어가며
제1장 ‘결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곧장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날
- ‘스스로 정한 일’을 실행했던 잊을 수 없는 남자
- ‘결정하기’ 전에 해야 할 일
- 비즈니스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밖에 결정하지 못한다
- 매달리는 삶의 폐해란 무엇인가?
- 본격적인 ‘회사 의존증’의 말로
- 결혼 상대를 고른다면 이런 사람을 선택하라!
제2장 왜 너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가?
- 얻는 것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 자존심에 얽매여 있지는 않은가?
-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 다른 사람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 단지 ‘참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 무조건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은가?
- 몸과 마음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은가?
- 응원해 주는 ‘동료’가 있는가?
- 각오가 정해지지 않은 것은 아닌가?
제3장 일하는 사람으로서 결단하기 위하여
- 인간에게 겉과 속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 공사(公私)의 균형은 ‘사적인 나’로 채워라!
- 시소 한가운데에 있으면 균형이 좋다
- 부장은 ‘차선의 왕’, 사장은 ‘최선의 왕’을 지향하라!
- ‘확실성’ 따위는 버려라!
- 경제신문 따위 읽지 마라!
- 발견하는 힘을 길러라!
- 눈에 보이지 않는 네 가지 ‘운’을 의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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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 목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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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바보 이반’이 되어야 한다!
제4장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 짙은 화장을 한 인생을 바라지 마라!
- 성장한다는 것은 때가 묻는다는 것
- 동심을 잊지 마라!
- ‘100점짜리 꼬마’보다 ‘15점짜리 장인’
- 장인의 삶에서 배워라!
- 네가 익혀야 할 것은 분위기다
- 익은 야자나무는 스스로 잎을 떨구고 열매를 떨어뜨린다
- 뿌리와 줄기와 잎을 소중히 하는 삶
- ‘운’을 내 편으로 만들면 좋은 결단을 할 수 있다
- 용기를 내어 ‘나쁜 일’을 할 수 있는가?
- 돈에 가까이 다가가면 반드시 화상을 입는다
제5장 인생을 결단하기 위하여
- ‘결단’의 사람, 하부 명인이 찾아왔다
- 이익이 되지 않는 ‘깨달음’이야말로 진짜다!
- 자신을 언제나 두 번째에 두면 좋은 결단을 할 수 있다
- 때로는 ‘포기하는’ 마음도 중요하다
- 만들고는 부수는 마음을 가져라!
- 우선 자기 업계를 부정할 수 있는가?
- 기분이 좋으면 판단은 빗나가지 않는다
- ‘너만이 될 수 있는 인간’이 되어라!
-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가?
-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결정하는 일도 있다
- 왜 ‘작귀(雀鬼)’이지 ‘작신(雀神)’이나 ‘작성(雀聖)’이 아닌가?
- 결단은 ‘준비·실행·뒷마무리’가 전부다
맺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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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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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결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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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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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날
어느 날 저녁 6시쯤이었을까. 역 앞에서 피곤한 표정의 회사원 두세 명이 멈춰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어떻게 할 거야? 늘 가던 곳에 들렀다 갈까?”
“죄송합니다. 오늘 밤은 집으로 곧장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그럼 잘 가.”
그 대화를 들은 순간 내 귀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곧장 돌아간다고? 농담하지 마. 곧장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 부하 직원처럼 보이는 남자가 어디에도 들르지 않고 귀가한다는 사실을 의심한 것은 아니다.
상사가 ‘늘 가던 곳’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평소에는 그 남자도 함께 갔을 것이다. 그것을 거절했으니 집에 무슨 일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
아내나 아이의 생일일지도 모르고, 고향에서 부모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 독신이라면 여자친구가 저녁밥을 만들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정은 아무래도 좋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어디에도 들르지 않고 집에 돌아갈 것이다.
그는 만원 전철을 갈아타며 자기 집이나 허름한 아파트로 돌아가겠지만, 그것과 ‘곧장 돌아간다’는 말은 의미가 다르다.
나는 초등학생 때 교실에서 문득 “오늘은 집까지 정말 곧장 가 보자”고 결심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곧장이다. 쉽게 말하면 학교와 집을 잇는 일직선 위를 걸어 돌아가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 고향은 교외라고는 해도 도쿄였다. 학교에서 집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 리 없다.
그 선 위에는 담이 있고 집이 있고 정원이 있고, 집 너머에는 또 다른 집이 있었다. 남의 집 안과 지붕 위를 지나지 않으면 집에 도착할 수 없었다.
다행히 직선 위에 강이나 바다는 없었지만, 있었다면 당연히 헤엄쳐야 했고 절벽이 있었다면 기어올라야 했다.
방과 후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학교를 나서자마자 집 한 채와 맞닥뜨렸다. 담을 넘어 부지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 집의 주민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곳에 낯선 아이가 담을 넘어 들어왔다. 명백한 무단침입이다.
“너 뭐야!”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높은 곳으로 뛰어오른 뒤, 1층 처마에 매달려 힘껏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놀란 집주인은 주변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지고 빨랫대로 찌르려고 했다. 마치 야생 원숭이 포획 작전 같았다.
몸이 가벼웠던 나는 다시 같은 방법으로 2층 지붕까지 올라가 집주인에게 혀를 내밀어 보인 다음, 이번에는 그 너머 집의 정원으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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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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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을 되풀이한 끝에 나는 마침내 우리 집까지 ‘곧장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물론 얼굴과 팔다리는 찰과상투성이였다. 그래도 햇볕에 그을린 얼굴로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기뻐하는 천진한 내가 그곳에 있었다.
그때의 상쾌함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정한 일, 그것도 문득 결정한 어려운 일을 자기 힘으로 즉시 실행했기 때문이다.
앞의 회사원이 “오늘 밤은 집으로 곧장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내가 반응한 이유를 이제 알았을 것이다.
그가 “어디에도 들르지 않고 귀가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지금껏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초등학생 시절의 일화를 떠올려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스스로 정한 일’을 실행했던 잊을 수 없는 남자
내가 왜 이 책의 첫머리에서 그런 어린 시절의 추억을 꺼냈는지 알겠는가.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일에는 기본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 그 어려움을 위험이나 리스크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다.
반대로 어려움이나 위험이 따르지 않는 일은 결정하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나에게는 학교의 ‘교칙’이 그런 것이었다. 교칙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규칙’ 역시 내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투성이였다.
이 책에서 무엇이든 무조건 “스스로 결정하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스스로 정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만 전하려 한다.
나는 오래전 도쿄 최대의 번화가 신주쿠를 근거지로 삼아 이른바 마작 대리 승부사를 하던 시절, 대단한 인물을 만난 적이 있다. 대리 승부사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할 테니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그 사람은 평소 이자카야 주인이었는데 몹시 과묵했고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를 물리면 예술가로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불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어쩌면 과거에 화가를 꿈꾼 적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느낄 정도였다.
나와는 단순한 마작 동료였지만 이자카야 주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그의 신원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마작을 할 때 이 사람은 늘 화료하지 않았다. 실력이 약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버리는 패를 보면 분명했다. 애초에 화료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재미가 생겨 한 번도 화료하지 않았더니 당연히 둘 다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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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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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그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쇼이치, 맞춰 주는구나”라며 웃었다.
그와는 그 정도의 사이였지만, 어느 날 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가부키초의 인파 속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온화한 말투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쇼이치, 지금까지 고마웠다. 나, 다녀올게.”
그리고 조금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남긴 채 네온의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어디에 가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며칠 뒤 신문에 날 만큼 큰 사건이 일어났고, 그가 살인범으로 자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느 거대 조직의 히트맨, 즉 살인청부업자였다.
신주쿠 번화가의 이자카야 점장이라는 신분은 그에게 더없이 좋은 은신처였다. 그는 여러 해 동안 표적이었던 그 세계의 거물의 움직임을 계속 쫓다가 마침내 기회를 잡은 것이다. 범행을 실행하기 직전에 우연히 나와 만났던 것이 틀림없다.
“쇼이치, 지금까지 고마웠다.”
지금도 그의 온화한 마지막 목소리가 내 귀에 남아 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사건에는 조직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그가 독단으로 실행한 범행이었다. 아마 의리를 느끼거나 어떤 사명을 느낀 순간 조직의 논리가 아니라 자기 판단으로 즉시 움직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몇 년 뒤 그의 이름이 다시 신문에 실렸다.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는 뉴스였다.
그는 스스로 자기 행동을 결정했다.
그리고 의리를 다하고 자수했으며 사형을 받음으로써 자기 인생에도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그 남자만큼 ‘스스로 정한 일을 끝까지 지킨 사람’을 알지 못한다.
‘결정한다’는 일은 때로 ‘목숨을 거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네가 알았으면 해서 일부러 이런 예를 든 것이다.
‘결정하기’ 전에 해야 할 일
한 남자가 스스로 정한 일을 지켜 사형 판결을 받았다.
당시의 나는 그 사건을 통해 ‘결정한다’는 말의 무게를 절절하게 느꼈다.
참고로 ‘결정할 결(決)’이라는 한자의 쓰임을 살펴보면, 결정한다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 알 수 있다.
‘決’ 자에 물 수변이 붙은 까닭은 원래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방 일부를 터서 고인 물을 흘려보내는 일을 ‘결(決)’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제방 일부를 터뜨리기로 할 때에는 망설이지 않고 명확히 정해야 한다. 그것을 ‘결단’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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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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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데서 ‘決’이라는 글자는 ‘마음속으로 정한다’는 뜻에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決’이 들어가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결의, 결심, 결연, 결행, 결사, 대결, 자결.
어느 말에서나 긴박감이나 비장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즉 ‘결정한다’는 행위는 본래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이자카야 주인, 아니 히트맨은 모든 것을 내던진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자기 생각대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결의·결심·결연·결행·결사·대결·자결이라는 ‘決’ 자에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말하기는 쉽지만 자신을 내던진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과 근성이 자리 잡고 있지 않으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던지면 여러 가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이 사람은 이익에 너무 집착하고 있구나”, “저 사람은 꾸밈없는 본래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식으로 상대의 속마음까지 보인다.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운영하는 마작 도장의 제자 가운데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하는 아이가 한 명 있다.
그 아이는 쓸데없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슬픈 광경을 보면 눈에 자연스럽게 눈물이 차오르고, 우스운 일을 보면 거리낌 없이 웃는다.
손익은 전혀 따지지 않는다. 마음도 솔직하고 건강하다.
그런 아이가 있어 주기 때문에 나도 언제든 나 자신을 내던질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을 버릴 수만 있다면 최선의 결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 아이에게 늘 감사한다.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에는 먼저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 자기 사정을 조금이라도 계산에 넣는다면 최선의 판단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두기 바란다.
갑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리는 일이 어렵다면 평소부터 자신을 두 번째로 두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하나의 단계가 될 수 있다.
비즈니스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밖에 결정하지 못한다
앞의 히트맨이 무엇보다 대단한 점은 누구의 명령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채 스스로 정하고 실행하고 뒷마무리까지 했다.
달리 보면 그는 줄곧 ‘무언가에 매달리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과연 회사원의 세계에서도 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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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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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그렇다면 왜 아닌가.
회사라는 조직은 기본적으로 팀플레이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는 회사원이 자기 힘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평사원은 계장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정할 수 없고, 계장은 과장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과장은 부장에게, 부장은 담당 임원에게, 임원은 이사회에 물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그것이 회사의 구조다.
그래서 보고·연락·상담, 이른바 ‘호렌소’가 철칙이라고 불린다.
이처럼 확인하는 기관이 많은 곳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 된다.
게다가 모든 사원은 ‘법인’이라는 법률상의 ‘사람’에게 매달려 살아가며, 그 대가로 매달 월급을 받는다.
그런 식으로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회사의 운명이 달린 큰 문제를 자기 힘으로 결정할 수 있을 리 없다.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상사에게 보고하고, 연락을 받은 상사는 그 위의 상사에게 다시 보고하고 상의하며, 또 그 위로 올라간다.
그런 곳에서 최선의 판단이 나올 리 없다.
가혹한 말이지만 앞서 일어난 원전 사고를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장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말입니다…”
회의에서 침을 튀기며 논쟁해 봐야 너희는 모두 무언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다. 부하가 상사와 싸울 권리 따위는 손톱의 때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다.
웃음이 나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회사원들이 사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그런 곳이다.
만약 훌륭한 상사가 있어서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정해라”며 결정권을 준다면, 그것은 원래 누가 어떻게 정해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내 여행지, 송년회나 환송회의 장소, 명절 선물의 품목 같은 일을 상사가 맡긴 적은 없는가.
그래서 나는 처음에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에는 기본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 그 어려움을 리스크나 위험이라고 바꾸어 불러도 좋다.
반대로 어려움이나 위험이 따르지 않는 일은 정하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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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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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리는 삶의 폐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매달리지 않는’ 삶을 살면 최선의 결단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그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
좋은 기회이니 잠시 생각해 보자.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언가에 매달리는 동물이다.
아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잠시라도 부모와 떨어지면 당황해 어머니에게 매달리려 한다.
본래 그런 습성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학교나 회사에 매달리는 삶을 살아간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인간이 학교나 회사에 소속되어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렸을 때에는 지금만큼 심하지 않았다.
동네에는 여러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오히려 회사원 가정이 적었을지도 모른다.
채소가게, 생선가게, 쌀가게, 빵집, 이발소, 미용실, 얼음가게, 막과자 가게, 자전거 가게가 있었다. 큰길에는 가구점, 양복점, 식당, 화장품점, 케이크 가게, 시계·귀금속점이 있었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장인들이 유리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실제로 일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나무통 장인, 게다 장인, 구리 세공인, 표구사도 있었다.
공동주택의 부엌 같은 곳에서는 아주머니들의 수다 모임이 날마다 열렸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제외하면 동네 사람 대부분은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이 그런 ‘매달리지 않는’ 인생을 살았다. 굳이 소속을 말하자면 마을 공동체 정도였다.
사람을 가리킬 때도 “골목의 경단가게 아저씨”, “모퉁이 자전거 가게 아들”이라고 불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만의 이름표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 사람들은 밝았고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가난했지만 모두 살아갈 자신감으로 넘쳤던 것처럼 기억된다.
그것 역시 ‘매달리지 않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매달린다’는 말이 와닿지 않는다면 전철에 비유해도 좋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학교나 회사라는 이름의 전철에 타고 싶어 한다.
왜 타려고 하는가. 자기가 운전하지 않아도, 쓸데없는 짓만 하지 않으면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학교라는 전철에서 내리는 역은 ‘졸업’이고, 회사라는 전철에서 내리는 역은 ‘정년’이다.
‘졸업’ 역에서 내린 학생은 다음으로 ‘회사’라는 전철표를 손에 넣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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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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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정년’이라는 역에서 내려진 사람은 그다음 표를 스스로 구해야 한다.
그렇게 전철에 맡겨 온 인생을 산 사람에게 전철이 급정거하거나 탈선했을 때의 비극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학생이라면 ‘니트족’, 회사원이라면 ‘구조조정당한 사람’이 된다. 거기서 다시 일어서려면 큰 고생이 필요할 것이다.
왜 그렇게 힘든지 알겠는가.
그들 대부분은 “이렇게 된 것은 학교 탓이고 회사 탓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언가에 매달리는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공통된 결점이다.
그런 상태로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회사원들이 하는 일에는 언제든 대신할 사람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우연히 그 전철의 손잡이에 매달려 타고 있는 승객에 지나지 않는다.
즉 회사의 간판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루만이라도 명함 없이 영업해 보라. 회사 이름을 전혀 쓰지 않고 업무 전화를 걸어 보라.
“사쿠라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어느 회사의 사쿠라이 님이신가요?”
이런 말을 듣고 곧바로 회사 이름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전철에 타서 손잡이에 매달린 채 인생을 걸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전철 안에서 ‘매달리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전철을 운전하는 사람, 즉 경영자뿐일 것이다.
그에 비해 옛 장인들처럼 ‘매달리지 않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평소 모든 일을 자기 힘으로 결정했고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의 책임도 스스로 진다는 자세로 살았다. 그래서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도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회사에 다니는 네게 이제 와서 ‘매달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라’고 말해 봐야 소용없다. 억지로 회사를 그만둘 필요도 없다.
“당신 책을 읽고 회사를 그만뒀습니다”라며 내가 운영하는 마작 도장에 찾아와도 곤란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회사원으로 살면서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장인다운’ 기술을 하나 익혀 두어라.
그것이 언젠가 네가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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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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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회사 의존증’의 말로
어느 날 밤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여성도 포함된 젊은 회사원 네 명이 술기운을 빌려 회사 안의 사람들을 험담하는 장면을 보았다.
말해 두지만 나는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험담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그래서 듣기 괴로웠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커서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내용은 시시한 상사의 흉이었다.
“나 정말 못 해 먹겠어. 농담도 아니고, 그 계장 최악이야. 회사를 그만둬 버릴까 봐.”
“그래, 우리 모두 그만둬 버리자.”
“좋아, 그러자.”
물론 그들이 회사를 그만둘 리 없다.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회사원들이 아무리 입에 거품을 물며 반론해도, 내가 보기에는 그들의 생활은 회사에 매달린 인생이다. 바꾸어 말하면 ‘회사 의존증’이라는 병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푸는 행위다.
의존이란 자기라는 중심축을 잃고 다른 것에 기대는 상태다. 알코올 의존증, 약물 의존증, 도박 의존증. 어느 것도 좋은 말은 아니다.
어떤 의존증이든 진행될수록 손쓸 수 없게 되고 말기 증상은 참혹하다.
물론 ‘회사 의존증’도 마찬가지다.
어느 일류기업의 임원이 순조롭게 출세 사다리를 올라 마침내 사장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회사에 더 오래 머물 수 있을까”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부사장을 비롯한 주변 임원을 예스맨으로 채웠다. 자기가 회장이 되자 그 부사장을 사장으로 앉혔고, 명예회장·고문·특별고문이 되어서도 계속 회사에 매달렸다.
그 회사에서 사장과 회장까지는 원래 있던 직책이었지만, 이후의 명예회장·고문·특별고문이라는 직책은 그가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무상하다. 마지막 특별고문 임기가 끝나 마침내 모든 일을 마치고 퇴임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일흔넷이었다.
마지막 출근을 하루 앞둔 날 그는 총무과를 찾았다. 총무부장은 긴장했다. 비록 늙었어도 과거의 대사장이 무언가 중요한 말을 꺼낼 듯했기 때문이다.
“특별고문님, 무슨 용무이십니까?”
전 사장은 총무부장에게 말했다.
“내일이면 내가 퇴임하는데, 어떻게 석 달치 정기권을 더 받을 수는 없겠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회사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큰 회사의 회장이라도 퇴임하면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 회사에 매달려 살아온 사람은 아무 직함도 없이 바깥으로 내던져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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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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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은 늙어서 버림받은 커다란 개와도 같았다.
회사는 결국 그 요청을 거절했고, 이후 명예회장을 비롯한 이름뿐인 직책을 대부분 폐지했다.
그 사람은 퇴직한 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치매에 걸려 폐인과 다름없는 입원 생활을 했고, 2년 뒤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가족만 곁을 지키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야말로 ‘매달리다 늙어 버린 폐해’ 그 자체다. 이런 유형은 모든 직책에서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고 누구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되는 일을 두려워한다.
네가 회사원이라면 이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교훈을 꼭 알아두기 바란다.
“편하게 살면 그 두 배의 괴로움이 반드시 찾아온다.”
모든 의존증의 금단 증상과 같은 이치다.
회사에 소속된 이상 누구나 ‘회사 의존증’에 걸린다. 일의 내용과 상관없이 수십 년 동안 고정급이라는 약물을 주입받으면 ‘무난한 삶만 고르는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앞의 사장은 그 약물을 50년이나 맞았기 때문에 마지막에 몇 배나 강한 금단 증상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지금 회사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매달리지 마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조금만이라도 매달리고 있는 손가락의 힘을 풀어 보라.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 살짝 손을 대고 있는 정도의 감각이면 더 좋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지금보다 자기 안의 중심축을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회사와 관계없는 취미나 스포츠 동료와 어울리거나, 휴일에는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참가하는 식으로 행동을 생활 속에 들여놓아도 좋다.
“저 사람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 뭐, 회사원이라고? 어디에 다니는데?”
이런 말을 듣게 되면 자신도 훨씬 즐거워질 것이다.
그 감각을 익히면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반드시 도움이 된다.
앞의 네 사람처럼 술을 마시며 상사를 험담하는 동안에는 상사가 결코 그들에게 중요한 일을 결정하게 맡기지 않을 것이다.
결혼 상대를 고른다면 이런 사람을 선택하라!
나는 첫머리에서 내 인생의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왔다고 썼다.
그리고 결정의 기준은 언제나 어려움이 따르는가 아닌가였으며, 반드시 더 험한 길을 선택했다고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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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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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에는 공부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철저하게 놀았다.
딱지치기에서 동네에 상대할 사람이 없어지면 한 시간이나 걸어 먼 마을까지 원정을 가서 나이 많은 아이들과 승부했다. 이기고 또 이겨 집에는 사과 상자로 수십 상자 분량의 딱지가 쌓였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물론 놀기만 했다. 중학교에는 더 넓은 지역에서 학생이 모이므로 싸움도 자주 벌어졌다.
선생에게도 맞섰다. 유도부 고문을 맡은 교사의 수업 중 일부러 도시락을 먹었다.
물론 혼이 났다. 하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교사가 체벌하려 하면 내가 먼저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얼굴 아래까지 이마를 들이밀었다. 그렇게 가까이 붙으면 때릴 수 없었다. 결국 선생도 질려서 점차 눈감아 주게 되었다.
마작을 시작한 것은 대학에 들어간 뒤였다. 해 보니 재미있을 만큼 잘 이겼다. 덕분에 학생 시절 용돈으로 곤란한 적은 없었다.
대리 승부사를 시작한 것도 대학 4학년 무렵이었던가.
대리 승부사란 야쿠자나 회사 사장 대신 마작을 치는, 말하자면 뒷세계의 승부사다.
하룻밤에 수백만 엔의 큰돈이 움직였다. 어느 때에는 패한 사장이 지불할 돈이 모자라 벤츠를 두고 간 일도 있었다.
너와 가위바위보를 한다고 하자. 한 번 이기면 100엔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번에 100만 엔이라면 어떨까. 상당한 압박을 느낄 것이다. 대리 승부사도 본질적으로는 그것뿐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압박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지지 않았다. 지면 내 목숨을 내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결정에는 위험이 따른다고 썼지만 당시의 나는 그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대리 승부사를 시작한 지 10년쯤 지났을 무렵 나는 한 여자와 결혼하기로 했다.
당시 내 주변에는 스무 명 가까운 여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 단 한 명을 골라 그 여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결정의 ‘기준’은 이전과 같았다.
그 많은 여자 중 결혼하면 가장 고생할 것 같은 여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결혼했다. 스스로 가시밭길, 험한 길로 나아간 것이다.
그 길은 사실 지금까지도 험하다.
일부러 그 여자를 고른 이유를 달리 말하면, 그녀는 내가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여자였고 다른 여자들은 내가 없어도 그럭저럭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쓸 생각은 없지만, 내가 결혼하기로 한 여자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악처라고 불려도 어쩔 수 없는 유형이었다. 내 아내가 되지 않았다면 그녀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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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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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도 아는 여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댁의 아내가 제게 1억 엔을 주겠다고 하는데, 대체 무슨 일인가요?”
이 일만 보아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와 솔직히 쓰자면 그녀와 결혼한 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의 어머니도 언니도 똑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 덕분에 내 문제 해결 능력은 비정상적일 만큼 높아졌고, 힘들고 가혹한 일에서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실은 좋은 일보다 나쁜 일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요강에 든 오줌을 그의 머리에 부었다고 전해지는 악처였다.
주변 사람들은 “왜 그런 여자와 결혼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도 꼭 결혼하시오. 나쁜 아내를 만나면 나처럼 철학자가 될 수 있으니.”
소크라테스와 똑같은 뜻은 아니지만, 네가 결혼을 결정한다면 ‘절망’을 필수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결혼은 ‘희망’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한다. 집안일과 빨래를 해 주고 성관계도 공짜다. 맞벌이를 하며 돈까지 잘 버는 아내도 있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에게 “너는 내게 정말 편리한 여자야”라고 거의 말하지 않는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로 얼버무릴 뿐이다.
평생의 반려자를 결정하면서 상대가 그저 자기에게 ‘편리한 여자’이면 되는가. 그것은 동반자가 될 여성에게 실례가 아닌가.
결혼 상대를 정한다는 것은 그녀의 인생에 전적인 책임을 진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 따위는 버리고 ‘절망’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돈을 벌어다 주고 당당하게 성관계를 즐길 수 있다. 잘만 하면 평생 세 끼를 먹고 낮잠까지 자며 살 수도 있다.
결국 서로의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오늘날 결혼의 대부분이다.
내가 아는 엘리트 회사원 가운데 일부러 이혼 경력이 있고 나이도 많으며 아이까지 딸린 외국인 중년 여성과 결혼한 사람이 있었다.
그 여성은 미인도 아니었다. 배가 나와 있었고, 굳이 말하면 서민 동네의 평범한 아줌마였다. 게다가 딸은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 문제아 중학생이었다. 그 딸은 학교에서도 문제를 일으켜 결혼 뒤 그는 자주 학교에 불려 갔다.
그가 유능한 회사원이었기에 친구들도 이 결혼에 놀랐지만 양가 부모와 친척들은 훨씬 더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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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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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부모와 친척들이 번갈아 찾아와 그에게 “속고 있다”며 교제를 그만두라고 거듭 타일렀다. 하지만 결국 집안의 명예 문제까지 겹치면서 그는 ‘부모도 자식도 아닌 사람’처럼 사실상 의절당했다. 재산도 나누어 받지 못했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본가와는 관계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그래도 그는 결혼을 밀고 나갔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자는 막대한 빚을 남기고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다른 남자와 도망쳤다는 소문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거봐,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듯 생활을 계속했다. 회사에 퇴직금 선지급을 신청해 아내가 남긴 빚을 모두 갚았다.
그의 퇴직금은 그것으로 전부 사라졌다.
도망친 아내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한때 문제아였던 딸은 마침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와 딸과 반려묘 셋이 함께 사는 생활이 몇 년 이어졌다. 그러다 딸이 이웃의 남성과 결혼하기로 한 어느 날, 그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놀랍게도 무덤은 미리 마련되어 있었다. 묘비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고만 새겨져 있었고, 그 밖에는 단 한 글자도 없었다. 의절당한 몸이니 본가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의 장례식에는 묘지 안에 다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였다. 회사 안팎에서 신망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마음을 아플 만큼 이해한다.
“이 여자는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조금만 잘못하면 나도 함께 망가질지 모른다.”
그는 그런 ‘절망’의 가장자리에서 결혼 상대를 결정했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네 삶의 방식도 저절로 바뀔 것이다. 놀라울 만큼 크게 달라질 것이다.
‘결정한다’는 일이 본래 얼마나 단단히 각오해야 하는 것인지, 반대로 먼저 편한 길을 고르면 그 뒤가 어떻게 되는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기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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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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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왜 너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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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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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는 것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언제였던가.
그날 밤 나는 도쿄의 유흥가에서 가장 화려한 가게 앞에 서 있었다.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흰 장갑과 감색 제복을 갖춰 입은 도어맨이 몹시 무거워 보이는 문을 열었다. 안에 있던 검은 양복의 매니저가 나를 정중하게 안쪽으로 안내했다.
담배 연기 너머에는 당시의 시대상을 상징하는 눈부시고 현란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호화로운 샹들리에 아래에서 아름다운 여자들이 치맛자락과 소매를 나풀거리며 돌아다녔고, 정재계 인사들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라이브 밴드가 재즈를 연주했다. 연주자 전원이 일어나 몸을 흔들며 연주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을 마시러 간 것이 아니었다.
당시 다니던 회사 사장의 지시로 어떤 돈을 지불하러 갔다. 액수는 무려 200만 엔이었다. 대졸 초임이 2만 엔 정도이던 시절의 현금 200만 엔이다. 지금 가치로 치면 2,000만 엔쯤 되는 돈뭉치를 사장은 젊은 내게 맡겼다.
그곳에서 본 광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의 장관이 대기업 사장과 담소를 나누는가 하면 경찰 최고 간부가 폭력단 두목과 즐겁게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여당과 야당 국회의원이 악수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문사 사장이 유명 여배우를 우익 거물에게 소개했다. 여배우는 그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졌고, 곧 그의 팔에 자기 팔을 감은 채 둘이 밖으로 나갔다.
‘대체 이 세계는 뭐지….’
잠시 뒤 이곳이 이른바 일본의 뒷무대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정치권과 재계, 언론, 우익, 야쿠자는 뒤에서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내 눈으로 보고 말았다.
나는 학생 때 마작을 배웠고, 이윽고 마작을 치는 일이 생업이 되었다.
마작장에 틀어박혀 지냈고 학생 중 가장 강하다는 말을 들었으며 용돈이 부족한 적도 없었다. 그래도 대학 4학년 때에는 취업시험을 보았다.
공학부였으므로 엔지니어가 될 예정이었다.
어느 제조업체에 입사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입사 전에 회사의 호출을 받아 찾아가니 젊은 계장이 “자네는 내 밑에서 일하게 될 걸세”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그 회사에 들어가지 않기로 1초 만에 결정했다.
본능적으로 “이런 사람 밑에서는 일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올바른 선택이었다.
너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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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한 이유도 없고 설명도 할 수 없지만 왠지 나쁜 예감이 드는 순간, “아, 이건 아니다”라고 느낀 적이 없는가. 나중에 돌아보면 그 지점이 인생의 갈림길이었던 경우가 있으므로 나쁜 예감은 무시할 수 없다.
보통 사람은 그런 예감 자체를 부정한다.
“아니야, 내 착각일 수도 있잖아. 사귀어 보면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그만두더라도 입사한 뒤에 해도 늦지 않잖아.”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을 믿었다.
이미 입사가 정해진 회사를 거절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남자의 삶’ 같은 것을 느꼈다. 무역 관계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순간적으로 이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사람 곁에 있고 싶었다.
일은 한순간에 결정된다.
“당신 밑에서 일하게 해 주십시오.”
“월급은 얼마를 원하는가?”
그 사장은 자기 회사에 들어오는 것을 즉시 허락하고 먼저 원하는 급여를 물었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대리 승부사 일로 돈을 벌고 있었으므로 월급이 필요하지 않았다.
“월급이 필요 없다고?”
“네.”
결국 나는 그 사장 밑에서 10년 동안 무급으로 일했다. 직책은 비서였다. 특별히 정해진 업무는 없었고, 자율 출퇴근제로 언제 출근하고 퇴근해도 괜찮다는 약속이었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은 할 일과 그 내용도 자유롭다는 뜻이다. 내가 스스로 정한 일을 정한 만큼 했다. ‘무급’이라는 것은 아무리 많이 일하고 어떤 성과를 내도 무급이라는 뜻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월급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일을 적당히 해도 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무급이었고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았기에 배울 것이 많았다.
어느새 사람을 보는 눈이 길러졌고, 상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른들 사이의 거래도 볼 수 있었고 앞서 말한 밤의 사교장에도 갈 수 있었다.
지금 너는 “무급으로 일해도 좋다”고 느낄 만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며,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이해한다.
하지만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얻는 것만 생각하다 보면 급료 이외의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상사에게 “자네는 누구에게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나?”라는 호통을 듣기 전에 적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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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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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라면 야근 수당을 받지 않아도 좋으니 맡겨 주십시오”라고 느낄 수 있는 감각만큼은 지녀 두는 편이 좋다.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사실은 무급 정도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거의 아무도 깨닫지 못하지만 현대인은 원하는 것이 지나치게 많다. 너도 어딘가에서 ‘갖고 싶어 하는 병’에 걸렸는지 모른다. 회사에서 지위와 명예를 원하고, 돈과 사랑을 원하며, 온갖 것에 달라붙어 얻어내려고 하지 않는가.
반대로 ‘구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하면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재미가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생훈』에서 이렇게 썼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일은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결코 그것을 생색내지 않는 것이다.”
평소 여러 일을 덧셈이 아니라 뺄셈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막상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자존심에 얽매여 있지는 않은가?
“앗, 사자다. 설날 사자춤이 왔다!”
“정말이네. 사자다! 춤춰라, 사자야!”
물론 설날도 아니므로 도장에 사자춤이 찾아왔을 리 없다.
사자를 닮은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가 취재하러 도장에 들어왔을 때, 내가 “사자가 왔다!”고 외치자 도장생들이 제각기 떠든 것이다.
머리숱이 적은 사람이 찾아오면 나는 큰 소리로 “갓파가 왔다!”라고 부른다. 그러면 도장생들은 “우와, 진짜 갓파다”, “갓파가 실제로 존재했어!”라며 크게 웃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묘한 광경일 것이다.
물론 찾아온 사람이 자기 약점을 놀림받아도 화내지 않을 사람인지 내가 판단하므로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 도장에서는 손님뿐 아니라 도장생끼리도 그런 ‘막말 배틀로열’을 하게 한다.
내 신호가 떨어지면 서로의 약점과 건드리기 곤란한 부분을 마구 공격한다. 일부러 상대를 화나게 하려는 아이도 있고, 시끌벅적 떠들지만 별 효과가 없는 아이도 있다.
공격을 받는 쪽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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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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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자기 약점을 철저히 공격당하면 즐거울 리 없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아이인지 금방 알 수 있다.
“히토쓰바시대학이 뭐가 대단해? 어디가 훌륭한데? 말해 봐. 네가 우리보다 뭐가 잘났어?”
“제가 잘났다고 말한 적 없는데요.”
“그럼 안 잘났네. 안 잘났으면 별것도 아니잖아.”
“왜 제가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합니까?”
“네가 방금 안 잘났다고 했잖아. 아, 이 녀석 거짓말했네. 왜 거짓말해?”
“거짓말이 아닙니다.”
“왜 성질을 내? 바보야. 너 사실 바보 아니냐?”
여기까지 오면 공격받은 쪽은 얼굴이 달아올라 폭발한다.
“난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때 내가 제지하고 그 히토쓰바시대 학생을 부른다.
“그런 시시한 말을 듣고 발끈하는 걸 보니 아직도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구나. 그 자존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나?”
물론 공격하는 쪽도 내가 있으니 여기까지 말할 수 있다. 내가 없는 곳에서 이런 말싸움을 하면 주먹다짐이 될 것이다.
“네, 죄송합니다.”
그 학생은 내게 사과했지만 분노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내가 왜 도장생들에게 이런 일까지 시키는지 알겠는가.
그들이 지금까지 부모와 학교 교사에게서 받은 것, 스스로 익힌 가치관 같은 것을 모조리 버린 상태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도장에 오는 아이들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열심히 노력해 온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학업에서도 최상위권이었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고 또 애써 세상으로부터 칭찬받아 온 아이들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고 학력이 아무리 좋아도 일을 못하면 상대받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하면 사회에서 원활하게 움직일 수 없다.
또 열심히 하든 요령껏 적당히 하든 회사로서는 이익만 올려 주면 불만이 없다. 학력이나 노력은 관계없다. 성실한지 불성실한지도 상관없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결국 결과론이다.
내게 모이는 아이들은 그런 면에서 사회와 잘 타협하지 못하는 유형이 많다.
“어릴 때부터 죽도록 노력하며 살아왔다고? 그게 뭐가 대단한데?”
나도 그들이 해 온 노력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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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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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상어가 살기 위해 애쓰고 있을까? 미역이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생각할까? ‘애쓴다’는 것은 가짜다. 억지로 애쓰지 않는 편이 훨씬 훌륭하다.
영리해지기보다 바보가 되어라. 바보가 될 수 있으면 편안해진다.
다른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른 한 사람의 몫을 한다.”
그런 사실을 알게 하려고 일부러 동료들이 약점을 지적하게 한다.
막말 배틀로열 끝에 모든 것을 버리고 바보가 될 수 있게 되면 “나는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지?”라고 처음으로 깨닫는 도장생이 많다.
발가벗은 자신이 될 수 있다. 자존심을 가지지 않는 진정한 강함이 생기는 것이다.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회장님, 안녕하세요.”
“그래, 잘 지냈나? 표정이 없잖아!”
“네, 다시 한번 인사하겠습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좋아졌어. 웃으니 귀엽잖아.”
맞이하는 동료들도 “그래, 그 얼굴이야. 그 표정!”이라며 놀린다.
앞의 히토쓰바시대 학생은 모두의 도움으로 자신이 붙들고 있던 자존심을 버리고 본래의 자신이 되었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즐겁게 도장에 다닌다.
“바보다!”라는 말을 듣고 발끈해 “널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던 일이 거짓말처럼 온화해졌다.
그뿐 아니라 우리 도장에는 명문대 출신이 많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그런 아이들의 공통점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네 회사에도 한두 명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입사했을 때는 건강하고 활기찼지만 도중에 이상해지고, 이성 직원에게 외면받고 동료에게도 괴짜 취급을 받게 되는 직원이 요즘 많다고 한다.
우리 도장에도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가 어렵다는 아이가 있었다. 매우 착한 아이였지만 다른 사람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했다.
“제가 말하면 이상한 소리를 할 것 같아요”, “모두가 웃을 것 같아요”라는 이유로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그런 아이들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순간적으로 행동에 옮기게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주면 “괜찮을까?”라는 불안이 덮쳐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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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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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에게 마작을 시킨다. 패를 뽑으면 1초 안에 버린다는 규칙으로 하게 한다.
마작은 단순하게 보면 패를 하나씩 바꾸는 게임이다.
따라서 1초 안에 패를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새 패를 가져오면 즉시 버린다.
마작을 통해 이 감각을 기르다 보면 쓸데없는 생각을 할 틈 없이 대화를 이어 갈 수 있게 된다. 머리로 따지지 않고 느끼는 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말하면 이상한 소리를 할 것 같다”고 했던 아이도 지금은 동료들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며 조금씩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너도 이 감각을 꼭 몸에 익히기 바란다. 순간적인 판단력을 기르는 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마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패를 뽑고 버리며 교체하는 감각을 알 것이다. 마작을 모른다면 카드놀이 ‘도둑잡기’를 떠올려도 좋다.
그것을 대화에서 해 보는 것이다.
“오늘 이 일 좀 해 줄래?”
“네, 하겠습니다.”
“이것을 총무부에 전해 줄래?”
“네, 알겠습니다!”
그 순간 자기 일정이 있더라도 즉시 대답하고 몸을 움직인다. 머릿속에서는 업무 내용과 전달할 서류가 무엇인지 이미 이해한다. 이것이 마작에서 1초 만에 패를 바꾸는 것과 같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면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자리에서 곧바로 결단하는 감각을 훈련하게 된다.
업무뿐 아니라 모든 장면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최고다.
예를 들어 아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여보, 오늘 일찍 퇴근해서 어린이집에 가 줘.”
“오케이! 아이를 데려올게.”
쓸데없는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언젠가 큰 업무의 결단을 네게 맡길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의 움직임은 뇌에서 몸으로 물결처럼 전달된다. 하지만 이 훈련을 하면 몸 전체의 연결망이 물고기 떼가 일제히 방향을 바꾸듯 즉각 반응하게 된다.
수족관에서 물고기들이 한순간에 방향을 바꾸는 모습, 그 감각으로 일해 보라.
상사가 말하면 즉시 답하고 물고기처럼 움직여라. 무엇보다 이런 속도감을 몸에 익혀야 한다. 그것이 순간적으로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훈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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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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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회의가 시작된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의견은 막다른 곳에 몰렸고 흐름도 좋지 않다.
‘이런 말을 하면 모두가 웃겠지….’
상사와 수많은 선배의 얼굴을 바라보며 회의석상에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가.
‘그래도 이 흐름대로 가면 곤란한데…. 누군가 먼저 반대하면 나도 동조할 텐데.’
“다른 의견 없습니까? 없다면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결국 망설이는 동안 회의가 끝나고, 뭔가 개운하지 않은 마음으로 회의실을 나온 경험은 없는가.
‘뭐, 됐어.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그때는 용기를 내서 말하자….’
이런 일이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일을 하지 못한다.
얼마 전에도 누군가가 민주당을 험담했다. 나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당신은 선거에 갔지요?”
“갔습니다.”
“민주당에 투표했다고 말했지요. 그렇다면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기대해서 투표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당신 쪽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말을 할 때 보통 사람의 열 배쯤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러면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선거에 가셨습니까?”
“갔지만 출마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투표했습니다.”
“그럼 무효표잖습니까?”
“내가 뽑고 싶은 사람이 출마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내 논리다. 선거에는 간다. 뽑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투표한다. 그 사람이 당선되든 낙선되든 내 문제로 생각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뒷일을 책임지는 것’, 즉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런데 투표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이 사람이 의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그뿐이다.
“이 후보들 가운데 고르라”고 해서 마지못해 한 명을 골랐다가 “차라리 뽑지 말 걸 그랬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한심하다.
응원해 놓고 나중에 험담한다.
요즘 세상에는 그런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원전에 찬성해 놓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입을 닫는 사람이 많은 데 놀랐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책임은 결국 누가 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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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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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고 싶은 말을 분명히 하고, 그 말의 ‘뒷일도 책임진다.’
그렇다고 인간관계가 나빠진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제나 진심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생각하지 않거나 흥정과 계산만으로 말한다면 반드시 반발을 살 것이다.
물론 내게 계산이나 흥정이 있을 리 없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고 말한 적도 없다. 상대에 따라 말을 바꾸지도 않는다.
애초에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생각부터 잘못이다. 나쁘게 평가받아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다.
우리 도장에서는 마작 대국에 ‘자기 평가’라는 관점을 도입했다. 예전부터 획득한 점수와 별개로, 작귀 사쿠라이 쇼이치식 마작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내가 평가해 점수를 매겼다. 여기에 본인이 자기 경기 내용을 채점하게 하는 방식을 새로 더했다.
평가점수는 높을수록 좋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매긴 점수와 자기 평가가 얼마나 일치하느냐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객관적인 관점’이다.
자기를 얼마나 침착하고 객관적이며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그런 습관이 생기면 자기만의 세계가 아니라 주변 사람과 환경까지 포함한 넓은 시야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비즈니스로 예를 들면 “이 일은 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시야를 조금 넓히면 “저 사람도 할 수 있고, 이 사람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사실이 보인다.
회의에서도 회의실을 넘어 회사 전체, 더 나아가 업계와 사회, 일본 전체에서 바라본 자신을 상상할 수 있다면 자기 의견이 어떤 의미인지 잘 보인다. 그때 다른 사람의 평가에도 차분히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참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느 젊은 회사원이 4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요즘은 입사 3~4년 안에 퇴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그도 그런 경우였다.
그 사실을 안 같은 부서의 2년 선배도 “좋은 기회이니 나도 함께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같은 과에서 동시에 두 명이 사표를 내면 과장은 ‘부하 관리 소홀’로 사내에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1년에 두 명이면 몰라도 한꺼번에 두 명은 곤란했다.
과장은 두 사람에게 사정을 듣고 부장과 상의했다.
결국 처음 퇴사하겠다고 한 직원의 사직서는 받아들였다. 하지만 선배 직원에게는 6개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급여를 줄 테니 “퇴직을 반년 뒤로 미뤄 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나가는 것보다 반년 간격을 두면 그럭저럭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백히 상사의 자기 보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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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 경우의 선배 직원이라면 과장이 제안한 거취를 어떻게 ‘결정’하겠는가. 후배와 동시에 그만둘 것인가, 아니면 과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열쇠는 바로 네가 쥐고 있다.
네가 거절하면 과장은 ‘감독 소홀’로 좌천되거나 이동될 수 있다. 회사는 잔혹한 곳이다. 부하 두 명이 동시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상사의 운명이 흔들린다.
과장은 필사적으로 네게 매달린다. 네 사직서를 회사에 제출하지 않고 과장이 보관하게 하면 6개월 동안 자유와 급료가 보장되고, 그 사이 다음 직장도 찾을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어떻게 했을까.
‘지금 그만둬 봐야 당장 할 일도 없다. 6개월 동안 일하지 않고 월급을 받을 수 있다면 퇴직은 반년 뒤로 미뤄도 되겠지.’
그렇게 판단하고 모든 것을 과장에게 맡겼다. 과장은 속으로 웃었다.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됐다. 그날 밤 과장은 부장과 건배했고 “잘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과장과 부장을 소란스럽게 만든 죄는 무거웠다. 회사는 약속대로 반년 동안 급료를 지급했지만 5개월째쯤부터 빨리 퇴직하라는 독촉이 빗발쳤다. 괴롭힘도 이어졌다. 결국 다음 직장을 찾기는커녕 돌팔매질을 당하듯 회사에서 쫓겨났다.
처음 퇴사한 후배는 그 반년 사이에 창업했고, 전 직장과 거래하는 데도 성공했다. 자기 재능을 살려 이후에도 사장으로 활약했다. 반면 나중에 퇴사한 선배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고향인 홋카이도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옛날의 ‘도덕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다.
참을 인 자루를 언제나 목에 걸고,
찢어지면 꿰매라, 또 찢어지면 다시 꿰매라.
뜻을 알겠는가.
계속 참고 또 참다가 마침내 ‘인내의 끈이 끊어졌다’는 표현과 반대로, 인내의 자루가 아무리 찢어져도 계속 기워 가며 참고 견디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기다린다는 가르침이다.
일본인이 이 노래를 좌우명으로 지켜 왔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예로부터 일본인만큼 인내심이 강한 민족이 없다는 사실은 이번 대지진 때 세계의 찬사를 받은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눈 속에서도 피해자들이 질서 있게 줄을 서 기다리는 모습은 같은 일본인인 나조차 감동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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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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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장생들과 재해 지역으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에도 사람들은 우리가 가져간 물건을 기쁘게 받아 주었다. 그 태도는 눈물이 날 만큼 겸손하고 조용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참으면 “잘 참았구나. 참 훌륭하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조르지 않고 참았던 기특한 경험을 가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손님이 있을 때에는 쟁반 위의 과자에 손을 대지 않았고, 선물을 받으면 먼저 불단에 올렸다.
내가 어렸을 때 텔레비전은 부잣집에만 있었지만 아이들 가운데 누구도 부모에게 “텔레비전이 갖고 싶다”고 떼쓰지 않았다. 그것은 나름대로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참는 마음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바로 그 미덕이 일본인의 ‘결단력’을 무디게 만들었다.
참으면 “착한 아이구나”라고 칭찬받으므로 인내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거기서 “계속 참으면 언젠가 보상받는다”라는 착각이 생기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진다.
필요 이상으로 무엇이든 갖고 싶어 하는 것도 문제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참아 버리는 것 역시 고쳐야 할 점이다.
앞의 선배 직원이 좀처럼 결정하지 못한 것도 과거에 참은 일을 칭찬받은 경험이 그의 뇌에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서는 한번 참고 과장의 말을 들어 체면을 세워 주면 나중에 좋은 방향으로 풀리겠지.’
그런 생각이 판단을 흐리게 했고 이후의 삶까지 꼬이게 만들었다.
무조건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은가?
그런데 너는 언젠가 지금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나 임원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특별히 큰 꿈도 없고 강한 야망이나 향상심도 없다. 마작 대리 승부를 하던 시절에도 “오늘은 좋은 승부였다”는 마음이 반복될 뿐이었다. 돈을 벌고 싶다거나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큰일을 해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나를 모델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 실제의 나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유명해졌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저 ‘마작장 아저씨’일 뿐이다.
해마다 십여 권의 책이 나오지만 편집자라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찾아와 “말해 달라”고 하기에 이야기하면 그것이 책이 될 뿐이다.
‘마작장 아저씨’라는 직업의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이 상당히 나쁘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곳에 모이는 손님도 변변치 않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시험 삼아 점잖은 주부들에게 “마작장 주인은 어떤 이미지입니까?”라고 물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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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스낵바 주인’ 쪽이 그래도 일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이다. 회사의 과장이나 부장에게 “마작장 아저씨가 쓴 책을 읽어 보시겠습니까?”라고 물어봐도 좋다. 아마 너는 코웃음을 살 것이다.
즉 내 직업은 세상에서 전혀 평가받지 못한다. 나 자신도 내 위치를 잘 알기에 큰 꿈도 없고 돈을 벌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그저 ‘마작장 아저씨’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네가 진심으로 “출세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사장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한다면 이 책을 더 읽지 말고 당장 버리기 바란다.
말해 두지만 나는 너를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보고, 내 나름의 지론으로 상당히 진지하게 답하고 있다.
“저는 무조건 출세해서 사장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나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네 바람에 답해 줄 처세술 책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런 책을 읽어라. 다만 『당신도 사장이 될 수 있다』 같은 책을 읽고 정말 사장이 될 수 있다면 모두 진작 사장이 되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 책의 편집자부터 자기 회사의 사장이 되어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너를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믿겠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인간은 회사의 임원이나 사장이 될 수 없다.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될 수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회사원이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대로 된 생각’은 무엇인가.
거짓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 곤란한 사람을 보면 적극적으로 돕는다. 자기는 속더라도 남을 속이지 않는다. 절대 나서서 잘난 척하지 않는다. 연장자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돈으로 마음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간으로서는 아주 제대로 된 사람이다. 하지만 기업인으로서는 ‘실격’이다.
잘 생각해 보라.
회사에 고용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안전과 안정을 얻는 대가로 자기 몸을 파는 일이다. 매달 급료가 들어오고 연금과 복리후생도 두터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활 보장의 대가로 너는 회사의 관리를 받으며 매우 긴 시간을 구속당한다.
그렇다면 네가 회사를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회사는 법률의 범위 안이라면 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하는 세계다. 그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이익이 올라가면 괜찮다고 여긴다.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누구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네 회사가 이익을 올리는 뒤에는 이익을 내지 못하는 수많은 동종업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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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슈퍼마켓과 재래시장의 관계를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네가 대형 슈퍼마켓 직원이라면 시장의 생선가게 주인은 명백한 ‘피해자’다.
네 회사가 더 많이 벌수록 그 뒤에서는 작은 가게들이 차례로 무너진다.
그런 조직의 사장이 되려면 주변에 수많은 희생이 쌓이지 않고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사장이 될 수 없고, 곤란한 사람을 돕는 사람도 사장에 어울리지 않는다.
옛날부터 이런 말이 있다.
승자는 적을 만들고,
패자는 벗을 만든다.
즉 네가 사장이 되는 날에는 믿을 수 있는 동료가 한 사람도 없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인간은 사장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회사에서 출세하려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쉽게 자기 힘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다음 사장이 누구인지, 그다음 사장은 누구인지, 그들의 가족관계는 어떤지까지 살피며 조심스럽게 판단한다기보다 처신하는 유형이 출세할 것이다.
출세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일도 제멋대로 스스로 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의 질문인 “왜 너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은 “출세하고 싶기 때문”일지 모른다.
몸과 마음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은가?
얼마 전 나는 도쿄 고라쿠엔홀의 링 위에 올라갔다.
내가 아끼던 종합격투기 선수의 은퇴 경기 뒤 행사에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쇼지 아키라라는 남자다. 아마 너는 모를 것이다.
그는 메인 이벤트에 등장했다. 작은 몸과 강한 일본 정신으로 외국 선수들과 맞서 온 격투가였고, ‘미스터 프라이드’, ‘마지막 일본 남자’라고 불렸다.
은퇴 경기를 맞은 쇼지는 자신이 직접 지명한 상대 미사키 가즈오와 현역 마지막 한 판을 치렀다.
흰 유도복에 검은 띠를 맨 쇼지는 태극권처럼 두 팔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하지만 미사키는 그 기묘한 자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압박했다. 2라운드에서 미사키의 로킥에 균형을 잃은 쇼지는 쓰러진 채 계속 펀치를 맞아 전혀 움직이지 못했고, 그곳에서 마지막 경기의 종료 벨이 울렸다.
쇼지도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이자 후배인 미사키가 조금도 봐주지 않은 모습이 무엇보다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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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젊었을 때 나는 연습장에 자주 놀러 가 링사이드에서 훈련을 보았다. 그러다 어느새 나도 링 안에 들어가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넘는 남자들을 지도하니 땀에 흠뻑 젖어 돌아가는 길에 옷을 새로 사 입을 때도 있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머리와 몸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몸무게 100킬로그램의 프로 격투가가 60킬로그램 남짓한 내게 눌려 꼼짝도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물론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몸에서 쓸데없는 힘을 빼고 상대와 하나가 되면, 상대가 공격해 오는 힘을 그대로 되돌려 줄 수 있다.
아기는 가볍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깊이 잠든 아기는 상당히 무겁다. 몸무게 전부가 안는 사람에게 그대로 실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힘을 완전히 뺀 상태에서 가장 강해질 수 있다.
정신도 같다. 어디엔가 힘이 들어가면 인간은 정직하지 못하게 된다. 회의에서 억지로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할수록 거짓이 끼어들 여지가 생긴다.
이른바 ‘악에 받치는’ 상태가 되면 그 자리의 흐름이 이상해지는 것과 같다.
그런 때에는 어떤 일도 결정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힘을 줄수록 그 말은 더 거짓되게 들린다.
정말 올바른 결단을 내리고 싶다면 마음과 몸의 힘을 풀어 두는 편이 좋다.
무술가 고노 요시노리에게 들은 좋은 이야기가 있다.
그 세계에서 누구나 아는 명인에게 한 무예가가 도전했다. 그 무예가는 엄청난 특기를 지녔고, 그것만 성공하면 명인에게도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너무도 간단히 패했다.
“졌습니다”라며 무예가가 머리를 숙이자 명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비유하자면 당신은 한 그루의 거대한 나무다. 소문대로 대단하다. 하지만 폭풍이 오면 큰 나무는 쓰러진다. 나는 숲이다. 어떤 폭풍이 와도 숲 전체가 쓰러지는 일은 없다.”
무언가를 결단해야 할 때 자기 몸을 한 그루 큰 나무처럼 굳혀 버리는 편과, 마음을 특별할 것 없는 숲처럼 유지하는 편 중 어느 쪽이 좋은 결과를 낼지는 분명하다.
무슨 일이든 힘을 빼고 대응하면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중요한 의견을 말하기 전에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숲을 떠올리고 온몸의 힘을 빼 보라. 마음이 편안해지고 맑은 기분으로 자기 생각을 상대에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결단은 숲처럼.
이 말을 가슴속에 간직해 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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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해 주는 ‘동료’가 있는가?
잠시 화제를 바꾸자.
나는 매년 여름이면 도장의 젊은이들과 바다로 놀러 간다.
그 여행은 무척 즐겁다. 아직 바다에 도착하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들떠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도장생들과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떠나는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 마음을 뛰게 한다.
차창으로 바닷바람이 들어와 기분이 좋다. 소금기 어린 냄새가 목적지에 가까워졌다고 알려 준다. 우리는 크게 심호흡한다.
숙소에 도착하면 모두 서둘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으로 달려간다. 누가 가장 오래 잠수할 수 있는지, 누가 물고기나 조개를 더 많이 잡는지 온갖 놀이를 한다. 나는 예순 중반을 넘었지만 아직 스무 살 젊은이들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들은 먼저 바다에 뛰어들어 첨벙거리고 있다. 나는 한참 뒤에야 바위에서 허리를 일으켜 바다로 들어간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친구’와 ‘동료’의 차이를 말하려 한다.
말해 두지만 내게 이른바 ‘친구’는 없다. 일부러 만들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말처럼 ‘친구’나 ‘우정’이라는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
잘 생각해 보면 친구란 서로에게 편리한 관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녀 관계도 ‘친구’로 시작한다고 하지만 잘되면 연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쉽게 남이 된다.
‘친구’에게 배신당했다며 목숨을 끊는 아이도 있다. 애초에 친구는 서로에게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더는 편리하지 않게 되면 쉽게 배신할 수 있는 관계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믿지 않는다.
대신 ‘동료’를 믿는다. 동료란 하나의 원을 이루는 관계다. 그 안에는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개인 감정을 넘어 이어져 있는 것이 동료다.
때로 동료끼리 싸우기도 한다. 그래도 동료는 동료다. 친구 관계라면 그렇지 못하다. 잘못하면 평생 절교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내게는 도장생도 동료이고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도, 사랑스러운 손주들도 모두 동료다. 세어 보면 백 명이 넘는다.
동료의 좋은 점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함께라면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지진 피해 지역에 봉사활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지만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에게 ‘동료’라고 부를 사람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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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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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뜻을 품고 결정적인 순간에 네 활동을 도와줄 동료가 있다면 좋은 결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 자리에 없더라도 마음속에서 말없이 등을 밀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이 내 뒤에 있다. 그러니 여기서 결정해야 한다….’
내가 좋은 결단을 할 수 있는 이유 역시 함께 떠들며 바다로 놀러 가는 좋은 동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각오가 정해지지 않은 것은 아닌가?
언제였던가. 한밤중에 집에 돌아오니 셋째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무언가 깊이 고민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 상의할 일이 있어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셋째가 폭주족에게 돈을 빼앗길 위기에 놓였고, 친구는 금속 배트로 맞았다고 했다. 당시 셋째는 아직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폭주족이 지금 당장 2만 엔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어떻게 하면 좋죠?”
아들의 눈에는 공포가 어려 있었다.
“그래? 장소가 어디냐. 아버지가 함께 가 주겠다.”
나는 즉시 결정했다. 마침 집에 있던 장남에게 운전하게 하고 약속 장소인 주차장으로 갔다. 한밤중 자동차 불빛이 눈부셨고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나는 혼자 차에서 내렸다.
둘러보니 폭주족은 열 명이 넘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그들도 내가 풍기는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네다섯 명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다.
나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달려들면 팔 한두 개쯤 부러뜨리겠다고 생각했다.
눈으로 우두머리를 찾았다. 싸움에서는 우두머리와 이야기를 끝내면 된다.
‘저 녀석이군.’
나는 그를 노려보며 천천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때 우두머리가 말했다.
“너는 누구냐?”
조용한 목소리였다. 젊은데도 제법 중심이 잡힌 리더라고 생각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 번 내뿜은 뒤 말했다.
“네가 2만 엔을 가져오라고 한 아이의 아버지다.”
나도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부모가 오든 말든 우리는 그 녀석에게 볼일이 있으니 가만두지 않겠다.”
그는 끝까지 아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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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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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해 봐.”
우두머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씩 웃었다.
나는 담배를 한 모금 더 피우고 구두로 밟아 껐다.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됐다. 가자!”
리더의 한마디에 폭주족은 주차장을 떠났다.
물론 이 나이에 십여 명과 싸우면 쉽게 이길 수 없고, 상대가 무기를 들었다면 내가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순간 목숨을 걸고 승부해야 할 때가 인생에 한 번쯤 있다.
특히 그때는 자식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설프게 타협하려 했다면 틀림없이 얻어맞았을 것이다. 몸을 던져 아이를 지키겠다는 강한 각오가 내게 있었다.
나는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에게도 언젠가 그런 장면이 찾아올 것이다. 단순히 폭력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네가 목숨을 걸고 결단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날 밤의 나처럼 상당한 각오로 대처해야 하는 순간은 인생에서 반드시 찾아온다.
그날을 위해 마음과 몸을 단련해 두어야 한다.
인생에서는 결코 도망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의 마지막에 한 가지 말해 두겠다.
결정적인 국면에서 ‘도망치겠다’는 결단만큼은 절대로 내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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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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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일하는 사람으로서 결단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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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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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公私)의 균형은 ‘사적인 나’로 채워라!
일이든 사생활이든 ‘능력 있는’ 사람은 즉시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일수록 실제로는 많은 고민을 안고 있다.
앞에서 썼듯 회사의 일은 어디까지나 이익을 추구한다. 능력 있는 사람은 자기가 늘 손익만이 지배하는 세계에 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이것이 능력 있는 사람의 고민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걸프전쟁에서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를 미국이 공격한 것도 ‘국책’이었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공격하는 것도 국가의 ‘정의’다.
빈 라덴을 체포해 재판에 세울 줄 알았더니 간단히 사살해 버렸다. 그 일에 환호하는 것 역시 미국의 ‘정의’다.
내가 보기에는 남이 사는 나라를 공격하면서 정의를 말할 자격이 어디 있느냐 싶다. 하지만 국가에 국책이 있고 그곳에 정의가 존재하듯 회사에도 ‘사책’, 즉 회사의 방침이 있으며 손익에 근거한 정의가 존재한다.
과거 일본에서 일어난 미나마타병을 비롯한 각종 공해, 탈리도마이드와 HIV 약해, 이번 원전 사고의 혼란도 틀림없이 회사의 ‘정의’와 정책이 낳은 결과다.
달리 말하면 회사의 정의란 기본적으로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허용되는 세계다. 그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능력 있는 직원은 상사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말을 고르고, 능력 있는 상사는 무능한 부하도 적당히 칭찬하며 이용한다. 또 하청업체 앞에 돈을 흔들며 무리한 요구를 한다.
이번 원전 사고의 최전선에서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지 상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일을 하면 희생자가 많이 생길 텐데 그래도 괜찮습니까?”
“괜찮아. 그런 것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능력 있는 상사와 부하는 이런 대화를 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일을 처리한다.
그러나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에게 더러운 일이라는 사실도 안다. 자기 손은 더럽히지 않고 돈을 주어 하청업체에 시킨다는 양심의 가책도 느낀다.
그것도 어쩔 수 없다.
능력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느끼는 고민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일수록 업무에서 벗어났을 때 이렇게 생각하기 바란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자신을 되찾는 곳이 ‘가정’이며,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 가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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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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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사를 구분하면 업무는 ‘공’이고 사생활은 ‘사’다.
능력 있는 사람이 집에 돌아와 목욕하듯,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공적인 일로 마음이 더러워졌다고 느낀다면 사적인 시간에 자기 마음을 씻으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집으로 일을 가져오거나 공적인 세계의 요령으로 사적인 생활까지 대한다. 집에서 회사에 전화를 걸고, 휴일에도 상사와 골프를 치느라 아이와 어울리는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이 그렇다. 공적인 부분이 사적인 영역으로 침범한 것이다.
아내와 함께 상사의 집을 방문하는 것도 공적인 부분이 사생활에 지나치게 들어온 사례다.
아무리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일의 때를 씻고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간단한 방법이 있다.
사적인 부분을 더 의식하고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휴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업무와 인연을 끊는다. 업무 관련 전화는 전혀 받지 않고 메일도 확인하지 않는다. 물론 머릿속에서도 일에 관한 생각을 모두 빼낸다.
가족을 위해 온 힘을 쓰고, 봉사활동을 하고, 여행을 가서 바다와 산의 자연을 만난다. 지역 축제와 행사에 참여하고 취미에 몰두하고 가족을 위해 요리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이렇게 공사의 균형을 잡으며 자기 안의 때를 씻어 내야 한다. 다음 날 아침 개운한 마음으로 출근해 다시 공적인 역할에 충실한다. 그러면 또 공적인 일로 때가 묻어도 고민을 줄일 수 있다.
반대로 이런 사적 시간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거나, 공적인 시간에 사적인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끌어들이는 사람 가운데 이른바 ‘능력 없는’ 사람이 많다.
인간에게 겉과 속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때에는 어쩌다 보니 내게 텔레비전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인기 개그 콤비 바쿠쇼몬다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매회 화제가 된 ‘선생님’을 게스트로 불렀다.
“출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마작장 아저씨가 나와도 괜찮겠나?”
“네, 꼭 부탁드립니다.”
내가 그 프로그램에 어울리는지는 별개로 담당자가 열심히 부탁했기에 출연을 수락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상당한 소동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염려한 대로 방송국의 최고 책임자인 국장이 “왜 마작장 아저씨 같은 사람을 인기 프로그램에 부르는가?”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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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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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만하다. 내가 국장이라도 화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의 출판사 윗사람들도 “왜 우리 회사에서 마작장 아저씨의 책을 내야 하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대기업 경영자라면 텔레비전이든 책이든, 심지어 도지사 선거에도 그럴듯하게 나갈 수 있겠지만 마작장 아저씨라면 모양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계속 마작장 아저씨로 남고 싶다.
방송 이야기로 돌아가자. 국장은 화를 냈다.
그런데 제작진은 어찌 된 일인지 국장을 설득했고 나는 출연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감사한 것은 아니다. 좋은 기회가 생겨 방송국 카메라가 실제로 돌아가는 현장에서 놀다 왔다는 기분이었다.
방송 뒤 제작진은 허리가 빠질 만큼 놀랐다.
방송을 본 십 대 청소년들에게서 방영 직후 2,000통이 넘는 이메일이 방송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모두 프로그램을 극찬하는 내용이었다.
대부분 “이런 어른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는 내용이었다.
젊은이들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정치인을 비롯한 많은 어른의 ‘위선’을 피부로 전부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긍정적인 자세로 선처하겠습니다”라는 말이 실제로는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이고, “현재 검토 중입니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임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진심으로 말하고, 일부러 속임수 마작의 실기까지 보여 주는 나 같은 사람에게서 진짜 어른을 느꼈던 것 같다.
반응이 너무 커서 국장이 직접 감사 전화를 했지만 솔직히 우스웠다. 감사는 필요 없다. 국장이 처음에 생각한 것이 오히려 맞았기 때문이다.
다만 내 이야기와 행동이 40대나 50대가 아니라 십 대 젊은이에게 전달되었다는 점은 기뻤다.
강연회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높은 사람이 단상에서 이야기하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말할 거면 당신이 직접 해 봐”라고 하고 싶다.
대학교수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 똥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똥은 훌륭한 거름이 되니 오히려 똥이 더 쓸모 있다.
똥만도 못한 어른들의 편리한 이야기로 가득한 세상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를 향해 진심으로 이야기한다. 친목회에서도 높은 사람은 완전히 무시하고 젊은이들을 내 주변에 모아 떠들다가 그대로 돌아간다.
나를 초대한 높은 사람들은 “원래라면 강연을 맡기지 않을 사람에게 내가 허락했는데 저 태도가 뭐냐…”라며 불만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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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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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하지 마라. 내가 가고 싶다고 부탁한 것도 아니다.
오래전 도쿄 신주쿠의 기노쿠니야서점에서 강연할 때 당시 한 살 반이었던 손주와 함께 단상에 오른 적이 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이 아이가 보채거나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나도 돌아갈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강연을 시작했다. 손주는 마이크를 가지고 놀며 모두의 귀여움을 받았다. 강연이 끝난 뒤에는 300명이 넘는 사람에게 사인을 했다. 다행히 아이는 울지 않았다.
아마 그 자리의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거만하고 불쾌한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면 손주는 틀림없이 울었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본래 가진 감성이다. 더러움은 전염된다. 아기는 그런 더러움을 가장 먼저 느끼므로 안다.
그렇다면 왜 젊은이는 내 말을 즉시 이해하는데 인생 경험이 풍부한 어른은 솔직하게 이해하려 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에게는 원래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냄비 뚜껑과도 같다.
젊은 사람의 마음은 뒤집어 보아도 안쪽 표면에 아직 때가 묻지 않아 겉과 비슷하다. 반면 어른의 뚜껑 안쪽은 거무스름하며 여러 찌꺼기가 눌어붙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보여 주려 하지 않는다.
앞에서 쓴 것처럼 겉을 ‘공’이라고 하면 안쪽은 ‘사’다. 젊은 사람은 공적인 모습과 사적인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더구나 유아에게는 공과 사의 구분조차 없다. 하지만 어른은 공과 사가 완전히 다른 종류가 된다. 따라서 사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진짜 자기를 드러낸다는 뜻이 된다.
어른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인간에게 겉과 속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공과 사를 제대로 나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두 모습을 감추지 않고 모두 드러내며 사는 일은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면 틀림없이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냄비 뚜껑의 안쪽, 즉 사적인 부분도 분명히 가지고 있고 그것을 소중히 여깁니다”라고 솔직히 보여 줄 수 있다면 지금보다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고 업무에도 정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 안쪽, 즉 사적인 부분을 튼튼하게 구축해야 한다.
집에 돌아오면 일은 전혀 관계없다. 함께 노는 동료 가운데 회사 사람을 한 명도 넣지 않는다. 쉬는 날 회사에서 전화가 와도 받지 않는다. 이것을 철저히 하면 지금보다 중요한 것이 반드시 보이게 된다.
시소 한가운데에 있으면 균형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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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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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무엇이 공이고 무엇이 사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적인 시간에 공적인 일이 억지로 뛰어들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곤란할 수도 있다. 반대로 회사에 집에서 전화가 걸려 와 그야말로 공사가 뒤섞일 수도 있다.
그럴 때에는 언제나 ‘시소의 한가운데에 있는 감각’을 가지면 좋다.
현재 자신이 공적인 쪽으로 너무 기울었다고 느끼면 무게중심을 사적인 쪽에 둔다. 지나치게 사적인 쪽으로 치우쳤다고 느끼면 공적인 일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행동한다.
그렇게 하면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늘 확인할 수 있고 균형도 잡기 쉽다.
시소 한가운데에 있는 감각은 다른 상황에도 유용하다.
실제로 우익과 좌익 사상가들과 이야기해 보면 오른쪽 사람은 오른쪽 사람과만 대화하므로 왼쪽 사상을 극단적으로 부정한다. 마찬가지로 좌파적 사상을 가진 사람은 오른쪽 사상을 거의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 당연히 의견은 절대로 맞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오른쪽도 왼쪽도 아닌 삶을 살면 우익 사상의 좋은 점과 좌익 사고에서 수긍할 점이 모두 보인다. 양쪽을 알고 있기에 각각의 잘못된 점도 잘 보인다.
시소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공사와 좌우뿐 아니라 선악이나 손익을 판단할 때도 이 시소 감각은 큰 도움이 된다.
“이 일을 하는 편이 좋은가, 그만두는 편이 좋은가”라는 결단도 사장이 높은 곳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시소 위에 올라가 있는 현장 과장이나 계장의 감각으로 판단하면 순간적으로 최선의 답을 낼 수 있다. 지금 어느 쪽으로 얼마나 기울었는지는 현장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도 지겨울 만큼 확인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장이다. 사장이나 총리가 무슨 말을 하든 현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너는 반드시 현장 감각을 가져야 한다.
이런 말을 아는가. 모른다면 꼭 기억해 두기 바란다.
새는 하늘 높이 날지만 저녁이면 땅으로 돌아온다.
아무리 높이 날아 위에서 세상을 볼 수 있어도 마지막에는 땅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훌륭한 이상을 내세우는 것보다 결국 현장 감각을 소중히 하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다.
이상만 떠들면서 현장을 모르는 상사, 경비 절감을 외치면서 고급차로 퇴근하는 임원과 사장에게 이 말을 가르쳐 주면 좋다.
나도 도장생들과 재해 지역으로 봉사활동을 떠날 때 그들이 신칸센 그린석을 준비하려 하자 웃으며 거절했다. 그렇게 가면 현장의 감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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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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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와 함께 움직여야 모두와 공명할 수 있다. 나도 짐으로 가득 찬 트럭을 함께 타고 현지로 갔다. 왕복 26시간의 강행군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충실한 느낌이 있었다.
회사에서 높은 사람일수록 언제나 현장에 나가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장은 ‘차선의 왕’, 사장은 ‘최선의 왕’을 지향하라!
좋은 기회이니 이런 이야기도 해 두겠다.
이 역시 고무술가 고노 요시노리에게 들은 이야기다. 중국에는 『장자』라는 책이 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장주라는 사상가가 쓴 책이라고 하며, 일본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 박사가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 책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차선의 왕은 백성에게 사랑받고, 최선의 왕은 백성이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수많은 백성이 안심하고 살도록 정치를 하는 왕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그것은 두 번째로 좋은 왕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더 훌륭한 왕이 있다.
그 왕이 있기에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지만 그는 공기처럼 존재하면서도 아무도 그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것이 최선의 왕이다.
“사람 위에 서는 자는 이래야 한다”는 비유인데 차선의 왕을 부장으로, 최선의 왕을 사장으로 바꾸면 재미있다.
“부장은 부하에게 사랑받고, 사장은 부하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부하들은 훌륭한 부장이 있어 안심하고 일하지만 회사 사장의 존재감은 거의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도 매일 즐겁게 일할 수 있으니 틀림없이 좋은 사장일 것이라고 모든 직원이 생각한다. 그런 사장이 있다면 최고의 리더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네가 부장을 목표로 한다면 차선의 왕을, 사장을 목표로 한다면 최선의 왕을 지향하기 바란다.
‘확실성’ 따위는 버려라!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초등학교 교실 선생님 책상 위에 꽃병이 놓여 있던 것을 기억한다.
꽃병에는 아름다운 꽃 몇 송이가 꽂혀 있었다. 꽃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꽃 주변을 작은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다니던 모습은 선명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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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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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벌레에 넋을 잃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빛이 꽃병에 반사되어 눈부셨다. 아마 오후 수업이었을 것이다.
“자, 여러분. 이것은 무엇일까요?” 선생님이 물었다.
“꽃병입니다”, “꽃이에요”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나만 “벌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이것은 무엇일까요?”라고 말하며 가리킨 손끝에 벌레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똑바로 보렴. 이것은 꽃이 꽂힌 꽃병이잖니.”
어린 나는 속으로 “선생님이야말로 똑바로 보세요!”라고 생각했다.
내가 일부러 선생에게 반항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선생이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순간 정답 안에는 ‘벌레’라는 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세상의 규칙이었다. 오히려 벌레라는 답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은 이것을 ‘확증’, 즉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부른다.
확증이 없으면 인간은 불안해지고 침착하지 못한다.
“이것이 꽃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지?”라며 심한 경우 공포까지 느낀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본래 이 세상에는 확실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증거로 이 꽃병이 깨지면 더는 꽃병이 아니다. 유리 조각일 뿐이다. 꽃은 시들면 쓰레기가 되고, 유리도 산산조각 나면 돌가루나 규소 같은 물질일 뿐이다. 제품의 형태를 이루었을 때에만 꽃병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얼마 전 세계적인 불황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대기업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회사에 들어가면 평생 안심”이라고 여겼던 기업이 사라졌다.
세계사를 돌아보아도 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미국과 세계를 양분했던 소련도 사라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없어졌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었다.
기업은 물론 국가조차 사라진다. 즉 확실한 것, 다시 말해 영원히 존재하는 기업이나 국가는 없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다”는 의식을 지니는 것만으로 삶의 방식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확실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마음에 유연함이 생긴다. 바로 그 유연함이 인간을 강하게 한다.
확실하지 않은 것의 대표가 인간관계다. 그렇기 때문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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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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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회사 사회의 인간관계만큼 쉽게 무너지는 것도 없다.
예를 들어 거래처 사람이 너를 무척 아껴 주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러면 완전히 인연이 끊기는 것이 이 사회다.
그가 중요한 거래처의 과장이었기에 사귄 것이고, 그 직함을 잃으면 더는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것이 옳을까.
“자네는 왜 내가 회사를 그만뒀는데도 예전처럼 만나 주나? 괜찮겠어? 시간 낭비 아닌가?”
“오히려 업무 관계가 없어져 잘됐습니다. 이제 진심으로 사귈 수 있잖아요. 앞으로도 여러 상담을 부탁드립니다.”
그런 대화가 가능한 인간관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안다. 그래도 네가 그런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 바란다.
사실 그런 유연성과 마음의 여유에서 중요한 결단도 태어나기 때문이다.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는가?
보통 사람은 물이 된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도호쿠 지방 사람은 ‘봄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네가 가져야 할 마음의 유연함이다.
경제신문 따위 읽지 마라!
최근 인터넷의 발달로 많은 사람이 신문과 잡지를 읽지 않게 되었다고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경제신문과 경제지만은 독자가 늘었다고 한다.
회사원 사회에서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그런 습관도 필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단언하겠다. 그런 것은 전혀 읽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런 신문과 잡지에 여러 번 소개되었지만 읽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학생이던 때 경제계 신문과 잡지는 매우 비주류였다. 그것이 최근 몇 년 사이 독자를 늘렸다는 것은 이 나라가 얼마나 경제 일변도로 변했는지를 상징한다.
경제지만의 문제도 아니다. 불확실한 인간관계를 포함해 이른바 정보라는 것에 수많은 사람이 휘둘리고 있다는 뜻이다.
정보만 뒤쫓다 보면 정보가 들어오지 않을 때 불안해진다. 정전이 되자마자 내일 날씨를 알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보를 쫓을 것이 아니라 자기 경험에서 정보를 내보낸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단순한 지식만 중시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정보에서 얻은 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일 뿐이다. 그것을 아무리 말해도 큰 신뢰를 얻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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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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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서 “신문에 나온 자료입니다만…”이라고 시작하는 의견은 사람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지 못한다. 반면 “제 경험에 비추어 말씀드리면…”이라고 시작하면 말하는 사람이 젊더라도 분명히 귀 기울일 가치가 생긴다.
왜 경험에는 설득력이 있는가. 그 문제는 이미 네 안에서 한 번 ‘끝난 일’이기 때문이다. 해결되고 마무리된 일이므로 거기서 나오는 의견은 네가 침착하게 분석하고 판단하고 반성한 결과다.
나는 ‘끝나다’라는 뜻의 일본어 ‘스무(済む)’가 ‘맑다’라는 뜻의 ‘스무(澄む)’와 통한다고 자주 생각한다. 마음이 고이거나 더럽혀지지 않고 맑기 때문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결단할 때 신문이나 인터넷의 자료와 지식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보를 의심하는 편이 좋다. 자기 경험과 체험에서 나온 예측을 토대로 결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해 두고 싶다.
그 결단도 눈앞의 손익만 쫓아 내려서는 안 된다.
손익이라는 결과는 본래 단단한 결단을 계속 쌓아 간 끝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발견하는 힘을 길러라!
“사쿠라이 씨, 지시를 기다리는 직원이 너무 많아서 곤란합니다.”
“지시를 기다리는 직원이라고요?”
나는 순간 ‘시지마치’라는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했다. 아는 사장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상사가 명령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니 곤란합니다.”
“아, 그래서 ‘지시 대기 직원’이라는 말입니까.”
사장 말로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부모의 지시를 받고 선배와 교사의 지시를 받으면서 자기가 먼저 무엇인가를 하는 훈련을 하지 못한 신입사원이 많다고 한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설마 그렇겠습니까.”
내가 말하자 사장은 흥분해 반박했다.
“정말이라니까요. 얼마 전 올해 입사한 신입에게 ‘이것을 사장실로 옮겨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장실 책상 위에 짐을 올려놓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더군요. 제가 15분 뒤에 들어갔는데도 책상 옆에 서 있었습니다. 이런 아이를 채용했나 싶어 얼마나 한심하던지요.”
그 정도로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상사의 지시 없이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직원이 실제로 존재하는 모양이다.
“사장님,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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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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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수동적인 태도를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장에게 알려 주었다.
그 방법은 수동적인 직원에게 ‘발견하는 힘’을 길러 주는 것이다.
독자인 너에게도 도움이 될 이야기이니 알아두기 바란다.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의 물고기는 일본까지 회유한다. 바닷속에는 해류가 있으므로 그것을 타면 물고기는 엄청난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북태평양의 혹등고래는 여름에 베링해 주변까지 북상하고 겨울에는 캘리포니아반도와 하와이, 일본의 난세이제도까지 남하한다. 연어는 강에서 산란하고 태어나지만 생애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내고 산란할 때 다시 강으로 돌아온다. 이를 소하 회유라고 한다.
바다만이 아니다. 가을 하늘의 철새도 기류를 타고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날아간다. 남극에서 관측용 발찌를 단 큰도둑갈매기라는 바닷새가 적도를 넘어 1만 3,000킬로미터를 이동해 홋카이도에서 발견된 기록도 있다.
남극에서 일본 홋카이도까지 날아왔다고 생각하면 새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물고기와 새는 해류와 바람의 흐름을 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들에게는 흐름을 발견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일이 곧 살아간다는 뜻이다.
식물도 태양 에너지와 물이 순환하는 가운데 흙에서 자라다가 마침내 시들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흐름 속에서 산다.
이런 흐름은 물고기나 새, 식물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도 흐름이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힘을 기르면 일이 매우 재미있어진다. 승부에도 흐름이 있으며 하나의 실수로 흐름이 바뀌는 일도 흔하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좋은 흐름을 타고 있는가, 나쁜 흐름 속에 있는가. 회사 전체의 흐름은 어떠한가. 나쁜 흐름이라면 좋은 흐름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흐름과 바람을 의식하고 느껴 보라.
요트가 항구에서 바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자기 일을 좋은 바람에 올려놓는 일도 바람을 발견하는 힘만 있다면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기회의 바람은 평생 세 번 분다”는 말도 흐름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발견하는 힘을 기를 수 있을까.
평소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야 한다.
특히 자연의 변화에 민감해지면 동물적인 본능이 깨어난다.
막 돋아난 나무를 보면서 이 나무는 왜 여기에서 자라는지, 새가 씨앗을 옮겼는지, 누군가 심었는지, 봄이 되면 어떤 꽃을 피울지 상상해 보라. 꽃만이 아니라 잎과 줄기, 뿌리까지 살펴보라.
그러면 잎이 햇빛을 받고 꽃과 열매를 위해 에너지를 모으며 나무를 성장시키는 모습이 점차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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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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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나무를 보는 방식도 달라진다.
활짝 핀 벚꽃을 단지 꽃으로만 보던 때와 달리 자신 안의 무언가가 변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 감각이 생기면 “담당 임원이 바뀌었다. 왜일까?”라는 회사의 움직임부터 “옆자리 여직원이 예뻐졌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는 사적인 변화까지 점점 민감하게 감지하게 된다.
해류와 바람을 발견하는 힘을 얻으면 즐겁게 일하는 방법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네 가지 ‘운’을 의식하라
발견하는 힘을 기르면 다음에는 운의 흐름이 보인다.
이렇게 되면 매우 재미있다.
운은 움직이고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겨우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재빨리 떠나 버린다.
한번 떠난 운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따라서 운이 찾아왔을 때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운을 내 편으로 만들면 상상하기 어려운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운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가, 놓치는가에 따라 인생에 큰 차이가 생긴다.
잘 생각해 보라. 회사 조직은 일을 잘하는 순서대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출세 여부도 운에 달려 있다. 계속 따르던 상사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자기도 출세하지만, 그 상사가 좌천되면 그 아래 사람들도 출세하지 못한다.
운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 운의 흐름을 판별하는 일은 곧 자기 인생을 결정하는 일과 연결된다. 업무와 관련된 운의 지식을 적어 둘 테니 참고하기 바란다.
운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혜택’ 또는 ‘은총’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늘에서 받은 혜택, 다른 사람에게 받은 혜택, 자기 노력으로 얻은 혜택 등 여러 은혜를 통틀어 우리는 운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운에는 천운·지운·인운·시운이라는 네 종류가 있다.
각각을 하나씩 설명할 테니 업무에 활용하기 바란다.
먼저 천운이란 무엇인가.
천운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찾아온다. 극단적으로 말해 회사를 위해 죽도록 일하는 사람에게도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에게도 같은 장소에 있다면 햇빛은 똑같이 비치고 같은 바람이 분다.
사계절의 풍경 속에서 사는 일본인에게는 일본의 천운이 있고, 사막의 나라에는 사막의 천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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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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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나라마다 그 나라의 ‘천운’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본인에게는 대체로 공통된 일본의 천운이 있다고 말해도 좋다.
최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대지진과 이상 기후는 이 천운의 기세가 매우 강해졌다는 의미다.
이럴 때에는 천운이 인운을 휩쓸어 가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와 예측을 넘어서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는 천운의 시대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자연을 상대하는 농업과 어업 종사자, 그리고 그와 관련된 기업은 앞으로 천운에 의해 운명이 크게 좌우되며 격동의 시대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
‘지운’은 장소의 운이다. 이것은 시시각각 끊임없이 움직인다.
도쿄가 맑아도 오사카에는 비가 내릴 수 있다. 오사카에서 비가 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쿄에도 비가 올 수 있다. 이것이 지운이다. 기대하던 야구 경기가 취소되거나 신칸센이 멈춰 일정이 크게 어긋나는 일도 지운에 따른 것이다.
1997년 나는 이집트의 고대 유적지 룩소르로 관광을 갔다.
그때 이슬람 원리주의 과격파 여섯 명이 룩소르의 ‘왕가의 계곡’ 근처에 있는 하트셉수트 여왕 장제전 앞에서 외국인 관광객 약 200명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참혹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관광객 가운데 일본인 열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관광객 61명과 이집트 경찰관 두 명이 숨졌다.
세계적인 테러 사건이 벌어진 때는 바로 내가 그날 아침 관광버스를 타고 룩소르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지 마십시오!”
현지 경찰이 외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혀 몰랐지만 잠시 뒤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뭐라고? 일본인이 습격당했다고?”
나는 버스에서 내리려 했지만 경비원들이 나를 좌석으로 돌려보냈다.
테러가 30분만 늦게 일어났다면 우리 버스 승객들이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같은 관광 코스를 돌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는 살아남았다. 이것이 지운이다.
이처럼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어쩐지 느낌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그 장소를 떠났는데, 떠나자마자 사고가 일어난 적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감지하는 힘 덕분이다.
다음으로 ‘인운’에는 스스로 만드는 운과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운이 있다. 나는 각각을 ‘자력운’과 ‘타력운’이라고 부른다.
자력운은 자신의 힘으로 운을 붙잡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힘으로 운을 붙잡을 수 있을까.
물론 방법이 있다. 바로 ‘때에 맞추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마니아우(間に合う)’는 정해진 시간에 늦지 않게 일을 처리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그 말의 본래 뜻은 ‘사이와 때(間)’에 ‘맞는다(合う)’, 즉 알맞은 순간에 필요한 일을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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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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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대가 ‘때가 나쁘다’ 또는 ‘때를 맞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필요한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본어로 ‘마누케(間抜け)’, 곧 ‘때와 상황이 빠진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間)’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평소 일상에서 “지금, 이 자리에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자력운이 붙는다.
논의가 막혔을 때 “잠깐 차라도 마시죠”라고 제안하는 일도 인운을 높인다. 누군가와 여행할 때 혹시 필요할지 모른다며 다른 사람 몫까지 물건 하나를 더 챙겨 가는 것도 좋다.
모두 필요한 순간에 ‘때를 맞추기’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타력운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운이다. 대재벌의 집에서 태어난 사람과 지방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같은 날 태어나더라도 인생이 전혀 다르다. 정치인의 자녀 같은 사람은 강한 타력운을 가지고 태어난 셈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타력운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을 충분히 살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시운’은 글자 그대로 때의 운이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일본의 총리가 간 나오토였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하나의 운이다. 도쿄전력의 사장과 회장 역시 마찬가지다. 한 시대 전의 전직 사장들은 자기 재임 중 그런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시운이 좋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운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강한 운을 가진 사람이 보인다.
주변에 그런 운이 강한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 한 그 사람 가까이에 있으라고 권하고 싶다.
운은 그 사람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도 행복을 실어 나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행운’이라고 한다.
너는 ‘바보 이반’이 되어야 한다!
이 장의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을 소개하겠다.
너라는 사람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옛날 어느 나라에 세 형제와 여동생 한 명이 살았다.
이반은 셋째 아들이었고 두 형보다 훨씬 성실한 일꾼이었다. 위의 두 형은 씀씀이가 거칠어 농부인 아버지에게 “빨리 재산을 나눠 달라”고 끈질기게 졸랐다.
요구가 너무 집요해지자 아버지는 “그렇다면 이반에게 물어보아라”라고 말했다. 형들이 곧바로 이반에게 말하자 이반은 “모두 가져가도 좋아”라고 대답했다. 결국 아버지와 이반, 여동생에게는 늙은 말 한 마리만 남고 모든 재산을 형들이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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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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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큰 악마가 지켜보고 있었다.
“가족이 재산을 놓고 크게 다투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정말 아쉽군.”
큰 악마는 세 명의 작은 악마에게 세 형제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욕심 많은 두 형은 작은 악마들이 들려준 돈벌이 이야기에 완전히 속아 어렵게 얻은 재산을 모두 잃었다.
세 번째 작은 악마는 이반을 찾아왔다. “이렇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자 일밖에 모르는 이반은 “시끄러워!”라고 외치며 괭이로 악마를 내리치려 했다. 죽을 위기에 놓인 작은 악마는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다는 나무뿌리를 두고 달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 이반이 사는 나라의 공주가 병에 걸렸다. 왕은 “공주의 병을 고친 사람에게 상을 주고, 그 사람이 미혼이라면 공주와 결혼시켜 주겠다”는 포고를 냈다.
이반은 작은 악마가 두고 간 만병통치 나무뿌리를 들고 성으로 가려고 집을 나섰다. 그런데 집 앞에 가난한 여자가 서서 “제 병을 고쳐 주세요”라고 간청했다.
마음씨 착한 이반은 그 여자에게 나무뿌리를 전부 주어 버렸다.
그래도 늙은 말을 타고 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반이 도착하자 공주의 병이 저절로 나았다. 기뻐한 왕은 약속대로 공주를 이반에게 주었다. 이후 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반은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왕이 된 이반은 곧바로 왕의 옷을 벗고 예전에 입던 낡은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밭에 나가 다시 농사를 지었다. 공주도 더러운 옷으로 갈아입고 함께 밭일을 했다. 왕이 앞장서 일하자 백성들도 열심히 일했고, 이반의 나라는 마침내 자급자족하며 풍족하게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자 큰 악마가 다시 찾아와 백성들에게 돈을 뿌렸다. 이것만 있으면 원하는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살며 멋진 옷도 입을 수 있다고 유혹했다.
하지만 이미 의식주가 충분했던 이반 나라의 사람들은 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그것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곤란해진 쪽은 큰 악마였다. 돈은 잔뜩 가지고 있었지만 누구도 돈과 음식을 바꾸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라는 게 도대체 뭐야?”라며 기분 나빠했다.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큰 악마는 굶어 야위고 몸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어느 날 악마는 “손으로 일하기보다 머리를 써서 일하면 힘들이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라고 연설했다. 그러다 연단에서 머리부터 떨어져 땅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읽어도 참 잘 만들어진 이야기다. 톨스토이가 일본의 원전 문제를 미리 내다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정부와 전력회사는 대지진 이전까지 원전이 있는 지역에 많은 돈을 뿌리고 일자리를 만들며 좋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마야말로 기업이며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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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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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일본에 이반 같은 인물이 얼마나 필요한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너에게는 이반이 될 용기가 얼마나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바보 취급을 받더라도 우직하고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말해 두지만 우리 도장에 모이는 사람들은 모두 ‘이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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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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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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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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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화장을 한 인생을 바라지 마라!
“회장님,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 한동안 못 본 사이에 예뻐졌군.”
“정말요? 회장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빈말이어도 기뻐요.”
“내가 빈말을 할 리 없잖아.”
어느 날 도장에서 젊은 여성 도장생과 나눈 대화다.
그녀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확실히 훨씬 아름다워져 있었다. 물론 화장을 한 것도 아니었다. 맨얼굴인데도 빛나고 있었다. 연애라도 시작했나 생각했지만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마음이 밝아지고 성격이 솔직해졌다는 사실을 건강한 맨얼굴이 내게 알려 준 것인지도 모른다. 젊은 사람이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지내는 모습은 보기 좋다.
반대로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여배우와 결혼한 남자가 하소연했다.
“아내와는 침실도 따로 쓰는데, 매일 아침 한 시간 반씩 화장실에 들어가 나오질 않아요. 아침부터 완벽하게 화장하고 나오니 지금까지 한 번도 맨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 화장을 지우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화장을 지운 얼굴은 보지 않는 편이 좋겠군.”
나는 그렇게 충고해 주었다.
인간은 본래 몸속에 여러 독소를 가지고 있다.
가지고 있다기보다 살아가는 동안 몸 안에 ‘때’가 쌓인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 때는 계속 쌓인다.
몸이 그렇다면 마음속에도 당연히 때가 쌓일 것이다.
네가 “젠장!”이라고 한 번 크게 외치면 그 분함이 마음속에 때로 남는다. 일 때문이라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속이면 양심이 진흙에 더럽혀진다.
승부의 승패에 집착해도 이기든 지든 마음에 때가 낀다. 한 번 화를 낼 때마다 마음이 한 겹 더러워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대가로 너는 월급이라는 생활의 양식을 얻는다.
그래서 인간은 목욕한다. 피부 표면의 때뿐 아니라 몸 안에 쌓인 독소까지 본능적으로 땀과 함께 밖으로 흘려보내려 한다.
퇴근한 직장인들로 밤마다 사우나가 붐비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다.
특히 때가 두드러지는 순간은 사람이 ‘이기고 싶다’는 욕망을 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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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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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서 경쟁자를 이기고 싶다. 출세해 지금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싶다.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싶다. 눈에 띄고 싶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인간은 더러워진다.
강한 유전자를 지닌 동물이 살아남는다고 한다. 인간의 DNA에도 먼 옛날부터 그런 경쟁의식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누구나 승부에서 이기고 싶어 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는 마음이 동물로서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화장과 같다.
게다가 너희는 이기기 위해 불필요한 학력과 지식을 덧붙이고, 필요 이상으로 상대를 눌러 이기려 한다. 이것이야말로 짙은 화장이다.
여성의 화장에 빗대면 이해하기 쉽다.
앞서 말한 여배우처럼 화장을 지우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짙게 화장한 사람이 있다. 내게 그것은 화장이 아니라 가면이다. 가면을 벗기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
네 회사에도 가면이 두꺼운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위선자다. 그런 사람이 사장인 회사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렵다.
자기 회사가 세상과 사람을 위해 봉사한다고 말하면서 뒤로는 돈벌이만 궁리한다. 회사 전체가 짙은 화장을 하고 있으니 실로 더럽다. 그런 회사일수록 ‘이기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고 여기며 무슨 짓을 하든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돈만 벌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호언장담한 사장이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생에서는 이기지 않아도 되는가. 너를 위해 분명히 말해 두겠다.
이기지 않아도 된다. 대신 지지 않는 인생을 살아라.
이기려고 얼룩과 주름을 화장으로 감추기보다 맨얼굴로 지지 않으면 된다.
화장으로 만든 승리, 즉 수단을 가리지 않는 방법만 찾으면 인간은 점점 약해진다. 더러움을 다시 화장으로 감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지 않는 인생은 무엇인가.
이기는 일과 지는 일을 모두 받아들이고 즐기는 인생이다.
계속 이기지 못해도 괜찮다. 분명 질 것 같은 승부라도 좋은 승부를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말하거나 사람을 속이려 한다. 좋은 승부를 하겠다는 각오만 품고 모든 일에 맞서면 인생에서 두려울 것이 없어진다.
그러려면 일에 실패했을 때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단해야 한다. 변명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어라.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말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실수까지 태연히 짊어지는 인생을 살아라.
“먼저 손해를 보아야 나중에 이익을 얻는다”는 말이 있다.
변명하고 책임을 피하는 것은 화장 위에 또 화장을 덧칠해 가면을 쓰는 것과 같다. 반대로 어떻게든 좋은 승부를 하겠다고 결단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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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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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미 맨얼굴이며 그 승부에서 이긴 것이다.
“내 마음은 언제나 맨얼굴이다”라고 너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성장한다는 것은 더러워진다는 것
갑작스럽지만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내용을 기억하는가.
안데르센의 동화다. 세부를 잊은 사람을 위해 줄거리를 적어 보겠다.
늘 새 옷을 입고 거리를 걷기 좋아하는 임금에게 어느 날 사기꾼 같은 두 명의 재봉사가 찾아온다.
그들은 “아무도 본 적 없는 특별한 옷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제안한다. 그 옷은 가볍고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에게만 보이고 바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흥미를 느낀 임금은 옷을 주문했다. 제작 중인 작업장에 구경을 가자 두 사람은 “어떻습니까? 정말 훌륭하지요. 이제 곧 완성됩니다”라고 말했다. 당연히 옷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임금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고 “훌륭하군”이라고 맞장구쳤다. 신하들도 마찬가지로 칭찬했다.
마침내 임금은 완성된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행진에 나섰다. 구경꾼들도 바보라고 생각될까 두려워 임금의 옷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때 한 아이가 “임금님은 벌거벗었어!”라고 외쳤다. 그러자 구경꾼들도 잇달아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임금과 신하들만은 계속 훌륭한 옷을 입었다고 믿으며 행진을 이어 갔다.
이 이야기는 독선적인 지도자 주변에는 돈과 출세만 노리는 사람들이 모이고, 지도자가 몰락하면 그 주변 사람들이 뿔뿔이 사라지는 모습을 두고 “그 사람은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고 표현할 때 흔히 인용된다.
그러나 내가 굳이 이 이야기를 다시 쓴 이유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임금님은 벌거벗었어”라고 외친 아이를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손주가 여럿 있다. 그 가운데 곧 세 살이 되는 손주를 요즘 특히 귀여워한다.
그 아이는 정말 사랑스럽다. 나를 “할아버지,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잘 따른다. 누가 가르쳤는지 자기가 얻은 것은 무엇이든 “반씩”이라고 말하며 절반으로 나누어 준다. 혼자 독차지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그 아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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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비슷하게 생긴 접시 두 개가 있다고 하자. 하나는 인간문화재가 구운 시가 수백만 엔짜리 접시이고, 다른 하나는 100엔 숍에서 산 접시다.
그 아이는 두 접시에 손을 대고 “반씩”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이에게는 둘이 똑같아 보이므로 접시가 두 개라면 하나씩 나누려 할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어른은 어떻게 할까. 100엔짜리 접시는 깨져도 괜찮지만 수백만 엔짜리 접시는 깨지면 곤란하다고 생각해 아이가 손도 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건 만지면 안 돼”라며 접시를 빼앗는다. 아이는 왜 빼앗겼는지 모르므로 “반씩”이라고 말하며 울어 댈 것이다.
나는 그런 손주가 한없이 사랑스럽다.
그 아이에게는 더러운 욕망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타아’, 즉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려는 봉사의 마음이다. 더구나 아이에게 접시의 금전적 가치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저 할아버지에게 하나를 주고 싶을 뿐이다.
그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 어떻게 될까. 열 살이 되어 집에 수백만 엔짜리 접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100엔짜리 접시는 함부로 다루면서도 인간문화재가 만든 접시에는 음식을 담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성장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더러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약삭빠르게 변하는 것이다.
“임금님은 벌거벗었어”라고 외친 아이 역시 성장하면서 점점 더러워질 것이다.
너도 마찬가지다. “일을 잘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의 때가 묻었다는 뜻이다.
반대로 때가 묻지 않으면 일반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다. 의식적으로라도 더러운 마음을 갖지 않으면 출세할 수 없다. 그것이 네가 사는 회사원 사회의 현실이다.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에는 적어도 “평소의 나는 더러워져 있다”는 의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한 결정을 내리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심을 잊지 마라!
내 도장에는 매일 도장생들이 찾아와 마작을 한다. 이곳에서는 마작을 통해 마음의 강인함을 기르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도장생의 비뚤어진 정신을 바로잡고 인간 본래의 마음을 되찾는 정신 수양의 장소다. 따라서 도장생을 평가하는 내 기준은 결코 마작 성적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즐겁다”고 느끼게 하는 인간적인 사랑스러움과 정직함을 평가한다.
마음이 솔직한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가, 웃는 얼굴이 사랑스러운가, 성격이 밝은가, 꿋꿋한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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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아무것에도 더럽혀지지 않은 동심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지를 보고 도장생을 판단한다.
“이 아이는 아직 자존심이 너무 세군.”
“이 아이는 고집을 부리고 있군.”
“그래, 이렇게 기특한 아이는 좀처럼 없지.”
그런 식으로 도장에 찾아오는 많은 사람을 바라본다. 달리 말하면 아이 같은 면이 많을수록 내 평가는 높다.
앞서 본 『벌거벗은 임금님』에서도 아이였기 때문에 “임금님은 벌거벗었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동심이야말로 막다른 곳에 다다른 앞으로의 시대를 살아갈 핵심이라고 믿는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동심은 평가 대상이 되지 않는다. 성격이 솔직하다는 이유로 출세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사람 위에 서는 이에게 이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네가 과장이나 부장이 된다면 반드시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보았으면 한다.
왜 중요한가.
솔직한 사람을 보면 자기 마음도 공명하기 때문이다. 더러워진 자기 마음을 씻어 주기 때문이다. “나도 저 사람처럼 순수하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상당히 깨끗해진다.
자기 마음이 씻긴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구원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흙투성이가 된 뒤 샤워로 머리와 몸을 씻는 것과 같다.
사람은 지금까지 줄곧 성적으로 평가받아 왔다. 공부를 잘하는가, 일을 잘하는가, 즉 할 수 있는가 없는가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이것이 능력주의다.
그래서 기존의 상사들은 유능한 부하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 능력에 기대었다. 능력이 부족한 부하는 버림받고 나이가 들면 한직으로 밀려났다. 짐짝 취급을 받고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다.
일을 잘하는 남자들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괜찮았을까. 진실은 회사를 그만두고 나면 잘 알게 된다.
아무리 유능한 남자도 언젠가는 정년을 맞는다.
유능했던 남자의 퇴직 후는 비참하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역 시절 일을 잘했다는 자신감이 있으므로 퇴직한 뒤에도 회사에 가고 싶어 한다. 근처에 간 김에 옛 부하를 불러낸다. 부하도 한 번쯤은 만나 주겠지만 두 번, 세 번이 되면 적당한 핑계로 거절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지금 손을 놓을 수 없는 일이 있어서요. 다음에 근처에 오시면 연락해 주세요.”
그제야 자신이 이미 방해가 되는 존재임을 안다. 한때 유능한 사람이라고 자부했기에 굴욕감은 더 크다.
거기에 자존심도 문제다. 늙은 네가 “나는 한때 일류 기업에서 일했다”고 말해도 직함이 사라진 뒤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명함으로 일해 온 사람의 말년은 비참하다. 정년을 맞은 너는 ‘그저 평범한 아저씨’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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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을 ‘잘하지 못했던’ 남자들은 정년을 맞으면 “드디어 끝났다!”며 기뻐하고 평범한 아저씨가 된다.
해방감을 누리며 노후 생활을 만끽한다. 지역 축제에 참여하고 자원봉사에도 힘쓴다. 퇴직금으로 부부가 해외여행을 떠나고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여유로운 말년을 보낸다.
그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유능한 남자들이 일할 때 그들을 기대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무시당했던 사람들은 재직 중에 일 이외의 보람을 찾아냈다.
그곳에서 회사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을 얻는다.
“일을 떠나 보니 이런 사람들이 있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사 밖에 동료를 만든다.
지역 상점가 사람들, 자원봉사 동료, 취미 친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히 지켜 온 가족이 있다.
그러므로 퇴직하면 더 이상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드디어 해방이다!”라고 기뻐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정년 뒤 회사 근처에서 옛 부하에게 전화를 걸지도 않는다.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회사란 아무리 몸을 깎아 가며 일해도 퇴직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곳이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노후는 생각보다 길다.
지금 네가 유능한 사람이라면 앞으로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이 사람과 일하면 즐겁고 사랑스럽다”고 느껴지는 부하와 함께 일하는 편이 매일을 더 충실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들은 살아가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 자신도 동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 역시 결단에 필요한 중요한 요소다.
‘100점 모범생’보다 ‘15점 장인’
“쇼짱, 정말 오랜만이야. 요즘 대단히 활약한다며?”
“내가 원래 골목대장이었잖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학교 전체를 휘어잡았지.”
“학교만이 아니었어. 이 동네 전체의 대장이었다고.”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
“하하하하하!”
수십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가자 어린 시절 동네의 말썽꾸러기들이 내 주위로 몰려와 곧바로 옛이야기를 시작했다.
가게 주인도 있었고 장인도 있었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추억이 끝없이 피어나 벚꽃놀이처럼 떠들썩했다.
너희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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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초등학교 동창회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모두 학원에 다니느라 동네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너도 어린 시절 시험에서 100점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아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참 재미있다.
늘 100점을 받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반대로 언제나 15점밖에 받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
100점짜리 아이는 분명 15점짜리 아이에게 우월감을 느낀다. 시험을 백 번 치르면 백 번 우월감을 느낀다.
하지만 15점짜리 아이가 백 번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15점을 받고도 제법 기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15점 그룹이었다.
“쇼짱, 대단하다. 15점이나 받았어!”
“나는 너보다 3점 낮은 12점이야.”
“아, 나는 또 0점이다.”
이런 분위기이므로 15점 그룹은 성적 좋은 아이에게 특별히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70점이나 75점을 받았다면 조금 분했을지 모르지만 15점 그룹은 그런 감정 자체가 없다.
반면 100점짜리 아이들은 한꺼번에 모여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까지 이른바 일류 학교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늘 100점을 받았던 아이들이 모인 학교에서 모두가 다시 100점을 받을 수는 없다. 그래도 100점을 받지 못하면 자기 가치가 사라진다고 여기므로 필사적으로 100점을 노린다.
그곳에서 다시 100점을 받은 아이와 받지 못한 아이로 갈린다. 계속 100점을 받은 아이는 또 우월감을 맛보고, 받지 못한 아이는 비로소 열등감을 맛본다.
그다음부터가 흥미롭다.
끝까지 100점을 받아 온 아이들은 마침내 하나의 사회를 만든다. 그것을 ‘100점 모범생 사회’라고 부르자.
이 사회의 밑바닥에는 100점짜리 아이를 목표로 하다 실패한 옛 아이들이 많이 속해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15점만 받던 아이들은 그곳에 없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15점이었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일찌감치 ‘15점 장인 사회’를 만든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기 손재주로 살아가는 사회가 바로 15점 장인 사회다.
과거 일본에는 분명한 15점 장인 사회가 있었다.
동네마다 공장이 있었고 그곳의 사장은 학력이 없어도 빛나고 있었다. 그런 공장에서 수많은 새로운 제품이 발명되었다.
예를 들어 훗날 파나소닉을 창업한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소학교 4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학교를 그만두고 전구 공장에서 말단 직공으로 일했다. 세계적인 혼다를 만든 혼다 소이치로는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자동차 수리 공장에 견습공으로 들어갔고, 스물두 살에 독립해 하마마쓰에서 자기 공장을 연 것이 세계의 혼다를 만든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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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훗날 발명왕이라 불린 에디슨은 초등학교 산수 시간에 1+1=2라고 가르치는 교사에게 “찰흙 한 덩이에 찰흙 한 덩이를 더하면 커다란 찰흙 한 덩이가 되는데 왜 둘입니까?”라고 물었다. 교사는 “네 머리는 썩었다”고 말했고 그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아인슈타인은 일곱 살까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으며 어린 시절 늘 두서없는 공상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15점 장인 사회의 대표적인 주민이다.
이 사회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100점짜리 아이에게 열등감을 느끼지도, 특별히 존경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는 일을 생각해 내거나 싸움을 잘하거나 달리기가 빠르거나 철봉, 딱지치기, 팽이 돌리기를 잘했던 일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마작장을 운영하는 아저씨에 불과한 나 역시 동창회의 모습을 보면 분명 15점 장인 사회의 한 사람이지 100점 모범생 사회에는 속하지 않는 듯하다.
동창회에서 신나게 떠드는 사람은 15점 장인 사회의 사람들이다. 100점 모범생 사회의 말단 주민들은 조용하다.
그렇다고 100점 모범생 사회의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옛날을 추억하는 동창회에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안타깝게도 아직 100점을 얻으려고 악착같이 일하고 있거나, 이미 은퇴해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장인의 삶에서 배워라!
15점 장인 사회에는 “과연 장인이구나”라고 감탄할 만한 좋은 이야기가 많다. 내가 들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다.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쳐 도쿄에는 “대패를 만들려면 이 사람에게 맡겨라”라고 불린 대장장이가 있었다. 목공 도구의 신으로 불린 지요즈루 고레히데라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물건만 만들었다.
고레히데가 만든 대패날은 다른 장인이 만든 것보다 몇 배나 비쌌다. 보통 대장장이는 하루에 하나를 만들지만 그는 열흘에서 보름 동안 온 정성을 들여 하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중간에 제작을 멈추었다. 자신의 최고 수준의 일을 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가난했다.
어느 날 그런 고레히데에게 오사카의 ‘에도쿠마’라는 목수에게서 주문이 들어왔다. 이름에는 ‘에도’가 붙었지만 간사이 지방에서 솜씨 좋은 목수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알아보는 사람은 알아본다”는 신념을 가진 고레히데는 곧바로 대패를 만들기 시작했다. 완성되자 자신이 직접 오사카까지 배달하러 갔다.
고레히데가 오사카역에 도착하자 ‘지요즈루 고레히데 님’이라고 적은 팻말을 든 사람이 그를 맞이했다.
에도쿠마는 고레히데를 집으로 데려가 그가 내놓은 대패를 오랫동안 바라본 뒤 “150엔에 팔아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돈을 지불했다. 당시 회사원의 월급이 약 30엔이었으므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00만~300만 엔에 해당했을지도 모른다. 대패 하나의 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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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것도 없이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고레히데가 주위를 둘러보니 집에는 찢어진 미닫이문과 최소한의 가구밖에 없었다. 그런 에도쿠마가 거액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하자 고레히데가 물었다.
“이렇게 큰돈을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에도쿠마는 품에서 전당표를 꺼내며 말했다.
“고레히데 선생님도 오사카까지 오실 여비를 마련하기가 힘드셨겠지요.”
그러자 고레히데도 품에서 전당표를 꺼냈고 두 사람은 함께 웃었다고 한다.
내일부터 먹을 것이 없어지더라도 일에서는 조금도 손을 빼지 않는다. 두 사람이 모두 15점 장인 사회의 주민이었음을 보여 주는 일화다.
고레히데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이런 이야기가 남았다.
1957년 10월, 어느 제자에게 “고레히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지방에 살던 그 제자는 여덟 식구가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어려워 도쿄까지 갈 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철물점으로 가 평소 일을 소개해 주던 주인에게 돈을 빌리려 했지만 주인은 마침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제자가 주인의 아내에게 “큰일이 생겼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사정을 묻지도 않고 금고를 열어 “이 돈으로 도쿄에 다녀오세요”라며 돈을 건넸다고 한다.
100점 모범생 사회에는 없는 15점 장인 사회의 따뜻함이 어떤 것인지 너도 조금은 이해했을 것이다.
네가 몸에 익혀야 할 것은 분위기다
지요즈루 고레히데는 외모도 훌륭했다. 몸은 마른 편이었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고 술 마시는 모습은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멋졌다고 한다.
그에게는 이런 일화도 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던 시절, 고레히데가 혼자 맥주홀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미군 장교가 종업원에게 “저분에게 맥주 한 잔을 보내 주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는 점령군 장교들이 패전국 일본인을 얕잡아 보고 선글라스에 파이프를 문 채 지프를 타고 다니며 거만하게 행동하던 시대였다.
그런 장교가 굳이 일본의 백발 노인에게 맥주를 보냈다. 고레히데에게서 늠름한 옛 무사의 분위기를 보았던 것이리라.
사실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몇 번 있다.
나는 친구들과 남태평양의 휴양지에 자주 놀러 간다. 얼마 전 관광객을 위한 고급 프랑스 음식점이 있어 친구와 둘이 가 보기로 했다.
나는 호텔 프런트에 볼일이 있어 친구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 두기로 했다.
볼일을 마치고 식당에 들어갔지만 둘러봐도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무슈,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몇 분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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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입니다.”
어쩔 수 없이 종업원을 따라가자 식당 앞쪽 자리로 안내했다. 바로 앞에서는 밴드가 연주하고 있었다. 꽤 좋은 자리였다.
주변에는 유럽 각지에서 온 커플들이 식사하며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휴양지 분위기가 가득했다. 메뉴판을 받았다.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할 무렵에야 그가 나타났다.
“어디에 있었어?”
“어디긴 어디예요. 이 가게에 들어오니 저쪽 자리로 안내하더군요. 회장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회장님만 이렇게 좋은 자리로 안내받으셨잖아요.”
친구가 가리킨 자리는 식당 한참 안쪽이었다. 칸막이 뒤라 밴드 연주도 전혀 보이지 않을 듯했다. 파리 같은 곳의 일류 음식점에서 일본인을 얕잡아 본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친구가 실제로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같은 일본인인 나는 왜 좋은 자리를 받은 것일까. 참고로 그 친구는 외국어에 능숙하지만 나는 외국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에는 후일담도 있다. 이듬해 같은 식당을 다시 찾아 친구를 먼저 들여보냈더니 또 같은 구석자리로 안내받았다. 내가 뒤늦게 들어가자 전과 똑같이 좋은 자리로 안내받았다. 친구가 몹시 풀이 죽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왜 그런 대접을 받았을까.
그가 풍기는 분위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회사 임원이므로 당연히 부유하다. 그렇다면 종업원은 돈 많은 손님을 귀하게 대해야 할 것 같지만, 바로 그 지점에 일류 음식점의 자부심이 있는 듯하다.
누가 보아도 돈이 많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일본 중년 남성은 그들에게 오히려 귀한 손님으로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지요즈루 고레히데에게 미군 장교가 맥주를 보낸 이야기와 이 사례를 생각하면 15점 장인 사회를 살아온 사람에게서 풍기는 무언가를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히 일본인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금 네가 어떤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익은 야자나무는 스스로 잎과 열매를 떨어뜨린다
15점 장인 사회도 제법 괜찮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네가 사는 곳은 아마 100점 모범생 사회의 말단일 것이다. 100점짜리 사람들이 의기양양하게 활약하는 ‘회사’라는 조직 속에서 너는 오늘도 지쳐 가며 살아간다.
왜 그렇게 더러워지면서까지 살아가는가.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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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그것을 꾸짖을 생각도 없고 그럴 권리도 없다. 가족이 있는 사람은 무척 힘들 것이다.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일하지 않으면 너는 살아갈 수 없단다”라는 말밖에는 자기 인생에서 자랑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소개한 명인들처럼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한 재능도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학력이라는 골치 아픈 간판뿐이다.
하지만 아이도 언젠가는 자란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아”라고 반발할지도 모른다.
15점 장인 사회의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랐고 부모의 삶을 동경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높은 사람이 찾아오거나 자기보다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태도가 전혀 달라지지 않는 부모를 존경했다. 가난한 세계였지만 부모의 등을 바라보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공부였다.
나무를 깎고 망치질하면 집이 지어진다는 것을 배웠고 페인트를 제대로 칠하는 법도 부모에게 배웠다. 그런 부모를 보는 것 자체가 훌륭한 교육이었다.
너는 어린 시절 무엇을 공부했는가. 학교에서 가르쳐 준 것을 많이 외웠을 뿐이지 않은가. 인수분해와 미적분처럼 학교에서 배운 것이 사회에 나와 실제로 무엇에 도움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네 아이는 너에게 무엇을 배우게 될까.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방법인가, 하기 싫은 일을 평생 계속하는 요령인가.
100점 모범생 사회의 가장 큰 결함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새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이다. 이미 있는 것을 개선하고 이어 가는 데에는 능하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지 못한다. 그런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100점짜리 사람들은 100점이 절대적인 만점이라고 믿고 그 이상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너도 그중 한 사람이 아닌가. 그저 만점을 받아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만을 목표로 살아왔다. 그것은 ‘직업을 얻은 것’이 아니라 ‘회사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하면 살아갈 수 없다. 다른 회사를 다시 찾아야 한다. 스스로 일을 만들면 된다는 생각은 없다. 일할 장소조차 자신이 만들지 못한다.
목수는 집을 지을 수 있다. 어부는 물고기를 잡고 농부는 쌀과 채소를 기른다. 요리사는 음식을 만들고 바텐더는 칵테일을 만드는 전문가다. 무슨 일이 생겨도 자기 기술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회사원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살아갈 방법’ 또는 ‘생존 기술’을 회사라는 존재에 의존해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네, 부장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진지하게 답한다. 이것이 100점 모범생 사회다.
그런 네가 중요한 순간에 정말 올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적어도 회사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 존재를 조금이라도 확인해 둔다면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할 자신감이 생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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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 사모아의 추장 투이아비는 유럽을 방문하고 돌아와 한 연설을 모은 『파파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익은 야자나무는 때가 오면 자연스럽게 잎을 떨어뜨리고 열매를 내어 준다.
그와 달리 백인은 자신이 가진 것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려 하지 않는다. 마치 잎도 열매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야자나무와 같다.
야자나무는 열매를 떨어뜨려 우리에게 준 뒤 어떻게 하면 다시 새로운 열매를 맺을지 생각한다. 백인보다 야자나무가 훨씬 더 현명하다.
회사원인 너는 남쪽 섬의 야자나무처럼 살아갈 수 있는가.
오늘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 먼저 자신이 가진 것을 떨어뜨려 보라.
“돈은 쓰지 않으면 결코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돈에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 애정과 열의, 시간까지 지금 가진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내어 주겠다고 결심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결심한 순간부터 네 주변에 반드시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뿌리와 줄기와 잎을 소중히 하는 인생
야자나무 이야기가 나왔으니 가족에 관해 말하겠다.
야자나무 같은 식물은 튼튼한 뿌리와 줄기와 잎이 있어야 훌륭한 열매를 맺는다. 뿌리도 없이 커다란 열매만 거두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인생에서 뿌리와 줄기와 잎에 해당하는 것이 가족이다.
어느 날 신문의 독자 투고란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우리 아빠는 정말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버는 돈은 적다. 그래도 나는 아빠가 정말 좋다.”
읽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부모라면 아이에게 이런 말을 듣고 싶을 것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뿌리와 같은 존재다.
신주쿠에서 마작을 치던 시절 나는 스스로 인생을 망치는 남녀를 많이 보았다.
원인은 마작만이 아니었다. 술, 여자, 약물 같은 일시적인 쾌락에 무기력하게 빠져들었다.
그들은 100점 모범생 사회는 물론이고 15점 장인 사회에도 들어갈 수 없는 구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태어날 때부터 그런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넉넉하게 자라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가난해도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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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나는 부모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삐뚤어지고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 욕망이나 특정한 대상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이 어떤 최후를 맞는지 많이 보아 온 내게는 자기 아이에게 편향된 삶을 강요하는 부모들이 어리석고 슬프게 느껴진다.
가난에 패배해 자포자기한 부모의 아이는 불쌍하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의사라는 이유로 의사가 되는 일을 강요받은 소년이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그 전형이다. 자신이 도쿄대를 나왔기 때문에 아이도 도쿄대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부모를 보면 아이가 가여워 견딜 수 없다.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욕심 때문에 아이를 무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부모는 뿌리와 줄기와 잎을 소중히 하지 않는 식물과 같다. 결국 모든 것이 썩는다.
아이가 곤란해할 때 알아차려 주고, 도움을 요청할 때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이 뿌리와 줄기와 잎을 소중히 하는 부모의 일이다.
나는 ‘작귀’, 즉 마작의 귀신이라고 불리지만 결코 귀신은 아니다. 아내와 네 자녀, 다섯 손주가 있는 평범한 가장이기 때문이다.
내가 대리 마작 승부사로 살면서도 인생을 망치지 않은 데에는 가정을 꾸린 일, 특히 아이들의 존재가 컸다.
첫아들이 태어났을 때 나는 “내가 이 아이를 먹여 살려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아이가 내일부터 나를 살아가게 해 주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희망이 없던 내일을 이 작은 생명이 살아가게 해 준다고 느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순간부터 아이는 내 삶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아이가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면 이 아이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결단했다.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와 가정이다. 아이의 어머니와 가정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집이다. 내가 집을 마련하기로 한 가장 큰 이유가 그것이었다. 불안정한 마작 승부사의 생활에 흔들리지 않고 아이가 언제나 안심하며 살 수 있는 안정된 그릇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그때부터 나는 뿌리와 줄기와 잎을 모두 소중히 하는 인생을 선택했다. 이후 대리 승부사의 세계에서 손을 씻고 평범한 마작장 주인이 되었다.
네가 아파트를 빌리는 대신 사고, 셋방 대신 자기 집을 짓는다면 그 결단의 이유도 나와 같기를 바란다.
경험에서 한 가지를 더 덧붙이겠다.
인간에게 돌아갈 장소가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길을 잃었을 때에는 그곳으로 돌아가면 된다.
헤매는 상태로 계속 나아가면 사람은 더 깊은 미로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지금 너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는가. 돌아갈 곳이 있으면 생각도 차분해진다.
그 사실 역시 네 결단을 좌우하므로 의식해 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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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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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을 내 편으로 만들면 좋은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언제였는지 젊은 사람들과 함께 하치조지마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운이 나쁘게도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다가 거칠어 며칠 동안 수영도 하지 못했다. 어느 저녁 우리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를 구경하려고 바다 쪽으로 뻗은 잔교까지 갔다.
출발하기 전 호텔 방에서 본 일기예보는 태풍이 하치조지마를 직접 덮칠 것이라고 알리고 있었다.
잔교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파도가 물보라를 높이 일으키며 크게 요동쳤다.
“와, 파도가 엄청 높다!”
“조심해. 파도에 휩쓸리면 끝장이야.”
모두 떠들며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전원이 잔교 끝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그 순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거대한 파도가 조금 전까지 우리가 서 있던 자리를 덮쳤다.
그대로 서 있었다면 틀림없이 전원이 파도에 휩쓸렸을 것이다.
우리가 왜 이동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몸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이것이 운이다.
너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다 가슴이 철렁한 순간, 사고가 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운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다고 찾아오지 않는다.
운은 인간이 본래 지닌 자연스러운 감성을 기분 좋게 되찾을 때 생긴다. 그러면 이성을 넘어서는 번뜩임과 행동이 가능해진다.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느껴지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우리가 잔교에서 거대한 파도를 피할 수 있었던 것도 마음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운을 불러들이려면 자기 마음을 가능한 한 기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네가 무엇인가를 결단해야 할 때 확실히 도움이 된다.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불쾌해진다. 그런 때에는 기분이 나쁘므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편이 좋다. 반대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좋은 일도 일어나기 쉽다.
일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돈이 된다는 이유로 일하거나, 싫은 일을 의무감만으로 계속하면 어딘가에서 위화감을 느낀다. 그러면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에는 가능한 한 위화감이 드는 것에서 멀어지는 편이 좋다. 일을 바꿀 수 없다면 일 이외의 시간에 기분이 좋아지는 일을 최대한 많이 하라.
마음과 몸을 기분 좋은 상태로 유지하면 운이 저편에서 찾아와 좋은 결단을 내리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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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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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내어 ‘나쁜 일’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도쿄 신주쿠 가부키초에서 자랐다고 해도 좋다.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온통 폐허가 된 신주쿠에 전후 복구 계획이 세워졌고, 그곳에 가부키 극장을 세우려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가부키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 동네에서 살아왔으니 당시 내 주변에는 나쁜 친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당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누가 봐도 나쁜 얼굴을 한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 지금은 겉으로는 좋은 얼굴을 하고 얼핏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이 나쁜 일을 하는 시대다.
일류라고 불리는 대기업이 주주총회 방해꾼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사건만 보아도 회사 자체가 얼마나 나쁜 일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뒤가 깨끗하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돈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겉으로는 훌륭한 사회인이면서 실제로 하는 일은 교활하고 비겁한 사람이 확실히 늘고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초등학생에게 훈계하듯 “나쁜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무언가를 결단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이 하나 있다.
‘용기를 내어 하는가’, 아니면 ‘비겁한 마음으로 하는가’다.
비겁하다고 느끼면 어떤 일이든 하지 않는다. 반대로 용기를 가지고 하는 일이라면 세상에서 나쁘다고 여기는 것이라도 해 볼 가치가 있다.
실제로 해 보면 알겠지만 용기를 내어 나쁜 일을 하는 순간에는 진짜 자신이 드러난다. 일종의 담력 시험과도 비슷하다.
학생 생활에 빗대면 교사에게 반항하는 것은 용기를 내어 나쁜 일을 하는 것이고,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는 것은 비겁한 마음으로 나쁜 일을 하는 것이다.
같은 나쁜 일이라도 둘은 전혀 다르다.
회사에서 망하기 직전인 협력업체에 일을 우선 배정하는 것은 용기를 내어 규칙을 어기는 일일 수 있다. 반대로 협력업체에 접대를 강요하거나 뇌물을 받아 챙기는 것은 비겁한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어떤 경우든 회사 안에서 나쁜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 나쁜 일에서도 무엇인가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결단하는 편이 좋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사람들 가운데 나쁜 일에서 제대로 배운 사람일수록 결정적인 수라장에서 강하고 믿을 만했기 때문이다.
돈에 가까이 가면 반드시 화상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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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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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리 승부사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한 번의 승부에서 당시 돈으로 수백만 엔이라는 거액이 움직였다. 지금 가치라면 수천만 엔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 승부에서 이기면 나를 대리 선수로 지명한 사장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사쿠라이 씨, 절반을 가져가십시오. 저는 돈이 필요해서 이 승부를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대리 마작은 단순히 돈을 벌려고 하는 경우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승부로 결판을 내는 일이 많았다.
“좋아, 마작으로 결정합시다. 이긴 쪽이 이 사업을 맡는 것으로 하지요.”
서로 마작 고수를 준비해 대리 선수끼리 승부했다. 그러니 이긴 뒤 “절반을 가져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20년 동안 마작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제안받은 돈을 모두 받았다면 얼마나 큰돈을 모았을까.
하지만 액수가 크다는 이유로 승부를 맡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나를 대리 선수로 쓰고 싶어 하는 사장이 네 명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프로야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처럼 “5천만 엔을 줄 테니 우리 편에서 뛰어 달라”고 해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두 사람이 한신이나 주니치처럼 “4천만 엔을 주겠다”고 부탁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500만 엔밖에 제시하지 못하는 요코하마나 히로시마 같은 사람의 사정에 마음이 움직일 때에야 비로소 승부에 나가는 감각이었다.
다른 대리 선수가 한 해 백 경기 출전하는 선수라면 나는 열 경기만 나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신주쿠라는 특별한 도시에서 살아가며 반드시 갚아야 할 의리 때문에 대리 승부를 했을 뿐이다.
아무리 많이 이겨도 받을 금액은 미리 정했다. 돈에 집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마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던 것 같다.
지금도 이런 습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리 승부의 마작은 무서운 세계였으므로 돈에 따라 움직이는 일을 본능적으로 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너도 “여기에서는 내가 나서지 않는 편이 좋다”고 느낀 순간에는 앞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것과 같은 감각이다.
지금 생각하면 바로 그 때문에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당시 내가 “자이언츠가 좋다”거나 “한신도 자이언츠만큼 돈을 내라”며 돈에 굶주렸다면 지금 이렇게 온몸이 멀쩡하게 살아 있을지 의문이다. 욕망과 욕망의 싸움에 휘말려 목숨조차 잃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왜 그토록 돈에 집착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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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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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도박을 좋아한 아버지가 빚더미에 올라 어머니가 돈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돈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위험한 것이라고 느꼈다.
“또 도박에서 졌어요? 이번 달 생활비는 어떻게 하려고요?”
“시끄러워. 그걸 어떻게든 마련하는 게 네 일이잖아.”
부부싸움의 원인은 언제나 돈이었다. 다행히 어머니가 생활을 제대로 꾸려 가는 분이어서 나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어머니마저 아버지처럼 돈에 무책임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돈의 위력은 대단하다. 돈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돈만 있으면 실은 별것 아닌 사람도 자신을 크게 보이게 할 수 있다. 원한다면 거의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다. 심지어 사람까지도 말이다.
어느 사장은 당당히 “돈으로 사람의 마음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이해할 만한 말이다. 실제로 많은 여자가 돈 많은 남자의 돈을 보고 몰려들었다.
반대로 돈 없는 사람은 부자를 비정상적으로 미워하면서도 부러워하고, 자신도 손쉽게 부자가 되려고 발버둥 친다. 부자가 되지 못하면 이번에는 빚을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무너진다.
그런 모습을 매일 보면 자연히 돈은 마물이라고 느끼며 더욱 멀리하게 된다.
나는 젊을 때부터 돈은 활활 타오르는 불이라고 생각했다.
벌레들은 그 불빛에 이끌려 다가갔다가 마침내 몸을 태운다.
그래서 대리 승부로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필요한 몫 외에는 받지 않았다.
돈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너도 반드시 기억해 두는 편이 좋다.
세이난 전쟁 당시 사쓰마군의 중요한 인물을 구해 간호해 준 한 여성이 있었다.
그 남자는 감사의 표시로 여자에게 거액을 남기고 떠났다.
그러자 여성은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그를 뒤쫓아가 “이런 것을 받으려고 도운 것이 아닙니다”라며 돈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자신에게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큰 사례를 받으면 오히려 자기 행동의 의미가 사라지는 듯하다는 그 마음을 나는 잘 이해한다.
그 밑바탕에는 돈 때문에 움직인 것이 아니라는 인간의 긍지가 있다.
예를 들어 마작 실력이 완전히 같은 두 사람이 승부한다고 하자. 내 경험으로는 돈에 집착하는 쪽이 반드시 진다.
돈을 얻고 싶다, 돈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승부의 판단을 흐리기 때문이다.
마작이나 일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에는 돈 계산을 완전히 제외하고 판단하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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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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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안을 선택해 잘되면 큰돈을 벌겠군.”
“B안은 실현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겠는데…….”
그런 발상으로 결정하지 않는 편이 좋다.
“이 일이 성공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뻐할까”, “성공하든 실패하든 내게 좋은 공부가 되겠군”이라는 기준으로 A와 B 가운데 하나를 골라라.
판단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불필요한 돈 냄새가 난다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징조라고 생각해도 좋다.
네게 여자 친구나 아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부잣집 딸이 나타났고 너에게 관심까지 보인다. 네 마음은 흔들릴 것이다. 그 여자가 아름답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 단지 욕심만 존재하며 네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다시 말하겠다. 돈은 활활 타는 불이다. 조심하지 않고 가까이 가면 반드시 화상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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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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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인생을 결단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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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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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의 사람, 하부 명인이 찾아오다
어느 날 장기 기사 하부 요시하루 명인이 내 도장에 찾아왔다.
하부 요시하루는 1996년 스물다섯 살에 일본 장기계의 일곱 주요 타이틀을 모두 차지해 큰 화제를 일으킨 천재 기사다.
더 놀라운 일은 열여덟 살 때 오야마 야스하루, 가토 히후미, 다니가와 고지, 나카하라 마코토라는 당시 현역 명인 경험자 네 명을 모두 꺾고 우승한 것이다.
그런 하부 명인이 뜻밖의 인연으로 도장에 나타났다.
어느새 마흔을 넘긴 그는 매우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남자의 이력서”라는 말이 있다. 특히 마흔을 넘기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가 얼굴에 분명히 나타난다.
교활하게 살아온 남자는 생쥐 같은 얼굴을 하고, 너그럽게 살아온 남자는 호테이와 다이코쿠 같은 얼굴이 된다.
네 회사 안을 둘러봐도 재미있을 것이다. 여우 같은 얼굴은 사람을 의심하고 속고 속이며 살아온 얼굴이고, 원숭이 같은 얼굴은 눈치 빠르게 회사 안을 뛰어다니며 처세해 온 얼굴일 것이다.
잘생겼는가 못생겼는가의 문제는 아니다. 미남이면서 차갑고 사나운 악어 같은 얼굴도 있고, 전혀 미남은 아니지만 매우 상냥하고 친근한 하마 같은 얼굴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회사가 동물원인지도 모른다.
하부 명인은 젊을 때와 변함없이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명인이 된 뒤에도 자기 마음에 솔직하게 살아왔다는 뜻이다.
다만 입 주변을 자주 움직이는 버릇이 있었다. 이것은 상반신, 특히 머리를 중심으로 살아왔다는 증거다.
젊을 때부터 로댕의 조각처럼 턱 아래에 손을 대고 골똘히 생각하던 행동이 지금까지 습관으로 남은 듯했다.
그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어깨에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토록 유명한 사람이니 조금은 허세를 부리고 건방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전혀 없었고 대화가 깊어져도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 매우 솔직하고 훌륭한 청년이었다.
그는 20년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으며 언젠가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오지 않았나? 더 일찍 오면 좋았잖아.”
내가 묻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회장님, 모든 일에는 알맞은 때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 맞는 말이군.”
나는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일부러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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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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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부 군, 이제 마흔이지? 40대는 진짜 자신이 반드시 나타나는 시기야. 자네는 지금까지 일곱 관왕을 차지했지만 그것은 아직 진짜 자네가 아니야. 이제부터가 진정한 자네의 인생이지.”
이것도 내 지론 가운데 하나다.
오다 노부나가는 혼노지에서 죽기 전 “인간의 오십 년은 하늘의 시간에 비하면 한낱 꿈과 같다. 한번 생명을 얻어 멸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라고 노래했다고 한다.
인생이 50년이던 시대에는 그 절반인 스물다섯 살부터가 그 사람의 진짜 인생이었다.
지금은 인생 80년 시대다. 그렇다면 마흔부터가 자신의 진짜 인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흔 살인 하부 명인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며 너희의 진정한 인생도 마흔부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회사원들은 정년 이후를 흔히 ‘제2의 인생’이라고 부른다. 내게는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정년을 맞은 뒤 다음 인생을 시작하려 하면 이미 늦다.
회사를 나와 독립하거나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등 자기 인생에 중대한 결단을 내리려면 마흔을 하나의 경계로 생각해야 한다.
회사원이라면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인생이 80년이라면 중요한 것은 50대부터 70대까지 20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다.
그 시간을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즐겁고 활기찬 인생으로 만들고 싶다면 마흔에 결단하고, 쉰까지 준비하며, 쉰부터 실행하고, 일흔에 정리한다.
이것이 내가 자주 말하는 ‘준비·실행·마무리’다.
이렇게 보면 예순부터 시작하는 것은 이미 늦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흔까지는 진정한 인생을 걷기 위한 사전 준비이며 훈련과 공부의 기간이다.
하부 명인이 활동하는 장기계도 세대교체가 빠르다. 십 대의 스타 기사가 잇달아 등장한다. 그러나 장기의 진정한 즐거움은 십 대나 이십 대에는 알기 어려울 것이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월드컵에 출전하는 축구 선수도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시기가 진정한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부터 본래의 인생이 시작된다.
네 인생도 완전히 같다. 진정한 인생은 쉰부터 일흔까지다. 그때의 삶은 지금의 삶과 전혀 다르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해도 좋다. 따라서 쉰 이전의 직함은 아무 소용이 없다.
신문에는 종종 전 일본 챔피언이나 전직 아이돌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실린다. 그들은 현역 시절의 간판으로 남은 인생까지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반대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마흔부터 제대로 살아간다면 진정한 인생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지금은 그때를 위한 훈련과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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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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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흔이 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단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부 명인은 내 생각을 잘 이해한 듯했다.
“회장님, 이기고 지는 승패를 넘어선 곳에 진정한 승부가 있는 것이지요.”
“정말 그렇네.”
승리만을 목적으로 삼으면 정신이 천박해지기 쉽다. 십 대부터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가 그런 생각에 이른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이길까”가 아니라 “어떻게 좋은 승부를 할까”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 상대가 보이기 시작한다.
좋은 상대와 좋은 승부를 하면 이겨도 져도 상대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다. 서로가 느끼는 그 기쁨이야말로 진정한 승부다.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시기가 마흔부터다.
네 인생도 같다.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회사원처럼 예순까지 필사적으로 일한 뒤 “이제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인생을 살려고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마흔에 가까운 나이라면 바로 결단해야 한다.
좋은 인생을 걷는 것이 좋은 승부를 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주변의 것들이 반드시 보이기 시작한다.
하부 명인은 이런 말도 했다.
“회장님, 저는 나가타초에 초청받아 정치인들과 장기를 두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장기를 두기 시작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집에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알 것 같네. 아주 잘 알겠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역시 이 사람은 대단한 승부사구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잘 안다”고 말했는지 너는 이해할 수 있는가.
나 역시 여러 번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선행을 많이 해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사람도 마작패를 잡으면 남보다 먼저 패를 가져가거나 노골적인 속임수를 쓰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더러운 수단도 사용한다.
나는 인간의 뒷면을 보는 듯해 구역질이 날 것 같았던 적이 여러 번 있다.
예상대로 하부 명인은 말을 이었다.
“정치계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장기는 기분이 나쁩니다.”
정치인 가운데 좋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도 우리는 의견이 같았다.
이익이 되지 않는 ‘깨달음’이 진짜다!
나는 하부 명인에게 이런 일화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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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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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갔을 때의 일이다.
시간이 생겨 여관을 나와 신록이 우거진 들과 산을 걸었다. 오전의 햇빛이 환하게 쏟아졌고 바람도 상쾌해 기분이 좋았다.
작은 개울을 발견하고 물가의 풀숲에 앉아 잔잔한 흐름을 바라보았다. 물가에는 처음 보는 꽃이 피어 있었다. 투명한 물에 손가락을 담그니 제법 차가웠다. 어느 산에서 흘러온 눈 녹은 물일지도 몰랐다.
‘저 산에서 내려왔다면 꽤 먼 길을 왔겠군. 어쩌면 땅속에서 솟은 샘물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로 누군가 지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삿갓과 장화를 착용한 전형적인 농촌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밭을 살펴보러 가는 듯했다. 키는 140센티미터 정도로 작았다.
내가 돌아본 것을 알아차렸는지 할머니는 개울가 길을 천천히 되돌아왔다.
내가 일어나 인사하자 할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물 좀 마시지 않겠어요?”
목이 마르던 나는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라며 호의를 솔직히 받아들였다.
할머니는 집에 돌아가 차가운 물을 가져다준 뒤 다시 밭을 살피러 조금 가파른 비탈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내가 목말라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등이 굽은 할머니의 뒷모습을 향해 저도 모르게 머리를 숙였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아이 같은 마음으로 할머니의 뒤를 따라갔다. 어쩐지 무척 기뻤다.
할머니는 비탈을 내려가 밭으로 들어가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 모습은 흙 속에서 사는 생물처럼 땅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런 이야기였다.
“회장님, 저는 유명인이나 훌륭하다고 불리는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말 훌륭하다고 느낀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부 명인이 말했다.
“그렇지. 우리가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 사람은 도시에는 없네. 이름 없는 산과 들, 시골에 살고 있지.”
농촌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하부 명인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역시 하나의 ‘깨달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삶도 있구나.’
너도 그런 할머니를 보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가.
깨닫는 힘은 무언가를 판단하기 전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단,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회사원 가운데 흔히 “눈치가 빠르다”고 평가받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자기 이익에 민감할 뿐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재빨리 발견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다.
너는 내가 만난 할머니의 행동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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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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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행동에 솔직히 감동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제멋대로 무언가를 결정하려 한다. 하지만 모든 정책에 이권이 얽혀 있으므로 믿을 수 없다. 어째서 욕심에 마음을 그렇게 빼앗기는 것일까. 정치인의 얼굴만큼 천박함이 느껴지는 얼굴도 드물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사람은 지위가 높아질수록 비열한 얼굴이 되기 쉽다.
자기 이익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일에도 감동할 수 있는 사람이 내린 결정이라면 누구나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언제나 두 번째에 두면 좋은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사쿠라이 씨, 당신에게는 여러 가지가 보이는군요.”
“네, 보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교주가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교주라고요?”
“네, 신흥 종교의 교주 말입니다. 자금은 제가 전부 대겠습니다.”
하부 명인뿐 아니라 언론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잇달아 나를 찾아온다. 만나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터무니없는 제안도 들어온다. 종교계에서 받은 권유도 이것 하나만이 아니다.
확실히 나의 감지하는 힘은 나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낄 정도다.
그것은 최근에 생긴 힘이 아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불가사의한 일을 경험했다. 특히 젊었을 때에는 그런 일이 두드러졌다. 앞의 대화처럼 실제로 ‘보였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마작 탁자를 둘러싸고 진지하게 승부하는 동안에도 벽 너머 방에 있는 사람들의 기척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몇 명이 있는지, 안쪽 방에서 몇 명이 들어오고 몇 명이 나갔는지를 손바닥 보듯 알았다.
나중에 물어보면 실제로 정확히 맞아떨어져 “역시 그랬군”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언제였는지 이런 이상한 일도 있었다.
아내와 고깃집에 갔는데 마침 딸의 집 근처였다. 딸도 부르기로 하고 아내가 전화를 걸었다.
딸은 오겠다는 것인지 오지 않겠다는 것인지 분명히 대답하지 않은 듯했다.
“올 수 있으면 오겠다고는 했는데 아마 안 올 것 같아요.”
아내가 말했다.
한동안 고기를 먹다가 갑자기 “딸이 지금 가게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뒤 발소리 같은 것이 방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안쪽 방에 있어 밖의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가게 입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딸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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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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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내가 마작에서 20년 동안 무패였던 것은 이 감지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 지금 맞은편 사람이 텐파이가 되었군.’
‘다음에는 리치를 선언하겠어. 그렇다면 여기서는 이 패를 버려 두자.’
승부의 흐름뿐 아니라 상대가 초조해하는 정도와 정신적으로 헛도는 상태까지 느꼈기 때문에 질 것 같지 않았다. 상대가 전날 여자에게 차였다는 사실까지 손에 잡히듯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종교인이 될 생각은 전혀 없다.
이 능력은 초인적이라기보다 동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상당히 하등동물에 가깝다. 뇌가 발달하지 않은 동물은 감지하는 힘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동물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감각을 너도 경험했으면 하기 때문이다. 당장 익히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이 있다면 조금씩 시험해 보라.
먼저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모두 버리고 만나 보라. 상대 마음의 움직임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것과 입으로 말하는 것이 다른 경우가 많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진심은 무엇인지 살피는, 이른바 마음을 읽는 훈련이다.
조건은 하나뿐이다.
여러 상황에서 자신을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에 두어라. 즉 자아를 버리고 자신을 지우는 것이다.
훌륭한 지도자일수록 부하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긴다. 모든 일을 부하에게 맡기고 책임만 자신이 진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제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두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상사로 있을 수 있는 것은 부하들이 일해 주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감지하는 힘을 믿어 부하에게 맡긴다. 만약 부하가 실패하면 “내 일은 부하를 지키는 것이다”라며 책임질 수 있다. ‘내가, 내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한을 이용해 자기만족을 채우려고 부하에게 명령하고 싫은 말을 하거나 싫은 일을 시키는 상사와 비교하면 감지하는 힘을 가진 상사가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면 끝까지 간섭하지 마라. 간섭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맡기지 마라.
맥도날드 창업자 레이 크록의 말이다.
네 상사는 이 말을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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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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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포기하는’ 마음도 중요하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나는 동료들과 피해 지역 세 현에 참치를 전달하러 갔다.
많은 이재민이 “참치회를 먹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생참치였다.
우리는 한밤중에 도쿄를 출발해 점심시간에 수백 명분의 참치회를 나누어 주었다. 현지 사람들은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주변 풍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지금 떠올려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피해 지역에서 만난 사람 대부분은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은 상태였고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듯했다. 망연히 서서 집과 재산뿐 아니라 인간다운 감정까지 전부 잃은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그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쓸 권리는 없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치회만 건넸다. 사람들은 말없이 그것을 먹어 주었다.
그 가운데 이상할 만큼 밝은 아주머니 두세 명이 있었다.
농담을 하고 “와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주변 사람들도 그 밝음에 이끌려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 밝음에 끌려 말을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밝게 지낼 수 있습니까?”
아주머니들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우리도 어두웠지. 칠흑처럼 깜깜했어. 쓰나미가 전부 가져갔으니까. 하지만 포기했어. 후회하고 슬퍼해도 되돌릴 수 없잖아.”
나는 그때 피해 지역의 아주머니들에게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배웠다.
그것은 포기하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많은 사람은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을 미덕으로 여겼다.
아무리 큰 위기에 빠져도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격려도 받아 왔다.
너도 한때 “꿈을 포기하지 마라.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 지역의 아주머니들은 포기했다.
포기했기 때문에 “이미 끝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이제 앞을 보고 걸어가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 마음이 밝은 웃음소리가 되었던 것이다.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자리에 계속 머무르는 일이기도 하다.
한번 포기하면 다음 결단이 태어난다.
천 년에 한 번이라는 대재난을 겪으면서도 그 안에서 배우는 그들은 진정한 인생의 달인이었다.
쓰가루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가을 대형 태풍이 아오모리현 전체를 덮쳤다. 거센 비바람에 쓰가루의 사과 농가가 막대한 피해를 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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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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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뒤 과수원을 보니 사과의 90퍼센트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사과로 생계를 이어 가던 농가에는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많은 사람이 망연자실했다.
그런데 아직 떨어지지 않은 사과가 10퍼센트 남아 있었다. 젊은 농부들이 모여 그 사과를 팔기로 했다.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 사과를 ‘떨어지지 않는 사과’라는 이름으로 수험생에게 판매했다.
도쿄의 메이지 신궁을 비롯한 여러 신사에서 팔았다. 가격은 비쌌지만 불티나게 팔렸고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들은 말했다.
“포기하지 않았느냐고요? 아니요, 포기했습니다. 포기했기 때문에 그런 아이디어가 나온 겁니다.”
너도 무언가를 결단해야 할 때 일단 포기해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 먼저 출세를 포기해 보라. 그 순간부터 지금과 전혀 다른 자신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만들고 부수는 마음을 가져라!
방금 나는 “출세를 포기해 보면 어떨까?”라고 가볍게 썼다. 그것은 성공이 무엇인지 네가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네가 열심히 노력하고 다른 사람을 밀어내 마침내 지금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고 하자. 그것은 정말 성공인가.
일반적으로는 성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본다. 사장이 되는 일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출세 게임에서 사장은 분명 마지막 칸이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칸은 아니다.
사장인 채로 죽는다면 그럭저럭 성공한 삶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유주 겸 사장이 아닌 이상 평생 사장으로 있을 수 없다. 사장으로 지내는 기간은 80년 인생 가운데 불과 몇 년이다.
따라서 사장이 된 것은 성공이 아니라 하나의 달성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산을 올라 정상에 선 것과 같다. 정상에 섰으면 곧 내려가야 한다. 인생이라는 산을 오랜 시간 올라가지만 하산은 순식간이다.
나는 인생이 마작과 같다고 생각한다.
마작은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완성된 패를 만들면 곧바로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음 판을 시작하는 게임이다. 완성품을 계속 보존하지 않는다. 만들고 부수며, 부수고 다시 만든다.
그러므로 완성한 패를 뽐낼 이유도 없고 성공했다고 자랑할 것도 없다. 우리 도장에서는 완성된 패가 더럽다면 일부러 화료하지 않고 무너뜨리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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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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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를 만드는 일과도 조금 비슷할지 모른다. 접시 백 장을 구운 뒤 아흔아홉 장을 깨뜨리고 단 한 장만 남긴다. 아흔아홉 장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의 하루도 만들고 부수며, 부수고 다시 만드는 연속이 아닌가.
어제 아침과 오늘 아침은 결코 같지 않다. 같은 낮도, 같은 밤도 없다.
그리고 또 다음 아침이 온다.
그 연속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면 인생에 완전한 성공 같은 것은 없으며, 있다면 그때그때 달성감을 맛볼 뿐임을 알 수 있다.
네 일도 마찬가지다. 어제와 완전히 같은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같은 전화 통화를 반복하지도 않는다. 입은 셔츠와 속옷이 매일 다르듯 네 인생은 만들고 부수며 다시 만드는 하루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음을 이해하면 피해 지역 사람들의 “포기했다”는 말도 알게 될 것이다.
어제는 큰 재해를 당했다. 그러나 오늘은 살아 있다. 같은 날은 두 번 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마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쉽다. 네 일은 패를 가져와 버리고, 버린 뒤 다시 가져오며 화료를 향하는 과정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회사 업무의 결단은 단지 어떤 패를 버릴지 고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만들고 부수며 다시 만드는 마음만 가져도 일을 대하는 자세가 훨씬 편해질 것이다.
먼저 자기 업계를 부정할 수 있는가
내 도장에는 많은 사람이 드나든다. 사람을 판단하는 내 기준 가운데 하나가 더 있다.
자기가 속한 업계를 무조건 긍정하는 사람은 믿지 않지만 자기 업계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믿는다는 것이다.
너는 지금 일하는 업계가 보람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이 업계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가.
어느 대기업 최고경영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기업의 높은 사람과 특별히 나눌 이야기도 없어 사양했지만 의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었다.
‘싫은데. 적당히 상대하다 끝내야겠군.’
그렇게 생각했지만 우리는 첫 대화부터 의외로 잘 통했다.
그가 첫마디부터 자신이 속한 업계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사쿠라이 회장님, 기업인이라는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 변변한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사장이나 회장이라는 사람들은 현장을 전혀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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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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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이라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견딜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시작부터 자기 업계와 재계,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 낮추면서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했다.
“왜 문제가 되는지 아십니까? 정치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장이라는 자리는 젊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사장이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오를 수 없습니다. 총리도 마찬가지겠지요. 되고 싶다, 꼭 되고 싶다, 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엉덩이라도 핥겠다는 사람들뿐입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마작 세계보다 더 심하군요.”
나도 그렇게 말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재계의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손으로 물건을 만들어 온 사람들이 아니다. 처음부터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관리해 온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출세만을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으면 사장이 될 수 없다.
“저 사람이 사장이 되면 좋을 텐데”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은 사장이 되기 어렵다.
지도자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지도자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려고 한다.
그것이 세상이다.
너는 자신이 속한 업계를 부정할 수 있는가.
오해하면 안 된다.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는 것이다.
불평은 자기 사정과 관계된 말일 뿐이므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게 싫다면 그만두면 되잖아.”
불평하는 사람에게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다.
하지만 부정은 다르다. 그 업계 안에서 일한 자신감이 있고 업계 전체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망이 없으면 제대로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낡은 체질과 싸울 용기도 필요하다.
너에게는 자기가 사는 업계를 부정하고 개선하기로 결단할 힘이 있는가.
한 번이라도 스스로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기분이 좋으면 판단도 흐려지지 않는다
어느 여름 많은 도장생과 별장에 갔다.
도장생이라고 해도 각자 직업이 있으므로 전날 먼저 떠나는 팀과 당일 출발하는 팀으로 나뉘었다.
나는 뒤에 출발한 팀이었다.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을 때 배가 고파 도중에 있는 소바 가게에 들어갔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가게는 몹시 붐볐다.
주방의 소바 장인 두 명을 제외하면 홀 직원은 한 명뿐이었다. 당연히 정신없이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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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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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누키소바, 자루소바, 차가운 기쓰네소바 등 우리 여섯 명은 각자 저렴한 메뉴를 주문했다. 여러 번 온 가게라 모두 값싼 메뉴가 오히려 맛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누키소바 나왔습니다.”
“차가운 기쓰네소바 나왔어요.”
주문한 음식은 계속 완성되었지만 자리까지 나를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도장생들이 적극적으로 가게 일을 도왔다. 완성된 음식을 손님들의 자리까지 가져다주었다.
자기 음식뿐 아니라 다른 손님의 음식도 날랐다. 물론 직원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모두 식사를 마칠 무렵 땀으로 흠뻑 젖은 가게 주인이 내게 다가왔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네요. 사실 어제도 음식을 나르는 일을 도와준 젊은 손님들이 있었거든요. 이틀 연속으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어제 도와준 젊은이들이 분명 우리 선발팀일 것이라고 느꼈다.
별장에 도착해 마중 나온 선발팀에게 “너희 어제 늘 가는 소바 가게에 갔지?”라고 묻자 그들은 “네, 갔습니다. 가게 일도 도왔습니다”라고 답했다.
내 지시가 아니라 자기 판단으로 소바 가게를 도왔다는 사실이 기뻤다.
무엇보다 그들이 자기 이익을 전혀 계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판단했다는 점이 기분 좋았다.
이 ‘기분 좋음’은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기분 좋은 상태로 지내면 자연스럽게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가정은 몰라도 직장에서 기분 좋게 지내는 일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참고 또 참은 대가로 월급을 받고, 그 돈으로 자동차와 집처럼 자기 기분을 좋게 해 주는 물건을 산다. 나는 그것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다.
하루 가운데, 더 나아가 인생 전체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장소는 아마 회사일 것이다.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일터를 기분 좋은 장소로 만들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내 생각이 틀렸는가.
물론 말단 직원 한 사람이 하기에는 어렵다. 일터를 기분 좋은 장소로 만드는 것은 상사의 중요한 역할이다.
회사에 가는 일이 즐겁고 동료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며, 돈을 받지 않더라도 그곳에 있고 싶다고 느끼는 장소.
상사는 지금 당장 그런 일터를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 도장에서는 서툰 아이가 좋은 일을 하나 하면 모두가 함께 기뻐한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기뻐한다. 그러면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네 직장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기분 좋게 보내는 시간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기분 좋게 지내면 판단도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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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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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아들이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 반드시 아버지를 쓰러뜨릴 거예요.”
아마 언젠가 씨름이나 격투기로 나를 이겨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디선가 기술을 배웠는지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시험해 봐도 돼요?”라며 덤벼들었다.
“좋아. 나는 앉아 있을 테니 어디 한번 해 봐.”
아들은 진지하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내 몸에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한순간에 승부는 끝났다. 물론 내가 질 리 없었다.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가 예순을 넘으면 반드시 이길 거예요.”
아들에게 아버지는 영원한 경쟁자다.
아들, 손주, 도장생 서른 명 정도와 바다에 잠수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날은 날씨가 나쁘고 물도 차가웠다. 저녁 무렵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물이 너무 차서 물고기도 보이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내가 한 마리 잡아 오지.”
5분 뒤 나는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다. 현장에 있던 아이가 쓰는 듯한 간단한 작살 하나로 잡은 것이다. 아들은 다시 존경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책을 아무리 많이 내도 아들은 그렇게까지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강연에서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물고기를 잡은 일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바다에 있어도 물고기 한 마리 찾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왜 뒤늦게 와서 순식간에 잡을 수 있지?”
아이들은 바로 그런 것을 멋있다고 여기며 존경한다.
그런 큰아들이 어느 날 이런 말을 했을 때에는 나도 조금 놀랐다.
“나는 평생 노력해도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쩐지 기뻤다. 아들이 아버지를 인정해 주어서가 아니다.
“당연히 그렇지”라며 한바탕 웃은 뒤 나는 말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누구도 될 수 없어. 그리고 누구도 나를 질투하지 않지. 이치로 선수를 질투하는 사람도 거의 없잖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부러워하는 것은 자기도 그 사람의 직함이나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자신은 결코 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질투하지 않아. 그러니 너는 너만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돼.”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가.
네 과장은 정말 그 사람만이 맡을 수 있는 자리인가. 다른 사람은 대신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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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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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은 어떤가. 그 사람이기 때문에 부장인가, 아니면 마땅한 사람이 없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인가.
달리 말하면 누구나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네가 과장이나 부장 자리를 목표로 한다면 그보다 ‘너만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편이 훨씬 재미있는 인생이 될 것이다. 얼마든지 대신할 사람이 있는 과장이나 부장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되지 않는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남들과 다른 사람, 나만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사는 곳은 마작의 세계다. 직함이 있다면 마작장 아저씨다. 사회적으로는 상당한 약점이다.
실제로 마작 세계에는 변변한 사람이 거의 모이지 않았다. 인생을 망친 사람, 가정을 돌아보지 않은 사람 등 인간으로서 밑바닥에 가까운 사람이 많았다.
고작 마작장 아저씨인 내가 바로 그런 세계에 산다. 그런데도 다양한 사람들이 나를 만나러 찾아온다. 왜일까.
내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흔하지 않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숫자와 계산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식보다 지혜를 믿는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알고 있는가.
지식은 밖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손에 넣는 것이 지식이다. 그래서 지식을 얻으면 혼자 차지한 뒤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하려 한다. 지식은 자아와 이기주의의 도구가 되기 쉽다.
반대로 지혜는 완전히 다르다. 글자 그대로 지혜에는 ‘은혜’가 들어 있다. 손에 넣으면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려는 것이 지혜다.
그렇게 지혜는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할머니의 지혜, 어부의 지혜, 목수의 지혜, 주부의 지혜 같은 것들이다.
흔하지 않은 사람은 지혜를 소중히 한다.
또한 회사에서 부하가 실수해도 함부로 화내지 않는다. 실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신 문제에서 도망치거나 거짓말을 하면 화낸다.
흔하지 않은 사람은 성실하고 꿋꿋한 사람을 사랑한다.
살아가는 요령이 서툰 사람을 좋아하고, 들판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을 좋아하며, 자연을 사랑한다.
그는 미래와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과거의 영광을 늘어놓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것도 모든 일을 놀이처럼 즐기면서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판단을 좀처럼 잘못하지 않는다. 왜인가. 계산에 자기 자신을 넣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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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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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 일은 두 번째로 미룬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네가 그런 흔하지 않은 사람이 되면 된다.
어떻게 하면 될까.
한마디로 말하면 흔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면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누구든 너를 대신할 수 있는 생활을 계속하는 한 너만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가
네가 흔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최소한 자신과 맺은 약속만은 반드시 지켜라.
약속은 무엇이든 좋다.
“내일 아침 5시에 일어나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했다면 반드시 일어나라. 전날 밤 갑작스러운 거래처 접대 때문에 한밤중에 집에 돌아왔더라도 자신과의 약속은 끝까지 지켜라.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것을 자아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30분만 더 자도 괜찮잖아.’
‘모레부터 5시에 일어나면 되니까 오늘 아침만은 괜찮겠지.’
마음속에서는 육체가 정신을 향해 달콤한 말을 건넨다. 실제로 졸리고 30분 늦게 일어나도 별일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한 장면이 인생 전체를 결정할 수 있다.
자신과의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킬 리 없다.
카드빚으로 파산하는 사람, 약물중독에 빠지는 사람, 범죄를 반복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자신과 한 약속을 수없이 짓밟아 왔기 때문에 그런 상태가 된 것이다.
“다시는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약속이다. 자신과의 약속이므로 다른 사람은 네가 무엇을 약속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모르기 때문에 더욱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죽을 때까지 담배를 피울 것이다. 젊을 때부터 피웠고 지금은 잘못하면 하루 백 개비를 피울 정도의 골초다.
폐암에 걸린다는 경고를 듣지만 암에 걸리면 걸리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담배를 끊지 않겠다는 것이 나 자신과 한 약속이다. 온 세상이 금연 열풍인 시대라서 오히려 이 약속이 조금 재미있다고 느낀다.
인생 전체에서 보면 대단하지 않은 약속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약속조차 지키지 못한다. 도저히 지킬 수 없다면 애초에 약속하지 않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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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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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부모의 부고를 듣고도 무대에 서는 것 역시 자신과의 약속이다.
장기 기사 요네나가 구니오 영세 기성은 이렇게 말했다.
남자의 약속은 법률보다 우선한다.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자신과의 약속은 아무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아무리 괴롭고 눈물이 날 만큼 슬프더라도 “이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입니다”라고 말하며 행동해 보라.
그 결단이 자신에게 이기는 일이다. 인생을 재미있게 만들고, 마침내 어디에도 없는 너만의 삶으로 이어진다.
자기가 결정하기보다 상대가 결정해 주는 일도 있다
지금까지 나는 줄곧 자신이 결단한다는 관점에서 썼다. 그러나 인생의 결단이 반드시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네 인생의 의미를 상대가 결정해 주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느낀 것은 앞 장에서 언급한 어느 휴양지를 여행했을 때였다. 나만 좋은 자리로 안내받은 일이 있었던 바로 그곳이다.
푸른 하늘, 뜨거운 태양, 흰 모래사장과 형형색색의 파라솔, 차갑고 맛있는 망고주스가 있는 휴양지였다.
그곳에서 갑자기 외국인 카메라맨이 내게 말을 걸었다.
카메라맨보다 사진작가라고 부르는 편이 맞을 듯했다. 좋아하는 사진을 찍으며 세계를 여행한다고 했다.
“실례합니다.”
아무래도 내 사진을 찍고 싶은 모양이었다.
‘관광객이 이렇게 많은데 왜 하필 나일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따질 일은 아니었다. 몇 장을 찍고 “메르시”라고 말했으니 프랑스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다시 말을 건 사람들 때문에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독일인 부부였다.
“당신은 선종의 승려입니까?”
선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머리를 깎지도 않은 내가 선승으로 오해받을 줄은 몰랐다.
그들은 직접 선을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무릎을 굽혀 앉아 무심히 풍경을 바라보는 자세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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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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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사람은 승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앞의 이야기와 연결하자면 그 독일인 부부는 내가 그곳에 가만히 있는 모습만 보고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느꼈기 때문에 승려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결단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 상대가 나라는 사람을 결정해 주는 일도 있구나. 그렇다면 스스로 결정하는 일은 아직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결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결정해 주는 것에 비하면 대단한 일이 아니다.
나는 선을 수행하지 않지만 내 안에 선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독일인 부부에게서 배웠다.
말이 나온 김에 선이 무엇인지 알려 주겠다.
선은 꾸밈없는 진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다. 좌선은 그 대표적인 수행이다.
그렇다면 선에서 말하는 ‘자신’이란 무엇인가. 선에서는 개인이 먼저 존재하고 그 뒤에 경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개인을 만든다고 본다.
오늘의 자신은 어제까지의 경험으로 만들어졌고 오늘의 경험이 내일의 자신을 만든다는 생각이다.
어쩐지 마작과 닮았다. 만들고 부수며 다시 만드는 마작과 같다.
과거 내 실제 생활에서도 나는 매일같이 벌어지는 문제와 사고를 즐기며 살았다.
집에서 한 발 나서면 “오늘은 무슨 일이 생길까”라며 설렜다. 위기나 문제가 나타나면 “왔구나, 드디어 왔어”라고 기뻐할 정도였다.
선과 전혀 관계없는 곳에 살았지만 오늘의 자신은 과거의 체험이 만들고 오늘의 체험이 내일의 자신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선과 같은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내가 내일 달라져도 그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승려입니까?”라고 물어 준 독일인 부부 덕분에 자기가 결정하는 일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마작에 천화와 지화라는 큰 역이 있듯이 우리의 진정한 결단은 하늘과 땅, 사람과 때가 자연스럽게 내려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작귀’이지 ‘작신’이나 ‘작성’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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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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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은 왜 신이 아니라 귀신입니까?”
어느 날 한 출판사 사장이 무심코 물었다.
확실히 나는 ‘작귀’, 즉 마작의 귀신이지 결코 마작의 신이나 성인은 아니다. 나는 이런 질문을 좋아한다. 두려움 없이 모르는 것을 그대로 묻는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내가 직접 결정한 일이었다.
한때 누군가가 “회장님, 앞으로는 ‘마작의 신’이라는 이름으로 홍보합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거절했다.
몇 번이나 말했듯 나는 마작장 아저씨이기 때문에 괜찮은 것이다. 나를 미야모토 무사시 같은 ‘검의 신’이나 ‘검성’과 같은 자리에 놓는다면 오히려 신이 화를 낼 것이다.
요즘에는 신이라는 말도 너무 쉽게 쓴다. 어느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지 않자 손님이 “손님은 신이 아니냐!”라고 소리쳤더니 종업원이 “죄송하지만 다른 신들에게 방해가 되니 조용히 해 주십시오”라고 답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래도 나를 상품화하려는 사람은 “마작의 신이라고 해야 홍보하기 쉬운데”라며 끈질기게 말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반대인 ‘귀신’이 낫겠다고 말한 것이 ‘작귀’라는 이름의 시작이었다.
왜 나는 귀신인가.
내가 오랫동안 ‘광기의 세계’를 보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부터 인간관계에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다. 상대가 권력자여도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광기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다르다. 본인조차 자기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행동해 버리므로 그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 세계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아니다. 바로 귀신이어야 한다.
본래 일본어의 ‘오니’는 모습을 감춘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를 뜻했으며 그 의미가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 존재로 넓어졌다고 한다.
또 귀신에는 강하다, 나쁘다, 무섭다, 엄청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중국에서는 죽은 영혼을 뜻하기도 한다. 내게 붙이기에는 아주 알맞은 이름이었다.
내가 스스로를 귀신이라고 정한 뒤부터 신기하게도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되었고 위험한 일도 위험하지 않게 되었다.
너희가 사는 세계 역시 망령 같은 사람들이 많이 떠도는 광기에 가까운 이상한 곳인지 모른다. 욕망과 집념에 사로잡힌 돈의 망령, 권력의 망령, 자기 일밖에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자들이 있다.
어쩌면 네 주변에도 귀신이 필요할지 모른다.
결단은 ‘준비·실행·마무리’가 전부다
너는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본 뒤 주문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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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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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인가, 5분인가. 아무리 빨라도 0분은 아닐 것이다.
나는 1초다. 가게에 들어가기 전에 무엇을 먹을지 미리 정해 두기 때문이다. 식당에 들어가는 일은 갑자기 벌어지지 않는다. 배가 고파서 들어가는 것이고, 라면을 먹고 싶으니 중국 음식점에 가며 일본 소바가 먹고 싶으니 소바 가게에 가는 것이다.
내게는 주문하는 데 왜 1분씩이나 필요한지 오히려 이상하다. 먹고 싶은 음식이 메뉴에 있는지 모르겠다면 물어보면 그만이다.
결단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 많다.
원전 사고에서 그것을 지겹도록 보았다. 총리 관저가 판단하게 하라고 말해도 일분일초가 급한 현장에서 관저 사람들에게 노심용융이 무엇인지 강의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결단에 시간을 오래 들이면 흔히 불순한 생각이 끼어든다. 그런 결단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결단력은 사실 그렇게 거창한 능력이 아니다. 사전에 얼마나 준비해 두었는지가 전부다.
“이런 일이 생기면 이렇게 한다”는 상황을 미리 많이 가정해 두면 결단은 즉시 내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축적한 지식과 정보보다 인간의 안테나와 날카로운 감각을 평소 갈고닦는 일이 중요하다.
나는 도장생들에게 늘 ‘준비·실행·마무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모든 일에서 이 세 단계를 제대로 하면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평온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사가 너에게 큰 프로젝트를 맡겼다고 하자.
너는 먼저 팀원을 모을 것이다. 팀이 꾸려지면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전부 적어 보라. 각종 문제와 팀원 사이의 갈등, 상사가 갑자기 내용을 변경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예산 문제, 일정, 인력 부족, 예상하지 못한 사고까지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준비다. 준비를 철저하게 해 두면 실제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결단하기가 쉬워진다.
간단히 말하면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주문할 요리를 정해 두는 것과 같다.
“그 음식이 없으면 이것을 고르고, 그것도 없으면 저것을 고른다”는 결정에 복잡한 논리는 필요하지 않다.
준비가 끝났으면 실행하면 된다. 여러 문제를 안은 채 프로젝트는 진행된다. 모든 일이 준비 단계에서 예상한 범위 안에서 끝났다면 성공이다.
그다음에는 마지막 마무리가 남는다. 마무리까지 제대로 처리해야 한 건의 일이 완전히 끝난다.
앞으로 네 인생에서 내려야 할 결단은 분명 여러 번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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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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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필요한 결단력을 기르려면 결단이라는 순간만 붙잡고 고민할 것이 아니라 ‘준비·실행·마무리’라는 전체 순환 속에서 결단을 바라보면 된다.
다만 결혼에 관한 결단만큼은 준비와 실행까지는 쉽게 진행되지만, 마무리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내 경험으로 마지막에 덧붙여 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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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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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으며
“마작에는 장고가 없다. 오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내가 만든 말이다.
그래서 우리 도장에서는 패를 가져오면 1초 안에 버린다는 규칙으로 도장생들이 마작을 친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 마작하는 모습을 보면 손이 자주 멈춘다. 패를 한 장 가져와 한 장 버리면 되는 일인데 터무니없이 오래 걸린다.
그 사이 “손해인가, 이익인가”를 계산하고 “이 패를 버렸다가 상대에게 맞으면 어떡하지”라고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계산하는 뇌만 혹사하고 감지하는 힘은 사용하지 않는 증거다.
마작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 전체가 숫자와 계산으로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태양이 찬란하게 비춰 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비가 내리면 “왜 비가 오는 거야. 맑으면 좋을 텐데”라고 제멋대로 불평한다.
태양과 비가 있기 때문에 식물이 자라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 눈과 바람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고 있는가. 구름과 별과 달에 돈을 지불한 적이 있는가.
산과 바다, 강과 호수가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인간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 원통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연과 삼라만상, 그리고 네 주변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을 더 솔직하게 느껴 보라.
이 책에서 말한 결단력은 사실 그런 감지하는 힘에서 태어난다.
자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성의와 성실함 역시 머리로 생각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시각장애인이 흰 지팡이를 짚고 짐을 든 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고 하자.
너는 “바쁘니까”라며 그 사람을 추월해 갈 수 있는가.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손을 내밀어 도울 것이다.
눈앞에서 아이가 넘어지면 네가 곧바로 달려가리라고 믿고 싶다.
“괜찮니?”라고 말을 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처럼 자연스럽고 빠르게 행동으로 옮기는 결단력이 곧 감지하는 힘이다.
나는 전철을 자주 타지 않지만 가끔 타면 역마다 어떤 사람이 타는지 주의 깊게 살펴본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노인, 임신한 여성이 타면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서다. 조폭처럼 보이는 남자나 광기의 세계에 사는 위험한 사람이 타면 다른 승객을 괴롭히지 않는지 지켜보다가 일이 생기면 즉시 나서기 위해서다. 전철이 역에 설 때마다 나는 반드시 확인한다.
이런 습관이 결단력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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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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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우유부단해 좀처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우선 머리로 생각하는 일을 멈추어라.
매번 머리로 계산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문제에 휘말리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한다.
생각하려 들지 않고 그저 느끼면 네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감지하는 힘이 생겼다면 그것은 결단력이 생겼다는 말과 같다.
“이 일을 맡아 주겠나?”
“네!”
내일부터 상사와 네가 그런 밝은 대화를 나누게 되기를 작은 마작장의 탁자 앞에서 기원하겠다.
사쿠라이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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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쪽 |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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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이 쇼이치
도쿄 출생. 대학 시절 어깨너머로 마작을 배우기 시작했고, 졸업할 때 이미 정해져 있던 취업을 포기한 뒤 비공식 프로 승부사로 데뷔했다.
이후 패배가 허용되지 않는 ‘대리 승부사’로 활동하며 20년 동안 무패를 기록해 ‘작귀’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는 그를 모델로 한 영화와 극화 등을 통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현재는 마작을 통해 인간의 힘을 단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귀회’를 이끌고 있다. 그의 순수한 삶과 절대적인 승부 감각을 배우려고 도장을 찾아오는 기업 경영자와 스포츠 선수도 많으며, 일본 전국에서 강연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노력하지 않는 삶의 방식』, 『한순간의 승기를 붙잡는 법』, 『역경을 돌파하는 방법, 순간력』, 『그런 일은 신경 쓰지 마라』 등이 있다.
작귀회 공식 홈페이지: http://www.jankiry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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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쪽 |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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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은 1초면 충분하다』
2011년 8월 25일 초판 제1쇄 발행
2011년 10월 5일 초판 제2쇄 발행
2012년 2월 29일 전자책 초판 발행
저자: 사쿠라이 쇼이치
발행인: 닛타 미쓰토시
발행처: 소프트뱅크 크리에이티브 주식회사
주소: 〒106-0032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 2-4-5
전화: 03-5549-1201(영업부)
인쇄·제본: 주오세이한인쇄 주식회사
사진: 기타무라 야스히로
편집 협력: 오다 도요지·하세가와 지미
북 디자인: 이노우에 요시쿠니(yockdesign)
교정: 도리우미 미에(버드 워크)
본문 조판: 아티잔 컴퍼니 주식회사
이 책에 관한 문의는 소프트뱅크 문고 편집부에 서면으로 보내 주십시오.
© Shoichi Sakurai 2011
Printed in Japan
ISBN 978-4-7973-65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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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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