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 기술』
20년간 무패, 전설의 작귀가 지닌 역경 돌파력
사쿠라이 쇼이치
※ 원문은 세로쓰기 스캔본이므로, OCR 과정에서 명백히 잘못 인식된 글자는 문맥에 맞게 바로잡아 번역했습니다.
들어가며
“응애” 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 첫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부터, 누구에게나 슬픔과 기쁨과 함께 늘 ‘불안’이 따라다닌다. 따뜻하고 편안했던 태내에서 나온 순간 인간이 처음 느끼는 감정이 바로 불안인 것이다.
사람은 그 불안을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해 확신을 구한다. 자기 안에서 확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다른 것에서 확신을 찾으려 한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는 인간 특유의 성질도 그런 데서 생겨난다.
그 성질은 이윽고 경쟁의식으로 변하고, 여러 승부에서 이김으로써 잠시 안도감을 얻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허기처럼 잠깐 채워질 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불안이라는 공복감이 덮쳐 온다.
결국 안심하기 위해 품는 ‘이기고 싶다’는 마음의 뿌리에는 누구나 안고 있는 불안이 있다. 단 한 사람도 그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기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불안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오직 승리만을 좇는다. 그리고 그 싸움 방식은 추하고 비열해진다.
본문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이기고 싶다’는 사고는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 속 동식물에게는 ‘본능으로 산다’, 다시 말해 ‘지지 않는다’는 평범한 자세가 있을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람이 이 ‘지지 않는’ 힘을 기르려면 자연 속 동물처럼 변화에 반응하는 움직임과 감성을 갈고닦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인다. 온갖 일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기에 세상이 성립한다. 흐름이 멈추면 생물은 순식간에 죽고, 사물은 더 이상 그 사물일 수 없게 된다.
즉 ‘산다’는 것은 움직임과 변화에 대응하고 적응한다는 뜻이다. 이는 모든 세계에 통하는 이치이기도 하다.
승부의 세계도 예외가 아니다. 움직임을 관찰하면 깨달음이 생기고 상대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지지 않는’ 기술은 그런 일을 되풀이하면서 서서히 몸에 배는 것이다.
‘지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 생활의 기반인 ‘의식주’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명을 유지하는 ‘식’, 몸을 지키는 ‘주’는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의 삶을 떠받쳐 왔다. 그러나 여기에 ‘의’가 더해지면서 인간 사회에 여러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의’는 몸을 치장하는 일로 이어졌고, 이윽고 명예와 권력 같은 ‘욕망’과도 결합했다.
그렇다면 ‘지지 않는’ 인생을 걸어가려면 “생명을 유지하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일도 중요해진다.
20년 동안 뒷세계 마작에서 무패였던 내 발자취를 돌아보면, 움푹 팬 발자국 하나하나에 수많은 사람의 기쁨과 슬픔이 어른거린다. 그 발자국들은 내게 “승부란 무엇인가?”, “강함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 책에서는 그런 물음 속에서 내가 느끼고 깨달아 온 승부론, 승부 철학, 승부 감각을 이야기한다. 그 밑바탕에는 한결같이 “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자세가 있으며, 결코 ‘이기기 위한’ 사고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 ‘승리’만을 추구해서는 진정한 강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 이해하게 될 것이다.
목차
제1장 ‘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긴다’보다 어렵다
- ‘지지 않는다’와 ‘이긴다’는 다르다
- ‘이기고 싶다’는 욕망은 짙은 화장과 같다
- ‘승리’를 지나치게 추구하면 약해진다
- 멋있게 이기려면 아직 백 년은 이르다
- 압박감을 없애는 ‘지지 않는다’는 마음
- 이치로가 WBC에서 고뇌한 이유
- 좋은 ‘승리’와 인간의 세 가지 본능
- ‘만족’보다 ‘납득’이 중요하다
- 일부러 지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
-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지지 않는다
- 패배의 99퍼센트는 ‘자멸’이다
- 확증과 보증을 구하면 약해진다
제2장 ‘지지 않기’ 위한 기술
- 두 마리는커녕 백 마리 토끼를 쫓아라
- 흘려보내는 감각으로 강해진다
- 초심자의 행운에 필연성이 있는 이유
- 단순함이 지닌 의미
- 일상에서 하는 ‘자기 연마 게임’
- 승기를 잡는 사람, 잡지 못하는 사람
- 악수로 이기려는 유혹을 끊어라
- 얼마나 꾸밈없는 상태로 있을 수 있는가
- 속내를 드러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
- ‘흔들리지 않는 축’을 만드는 법
- ‘흐름’을 축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강하다
- ‘땅’에 집착하면 약해진다
- 자신의 방정식을 깨뜨려 보라
- ‘깨달음’의 정도가 승부를 결정한다
제3장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정답’을 찾지 않는 강함을 가져라
-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라
- 제대로 매달릴 줄 알면 지지 않는다
- ‘칭찬하며 키운다’는 말에 대한 의문
- ‘칭찬’이 낳는 위험한 인간관계
- 정리하는 감각이 승부의 강함을 만든다
- 좋은 간격을 잡으면 우위에 선다
- 시간과의 간격을 익혀라
- 간격을 잡지 못하는 경제인
- 서투름은 ‘나쁜 흐름’으로 이해하라
- 서투른 것을 극복하면 잘하는 것도 늘어난다
- 조화를 깨뜨리는 사람은 존재감이 약하다
- 승부에서 분노의 감정은 마이너스다
- 가해자 의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
- 금기가 적을수록 강해진다
제4장 역경을 돌파하는 힘
- ‘기회’와 ‘승부처’는 다르다
- 승부처에서 힘을 내는 법
- 실수의 재미를 맛보라
- 실수한 뒤가 갈림길이다
-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위험을 감수하라
- 긴장은 머리 뒤쪽에 둔다
- 평소부터 긴장감 속에 몸을 두어라
- 적절한 온도에서 ‘그만둘 때’를 판단하라
- 일부러 상대의 특기를 받아들인다
-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일치시킨다
- 몸 전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강하다
- 편안함을 찾으면 빈틈이 생긴다
- 평상심이 있으면 수정하는 힘이 강해진다
제5장 누구나 무적이 될 수 있다
- 마침내 도달한 ‘적조차 내 편’인 경지
- ‘결과가 전부’라는 말은 패자의 논리다
- 승패보다 중요한 ‘승부 감각’
- 어떤 습관이 결단력을 높인다
- 전문가보다 만능가를 지향하라
- 자기 안의 ‘바보’를 알아라
- ‘할 줄 아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핵심을 찌른다
- ‘느끼는 힘’을 더 믿어라
-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낀다
- 좋은 승부는 상대와 하는 공동 작업이다
- 개체는 전체이며, 전체는 개체다
- ‘뒷정리’는 다음 승부의 ‘준비’다
- ‘승리’를 양보할 수 있는 여유야말로 강함이다
맺으며
제1장 ‘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긴다’보다 어렵다
‘지지 않는다’와 ‘이긴다’는 다르다
승부를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이긴다’는 자세와 ‘지지 않는다’는 자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강할까. 결과만 보면 ‘이긴다’와 ‘지지 않는다’는 같은 뜻이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이기고 싶다’는 마음은 욕망과 같아서 한도가 없다. 한도가 없기에 그것을 이루려고 더러운 짓이나 비열한 짓도 태연히 하게 된다. 끝없이 상대를 짓밟는 방식도 ‘이기고 싶다’는 마음에 지배된 인간의 행동이다.
반면 ‘지지 않겠다’는 마음은 인간의 꾸밈없는 부분, 본능에 더 가깝다.
지지만 않으면 되기에 상대를 끝까지 몰아붙일 필요도 없다. 자연히 일정한 한도가 생긴다. 한도가 있으므로 상대가 조금 아픈 기색을 보이면 끝내고, 쓰러지면 끝내는 식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지지 않겠다’는 마음에는 “이제 이만하면 됐다”는 만족감과 납득이 있다. 그러나 ‘이기고 싶다’는 마음에는 한도가 없어, 이미 쓰러진 상대에게도 더욱 철저한 공격을 가하게 된다.
이 ‘이기고 싶다’는 욕망은 현대사회가 품고 있는 욕망과 아주 닮았다.
승자인 채 죽어 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다만 지지 않는 방식으로 죽어 갈 수는 있을지 모른다.
이는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와 경제를 모두 아울러 말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도 영원히 계속 이길 수는 없다.
또한 ‘승리’만을 원하는 사람은 인생에서도 ‘얻는 것’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쉽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로 보면 얻은 것은 잃게 되어 있다. 밀려온 파도는 이윽고 빠져나간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얻는 일만 추구하는 것은 젊은 시절의 어느 한때로 충분하다. 인생길 앞에 놓인 모든 것은 잃기 위한 인도라고 할 수 있다.
젊을 때는 여러 가지를 얻겠지만 나이를 먹으며 그것을 잃어 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잃는 일을 거부하지 말고 ‘잃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해도, 낙담하거나 실망할 일은 줄어들 것이다.
지금은 편리한 시대라 사람들이 많은 것을 누리지만, 그 속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아주 많이 잃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는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얻기’ 일변도의 삶에서 벗어나 자연의 섭리에 맞는 ‘얻고 버리는’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승리’만 바라는 치우친 마음의 균형도 바로잡아 줄 것이다.
내가 승부에서 처음으로 “지지 않겠다”고 의식한 것은 어린 시절 놀이를 통해서였다. 딱지치기든 팽이치기든 지면 상대에게 빼앗겼다. 지면 놀 수 없고 즐길 수 없었다. 놀이였지만, 아니 놀이였기에 질 수 없었다.
나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아니고 이기고 싶어서 논 것도 아니다. 노는 일이 너무 좋았고, 지면 놀 수 없으니 이겼을 뿐이다.
내게 놀이는 곧 즐거움이었고, 노는 것은 사는 일이었다. 보통은 지면 슬프고 이기면 기쁘다고 느끼겠지만, 내게는 놀이가 그런 것이었기에 ‘기쁘다’, ‘슬프다’와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놀았다.
어린아이였으니 의식주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았다. 하지만 놀이만큼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내 최초의 독립과 자립, 자각 같은 것은 놀이를 통해 생겨났다. 어쨌든 지면 놀지 못했다. 놀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다.
그래서 즐거움을 한 아름 안은 채 놀았다. 그 밑바탕에 있던 것이 ‘질 수 없다’는 강한 마음이었다.
‘이기고 싶다’는 욕망은 짙은 화장과 같다
동물은 강한 유전자를 가진 존재가 살아남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꾸밈없는 부분에도 먼 옛날부터 DNA에 새겨진 경쟁의식이 있다.
그런 인간의 본성 때문인지 내게 상담하러 오는 사람 대부분은 ‘이기는 것’만 생각한다. 그것도 승부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은 채 겉모습만 꾸미듯 ‘승리’를 원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품는 ‘이기고 싶다’는 마음은 화장과 다르지 않다. 꾸밈없는 본질에서 나오는 ‘지지 않는다’는 마음이 아니라, 화장처럼 표면적인 ‘승리’를 구할 뿐이다.
하지만 본래 경쟁의식은 동물로서의 꾸밈없는 부분, 본능에 더 가까운 곳에 있다. 그것은 ‘이기고 싶다’는 끝없는 욕망이 아니라 ‘지지 않는다’는 본능적인 사고다.
‘지면 끝이다’라는 경쟁의식은 인간만 아니라 동물도 가지고 있다. 동물은 필요 이상의 싸움을 거의 하지 않는다. 본능적인 경쟁의식은 필요에 몰렸을 때만 나타난다.
그런데 지금의 인간은 꼭 필요하지도 않은 힘과 능력을 잔뜩 갖추고, 하지 않아도 될 다툼을 벌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기고 싶다’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힐수록 그런 경향은 강하다.
이기려고 쓸데없는 능력을 익히고 필요 이상의 힘을 기르는 것은 말하자면 ‘짙은 화장’과 같다.
여성에 빗대면 이해하기 쉽다. 화장을 지우면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짙게 화장한 사람이 있다. 그것은 화장이 아니라 변장이다. 가면을 벗기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
짙은 화장은 그 사람의 잡티와 주름을 감추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기기 위해서만 익힌 힘은 그 사람이 지닌 약점을 감추려고 존재한다고 해도 좋다.
약점을 감추기만 하는 힘은 약하다. ‘승리’에 사로잡힌 사람의 승부도 약하다. 거기서는 좋은 것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지향하는 ‘승부’와 정반대에 있다.
‘승리’를 지나치게 추구하면 약해진다
글자만 보고 ‘이기고 싶다’는 말은 적극적이고 ‘지지 않는다’는 말은 소극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기고 싶다’는 마음은 짙은 화장으로 겨우 남에게 보일 만해진 사람이고, ‘지지 않는다’는 마음은 민낯으로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만큼 둘은 다르다.
내 취향은 화장해서 아름다운 사람보다 민낯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도 무척 귀엽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치장한 것이나 화장의 유혹에 빠지기 쉬워진다. 외모뿐 아니라 ‘마음의 화장’, ‘능력을 치장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출세하고 권력과 돈을 얻기 위해 화장 위에 화장을 거듭한다.
온갖 화장을 겹쳐 ‘승리’를 주워 담으려는 추한 인간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지금 시대의 ‘승리’의 모습이다.
서점에 가득 꽂힌 책을 둘러봐도 이기기 위한 겉치레 방법과 기술만 말하는 책이 많다. 모두 겉만 꾸미는 화장법을 가르칠 뿐이므로, 그런 책을 읽은 사람이 꾸밈없는 본질에서 진정한 강함을 얻고 성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화장한 ‘승리’를 지나치게 추구하면 인간은 점점 약해진다. 우연히 이겨 잠시 강해진 듯 느낄 수는 있어도, 꾸밈없는 본질은 굳어 간다.
화장만 하면 피부가 바깥 공기에 노출될 기회가 줄어든다. 건강한 피부를 유지하려면 때로는 맨살을 바깥 공기에 드러내고 햇빛을 쬐게 해야 한다.
하지만 화장에 사로잡힌 사람은 화장하지 않고는 밖에 나가지 못한다. 어느새 화장 자체가 목적이 되어, 화장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 피부는 점점 약해진다. 바깥 공기에 닿지 않으면 약해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므로 당연한 결과다.
그것이 단지 ‘화장’이라면 그나마 괜찮다. 그러나 ‘삶의 화장’을 벗겨 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어떨까. 그것은 이제 진짜 자기 모습으로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승리’를 지나치게 추구한 끝에 인간의 본질 자체가 퇴화한 것이다.
현대사회는 겉보기에는 화려할지 몰라도 내면까지 결코 풍요롭지는 않다. 일본은 풍요를 향해 나아왔을 텐데도 곳곳에서 큰 비극이 벌어진다.
승리와 풍요는 같지 않으며, 승리와 강함도 같지 않다. 시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을 화장하려는 사람이 좀처럼 줄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멋있게 이기려면 아직 백 년은 이르다
전작 『사람을 꿰뚫어 보는 기술』이 팔린 뒤로 전보다 더 많은 상담이 내게 온다. 이메일, 편지, 면담, 내가 주재하는 마작 도장 작귀회 방문 등 방법도 제각각이며 온갖 고민이 찾아온다.
그 많은 상담 중 특히 자주 듣는 말은 “이기는 기술을 가르쳐 주세요”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지지 않는 기술을 가르쳐 주세요”라고 하지 않는다.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며 겉핥기식 답을 얻으려 한다.
그중에는 “멋있게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답한다. “멋있게 이기겠다니, 아직 백 년은 일러.”
상담하러 온 사람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멋있게 이기려고 해도 좀처럼 그렇게 할 수 없다. 게다가 ‘이기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의 ‘멋있는 승리’는 몹시 추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추한 승리 방식’을 ‘멋있는 승리 방식’이라고 착각한다.
나는 ‘멋있게 이기기’보다 ‘멋있게 지기’를 생각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얼마 전 작귀회 도장생에게 “멋있게 이기려고 하지 말고, 멋있게 지는 일을 생각해 보면 어때?”라고 조언했다. 그러자 그는 이후 대국에서 극적으로 이겼다.
‘멋있게 지려면’ 마음가짐에서 몸가짐까지 몸과 마음 양쪽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첫걸음은 ‘이기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고 몸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힘을 빼는 일이다.
그 도장생은 “멋있게 지자”고 생각한 순간 사고와 동작에서 힘이 빠졌다. 마음가짐과 몸가짐은 아직 멀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대국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자기 기쁨만을 위해 하는 승부라면 대단한 승부가 아니다. 이기든 지든 상대가 “좋은 승부였다”고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좋은 승부’다.
졌더라도 상대를 원망하지 말고 “좋은 승부를 하게 해 주어 고맙다”고 생각해야 한다. 패배를 통해 자기 약점을 배우고, 더 강해질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존경한다면 상대의 기쁨도 자기 기쁨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긴 일도 진 일도, 일어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감각이 아주 중요하다.
패배를 그저 부정적인 일로만 여기면 발전이 없다. 패배도 ‘승부’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고 받아들이는 감각이 ‘좋은 승부’를 만든다.
‘멋있게 지는 일’은 결과적으로 ‘지지 않는 일’로 이어진다. ‘멋있게 이기겠다’는 욕망에 찌든 생각을 버리고 먼저 ‘멋있게 지는 일’을 의식하라. 진정한 ‘강함’은 분명 거기서 태어날 것이다.
압박감을 없애는 ‘지지 않는다’는 마음
일본의 우승으로 막을 내린 2009년 제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주 개최국 미국에서는 열기가 그리 높지 않았던 듯하지만, 대표팀이 결승에 오른 일본과 한국에서는 크게 달아올랐다.
한국 선수들은 이번에도 “일본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다”는 강한 마음을 전면에 드러냈다. 일본 선수들에게도 물론 “한국에 질 수 없다”는 마음이 있었겠지만, 그 강도에서는 한국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일본에 지고 싶지 않다”는 말 속에 담긴 ‘질 수 없다’, ‘지지 않는다’는 한결같은 자세와 기개는 양국의 역사를 떠나 내가 아주 좋아하는 부분이다.
대회 당시 일본 대표팀의 애칭은 ‘사무라이 재팬’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본 선수보다 한국 선수에게서 ‘사무라이 정신’을 느꼈다. 특히 한국 감독에게서 강하게 느꼈다.
야구 수준만 보면 한국은 일본보다 분명 아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수 하나하나의 승부 근성, 지지 않겠다는 마음은 대단히 강하다. 그 강한 마음은 압박감을 밀어내고 각자의 가능성을 넓힌다.
‘질 수 없다’는 마음이 강해질수록 신기하게도 압박감은 사라진다.
반대로 ‘승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끝없이 압박감에 시달린다. ‘승리’만 좇으면 시야가 좁아지고 자기 기량 이상의 일을 하려고 한다. 이윽고 큰 압박감이 생겨나고, 거기에 발목이 잡혀 지고 만다.
‘지지 않는다’는 마음은 ‘이기고 싶다’는 마음보다 순수하다. 쓸데없는 생각이 끼어들지 않고 압박감도 느끼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지지 않는다’는 접근으로 승부에 임하는 사람에게 압박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치로가 WBC에서 고뇌한 이유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대회에서 이치로 선수는 ‘승리’를 좇아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치로가 소속된 시애틀 매리너스는 약했다. 적어도 2008년까지는 그랬다. 이치로가 안타를 쳐도 팀이 지는 일이 많았고, 솔직히 이치로 마음속에도 “이 팀에서는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긴 시즌을 치르는 동안, 혹은 팀의 체제 속에서 패배가 보인다. 이치로에게는 매우 괴로운 상황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런 때 일본 대표로 돌아와 보니 대표팀은 제법 “해 볼 만하다”는 팀이었다. 메이저리그 소속팀이 침체해 있었기에 “이 팀이라면 우승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강해졌을 것이다.
이치로는 일본 대표팀에서 자기 역할이나 기록을 추구하기보다 마음이 ‘승리’ 쪽으로 기울었다. 그 결과 엄청난 압박감에 짓눌린 것은 아닐까.
나는 아시아 지역 도쿄 라운드의 일본 경기를 두 차례쯤 경기장에서 봤다. 이치로의 몸은 굳어 있었고 평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경기 전 연습부터 줄곧 그랬다. 던지고, 달리고, 치는 모든 동작이 본래의 이치로와 달랐고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는 느낌이 강했다.
평소에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멋지게 던지는데 어딘가 어색했다. 무언가 한쪽으로 치우친 느낌이었다. 함께 간 작귀회 도장생에게 “이치로가 좀 이상하네”라고 하자 그는 “이치로는 슬로 스타터라 대회 초반에는 늘 이래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모두가 알다시피 일본은 이후 WBC 2연패를 달성했다. 그리고 대회 뒤 이치로가 위궤양을 앓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치로의 부진은 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가 상하는 것은 승부사의 숙명이다. 거꾸로 보면 매년 그토록 많은 기록을 이어 가면서 지금까지 시즌 내내 몸 상태를 유지해 온 이치로가 대단하다. 승부를 하는 이상, 특히 그것이 진검승부일수록 인간은 위를 상하게 된다.
나는 위궤양까지 앓은 적은 없지만 대타 승부를 하던 시절 큰 승부 전에는 위에 이상을 느꼈다. 칼날을 위에 댄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내 경우에는 큰 승부를 치르는 도중이 아니라 그 전에 반드시 그런 몸의 변화를 느꼈다. 어떻게 될지, 승부가 어느 쪽으로 굴러갈지 모르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한편 두려움과 불안도 생겼다. 즐거움과 불안 사이를 오갔다. 큰 승부 전에는 늘 그랬다.
뒷세계 마작의 대타 승부는 평범한 마작과 완전히 다르다. “지면 다음에 만회하면 된다”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지면 끝’인 세계였다.
지면 이 도시에서 사라지거나, 자기 목숨을 끊거나, 누군가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데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다. 목숨이 걸렸으니 당연히 질 수 없었다. 상대도 같은 상황이었다.
팀의 견인차였던 이치로에게 이번 WBC는 그런 벼랑 끝 싸움이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이 나쁜 상태에서도 압박감과 싸우며 개인과 전체 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했다.
벼랑 끝 승부는 위에 부담을 준다. 그런 가운데 위에 가해지는 손상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압박감 속에서도 ‘즐기는 마음’을 계속 지니는 수밖에 없다. 그토록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싸우고 승부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설레는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공포와 불안 같은 부정적 사고와 설렘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사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승리’와 인간의 세 가지 본능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기에 ‘승리’를 좇는다. 승리를 향해 가는 승부가 욕망이 지배하는 싸움이라면, ‘지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본능에서 나오는 싸움 방식이다.
욕망이 없는 동물과 생물은 ‘승리’를 좇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본래 지닌 싸움의 자세가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분이 있는 힉슨 그레이시는 ‘지지 않는다’는 자세로 싸운 보기 드문 격투가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승부에는 승패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이기는 것보다 상대와 싸우는 데서 기쁨을 느낍니다.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싸우는 동안 내가 다치지 않고 상대도 다치게 하지 않는 일입니다. 둘 다 부상 없이 싸움을 마치는 것이 승부에서 내가 가장 바라는 바입니다.”
나도 힉슨과 같은 의식으로 싸워 왔다. 링과 마작판이라는 환경은 달랐지만, 싸움 속에서……
나는 언제나 상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때, 아프지?”, “이제 움직이지 못하겠지?”, “이건 괴롭지?”라고 느끼게 할 만한 일은 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공격해 상대를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승리’를 향해 싸우면 금세 상대를 다치게 한다. 오직 ‘승리’만 추구하고 욕망의 세계에 빠지면 한도가 사라진다.
승자의 기쁨만을 좇으면 그 이면의 슬픔을 깨닫지 못한다. 깨닫더라도 그 아픔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둔감해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승부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 승자의 기쁨 뒤에는 반드시 패자의 슬픔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도를 넘어서 ‘승리’만 추구하는 싸움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거기에 남는 것은 패자의 비극뿐이다.
나도 젊었을 때는 그 가감을 몰라 상대를 철저히 짓밟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승부는 이기면 되는 것 아냐?”라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승부를 계속하면서 차츰 알게 되었다. 내가 이기는 일이 패자를 얼마나 깊이 다치게 하는지를 말이다. 그 뒤로 내 승부관은 서서히 달라졌다.
승리를 거듭하고 ‘이김’이 쌓이면 욕망도 점점 부풀어 오른다. 그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기에 욕망을 가능한 한 통제하는 일이 중요하다. 욕망에 찌든 승리 방식만큼 보기 흉한 것은 없다.
인간에게는 식욕·수면욕·성욕이라는 본능에서 나오는 세 가지 욕구가 있다. 이 세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충분하다는 감각을 지니면 그 밖의 욕망에 현혹되는 일이 줄어든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지금 나는 욕망에 홀려 있다”고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욕망의 통제는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살다 보면 주변에서 여러 욕망이 들어온다. 자기 욕망뿐 아니라 남의 욕망까지 스며들기에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욕망이 자기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자기 욕망도 있고 타인의 욕망도 있다. 그것을 의식해야 비로소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
‘만족’보다 ‘납득’이 중요하다
“자신에게 이겨라”라는 말이 있지만, 승부에서 정말 져서는 안 될 상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끝내 자신을 이기지 못한다면 눈앞의 승부에서 아무리 많이 이겨도 진정 이겼다고 할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만 이기는 사람은 이윽고 승부 자체에서도 이기지 못한다.
‘자기에게 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자세로 계속 걸어가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면 적을 밖에 두지 말고 안에, 즉 자기 안에 두어야 한다.
보통 적은 자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한다. 승부의 상대뿐 아니라 자신에게 나쁜 감각과 요소도 적으로 여긴다. 몸이 약하거나 타고난 병이 있는 것 같은 일도 사람은 적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적이 자기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것까지 적으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자기 성격이나 가치관 속에도 적이 있을 수 있다.
자기 안에서 새롭게 발견한 적과는 한결같이 싸워야 한다. 그 싸움을 거쳐야 비로소 타인과 승부 상대와 싸울 수 있다.
자기 안의 적과 싸워 자신의 일부를 이해한 사람은 상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승부 속에서 인간으로 성장하는 일이야말로 승부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어렵다. 나 역시 평생을 들여도 나 자신을 완전히 알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를 다 알지 못한 채 죽는다.
때때로 “나는 이런 사람인가?” 하고 조금 알 것 같은 순간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그런 변화가 있기에 사는 일이 재미있고 즐겁다.
사람은 변한다. 그리고 변해 가는 자기 모습을 납득하는 일이 중요하다. 만족하라는 뜻이 아니다. 변화에 만족해 버리면 더는 변하지 못한다.
또 만족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불만이 점점 커지고 시선이 바깥으로 향한다. 그러면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강해지고 남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일만 많아진다.
‘납득’과 ‘만족’은 비슷한 말이지만 인생에서는 만족이 아니라 납득하며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매사를 납득하며 살면 자연히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인생의 질은 이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 있다. 소중한 것을 많이 지닌 사람은 자연히 감사하는 마음도 많다.
적을 자기 안에 두면 그 사람의 인생은 납득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결국 ‘자기와 싸운다’는 것은 자신을 납득하기 위해서다. 만족이 아니라 납득을 위해 사람은 자기와 싸워야 한다.
‘지지 않는다’와 ‘승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납득을 구하는 사람은 욕망으로 얻는 ‘승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지지 않는 사람’이란 어디까지나 납득하는 일에 끝까지 집착하는 사람이다.
일부러 지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
내가 마작을 시작했을 때 이상하게 느낀 점은 “왜 모두가 일부러 지려고 애쓸까?”였다. 모두 이기고 싶어 마작을 했겠지만, 행동은 지는 쪽으로 흘러갔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이기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애쓸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대부분 ‘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공하려고 사람을 속이고 기만한다. 그렇게 성공해도 나는 그것을 진정한 승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속임수와 기만으로 얻은 승리는 아주 약하다. 마작에서도 비열한 수를 쓰는 사람이 우연히 이길 수 있지만 그 ‘승리’가 계속되지는 않는다. 안정감이 없으므로 그냥 두면 반드시 스스로 무너진다.
마작은 본래 상대에게 쏘이는 것과 화료하는 것, 즉 ‘내주는 일’과 ‘얻는 일’의 균형 위에 성립한다.
하지만 마작을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얻는 일’, 화료만 구하며 상대를 보려 하지 않는다. ‘승리’의 욕망에 갇혀 전체를 보는 눈을 잃었기 때문이다. 판단과 행동의 균형이 치우치고 끝내 스스로 무너진다.
이처럼 “이기고 싶다”는 욕망대로 돌진하면 사실은 ‘지기 위한 노력’을 하는 셈이 된다. 대부분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지 않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한마디로 하면 “필요한 일만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이 있다. 그중 필요한 것만 골라 그때그때 알맞은 일을 하면 좋은 방향으로 간다.
필요와 불필요는 순환한다. 필요한 것이 돌아오면 그대로 살리면 된다. 불필요한 것이 오면 견딘다. 필요한 것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참아 내고 ‘그때’를 조용히 기다리면 된다.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지지 않는다
필요와 불필요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어느 겨울 아침, 햇볕을 받아 몸을 녹이고 있는데 구름이 해를 가렸다고 하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 ‘승리’에 집착하는 사람은 모두 햇볕을 찾아 걸어간다. 그저 구름이 지나가기를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데 그러지 못한다.
자기 지식과 기술로 상황을 타개하려 한다. 그 마음이 구름 없는 곳으로 몸을 움직이게 하지만, 그것은 ‘자멸’로 가는 길일 뿐이다.
현대인의 몸에는 지식과 기술이 깊이 배어 있다. 세상 자체가 기술 일변도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른다. 컴퓨터를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졌다’ 하고, 휴대전화를 조작하지 못하면 ‘바보’라는 말을 듣는다. 그 때문에 완전히 기가 꺾인 사람도 많다.
그러나 나는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다룰 줄 모르지만 그렇다고 ‘바보’ 취급을 받지는 않는다. 그저 평범한 아저씨지만 지금 세상에서 이렇게 책도 낸다.
중요한 것은 자기 존재와 자리를 지식이나 기술 없이도 통하고, 감각으로 승부할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이다. 감각으로 일을 대하면 “지식이다”, “기술이다”라고 떠드는 사람보다 뛰어난 모습을 분명 보여 줄 수 있다.
‘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고 싶다면 지식과 기술을 버리거나 적어도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감각을 지니고 “다른 것은 없을까?”라고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골라 내면 자연히 좋은 조건이 갖춰진다. 좋은 조건이 갖춰지면 결과적으로 ‘지지 않는 일’로 이어진다.
이렇게 ‘지지 않기 위한 노력’은 지식과 기술에 의존하는 자기를 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 ‘자기를 버리는 마음’이 없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은 채 좋은 부분만 받아들이려 해도 세상일은 그렇게 편리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주변을 보면 인간은 지금까지 쌓아 온 자기를 좀처럼 버리지 못한다. ‘얻는다’는 마음만 있을 뿐 ‘버린다’는 감각을 갖지 못한다. 자기에게 나쁜 것조차 계속 끌어안는다.
지식과 기술 중에서도 자기에게 나쁜 것은 걷어 내야 한다. 남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힘으로 제거하지 못하면 그 힘이 자기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없다.
자기 내면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다. 그 ‘괴로움’을 제대로 자각하고 나쁜 것을 버려야 한다. 한꺼번에가 아니라 조금씩 버린다.
모두 한 번에 버리려고 하면 지나친 완벽주의가 되어 오히려 ‘병’을 부르기 때문이다. 나쁜 것의 절반쯤을 버린다는 감각이면 된다. 쌓이면 절반을 버리고, 다시 절반이 쌓이면 또 그 절반을 버린다. 신문지를 반으로 잘라 한쪽을 버리듯 되풀이하면 내면의 나쁜 것은 이윽고 아주 작아진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지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패배의 99퍼센트는 ‘자멸’이다
일이든 인생이든 ‘패배’의 99퍼센트는 ‘자멸’이라고 해도 좋다.
스포츠·경제·도박 등 모든 세계의 승부에서 패배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자멸로 패배를 불러오는 경우다.
뒷세계 마작에서 대타 승부를 하던 시절, 내가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제멋대로 춤추다가 눈앞에서 가라앉는 광경을 수없이 봤다. 거의 모든 대국이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이렇게 느꼈다. “내가 강한 게 아니야. 다들 제멋대로 자멸하는 거야.”
대부분이 스스로 자멸한다는 말은 승부의 세계뿐 아니라 일과 인생, 사회 전체에도 해당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맞은 때 하지 않고 불필요한 일만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승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동기와 행동에는 자멸의 요소가 숨어 있다. 그러나 ‘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취하면 적어도 자멸은 피할 수 있다.
생태 문제도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진보·개발·경제를 우선하고 그것에서만 가치를 찾는다. 그러나 내 눈에는 자연을 파괴하려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모습으로 보인다. 자연 파괴는 인류의 자멸로 이어지는 길이다.
우리는 자연과 공존해야 하는데 지금 세상은 반대 길을 걷는다. 자멸의 길을 계속 걸으면 결국 식량이 사라진다. 우리 식욕을 채우는 것은 자연의 은혜다. 생명을 이어 주는 자연이 없어지면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경제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세계에 둘러쳐진 교통망이다. 자동차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자동차가 아무리 많아도 인간의 식욕을 채워 주지는 못한다.
인간에게는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기본 원칙이 있다. 모든 생물에게 통하는 원칙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을 욕망과 소비의 대상으로 삼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식량을 스스로 줄인다. 그 결과 최소한의 식사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을 더욱 늘린다.
어느 날 갑자기 물고기가 모두 사라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런데 물고기가 영원히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오만이다. 온 세상의 식물이 말라 죽을 수도 있다.
태고부터 지구는 생물종의 위기가 되는 빙하기를 여러 번 겪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거대한 순환 중 하나였지 인류가 스스로 불러온 환경 위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욕구를 충족하려고 지구를 근본적인 위기로 몰아넣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멸의 길로 굴러떨어지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가령 해수 온도가 1~2도만 올라가도 산호는 죽는다고 한다. 산호가 죽으면 물을 정화할 수 없게 된다.
육지에서 흘러든 물을 산호와 여러 생물이 정화하고, 그렇게 깨끗해진 바다에서 다양한 생명이 자란다. 그 순환을 끊으면 우리 생명의 순환도 당연히 멈춘다.
우리가 이미 그런 자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확증과 보증을 구하면 약해진다
승부의 세계에는 징크스를 신경 쓰는 사람이 많다. 거기에 이론이나 확증은 없지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이유만으로 징크스라는 말로 포장한다.
좋은 일이 이어지길 바라며 길흉을 따지거나 징크스에 기대는 사람도 있다. 프로 세계에도 많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일종의 ‘마니아’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일에 열심인 사람일수록 그런 사고에 사로잡히기 쉽다.
스포츠에서 프로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한 가지에 몰두하고 다른 것을 희생하며 기술을 연마해 프로 세계까지 간다.
프로가 아니어도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는 훌륭하고 열성적인 사람은 내가 말하는 ‘마니아’, 혹은 ‘오타쿠’가 되기 쉽다.
스포츠에서는 그런 사람을 마니아나 오타쿠라고 잘 부르지 않지만, 내 눈에 야구 선수는 ‘야구 마니아’와 같다.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은 ‘돈 마니아’나 ‘일 마니아’다. 아키하바라에 있는 사람만 마니아나 오타쿠인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징크스와 길흉에 신경 쓴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체질이라 늘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승부사로 살아왔지만 그런 집착이 별로 없다. 마작을 할 때 담배 놓는 위치나 음료 종류에 집착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나는 과거를 돌아봐도 징크스나 길흉을 신경 쓴 적이 없다.
징크스를 믿는 사람은 매뉴얼과 통설에 기대기 쉽다. 내면의 불안을 지우려고 확증과 보증을 구한다.
확증이나 보증이 없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현대인의 성질이다. 세상이 근대화될수록 사람은 확증을 찾고 보장된 지위를 가지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지 ‘본능’이 아니다. 본능의 힘이 쇠퇴했기에 본능으로 판단해야 할 곳을 확증과 보증으로 메우려 할 뿐이다.
확신을 얻고 보장을 받는 것은 ‘승리’의 한 변형이며 ‘승리’의 논리에서 나온다. 현대인의 끝없는 승리 욕구가 여기에도 나타난다.
나는 승부에서도 인생에서도 확증을 구하지 않는다. 확증보다 “그런 느낌이 든다”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느낌’이 이윽고 확신이 될 수는 있어도 확신이 먼저 오지는 않는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본능으로 느낀 것에서 답을 끌어낸다. 그것이 ‘지지 않는’ 강함을 만든다.
현대인에게 부족한 것은 그렇게 본능으로 느끼고 정진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제2장 ‘지지 않기’ 위한 기술
두 마리는커녕 백 마리 토끼를 쫓아라
이제는 사어가 되었겠지만 예전에 ‘나가라족’, 즉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부정적인 뉘앙스였지만 나는 이 ‘동시에 하는 감각’을 좋게 본다.
나는 무슨 일을 해도 그 한 가지에만 사로잡히지 않는다. 무엇을 하면서 언제나 다른 무언가도 한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오히려 좋은 집중력을 만든다.
마작을 할 때도 그런 감각으로 한다. 도장에서 마작을 하면서 다른 탁자의 도장생을 관찰한다. 작은 움직임과 몸짓을 보고 “저 녀석은 담배가 피우고 싶구나”, “음료를 사러 가겠구나” 하고 마음을 읽는다.
늘 그런 감각을 가지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지혜도 나온다.
눈앞의 일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무언가를 하면서 다른 것도 느껴라. 눈앞에만 집중하면 주변이 보이지 않고 이상한 긴장이 생겨 이로울 것이 별로 없다.
“눈앞의 일을 성실하게 해라”, “한 가지에 집중해라”라고들 하지만 한 점에만 집중하는 성실한 사람일수록 실패를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이 오히려 큰 실패를 만든다. 그래서 동시에 여러 일을 하는 것은 불성실하고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것은 성실하다는 생각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작귀회에서는 대국 중 사담이 금지되어 있지만, 나는 주변을 살피고 마음속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패를 친다. 그렇게 눈앞의 일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하는 것이 진정한 집중이다.
일본 교육 자체가 눈앞에만 집중하라고 가르치므로 여유 없는 사람이 늘어난다.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면 한 마리도 못 잡는다”는 말을 철저히 주입한다.
그러나 사실 두 마리는커녕 백 마리쯤 쫓겠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한 가지가 아니라 천 가지를 붙잡겠다는 정도의 마음이 없으면 인간은 성장하지 않는다.
한 가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증거다. 여유가 없다면 만들면 된다. 마음과 움직임 모두에 여유를 가지면 초조하거나 망설이고 고민하는 일이 줄어든다.
여유는 서서히 만들면 된다. 두 마리도 못 쫓는 사람에게 갑자기 백 마리를 쫓게 하는 것은 무리다.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로 자기 역량을 조금씩 키운다.
역량을 키우면 여유가 생기고 깨닫는 일도 많아진다. 승부는 이 ‘깨달음’의 수로 승패가 결정된다고 해도 좋다. 마음의 여유는 ‘지지 않는 일’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지지 않으려면 한 마리라도 더 많은 토끼를 쫓는 감각이 중요하다.
흘려보내는 감각으로 강해진다
젊은이들은 무시하는 것을 ‘스루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와 다른 나만의 감각으로 ‘스루’를 쓴다.
나는 무엇이든 일단 자기 안을 통과시킨 뒤 뒤로 빠져나가게 하는 감각을 지닌다.
‘좋은 것’은 안에 간직하고 싶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붙들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낸다. 반대로 ‘싫은 것’도 내팽개치거나 무시하지 않고 반드시 통과시켜 그 존재를 확인한다. “일단 전부 받아 두자”는 느낌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안에 쌓아 두면 ‘사로잡힘’이 생겨 더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일 수 없다. 싫은 것도 완전히 무시하면 왜 싫은지,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 채 끝난다.
이 감각에 익숙해지면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균형 있게 취사선택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자기 안의 것뿐 아니라 타인도 통과시킬 수 있게 되면 많은 것을 깨닫는다. 상대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을 지나가면서 여러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 깨달음 가운데는 지금 전해 줘야 할 것도 있고, 모르는 척해야 할 것도 있다.
흘려보내기에는 딱지를 뒤집는 듯한 재미가 있다. 뒤에 있는 것을 뒤집어 앞으로 드러내는 재미다. 나도 뒤집히고 상대도 뒤집히면 꾸밈없는 인간이 나타난다. 그것이 즐겁다.
앞과 뒤가 함께 있어야 비로소 ‘형태’가 드러난다. 세상 모든 것에는 앞과 뒤가 있다. 현대사회에는 겉만 꾸미는 일이 판쳐 형태가 뒤틀린 것이 많다.
그래서 뒤틀린 사람을 보면 먼저 “뒷면을 보여 줘”라고 하며 뒤집는다.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차츰 뒷면을 보이는 데 익숙해지고 끝내 꾸밈없는 자기로 돌아간다.
인간은 앞과 뒤를 모두 자각해야 진정한 자기가 된다. 선과 악이 뒤섞여 만들어진 존재인데 악을 안에 감추고 선만으로 꾸미는 사람도 많다. 선과 악을 앞뒤처럼 나누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이 악보다 많은 사람도 있겠지만 비율의 차이일 뿐 둘 다 지녔다는 사실은 같다. 인간을 몸과 마음이 하나인 존재로 보듯 선과 악도 나누지 말고 ‘둘 다 지녔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화려한 겉면만 보이는 사람은 어딘가 거짓되고 약하다. 반대로 겉과 속 구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강함이 있다.
일상에서 계속 흘려보내는 감각을 지니면 당신 안에도 그런 부드러운 강함이 자랄 것이다.
초심자의 행운에 필연성이 있는 이유
도박의 세계에서는 초보자가 순식간에 큰돈을 버는 일이 있다. 이른바 ‘비기너스 럭’이다.
그것을 단지 “운이 좋네”, “따르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초심자의 행운은 우연이 아니다.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 필연성이 있다. 일을 알수록 사람은 점점 어렵게 생각한다. 지식과 정보가 늘고 생각이 넓어지면 망설임이 생긴다.
마작에도 어려운 수와 쉬운 수가 있지만 초보자는 어느 쪽인지 모른다. 직감으로 가장 단순한 수를 택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승리로 이어진다.
승부는 복잡하게 만들수록 패배에 가까워진다. 승부 세계에서도 ‘심플 이즈 베스트’가 통한다.
나도 이렇게 책을 내지만 솔직히 어려운 것은 전혀 모른다. 여러 분야의 ‘선생’들과 교류하지만 그분들은 어려운 일을 정말 잘 안다. 나는 쉬운 것만 알기에 말할 수 있는 것도 쉬운 것뿐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살았기에 대타 승부 시절에도 지지 않고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쉬운 것이 사실은 더 어렵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게 쉬운 것은 그대로 쉽다. 많은 사람이 쉬운 일을 지나치게 어렵게 생각하고 복잡하게 하려 하기에 못할 뿐이다.
인간관계도 복잡해질수록 수정하기 어렵다.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여러 일을 바로잡기 어려워 마음 곳곳에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끈이 복잡하게 얽히면 풀기 어렵듯 인간관계도 얽히면 해결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관계라는 끈을 묶을 때도 자기 손으로 풀 수 있을 정도의 ‘매듭 감각’을 가져야 한다.
심플 이즈 베스트라는 사고는 승부뿐 아니라 삶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 모든 일을 간단하고 단순하게 해야 한다.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 얼핏 수준 높은 일처럼 보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복잡함을 훌륭하다고 여기고 정보가 넘치는 현대사회는 복잡함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그래서 복잡함을 정리하고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작귀회에서도 내가 하면 단순한 일을 도장생이 하면 복잡하게 만들어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복잡하게 해야 지식과 힘이 늘어난다는 교육을 받았고 그 사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단순하게 하는 방식을 흉내 내지 못한다.
나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계속 버려 단순하게 만들려고 해 왔다. 사고와 동작의 다양한 것을 하나로 묶어 단순하게 만든다. 조금씩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비기너스 럭’이 초보자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실감할 것이다.
어떤 직업과 일이든 저마다 ‘도’가 있다. 그 길에 어느 정도 통달한 사람은 곁에서 보면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것이 바로 ‘지지 않는’ 비결이다.
단순함이 지닌 의미
승부의 장에 섰을 때 얼마나 빠르고 강하게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가. 그것을 실천하려면 먼저 단순해야 한다.
말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전하려 할 때 장황하게 계속 말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만 간결하게 전하는 편이 상대에게 더 잘 닿는다.
말이 잘 전해지지 않는 까닭은 지나치게 생각해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전달에 시간을 들일수록 내용 일부는 상대에게 닿기도 전에 빠져나간다.
승부의 공격도 같다. 불필요한 생각이 섞이면 속도가 떨어지고 상대에게 준비할 시간을 준다. 상대를 유리하게 할 뿐이다.
단순하다는 말은 다양한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지나치게 생각해 헛된 움직임을 하지 않고, 기술이 있어도 그것에 의존해 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치에 맞는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없어 아름답다. 거기에 속도가 더해지고 힘도 최대한 발휘된다.
생각과 기술에 의존하는 싸움은 잔재주에 사로잡힌 공격이 되기 쉽다. 그런 공격은 상대에게 주는 타격도 작아서 ‘지지 않는’ 싸움을 할 수 없다.
‘지지 않는’ 공격은 기술이 아니다. 단순하게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맞설 때 비로소 태어난다.
일상에서 하는 ‘자기 연마 게임’
나이를 먹으면 건망증이 심해진다. 무엇을 어디에 뒀는지, 왜 그곳에 왔는지 순간적으로 모를 때가 있다.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나도 젊을 때보다 많이 잊는다. 그러나 작은 시련을 일상에 넣기만 해도 자신을 연마할 수 있다. ‘시련’이라는 말이 거창하지만 게임하듯 자기를 단련할 수 있다.
내가 집에서 하는 게임은 이렇다.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 할 일을 순간적으로 열 가지쯤 정한다.
침실에서 거실로 간다면 담배를 놓고, 수건을 들고, 차를 끓이고, 욕조에 물을 받는 식이다. 예전에는 열 가지를 빠짐없이 했지만 요즘은 하나둘 “어라?” 하고 잊는다. 이른바 부주의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니 내게도 쇠약함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리라.
하나둘 잊었을 때 나는 게임처럼 “아, 졌네”, “나도 약해졌구나”라고 느낀다. 그렇게 승부 감각을 계속 지니며 자신을 연마하는 일이 중요하다. 열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사람은 한두 가지만 해 온 사람보다 반드시 강해진다.
아내는 “어라, 부엌에서 뭘 하려 했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아내는 할 일 하나를 잊지만 나는 한 가지 일만 하려고 움직이지 않는다. “한 가지로는 재미없다. 열 가지를 해 보자”는 마음으로 날마다 자신을 단련한다.
할 일 열 가지는 시간을 들이지 않고 순간적으로 정한다. ‘생각난 순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는 감각을 일상에서 기른다. 순간적인 움직임은 생활 속에서 자란다.
세상에는 기다려도 되는 것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 있다. 순간적으로 할 일을 정해 실천하는 습관을 들이면 둘을 즉시 구별할 수 있다. 구별하지 못하면 무언가를 놓친다.
기다릴 필요가 없는 일은 계속 끝낸다. 그런 감각을 기르지 않으면 모든 일에 ‘때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반대로 때를 맞추는 사람은 순간적인 판단력과 ‘지지 않는’ 감각을 지니고 남을 배려할 수도 있다. 일상에 ‘자기 연마 게임’을 넣는 것만으로 여러 일에 통하는 감각과 정신을 기를 수 있다.
승기를 잡는 사람, 잡지 못하는 사람
승부의 흐름에는 반드시 ‘승기’라는 기회가 온다. 마작도 네 사람 모두에게 “바로 여기”라는 순간 승기가 찾아온다. 일과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며 누구에게나 오지만 반드시 공평한 것은 아니다.
승기를 끌어들이려면 여러 힘이 필요하다. 노력과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며 흐름을 읽는 힘, 사람의 자질, 승기와의 궁합도 관계한다.
승기와 궁합이 맞으면 그것은 승기가 되고, 맞지 않으면 그저 하나의 ‘기회’로 끝난다. 맞지 않을 때는 어떻게 맞출지 찾아야 많은 승기를 만날 수 있다.
이 감각을 기르려면 여러 대상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눈앞에 바보가 있으면 바보에게, 아이가 있으면 아이에게, 노인이 있으면 노인에게, 약한 사람이 있으면 약한 사람에게 맞춘다. 온갖 방식으로 맞춰 보지 않으면 승기를 자주 만날 수 없다.
“기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켜잡는 것”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기회는 이미 모두에게 와 있다. ‘잡는다’는 표현보다 기회가 당신에게 잠깐 ‘달라붙는다’고 하는 편이 맞다.
그 짧은 순간 달라붙은 기회를 느끼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성패가 달렸다.
기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비유하면 이해하기 쉽다. 바람도 보이지 않지만 강한 바람인지 기분 좋은 산들바람인지는 느낄 수 있다.
기회와 운은 바람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람에게 달라붙는다. 도장생 대국을 보며 “지금 저 녀석에게 붙어 있는데”, “좀 더 활용하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기회의 바람은 얼마든지 부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인간이 사물에 둔감해졌다는 증거다.
기회를 느껴도 자기 능력을 넘어서면 따라잡지 못하고 넘어질 수 있다. 놓치는 일을 줄이려면 평소 기회를 따라잡을 다리 힘과 순발력을 연마해야 한다.
기회는 약점을 찾으며 주위를 계속 움직인다. 기회만 아니라 운과 승패도 모두 움직인다.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면 기회와 운이 문득 빗나간다.
느끼는 힘의 기본은 좋은가 나쁜가, 즐거운가 불쾌한가라는 감각이다. 일상에서 그런 기본 감각을 기르는 일이 결국 기회, 즉 승기를 놓치지 않는 길이다.
악수로 이기려는 유혹을 끊어라
승부의 현장에는 반드시 ‘흐름’이 있고, 거기에는 올바른 흐름과 잘못된 흐름이 있다. 언제나 옳은 일만 하면 흐름을 탈 수 있을 만큼 승부는 단순하지 않다.
마작에서 흐름이 올바르면 올바른 패를 치면 된다. 하지만 잘못된 흐름에서는 때로 올바른 패를 쳐서는 흐름을 탈 수 없다. 오히려 잘못된 방식이 좋은 결말로 이어질 때도 있다. 다만 조건이 붙는 이야기다.
잘못된 흐름은 거친 바다와 같다. 바다를 잘 아는 전문 어부도 거친 파도에 휩쓸려 침몰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 있어도 잘못된 흐름이 된 파도를 헤쳐 나가지 못할 수 있다.
“바다가 거칠면 나가지 않으면 되잖아”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부도 당연히 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판단하고 나갔다가 야구의 불규칙 바운드처럼 갑자기 흐름을 바꾸는 상황을 만난다.
인간의 지혜로는 미치지 못할 흐름이 있다. 자연의 섭리와 도리 같은 것이며 모든 세계, 승부에도 통한다.
잘못된 흐름에서는 옳은 수보다 잘못되거나 나쁜 수가 좋은 결과를 낼 때가 있다. 그래도 그런 장면에서 나쁜 수로 이기려 하지 말고 차라리 패자가 되는 편이 낫다.
잘못된 흐름을 나쁜 수로 타면 나중에 올바른 흐름이 왔을 때 거기에 맞추지 못한다. 자기 힘은 올바른 흐름에 얼마나 잘 맞추느냐로 시험받는 것이므로 나쁜 흐름에 맞출 필요가 없다.
야구의 불규칙 바운드도 한 경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언제 생길지 모르는 일에 늘 대비하면 평범한 땅볼을 잡지 못한다.
잘못된 흐름이 눈앞에 나타나도 올바른 자세를 지키면 이윽고 올바른 흐름이 온다. 그때를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지지 않는다’는 일로 이어진다.
마작에서는 잘못된 흐름이 자주 생긴다. 그럴 때일수록 올바른 길을 배신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려운 잘못된 흐름 속에 있을수록 승부를 재미있게 느끼고, 판이 흐트러졌을수록 올바른 길을 관철한다.
괴롭고 힘들어도 참고 자기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올바른 흐름이 온다. 그것이 ‘지지 않는’ 기술이다.
얼마나 꾸밈없는 상태로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어.” “이런 일을 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
누구나 선입견·고정관념·편견에 사로잡혀 산다. 그것이 자기도 모르게 일상의 행동을 제한한다.
나는 사물을 볼 때 그런 감정과 관념을 마음 밖으로 버리고 꾸밈없는 상태에서 본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백지 같은 상태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이 힘을 주지 않고도 문득 가능해질 때가 있다. 꾸밈없는 상태에서 볼 수 있으면 그것이 ‘지지 않는’ 강함으로 이어진다.
나는 바다를 좋아해 시간이 나면 찾아간다. 자연과 만나는 곳은 내게 최고의 놀이터이자 오감을 단련하는 곳이며 쉬는 곳이다.
매년 여름방학이면 작귀회 회원들과 이즈 바다에 간다. 젊은 도장생들에게 “뭐라도 잡아 와”라며 잠수하게 하지만 30분, 한 시간이 지나도 먹잇감을 잡지 못한다.
내가 잠수하면 몇 분 만에 잡아 육지로 올라온다. 도장생들은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잡느냐고 놀란다.
나는 바닷속에서 꾸밈없이 사물을 본다. ‘본다’기보다 ‘느낀다’는 말이 맞다. 꾸밈없는 감각으로 느끼기에 남에게 보이지 않는 문어나 광어가 보인다.
남쪽 섬에 갔을 때는 바위에 숨어 있던 큰 매부리바다거북도 찾아 잡았다. 20미터가 넘는 깊이에서 바위와 한 몸이 된 거북은 위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지만 꾸밈없이 느끼려 하면 기척을 알 수 있다.
꾸밈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그때그때 장소에 ‘맞추는’ 일이기도 하다. 문어와 광어가 주변에 맞춰 몸 색을 바꾸듯 그곳에 맞춰 살아간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은 색을 바꾸지 못해 상황에 맞추지 못한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비위를 맞추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한 것에만 맞추며 거기에는 계산만 있고 자연의 흐름은 없다.
내가 말하는 맞춤은 편리한 것과 나쁜 것을 모두 포함해 상황 전체에 맞추는 일이다. 매일 그렇게 하다 보면 늘 꾸밈없는 상태로 사물을 보고, 그것이 강함이 된다.
속내를 드러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라
꾸밈없이 본다는 것은 자신을 편안한 상태에 두는 일이다. 인간은 꾸밈없을 때 가장 편안하고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승부에 강하고 지지 않는 사람은 긴박한 장면에서도 편안하다. 그래서 부드럽게 움직이고 생각하며 어떤 변화에도 대응한다. 늘 꾸밈없기에 자기 수를 태연히 드러내기도 한다.
승부에서 수를 감추는 것은 유효한 전략으로 여겨진다. 월드컵 때 강팀이 비공개로 훈련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몰래 준비하면 상대보다 앞설 수도 있다.
그러나 꾸밈없이 편안하다면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다. 지지 않는 사람은 자기 수를 드러내 약점을 들켜도 오히려 그 약한 부분으로 싸울 만큼 강하다. 그것이 진정한 강함이다.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 한쪽에서 이미 자기 약점과 불리함을 의식한다는 증거다. 마음에서는 이미 상대에게 조금 진 상태다.
그런 상태로 우연히 한두 번 이겨도 본질적으로 약하므로 승리는 오래가지 않는다.
반대로 지지 않는 승부를 하려면 벌거벗은 듯 꾸밈없이 있으면 된다. 그럴수록 강함과 가능성은 계속 커진다.
‘흔들리지 않는 축’을 만드는 법
힉슨 그레이시는 부드러운 움직임과 힘 빼기를 몸에 익힌 드문 사람이다. 많은 상대가 그가 힘을 뺀 채 누르는 것만으로도 꼼짝 못하다가 조르기나 관절기로 끝났다.
힘을 뺀다는 것은 낭비되는 힘을 없애는 일이다. 자기 안의 헛힘을 없애고 상대 힘까지 빼앗는다. 그러면 상대가 공격하는 힘을 흡수해 그대로 되돌릴 수 있다.
힉슨이 힘을 뺐을 때는 ‘축’이 훌륭히 서 있다. 그저 힘만 빼면 축이 흔들린다. 진정으로 힘을 빼는 일은 축이 선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축이 서면 흔들리지 않는다. 반대로 축이 없으면 몸이 흔들려 멀미와 불쾌감, 나쁜 몸 상태를 부른다. 그런 상태에 좋은 일이 생길 리 없다.
세상에는 파동·흔들림·흐름처럼 과학만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무수히 많다.
얼마 전 도장에서 찻잔에 비친 형광등 빛을 봤다.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큰 소리를 낼 때마다 빛이 흔들렸다. 사람의 존재가 이토록 떨고 흔드는 것임을 실감했다.
인간은 서 있는 상태가 좋다. 다만 꼿꼿이 굳어 선 모습이 아니라 흔들리는 형광등 빛처럼 부드럽게 흐름에 몸을 맡긴 느낌이다. 그런 감각이 되었을 때 비로소 축이 섰다고 할 수 있다.
건강한 사람이든 허리가 굽은 사람이든 몸에서 힘이 빠져 부드러운 상태라면 축이 서 있다. 정말 힘이 빠진 좋은 상태란 바로 그런 것이다.
‘흐름’을 축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강하다
어릴 때는 축이 선 사람이 주변에 꽤 있었지만 지금은 좀처럼 보기 힘든 귀한 존재가 되었다.
스포츠와 몸의 움직임은 ‘동’에서 시작한다. 움직여 강함을 얻고 상대를 움직여 승부에 이긴다. 그러나 그 위에는 ‘정’으로 상대를 움직이는 경지가 있다. 선의 달인에게 그런 고요함이 있다.
사람은 예상 범위를 넘는 움직임을 만나면 대처하기 어렵다. 그래서 고요함이 필요하다. 고요함을 알면 바로 당황하지 않고 어떤 일이 생겨도 침착하게 대응한다. 고요한 상태이기에 움직임 속에서 일어나는 일도 깨닫는다.
‘동’도 ‘정’도 넘어선 곳에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을 느끼는 사람은 강한 축을 지닌다.
바람·파도·강을 보면 자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그와 같은 감각을 자기 안에서 찾으면 자연히 축이 선다.
나무의 축은 어디에 있을까. 대부분 줄기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주관일 뿐이다. 나무는 줄기가 튼튼해서가 아니라 땅속에 뿌리를 단단히 내렸기에 선다. 나무의 축은 줄기가 아니라 대지 속에 있다.
축은 곧게 뻗은 한 줄이 아니다. 형태도 크기도 없으며 끝없이 퍼진다. 그 확장이 무한한 가능성을 낳는다.
‘형’에 집착하면 약해진다
무술에는 정해진 ‘형’을 배우고 완성하는 방식이 있다. 가라테·검술·합기도의 여러 유파가 그렇다. 사람들은 유파, 자기 스타일과 특기에 집착하며 ‘형에 들어가면 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분명 형은 승부에서 강점이 될 수 있다. “이 패턴으로 끌고 가면 지지 않는다”는 형이 때로는 힘이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집착하면 변화에 따라가지 못한다. 형은 고정관념이 되어 몸과 마음을 굳힌다. 유연성을 잃으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
승부든 세상이든 상황은 늘 변한다.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핵심이므로 형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형에 들어가면 강하다’는 말은 뒤집으면 ‘그 형으로 싸우지 못하면 약하다’는 뜻이다. 상황이 계속 변하는데 자기 형이 오기만 기다리면 진정한 강함을 얻지 못한다.
내가 주재하는 작귀회도 ‘작귀류’라고 불리지만 정해진 형은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승부와 인생에 관한 생각을 통틀어 그렇게 부를 뿐이다.
나는 도장생이 변화를 느끼고 대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도 날마다 변하는 그들에게서 배운다. 작귀류에서 중요한 것은 형보다 기본 동작과 유연한 사고·움직임이다.
내게 변화를 가르치는 스승은 자연이다. 바다 생물은 몸 색을 바꾸고 조류를 보며 자세와 움직임을 바꾼다. 자연과 만나며 사는 것은 변화하는 일 자체임을 배웠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사회와 주변 변화에 대응할 유연성이 없으면 숨이 막힌다.
그런데 많은 일본인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 “그 학교에 가지 않으면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없어”, “그건 우리 회사 방식이 아니야”, “이 월급으로는 살 수 없어”라고 말하며 몸을 굳히고 변화를 거부해 스스로 쇠퇴의 길로 간다.
일과 사고방식, 생활양식도 정해진 대로 하면 편하고 안심된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변화하지 않으면 약해진다.
‘깨달음’의 정도가 승부를 결정한다
손익 계산만으로 사물을 보지 말고 각자가 ‘깨달음’의 정도를 높이면 세상도 조금은 나은 쪽으로 갈 것이다.
지나치게 생각하는 세상은 ‘병’을 늘린다. 사회의 병, 인간의 병 등 여러 병이 계속 생긴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난다는 사실도 이를 보여 준다.
생각으로만 사물을 파악하고 행동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깨닫고 ‘느끼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 병들지 않고 살아날 사람도 분명 늘어난다.
많이 느끼고 깨달으려면 인간관계보다 앞선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다. 그 세계에서 깨닫는 일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거대한 자연에 가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도시를 스치는 바람에서 날씨 변화를 느끼고 길가의 꽃 한 송이에서 계절을 느끼는 것도 깨달음이다.
자연계는 본능의 세계이기도 하다. 자연에 가까워지면 인간의 본능도 깨어나고 잠들어 있던 본능이 움직인다. 그런 상호작용을 되풀이하면서 본능에서 깨달음이 나온다.
깨달을 수 있게 되면 사람은 원기·기력 등 여러 ‘기’를 자기 안에 지닌다. 다채로운 ‘기’를 지닌 사람은 이윽고 남을 배려할 수 있게 된다.
승부는 깨달음이 얼마나 많은가로 승패가 결정된다.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은 승부에도 강하다. ‘승리’만 구하지 말고 깨닫고 느끼는 감각을 연마하라. 그것이 지금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이다.
제3장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답’을 찾지 않는 강함을 가져라
누구나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공부한다. 거기에는 모두 ‘정답’이 있고, 현대사회는 정답을 많이 맞힐수록 좋은 학교와 회사에 들어가는 구조다. 그것이 ‘성공’이라고 칭송된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정답이 없는 세계에 산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지구란 무엇인가, 우주란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할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정답이 있는 것에 익숙해져 무엇이든 정답을 찾지 못하면 불안해한다.
내가 말하는 ‘강함’도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즉 정답이 없다. 강함만 구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정답이 없다는 사실 속에 오히려 ‘지지 않는 강함’이 숨어 있다. 자기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매뉴얼에 익숙한 현대인은 정해진 답이 없으면 불안해 견디지 못한다. 불안을 없애려고 바깥에서 확증과 보증을 찾기 시작한다. 지위·명예·돈·권력은 모두 외부에서 찾은 확증의 한 형태다.
이 세상에 사는 한 확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현대인은 확실한 것이 있다고 믿고 살기에 약해진다.
영리한 사람은 일을 확증과 보증에 연결하는 이유를 잘 만든다. 현대에는 그런 사람을 영리하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바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인간으로서 약해지는 법을 일부러 배우고 영리한 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라
확증이 없으면 불안과 공포가 생긴다.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어서 나도 확증과 보증을 바라는 마음이 조금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에 궁극적인 확증은 없음을 안다.
확증이 없다고 생각하면 답과 확신을 강하게 구하지 않게 된다. 확증을 찾는 것은 불확실한 세계의 공포에서 달아나려는 행동이며 인간의 근원적인 약함에서 나온다.
하지만 ‘확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그 약함을 조금씩 극복할 수 있다.
자연과학에는 정리와 공식, 정답이 있다. 어릴 때부터 그런 것을 배우면 확증은 당연히 존재한다고 느끼기 쉽다.
그런 사람이 실제 인생을 걸으면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에 번번이 배신당한다. 처음부터 확증은 없다고 생각했다면 별일 아닐 텐데, 확증에 의지해 살아온 사람은 조금만 배신당해도 좌절한다.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 이름난 대기업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들어가기만 하면 평생 안심이라고 여긴 회사들이다. 그러나 영원한 번영은 없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한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만으로 삶은 크게 달라진다. 고정관념에 갇히는 일이 줄고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그 부드러움은 틀림없이 사람을 강하게 한다.
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강인해야 한다. 그 강인함을 얻기 위해 먼저 ‘정답을 찾지 않는다’, ‘확증은 없다’는 마음을 가져 보면 어떨까.
제대로 매달릴 줄 알면 지지 않는다
내게는 손주가 몇 명 있고 집에 자주 놀러 온다. 손주들과 지내면 많은 것을 깨닫는다. 얼마 전 아직 아기인 손주가 부모의 관심을 바라며 우는 모습을 보고 “사람은 무언가에 기대는 생물이구나”라고 깊이 느꼈다.
아기는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부모에게 기대어 산다. 인간의 ‘기대는 정신’은 그렇게 어릴 때 몸에 새겨진다. 따라서 완전히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성장하면서 기대는 대상은 사랑·돈·친구·가정·일·취미·꿈·희망으로 바뀐다. 사람은 늘 무언가에 기대어 산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일흔이 넘어 제법 긴 인생을 걸었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아직 완전히 자립했다는 느낌이 없다.
누구나 기대어 살지만 기대는 방식과 형태를 잘못 잡으면 삶 자체가 치우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아주 어릴 때 부모에게 제대로 기댈 수 있었느냐가 이후의 방식을 결정한다. 아이가 원할 때 부모가 얼마나 받아 줄 수 있느냐가 큰 갈림길이다.
충분히 기대지 못한 아이는 깊은 불만을 품은 채 어른이 되어 ‘의존’이라는 뒤틀린 방식으로 기대고, 이윽고 중독으로 나타난다. 오타쿠와 마니아도 일종의 의존 상태이며 현대인 다수도 사랑·돈·일에 지나치게 기대는 중독자다.
기대는 마음은 당연하지만 지나치면 마음이 약해져 ‘기댐’이 ‘의존’으로 바뀐다. 마음이 약해지면 인생의 승부도 연달아 진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의존 상태임을 모른다. 약해져 지고, 져서 더 약해지는 일을 되풀이하며 의존을 심화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하지만 의존이 심한 사람은 정말 지푸라기에 매달린 것처럼 보인다. 지금 사회 자체가 지푸라기투성이다. 돈도 사랑도 지푸라기인데 거기에 매달려 살아날 수는 없다.
아이들이 기대는 어머니마저 ‘지푸라기 같은 부모’가 늘었다. 현대인은 본능이 쇠퇴했으며 여성 특유의 모성 본능도 약해진 것인지 모른다.
부모가 지푸라기라면 아이는 매달리다 몸을 망친다. 의존을 심화하며 인생의 균형을 깨뜨리고 패배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약해지고 패배가 쌓인 인생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자기 의존을 자각하고 치우침을 바로잡아야 한다. 나의 기대는 방식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는가, 의존이 되지는 않았는가 돌아보라.
자신을 지지 않는 상태에 두려면 각자에게 맞는 ‘제대로 기대는 법’을 익혀야 한다.
‘칭찬하며 키운다’는 말에 대한 의문
어느 교육 관련 기업의 강연에서 현대 교육 방침에 ‘칭찬하며 키운다’는 것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학생은 좋은 성적을 받아 칭찬받고 싶고, 교사도 우수한 학생을 길러 주변의 칭찬을 받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칭찬하며 키운다’는 방침을 가지면 제자를 지지 않는 사람으로 이끌 수 없다.
얼마 전 한 도장생에게 여성용 배꼽티를 선물받았다. 나는 일단 무엇이든 도전하는 편이라 물론 입어 보았다. 어울리는지는 별개로, 내게 그런 옷을 준 도장생의 마음과 유쾌함이 왠지 기뻤다.
얼마 뒤 아버지의 날에 도장생들에게 “아버지에게 배꼽티를 보내고 입은 사진을 받아 와라”라고 지시했다. 오랫동안 불효한 사람, 아버지가 완고한 사람, 부모와 완전히 소원해진 사람 등 관계는 제각각이었다.
“그런 걸 보내면 ‘이 바보야!’라고 화내실 게 뻔합니다”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해 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러자 입지도 않을 거라던 아버지들에게서 뜻밖에도 많은 사진이 왔다. 모두 좋은 미소를 지었고,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사람도 있었다.
상식으로 보면 중년·노년의 아버지에게 갑자기 여성용 배꼽티를 보내 입어 달라고 하는 것은 야단맞을 일이다. 출세하고 월급이 늘었다고 보고하면 칭찬받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감사 인사를 듣고 아버지가 좋아졌다는 사람도 있었다. 도장생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상했지만 그 옷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벽을 무너뜨렸다.
현대 교육에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런 ‘가르치는 감각’이지 우수한 학생을 만드는 비결이 아니다. “네가 잘되면 내가 기쁘다”는 식의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겉보기에는 쓸모없고 바보 같은 행동이 영리한 척 쌓아 온 벽을 무너뜨렸다. 아버지도 그 기쁨을 느꼈고 자식도 감동했을 것이다.
그동안 “그건 하면 안 돼”, “남 보기에 창피한 짓 하지 마”라고 잔소리하던 아버지가 몸을 던져 창피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이들이 감동하지 않을 리 없다. 거기에 현대 교육에서 빠진 중요한 가르침과 이끌어 줌이 있다.
‘칭찬’이 낳는 위험한 인간관계
애초에 ‘칭찬받으려는’ 인간관계는 이상하다. 자기 취향이 아닌 일도 억지로 하고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남자아이는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칭찬받으려고 할 바에는 차라리 하지 않겠다는 감각과 기개를 갖기를 바란다. 그것이 조금이나마 제대로 된 남자를 되찾는 길이다.
상사·교사·부모에게 칭찬받으려고 행동하는 아이가 늘었고, 그 ‘칭찬 사회’에서 낙오한 아이들이 여러 사건을 일으킨다. 칭찬받으려고 애쓴 사람이 조직의 윗자리에 서기에 문제도 생긴다.
오늘날 사람들은 칭찬을 구하는 한편 끝없이 남을 헐뜯으며 산다. 칭찬받고 싶은 사람은 칭찬이 끊기면 불평만 하게 되고 세상은 불만 제기자투성이가 된다. 그러니 칭찬하거나 칭찬받는 일을 구하지 말고 남을 헐뜯지 않으면 된다.
작귀회에서 나는 도장생을 칭찬하지 않는다. 적어도 전달 수단으로 칭찬하지 않는다. 상태가 좋아진 사람에게 “좋아졌네”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 과정과 자기 힘으로 좋아진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지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칭찬으로 죽인다’는 말처럼 칭찬에는 상대를 망가뜨리는 면이 있다. 상대를 살리려면 “좋아졌네” 정도의 감각이면 충분하다.
칭찬해야 하고 칭찬받아야만 하는 관계는 약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아주는 관계가 강하다. 지도자와 제자, 부모와 자식 등 여러 관계에서 그런 호흡이 가장 바람직하다.
정리하는 감각이 승부의 강함을 만든다
방을 정리하면 기분도 상쾌해진다. 물리적인 ‘정리’가 심리에도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 감각은 일과 인생의 승부에서도 중요하다.
승부에서는 상대를 먼저 정리해 끝낸 쪽이 승자이고 당한 쪽이 패자다. ‘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끝낸다’는 감각을 평소 지니면 지지 않는 일로 이어진다.
일과 생활에서도 빨리 정리하고 끝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늘 ‘때를 맞추고’, ‘끝내는’ 일을 의식해야 한다. 순간순간 여러 일을 깨닫고 행동해 처리하면 제때 맞출 수 있다.
끝내는 일에 익숙해지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더 많은 것을 깨닫는다. 그 좋은 순환을 유지하면 정리가 일상이 되고 승부에서도 좋은 결과로 나타난다.
상사나 배우자에게 “아직도 안 했어?”라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은 때를 맞추고 끝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정리하지 못하므로 승부에서도 정리당하는 쪽으로 간다.
일과 생활의 리듬에 맞춰 모든 것을 제때 끝내면 결과적으로 상대를 정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정리를 못했다면 우선 ‘때를 맞추는 일’부터 시작해 보면 좋다.
좋은 간격을 잡으면 우위에 선다
모든 대전 스포츠에서는 좋은 ‘마아이’, 즉 간격을 잡은 쪽이 주도권을 쥔다. 격투기라면 상대의 간격을 깨고 자기 간격으로 끌어들이면 매끄럽게 공격할 수 있다.
좋은 간격에는 거리감과 리듬이 중요하다. 아슬아슬한 거리를 지키며 순간적인 빈틈을 찌르려면 좋은 간격을 잡아야 한다.
앞으로 가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뒤로 움직일 줄도 알아야 한다. 좌우 움직임도 중요하다. 눈앞 한 점에만 집중하지 않고 앞뒤·좌우·위아래 여러 방향을 느껴야 한다.
간격은 ‘시간’이며 ‘거리’다. 좋은 간격을 잡는 사람은 거리와 시간의 가감을 잘 재어 상황마다 핵심을 찌르는 대응을 한다.
먼저 거리감을 잘 잡아야 한다. 붙었다 떨어지며 순간에 맞게 유연하게 대응한다.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과 비슷하다. 자연의 흐름에 거스르면 간격을 잴 수 없다. 힘을 뺀 채 흐름에 맡겨 가까워지고 멀어진다.
나도 아주 가끔 스스로 움직여 거리를 재지만, 대개 무언가에 밀리거나 끌리는 듯 흐름을 느끼며 간격을 잡는다.
시간과의 간격을 익혀라
시간은 그저 지나가고 그 끝에 ‘지금’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의식하는 순간 이미 지나가므로 머리로 붙잡을 수 없다. 따라서 그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감각이 중요하다.
시간의 간격을 잘 잡으려면 평소 ‘늦지 않는다’는 것을 의식하라. 일과 사적 관계에서 약속을 지키고 시간을 지키는 일이 쌓이면 제때 맞추게 되고 이윽고 좋은 간격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약속은 남보다 자기 자신과 하는 것이다. 남과 한 약속이라고만 생각하면 윗사람과의 약속은 지키고 아랫사람과의 약속은 깨는 차별이 생긴다. 그래서 자기와의 약속이 중요하다.
그 약속을 지켰는지는 스스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지켰다면 “좋아, 제대로 지켰어”, 못 지켰다면 “못난 녀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기가 가장 잘 안다.
자기와의 약속을 지켰다면 스스로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라. 훌륭하고 위대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어겼다면 스스로 꾸짖고 “미안하다”고 말하라. ‘고맙다’와 ‘미안하다’를 언제나 자기 안에 두는 것이다.
간격을 잡지 못하는 경제인
일상에서 거리와 시간의 간격을 잘 잡는 사람은 일과 스포츠에서도 좋은 간격을 잡는다. 반대로 승부에서 간격을 못 잡는 사람은 생활에서도 그렇다.
요즘은 사회 전체가 간격을 전혀 잡지 못한다. 경제가 대표적이다. 세계 모든 것이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복잡하게 얽혔고 하나가 무너지면 모두 무너진다.
특히 “돈은 되지만 별로 좋지 않다”는 일에는 확실히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많은 경제인이 그러지 못한다. 경제와 좋은 간격을 잡는 사람이 많았다면 세계경제에 불안이 이만큼 퍼지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이야말로 간격의 달인이다. 해가 뜨고 지며 달이 나타나는 것도 지구·태양·달의 간격이 맞기 때문이다. 숲의 풀과 나무, 동물과 곤충도 자연스럽게 간격을 잡고 산다.
일상에서 간격을 잡고 자연에서도 그 감각을 배워야 좋은 간격으로 지지 않는 싸움을 할 수 있다.
서투름은 ‘나쁜 흐름’으로 이해하라
자기 결점과 약점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누구나 안고 사는 큰 과제다.
어떤 책은 약점을 극복하기보다 장점을 늘리라고 가르친다. 서투른 것을 고치기보다 특기를 연마하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특기를 늘리겠다는 생각은 ‘이기고 싶다’는 의식의 연장선이며 끝없는 욕망이 엿보인다. 반대로 서투름을 극복하려는 것은 ‘지지 않는다’는 본능에 가깝다.
나는 특기를 연마하기보다 서투른 것을 극복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 상승효과로 자기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많으므로 해야 할 일도 더 많다. 나는 원래 역경을 좋아해서 서투른 것을 극복하는 쪽에 더 끌린다. 그렇게 자기 폭과 인간으로서의 입구를 넓혀 왔다.
잘하는 것은 ‘좋은 흐름’이라 그냥 두어도 자연스럽게 흐른다. 서투른 것은 ‘나쁜 흐름’이므로 방치하면 큰일이 난다. 잘함과 못함으로 나누지 말고 흐름으로 보면 무언가 보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흔히 못하는 것은 두고 잘하는 것만 키우라고 한다. 내게는 전문가가 자기처럼 입구가 좁은 전문가를 만들려는 말처럼 보인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며 도장에서 젊은이들과 인간의 길을 찾는 사람이다. 그래서 “못하는 일을 극복하는 편이 더 재미있다”고 가르친다.
서투른 것을 극복하면 잘하는 것도 늘어난다
잘하는 것을 늘려도 서투름은 고쳐지지 않지만 반대로 서투른 것을 극복하면 잘하는 것도 늘어날 때가 있다.
못하는 일을 극복하려면 궁리가 들어간다. 그 궁리가 결과적으로 잘하는 일까지 더 키우는 경우가 많다.
잘하는 것만 늘리려는 생각은 치우친 인간을 만든다. 본래는 잘함과 못함을 함께 보며 균형 있게 살아야 한다.
전문가처럼 고정관념과 집착을 가지면 거기에 매달려 다른 일과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무엇이든 단정하므로 사실은 잘할 수 있는 일도 서툴다고 믿고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음식도 어릴 때 맛없다고 느낀 것이 어른이 되어 맛있게 느껴질 때가 많다. 어른이 된 뒤 잘하게 되는 일도 분명 있다.
그것을 찾으려면 무조건 싫다고 밀어내지 말고 서투른 곳으로 발을 들여야 한다. 길이 열리면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성장한다.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전체가 자라는 편이 좋다.
개인만 아니라 세상과 학교의 학급도 한 사람보다 모두가 함께 성장할 때 더 즐겁고 재미있다. 서투른 것이 많다면 그중 손대기 쉬운 것부터 시작해 보라.
조화를 깨뜨리는 사람은 존재감이 약하다
열 명쯤 모이면 반드시 조화를 깨는 사람이 있다. 조화를 중시하는 작귀회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나는 그들을 쫓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조화를 깨는 일이 무엇인지 다른 구성원에게 알려 주는 반면교사로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행동은 강한 존재감이 아니라 본질적인 약함에서 나올 때가 많다. 배움은 좋은 것에서만 얻는 것이 아니다. 나쁜 것에서 배운 내용이 더 확실히 몸에 밸 때도 있다. 조화를 깨는 사람은 ‘필요악’이 아니라 ‘필요한 존재’다.
환경 때문에 그런 성질이 생겼다면 환경을 바꾸면 금세 고쳐진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새겨진 경우에는 스스로 고치려 하지 않는 한 외부 요인으로 바뀌지 않는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가 있었기에 생명을 오랫동안 이어 왔다. 서로 물들며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었다.
조화를 깨는 사람은 ‘개인’이라는 고집과 고정관념에 물들어 주변에 맞추고 분위기를 읽지 못한다. 사람과 어울리는 법이 서툰 것이다.
인간은 하나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남녀 둘이 있어 생명을 얻는다.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서로 반대되는 두 존재가 섞이고 물들어 태어난다. 태생이 그러하니 누구나 서로에게 물들어야 한다.
여기서 물든다는 것은 남의 색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익숙해지고 어우러진다’는 뜻이다. 그 자리에 어우러지면 조화와 인간적인 강함이 생긴다. 오케스트라가 조화로운 소리를 내듯 인간도 조화를 통해 아름다운 장을 만든다.
인간에게 양면성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겉과 속이 달라서는 안 된다고 하니 겉치레뿐인 거짓 인간이 태어난다. 인간은 양면을 모두 숨김없이 드러내고 살아도 된다. 그 위에서 장소에 어우러져 좋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진검승부에서 분노는 마이너스다
젊은 상담자가 “분노는 승부에서 플러스입니까, 마이너스입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프로레슬링에서는 반칙 공격을 받은 선수가 분노를 폭발시켜 이기는 장면이 있다. 스포츠를 오락으로 보면 극적이고 재미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검승부에서 분노는 마이너스일 뿐이다.
누구나 화가 나지만 일시적이어야 한다. 한 일에 계속 화를 품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분노는 냉정함을 빼앗고 눈앞만 보게 한다. 그러면 일과 인생의 흐름을 붙잡을 수 없고 승부에서도 스스로 지러 가는 셈이다.
상대가 분노를 던지면 나는 “재미있는데” 하며 일단 받아들인다. 그런 뒤 그 힘을 뒤로 흘려보낸다. 한 번 내 안을 통과시키면 분노의 성질이 보이고 여러 깨달음이 생겨 어떻게 싸울지 힌트를 준다. 상대의 분노가 내 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분노를 상대에게 던지는 것은 불리하다.
인간의 분노는 원래 지닌 ‘피해자 의식’에서 많이 나온다. 편안한 태내에서 바깥세상으로 내보내진 순간부터 피해자 의식을 갖기에 완전히 없앨 수 없다.
피해자 의식을 발판 삼아 애쓰고 능력을 키우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치면 왜곡이 생긴다. 그러므로 거기서 나오는 분노는 적당한 곳에서 억제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 안에 조금의 ‘가해자 의식’을 지녀야 한다. 피해자 의식을 억제하려면 필요하다. 다만 지나쳐 불필요한 혐오와 죄책감까지 지녀서는 안 된다. 아주 조금이면 된다.
가해자 의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상대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난다. “내게도 잘못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만 해도 여유가 생겨 피해자 의식에서 나온 분노가 상당히 가라앉는다.
누구나 분노와 괴로움에서 자신을 구하는 요령을 익혀야 한다. 남에게 구원을 찾으면 수상한 종교 같은 것에 의존한다. 자신을 구하려면 자기 손으로 해야 한다.
먼저 남을 돕기 전에 자기를 구하는 기술을 익혀라. 그것이 강한 마음과 힘을 기른다.
타인에게 의존하면 “세상이 나쁘다”, “너희가 나쁘다”고 생각한다. 대신 “나도 나쁘다”고 생각하라. 세상의 나쁜 어른 속에는 자신도 들어 있다. 그렇게 인식하면 가해자 의식이 조금씩 생긴다.
현대인은 늘 분노를 품는 것 같다. 남에게 속은 일 때문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도 종종 본다.
범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래도 사기를 당해 분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가해자 의식을 조금 가져 보는 것이 좋다.
속은 데에는 어떤 욕망이 얽혔을 수 있다. 선한 마음이나 맹목적인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였을 수도 있다. 사기꾼은 그런 마음의 결점과 약점을 교묘히 찌른다. 일을 여러 각도에서 보고 자기도 남의 약점을 이용한 적은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
“나는 늘 피해자다”가 아니라 “나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분노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타인의 일도 완전히 남의 일이 아니며 자신과 조금은 연결되어 있다. 그 의식을 지니면 적어도 분노에 사로잡혀 자기를 잃는 일은 줄어든다.
금기가 적을수록 강해진다
일본은 잡종성이 적은 순수 배양 사회인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깔끔하게 정리된 느낌이다. 도시도 너무 정돈되어 재미가 없고, 어디를 가도 특별한 개성 없는 미인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다.
나는 이 ‘말끔함’에 잘 어울리지 못한다. 더럽고 불편한 것을 제거해 만든 무균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곳에 사는 사람도 무균 상태에 익숙해 다른 균에 대한 면역이 없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다.
다른 균이 들어오면 무균 상태에서 자란 사람은 순식간에 당할 것이다. 몸과 마음을 강하게 하려면 바깥 공기와 다른 균을 받아들여 면역력을 높여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무균을 바라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인은 건강만 좇는 강박관념 같은 ‘청결병’에 걸린 듯하다. 건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은 담배·술·기름진 음식·매운 음식은 안 된다며 수많은 금기에 묶인다. 의학적 근거도 있겠지만 지나친 반응이 더 문제라고 느낀다.
무균 상태에서 생물의 생명력이 약해지듯 금지하는 것이 너무 많으면 인간도 약해진다.
유행하는 자연식도 진정 자연 그대로인 식재료는 일본 어디에도 없다. 무농약·유기농이라 해도 물과 흙은 이미 오염됐고 채소와 과일도 개량되어 본래 모습이 아니다.
농약과 첨가물이 넘치는 환경은 문제지만 지나치게 예민하면 현대 식환경에 대한 면역력을 잃고 마음의 건강까지 해친다.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 훌륭한 것과 못난 것이 섞인 세계에 산다. 나쁘고 못난 것을 단순한 마이너스로 배제하는 풍조는 위험하다. 그 안에도 자신을 강하게 해 줄 것이 반드시 있다.
엄격하게 금지하지 말고 느슨한 마음으로 대응해 입구를 넓혀라. 금지하는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약해진다. 현대인은 스스로 금지하려는 행동 자체를 더 금지해야 하지 않을까.
제4장 역경을 돌파하는 힘
‘기회’와 ‘승부처’는 다르다
나는 역경을 아주 좋아한다. 마작에서도 남들이 위기라고 하는 상황이 오히려 “좋아, 해 보자”는 활력을 준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는 말에는 심리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위기를 맞은 쪽은 어떻게든 견딘 뒤 마음을 새롭게 하고 다음 공격에 도전한다. 반대로 위기로 몰아넣은 쪽은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고 낙담하고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다음 위기를 스스로 부른다. 승부는 이런 기회와 위기의 반복이다.
하지만 ‘승부처’는 기회나 위기와 차원이 다르며, 지지 않는 사람은 승부처에 강하다.
진정한 승부처는 위기 중의 위기, 압도적으로 불리할 때 찾아온다. 마작이라면 나를 뺀 세 사람이 모두 리치한 상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세 사람의 리치에도 겁먹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 상황을 견뎌 냈을 때의 성취감은 평범한 승리에서는 느낄 수 없다. 그것이 진정한 승부처다.
큰 점수를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승부처이기에 모든 것을 건다. 세 사람이 높은 점수로 앞서고 내가 작은 점수만 낼 수 있어도, 그 리치를 뚫고 화료했을 때의 감각과 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많은 사람은 자기 상태가 좋을 때를 승부처라고 생각한다. 내게 승부처는 최대의 역경, 지면 피해가 아주 큰 상황이다. 내가 우세할 때가 아니라 상대가 승부를 걸어왔을 때 찾아온다.
상대의 빈틈을 보고 치고 나가는 것은 승부처가 아니라 기회다. 승부처는 그보다 위에 있다.
승부처에서 힘을 내는 법
내가 70, 상대가 30으로 유리할 때 승부를 거는 것은 승부처가 아니다. 반대로 상대가 70, 내가 30으로 불리할 때가 승부처다.
여러 위험과 불리함이 있기에 그때 온몸과 온 마음으로 맞서야 하고, 평소에는 낼 수 없는 벼랑 끝의 힘이 나온다. 보통 50킬로그램만 드는 사람이 화재 현장에서 80킬로그램을 드는 힘이 나오면 처지를 뒤집을 수 있다.
불리한 상황도 견뎌 이긴다. 다만 평소에도 불리할 때 외면하지 않고 대처하는 생활 태도가 있어야 결정적인 순간에 대응할 수 있다.
나는 일부러 불리한 곳에서 방법을 찾아 이기는 승부를 좋아했고 그것이 승부처의 힘을 연마해 주었다.
승부처는 초반·중반·후반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므로 언제든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
유연하게 움직이려면 흐름을 느껴야 한다. 마작에는 부모패의 흐름, 큰 흐름과 작은 흐름이 있다. 큰 흐름에 작은 수로 화료해도 타지 못하고, 작은 판에 큰 수를 노려도 잘되지 않는다.
폭우가 5분 뒤 가랑비가 될 때도 있는데 그 5분을 못 기다리고 뛰어나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 때를 못 맞추는 사람은 흐름을 느끼지도 맞추지도 못한다.
잔잔한 판과 거친 판이 있다. 거친 판에서는 그 흐름을 타고 거친 수를 쓰고, 작은 판에서는 흔들리지 않게 친다. 큰 패가 왔다는 욕심만으로는 당시 흐름을 타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 자리의 흐름에 맞추되 승부처가 오면 과감하게 공격하라. 진정한 승부처에서 계속 싸우면 틀림없이 지지 않는 사람이 된다.
실수의 재미를 맛보라
실수에 관한 글은 대개 실수는 반성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상식을 전제로 한다. 나는 실수를 반성하기보다 오히려 기꺼이 마주하는 자세를 취한다.
승부에서 한 번의 실수에 끌려다니다 그대로 무너질 때가 있다. 실수에 사로잡혀 자멸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수는 반드시 크고 작은 손해를 낳는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만이 아니야. 상대도 반드시 실수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자기 실수를 가능한 작게 만들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누구나 실수하므로 후회하고 비난하기보다 상처가 넓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의 실수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주사를 맞을 때 아이는 공포와 불안에 먼저 사로잡혀 아픔을 두세 배 크게 느낀다. 어른은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덜 아프다.
실수도 같다. 아픈 것은 당연하고 실수도 당연하다. 정신적으로 억제해 더 커지지 않게 하면 된다.
실수했을 때 “큰일이다”라고만 하지 않고 그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실수가 살아난다. “내가 이런 실수도 하네. 재미있군”이라고 여유를 가지면 나중에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실수한 뒤가 갈림길이다
실수한 사람이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지만 실수는 몇 번이고 일어난다. 같은 것은 아니어도 모양과 정도가 다른 실수를 인간은 반복한다.
그러므로 다시는 안 하겠다고 생각하기보다 실수를 재미있게 받아들이면 수가 반드시 줄어든다.
실수 하나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만든 상처를 넓히느냐가 중요하다. 숨기거나 남 탓하고 변명하면 상처가 커지고, 실수는 거짓말이라는 더 큰 것으로 바뀌어 패배를 부른다.
실수를 줄이려면 먼저 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잘못했다면 단순하게 사과하고 빨리 다음 일을 하라.
받아들이지 않고 미루면 같은 일이 두려워져 하지 못하고, 결국 다른 실수를 부른다. 실수에서 달아나는 행동이 연속된 패배의 계기가 되어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실수 뒤에 승자와 패자의 갈림길이 있다. “미안해, 잘못했어. 한 번 더 하게 해 줘”라는 감각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같은 실수는 절대 안 합니다”라고 하면 압박과 긴장이 들어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위험을 감수하라
구기 종목에서 ‘잡기 어려운 공을 잡으러 가는’ 감각은 중요하다. 쉽게 잡을 공을 놓치는 실수와 어려운 공을 잡으려다 놓치는 실수는 성질이 전혀 다르다.
실수할 법한 영역에 스스로 뛰어드는 일이 발전으로 이어진다. 어려운 일에 도전해 성공해야 비로소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할 수 없을 것 같은 영역에 뛰어들려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위험을 즐기려 하면 내면의 잠재력이 나온다.
가능성을 넓히려면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을 택하는 삶이 필요하다. 실수할 영역에 발을 들여 거기서 실수를 줄여 가는 일이 자신을 성장시킨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안전지대가 아니라 실패할 수도 있는 영역에서 한 실수만 성공으로 이어진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듯 실수도 사서 할 정도의 마음가짐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다.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가지면 세상의 승부가 좋은 방향으로 간다. 특히 지도자와 책임자에게 중요하다. 실수에도 좋은 실수와 나쁜 실수가 있다. 의욕 있게 하다가 나온 것인지 무성의한 부주의인지 가려내야 한다.
긴장은 머리 뒤쪽에 둔다
나는 긴장을 많이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긴장하는 자리에 자주 서야 하며 어느 정도 긴장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해도 재미없다.
긴장은 머리 앞, 이마 근처에 나타나 시야를 가린다. 그럴 때 뒤쪽으로 보내면 된다.
먼저 무엇 때문에 긴장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잘하려고, 실패하지 않으려고 긴장한다면 그 생각을 뒤로 보내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 돌아온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아”라고 생각한다.
속이려는 생각 때문에 긴장한다면 그것도 뒤로 보내 버려라. 속임은 오래가지 않으니 빨리 버리는 편이 낫다.
나는 도장생에게 두 손으로 얼굴 앞을 가렸다가 양옆으로 한꺼번에 펼쳐 시야를 넓히게 한다. 얼굴을 가린 때가 긴장이고 손을 뗀 때가 이완이다. 평소 이런 연습만 해도 긴장이 가라앉는다.
앞만 의식하고 성공과 타인의 시선만 신경 쓰면 긴장이 앞으로 나온다. 그런 의식은 모두 뒤로 보내면 된다.
또 긴장을 없애려고 하기보다 ‘부드럽게 긴장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딱딱한 긴장은 마음을 가두지만 부드러운 긴장은 마음을 퍼뜨려 자유롭게 한다.
잘하려는 마음, 좋은 모습을 보이려는 마음, 이기려는 마음을 걷어 내고 “지금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면 된다”고 생각하라. 좋은 것과 못난 것을 모두 포함한 자기 크기 그대로 있으면 된다.
이 부드러움은 긴장한 순간 갑자기 만들 수 없다. 평소 생각과 몸의 유연성을 소중히 해 부드러운 상태를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평소부터 긴장감 속에 몸을 두어라
심하게 긴장한 사람에게 “릴랙스”라고 말해도 풀리지 않는다. 몸의 상태이므로 말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가장 굳은 부위를 직접 만져 풀어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어깨가 굳으면 어깨, 무릎이면 무릎을 만지면 긴장이 빠진다.
긴장과 가까운 ‘긴박감’은 좋은 승부에 중요하다. 평소 긴박한 상황에 몸을 두면 거기에도 차츰 익숙해진다. 반대로 늘 두려워하면 조금만 긴박해져도 무너지는 약한 사람이 된다.
누구나 거리와 시간을 이용해 자신을 몰아붙여 긴박감을 만들 수 있다. 달리기에서 20분에 돌던 거리를 15분에 돌고, 한 시간에 열 쪽 풀던 문제집을 열다섯 쪽 푸는 식이다.
애초에 영리한 척하거나 자기 능력 이상의 일을 잘해 보이려 하기에 긴장한다.
‘부끄러움’을 오해한 사람도 긴장에 사로잡힌다. 남이 즐거워 웃는 것도 자기를 비웃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내 실수로 모두 웃는다면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기를 재미있고 즐거운 상태로 만들면 긴장에 속거나 삼켜지는 일도 줄어든다.
적절한 온도에서 ‘그만둘 때’를 판단하라
인간은 실수하는 생물이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실수하기에 인간이며 여러 드라마도 생긴다. 물론 실수는 적을수록 좋고 지지 않는 기술에는 상대보다 실수를 줄이는 일도 포함된다.
실수를 되풀이해 “이제 틀렸다”고 너무 일찍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우세할 때 “이제 이겼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다. 둘 다 승부를 중간에 던지고 가능성을 좁힌다.
“이만하면 됐다”보다 “아직 더 좋아질 수 있다”고 계속 생각해야 한다. 이쯤이면 됐다고 느낀 순간 한 걸음 더 버티는 일이 중요하다.
다만 승리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주의해야 한다. 욕망에는 한도가 없어 납득하지 못하고 열 걸음, 스무 걸음까지 더 버틴다. 애써 이겨도 만족은 없고 종착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다시 욕망을 좇는다.
그러므로 성공의 바로 앞에서 멈추는 판단도 중요하다. “성공은 여기까지고 이 너머는 실패다. 위험하다”는 판단이다. 욕망에 사로잡히면 물러날 때를 몰라 깊이 빠진다.
운동선수가 젊어서 은퇴하거나 마흔이 넘도록 계속하는 차이는 단순한 물러날 때보다 각자의 성품에서 온다. 좋을 때 그만두는 사람은 대개 다른 일을 하고 싶어진 사람이다.
마흔이 넘어서도 현역으로 던지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구도 기미야스 투수는 자기 성품 때문에 계속한다. 과거의 영광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젊을 때보다 필사적으로 땀 흘리고 연습한다. 나는 그가 끝까지 버텨 주기를 바란다.
물은 100도에서 증발해 액체에서 기체로 변한다. 성공과 실패의 경계도 비슷하다. 무분별하게 성공을 좇아 정도를 넘으면 성공도 증발해 흔적 없이 사라진다.
인간 체온에 적정 온도가 있듯 모든 일에 적온이 있다. 그것을 무시하고 과열되면 승부와 인간관계 모두 나쁜 형태로 바뀐다. 제대로 그만둘 때를 아는 사람은 적정 온도에서 균형을 지킬 줄 안다.
일부러 상대의 특기를 받아들인다
프로레슬링은 상대 기술을 받아 줘야 제맛이다. 일부러 특기를 받은 뒤 되돌려 주는 반복이 묘미다.
나도 마작에서 일부러 상대의 특기에 걸릴 때가 있다. 상대 특기를 아는 일이 나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승부에서 성장하려면 자기만 살려서는 안 되고 상대도 살려야 한다.
비열한 수가 특기인 사람도 있다. 뒷세계 마작 시절 그런 상대와 여러 번 싸웠다. 당시 나는 상대가 더러운 수를 쓰면 한 단계 더 더러운 수로 짓눌렀다. 독으로 독을 제압한 것이다.
그러나 자랑할 일이 아니다. 더 더러운 수를 쓰는 내가 너무 싫었고 그런 승부에 진저리가 난 것도 대타 승부를 그만둔 이유 중 하나다.
독으로 독을 다스리는 방식은 추하다. 그저 더러운 수에 어울리지 않으면 된다. 어울리면 내가 더 지저분한 인간이 되며 좋은 승부라 할 수 없다.
상대의 훌륭한 특기는 기꺼이 받아 주되 더러운 특기에는 올라타지 마라. 그래서 질 때도 있겠지만 “더러운 인간이 되지 않아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참된 성장은 좋은 승부만 가져온다.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승부에는 수비와 공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지킨다’는 입장이 없어야 한다고 본다. 수비 자세는 이미 도망치는 상태다. 수비가 좋은 야구를 지키는 야구라 칭찬하지만 도망치는 야구로는 끝내 우승하기 어렵다.
내가 감독이라면 수비 때 “잘 지켜라”가 아니라 “지키는 것도 공격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지키는 마음일 때 공격받으면 버틸 수 없다. 노림당하고 쫓긴다고 느껴 달아나려 하며 더 불리해진다. 다음 공격도 늦어진다. 멀리 달아났다가 돌아와 공격하는 일을 반복하면 상대와 싸우기 전에 쓰러진다.
인간은 말에 사로잡히므로 ‘수비’라고 생각하면 약점과 결점을 감추려 한다. 대신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라.
공격에 부드럽고도 엄격하게 대응하는 것이 기본이다. 유도도 낙법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크게 다치고, 합기도도 상대 기술을 ‘받는다’고 한다. 상대의 공격력을 깎아 다음에 내가 공격하기 쉽게 하는 공격인 셈이다.
공격하는 마음으로 상대 공격을 받는 한 수비는 없다. 지지 않는 승부에는 지킴보다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항상 공격하는 마음을 가지면 강해진다. 궁지에서 견뎌야 할 때 “괴롭다”, “어떻게든 해 줘”라고만 생각하면 거기서 패배다. 괴롭다고만 생각하면 인내에 한계가 있다.
견디는 일을 ‘재미있다’고 느껴야 한다. 그러면 수동적인 인내가 공격적인 인내로 바뀌고, 역경에서 화재 현장의 괴력 같은 잠재력이 나와 활로가 열리기도 한다.
야구에서 지는 팀의 투수가 타선 지원을 기다리며 끈질기게 호투하면 9회에 역전할 때가 있다. 포기하지 않는 공격적 투구가 동료에게 전해져 타선에 불을 붙인 것이다.
벼랑 끝에서도 모든 감각을 갈고닦아 앞을 냉정하게 내다보게 하는 것이 공격하는 마음이다.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일치시킨다
마음·기술·몸이 일치해야 진정한 강함이 나온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기술과 몸이 좋아도 높은 수준에서 안정되지 않는 선수는 마음가짐이 미숙하다.
고교야구에서 활약해 높은 순위로 프로에 들어가고도 별 활약 없이 은퇴하는 선수가 많다. 부상과 고장도 있지만 마음가짐이 미숙한 채 프로 세계에 적응하지 못해 도망치듯 떠나는 경우도 있다.
어떤 프로 세계든 승부에 대한 동경만으로는 일선에서 버틸 수 없다. 수많은 욕망에 지지 않는 강한 마음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승부에서는 마음과 몸의 일체감이 중요하다. 그것이 있으면 상대와 승부의 장과도 하나가 된다. 그러나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제대로 서야 한다. 둘은 끝내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신을 중시하지만 정신보다 몸이 먼저다. 태내에서 생명이 자랄 때는 정신 없이 몸만 있다. 그 몸이 바깥세상과 만나며 정신이 생긴다.
인간은 정신보다 몸이 먼저인 존재이므로 마음가짐보다 먼저 몸가짐을 살펴야 한다. 몸가짐이 바로 서면 마음도 자연히 바로 선다. 도장생에게 부드러운 움직임을 요구하는 까닭은 움직임이 부드러워지면 생각도 부드러워짐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자연의 생물은 모두 저마다 아름다운 몸가짐을 지닌다. 상어·호랑이·새는 본능대로 자연의 시간 속에 몸을 흘려보내며 산다.
바른 몸가짐은 힘을 꽉 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부드러운 상태다. 그것을 만들려면 가능한 한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깊이 생각할수록 사로잡혀 몸과 마음이 굳는다.
굳은 신념과 의지가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굳은 사람은 위험하다. 다른 굳은 사람과 부딪치면 서로 다치고 주변에도 악영향을 준다. 부드러운 사람끼리의 충돌은 영향이 그렇게 퍼지지 않는다.
부드러움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어느 세계에서든 뛰어난 일을 한다. 이치로도 몸과 마음과 기술이 일치한 채 늘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유연함을 의식한다. 부드러움 자체가 큰 가능성을 품는다.
몸 전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강하다
몸이 굳은 사람은 어떤 동작에도 일부만 쓴다. 부드러운 사람은 몸 전체를 유연하게 쓰지만 굳은 사람은 특정 부위에만 부담이 걸리는 어색한 움직임을 한다.
나도 몸이 부드럽다는 말을 듣지만 스트레칭이나 체조를 따로 하지는 않는다. 생활에서 무슨 일을 하든 몸 전체를 쓰려고 할 뿐이다.
현대인, 특히 도시인은 대부분 몸이 굳었다. 생활양식과 습관 속에서 몸 쓰는 방식을 정형화했기에 평생 쓰지 않는 부위가 쓰는 부위보다 더 많다.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의 움직임에는 도시인 같은 치우침이 없다. 몸 전체를 균형 있게 쓰며 부드럽게 흐르듯 움직인다.
인간의 몸은 전체를 움직일 때 엄청난 힘을 낸다. 모든 부분이 연결되어 부드럽게 움직이면 단순한 합계를 넘는 힘이 된다.
내가 가르치는 마작 기본 동작에도 ‘부드러운 동작’이 있다. 패를 부드럽게 쥐고 빠르면서 유연하게 친다. 최단거리로 치기 위해 팔을 지나치게 올리거나 당기지 않으며 손끝만 아니라 패와 몸이 하나라는 감각으로 상체 전체를 쓴다.
그렇게 하면 굳었던 도장생도 차츰 부드러워지고 자세와 동작, 마음의 경직도 풀린다.
마작할 때만 의식해서는 한계가 있으므로 평소 생활에서 몸 전체를 쓰게 한다. 도장에서도 전신을 쓰는 움직임과 놀이를 많이 한다.
몸과 마음은 끝내 일치하므로 몸이 부드러우면 마음도 부드러워진다. 어린 시절의 초심을 떠올리는 것도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한 방법이다. 지금 지위와 명예가 있어도 기대지 말고 자신도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을 마음 한구석에 두면 굳지 않는다.
딱딱함을 강함으로 착각하기 쉬운 현대인은 몸과 마음 모두 부드러워지도록 애써야 한다.
편안함을 찾으면 빈틈이 생긴다
자기보다 아래라고 여기는 상대와 싸우면 ‘쉽게 이기겠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약하면 승리 기회가 늘 수 있지만 싸우기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면 뜻밖의 패배를 부른다.
압도적으로 유리하던 팀이 지는 것도 방심이 만든 빈틈을 찔렸기 때문이다. 불리한 팀은 잃을 것이 없다는 각오로 공격하므로 빈틈을 보이면 아래 상대에게도 진다.
경제에서도 업계 선두라는 안도와 우월감에 젖어 쇠퇴하는 기업이 많다. 해이해진 체질로 경쟁사에 추월당하고 인수되기도 한다.
실력도 없으면서 쉽게 이기려 하면 정말 비참해진다. 그런데 사회의 많은 사람이 “편하게 벌자”, “편하게 이득 보자”는 가치관으로 쉬운 승리만 찾는 듯하다.
편안함만 찾으면 힘든 상황을 견디고 넘는 힘이 자라지 않는다. 어려움에서 달아나고 자기를 속여 성장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는 경쟁과 복잡하고 성가신 관계가 있어 사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도 자연계의 압도적인 가혹함에 비하면 노력하고 견뎌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정도다.
눈앞에 쉬운 길과 힘든 길이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힘든 길을 고른다. 쉬운 길을 골랐다면 아마 내가 약해져 생기 없이 살 때일 것이다.
힘든 길을 걷는 사람은 단련되어 강해지므로 다음 힘든 길은 편하게 걸을 수 있다. 쉬운 쪽만 고르면 힘든 일은 영원히 힘든 채다.
평상심이 있으면 수정하는 힘이 강해진다
요즘은 고장 난 텔레비전이나 녹화기를 수리하러 가면 새로 사는 편이 싸다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고치는 의미와 가치를 잃었다.
기계는 스스로 고칠 수 없지만 인간은 자신을 고칠 힘이 있다. 나는 이를 ‘수정력’이라 부른다.
상태가 좋을 때는 누구나 이길 수 있다. 문제는 나쁜 상태에 빠졌을 때 어떻게 고쳐 지지 않는 싸움을 하느냐다. 수정력은 승부뿐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중요하다.
자기를 고치려면 먼저 상태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자각력이 있어야 한다. 자각력과 수정력을 함께 가져야 자신을 고칠 수 있다.
수정력이 있는 사람은 고쳐야 할 곳을 빠르게 느끼고 일찍 손봐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나쁜 상태에 빠져도 오래 걸리지 않아 벗어난다.
하지만 현대인은 수정력이 약해졌다. 본능적인 힘인데 세상이 편리해지며 본능과 함께 쇠퇴했기 때문이다.
수정력을 강하게 하는 또 하나는 평상심이다. 큰일 앞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중요하다.
평상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기보다 일상이라는 ‘평상’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다. 일상의 사소한 일도 정성껏 다루고 ‘준비·실행·뒷정리’를 당연하게 해낸다. 그렇게 연마한 일상이 있어야 평상심이 생긴다.
평상의 마음이 있으면 일이 생겨 흔들려도 곧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좋은 수정력에는 그런 평상심이 필수다.
제5장 누구나 무적이 될 수 있다
마침내 도달한 ‘적조차 내 편’인 경지
나는 20년 동안 뒷세계 마작에서 대타 승부를 했고 단 한 번도 지지 않은 채 은퇴했다.
지금은 아름다운 싸움을 바라지만 젊을 때는 승리에 집착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계속 이기고 승리에 매달리는 일이 괴로워졌다. 승리 뒤에는 패자의 슬픔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작을 하며 패자 너머의 삶과 가족, 아내와 아이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내 아버지의 존재도 느꼈다.
어릴 때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어머니를 늘 울렸다. 어머니를 좋아한 나는 도박과 아버지를 미워했다. 어느새 패배한 상대 너머에서 그런 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내 승리의 기쁨보다 패자의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아버지가 느꼈던 슬픔인지도 모른다.
대타 시절 나는 ‘무패’였고 어느 날 주변에 말 그대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톨이라는 뜻은 아니다. 실제 대국 상대는 있었지만 차츰 ‘적도 내 편’이라는 감각이 싹텄다. “이긴 사람도 나이고 진 사람도 나다”, 승리의 뒤편에는 패배한 내가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적을 마작을 함께해 주는 동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료를 위해 좋은 마작을 치자고 생각하면 좋은 답이 돌아올 때가 있다. 적을 적으로만 여겼다면 분명 어딘가에서 졌을 것이다.
대타 시절에는 이 생각을 뚜렷이 인식하지 못했다. 은퇴하고 작귀회를 시작한 뒤 ‘적도 내 편’이라는 어렴풋한 생각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그 뒤로 단순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좋은 승부를 하려고 했다. 승패보다 좋은 승부를 하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가르침을 잇는 도장 시합에서는 승자보다 패자가 더 높이 평가되는 일이 많다. 이겨도 더러운 방식이면 누구도 칭찬하지 않는다. 반대로 아름다운 마작을 끝까지 한 패배라면 높이 평가한다.
자기 화료만 생각하지 않고 얼마나 좋은 방총을 하는지, 상대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주는지도 평가한다. 자기가 얻기만 하는 더러운 마작은 안 된다.
이기려고 비열한 수와 교활한 수단을 쓴 사람은 크게 이겨도 인정받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끝까지 화료와 방총, 얻음과 내줌의 균형이다.
‘결과가 전부’라는 말은 패자의 논리다
세상은 결과가 전부라고 하며 승리에 절대적 가치를 둔다. 자기만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는 형태다.
그런 승리는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을 낳는다. 승자 아래에는 수많은 희생자가 있고 그만큼 슬픔과 고통이 생긴다.
세계 제일의 승자를 지향해 온 미국은 승리 지상주의 끝에 세계적인 대불황을 낳고 스스로 그 파도에 삼켜졌다.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다. 당사국 사이의 승패가 있어도 인간 전체로 보면 패배일 뿐이다. 전쟁 자체가 이미 패배다. 미국은 아무리 전쟁에서 이겨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패전국이다.
현대사회는 기업 경쟁에서 스포츠까지 미국식 승리 지상주의가 퍼졌다. 결과만을 최고로 삼고 승리만 목적으로 하는 추한 싸움이다.
과거 스포츠에는 멋진 승부를 보여 준 상대라면 패자도 칭송하는 풍조가 있었다. 지금은 팀과 선수에게 거액이 흘러들어 오직 승리만 좇는 재미없는 것이 되었다.
일본의 국기이자 신사 의식의 성격도 지닌 스모는 단지 이기는 것뿐 아니라 지위가 높을수록 행동·말·싸움 방식에 품격을 요구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강하기만 하고 품격 없는 선수가 높은 자리에 올라 아래 선수에게 거친 기술로 이기기도 한다. 스모에도 승리 지상주의가 퍼진 듯하다.
승부란 무엇인가, 이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
자연의 생명은 모두 사슬처럼 이어져 있다. 죽은 동물은 흙으로 돌아가 식물을 기르고, 식물은 다시 동물의 먹이가 된다.
내어 주는 일과 받는 일을 균형 있게 순환시키는 것이 자연의 주기다. 먹이사슬에는 상대에게서 일방적으로 빼앗는 승리 지상주의가 없다.
인간은 자연을 본받아 내어 주고 나누고 순환시키는 의미를 배워야 한다. 그래야 스포츠·일·인생 곳곳의 승부에 진정한 품격이 싹튼다.
승패보다 중요한 ‘승부 감각’
대타 승부를 그만둔 지 20년 넘게 지났다. 변한 부분도 많겠지만 변하지 않은 것 중 하나가 나의 승부 감각이다.
그 감각은 어린 시절 놀이에서 형성되었고 그것이 통했기에 마작을 했다.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할 감성이므로 어디서든 작동한다.
일상의 작은 일 하나하나가 모두 승부다. 내게 사는 일 자체가 승부이기에 승부 감각이 필요하다. 어릴 때 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승부였고 그 감각은 몸에 깊이 뿌리내렸다.
어릴 때 매일 승부를 하다 드물게 나와 비슷한 감각의 아이를 만났다. 아이들 승부는 몸을 많이 움직이지만 운동신경이 좋다고 승부 감각도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이 녀석은 할 줄 아네”라고 느낀 아이는 승부 감각이 있는 움직임을 했다.
대부분은 세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만 승부 감각이 있는 사람은 세로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가로로도 움직일 수 있다. 그런 선수는 앞뒤좌우가 모두 들어간 축으로 움직여 몸이 움직여도 축은 흔들리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그런 몸놀림을 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좋은 승부 감각을 기르는 일은 중요하다.
내가 말하는 승부 감각은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져서 주변이 기뻐하고 흥이 난다면 기꺼이 진다. 다만 대개 내가 이기는 편을 더 좋아했기에 이겨 왔을 뿐이다.
나는 주변 사람에게 괴롭고 지루한 기분을 주고 싶지 않다. 젊은이들이 도장을 재미없다고 하면 내 패배다. “역시 회장님이 있으면 재미있어”라고 해야 비로소 승리의 기분을 느낀다.
세상에는 물건과 돈이 움직이는 승패가 넘친다. 물건과 돈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시시한 승부에 일희일비한다. 그런 승부 감각에는 축이 하나뿐이지만 좋은 승부에는 축이 많다.
물건과 돈이 움직이지 않아도 승패 속에서 모두의 마음이 기분 좋은 쪽으로 움직이면 된다. 세상의 일반적인 감각과 전혀 다르지만 그것이 나의 승부 감각이다.
어떤 습관이 결단력을 높인다
“나는 우유부단합니다”라는 말은 들어도 “나는 결단력이 있습니다”라는 말은 드물다. 자랑처럼 들려서인지, 정말 그런 사람이 적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우유부단한 사람도 결국 결정은 한다. 결단은 결정하고 판단하는 힘이므로 누구에게나 있고, 다만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다.
아는 일은 빨리 판단하고 모르는 일은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결단에 시간을 들이면 잡념이 들어와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모르는 일도 가능한 빨리 결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평소 빠르게 결정하는 경험을 쌓고 준비해야 한다. 순간 결단을 위해 인간의 안테나와 감각을 날마다 갈고닦는다.
작귀회에서 패를 1초 안에 치는 규칙도 그런 감각을 위한 훈련이다.
결단력이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 중에는 기존 지식과 정보로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진정한 결단력이 아니라 고정관념에 따른 순간 판단일 뿐이다. 결단은 과거와 대조하는 일이 아니다.
진정한 결단력은 ‘결단하는 감각’을 거듭 쌓아야 생긴다. 평소의 축적, 즉 준비가 그 감각을 뿌리내리게 한다.
내가 가르치는 ‘준비·실행·뒷정리’에서 결단은 준비와 실행 사이에 있다. 결단만 떼어 연마할 수는 없다. 준비하고 실행하고 뒷정리한 뒤 다시 준비하는 순환을 일상에서 반복해야 한다.
그러면 결단력뿐 아니라 없던 다른 힘도 자연히 자란다. 그것이 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노력이다.
전문가보다 만능가를 지향하라
전문가는 존경받지만 한 가지에만 몰두하면 치우친 인간이 된다. 한 생각과 고정관념에 갇힌 사람이 많으며, 치우침 때문에 어딘가 병들고 그런 사람이 늘면 사회도 병든다.
승부로 비유하면 전문가는 전문 기술로 이기려는 사람이고 만능가는 무엇이 와도 달아나지 않는 감각의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전문가보다 모든 것에 통하는 만능가가 되고 싶다.
지금은 오히려 치우친 사람이 높이 평가돼 문제다. 누구나 직업이 있으므로 형식상 전문가는 될 수밖에 없지만 몸과 마음 전부를 전문 분야에 던지는 것은 위험하다. 전문적으로 일해야 할수록 거기에 완전히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나도 마작 세계에 50년 넘게 관여했지만 전문가도 프로도 아니다. 예전에는 누가 나를 마작 프로라고 부르면 몹시 화가 났다.
나는 면허와 자격과 무관하게 살았고 한 번도 원한 적 없다. 전문가가 되는 일이 정말 싫어 운전면허도 없다. 마작에 오래 관여할 수 있었던 것도 면허와 자격이 없는 세계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진정한 프로는 한 가지만 완성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요소도 많이 지닌 사람이다.
일본에서 ‘엘리트’는 공부·일·돈벌이를 잘하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프랑스에서의 의미는 더 넓다고 한다. 학력과 심신의 강인함, 유연성까지 여러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프로이자 엘리트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부모님은 “우동처럼 굵고 짧게 살지 말고 메밀국수처럼 가늘고 길게 살아라”라고 했다. 여기서 굵고 짧은 우동이 전문가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굵고 짧기보다 메밀국수처럼 가늘고 길며 유연하게 사는 감각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자기 안의 ‘바보’를 알아라
모든 사람에게 개성이 있듯 장점과 단점이 있다. 결점까지 함께 지닌 존재가 인간이다.
누구나 실수하며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완전한 사람은 없다. 실수는 그 사람의 결점이자 숨겨진 면이며, 실수를 통해 그것을 깨닫는다.
결점은 자기 상태를 알게 하는 중요한 것이다. 장점만 있다면 더 나아지고 좋아지려는 마음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결점이 있기에 조금이라도 좋아지려 하고, 이는 본능이며 지지 않는 사고와도 강하게 연결된다. 결점은 삶의 원동력 중 하나다.
결점 때문에 바보나 얼간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둘이 조금 다르다고 본다.
도장생을 보면 일류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에게 ‘바보’가 많다.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않은 사람에게는 ‘얼간이’가 많은데, 얼간이는 악의가 없어 그나마 귀엽다.
학문을 익혀 자기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깔보고 헐뜯기 쉽다. ‘바보’라는 한마디도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주변을 편안하게 할 수도 있다.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이는 자기가 현명하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내 눈에는 그들이야말로 바보지만 우월하다고 믿어 자기 결점을 깨닫지 못한다.
자기 결점을 보지 않는 것은 문제지만 지나치게 들여다보는 것도 좋지 않다. 그러면 남의 결점까지 몹시 신경 쓰여 자기 마음을 통제하기 어렵고 자기를 잃는다.
가령 A의 결점이 마음에 걸린다고 하자. 혼자 속으로 비판하는 정도라면 아직 괜찮다. 다른 사람까지 A를 비판할 때 함께 맞장구치지 말고 그 비판의 불을 꺼야 한다.
자기 불은 끄기 어렵지만 남의 불을 꺼 주면 자기 불도 조금 식는다. 그것이 마음을 통제하는 길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며 자기와 남의 결점을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바라보면 그 속의 깨달음은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다.
‘할 줄 아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핵심을 찌른다
회사에서 ‘일 잘하는 사람’은 요령 있게 빠르게 처리해 인정받는다. 어떤 세계든 그런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무엇이든 자연스럽고 즐겁게 행동한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에 빠르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일일이 고민하지 않는다.
나도 마작을 할 줄 알기에 어떤 패를 버리고 다음을 어떻게 전개할지 느끼는 대로 움직인다. 생각하지 않기에 빠르게 칠 수 있다.
일에도 최소한의 생각은 필요하지만 할 줄 아는 사람은 필요한 것만 단순하게 생각하고 바로 행동한다.
생각하지 않고 느끼는 일이 속도를 만든다. 도장에서 패를 1초 안에 치게 하는 규칙도 그 연장선이다.
이치로의 기습 번트처럼 할 줄 아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과녁을 찾아 맞힌다. 못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생각해 때를 놓치고 빗나간 이유를 끝없이 고민하다 또 실패한다. 계속 빗나가면 패배의 악순환에 빠진다.
좋은 생각은 늘 단순하다. 끝없이 고민한 것에는 좋은 답이 드물다. 제대로 준비하면 과녁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느끼는 힘’을 더 믿어라
지나치게 생각해 일이 반대로 풀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도박에서는 처음 ‘이것이다’라고 느낀 인상을 버렸다가 반대 결과가 나는 일이 많다. 파친코 기계를 골랐다가 다른 것이 좋아 보여 옮겼는데, 새 기계는 꽝이고 처음 고른 기계가 대박을 터뜨리는 식이다.
현대인은 첫눈에 느낀 자기 ‘느끼는 힘’을 믿지 못한다. 그 힘이 약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작동했는데도 스스로 직감을 버리고 미로에 들어갈 때가 많다.
망설임이 겹치면 “왜 졌지, 생각이 틀렸나?”라며 패배의 악순환에 빠져 같은 패배를 반복한다. 생각했기 때문에 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생각할수록 선택지가 늘고 직감이라는 센서를 방해하는 잡음도 많아진다.
악순환에 빠졌다면 일단 백지로 돌아가 느끼는 힘을 다시 시험하라. 되풀이하면 보이지 않던 과녁도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낀다
승부가 시작되면 사람은 눈앞에 사로잡히기 쉽고 승부에 약할수록 더 그렇다. 몸과 마음이 굳어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를 부른다.
지지 않는 비결은 ‘눈’이 아니라 ‘귀’에 있다. 상대와 전체 흐름을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귀를 맑게 해 느끼는 것이다.
산속에서 귀를 기울이면 마음이 가라앉고 작은 소리도 들린다. 이런 감각이 있으면 승부의 핵심에 가까워진다.
마작은 뒤집어 쌓은 패, 상대 패, 승부 흐름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읽어야 한다. 그래서 귀를 맑게 해 느끼는 일이 중요하다.
대국 중 나는 상대가 패를 집고 버리는 소리의 미묘한 변화를 듣는다. “텐파이구나”, “망설이는군”, “승부를 걸었네” 같은 것이 손에 잡히듯 느껴진다. 표정을 읽으려 할 때보다 귀로 보려고 할 때 상황이 더 선명하기도 하다.
나만의 특별한 힘은 아니다.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은 그런 귀의 힘을 지닌다. 현대인은 도시 환경 때문에 감성과 능력을 닫았을 뿐이다.
나는 능력을 퇴화시키지 않으려고 바다와 산을 찾고 귀를 소중히 여겨 큰 소리에 가까이 가지 않으며 헤드폰으로 큰 음악을 듣지 않는다.
아름다운 소리가 듣고 싶으면 파도·시냇물·새·나무의 소리를 찾아간다. 그렇게 승부의 무기인 귀를 아낀다.
귀로 볼 수 있게 되면 깨끗한 소리와 더러운 소리를 즉시 구별한다. 지금 세상은 텔레비전의 싫은 소리, 번화가의 불쾌한 소음처럼 더러운 소리투성이다.
그래서 나는 마작 도장 간판에 ‘패의 소리’라는 이름을 넣었다. 마작은 더러운 소리를 내는 사람이 모여 지저분하게 치는 게임이 되었기에 오히려 깨끗한 소리를 내는 마작을 하려 했다.
패를 치는 소리에는 마음이 드러난다. 눈을 감고 도장생의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보인다. 삶의 습관과 사고가 소리에 나타난다.
소리를 깨끗하게 하려면 먼저 치는 방식을 깨끗하게 해야 하고, 그러면 마음도 깨끗해진다. 패의 소리는 그만큼 정직하다.
좋은 승부는 상대와 하는 공동 작업이다
작귀회에서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이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좋은 승부를 하느냐다. 나의 승부 미학을 가르치는 일이다.
지금 사회에는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퍼졌다. 결과적으로 이기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더러운 수까지 쓴다. 세계가 그런 추한 승부에 오염되었다.
예전에 한 고교야구 감독이 도장에 왔다. 그의 마작과 말에는 아주 불쾌하고 비열한 기운이 있었다. 이런 사람이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친다는 생각에 참담했다.
그는 승리 지상주의의 전형이었다. “이기면 기쁘잖아.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 그런 단순한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승부를 가르치는 듯했다.
그러나 승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성립하고, 좋은 승부를 하려면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야구도 아홉 명 대 아홉 명이 아니라 열여덟 명이 함께 경기를 만든다고 느껴야 한다. 상대 팀도 자기 팀이라는 감각이 있어야 좋은 경기가 된다. 두 감독이 그런 감각을 지니면 틀림없이 좋은 승부가 된다.
개체는 전체이며, 전체는 개체다
상대를 존중하는 생각은 작귀회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처음에는 점수 승부였지만 이윽고 동작과 마음가짐,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자세도 평가에 들어왔다.
네 명이 경쟁하지만 동시에 한 팀이다. 서툰 사람도 들어오지만 네 사람이 승부의 장을 만들고 얼마나 좋은 승부를 하느냐가 중요하다.
누가 함께할지 모르고 발목 잡는 사람도 올 수 있지만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최고의 장을 만든다.
작귀회를 시작한 지 21년이 되어 이제 그 마작이 작귀류다워졌다고 느낀다. 네 사람이 승부를 만든다는 자세가 뿌리내렸고 거기에는 적도 아군도 없다.
개인에 갇힌 승리는 진정한 기쁨을 주지 않는다. ‘개체는 전체이며 전체는 개체’라는 생각을 형태로 실천하는 것이다.
도장에는 대국 중 발목을 잡는 서툰 사람도 있다. 조금 잘하는 사람은 그들과 좋은 장을 만들며 가르치게 된다. 함께해 보니 제대로 되지 않고 점수가 떨어지기에 지도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개인의 성장과 함께 전체가 성장하고, 전체의 성장과 함께 개인이 성장하는 좋은 순환이 생긴다.
‘뒷정리’는 다음 승부의 ‘준비’다
일상과 승부의 강함에는 ‘준비·실행·뒷정리’를 습관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밤에 다음 날 준비를 하는 것이 준비, 아침부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실행, 귀가해 청소와 빨래를 하는 것이 뒷정리다. 일상에서도 이 순환을 반복한다.
주의할 점은 뒷정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제대로 해야 다음 준비로 갈 수 있으므로 이미 다음 준비의 일부다. 세 단계는 원처럼 연결되어 순환한다.
뒷정리를 제대로 하면 다음 준비를 빨리 시작할 수 있다. 실수가 있었을수록 뒷정리가 다음 일의 준비에 영향을 준다. 준비가 부족하면 실행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원을 계속 돌리려면 마음을 좋은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좋은 마음으로 충분히 준비하면 실행도 좋아지고 실수가 줄어 뒷정리도 쉬워진다. 실행이 나쁘면 뒷정리도 꼬이고 의욕을 잃어 원이 뒤틀린다.
순환을 계속하려는 강한 마음이 없으면 마지막 뒷정리가 소홀해져 틈이 생기고, 그 틈은 커져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부른다.
프로선수의 컨디션 기복도 이 순환이 매끄럽지 않아서 생긴다. 경기가 끝나도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끝난 순간 다음 경기가 시작된다. 몸 관리, 기술 반성, 반복 훈련 같은 뒷정리를 하는 선수와 하지 않는 선수의 차이는 당연히 커진다.
‘승리’를 양보할 수 있는 여유야말로 강함이다
준비·실행·뒷정리를 실천해 강하고 지지 않는 사람이 되면 여유가 생긴다.
여유는 사고와 행동의 폭을 넓혀 자기뿐 아니라 상대도 생각하게 한다. “부디 이기세요”라고 승리를 양보할 정도의 배려가 생긴다. 그만한 여유가 있으면 지지 않는 싸움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여유 없는 사람은 상대가 이기거나 성공하지 않기를 바라며 실패만 원한다. 그런 자세로 승부에 이길 수 없다.
나는 마작에서 오픈 리치를 좋아한다. “아무도 쏘이지 마. 내가 스스로 뽑을 테니까”라는 여유가 있을 때는 거의 지지 않는다. 야구도 “제발 치지 마”라는 마음으로 던진 공보다 “칠 수 있으면 쳐 봐”라는 여유로 던진 공에 힘이 더 붙는다.
이 여유는 상대를 얕보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흔히 “여유롭다”는 말에 ‘쉽게 이긴다’는 방심이 섞이지만 내가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진정한 여유는 정신과 기술 모두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 나온다. 실력이 부족한 채 승리를 권한다고 이길 만큼 승부는 만만하지 않다.
평소 준비·실행·뒷정리의 단련을 쌓은 뒤 적에게 “자, 먼저 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여유다. 정말 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맺으며
한 길을 완성하는 것은 어렵다.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지만 어느 길이든 완성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완성한다는 것은 확증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내게는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감각이 전혀 없다. 자기 안에 확증이 없으니 당연하다.
도장생을 지도할 때도 잘못하던 사람이 왜 좋아지는지 모른다. 감각으로 “이렇게 하면 좋아질 거야”, “팔꿈치를 조금 낮춰 봐”라고 작은 도움만 줄 뿐이다.
승부를 시작한 지 50년, 작귀회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지만 내가 마작을 얼마나 아느냐고 하면 백 걸음 길의 세 걸음 정도다. 아직 천분의 일쯤밖에 모른다.
백 걸음을 가도 거기가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백 걸음을 갔다가 출발점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직선으로 앞에 다음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 걸음을 가고 백 걸음을 돌아오는 것이 내 길인지도 모른다.
젊을 때는 “50걸음쯤 왔나”, “나는 대단하군. 나보다 앞선 사람이 없네”라고 느낀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것은 인간끼리의 좁은 세계에서 혼자 우쭐한 것뿐임을 깨달았다. 그때 마작의 신이 “너는 아직 한 걸음밖에 걷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이 길은 평생 걸어도 어딘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안다.
나는 자연에서 배운 것과 깨달은 것을 마작을 통해 도장생에게 가르친다.
많은 사람에게 만져져 패가 울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다른 도장에 가면 패가 불쌍하다. 사람의 손길에 학대받는 듯하다.
그래서 작귀회에서는 패를 조금이라도 부드럽고 깨끗하며 소중히 다루도록 가르친다. 내게 패는 그만큼 소중하고 거기서 얻고 배운 것이 많다.
세상에서 ‘배운다’는 것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서 차원이 낮다고 여기는 마작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내 인생은 거기서 시작했다.
배움은 위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도장생을 지도하면서도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워 얻는다.
정치인·전문가·경제인·대학교수 등 여러 사람과 교류하지만 그들에게 배우는 것은 거의 없다. “왜 좋을까?”보다 “왜 안 될까?”에서 배우는 편이 깨닫고 개선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가르침을 주는 이는 늘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 쌓아 온 가르침을 이 책에 많이 담았다. 여기서 지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조금이라도 느껴 주면 기쁘겠다.
또 인생에서 지지 않으려면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배우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해 준다면 나도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 같다.
2009년 8월
사쿠라이 쇼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