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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10 사람을 꿰뚫어보는 기술 - 사쿠라이 쇼이치

페페 더 엔지니어 2026. 7. 10. 20:30

사람을 꿰뚫어보는 기술
20년간 무패, 전설의 작귀(雀鬼)가 말하는 「인간 관찰력」

저자: 사쿠라이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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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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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 일관되어 있다. 몸의 움직임, 버릇, 차림새와 같은 외적인 모습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부터, 인간의 내면과 마음, 정신의 구조,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다. 굳이 핵심어를 하나 꼽는다면 ‘인간을 통찰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사람이 사람을 관찰한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사람이 타인을 볼 때는 대부분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 경험이라는 ‘자’를 대어 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상대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타인을 본다.

사람을 관찰하는 전문가인 점술가나 정신과 의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사람을 본다, 관찰한다는 것은 상대의 몸짓과 말에서 미묘한 리듬이나 상태, 또는 위화감을 느끼고 읽어내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자신의 자를 이용해 상대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그 자에는 12색짜리도 있고 24색, 36색짜리도 있으며 사람마다 다양하다. 준비된 색이 많을수록 상대의 진짜 모습에 가까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큰 눈금의 자를 가지고 있어도 상대의 색을 정확히 붙잡을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은 색을 갖추고 있어도 상대는 반드시 자신의 자 밖으로 넘쳐난다. 사람이 사람을 재는 자란 결국 그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상대를 정확히 보려면 그런 자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하게 사용해 온 그 자를 일단 버리고,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새로운 색을 만들어 낸다. 24색이나 36색짜리 자를 사용하는 고정관념과 기성개념에 묶인 관찰력으로는 그 변화를 결코 붙잡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도 변하고 있다는 자각과, 눈앞의 변화에 대응하려는 유연함이다.

자신의 자에 사로잡히지 않고 눈앞의 변화를 감지해 유연하게 대응한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태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는 어른보다 아직 본능에 가까운 곳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런 자가 없고 생각도 부드러워, 때로는 직감으로 올바른 것을 꿰뚫어보기도 한다. 많은 사람은 원래 가지고 있던 그런 유연한 관찰력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미리 밝혀 두자면 이 책은 흔히 말하는 ‘자기계발서’처럼 어떤 ‘정답’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내가 독자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답을 손쉽게 얻으려 하지 말고, 쉬지 않고 변하는 사물과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관찰력을 갈고닦는 것이다. 부드러운 사고로 관찰력을 연마해 나가면 그 앞에는 반드시 새로운 발견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그런 새로운 발견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2008년 12월
사쿠라이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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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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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버릇’은 마음을 발가벗긴다
- 버릇은 그 사람의 진실을 드러낸다
- 누구도 버릇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정신의 ‘메타볼릭 버릇’이 붙은 현대인
- 쓸데없이 힘을 주면 양손 엄지가 젖혀진다
- 자연스럽게 사는 사람은 버릇이 적다
- ‘취하는 버릇’이 사람을 둔하게 만든다
- 대국 상대의 심리는 움직임의 버릇으로 읽는다
- 성격이 아니라 버릇을 고친다

제2장 몸의 움직임을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 인간은 ‘흉내 내는’ 생물이다
- 불필요하고 위화감 있는 움직임이 보내는 경고
- 흔들림은 심신의 중심축이 벗어났다는 증거
- 늘어나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 옆으로 벌어진 눈을 가진 사람이 늘고 있다
- ‘눈빛의 힘’을 잃어버린 일본인
- 큰 판을 보는 ‘전체의 눈’을 갈고닦아라
- ‘첫인상’은 날마다 달라진다
- 현대인의 치우친 걸음걸이가 생기는 이유
- 집착은 발을 땅에서 띄운다
- 도시의 혼잡 속에서도 부딪히지 않고 걷는 비밀
- 걷기에도 수준이 있다
- 다리 떨기에 숨은 의미
- 서양인의 몸짓은 왜 큰가
- 패를 버리는 행위에 아름다움과 추함이 드러난다
- 일류도 승리를 눈앞에 두면 떤다
- ‘부드러움’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다
- 기척을 지우면 상대의 빈틈을 찌를 수 있다
- 소년 시절의 나를 사로잡은 남자

제3장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방법
- 사람을 ‘대하는’ 감각을 갈고닦아라
- 공기를 3분의 1밖에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
- 자신의 바깥, 안쪽, 중심핵을 보라
- 점점 얇아지는 현대인
- 자극과 욕망을 통제하라
-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는 사람들
- 허세를 부리는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이 없다
- ‘하면서’ 사는 생활을 권한다
- 나쁜 성격은 고치지 말고 ‘완화’하라
-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십자선을 가져라
- 얽매임은 존재의 내부를 비운다
- 자기 자신을 구하는 방법
- 이겼다면 양보하라
- 리더가 거리를 조절하는 법

제4장 인생을 내다보는 기술
-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 잊고 있던 자신의 한 면을 떠올린다
- 계기의 공 하나가 인생을 바꾼다
- 주먹 한 대가 가져온 인생의 전환점
- ‘무모함’에서 ‘엉망’을 빼라
- 끝까지 미완성을 추구한다
- 못하는 사람에게서 배운다
- 좋은 모방과 나쁜 모방
- “절대로”와 “상관없어”라는 병
- 말끝을 올리는 화법에서 보이는 무책임
- 친절이 끼치는 폐
- 꿈과 희망이 없어도 살 수 있다
- 아이를 꾸짖지 않고 바로잡는 방법
- 누구나 ‘신호’를 보낸다
- 결과보다 도전한 과정이 귀하다

제5장 몸가짐과 행동으로 사람의 유형을 가려내기
- 내면까지 멋을 갖추는 삶
- 자신을 파는 사람은 멋이 없다
- ‘마음의 옷’을 벗으면 편해진다
- 인공적인 밝음과 타고난 밝음
- ‘광기’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
- 사교적인 사람과 사기꾼의 경계
- 옷차림 하나로 마음의 성질을 읽는다
-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외로움의 반영이다
- 말이 적은 사람은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다
- 차가운 사람과 뜨거운 사람
- 지나치게 겸손한 사람과 거만한 사람
-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과 남에게 엄격한 사람
- 쉽게 원한을 품는 사람의 진실
- 남의 험담만 하는 사람
- 분위기만 잘 타는 사람은 좋은가 나쁜가
-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의 정체
- 푸념하는 사람은 떼쓰는 사람이다
- 제멋대로인 사람은 훌륭한 반면교사다
- 변명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불안에서 달아난다
- ‘존재감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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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버릇’은 마음을 발가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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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릇은 그 사람의 진실을 드러낸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버릇이 있다. 머리카락을 만지거나 손톱을 물어뜯거나 다리를 떠는 식이다.

버릇은 그저 버릇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눈은 입만큼 말한다”는 말이 있듯, 버릇에도 “입만큼 많은 것을 말한다”는 측면이 있음을 알아 두어야 한다. 버릇은 그 사람 안에 감춰진 진실을 본의 아니게 말해 버릴 정도로 중요한 몸짓이다.

그러므로 버릇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 알아보기 쉬운 버릇부터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버릇까지 하나하나 살펴보면, “이 사람은 지금 이런 상황에 있구나”, “입으로는 저렇게 말하지만 속뜻은 이렇구나”, “과거에 이런 대우를 받아 왔구나”처럼 참으로 다양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버릇은 습관이다. 습관이 쌓여 버릇이 만들어진다. 습관은 각자가 놓인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습관이 드러난 것이므로 관점을 바꾸면 버릇은 그 사람 자신의 일상을 보여 준다고 해도 좋다.

물론 버릇은 환경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자질, 성격, 가치관을 비롯한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 만들어지고 겉으로 나타난다. 한 지붕 아래에서 자란 형제라도 버릇은 전혀 다르다. 같은 환경에서 성장해도 성격과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므로 버릇도 달라진다. 여러 요소에 의해 습관이 된 것이 버릇의 모습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긴박하거나 막다른 상황에서 사람의 본모습이 드러난다고들 하지만, 살아가면서 그런 장면을 실제로 만나는 일은 의외로 많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생사가 갈리는 극한의 순간이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다. 긴장을 풀고 있는 평범한 때에야말로 ‘그 사람’이 드러난다.

나는 뒷세계의 프로 마작사 생활을 그만둔 뒤 ‘작귀류 마작 도장 패의 음(牌の音)’을 열고, 마작을 통해 후배들에게 사람으로서 걸어야 할 길을 가르치는 ‘작귀회’를 시작했다. 작귀회에는 많은 젊은이가 도장생으로 몸담고 있다. 이들도 긴장한 채 대국하고 있을 때보다 대국이 끝나 안도하고 있을 때 자신의 맨얼굴을 더 많이 드러낸다.

의식적으로 하던 행동이 습관이 되면 머지않아 무의식적인 행위가 되고, 그 안에서 그 사람 특유의 움직임과 사고가 나타난다. 일상 속에서 습관화된 것이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생각으로 튀어나온다. 남이 보기에는 부자연스럽더라도 본인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 누구도 버릇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습관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1년, 한 달, 일주일 같은 기간을 거치며 형성된다. 아주 먼 옛날의 세계에서 기간이라 해 봐야 우기와 건기, 또는 사계절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달력이 생기고 시계가 생기면서 인간은 한 해를 잘게 나누어 생활하게 되었다. 계획을 세우든 약속을 하든 어딘가에서 시간을 구분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은 그런 일상의 구획 속에서 여러 규칙도 만들었다. 일을 원활히 진행하거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등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 밑바탕에는 “미리 정해 두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인간의 심리가 있다.

구분과 규칙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자연히 특정한 패턴에 근거한 행동과 사고방식을 형성한다. 그것이 버릇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매일의 습관 속에서 버릇을 차곡차곡 쌓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버릇과 무관하게 살 수 없다.

버릇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 좋은 버릇과 나쁜 버릇이 있다.

아쉽게도 버릇은 흔히 나쁜 쪽으로 나타난다. 우리 몸속에 흐르는 피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생물보다 자연에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는 ‘인류’의 피, 자연의 관점에서는 반드시 질이 좋다고 할 수 없는 그 피가 버릇이 되어 표면으로 나오는 것이다.

아기에게도 버릇이 있다. 어른보다 수는 적지만 분명히 버릇을 지니고 있다. 내게도 손주가 몇 명 있는데 그들을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부모의 영향이 가장 크다. 아기는 부모가 하는 일을 보며 자란다. 부모에게 의존해 살아가는 동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양친의 행동을 보고 배우며, 버릇이 하나, 둘 생겨난다. 그런 의미에서는 “버릇도 유전된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바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아이의 몸과 마음 깊은 곳에 단단히 새겨진다.

아는 사람에게 “요즘 아버지와 닮아 가네” 또는 “어머니와 닮아 가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이것은 반드시 얼굴 생김새가 닮아졌다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버릇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어 나오기 때문에,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은 그 버릇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고 느낀다. 그만큼 우리는 버릇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 정신의 ‘메타볼릭 버릇’이 붙은 현대인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사회는 넓어졌다. 사회는 원래 확장되는 것이고, 확장됨으로써 사람들은 그 장점과 편의를 누릴 수 있다. 인터넷의 등장은 과거에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사회를 확대했다. 세계 각지의 정보를 순식간에 얻는 일은 100년 전은 물론 50년 전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확장하는 것’의 무서움이 숨어 있다.

인간은 넓어지고 퍼지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감각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무조건 확장은 선이며 힘이고 능력이라고 믿는다. 정신에 ‘확장 버릇’이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광고든 유행이든 “널리 퍼지면 이긴 것”이라는 풍조가 있다. 반면 “퍼지는 것이 정말 좋은가”라고 의문을 품는 사람은 너무도 적다. 확장에는 네트워크, 돈, 물류처럼 양으로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마음의 팽창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그 안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뒤섞여 있다.

나쁜 것은 그 자리에서 가두어 확산을 억제하고, 좋은 것은 갑자기 퍼뜨리지 말고 조금씩 넓혀 가야 한다. 그런 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은 무조건 퍼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범죄 같은 것까지 손쉽게 번져 나가는 결과가 생긴다.

“예전에는 이런 범죄가 없었는데”라는 사건이 늘어난 뒤 “그럼 범죄를 줄입시다”라고 말해 보아야, 겉으로는 모두가 확장 경쟁을 벌이고 있으므로 일이 그렇게 편리하게 돌아갈 리 없다.

인터넷이 세계를 무한히 연결하면서 현대사회에는 정보가 넘쳐나게 되었다. 한마디로 정보 과잉이다. 호흡이나 식사를 보아도 알 수 있듯 인간은 몸 안으로 들인 것 가운데 필요한 것을 흡수하고, 나머지를 밖으로 내보내며 생명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정보가 과도한 현대에는 한 사람에게 들어오는 정보가 너무 많아, 그것을 충분히 씹고 불필요한 것을 배출하는 일이 따라가지 못한다. 정보의 홍수, 포식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날에는 여러 의미에서 인간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

즉 현대는 사람의 몸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메타볼릭 증후군’ 같은 상태가 되었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대중매체와 인터넷 업계가 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짧은 기간에 살이 붙어 거대해지고, 그렇게 커진 것이 ‘성공’이라며 추켜세워진다. 사람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 같은 더 큰 틀도 급격히 비대해지면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현대인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메타볼릭 상태에 빠졌다. 육체의 비만이라면 식사 제한을 비롯한 대처법이 여럿 있겠지만, 정신의 비만을 개선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세상에 정보가 넘쳐나기에 개인의 힘만으로 그것을 제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정보를 차단하려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속이나 무인도로 가는 수밖에 없다.

정보와 지식을 지나치게 집어넣은 인간의 정신은 비대해진다.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정신의 파열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정보도 음식도 천천히 자기 안에서 씹고 시간을 들여 소화해야 한다. 양은 배가 80퍼센트 찰 정도에서 멈춘다. 현대인에게는 그런 자기 통제력이 필요하다.


■ 쓸데없이 힘을 주면 양손 엄지가 젖혀진다

세상에는 “나는 어느 대학을 나왔다”는 간판만 내세우면서 부끄러운 언행을 하고도 태연한 사람이 있다. 반대로 학력이 없다는 사실을 열등감으로 품고 사는 사람도 많다.

학력뿐 아니라 어떤 것에 열등감을 느끼고 과도한 수치심을 안고 사는 사람은 몸 어딘가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 있다. 내가 자주 보는 부위는 양손의 엄지다. 엄지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뒤로 젖혀진 사람이 많다.

컴퓨터나 비디오 게임을 너무 많이 해도 엄지가 젖혀진다고 들었지만, 심한 열등감을 안고 사는 사람의 엄지는 부자연스럽게 힘주며 살아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힘을 주고 살기 때문에 손가락에도 이상한 힘이 들어간다. 몸에 힘을 주어 굳히면 정신에도 영향이 생긴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마음까지 굳어 버린다.

고정관념은 모든 것의 본질을 보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고정관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다. 그래서 나는 그때그때 고정관념을 지우고 새로 써 넣는 작업을 되풀이한다.

당신의 엄지는 뒤로 젖혀져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먼저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고 열등감을 인정하며, 고정관념과 능숙하게 지내는 법을 익히기를 권한다. 그러면 조금씩 불필요한 힘이 빠질 것이다.


■ 자연스럽게 사는 사람은 버릇이 적다

나는 자연을 접하고 싶어 가끔 해외로 나간다. 바다나 산을 찾는데, 그곳에서 만나는 ‘대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종종 놀란다.

피지에서는 현지인과 함께 험한 산들을 돌아본 적이 있다. 현지인이 말 한 마리를 데리고 와서 말했다.

“당신은 말을 타세요. 이 산을 걸어서 도는 것은 절대로 무리입니다.”

나는 안장 없는 말에 올랐고, 현지인은 맨발로 말과 나란히 달렸다.

산이라기보다 거의 밀림이었다. 길에는 강도 있었고 몸이 빠질 만큼 깊은 늪도 있었으며, 지형과 날씨가 몹시 거칠었다. 그러나 현지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리라면 신발을 신어도 아플 것 같은 울퉁불퉁한 바위밭을 맨발로 거침없이 지나갔다.

그렇게 대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은 이른바 버릇이 적다. 버릇이 없다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고요하다’고 표현해야 할까. 그 현지인도 마찬가지였는데 쿵쾅거리거나 부산스러운 데가 없었다. 대자연 속에서 둥실 떠 흐르듯 살아간다. 버릇이 적으면 움직임도 매끄러워진다.

나는 그들을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그들이 지니고 있다고 느꼈다. 옛 일본인 역시 그들처럼 자연 속에서 살아남는 능력을 몸에 익히고 있었을 것이다. 대자연의 혜택을 누리려면 숲과 바다와 강이 건네는 소리를 가려 들을 힘이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 갖추어진 소중한 감각 기능인 오감을 사용해야 한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생물은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보아도 퇴보하고 있다. 눈으로 보이는 정보만 좇는 ‘한 가지 감각의 인간’이 늘고, 오감은 쇠퇴하는 중이다. 가능한 한 자연과 만날 기회를 만들고 오감을 자극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취하는 버릇’이 사람을 둔하게 만든다

술을 마시면 금세 취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술을 좋아하는 것은 괜찮지만 특별히 술이 약한 것도 아닌데 술에 먹혀 기억을 완전히 잃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평소에도 술이 아닌 무언가에 취해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것에 취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면을 지닌다.

여자에 취하고, 돈에 취하고, 일에 취하고, 취미에 취한다. 술을 마시는 것만이 취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넓은 의미의 ‘취하는 버릇’이 있다. 취한다는 것은 자신을 알지 못하게 되거나 자신의 존재마저 사라질 만큼 빠져드는 상태다. 이른바 ‘자신을 잃는’ 상태는 많든 적든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나 시간을 의식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푹 빠져 자신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시간이 띄엄띄엄 존재한다.

현대사회에는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요인이 무수히 많다. 열심히 사는 것과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세상에는 사실 무언가에 취한 사람이 대단히 많다.

내 주변에도 ‘취객’이 많다. 일에 취한 사람, 돈에 취한 사람, 지식에 취한 사람. 권력에 취해 나라를 잘못된 길로 몰아가는 지도자도 세계 곳곳에 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취해 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누구도 자신이 취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흔히 취해 있는 상태를 ‘훌륭하다’고 여기니 더욱 곤란하다.

나 역시 실제로 술에 취한 적도 있고 배멀미를 한 적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나 또한 일상에서 무언가에 취한 경험이 있다는 뜻이다.

다만 나는 무엇에든 애착을 갖되 결코 사로잡히지 않는 삶을 지켜 왔기에, 취함도 가벼운 정도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물에 집착하며 깊이 파고든다. 그래야 선택할 수 있고 방향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대상에 사로잡히는 감각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취하는 사람은 사로잡히기 때문에 취한다. ‘고집을 갖는 것’과 ‘사로잡히는 것’은 닮아 있어 구별하기 어렵지만, 무언가에 뜻을 두더라도 결코 그것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유연성을 더한 고집을 지니고, 속박으로 이어지는 고정관념은 가능한 한 지운다. 모든 일에는 앞과 뒤가 있다. 뜻을 두되 양면을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하다.

차멀미나 배멀미는 별개로 하고, 무언가에 취해 있을 때는 분명 기분이 좋다. 그러나 그 반대로 취하지 않는 데서 오는 기분 좋음도 있다. 내게 취하지 않는 쾌감은 자신을 각성시키는 것이다. 취함은 사람을 둔하게 하지만 각성은 사람을 깨어 있게 한다.

내가 뒷마작 세계에서 대타로 승부하던 시절, 큰 승부를 앞두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는 생활을 반복했다. 자신을 궁지로 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몸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졸리지 않으니 자지 않았고 배가 고프지 않으니 먹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했던 것 같다. 자신을 깨우고 오감을 예민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 대국 상대의 심리는 움직임의 버릇으로 읽는다

나는 40년 넘게 마작과 함께해 왔다. 그동안 마작탁자를 둘러앉은 상대의 다양한 버릇을 보았다. 패를 잡는 법과 버리는 법 하나하나에도 버릇이 나타난다. 큰 승부의 긴장된 장면에서 버릇 때문에 허점을 드러내 대역전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수많은 버릇을 보면서 자주 마주치는 ‘흔한 버릇’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알아보기 쉬운 것은 다리를 떨거나 어깨가 조금 올라가거나, 반대로 몸이 움츠러드는 신체적 버릇이다. 어깨에서 손끝까지의 움직임이 굳어 매끄럽지 않은 사람은 생각이 막혀 있는 사람이다. 패를 치기 전부터 알 수 있으므로 대응하기도 쉽다. 평판이 좋던 어떤 대국자는 막상 시작하자 예상보다 여러 버릇을 드러냈고, 그 순간 승부의 앞날이 보인 적도 있었다.

어깨부터 손끝까지의 움직임은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말한다. 움직임은 관절과 근육이 연동하여 만들어진다. 패 한 장을 내는 데도 어깨, 팔꿈치, 손목, 손가락의 관절과 근육이 함께 움직인다. 긴장하거나 무언가를 숨기려는 심리가 그 연동을 흐트러뜨린다. 본인은 평소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해도 어딘가 위화감이 있는 움직임이 생긴다.

그렇다고 상대의 버릇을 의식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상대의 버릇만 보는 데 사로잡히면 오히려 진다. 감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정도가 가장 알맞다.


■ 성격이 아니라 버릇을 고친다

사람에게는 여러 버릇이 있다. 그중에는 고치고 싶어도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고쳐야 하는 버릇일까. 나는 “버릇이 좀 있으면 어때. 그 버릇까지 포함해서 당신인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게서 버릇을 없애는 일은 성격의 일부를 없애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일상과 습관에서 생긴 것이 버릇이므로 성격과도 닮았다. 성격이 없는 사람이 없듯 버릇도 누구에게나 있다. 그렇다면 버릇이 있음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 좋은 버릇이 되게 하면 된다.

버릇과 성격 가운데 하나를 정말 고친다면 성격보다 버릇이 더 고치기 쉽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성격을 고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도장생에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네 성격의 싫은 부분을 버릇이라고 생각해 봐. 버릇이라면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버릇은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 의식할 수 있다. 성격도 그렇게 의식한다면 고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그 도장생에게서 성격의 나쁜 부분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자신의 성격에서 싫은 부분을 고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런 방식으로 의식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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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몸의 움직임을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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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흉내 내는’ 생물이다

‘의태하는 생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비, 가자미, 카멜레온일까. 넓은 의미에서 생물은 의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은 생존의 지혜이고, 그 지혜는 유전자로 이어진다.

자연의 생물은 의태하지 않으면 천적에게 발각되어 잡아먹히거나 먹이를 잡지 못한다. 그에 맞추어 진화하며 몸의 색과 형태를 바꾸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 역시 늘 의태하고 위장하며 산다.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각자 나름대로 모습을 바꾼다. 생물의 의태 본능 같은 것이 인간 안에도 남아 있다.

날마다 유행이 달라지는 패션도 인간의 의태 중 하나다. 미용과 성형도 마찬가지이며 교육과 훈육 또한 일종의 의태일지 모른다. 사회라는 틀에 동화하기 위한 의태다.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회통념, 그리고 의태하는 재능과 기술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사회에서 높이 평가받는 구조가 ‘의태하는 인간’을 차례차례 만들어 낸다.

사회에 동화되기를 싫어하고 의태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사는 이상 사회제도의 틀과 일반상식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의태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떠밀린다. 그것이 성공, 출세, 풍요, 먹고사는 문제와 이어진다. 그렇게 인간도 다른 생물처럼 일상에서 의태하며 산다.

그러나 자연 생물의 의태와 인간의 의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생물의 의태는 생명과 생존을 위한 것이고, 그 결과 자연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도 이어진다. 반면 인간은 의태함으로써 진짜 자신을 잃고 저마다 가짜가 되어 간다. 좋은 학교와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 자체는 좋지만, 의태하면 할수록 많은 사람이 자연의 이치에 어긋난 가짜 인간이 되어 버린다.

본래 인간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있는 그대로 살아야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와 정반대로 산다.

오늘날에는 가짜를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식품 위장이다. 자연의 생물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의태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선악마저 무시한 채 의태를 거듭하고, 그 의태가 욕망과 결합하여 가짜가 활개 치는 세상을 만들었다. 현대처럼 위장이 횡행하는 사회가 된 것도 이런 관점에서는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 불필요하고 위화감 있는 움직임이 보내는 경고

습관에서 버릇이 생긴다고 앞서 말했지만, 습관 역시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달라졌다.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세계에 일종의 결과지상주의가 퍼졌고, 일본도 한쪽으로 쏠려 각박한 사회가 되었다. 사람들은 계산적으로 변했으며 모든 판단의 밑바탕에 음흉한 손익 계산만 둔다. 손해인가 이익인가, 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 지나치게 늘어 사회의 균형이 무너지고 나쁜 방향으로 가는 듯하다. 요컨대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감’이 나빠졌다.

사회 전체의 조절이 좋지 않으니 “적당히 좀 해!”라고 외치고 싶은 일도 늘어난다. 하지만 조직 안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윗사람이고, 아랫사람은 좀처럼 말하기 어렵다.

회사도 가정도 같다. 아래에 있는 사람은 “적당히 해!”라는 마음을 스스로 억누르고 눈을 감는다. 그러면 위에 있는 사람은 “내 말만 듣고 있으면 돼”라며 더욱 횡포해진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가. 억눌렸던 아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 응어리를 풀 듯 폭발한다. 상사를 향해서, 부모를 향해서, 때로는 사회 전체를 향한 원한으로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터뜨린다. 현대사회는 바로 이런 악순환에 빠져 있다.

인간에게는 뜻대로 움직이고 일할 수 있는 몸이 주어졌다. 손발은 물론 눈, 귀, 입, 몸통도 그렇다. 움직이는 사명을 지닌 것이 몸이다. 움직이는 몸을 가진 것은 모든 동물에 공통된 자연의 이치다. 몸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는 필요한 움직임을 취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조절 감각이 나빠진 현대사회의 사람들을 보면 불필요한 움직임을 하는 이가 참 많다.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움직임이 아니라 쓸데없고 위화감 있는 움직임을 한다. 머리를 앞뒤로 흔들거나 오른쪽과 왼쪽으로 계속 기울인다.

위화감 있는 움직임은 일종의 경고다. 머리를 흔드는 경향이 있는 사람의 경우 그 밑바탕에는 ‘두려움’이 자리한 때가 있다. 사람은 추위와 공포 앞에서 떤다. 그러므로 머리를 자꾸 흔드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이나 견디기 어려운 공포가 숨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지구의 모든 생물은 자연의 파장, 또는 우주의 파장이라 불러도 좋을 어떤 리듬 속에서 산다.

인간도 그 파장 속에서 생명으로 살아가며 몸을 움직인다. 그런데 지나치게 불필요하거나 위화감 있는 동작을 거듭하면 그 파장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자연의 파장과 멀어진 쓸데없는 움직임만 늘어난다.


■ 흔들림은 심신의 중심축이 벗어났다는 증거

흔들린다는 말을 들으면 지진도 떠오른다. 큰 지진은 대재해를 일으키고, 작은 지진도 반복되면 절벽이 무너지거나 땅이 함몰되는 등 여러 영향이 나타난다. 자연의 파장 안에서 생각하면 지진의 흔들림과 인간의 흔들림도 같다. 큰 흔들림은 위험하고, 작은 흔들림도 쌓이면 점점 위험한 상태로 향한다.

긴장과 공포에서 나오는 흔들리는 동작은 마음과 몸의 지지점이 벗어났다는 증거다. 의자에 앉아서도 머리만, 또는 상반신만 계속 흔드는 사람이 있다. 이런 쓸데없는 동작이 많은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다. 의미도 없이 몸을 움직인다. 파장에 맞춰 흐르듯 움직이는 사람은 정말 적다.

의미 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어느 날 의미 없는 일을 갑자기 저지를 위험도 품고 있다. 아키하바라에서 일어난 무차별 살인사건의 범인도 평소 생활에서 의미 없고 불필요한 움직임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물함을 열면서 전혀 관계없는 부분을 한 번 만진 뒤 연다든가, 옷을 입는 과정에 불필요한 동작이 끼어드는 식이다.

그런 사람은 겉으로 성실해 보이는 경우가 많아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도 방치되기 쉽다. 그리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이 크게 흔들리면 다른 사람에게도 엄청난 흔들림을 전하게 된다.


■ 늘어나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반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현대사회에는 등교 거부, 은둔, 니트족처럼 스스로 행동을 일으키지 못하게 된 사람이 많다. 왜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까. 이유 중 하나는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이고, 실수에서 교훈을 얻거나 그것을 계기로 고쳐 나갈 수 있다는 감각이 부족하다.

여기에는 결과지상주의의 영향도 적지 않다. 사회 전체를 감싸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 자신의 아이에게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 부모들. 움직이지 않게 된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주변에서 아무리 “괜찮아”라고 말해도 “한 번 실패하면 끝이다”라는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진에 본진과 여진이 있듯 사람의 마음에도 ‘본진’과 ‘여진’이 있다. 여기서는 본진을 본심, 여진을 남아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해해도 좋다. 본심은 표면에 드러나는 큰 흔들림이고, 여진은 주변 사람이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하는 작은 흔들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작은 여진을 주변에서 알아봐 주어야 한다.

지진은 단층이 어긋나 일어난다. 본진 뒤에 여진이 생기듯 마음의 흔들림에도 본진과 여진, 거기에 전조가 있다. 화산 분화의 전조가 되는 화산성 지진과 같다고 해도 좋다.

그 사람의 몸이 흔들리는 모습을 제대로 보고 있으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언젠가 큰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곧 무너질지도 모른다” 같은 전조를 때때로 읽을 수 있다. 마음의 흔들림과 몸의 흔들림은 이어져 있다. 마음의 흔들림은 신호가 되어 몸 어딘가에 나타난다.

마음속을 직접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내는 목소리는 반드시 몸 어딘가에 나타난다. 2차, 3차 피해로 번지는 것을 막고 첫 단계에서 피해를 멈추려면 주변 사람이 그 사람이 보내는 전조와 작은 여진을 알아차리는 일이 중요하다.


■ 옆으로 벌어진 눈을 가진 사람이 늘고 있다

“눈은 입만큼 말한다”는 말처럼 눈은 그 사람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 눈의 표정과 시선을 보면 생활 모습이 보인다. 일상이나 직업에 따른 특징도 눈에 나타난다.

택시 운전기사와 트럭 운전기사를 비교하면 시선의 차이가 분명하다. 택시 기사는 운전하면서 보도에 있는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방으로 끊임없이 시선을 보낸다. 트럭 운전사에게 거만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평소 높은 운전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위에서 보는 시선’이 몸에 밴 가능성도 있다.

눈에는 여러 표정이 나타난다. 마작을 할 때도 눈만 보아 상대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 때가 있다. 눈에 드러난 이면의 힘주기를 찾아가는 것이다. 큰 패로 오르려 할수록 몸에 힘이 들어가고, 그 불필요한 힘이 눈에 나타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쓸데없는 신경을 너무 많이 쓰는 듯하다.

포커페이스라 불리는 사람도 눈에 나타나는 미세한 변화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다. 침착한 척해도 눈이나 그 주변에서 한순간 표정의 변화가 번뜩인다.

희로애락이라는 다양한 감정이 있기에 인간이다. 감정이 없다면 로봇과 다르지 않다. 감정이 있으므로 마음과 몸이 움직인다. 현대사회에는 이성으로 감정의 움직임을 억제하는 것을 좋다고 여기는 풍조가 있다. 숨 막힘을 느끼면서도 많은 사람이 감정을 눌러 죽이며 산다. 사회 전체에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예를 들어 일본인의 눈은 예전과 비교해 상당히 달라졌다. 오늘날에는 내가 보기에 ‘옆으로 열린 눈’이 많다. 옆으로 연다는 것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본다는 뜻이다. 작은 글씨를 많이 보아서인지, 컴퓨터나 휴대전화 탓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눈을 가늘게 뜬다는 것은 그렇게 해야만 볼 수 있는 대상이 많아졌다는 뜻인 동시에, 사실은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세상에 넘쳐나는 데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꽃은 탁한 공기보다 대자연 속에서 아름답게 핀다. 흐린 공기 속에서는 꽃의 매력을 충분히 피우지 못할 뿐 아니라 이미 핀 꽃도 시들고 만다.

인간도 꽃과 같다. 숨 막히는 현대사회에서 사람은 감정을 억누르며 산다. 감정을 억제하려면 모든 것에 둔감해지는 편이 편하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둔감해지기 위해 오감을 하나씩 닫아 버렸다. 몸은 오감을 써야 제대로 기능하는데도 말이다.

오감을 사용하지 않으면 심신의 균형이 무너지고 인간이 인간답지 않게 된다. ‘옆으로 열린 눈’ 역시 그 징후 중 하나일 것이다. 오감을 사용해 각자의 꽃을 피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 전체가 이 문제를 더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


■ ‘눈빛의 힘’을 잃어버린 일본인

“요즘 젊은이들은…”이라고 설교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오늘날 젊은이 중에는 무기력하게 늘어져 사는 사람이 많아진 듯하다. 요즘 표현으로는 ‘느긋하게 퍼져 있다’고 해야 할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젊은이들의 눈에 힘이 없다는 점이다.

눈빛에 힘이 없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한 점에서만 바라보는 것 같다. 하나의 대상을 응시하기만 하니 눈이 피곤해진다. 게임, 인터넷, 휴대전화 가운데 무엇이 계기인지는 모르겠다. 시각적으로도 사고 면에서도 하나의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보고 생각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이들은 여러 방향에서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듯하다.

눈이 피곤하면 먼 곳이나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이 휴식이 된다. 하지만 이제는 빌딩이 빽빽하게 서 있어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줄었다. 정신적인 면에서 말하면 현대사회에서 숨을 돌릴 곳이 적어졌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눈빛의 힘을 기르더라도 한 점에 집중하는 힘보다는 전체를 바라보는 힘이 좋다. 한 점 집중형은 거기에 붙잡힌 채 남으므로 유연한 대응이 어렵다. 시야를 부드럽게 넓혀 보아야 한다.

한 점 집중형은 문제도 일으키기 쉽다. 양육을 예로 들면 “공부해라. 공부만 하면 된다”는 식이 된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반드시 어딘가에 뒤틀림이 생긴다. 그보다 시야를 조금 넓혀 “놀면서 공부도 하는 거야”라고 가르쳐야 한다. 공부만 비추지 말고 그 주변에도 빛을 비춘다. 여기서 시야를 넓힌다는 것은 ‘무언가를 하면서 다른 것도 함께 느끼는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 가지에 사로잡히면 다른 이상한 것과 위화감 있는 것을 놓치게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에서 그런 징후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

나는 전체를 하나의 피사체처럼 넓게 받아들인 뒤 그 안의 어디에 위화감이 있는지 느끼려 한다. 풍경 속에서 생기는 미세한 흔들림을 붙잡는 것이다.

바닷속에서 소라나 가자미를 찾을 때도 넓은 시야로 보는 힘이 필요하다. 물론 위화감을 느끼는 힘도 있어야 한다. 자연 속에서 위화감을 느꼈다면 먼저 그것이 내 쪽에 있는지 상대 쪽에 있는지 생각한다. 바다에서 내게 위화감이 있다면 내가 비켜야 하고, 물고기가 위화감을 느낀다면 그쪽이 나를 피할 것이다.

자연계의 생물은 물론 ‘위화감’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각자의 감각과 기관을 움직여 주변에서 무언가를 감지하고 느낄 뿐이다.

인간은 문명이 발달하면서 그런 야생의 감각을 조금씩 잃었다. 젊은이들에게서 눈빛의 힘이 사라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흐름인지 모른다.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첫걸음으로 시야를 넓히는 일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 큰 판을 보는 ‘전체의 눈’을 갈고닦아라

상대의 몸 움직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면 그 위화감은 반드시 무언가를 시사한다. 그것을 끝까지 따라가면 상대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까지 알게 된다.

전에 한 편집자와 일할 때 그의 오른쪽 어깨에서 위화감을 느껴 지적한 적이 있다. 그는 과거 운동을 하다 어깨를 다쳤다고 말했다. 글을 쓸 때 오른쪽 어깨에 힘이 들어가 부자연스럽게 올라가 보였기 때문에 말한 것인데, 함께 있던 다른 사람은 그의 어깨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탁구 여자 일본 국가대표 히라노 사야카 선수의 경기를 보러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친분이 생겼고, 요코하마에서 경기가 열린다고 하여 응원하러 갔다. 상대는 강호 한국의 선수였으며 히라노 선수는 그때까지 그 선수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초반에는 히라노 선수가 다소 밀렸다. 그런데 두 번째 세트의 어느 순간 나는 한국 선수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머리 위치가 내려간 것처럼 보였다. 머리가 내려갔다는 것은 무게중심도 내려갔다는 뜻이다. 체력이 떨어져 다리에 힘이 빠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머리 위치는 분명 낮아졌다. 예상대로 그 뒤 한국 선수의 공은 잇달아 네트에 걸렸고, 히라노 선수가 그 경기를 이겼다.

한국 선수는 공이 네트에 걸리기 시작한 뒤 자주 목을 기울였으므로 자신의 머리 위치가 낮아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현장에 있던 한국 팀의 코치와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기서 말한 ‘위화감을 느낀다’는 일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말로 설명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감각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미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분만 보지 않고 전체를 바라보면서, 과거 움직임의 잔상과 비교해 위화감을 찾아낸다. 그러려면 먼저 전체를 붙잡아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력은 시력검사표의 1.2나 2.0 같은 수치가 아니다. 전체를 보는 힘, 말하자면 ‘전체 시야’ 또는 ‘전체의 눈’이다. 나는 작귀회 도장에 있을 때 구석에 서서 보기만 해도 각 탁자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여러 탁자에서 각각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모두 보인다.

하지만 마작 DVD를 제작할 때 텔레비전 화면 속 대국을 보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작은 화면 안의 상황은 도무지 알 수 없다.

화면이라는 한정된 부분만 바라보고 있으면 내 눈까지 잘려 나간 듯한 감각이 든다. 자연에 맞닿은 전체를 보는 힘은 있지만, 인공적으로 잘라낸 한 부분을 보는 힘은 내게 없는 셈이다.

그런데 현대인의 생활은 오히려 이렇게 잘라낸 한 부분만 보는 힘에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에는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전화가 필수품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도 ‘컴퓨터의 눈’, ‘휴대전화의 눈’이 되어 버렸다. 작은 틀 안을 보는 힘은 있어도 큰 판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해 수많은 것을 놓친다.

나는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갖고 있지 않고, 사용법도 모른다. 텔레비전 화면 속 상황조차 이해하지 못하니 휴대전화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시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 대신 나는 바다에 가면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물고기와 조개가 보인다. 마작도 현장에서 직접 보면 멀리서도 전개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자연과 함께 살던 옛사람에게는 이런 ‘전체의 눈’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인은 본래 가지고 있던 그 힘을 잃어버렸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첫인상’은 날마다 달라진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라”라는 말을 흔히 한다. 나는 외모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첫인상이 전부다”라는 생각에도 반드시 동의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기분과 마음은 날씨처럼 날마다 달라진다. 머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플 수 있고, 몸 상태도 날마다 다르다. 처음 만났을 때 어딘가 짜증스러워 보였던 사람이 다음번에는 그 짜증이 풀려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기운이 좋은 날도 있고 영 좋지 않은 날도 있다.

첫인상은 그날 그 순간에 받은 인상일 뿐이므로 그것이 전부일 수 없다. 상태가 좋을 때와 나쁠 때를 포함해 열 번, 스무 번 거듭 만나며 여러 모습을 본 다음에야 “이 사람은 대체로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첫인상뿐 아니라 내가 사람을 볼 때 중시하는 것은 언제나 전체다. 말, 표정, 몸의 움직임을 한데 묶어 보면 “신경이 예민하구나”, “세세하구나”, “대충대충 하는 사람이구나”처럼 성격과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신경질적인 사람은 시선을 자주 피한다. 보는 듯하면서도 보지 않고, 금세 시선을 돌려 버린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엉뚱한 곳을 바라본다. 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해 상대를 보면서 말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다만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 단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경우도 있으므로 모두 예민한 성격이라고 묶을 수는 없다.

쉽게 속는 사람 가운데는 고정관념에 붙잡힌 사람이 많다. 사람을 구별하고 삶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고 전체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런 판단을 거듭할수록 사람의 성격뿐 아니라 사물의 본질도 보이기 시작한다.


■ 현대인의 치우친 걸음걸이가 생기는 이유

걷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동작이다. 너무 기본적인 움직임이라 의식하며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의식하지 않는 움직임은 무심코 드러나는 버릇과 같아서 그 사람의 살아온 방식과 생활습관이 나타난다.

도시와 농촌에 사는 사람의 걸음은 서로 다르다. 메이지 시대 이전 일본인이 같은 쪽 손과 발을 함께 내미는 ‘난바 걸음’을 걸었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시대에 따라서도 걸음걸이는 변한다.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발끝으로 땅을 긁듯 걷거나 무게중심이 지나치게 앞쪽으로 쏠린 사람이 많다. 발바닥 전체를 균형 있게 사용하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본인은 평범하게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옆에서 보면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쳐 균형이 나쁘다. 이는 본능적으로 자기 안에서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장애물을 만나거나 목표에 도달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데 스스로 제동을 거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삶에서도 일이 생길 때마다 브레이크를 건다. 무엇인가를 피하거나 달아나듯 본심을 감추며 살아간다.

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브레이크를 거는가. 과거에 마음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에게 학대를 받았거나 심한 괴롭힘을 당했을 수도 있다. 그때부터 자신의 마음을 정지시킨 것이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목표와 기대가 어긋난 일을 계기로 멈춰 버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과거의 한 지점에 걸린 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과거를 끌고 걷는 사람은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듯한 위화감을 품고 계속 걸어간다. 그러면 정신의 균형도 무너지므로 사람 많은 곳에서 남과 자주 부딪히게 된다.

치우친 걸음걸이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자기 목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에 따라 매우 힘든 작업일 수 있다. 그래도 ‘위화감 없는 걸음’을 되찾는 첫걸음은 거기서 시작된다.


■ 집착은 발을 땅에서 띄운다

종종걸음으로 부산하게 걷는 사람이 정말 많아졌다. ‘서두른다’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전철 한 대를 놓쳐도 큰일이 아닌데 플랫폼에서 뛰어 올라탄다. 시간에 여유가 있어도 눈앞에 전철이 서 있으면 반사적으로 달린다.

그 행동에 대단한 의미는 없다. 서두름을 착각한 채 그저 조급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렇게 되기 쉬운지도 모르지만, 조급해지거나 서두르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일도 중요하다.

긴장과 압박에 약한 것은 모두 조급함에서 비롯된다. 목표를 향해 노력하지만 좀처럼 닿지 않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조급함을 조절할 수 있다면 긴장과 압박도 크게 줄일 수 있다.

반면 이른바 시골에 가면 사람들의 걸음부터 다르고, 무엇보다 초조함이 적다. 시골의 땅이 흙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흙은 살아 있으므로 흙에 닿으면 생명을 실감할 수 있다. 도시의 콘크리트는 자연물이 아니고 숨 쉬지 않기에 사람에게 위화감을 일으킨다.

살아 있는 것과 접촉할 공간이 줄어들면 생명에 대한 생각도 달라진다. 무차별 살인 같은 잔혹하고 무의미한 사건이 늘어나는 데에도 이런 시대적 배경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느낀다.

마음이 병든 사람의 걸음은 어딘가 어색하다. 발끝이나 뒤꿈치 한쪽에 무게중심이 치우친다. “발을 땅에 붙이고 산다”라는 표현을 빌리면, 이런 사람은 말 그대로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상태다.

본래는 발을 땅에 붙인 삶이 바람직하다. 남에게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삶이라도 땅을 딛고 사는 편이 낫다. 인간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발이 땅에서 뜬 사람은 대개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다. 어릴 때부터 공부만 해 온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공부라는 틀에 갇히고 걸음도 어딘가 어색하다. 그런 사람이 부모가 되면 자녀에게도 자신과 같은 집착을 강요한다. 이 ‘부정적인 연쇄’를 끊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본인이나 주변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리면 연쇄를 조금이라도 약화할 수 있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발을 땅에 붙이고 걷는가. 나는 땅을 딛고 살아가는가.

당신의 발은 지금 땅에 닿아 있는가.


■ 도시의 혼잡 속에서도 부딪히지 않고 걷는 비밀

세상에는 여러 직업이 있고, 직업에 따라 사람의 몸짓과 행동도 달라진다. 교사, 정치인, 경영자처럼 직업과 지위가 몸의 움직임을 빚기도 한다.

이를 ‘환경에 물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직업이 만든 변화는 환경을 벗어나면 쉽게 사라진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경우가 있어도 그것은 도금과 비슷하다. 벗겨지면 본바탕이 다시 나타난다. 직업 환경의 힘은 그 정도다.

하지만 직업이 아니라 ‘지역’이라는 환경의 차이는 이야기가 다르다. 전국 각지의 말과 생활습관이 다르고, 생활습관은 버릇을 만든다. 지역은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 걸음걸이 하나만 보아도 도시와 지방이 다르다.

도심의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모습을 보면 인간에게 대단한 능력이 숨어 있음을 실감한다. 큰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이쪽의 백 명과 저쪽의 백 명이 뒤섞여도 좀처럼 충돌하지 않는다.

각자 제멋대로 걷는 듯하지만 부딪히지 않는다. 도시에 사는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걷는 법을 익혔다. 충돌할 것 같아도 순간적으로 피하는 능력이 몸에 밴 것이다.

이는 걷는 동작 자체가 서로 부딪히지 않을 간격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간격을 유지한 채 달리라고 하면 쉽지 않다. 백 명과 백 명을 달려서 교차하게 하면 아무도 부딪히지 않는 상황은 기대하기 어렵다.

도시인은 거리를 걸으며 다른 사람과 충돌하지 않을 거리감을 자신도 모르게 배운다. 반대로 지방에는 지방의 간격과 거리감이 있다. 보행자 수 자체가 적다. 지방 사람이 도시에 와서 당황하는 까닭은 자신에게 익숙한 거리감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걷기에도 수준이 있다

거리를 보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걷는 사람이 많다. 멍하니 걷거나 주의가 산만한 사람이다. 걸으면서 휴대전화 메시지만 들여다보는 사람은 애초에 인간에게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이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머릿속에서 빠져 있다.

보도에서 여성을 마주칠 때 “여자는 좀처럼 먼저 비켜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남성이 있다. 여성 쪽에 “남자가 비켜 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보도에서 여성과 마주치면 되도록 차도 쪽으로 비켜 준다. 상대가 어린아이일 때도 같다. 밤에는 더 주의를 기울인다. 여성은 밤길을 걸을 때 경계심으로 온몸이 긴장해 있다.

그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기 위해 맞은편에서 여성이 오는 것을 보면 길 반대쪽으로 옮긴다. 남자라면 그 정도의 배려는 해야 한다. 먼저 “나는 위험하지 않다”고 보여 주는 것이다.

여성이 앞에서 걷고 있다면 바로 뒤를 바짝 따라가서도 안 된다.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예의다. 추월해야 한다면 간격을 유지하고 발소리를 일부러 들려 자신의 위치를 알린 다음 지나간다.

인간의 기본 동작인 걷기 하나도 결코 단순하지 않다. 여러 상황을 관찰해야 하고, 신경도 써야 한다.


■ 다리 떨기에 숨은 의미

사람의 버릇 가운데 흔한 것이 다리 떨기다. 다리 떨기는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므로 주변 사람이 쉽게 알아챈다. 보는 쪽에서도 위화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다리뿐 아니라 머리, 어깨, 팔, 손가락 등 몸 어딘가를 불필요하게 흔든다. 불필요한 움직임이 반복되면 버릇이 되고 위화감의 근원이 된다. 필요한 움직임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불필요한 움직임은 자연스러운 동작이 아니므로 여러 문제를 낳는다.

사람은 흔히 “곤란한데”, “일이 잘못됐는데”라고 느낄 때 불필요한 움직임을 보인다. 업무나 돈 문제 등 일상에서 반복되는 ‘좋지 않다’는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 사회에서 살면서 곤란한 일이 전혀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그런 일이 많은 사람은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불필요한 동작도 자연히 많아진다.

불필요한 움직임을 줄이려면 ‘좋지 않은 일도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에는 맛있는 것도 있고 맛없는 것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한 일도 그저 하나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나 좋은 것과 맛있는 것만 노리면 나쁜 것, 맛없는 것을 만났을 때 대처하지 못하고 당황한다. 그 초조함이 불필요한 움직임으로 드러난다. “서두르지 마라”, “진정해라”라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은 좋은 것만 얻으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한다.

세상에 좋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많은 사람이 좋은 것에 대한 환상을 품을 뿐, 실제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다. 그것을 깨달으면 다리 떨기를 비롯한 불필요한 움직임도 서서히 줄어든다.


■ 서양인의 몸짓은 왜 큰가

사람이 의사를 전달할 때 몸짓과 손짓을 사용하는 것을 보디랭귀지라고 한다. 서양인과 일본인의 몸짓을 비교하면 서양인이 압도적으로 크다. 일본인의 눈에는 과장되어 보일 정도다.

왜 서양인의 몸짓은 커졌을까.

그 답은 그들이 걸어온 역사에 있다. 다양한 민족이 뒤섞여 살던 유럽에서는 고대부터 영토 분쟁이 반복되었고 이문화 교류도 활발했다. 신대륙 아메리카에도 유럽 각지의 사람들이 건너가 다민족 국가를 만들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과 접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진의를 전달하려다 몸짓이 자연히 커진 것이다.

몸으로 뜻을 전달하는 제스처 게임을 보면 엉뚱한 동작인데도 주변 사람이 의미를 알아맞히는 경우가 있다.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전달하려 하면 몸의 움직임만으로도, 조금 빗나간 동작일지라도 충분히 뜻이 통한다는 좋은 사례다.

유럽과 미국처럼 이동하고 개척해 온 민족의 역사에서는 몸짓이 커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오늘날 그들처럼 적응력이 높은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서 활약하는 것도 필연적일 수 있다.

앞으로 인터넷과 가상현실 사회의 영향으로 인류 전체의 몸짓은 작아질지 모른다. 그래도 오랜 세월 몸에 새겨진 높은 적응력은 여러 장면에서 계속 발휘될 것이다.


■ 패를 버리는 행위에 아름다움과 추함이 드러난다

마작에서는 네 명의 플레이어가 열세 장의 패를 들고, 산에서 한 장을 가져온 뒤 손패에서 한 장을 버리는 행동을 반복한다.

사람의 성품이 드러나는 때는 패를 가져올 때가 아니라 버릴 때다. 열세 장 가운데 어떤 패를 버리는가. ‘버린다’는 한 동작 안에 여러 의미가 담긴다.

용기와 정확한 상황 판단으로 패를 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제 승부에서는 쉽지 않다. 한 타 한 타를 버리는 과정에 그 사람의 위험함, 추함, 거침, 모호함, 겁이 뒤섞여 나온다.

버리거나 자르는 행동에는 임기응변, 적재적소, 유연함이 모두 갖춰져야 한다. 패를 버리는 장면에는 용기와 의심, 손익 계산을 비롯해 인간의 욕망과 보기 싫은 부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작귀회에서는 버리는 방식과 패를 자르는 동작이 조금이라도 아름다워지도록 그 연습을 반복한다. 먼저 움직임을 다듬고, 다음에는 사고방식을 다듬는다. 몸과 마음 양쪽에서 가능한 한 좋은 형태로 패를 자르기 위해 매일 단련한다.

버리는 동작을 연습하다 보면 마작에 대한 미의식이 생긴다. 동작을 갈고닦는 과정에서 생각에도 점차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추한 부분을 지닌다. 그것을 완전히 없애는 일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가라앉혀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움직임과 생각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고쳐 간다. 그것이 중요하다.

그 중요함을 알기에 작귀회에서는 오늘도 패를 자르는 연습을 한다.


■ 일류도 승리를 눈앞에 두면 떤다

긴장했을 때 손이나 다리가 떨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글씨를 쓸 때 손이 떨리고, 많은 사람 앞에서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무릎이 흔들린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교감신경의 작용으로 손에 땀이 나듯 신경의 작용으로 몸이 떤다.

수많은 격전을 이겨 온 장기 기사 하부 요시하루조차 대국 막판에 손이 떨릴 때가 있다고 한다. 타이틀이 걸린 큰 승부에서 승리를 확신한 순간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승리가 보이면서도 “어딘가 놓친 수가 있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목숨을 깎는 듯한 승부를 셀 수 없이 치렀다. 단 하나의 간과 때문에 역전당하거나, 다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기습을 받은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거듭했기에 진정한 승부사인 그의 손은 떤다. 수많은 싸움을 지나온 사람일수록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두려움을 안다.

인간은 승리를 확신하면 마지막 순간에 흔들린다. 프로야구에서 단 한 명만 더 잡으면 노히트 노런을 완성하는 순간 안타를 맞고, 이어 역전까지 허용하는 투수가 있다. 축구에서는 마지막 5분에 두세 골 차가 뒤집히고, 격투기에서는 라운드 종료 직전 역전의 한 방을 맞아 KO되기도 한다.

사람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흔들린다. 과신하거나 수비적으로 변하면서 그때까지 유지해 온 자세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이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흔들리기에 인간이다. 누구나 약함을 지니며, 아무리 강해 보이는 사람의 마음속에도 약함은 반드시 있다. 그 약함이 흔들림을 만든다.

흔들림이 있기에 여러 장면에서 수많은 드라마가 생긴다. 그 흔들림 때문에 졌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라면 당연하다. 이번 패배를 다음에 살리자”라고 생각하며 승부를 이어 가는 편이 훨씬 중요하다.


■ ‘부드러움’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라는 말이 있다. 약자가 강자를 쓰러뜨린다는 뜻으로 흔히 쓰이지만, 굳센 힘의 방향을 유연하게 비껴 가고 때로는 그 힘까지 이용해 이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스포츠, 마작, 장기뿐 아니라 모든 승부에 통하는 말이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힘과 속도를 얻겠다며 무작정 근육을 단련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이다. 움직임이 크고 강한 것이 곧 힘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 강함은 고요하고 부드러운 것 안에 숨어 있다.

나는 프로 격투가들과 교류하며 가끔 몸의 움직임을 가르친다. ‘고요함의 힘’을 보여 주기 위해 체중 100킬로그램의 선수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단순히 힘으로만 누르면 쉽게 튕겨 나가겠지만, 내가 누르면 그는 꼼짝할 수 없다. 고요하고 부드러운 힘으로 거친 힘을 제압하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표현하면 몸 전체로 상대의 무게중심을 눌러 잡는 감각이다.

중국의 전통 무술인 태극권도 느리고 고요한 움직임의 연속이다. 그 유연한 동작을 구현하려면 체력뿐 아니라 정신과 호흡을 포함한 내면의 수련도 필요하다. 그 안에도 강함을 제압하는 부드러움의 비밀이 있다.

부드러운 움직임은 같은 힘을 내더라도 불필요한 힘을 덜 쓰므로 효율이 좋고 지치기 어렵다. 움직임의 절전 방식이라고 해도 좋다. 다음 동작으로 옮기기도 쉽고 상대의 변화도 따라갈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승부의 세 원칙은 ‘임기응변’, ‘적재적소’, ‘유연성’이다. 임기응변은 어떤 상황에도 동요하지 않고 냉정하게 대응하는 것, 적재적소는 그때그때 알맞은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마지막 유연성은 몸의 유연함이 아니라 어떻게 공격하고 어떻게 받을지를 생각하는 사고의 부드러움을 뜻한다.

움직임과 함께 생각도 부드러워야 한다. 그런데 일본의 정상급 선수 가운데도 생각이 딱딱한 채 훈련을 쌓는 사람이 적지 않다.

생각이 굳은 사람은 근육과 관절 등 몸의 여러 부분도 굳기 쉽다. 몸이 굳으면 마음도 굳는다. 일본에서는 ‘굳은 의지’를 미덕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본래는 ‘유연한 의지’가 더 좋다.

재능이 있는데도 정신과 몸의 유연성이 부족해 성장하지 못하는 선수도 많다. 유연성은 모든 승부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 기척을 지우면 상대의 빈틈을 찌를 수 있다

나의 관찰력과 통찰력은 어린 시절에 길러졌다. 아이들과 놀면서 상대의 빈틈을 알아차렸고, 그 틈을 찌르며 놀았다.

곧 아이들의 빈틈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어른의 빈틈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른에게도 빈틈이 꽤 많구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가게 천장에 매달아 둔 잔돈 바구니에서 10엔짜리 동전을 꺼낸 적도 있다. 점원과 손님이 가득한데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어른이 많은데도 들키지 않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꺼낸 뒤 다시 바구니에 돌려놓았지만 끝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빈틈을 엿보는 놀이를 하며 자연스럽게 기척도 지울 수 있게 되었다. 음료 회사에서 주스를 몰래 가져온 적도 있다. 처음에는 한두 병이었지만 나중에는 한 상자를 들고 나왔다. 경비실 앞을 지나야 했고 상자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까지 났지만 경비원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았다.

상대의 틈을 찌르고,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을 찌른다. 그런 식으로 여러 빈틈을 찾아 놀았다. 물론 모두 엄연한 범죄이므로 독자는 절대 흉내 내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도 파티 같은 자리에서 기척을 지운 채 상대에게 다가가 놀라게 할 때가 있다. 나는 키가 커서 눈에 띄지만 상대는 바로 곁에 있어도 알아채지 못한다. 시야 안에 들어와 있는데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상대의 틈을 관찰하면 몸과 마음의 허점이 보인다. 빈틈이란 다시 말해 사각지대다. 인간은 수많은 사각지대와 약점을 품고 살아간다.

나에게도 당연히 빈틈이 있다. 하루 24시간 신경을 곤두세울 수는 없다. “방심했구나” 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다가도 순간적으로 깨어날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요즘에는 잠에서 깨는 일이 더뎌졌다. 그제야 “예전에는 어떻게 즉시 깨어났던 걸까”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꽤 둔감해지고 있다.

그 증거로 이제는 전철 안에서도 잘 수 있다. 전철에서 조는 것은 빈틈 그 자체다. 예전에는 전철에서 절대 졸지 않았고, 애초에 남 앞에서 잠드는 일조차 불가능했다.

이는 내 삶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아야 할 필요’가 줄었다는 뜻일 것이다. 승부사로 살아오며 몸에 밴 태도였지만, 이제는 그럴 필연성이 사라진 듯하다. 그 시대가 끝났다고 본능이 알려 주는 것이다.

예전에는 금세 나았을 상처가 오래가기도 한다. 약한 상태가 길어진다. 젊을 때도 약한 부분은 있었겠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나이가 든 뒤에야 그것을 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일인지도 모른다.


■ 소년 시절의 나를 사로잡은 남자

지금은 내가 ‘작귀’라고 불리고 책도 내지만, 이런 사람이 되려고 목표를 세우고 살아온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계속 좇은 결과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런 삶이 좋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좋아서 걸어왔을 뿐이다.

그 배경에는 “이런 삶은 정말 좋다”고 느끼게 한 동네의 형이나 어른들이 있었다.

“좋아서 견딜 수 없다. 저런 방식으로 사는 것이 너무 좋다.”

그 정도의 마음을 품으면 삶의 방식이 변한다. 무언가를 그토록 좋아할 때 사람은 그곳에 가까이 갈 수 있다. 멀리서 “저렇게 살면 좋겠다”고 바라보기만 해서는 언제까지나 가까워지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운동선수나 연예인을 동경할 수는 있어도 주변의 평범한 어른을 동경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우리가 어렸을 때는 운동선수나 영화배우가 아니어도 현실 속 가까운 곳에 동경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나름의 삶의 자세를 찾아왔다.

내가 어릴 때 “저 사람의 삶이 너무 좋다”고 느낀 이는 육체노동을 하던 이웃 아저씨였다. 정장을 입고 가방을 든 회사원이 아니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을 쓰며 일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서겠구나” 하는 분위기가 났다. 일이 터지면 몸을 던져 처리할 풍격이 있었다.

골목대장이던 내게 그는 하나의 이상이었다. 아마도 그 사람이 지닌 지도자의 자질에 소년이던 내가 매료되었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영화 스타는 이시하라 유지로였다. 나도 그를 보며 멋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타를 향한 동경이었다. 이웃 아저씨에게 느낀 “저런 삶이 견딜 수 없이 좋다”는 감정과는 전혀 달랐다.

내 어린 시절은 물건이 풍족하지 않은 시대였다. 그러나 가까이에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느끼게 해 주는 어른이 많았다는 점에서는 무척 풍요로웠다고 지금 새삼 느낀다.

 


제3장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방법

 

 

 


■ 사람을 ‘대하는’ 감각을 갈고닦아라

 



평소에는 좋은 사람인데 운전대만 잡으면 인격이 달라지는 사람이 주변에 있지 않은가. 자동차 안은 소유자만의 공간이고, 자기 집과 비슷한 곳이다. 그래서 무심코 본성이 드러난다.

자동차는 쇳덩어리다. 사람이 부딪히면 크게 다치므로 보행자는 차를 피한다. 운전자는 보행자가 알아서 피해 주니 마음이 커지고, 큰 차를 타면 태도도 더 커진다.

운전할 때 인격이 변하는 사람은 쇳덩어리로 둘러싸인 폐쇄된 공간에서 자기 세계에 푹 빠져 있는 것이다. 길을 걷는 사람도 인간이고 차를 모는 사람도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쇠와 동화되어 사고방식도 딱딱해지고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이는 환경뿐 아니라 물질과 물건에 의해서도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인간관계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신경 쓰는 사람이 많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고, 괴롭힘당하고 싶지 않고, 소중히 대접받고 싶어 한다. 결국 주변 사람이 자신을 한눈에 알아봐 주기를 바란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좋은 물건을 갖는 것이다. 좋은 것을 소유하거나 몸에 걸치면 주변의 반응과 대우가 달라진다.

인간관계에서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감각이 중요하다. 내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또 남에게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람을 ‘쓰거나 쓰이는’ 관계가 아니다. ‘부려 먹는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사람을 사용한다는 감각은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부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자기 아이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주변 사람을 대하는 솜씨가 좋아지면 자신이 받는 대우도 자연히 좋아진다. 아이에게는 아이에게 맞는 방식이 있고, 젊은이와 노인, 여성에게도 각각 알맞은 대하는 법이 있다.


■ 공기를 3분의 1밖에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

자연계의 동물은 이틀이나 사흘 동안 먹이를 구하지 못할 때가 있다. 굶어 죽는 동물도 있겠지만 먹이를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음의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인간은 조금만 상태가 나빠져도 곧 마음의 병을 앓는다. 이제 거의 모든 사람이 그 예비군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기분과 몸 상태에는 누구나 좋고 나쁜 때가 있으며 언제나 똑같은 사람은 없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 나름의 리듬과 파동, 이른바 바이오리듬이 있었다.

유독 오늘날 그 변화가 질병으로 취급되는 까닭은 모든 것이 ‘능력’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학력사회와 결과지상주의는 모든 일을 결과로 평가하고 그것을 곧 능력으로 규정한다. “그 능력이 그 사람의 전부다”라는 관념을 심는다.

실패하거나 패배한 것이 단지 그날 컨디션이 나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을 자기 능력의 척도로 삼아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라고 단정하고 스스로 병 속으로 들어간다. 현대에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은 것은 결과지상주의 능력사회가 낳은 폐해다.

옛날에도 상태가 좋은 날과 나쁜 날은 있었지만 그것을 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오늘 컨디션이 좋네”, “오늘은 별로네”라고 말했을 뿐 “너는 병이야”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늘날의 능력사회에서는 그 자연스러운 변화까지 하나의 병이 된다.

내 생각을 한 가지 예로 설명해 보겠다.

아키하바라에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른 청년도 어린 시절에는 공부를 어느 정도 잘하고 능력도 있었다. 능력사회 안에서 만족하며 살던 시기가 있었지만 일정한 수준에 이르자 기존의 능력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능력사회의 벽과 부딪혔다. “지금까지는 잘했는데”라는 생각과 함께 위만 바라보며 살던 사람이 한꺼번에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 순간 사람에게는 주변 공기가 3분의 1로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 당연히 마시던 공기가 갑자기 부족해진 듯 숨을 헐떡인다.

능력만 좇으면 사람은 일종의 산소결핍 상태에 빠진다. 뇌에 산소가 닿지 않는 것처럼 사고가 흐려지고, 심해지면 망상과 환상까지 생긴다. 에베레스트처럼 산소가 희박한 고산에서 등반가가 환각을 보는 것은 생리적 현상이지만, 사람은 심리 작용만으로도 비슷한 산소결핍에 빠져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 긴장하고 얼어붙는 일도 이런 상태에서 시작된다. “머릿속이 하얘졌다”는 말처럼 긴장이 심해지면 뇌에 산소가 3분의 1밖에 들어가지 않는 듯 느껴지고, 방금까지 기억하던 말이 연결되지 않거나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공기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자기 몸이 제멋대로 그렇게 반응할 뿐이다. 이를 피하려면 미리 자기만의 방식을 가져야 한다. “잘해야 한다”, “좋게 보이고 싶다”처럼 능력사회가 주입한 생각을 버린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좋은 말을 해야지”, “감동시켜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순간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표현할 뿐이다. 마작도 같다. 그 자리에서 최선의 수를 둘 뿐이며, 그러면 상대가 스스로 무너진다. 능력사회가 심은 “반드시 이기고 싶다”는 마음만 붙들어도 사람은 다시 숨이 막히게 된다.


■ 자신의 바깥, 안쪽, 중심핵을 보라

요즘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런 사람이 많다. 병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딘가 가라앉아 있고, 어깨가 처지고,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등 한 걸음 직전의 사람도 자주 보인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정신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본질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그래서 병을 앓는 사람이 늘고, 그 병에 대한 오해도 함께 커진다.

인간의 정신은 ‘바깥’과 ‘안’, 그리고 안의 더 깊은 곳에 있는 ‘중심핵’으로 이루어진다. 바깥과 안과 핵, 이 세 가지가 있을 때 비로소 정신이 생기고 사람은 사람다운 길을 걷는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이 세 요소의 균형을 잡으며 산다. 시소에 비유하면 양쪽 끝 어느 쪽도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떠 있는 상태가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몸부림치는 사람도 많다. 시소가 기울면 편향이 생기고 정신이 흐트러져 병이 된다. 균형을 잡으려 지나치게 애쓴 탓에 병이 생길 수도 있고, 환경의 영향으로 균형이 깨질 수도 있다.

정신의 균형을 지키려면 시소 한가운데 서 있다는 감각이 중요하다. 그러면 자기 안에 핵이라는 축이 생긴다.

공도 중심이 있기 때문에 굴러가고, 지구도 중심축이 있어 일정한 리듬으로 자전한다. 태양계 자체도 자전과 공전의 균형 위에 성립한다. 그 중심에는 반드시 핵이 되는 축이 있다.

많은 사람은 정신의 균형이 안쪽으로 무너질 때만 병이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남이나 사회를 탓하며 바깥쪽으로 무너지는 병도 있다. 최근의 무차별 살인 범인들은 바깥으로 균형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도 처음에는 내부의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처럼 가까운 사람과 갈등한 뒤 그 화살이 밖을 향하면서 균형을 크게 잃고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해치는 범죄로 나아간다.

‘생활한다’는 일도 안과 밖의 관계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집 안에만 있으면 먹고살 수 없으므로 사람은 밖에 나가 일한다. 하지만 바깥일만 지나치게 중시하면 일밖에 모르는 인간이 된다.

일만 하는 사람이 늘면 경제는 좋아질지 모르나 안쪽인 가정을 소홀히 하면 이혼과 가정 붕괴 같은 문제가 생긴다.

나는 “개체는 전체이고 전체는 개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정신도 마찬가지로 “안은 밖이고 밖은 안이다.” 바깥과 안, 그리고 그 한가운데가 함께 있을 때 정신이 성립한다. 안과 밖만이 아니라 안의 더 안쪽에 중심핵이 있다는 감각을 가질 때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


■ 점점 얇아지는 현대인

전철을 타면 요즘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주변에 대한 관심을 거의 잃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낀다. 큰 소리로 떠들거나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다리를 길게 뻗고 앉는다. 차량 안에 자기밖에 없는 듯 행동한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만 보며 다른 사람과 일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회가 지나치게 편리해졌기 때문이다.

편리한 사회에서는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아도 무엇이든 쉽게 얻는다. 정보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한 가지를 조사하려 해도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자료를 찾아야 했지만, 이제는 컴퓨터 하나로 필요한 정보를 순식간에 얻는다.

모든 것을 쉽게 얻으니 사람은 수고를 꺼리게 된다. 인간관계, 물건 만들기, 생활의 모든 일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편하게 끝내려 한다. 과거보다 효율적이 되었지만 그만큼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옅어졌다.

이는 시대 전체가 모든 일에 대해 희박해졌다는 증거다. 그에 따라 인간도 얇아졌다. 에도시대 사람의 인간적 두께가 50센티미터였다면 현대인은 5센티미터 정도일 것이다.

겉으로는 체격이 커졌지만 인간 자체는 평면화되어 얇아졌다. 편리함이 좋은 것은 알지만 이보다 더 얇아지면 어떻게 될지 나는 위기감을 느낀다.

인간이 예전의 두께를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이마에 땀을 흘리는’ 일이 필요하다. 수고를 아끼지 않고 손익 계산도 잠시 내려놓은 채 여러 일과 사람을 직접 마주한다. 그렇게 하면 인간의 두께가 늘고 다음 시대로 이어지는 새로운 길도 보일 것이다.


■ 자극과 욕망을 통제하라

인간은 본래 자극을 원하는 생물이다. 누구나 크고 작게 자극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욕구가 지나치면 사람은 망가진다.

인간의 욕구는 계속 커지는 성질을 지녔다. 자극뿐 아니라 모든 욕망이 확대된다. 욕망 자체가 점점 더 큰 것을 요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커진 욕망으로 자신을 파괴하지 않으려면 통제가 필요하다. 먼저 “내게도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한 다음 그것을 조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광기로 변하고, 사람은 그 깊은 어둠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자극 가운데에는 혼자 얻을 수 없는 것이 많다. 혼자서도 느끼는 자극이 있지만 대부분은 사람과 마주하고 접촉할 때 생긴다. 남녀, 부모와 자식, 동료 사이에서 자극을 받는다. 그런데 그것을 얻으려 노력하고 집착하는 동안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엄격함’이라는 자극을 계속 주며 키우면 아이가 견디지 못해 부모가 생각한 방향과 전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부모가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라고 말할 수 있을 때는 그나마 낫다. 때로는 부모와 아이 모두가 매우 불행한 상황으로 빠진다.

여기서 말한 엄격함의 밑바탕에는 경쟁의식이 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경쟁의식이 존재감을 만들고 버릇으로 이어진다. 경쟁의식은 욕망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서 완전히 떼어 낼 수 없다.

누구의 안에도 경쟁심은 숨어 있으므로 욕망처럼 통제해야 한다.

경쟁의식은 농경문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인간에게 스며들어 반쯤 본능이 되었다. 밭을 일구며 정착하고 여러 가족이 모여 마을을 이루자 “옆집 밭보다 더”라는 경쟁이 생겼다. 이어 “이웃 마을보다 더”로 넓어지고 전문가와 마을을 통솔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권력과 격차도 생겼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경쟁은 인간에게 각인되었다.

오늘날도 아이는 학교에서, 부모는 회사와 지역 공동체에서 경쟁한다. 가족 모두가 일상에서 숨 돌릴 틈이 없다.

이런 세상에서 여러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본래 가족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이자 각자가 돌아갈 곳, 편안히 쉴 곳이어야 했는데 말이다.


■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는 사람들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고 연기를 잘하는 부류가 있다. 언론 보도에서 종종 보았을 것이고, 어쩌면 주변에도 있을 수 있다. 텔레비전 속 이야기라면 “별사람 다 있네” 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실제 주변에 있다면 남의 일이 아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연기를 잘하는 부류다. 판매 기술로 연기를 갈고닦고, 살아가는 지혜와 지식으로 배운다. 진심이 통하는 접객은 좋지만 오늘날 서비스 방식은 대부분 매뉴얼화되어 있다. 기계로 찍어 내듯 연기하는 사람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물건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현대사회는 정도가 지나치다. 손님을 인간이 아니라 돈덩어리로 보는 듯하다.

접객 태도를 매뉴얼화해 철저히 실행하면 경제는 성장할지 모르지만 결국 인간 붕괴로 이어진다.

웃음을 팔면 물건은 잘 팔린다. 그러나 웃음을 파는 일은 자신을 파는 것과 같다. 자신을 계속 팔면 언젠가 그 사람은 부서진다.

내가 작귀회 사람들과 ‘패의 소리’라는 가게를 시작했을 때 접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웃음을 팔지 마라. 웃음을 팔아 돈을 받겠다는 것만큼 볼품없는 일도 없다. 대신 찾아온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간으로 소중히 대하는 마음을 잊지 마라.”

그래서 지금도 작귀회 사람들은 가게를 찾은 손님에게 억지웃음을 팔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소중히 대접하는 일을 계속한다.

물론 능숙한 연기로 사람을 속이는 이도 많다. 점원의 태도에 넘어가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이용하고 후회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최근 사회문제가 된 보이스피싱도 연기로 속이는 전형적인 범죄다.

시야를 조금 넓히면 사실 사회 전체가 사람을 속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는다. 식품 유통만 보아도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복잡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속이기 쉽다. 식품 위장이 끊이지 않는 것도 그런 시스템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점원이나 회사라는 미시적 수준을 넘어 사회의 구조 자체가 속임수가 되어 간다.

이 사회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속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냉동만두에 농약 성분이 들어간 사건 같은 것도 특별한 예외만은 아니다. 우리는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교묘하게 속고 있다.

우리는 ‘속임수의 하늘’ 아래 산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의 사회는 정당함과 양식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반사회적으로 살 필요는 없지만 그런 구조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 허세를 부리는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이 없다

단순히 허세를 부리는 사람과 당당한 사람의 차이는 내면에서 배어 나오는 그 사람의 본질이다.

눈에 보이는 반응으로도 구별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그것이 허세였는지 진짜 침착함이었는지 대개 드러난다. 진정한 침착함을 가진 사람은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몸과 마음 모두 그렇다.

내면에서 좋은 삶의 자세가 우러나오는 사람은 멋있고 자연히 머리가 숙여진다. 말투가 거칠어도 멋있는 사람이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도 고개를 숙이게 하는 사람이 있다. “요즘 정치인 가운데 존경해 머리를 숙일 만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안타깝게도 한 명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다.

어느 산골에서 작업복 차림의 농가 할머니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이유 없이 고개를 숙이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있다. 그 사람의 살아온 방식이 온몸에서 드러났을 것이다. “무언가를 정말 소중히 여기며 사는구나”라는 느낌도 강했다. 그것이 밭인지, 가족인지, 직접 기른 채소인지, 자신의 삶인지, 아니면 그 모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걷는 모습에서 보였다.

인간은 먼저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 위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몇 가지 지니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젊은이들에게는 소중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가족도 부모도 아무래도 좋다고 느꼈거나, “소중한 것을 갖지 못한 나는 피해자다”라는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소중히 여길 수는 없다.

소중한 것은 여러 개여도 좋다. 다만 그 안에 반드시 ‘사람’도 넣어 두어야 한다. “내게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 ‘하면서’ 사는 생활을 권한다

어릴 때 “한 가지 일에 집중해라”라고 혼난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여러 일을 함께 하기보다 한 가지에 몰두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하면서 다른 것도 하는’ 생활을 권해 왔다. 한 가지를 지나치게 의식하면 오히려 본래 힘이 나오지 않는다. 의식을 한 점에 너무 집중하지 않기 위한 ‘하면서’다.

올림픽 선수 중에는 경기 전에 음악을 듣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하나의 ‘하면서’다. 음악이라서 좋은 것이 아니라 의식이 경기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몸이 이완되기 때문에 좋다.

전문가들은 음악의 효과라고 설명하지만 반드시 음악일 필요는 없다. 만담이나 코미디처럼 긴장을 풀고 의식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다.

사람이 집중할 때 그 방식을 보면 엉뚱하게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한 점에만 매달린 나머지 “왜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지 않았지?”라는 상황이 생긴다. 그러면 “이것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답하지만, 바로 그것이 방향을 잃은 집중이다.

“집중해서 하나만 파고들어라”라고 말하면서 올바른 집중법은 가르치지 않는 지도자를 조심해야 한다.


■ 나쁜 성격은 고치지 말고 ‘완화’하라

버릇은 고칠 수 있지만 성격은 대체로 고치기 어렵다. “신경질적인 성격을 고치고 싶다”는 상담을 받기도 하지만 완전히 바꾸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성격을 고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친다’기보다 ‘느슨하게 풀어 준다’는 감각을 가져야 한다.

감기에 걸리면 기침과 콧물이 나지만 계속 같은 정도로 나오지는 않고 조금씩 가라앉는다. 성격도 이런 식으로 서서히 완화하면 된다.

그러려면 먼저 문제로 느끼는 성격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집중해서 살피는 동안에는 약을 주는 것과 같아서 그 성격도 누그러진다.

성격은 만성질환과 비슷해 다시 나타나거나 심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거듭 관찰하며 조금씩 풀어 가는 수밖에 없다.

누군가 신경질적인 면을 고치고 싶다고 하면 나는 내가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민한 사람에게는 믿기 어려울 법한 내 과거의 경험을 골라 말한다. 그러면 상대는 “그런 삶과 방식도 있구나”라고 깨닫고 이해한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약이 된다.

작귀회 수련생 가운데도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 몇 명 있다. 꾀병이 진짜 병이 될 만큼 예민한 사람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감기를 만들어 내듯 자기 몸으로 병을 빚는다.

나는 그런 수련생에게 일부러 무신경한 모습을 보여 줄 때가 있다. 사용기한이 지난 안약을 넣거나, 결벽증이 있는 사람에게 땀이 많은 사람의 얼굴을 만져 보게 하기도 한다. 물론 나와 수련생 사이에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결벽증이 있는 수련생에게 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땀에 젖은 사람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만지며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보여 주었다. 그것을 몇 차례 반복하자 과민함이 조금씩 옅어졌다. 성격은 한 번에 고치기보다 서서히 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나친 공포를 느끼는 수련생에게는 몸이 굳는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권투 글러브를 낀 여자아이에게 1분 동안 맞아 보는 놀이를 시킨 적도 있다.

다른 수련생은 어떻게든 1분을 버티지만 공포가 심한 사람은 코피가 나고 입술이 터질 만큼 일방적으로 맞았다. 두려움 때문에 몸이 굳어 주먹을 피하지도, 가드하지도 못했다.

그 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가드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가드하면 버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가드도 몸을 굳히면 안 된다. 부드럽게 받아야 주먹의 힘을 흘릴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예민함은 마음의 경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수련생은 부모나 교사에게 “굳은 의지를 가져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 가르침으로 얻은 것도 있을 테니 전부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이 심어 놓은 더 큰 부작용도 분명 존재한다.


■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십자선을 가져라

“부모와 자식은 친구처럼 지내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부모의 위엄을 세우고 엄격히 대해야 합니까?”

가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둘 다 필요합니다”라고 답한다.

가정뿐 아니라 오늘날 사회는 ‘세로선’과 ‘가로선’을 모두 가르쳐야 한다. 세로선은 위아래 관계이고, 가로선은 동료 의식이다.

우리 집에는 암묵적으로 내가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다. 가장이 앉는 자리다. 아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도 내가 방에 들어오면 곧 자리를 옮긴다. 가족 모두 그곳이 내 자리라는 것을 안다. 방 안을 걸을 때도 아들은 내 동선을 먼저 살피므로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이것이 세로선이다.

‘가장의 기둥’이라는 말처럼 가정에도 하나의 세로선이 분명히 서 있어야 한다.

물론 가로선도 가르친다. 세로선만으로 살면 신뢰관계가 사라진다. 가로선이 들어가야 신뢰가 생긴다.

가로선은 “우리 모두 같은 편이다”, “너무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가로선을 가르치려면 위에 있는 사람이 먼저 옆으로 내려와야 한다. 윗사람이 수평이 되지 않으면 아랫사람도 수평으로 설 수 없다. 나는 가정과 도장에서 상황에 맞게 아래로 내려가거나 옆에 선다.

“지금은 세로로 설 때다”, “지금은 가로로 설 때다”를 판단하려면 감각이 필요하다. 이는 위치가 위인지 아래인지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해당한다.

내가 “이번에는 서로 같은 위치에서 하자”고 해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어딘가에서 자기 이익을 계산하거나 교활하게 행동한다. 살아오며 세로선만 배운 영향도 있을 것이다.

세로선과 가로선이 교차할 때 좋은 인간관계가 만들어진다. 가정, 학교, 회사 어디에서든 두 선이 만나는 ‘십자선’이 필요하다.


■ 얽매임은 존재의 내부를 비운다

나는 이른바 ‘업계’라는 것을 싫어해 될 수 있으면 거리를 둔다. 좁은 세계에서 생기는 시기와 질투, 누군가와 사귀면 다른 누군가가 불평하는 관계가 답답하다. 업계는 잘 관리되어 도움을 줄 때도 있지만 대부분 날개조차 제대로 펼 수 없을 만큼 숨 막힌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살아가며 인간관계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좋은 관계도 있고 나쁜 관계도 있으며, 사람들은 나쁜 관계를 ‘얽매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얽매임’이라는 말은 소리부터 좋지 않다. 무엇인가 몸에 감겨 붙는 느낌이다. 거기에 사로잡힌 사람은 전체 모습에서 답답함이 느껴진다.

남쪽 섬의 숲을 가면 큰 나무 하나에 덩굴이 빽빽하게 감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덩굴에 휘감긴 나무는 속의 양분을 모두 빼앗겨 내부가 텅 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얽매임’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인간관계의 얽매임에 붙잡힌 사람도 똑같아 보인다. 모든 것을 빨려 내부가 비어 버린 듯하다.

얽매임을 짊어진 사람은 자기라는 존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속을 계속 공동화한다. 얽매임은 흡혈귀와 같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그것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나쁜 관계도 ‘얽매임’이라는 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좋지 않은 상대를 만나면 “붙잡히지 말자, 붙잡히지 말자”라고 의식한다. 사로잡히기 때문에 속을 빨리는 것이지, 사로잡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주변에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네”라고 생각되는 동료도 있다. 야구로 말하면 타석에서는 삼진, 수비에서는 실책만 하는 유형이다. 그래도 나는 그 관계를 얽매임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팀원이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안다. 그렇다면 내가 던지고, 치고, 지키면 된다.

팀원이 삼진을 당하거나 실책해도 내 삶의 자세는 바꾸지 않는다.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덩굴이 감겨도 속을 다 빼앗기지 않고 살아가려면 그런 의식을 지녀야 한다.


■ 자기 자신을 구하는 방법

부드러운 솜으로 서서히 목을 조르는 듯 숨 막히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구원을 찾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흥종교에 빠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그 징후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중한 아이를 정성껏 키운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계속 지키면 그 사람은 그동안 구원받는다.

“아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에게도 소중히 여길 대상은 반드시 있다. 일일 수도 있고 친구나 동료일 수도 있다.

구원받으려면 솔직한 마음과 자연스러운 자세로 여러 일에 임해야 한다. 일에도 욕심과 계산 같은 불필요한 것이 끼어들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다.

막대한 부를 쌓은 빌 게이츠도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사업의 일선에서 물러나 자선활동에 힘을 쏟았다. 개발도상국 아이들을 돕지만, 그 활동에서 그는 아이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봉사활동에는 자신을 구하려는 면도 있다. ‘남을 위해 산다’는 일은 자기만족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 이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나는 오직 남을 위해 살고 있다”고 말하면 오히려 구원받지 못한다. 조금은 자조적으로 “이것도 자기만족일지 모른다”고 인정하는 편이 낫다. 내가 작귀회 활동을 두고 “전부 너희를 위한 것이고 내 만족은 전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면 아마 나 역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 이겼다면 양보하라

현대사회는 ‘격차사회’라고 불리고 부유한 사람은 ‘승자’로 분류된다. 그들은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승자 가운데에는 사업 이외의 부분이 크게 결여된 사람이 많다. 장사, 기업, 정치에서 큰 성공을 거두려면 현실적으로 정의감만 붙들고는 어렵다. 순수한 정의만 좇는다면 정상까지 오르기 힘들다.

일본과 세계에는 유명한 경영자가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어디에선가 정의감을 팔거나 떨쳐 내었다. 오직 정의감만으로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거의 없다.

사회에서 부딪히는 동안 어린 시절의 정의감을 잃고, 일에서 이익을 만들며 성공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어른이 된 것’이라고 변명한다.

아이에게는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는 어른 가운데 과연 몇 명이 진짜 정의감을 계속 실천하고 있을까.

회사든 조직이든 사람은 윗자리에 오르면 좀처럼 양보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양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위에 서고 싶어 한다.

위로 갈수록 지위, 명예, 돈이 늘고 그만큼 남이 끼어드는 일도 많아진다. 그것을 막기 위해 더 높은 곳, 더 이상 양보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향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자기만 생각할 수 없다. 특히 위에 선 사람은 주변 사람도 고려해야 한다. 자기 일만 편해져서는 조직이 잘 굴러가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려면 주변 사람의 일도 하기 쉽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양보할 마음이 생긴다. 나는 겉으로 보면 굳이 양보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일지 모르지만, 그 자리를 조금이라도 즐겁고 일하기 편하게 만들기 위해 늘 양보할 마음을 갖는다.

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양보의 정신이 필요하다. 무조건 겸손하라는 뜻은 아니다.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내어 주어야 한다. 내가 인간관계를 유연하고 좋게 유지해 온 것은 이 양보의 정신 덕분이다.


■ 리더가 거리를 조절하는 법

나는 작귀회라는 마작 도장을 이끌고 있으며 직함은 회장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회장’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회장이라는 이유로 권위를 휘두르거나 자리에 기대지 않는다. 동료와 소통할 때는 상황에 맞춰 내 위치를 크게 낮추기도 한다.

그러면 “회장님은 지켜야 할 위치가 있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듣지만 나는 그런 위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리더의 자리는 다른 곳에 있다.

바다에 갔을 때 바위 위에서 조류를 살피고 위험한 곳을 동료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떠올리면 된다. 환경과 상황을 보고 판단해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 그것이 리더의 위치다. 지위와 권력을 뜻하지 않는다.

리더는 늘 어디에 서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저 사람에게는 어느 위치에 서 주는 것이 좋은가, 이 사람이 가장 좋은 상태가 되려면 어디에서 도와야 하는가. 간격을 재고 상황을 살피며 임기응변으로 위치를 바꾼다.

여기서 위치란 물리적 위치와 심리적 위치 모두를 뜻한다. 실제 도장에서 내가 어느 자리에 서는지, 대국 중인 탁자를 어디에서 바라보는지가 물리적 위치다. 상대와 마음의 거리를 어느 정도로 두는지는 심리적 위치다.

위치를 정할 때는 장소와 상대의 밝음과 그늘도 느껴야 한다. 어디에 햇빛이 들고 어디가 어두운지를 살피며 늘 최선의 위치에서 동료를 이끄는 것이 리더다.

집단의 리더에게는 통솔력, 판단력, 책임감 등 여러 능력이 요구된다. 성격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끌고 가야 하므로 어느 정도 강하게 밀어붙이는 힘도 필요하다.

다만 강압의 정도를 조절하기가 어렵다. 강하게 이끈 일이 성공하면 문제가 없지만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충분하다.

나는 리더의 강한 추진력 자체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집단이 좋은 방향으로 간다면 괜찮다. 다만 실패했을 때는 강하게 밀어붙인 만큼 영향도 넓게 번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강하게 이끌려면 그에 맞는 주의와 각오, 확고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로 밀어붙여야 하는지는 실제로 해 보아야 배운다. 머릿속 모의실험만으로는 익힐 수 없다.

그저 강하기만 해서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모두와 의논해 정하기, 사람들에게 맡기기 같은 여러 선택지도 가져야 한다.

한 사람의 힘으로 끌고 간 뒤에는 전체의 힘에 맡긴다. 전체에게 맡긴 뒤에는 다시 한 사람의 힘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방식을 적절히 나누어 쓸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일 것이다.

 


제4장 인생을 내다보는 기술

 



■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다. 내 나이가 되면 대부분 자녀와 손주가 있다. 인생의 큰일을 어느 정도 마치고 느긋하게 여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어깨가 처지고 어두운 그늘이 얼굴에 드리운 사람도 있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어린 시절에 형성된 개성과 본질은 수십 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공부만 하느라 친구들과 놀지 않았던 사람은 결국 친구 없는 외로운 삶을 산 듯했다. 좋은 대학에 갔고 회사에서도 출세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정신을 차려 보니 홀로 남았다.

그는 자기 길을 밀고 나가기 위해 동료와 친구를 희생했다. 사람을 만들지 않고 자기 길만 걸었으니 지금 혼자인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무언가를 이루려면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수행 중이니 연애하면 안 된다”, “입시 준비 중이니 놀면 안 된다”는 말은 가르치는 쪽의 사정일 뿐이다. 수행하면서 연애해도 되고 공부하면서 놀아도 된다. 사랑과 놀이를 발판과 격려로 삼아 더 힘내면 된다.

여성 동창 가운데에는 지쳐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무엇이든 열심히 하던 사람이 그랬다. 결혼생활과 육아에 최선을 다한 뒤 이제는 부모나 남편을 돌보느라 완전히 지쳐 있었다. 가장 밝아 보인 이는 줄곧 독신으로 살아온 여성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딸이나 좋은 학교에 갔던 여성도 이제는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경우가 많았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인지기능의 저하와 우울함이 뒤섞인 듯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은 문득 모든 것이 시들어 축 처진 듯한 모습이 된다. 시선은 아래로 향하고 어깨는 떨어진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는 잠시 반듯해지지만 대화가 끝나면 다시 고개를 떨군다.

이런 특징은 나이와 관계없이 나타나지만 늙을수록 훨씬 분명해진다. 피부의 얼룩처럼 몸에 깊이 배어 있어 더는 감출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 잊고 있던 자신의 한 면을 떠올린다

 


동창회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꾸밈없는 본모습으로 돌아갔다. 고등학교나 대학 동창회였다면 그렇게까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초등학교 친구였기에 모두가 맨몸이 될 수 있었다. 추억을 겹쳐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이 다시 초등학생이 된 듯 느껴지고, 본성과 속마음이 나온다.

초등학교 동창회를 해 본 적이 없다면 권하고 싶다. 옛 친구들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일은 정신에도 좋다. 그 안에서 잊고 있던 자기 모습을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숨겨 둔 모습을 마주하기 싫은 사람도 있겠지만, 잊었던 한 면을 다시 확인하는 일은 인생에서 결코 헛되지 않다.

그날 참석한 동창 대부분은 현역에서 물러나 있었다. 날마다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멋있게 말하면 유유자적이겠지만 내 눈에는 그저 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거나 산책을 일과로 삼고, 국화 재배와 노래 교실, 춤 교실 같은 취미를 자랑했다.

실례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며 “별것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내게 취미가 없어서 다행이다”라는 느낌도 들었다.

할 일이 사라져 취미로 도망쳐야 하는 나 자신은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취미를 반드시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일종의 도피처라고 본다. 그래서 평생 특정한 취미를 갖지 않고 한결같이 무취미로 살아왔다.

“그렇다면 무엇을 좋아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바다를 좋아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내게 바다는 취미가 아니다. 바다나 격투기처럼 거의 맨몸으로, 물건에 기대지 않고 노는 것이 좋을 뿐이다.

그래서 바다에서도 산소통을 메는 스쿠버다이빙에는 관심이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즐거움을 찾아 논다. 몇 살이 되든 나는 그렇게 노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좋다.


■ 계기의 공 하나가 인생을 바꾼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보급된 현대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소통, 피부와 피부가 닿는 관계가 과거보다 확실히 줄었다. 특히 같은 지역에 사는 주민 사이의 교류가 옅어졌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누구나 체감하는 일이지만 예전에는 아이가 잘못하면 부모가 아니어도 동네 어른이 반드시 나무랐다. 주민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 지금보다 훨씬 큰 관심을 가졌다. 이제는 그런 교류를 거의 보기 어렵다.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던져 주는 ‘계기의 공’을 받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공을 던지는 사람은 부모, 이웃 어른, 학교 교사일 수 있다. 어른이 던진 계기의 공을 받아 냄으로써 아이는 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공을 던지는 어른이 줄었다. 공을 가진 어른이 있더라도 아이에게 던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큰 원인이다. “지금 혼내지 않으면 언제 혼내나” 싶은 상황에서도 혼낼 수 없다. 교사조차 학생을 엄하게 나무라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 이른바 ‘괴물 부모’가 기세를 부리고, 필요한 때에 꾸짖지 못하는 교사들이 잇달아 마음의 병을 앓는다.

혼나야 할 때 혼나지 않고 자란 아이는 인간다운 길에서 조금씩 벗어날 것이다. 이는 언젠가 큰 사회문제로 발전할지 모른다.


■ 주먹 한 대가 가져온 인생의 전환점

아이는 누군가가 던진 계기의 공을 받아 구원받을 때가 있다. 그 공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내게도 큰 전환점이 된 공을 던져 준 어른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던진 공은 주먹 한 대였다. 그 주먹을 맞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잘못의 경계선을 모른 채 지금과 조금 다른 길을 걸었을 수도 있다.

학교에는 몸이 불편한 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몸짓을 흉내 내며 친구들을 웃겼다. 그 순간 선생님이 달려와 내 머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평소 매우 다정한 선생님이었다. 나는 여러 장난과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선생님에게 주먹을 맞은 적은 없었다. 다른 교사에게 노골적인 차별을 받기도 했으나, 담임은 모든 아이를 차별 없이 대했다.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의 교육 방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를 똑같이 대했고,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나는 그런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다.

그런 선생님이 장애가 있는 아이를 흉내 내는 나를 보고 무서운 얼굴로 달려왔다. 주먹을 맞으며 나는 깨달았다. “바로 이런 일은 해서는 안 되는구나.”

매우 아팠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통증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늘 웃던 선생님이 귀신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깊게 박혔다. 선생님도 나를 때리는 일이 괴로웠을 것이다. 그 모습에 정신이 들었다. 인간에게는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고, 선생님은 몸으로 그 경계선을 보여 주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은사라 부를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 비열한 어른이라고 느낀 교사는 많았지만 말이다.

내가 은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한 사람뿐이다. 그래서 지금도 초등학교가 내게 가장 좋은 학교였다고 생각한다.


■ ‘무모함’에서 ‘엉망’을 빼라

나는 어린 시절부터 무모한 일을 거듭했다. 한계에 도전하면서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위험한 일도 많이 해서 늘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또 무리하다 다시 골절된 일도 흔했다. 그래서 지금도 작귀회 수련생에게 “무모해져도 좋다”고 말한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무모함은 괜찮지만 ‘엉망진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어의 ‘무차’와 ‘무차쿠차’는 다르다. 이 차이를 혼동하면 안 된다.

무모함이 엉망진창으로 변하면 남에게 폐를 끼치고 독선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순수한 무모함이라면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남을 위해 무언가 해 보자는 힘으로도 이어진다. 무모하게 뛰어들 때 평소에는 없던 비상한 힘이 불쑥 나올 때도 있다.

나도 초등학생 때는 무모하다 못해 엉망진창이었을 것이다. 4학년 담임 선생님이 내게서 그 ‘엉망’을 떼어 주었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때부터 마음속에 “그건 엉망진창이야”라고 경고하는 또 한 명의 내가 생겼다. 나는 엉망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무모함을 끝까지 밀고 왔다.

덕분에 다른 사람이 좀처럼 맛보지 못하는 수많은 경험을 했다. 돌아보면 그 무모한 일은 모두 무척 재미있었다. 그것이 엉망진창이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끔찍한 인생이 되었을 것이다.

주변을 보면 본래 무모한 기질의 아이가 적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은 순수한 무모함이 아니라 엉망진창이고, 본인은 그 사실조차 모른다.

그런 아이는 앞뒤 보지 않고 덤비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무모함과 엉망진창은 다르다고 설명한다.

엉망진창은 처리하기 어렵다. 나와 관계없는 곳에서 벌어지면 코를 막고 지나갈 수 있지만, 내 몸에 직접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정치인의 엉망, 관료의 엉망은 국민 모두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준다.

사회가 엉망이니 엉망인 사건도 자주 일어난다. 세계를 보아도 시장자본주의라는 돈의 춤에 휘둘린 엉망인 사람들 때문에 곳곳이 난장판이 되었다.

오늘날 아이들은 내가 어렸을 때와 달리 무모한 일을 해 보기가 어렵다. “바다와 강에 가까이 가지 마라”, “거기에 올라가지 마라”, “그곳에 들어가지 마라”처럼 수많은 금지 조항에 묶여 있다.

이는 어른이 자기 책임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부모는 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무엇이든 남 탓으로 돌린다. 학교는 그런 부모를 두려워해 각종 제한을 만들고 미리 방어선을 친다.

그 결과 부모와 교사 모두 이상한 방식으로 꼼짝 못 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자유롭게 뻗어 나갈 수는 없다.

내가 어렸을 때 무모한 짓을 하다 다치면 책임은 다친 나에게 있었다. 나는 늘 상처를 달고 살았지만 학교 책임이라고 한 적은 없다.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책임지고, 아이가 책임질 수 없다면 부모가 책임진다. 그것이 본래 모습이다.


■ 끝까지 미완성을 추구한다

‘귤꽃 피는 언덕’이라는 동요를 아는가. “귤꽃이 피어 있는…”으로 시작하는 노래다.

어느 잡지에서 그 노래에 관한 기사를 보고 작귀회 사람들에게 불러 보게 했다. 그런데 대부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그렇다 쳐도, 아는 사람조차 만족스럽게 부르지 못했다.

이 노래가 흥미로운 까닭은 아무리 연습해도 좀처럼 완전히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수련생은 집에서 천 번쯤 연습한 뒤 내 앞에서 다시 불렀다.

그러나 막상 부르자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내 앞에서 긴장한 것은 아니다. 본인은 이제 완전히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 보니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노래 특유의 미묘한 선율 때문인지도 모른다.

천 번 연습해도 “자, 불러 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나는 여기에서 엄청난 의미를 느낀다. 작귀류도 그 노래와 같다. 내가 가르쳐도 도장을 벗어나면 모두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작귀류는 평생 좇아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을 추구한다. 완성되지 않을 것을 계속 만드는 길이다. 나는 안다. 작귀류는 백 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해 누구도 완전히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한다. 그 점이 재미있다.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노력을 쌓는다. 좋아지는지 나빠지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계속한다.

사람의 일생도 같지 않을까. 삶을 끝낼 때 “결국 따라잡지 못했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구나”라고 깨닫는다.

이제 ‘귤꽃 피는 언덕’은 작귀회에서 교가나 사가 같은 노래가 되었다.


■ 못하는 사람에게서 배운다

학문이나 전문 분야를 배울 때 자신보다 지식이 많거나 그 분야에 깊이 관여한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당연하다. 이른바 잘하는 사람에게 지식을 얻는다.

하지만 ‘인생’을 배울 때 나는 잘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인생은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못하는 사람에게서 배운다.

세상에는 “저 사람은 대단하다”, “저 사람은 많은 것을 안다”고 평가받는 유능한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 살아가는 법을 많이 가르쳐 주는 사람은 오히려 못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자신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면 그 아래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더는 배우려 하지 않는다. 대부분 자기보다 위라고 판단한 사람만 좇는다. 능력 있는 사람만 따라가는 것이다.

나는 반대로 못하는 사람을 보며 “왜 못할까”를 생각하고 거기서 배운다.

유능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분야에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는 오히려 못하는 사람에게 강한 관심이 있다. “왜 할 수 없을까”, “인간은 어째서 이렇게 되는가”를 생각한다. 거기서 얻는 배움이 훨씬 몸에 남고 나를 성장시킨다.

사람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더 위로 가면 더 높은 수준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배운다.

나도 일반적인 교육 과정을 두루 거쳤다. 내 학문과 바탕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면 역시 초등학교라고 생각한다. 가장 공부를 하지 않았던 초등학교에 내 뿌리가 있다.

학자와 대학 교수처럼 한 가지를 깊게 연구한 사람 중에는 강한 고정관념에 갇힌 이가 많다. 융통성이 없고 이상한 완고함을 지니며 자존심도 세다. 그런 사람은 못하는 사람에게 배우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학문은 계속 쌓고 얻기만 하며 버리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은 얻으면 버리는 반복으로 이루어지는데 교육과 학문은 그 흐름과 반대로 얻기만 한다. 얻고 쌓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대기업과 강대국이 생기지만, 이런 형성 방식은 자연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자연의 원리를 벗어난 것은 언젠가 무리가 생겨 무너진다. 세계 곳곳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세상에서 능력 있다고 평가받는 학자와 교수일수록 못하는 사람에게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담이지만 얻는 것과 버리는 것의 균형을 가진 대학 교수를 딱 한 명 만난 적이 있다. 교토대학교 명예교수였던 수학자 모리 쓰요시 선생이다.

그는 내가 만난 다른 교수와 달랐다. 수학의 대가인 그가 “통계학만큼 믿을 수 없는 것도 없다”고 말했다.

수학계 정상에 있으면서도 수학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태연히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사람은 역시 진짜 정상에 있는 수학자구나”라고 느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았다.


■ 좋은 모방과 나쁜 모방

일본인은 흉내를 잘 내는 민족이라는 평가를 받곤 한다. 먼 옛날 야마토 민족이 대륙에서 이동해 온 일이나, 전후 고도성장기에 서구의 많은 것을 받아들인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에 한 일이다. 본래부터 모방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모방은 일본인만 한 것이 아니다. 인류 역사는 모방의 연속이라고 해도 좋다. 남이 하는 좋고 편리한 일을 따라 하고, 때로는 그것을 발전시킨다. 물론 “따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할 일도 있었을 것이다. 생물의 진화처럼 그중 좋은 것만 계속 모방되고 널리 퍼져 살아남았다. 그렇게 시대가 변했다.

모방한 사람을 낮게 보는 시선이 있지만 그런 생각은 인류의 걸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누가 더 위대하고 위아래가 어떻다는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 생존을 위해 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모방이 되었을 뿐이다. 그것을 “이것은 전적으로 내가 만든 생각이다”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모방자를 깔보게 된다.

다만 유행에 휩쓸려 남을 흉내 내는 것밖에 못 하는 값싼 사람이 실제로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을 잃었으니 가볍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면 먼저 자신을 제대로 돌아봐야 한다.

한편 아무것도 없는 제로에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은 모방이 아니다. 모방은 하나를 하나로 복제하거나, 하나를 둘과 셋으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덧붙여 발전시키는 모방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살을 붙인 탓에 오히려 움직임과 기능이 나빠질 수도 있다. 요즘 말하는 대사증후군처럼 좋은 의도로 붙인 것이 군살이 될 수 있다.

필요한 것만 따라 하고 불필요한 부분은 덜어 내는 감각이 중요하다. 그러면 욕망과 집착도 사라지고 가장 좋은 균형이 보인다.

모방을 더 깊이 생각하면 따라 할 수 있는 수준과 따라 해도 할 수 없는 수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지진에는 몸으로 느끼는 지진과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지진이 있다.

누구나 감지하는 흔들림도 있지만 민감한 동물만 느끼는 작은 흔들림도 있다. 아무리 보거나 느끼려 해도 그 사람의 감성으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반드시 존재한다.

따라 해도 되지 않는 부분을 극복하려면 기술만 흉내 낼 것이 아니라 대상의 뿌리를 느끼는 감성을 조금씩 갈고닦아야 한다. 감성이 예리해질수록 지금까지 보이지 않거나 놓쳤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 “절대로”와 “상관없어”라는 병

 



인간은 고정관념을 지닌 생물이다. 그러나 그것에만 사로잡히면 비극의 길을 걷는다.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도 한 가지를 고집하는 일이 흔하다. 그곳에 인간의 약함이 숨어 있다. 고정관념에 갇혀 “이것밖에 없다”고 믿는다. 답은 언제나 하나뿐이라는 강박과 비슷하다.

그런 사람은 “절대”라는 말을 쉽게 쓴다. “절대 무리입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별것 아닌 일에도 ‘절대’를 반복하는 것은 하나의 버릇이자 정신적으로 병든 징후일 수 있다.

요즘 젊은이가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무슨 일이든 쉽게 부정한다.

자기에게 불편한 일에 지나치게 민감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말을 즉시 내뱉는 것일 수 있다. “말도 안 돼”라고 말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므로 자주 쓰는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자기 사정에 따라 단정할 뿐이다. ‘절대’만큼 병적이지 않더라도 고정관념의 그림자가 보인다.

한편 젊은이가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한다. 지금 세상을 보면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다. 정치, 경제 구조, 세계의 모습 어디를 봐도 그렇다. 젊은이는 그 상황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말도 안 돼”라는 소리를 내는지도 모른다.

조금 전 유행한 코미디의 “그런 건 상관없어”라는 대사도 시대가 토해 낸 말일 수 있다. 숨이 막히고 족쇄를 찬 듯한 사회에서 “그런 건 나와 상관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 유행어는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로 볼 수도 있다.

나도 현대사회를 보며 “그건 내게 상관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휴대전화도 쓰지 않고 컴퓨터도 하지 않는다. 내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판에서 보면 “상관없다”고 외면할 수 없는 일도 많다. 세계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 식량인 옥수수를 석유 대신 연료로 쓰면 “그 옥수수를 먹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친환경’을 외치는 사람들의 유행은 내게 큰 관심사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현실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 말끝을 올리는 화법에서 보이는 무책임

 

 


대화할 때 문장의 끝을 올려 말하는 화법이 있다. 진술을 마치 질문처럼 만드는 이런 말투에서는 단정을 피하려는 느낌을 받는다. 책임을 회피하는 듯 들리기도 한다.

상대에게 판단을 맡기려는 의존심이 말투로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다.

무엇이든 남에게 맡기면 편하고 쉽다. 말끝을 올리는 화법에는 “상대가 결정해 주는 편이 편하다”는 생각이 숨어 있을 것이다. 살아오며 대부분의 일을 부모가 정해 준 사람일 수도 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관리받기를 좋아하고, 관리받는 편이 편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 두 욕구 사이에서 살아간다. 말끝을 올리는 사람은 자유와 관리의 균형이 관리 쪽으로 기울어 있을 수 있다.

먼저 자기 말끝이 습관적으로 올라가는지 확인해 보라. 그렇다면 자유와 관리의 균형이 무너졌을 가능성이 있다. 균형을 되찾으려면 자기 안의 무책임과 의존심을 알아차리고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 그러면 말끝을 올리는 습관도 서서히 가라앉을 것이다.

 


■ 친절이 끼치는 폐

 


현대사회에는 정보가 넘치고, 사람은 그 정보에서 만들어진 ‘상식’에 붙잡혀 있다. 그것이 정말 상식인지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무젓가락이 있다. 해외 산림 벌채의 영향 때문인지 일본에서도 “일회용 젓가락 대신 개인 젓가락을 쓰자”고 말한다. 그러나 삼나무와 편백나무를 대량으로 심은 일본의 산에는 반드시 들어맞지 않는다. 조림지는 사람이 간벌하지 않으면 나무 사이가 지나치게 좁아지고 햇빛이 땅에 닿지 않아 오히려 망가진다.

간벌한 산에는 충분한 햇빛이 들어 풀과 관목이 자란다. 그러면 흙이 비바람에 쓸리지 않아 산사태를 막고, 활력을 되찾은 나무와 풀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온난화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친환경, 친환경”이라는 말에 휩쓸려 의미도 모르면서 개인 젓가락을 쓰고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과거에는 산불이 나면 자연과 사람을 돕는다며 대규모 진화작업을 했다. 불이 나면 끄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경우에 따라 그대로 타게 둔다. 탄 재가 비료가 되어 토양을 풍요롭게 하고 자연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태고부터 이어진 자연의 원리에 맞는 방법 아닐까. 과거에도 번개 때문에 곳곳에서 산불이 났고, 그 불을 거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며 자연의 순환이 이루어졌다.

이런 잘못된 상식을 생각하다 보면 인간의 친절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느낀다. 오히려 상대에게 해가 되는 ‘마이너스의 친절’이 많을 수 있다.

아이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조금 더 타게 두면 스스로 정리될 일을 부모의 친절로 서둘러 꺼 버린다. 더 충분히 타고 나서 시원하게 끝내는 편이 아이에게 좋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잘못 이해한 친절로 무작정 진화에 나선다.

나는 사랑이나 친절이라는 말을 들으면 섬뜩할 때가 있다. 누가 “사쿠라이 씨는 다정하군요”라고 하면 모욕처럼 느껴진다. 내 뿌리에는 다정함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상품으로 삼거나, 다정한 남자와 부모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무슨 일이든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

 


■ 꿈과 희망이 없어도 살 수 있다

 


살다 보면 여러 고민이 생긴다. 실패하거나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고민하고 생각한다. 그것이 산다는 일이다.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은 그 증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수많은 일을 위협으로 느끼고 실패를 숨기거나 얼버무린다.

인간은 본래 약한 생물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강해지려 하지 않는다. 나도 당신도 모두 약하다.

열 달 동안 모체 안에서 보호받은 아기는 태어나는 순간 위험한 세계에 던져졌음을 몸으로 안다. 인간이 맨 먼저 느끼는 것은 불안과 공포다. 모체 밖으로 나온 순간 누구나 그것을 피부로 느꼈다.

따라서 불안과 공포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심어져 있다. 그것을 그대로 안고 살지, 조금씩 대처하며 살지는 각자의 문제다. 그러나 사람은 좀처럼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는다.

아기 때는 배가 고프면 두세 시간마다 우유를 받고, 기저귀도 갈아 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부모가 모두 해결한다. 누구나 이런 ‘벌거벗은 왕’의 시기를 지나고 그동안 의존심도 심어진다.

열 달 동안의 태아가 몸 안의 태아라면 아기는 몸 밖의 태아다. 인간에게는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두 시기가 있다. 그리고 유아기에는 망상과 환상도 심어진다.

어른이 된 뒤 그것을 감추려 해도 이미 늦다. 사람은 망상과 환상을 숨기기 위해 ‘꿈’과 ‘희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나는 그 점이 우습다.

꿈과 희망이 망상과 환상을 가리는 역할도 한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을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면 허세뿐인 사람이 된다. 꿈이 없으면 살 수 없다거나 희망이 있어야 산다는 말은 인간의 생명력과 전혀 관계가 없다. 나는 꿈과 희망을 품어 본 적이 없지만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꿈과 희망보다 내게는 그때그때의 환경에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 안에서 자신에게 묻고 답하며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해 왔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 아이를 꾸짖지 않고 바로잡는 방법

 


모든 것을 남에게 의존하던 몸 밖의 태아 시기에 인간에게는 환상과 망상, 여러 요소가 심어진다. 그것들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버릇도 그중 하나다.

어머니에게 충분히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 반동을 보일 수 있다. 무엇인가에 매달리거나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등 채워지지 않은 의존심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모가 아이를 충분히 응석받이로 키우는 일도 방법을 잘 잡아야 한다. 내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는 이 아이의 노예가 되자. 철저히 함께 놀아 주자”라고 마음먹었다. 중학생쯤에는 대등한 관계가 되고, 열여덟 살이 지나면 “이제 내 등을 보고 배워라”라고 보여 주려고 했다. 수십 년 전 그런 생각을 했던 일이 지금은 그립다.

이제는 자녀보다 손주를 보며 지낸다. 함께 놀면서 다정함과 심술, 여러 감정을 자유롭게 드러내게 한다.

손주가 한 말이나 행동이 조금 어긋났다고 느끼면 즉석에서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 들려준다. 비겁함과 교활함을 직접 지적하기보다 우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바로잡는다. “얼마 전 공원에 이런 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나라에 이런 왕이 있었는데”라고 시작해 손주의 표정과 마음 움직임을 보면서 이야기를 짠다.

그러면 손주도 나름대로 여러 사실을 알아차린다. 잠자코 이야기를 들으며 반성할 부분을 제대로 반성한다. 잘못을 직접 꾸짖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

나는 경험을 통해 이 방법을 알았다. 육아로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시도해 보기를 권한다.

 


■ 누구나 ‘신호’를 보낸다

 


최근 몇 년 사이 아이가 일으키는 사건이 자주 보도된다. 그때마다 부모와 교사가 “몰랐다”, “눈치채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유난히 많다.

학교에서 괴롭힘이 있었는데도 진심으로 “몰랐습니다”라고 말하는 교사는 교사로서 자질이 없다. 그런 사람은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사건을 일으킨 뒤 부모가 “몰랐다”, “모르겠다”를 되풀이하는 것은 먼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다. “눈치채고 있었습니다”라고 하면 “알면서 왜 막지 않았느냐”는 책임 문제가 생긴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언어로 방패부터 세우는 행동이다. “현재로서는 모르니 자세히 조사해 보겠다”는 말도 사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자기 아이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 사람에게도 부모가 될 자질이 부족했던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서로 아는 부모와 자식은 없다. 관계에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함께 있다. 다만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앞으로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느껴 선택할 뿐이다. 아이보다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는 부모가 늘고 있다.

아이가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는 반드시 예고 신호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놓친 부모는 어느새 부모 역할에 게을러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이의 신호는 다양해 한 가지로 단정할 수 없다. 표정만 보아도 눈이나 입이 지나치게 벌어지거나 꼭 닫히고, 시선이 한 점에 너무 강하게 고정되는 등 여러 형태가 있다.

아이와 관련된 사건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충동이 억눌리거나 잠잠했을 뿐, 어느 날 돌연 그런 정신 상태가 된 것이 아니다.

무차별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타인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이전부터 지녔을 가능성이 있다. 어른이 되면서 체력과 돈이 생기고 도구를 구할 수 있게 되자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실행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격 충동은 인간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있다. 잔혹함과 자비로움을 함께 지닌 것이 인간 정신이다. 사람은 그것을 조절하며 살고, 균형이 부정적인 쪽으로 무너지면 마음이 병든다.

잔혹한 사건이 생기면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하나”라고 탄식한다. 그러나 완전히 남의 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특수한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도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자각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 결과보다 도전한 과정이 귀하다

작귀회 수련생은 모두 결과지상주의 능력사회에서 매일 부딪히며 산다. 그래서 적어도 도장에 있는 동안은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내가 볼 수 있는 범위에서 능력사회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마음의 병에 빠질 듯한 사람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다.

능력사회에서는 잘한 아이가 훌륭하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나는 못하면서도 애초에 해내기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애쓰는 아이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결과보다 과정과 노력을 인정해 주고 싶다. 그래야 잘하지 못하는 아이도 무엇인가 시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본래 사람은 평가받기 때문에 노력한다. 아무런 평가도 받지 못하면 힘쓰기를 그만두기 쉽다.

세상에는 무엇을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나는 그런 아이도 평가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문제가 있지만, 무언가 해 본 뒤 “실패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시도는 인정해야 한다.

능력은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까지 포함한다. 잘하지 못하더라도 노력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능력이 있다.

결과지상주의 사회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계속 늘어난다. 내가 그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신이 결과 앞에 반드시 존재하는 과정을 평가할 수 있게 된다면 주변의 누군가가 그 덕분에 구원받을 수 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바뀌는 일이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힘이 된다.

개체는 전체이고 전체는 개체다. 한 사람의 힘을 결코 얕보아서는 안 된다.

 


제5장 몸가짐과 행동으로 사람의 유형을 가려내기

 

 


■ 내면까지 멋을 갖추는 삶

 



겉모습을 꾸미는 사람에게 “외모만 신경 쓰지 마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하지만 겉모습도 중요하지 않은가. 연출과 패션 역시 어느 정도 필요하다.

나는 멋을 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외형에만 붙잡히지 말고 내면의 멋도 갖추어야 한다.

나는 외모의 멋과 그 안에 감춰진 마음을 함께 본다. 외형이 결과라면 내면은 내용이다. 나는 결과보다 내용을 더 중시하므로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내면이 따라오지 않는 모습은 전혀 멋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평소 옷차림은 깔끔하고 청결한데 막상 집에 가 보니 방이 매우 지저분해 놀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방은 그 사람의 내면 세계를 보여 준다. 방이 어질러져 있다는 것은 마음도 정리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다. 마음의 축이 없으니 생각도 방도 늘 흐트러진다.

옷차림을 의식하는 일은 잊지 말아야 하지만 지나치게 집착해서도 안 된다. 임기응변과 적재적소를 잘 활용할 때 그것이 감각과 센스가 된다.

같은 정장을 입어도 멋있게 소화하는 사람이 있고 옷에 눌리는 사람이 있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정장을 입은 것이 아니라 정장에 입혀진 것이다.

이는 옷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남성다움을 드러내려 해도 그 이미지에 짓눌리면 어딘가 가짜처럼 보인다. 강함, 다정함, 배려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소화한 사람이 훨씬 멋있다. 소화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에 충분히 배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명품을 가지고 있어도 명품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물건이 사람보다 더 눈에 띄면 ‘브랜드에 졌다’고 말한다. 명품을 들었는데도 오히려 싸 보이는 것 역시 브랜드에 진 것이다.

그 사람의 감각이 아직 물건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브랜드에 지나치게 기대고 의존하는 태도도 생각해 볼 일이다.


■ 자신을 파는 사람은 멋이 없다

멋없던 사람이 멋있어지고 싶어도 지금은 사회 전체가 멋없어져 쉽지 않다. 사회가 여러 면에서 뒤틀리고 울퉁불퉁해졌다. 그런 환경에서 살려면 사람도 그 굴곡에 맞춰야 하므로 멋없어지는 사람이 늘고, 원래 멋있던 사람까지 변한다.

출세하고 성공해 두드러진 사람이 되어도 전체적인 멋을 느끼기 어려울 때가 많다. 현대사회가 만든 가치관에만 갇히면 자신을 잃거나 자신을 팔아야 한다. 웃음을 팔고, 노력을 팔고, 무엇이든 자기 자신을 상품처럼 내놓는 모습은 멋이 없다.

“팔지 않으면 급여를 못 받고 살 수도 없다”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치관만 붙들거나 그것이 사람의 전면에 드러나면 어쩔 수 없이 볼품없어 보인다.

대개 사람은 젊을 때 더 멋있다. 학생 시절이 정점이고,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점점 멋을 잃는다. 겉으로는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가지만 실제로는 멋없는 쪽으로 물러나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 넘치는 정보와 당연하다고 여기는 행동과 사고방식 자체가 멋없을 때가 많다. 오히려 그 반대가 멋있는 경우도 있다.

지식과 정보를 많이 가진 것이 멋으로 평가되더라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 편이 더 멋있을 수 있다. 지식과 정보보다 직감을 소중히 여기며 자연스럽게 산다. 궁극적인 멋은 꾸밈없는 자기 모습으로 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마음의 옷’을 벗으면 편해진다

요즘은 남성다움을 느끼게 하는 남성이 드물다. 그런데 아주 가끔 남자에게서도 보기 힘든 강함을 지닌 여성이 있다.

그런 여성은 이른바 커리어우먼에게서 느끼는 억센 기세나 딱딱한 긴장감과 다르다. 내 눈에는 오히려 말랑하고 부드럽다. 마음의 유연성이 자연스럽게 겉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틀에 붙잡히지 않은 것도 이유일 수 있다.

물론 그런 강함을 지닌 여성은 부드러움 속에 분명한 중심이 있다. 단단한 바탕과 자질이 피처럼 몸을 돈다.

반대로 겉으로는 자립하고 단정해 보이지만 뒤에서는 완전히 무너진 사람도 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자세는 결국 ‘꾸밈’에 불과하다.

사람은 다정함도 강함도 입을 수 있다. 모두 맨몸 그대로 있어도 되는데 다정함이라는 셔츠를 걸치고 강함이라는 옷을 입는다. 부끄럽거나 더러운 곳은 속옷으로 가린다.

그런 의상은 본질을 가리는 베일일 뿐이다. 여러 겹의 옷을 입은 사람은 걷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이다. 그래서 도장 수련생 중 마음의 의상을 두껍게 입은 사람이 있으면 나는 “벗어라”라고 말하며 한 겹씩 벗겨 준다.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상대에게 맞추어 조금씩 벗기면 꾸밈을 버린 쪽이 얼마나 편하고 솔직한지 깨닫는다.

회사원의 정장과 넥타이, 운동선수의 유니폼도 하나의 의상이다. 누구나 무엇인가를 걸치고 산다. 나에게도 꾸미는 순간은 있겠지만 꾸미지 않은 시간이 훨씬 길었기에 지금까지 나답게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디지털의 파도에 삼켜진 사람은 생각에도 디지털식 외피를 두른다. 나는 누구나 인정하는 아날로그 인간이다.

그런 나와 접하면 완전히 디지털식 사고를 하던 사람도 이상하게 아날로그적인 모습으로 돌아온다. 예전에 가지고 있었을 그 사람의 본질이 조금씩 나온다. 사람이 솔직해지면 누구나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그렇게 상대의 기분을 풀어 준다.

물론 그 사람이 다시 디지털 현실로 돌아가면 원래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 인공적인 밝음과 타고난 밝음

세상에는 밝은 사람과 어두운 사람이 있다. 겉으로는 활기차고 기분이 고양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두운 사람도 있다.

밝은 사람은 크게 두 종류다. 하나는 천성적으로 밝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적으로 밝아 보이려는 사람이다.

인공적으로 밝은 사람은 책이나 외부 지식으로 배운 모습을 억지로 발산한다. 타고난 밝음이 태양이라면 인공적인 밝음은 전등과 같다. 같은 빛처럼 보여도 전등은 무리가 쌓여 언젠가 끊어진다. 켰다 껐다 하므로 앞과 뒤가 생긴다.

혼자 있으면 어두워지고 일이 생기면 금세 가라앉는 것은 인공적인 밝음을 내고 있다는 증거다. 좋은 사람과 즐거운 사람을 연기하다 가끔 지친다. 아이로 말하면 “부모가 좋아하니까, 선생님이 좋아하니까 착한 아이가 되어야지”라는 유형이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므로 언젠가 무리가 온다.

밝고 좋은 사람을 연기하는 것은 삶에 손익 계산이 들어왔기 때문일 수 있다. 밝게 행동하는 것이 이익일 때는 유지하지만 손해가 되면 갑자기 달라진다. 인공적인 다정함과 밝음은 언젠가 반드시 허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이는 어릴 때부터 가능한 한 본래의 밝음을 유지하게 해 주는 편이 좋다. 아이가 밝게 뛰놀 때 “무모하게 굴지 마라”, “시끄럽다”고 억누르지 말고 마음껏 움직이게 한다.

진짜 밝음과 타고난 밝음을 기르려면 아이의 빛을 키워야 한다. 주변에 폐가 된다는 이유로 필요 이상 억누르면 아이에게 손해만 남는다.


■ ‘광기’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

나는 위험한 것에 끌린다. 어린 시절에는 철교를 건너고 급류에서 헤엄치는 등 위험한 일을 태연히 했다. 지금도 상어나 악어를 보면 만져 보고 싶어진다.

어릴 때 위험한 일을 많이 해 보았기에 보통 사람이 두려워하는 위험이 실제로는 대단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일찍 알았다. 진정한 위험과 위협이 무엇인지도 조금씩 이해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무서워하던 위세 부리는 어른이나 고함치는 교사도 내게는 별것 아니었다. 중학생 때에는 그런 어른의 가면을 벗기는 일을 일과처럼 하기도 했다.

내가 공포를 느끼지는 않아도 늘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광기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곳으로 간 사람은 무슨 일을 할지 알 수 없다.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고 망상과 현실도 나누지 못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그런 사람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더 많아질 것이다.

그들은 존재 자체가 녹아 버린 듯한 모습일 때가 많다. 시선, 움직임, 말이 어딘가 풀리고 흐릿하다.

반대 유형도 있다. 무엇이든 지나치게 앞서가는 사람이다. 굳이 앞서지 않아도 될 곳에서 성급하게 나간다. 눈과 손가락, 발, 사고까지 모두 신경질적으로 앞질러 간다.

요즘에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사람이 잔혹한 사건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러나 내 눈에는 전철에 탄 사람의 절반 이상이 상황에 따라 그런 사건을 일으킬 가능성을 품고 있는 듯 보일 때가 있다. 광기의 기색을 가진 사람이 정말 늘었다.

그들은 외모만으로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공부도 잘하고 사회생활도 능숙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병을 품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행동이 본모습인지 연기인지 관찰하고 판단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마음의 병을 피하려면 솔직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수련생에게 늘 “솔직해져라”라고 말한다.

솔직하다는 것은 무엇이든 순종하라는 뜻이 아니다.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포함해 자신의 전부를 숨김없이 내보이는 것이다. 물론 용기가 필요하다. 수련생이 용기를 내어 솔직해질 수 있도록 나도 맨몸으로 그들을 대한다.


■ 사교적인 사람과 사기꾼의 경계

세상에는 내성적인 사람과 명랑한 사람이 있다. 내성적인 사람은 긴장하고 낯을 가리기 쉬워 처음 만난 사람과 가까워지기 어렵다.

반대로 명랑한 사람은 주눅 들지 않고 스스로 인간관계를 넓힌다.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누구와도 쉽게 이야기하는 사교적인 사람이 부러워 보일 수 있다.

은둔형 외톨이나 니트로 불리는 사람의 삶이 안쪽으로 기울었다면 사교적인 사람은 바깥으로 향한다. 전자는 안과 밖의 균형이 지나치게 안쪽으로 무너져 자기 세계에 갇혔을 것이다. 그러나 사교적인 사람도 균형이 바깥으로 과도하게 기울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움직임과 고요함의 균형을 잡는다. 은둔한 사람이 고요함 쪽으로 쓰러진 것처럼 사교적인 사람도 움직임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 수 있다.

자연에 낮과 밤이 있듯 마음 안에도 밝은 낮과 어두운 밤이 있어도 된다. 하루 종일 움직임만으로 살면 막히고 만다. 잠시 고요함으로 균형을 옮겨 숨을 고르는 일도 필요하다.

사교적으로 보이는 사람 가운데에는 이른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있다.

남에게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지나치면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을 보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만 생각하게 된다. 본인은 선을 추구한 결과라고 여기겠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불쾌하게 보일 수 있다. 누구에게나 선과 악이 있으므로 서로 그 양쪽을 인정하며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요즘 교육에서는 꾸짖기보다 칭찬해서 키우자는 말을 자주 한다. 그 생각에 지나치게 기우는 사람 역시 모든 사람에게 좋게 보이려는 유형이 되기 쉽다. 인간의 좋은 면만 보기 때문이다.

이 성향이 지나치면 말과 행동이 사기꾼과 비슷해진다. 회사 영업을 맡기면 능숙하게 해낼 수 있지만 말은 거짓투성이일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본인조차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요령이 좋고 계산이 빠르며 자신을 연출하는 데 능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내면이 훤히 보여 오히려 보는 쪽이 민망해진다.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 휘둘린다.

지나친 유형에게는 정확히 지적해 줄 필요가 있다.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므로 “당신 말은 좋은 부분만 골라 붙인 것입니다. 인생에 그런 것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알려 주어야 한다.

삶에는 산도 있고 골짜기도 있다. 사람을 만날 때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것은 기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가르쳐 주는 것도 좋다.


■ 옷차림 하나로 마음의 성질을 읽는다

언제나 같은 옷이나 비슷한 색만 입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날 때마다 옷과 머리 모양이 달라지는 사람도 있다. 정반대로 보이는 두 경향에는 어떤 심리가 작용할까.

늘 같은 옷을 고르는 사람 가운데에는 고정관념이 강한 이가 많다. 고정관념이 지나치면 하나에 매달리게 된다.

평상복이 제복처럼 늘 같은 사람은 변화를 즐기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사실은 더 다양한 변화를 누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전문직이나 한 분야의 전문가도 그런 경향을 보인다. 한 길을 깊게 파는 동안 집착이 강해져 패션에도 나타난다.

만화가 중에는 의외로 기발한 옷차림을 하는 사람이 많다. 만화 세계에서는 하늘을 날고 변신하며 엄청난 힘을 쓰는 등 망상을 현실처럼 표현한다. 그 세계에 지나치게 잠기면 현실사회와의 접점이 흐트러져 기발한 패션으로 나타날 수 있다.

수수하든 화려하든 하나의 형식에 물드는 것은 붙잡힘과 같다. 인간의 사고를 굳게 만든다. 경찰관도 집에 돌아가 제복을 입고 있지는 않는다. 제복은 통일성과 식별성, 기능성을 위한 것이지만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전환하고 두 영역의 균형을 지키는 의미도 있다.

반대로 옷차림을 자주 바꾸는 사람에는 우유부단한 사람과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이 있다. 우유부단한 사람은 유행에 휩쓸리고 자기 중심이 없어서 옷에 따라 기분까지 달라진다.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은 중심이 있으므로 옷이 달라져도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움직인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뜻이다. 변화에 맞추려면 때에 따라 변신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임기응변이 좋은 사람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변신을 잘한다.

자주 꾸미는 사람에게 남에게 조금이라도 좋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외형만 좋은 방향으로 바꿀 것이 아니라 내용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꾸밈없는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본래의 변화다.

옷을 자주 바꾸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변신 욕망은 있다. 눈이 조금 더 컸으면, 키가 조금 더 컸으면 하는 바람처럼 열등감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인간은 나이를 먹으며 자연히 변한다. 스무 살의 나와 서른 살의 나는 다르고 얼굴과 체형도 변한다. 미모에 크게 신경 쓰는 배우도 나이가 들며 크게 쇠하는 경우가 있다.

변화는 자연스럽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고 억지로 버티는 모습은 오히려 멋없다. 아무리 젊게 꾸며도 만들어진 것이므로 부자연스럽다. 있는 그대로 사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변해 가는 자신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은 외로움의 반영이다

기관총처럼 쉬지 않고 말해 소통이라는 말조차 성립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말하는 동안 입만 움직이므로 몸과 마음의 균형이 흐트러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남의 말을 듣지 못하니 오감도 제대로 쓰지 않는다. 쓰는 것은 입뿐이다. 대화에는 적어도 귀와 입이 필요하지만 일방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입 하나만 사용한다.

사람 사이의 소통에는 ‘기다림’의 감각도 중요하다. 기다리지 않으면 생각의 공을 주고받을 수 없다. 서로 기다릴 때 말이 이어지고 아름다운 흐름이 만들어진다.

일방적으로 말하는 사람의 밑바탕에는 외로움도 있을 것이다. 마음 안에서 커지는 외로움을 억누르지 못해 계속 말을 쏟는다.

또 하나는 자기주장과 인정 욕구다. 누군가와 사회가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한 시절을 겪었을 수도 있다. 부모나 교사에게 인정받지 못한 경험이 겹쳐 밖으로 터져 나온다.

내면의 욕구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들어 줘, 인정해 줘”라는 상태가 된다. 그 사람의 대화는 상대와 공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벽에 공을 던지는 일과 비슷하다.

그럴 때 가끔은 그 공을 받아 주고 인정해 준다. 조금씩 “당신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면서 “다른 사람을 조금 더 생각하면 대화가 더 재미있어진다”고 알려 준다. 그러면 서서히 진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 말이 적은 사람은 두려움을 아는 사람이다

말이 적은 사람과 이야기할 때 나는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린다. 억지로 마음을 열어젖히지 않는다. “이 사람은 어떤 순간에 말을 할까”를 살핀다. 같은 과묵한 사람이라도 각자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순간과 분위기가 있다.

먼저 “이럴 때라면 말하는구나”라는 지점을 찾아 거기서 시작한다. 그것을 보지 않고 “왜 이렇게 말이 없니, 말 좀 해”라고 몰아붙이면 닫힌 껍질을 더 단단히 닫게 할 뿐이다.

과묵한 사람 중에는 살아오며 인간과 말의 무서움을 많이 겪은 사람이 있다. 말은 마음속 불안과 상처에 울려 퍼진다. 그런 말을 계속 듣던 시기가 있었기에 더는 말에 닿고 싶지 않아 껍질 속으로 숨었을 수 있다.

장인 중에도 말이 적은 사람이 많다. 손님을 상대하지 않는 직업이라면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원래 사람과 이야기하는 데 서툰 경우도 있고, 직업을 가진 뒤 물건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져 과묵해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눈은 입만큼 말한다”고 하지만 과묵한 사람의 눈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때도 있다. 표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그 사람에게 말하기 쉬운 순간과 분위기를 관찰하고 대화의 입구를 찾아야 한다. 대화는 거기서 시작된다.


■ 차가운 사람과 뜨거운 사람

사람의 마음은 바닷물의 밀물과 썰물처럼 차오르고 빠진다. 언제나 일정한 사람은 없다. 사계절이 바뀌듯 마음도 변하며, 계절에 온도 차가 있듯 마음에도 뜨겁고 차가운 때가 있다. 여러 온도를 지니기에 인간이다.

열혈형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에 몰두하고 거기서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는다’는 말이 열혈형에게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몰두하던 일이나 대상에서 떠나는 순간 놀랄 만큼 차가워질 수 있다. 갑자기 식은 열혈형 사람을 만날 때는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사람은 마음 어딘가에 외로움을 품고 있을 수 있다. 외로움은 누구나 지니지만 그것이 커지면 차가움으로 드러난다.

인간관계에서 좌절한 사람도 차가워진다. 남과 사회에게 버려진 듯 느끼며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결과, 사람을 대할 때 냉랭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차가운 시선도 필요하다. 한때 뜨거워지더라도 마음 한편에는 식혀 보는 부분을 남겨 두어야 한다.

뜨거워야 할 때와 차갑고 냉정해야 할 때가 있다. 어느 쪽이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다.

정신의 균형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온도도 조절해야 한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지 않게 상황에 따라 적정 온도로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 지나치게 겸손한 사람과 거만한 사람

불편할 만큼 지나치게 겸손한 사람이 있다. 양보하고 사양하며 자기주장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도 사실 요령으로 살아갈 때가 있다. 10년, 20년 동안 겸손한 태도를 반복하면 계산된 겸손이 몸에 밴다.

물론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나는 겸손한 사람을 만나면 그것이 본래의 겸손인지, 요령에서 나온 만들어진 모습인지 살핀다.

꾸며 낸 겸손은 작위적인 부분을 계속 건드리면 버티지 못하고 허점이 나온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어느 면을 뒤집어 보아도 겸손하다.

지나치게 겸손한 사람 가운데에는 종교, 철학, 도덕 지식을 배운 뒤 자신을 좋게 보이려는 사람이 많다. 내 경험으로는 학교 교사에게 특히 그런 유형이 많았다.

반대로 지나치게 거만한 사람도 있다. 요즘 말로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다.

거만한 사람은 무엇을 하든 “내가 해 주지”라는 자세를 보인다.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취재하러 온 사람 중에도 “우리가 찍어 주겠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이가 많다.

나는 그들이 도장에 들어오면 “또 하찮은 것을 찍으러 왔느냐”는 표정을 지어 먼저 거만함을 날려 버린다. 그러면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갑자기 조심스러워져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촬영한다.

그것은 내 위치이기에 가능한 대응일 수 있다. 보통 사람은 윗사람에게 대놓고 맞서기 어렵고, 무시한다고 해서 거만한 언행을 막기도 어렵다.

그럴 때는 오히려 상대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편이 좋다.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내가 회사원이었을 때 사장은 매우 무서운 사람이어서 다른 직원은 모두 두려워했다. 나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 일부러 사장이 화낼 만한 행동도 했다. 다만 해야 할 일은 정확히 하고 남보다 두세 배 일했다. 그러자 사장도 점차 나를 꾸짖지 않았고, 내가 있으면 오히려 밝아졌다.

거만하고 오만하며 무서운 상사는 세상에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두운 과거가 있거나 가정 문제가 있어 마음에 무거운 것을 품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무시하거나 반항하기보다 가능한 한 밝게 대한다. 비위를 맞추거나 맹목적으로 따르라는 뜻이 아니다. 그 사람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밝은 부분을 비추어 주는 것이다. 반복하다 보면 그도 예전에 밝았던 자신을 떠올리고 빛을 되찾을 수 있다. 음습하고 어두운 것에는 밝음으로 맞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과 남에게 엄격한 사람

무뚝뚝하고 불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정한 사람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 나무통을 만드는 장인이 있었다. 일 년 내내 공방에서 묵묵히 통만 만들었다. 영화를 보거나 밤에 술을 마시는 오락도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가 공방 앞에서 놀아도 쳐다보지 않고 일만 했다.

장사를 위해 상냥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질 좋은 통을 만들어 오랫동안 쓰게 하고 결과적으로 손님이 만족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말은 적었지만 물건은 확실했다.

우리가 공방 주변에서 온갖 장난을 쳐도 한 번도 화내지 않았다. 보지 않는 듯 일하면서도 위험한 짓을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도 그 사람이 진정한 다정함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겉은 부드럽지만 실제로는 매우 엄격한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엄격하되 남에게 같은 수준을 강요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다정하게 느껴진다.

그 반대라면 곧 불쾌한 사람이 된다.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남에게 엄격한 유형이다. 자신에게 엄격한 삶은 괜찮지만 자기에게 느슨하고 남에게 엄한 사람은 질이 나쁘다.

옛 부모 가운데에는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 많았다. 요즘에는 정작 자신은 흐트러져 있으면서 아이에게만 엄격한 부모가 많다. 자신이 힘든 길을 걷지 않고 얻지 못한 것을 아이에게 대신 얻으라고 한다. “너는 엄격하게 살고 공부해서 반드시 얻어라”라는 방식이다.

멋있게 말하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에게 맡긴다”가 되겠지만 그런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부모가 제대로 살지 않으면서 그렇게 키우면 아이가 납득할 수 없고 언젠가 반발한다.

겉은 흐트러져 보여도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도 있다. 평소 편한 차림을 하는 나도 그 유형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남이 말하는 만큼 내가 엄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 눈에는 힘든 방식으로 사는 듯 보이지만 내게는 이것이 평상시 모습이다. 스스로를 몰아붙였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특별히 노력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때그때 필요하고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다.

자기 행동을 ‘엄격한 수행’으로 보는가, ‘좋아서 하는 일’로 보는가의 차이일 수 있다. 힘든 일도 되도록 즐겁게 하려 하면 마음이 훨씬 가벼워진다.

그리고 내 앞에 힘든 길과 편한 길이 있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힘든 길을 택한다. 나는 어려운 상황을 좋아한다. 따라서 스스로를 곤경에 몰아넣는다기보다 스스로 그 안으로 뛰어드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 쉽게 원한을 품는 사람의 진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 원한을 품는 사람이 있다. 좋게 말하면 진지하고 열심인 유형이다. 모든 일에 진지하고 열심이기 때문에 오히려 집착한다. 배신당하거나 자기 뜻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포기하지 못해 오래 품는다.

사람이 진지하고 뜨거워지는 것은 무엇인가를 노력할 때다. 그런데 실제로 도움이 되는 노력보다 헛도는 노력에 매달릴 때 더 진지하고 뜨거워지는 경우도 있다.

지나치게 달아오른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뜨거울수록 원한의 뿌리도 깊어진다.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식는 사람도 원한을 오래 품기 쉽다. 언제나 열정적인 사람보다 평소에는 차가워 보이다가 갑자기 뜨거워지는 사람을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에게 원망받지 않으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난로는 적당히 떨어져 있을 때 따뜻하고, 너무 가까우면 누구나 화상을 입는다. 인간관계도 같다. 뜨거운 사람에게 지나치게 다가가면 데인다. 화상을 입지 않을 간격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

살아가는 데 열기는 필요하지만 과열되어서는 안 된다. 남의 열기에 가까이 가면 데고, 자신이 지나치게 뜨거워지면 스스로 재가 된다.

무엇이든 진지하게 하는 사람은 고지식한 경우가 많다. 반대로 말하면 고지식한 사람일수록 쉽게 달아오른다.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 것은 좋지만 중간에 숨을 돌리는 일도 삶에 필요하다.


■ 남의 험담만 하는 사람

입을 열기만 하면 남의 흠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결점을 찾아낼 수 있는지 감탄스러울 정도다.

험담만 하는 사람은 삶의 어느 지점에서 생긴 상처를 품고 있다. 당시의 “용서할 수 없다”는 감정이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어 무엇이든 못마땅하게 느낀다. 자신이 주변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감정도 강할 것이다.

사람을 평가하는 일은 원래 간단하지 않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운데 남을 정확히 평가하기는 더 어렵다.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거나 이해받지 못하는 일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험담하는 사람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신보다 먼저 남을 보고, 곧바로 남을 탓한다. 본래는 자신을 충분히 바라본 뒤 말해야 한다.

남의 뒷말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험담의 대상이 되면 비정상적으로 반응하고 격분한다.

그 행동에는 자신이 구원받고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남을 깎아 자신을 높은 위치로 올리고, 노력하지 않고도 위에 선 듯 느끼며 안도한다. 높은 곳에서 남을 내려다보며 혼자 만족한다. 내면의 외로움과 불안이 그런 행동을 끌어낸다.

시중의 주간지 기사 대부분도 일종의 험담이다. 그런 잡지가 팔리는 것은 ‘알고 싶다’는 호기심 뒤에 ‘몰래 엿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엿보아 무언가를 얻는 쾌감,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숨어 있는 그 욕망을 주간지와 텔레비전이 교묘히 찌른다.

사람의 깊은 심리를 장사에 이용하는 이들은 매체 밖에도 많다. 그런 천박한 장사에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자기 호기심 뒤에 숨어 있는 욕망을 알아차려야 한다.


■ 분위기만 잘 타는 사람은 좋은가 나쁜가

학교 반이나 회사 부서에는 흔히 분위기를 잘 타고 능청스러운 사람이 한 명쯤 있다. 이 유형의 특징은 늘 요령을 살핀다는 점이다.

본래 일본어의 ‘초시’는 샤미센이나 아악에서 음의 높낮이와 조율을 가리키는 중요한 말이다. 박자와 비슷하게 쓰이기도 하고 “호흡을 맞춘다”는 표현도 있듯 집단으로 일을 이룰 때 흐름과 조율은 중요하다.

분위기를 잘 타는 사람은 그 중요함을 본능적으로 아는지도 모른다. 요령이 좋고 눈치도 빠르다. 무엇이든 요령으로 처리하다 보니 점점 그런 유형이 된다.

하지만 요령만 재다 보면 진짜 ‘용량’을 재지 못한다. 실제 사물과 상황의 크기를 정확히 붙잡지 못하게 된다.

‘요령이 좋다’는 말에는 약간의 교활함도 들어 있다. 모두에게 알맞은 정도를 찾는 것과 달리, 요령은 개인의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자기만 만족하면 끝나는 사람이 많다.

다소 부정적으로 설명했지만 나는 이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로 밝고, 사물에는 양과 음이 있다면 어두움보다 밝음이 낫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자리가 밝아진다. 분위기를 잘 타는 사람이 우울증에 빠졌다거나 은둔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듣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어두운 환경 속에서 더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 밝은 곳에서 지나치게 들뜨면 위험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빛이 된다. 모래에 묻힌 유리 조각과 비슷하다. 햇빛 아래에서는 날카롭고 위험하지만 달빛 아래에서는 보석처럼 반짝인다.

다만 발이 땅에 단단히 붙어 있지 않아 가볍게 평가받기 쉽다. 주변을 밝히고 활기를 북돋우면서도 경박하다는 말을 듣는다. 제법 손해 보는 역할이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가끔은 고마움을 표현해도 좋다. 물론 그 말을 듣고 또 들뜰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의 정체

사람이 쓰는 말에는 그가 살아온 방식이 그대로 나타날 때가 있다. 같은 “바보”라는 말도 어떤 사람이 하면 정감 있게 들리고, 다른 사람이 하면 깊은 상처를 주거나 순전히 멸시처럼 들린다.

말하는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삶의 자세와 인격, 인간성이 한 단어에 응축되어 나온다.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은 대개 거만하다. 앞서 말한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다. 요즘에는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늘었다.

그런 사람은 결과만으로 모든 일을 판단한다. 돈이 많으면 훌륭하고, 공부를 잘하면 훌륭하며, 좋은 회사에 들어가면 훌륭하다고 본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결과 앞에 존재하는 과정을 볼 수 없다. 고정관념에 갇혀 본질을 보려 하지 않고 자기 판단만 기준으로 삼으니 자연히 위에서 내려다본다.

사회에는 부모, 교사, 상사처럼 위에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런 위치에 오를수록 자신이 내려다보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지 조심해야 한다.

겉치레뿐인 권위는 금세 허점이 나온다. 아랫사람이 “그 지위와 옷을 벗으면 당신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건방지게 굴지 말고 나를 따르기만 해”라는 본심이 튀어나오면 존중받을 수 없다.

진정으로 위에 선 사람은 직함을 벗은 맨몸의 대응만으로도 상대를 납득시킬 힘이 있어야 한다.


■ 푸념하는 사람은 떼쓰는 사람이다

요즘은 푸념하는 사람이 많다. 외로워서일까, 말하면 불만을 잠시 잊을 수 있어서일까, 동정을 받고 싶어서일까. “내 하소연 좀 들어 줄래?”라는 말을 누구나 들어 보았을 것이다. 나도 물론 들어 보았다. 하지만 나는 푸념을 되도록 듣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은 여러 일에 지쳐 회사, 상사, 남편, 아내, 연인을 두고 푸념한다. 그러나 내게 푸념은 아이가 떼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울며 버티는 것을 떼쓴다고 한다. 하소연만 하는 어른도 그 아이와 비슷하다. 아무리 울고 불평해도 그곳에서 새로운 전망은 열리지 않는다.

본인은 푸념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떼쓰는 것일 수 있다. 그 말을 계속 듣다 보면 듣는 사람까지 같은 늪에 빠진다. 맞장구쳐 주는 것이 다정함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함께 푸념한다는 것은 자기에게도 같은 떼쓰기의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 늪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상대의 말이 단순한 푸념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멈추게 하는 편이 좋다. 진짜 상담인지 하소연만 하는 것인지 구별해야 한다. 푸념과 맞장구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두 사람이 함께 질질 끌 뿐이다.

푸념한다고 기분이 제대로 풀리거나 무엇인가가 배출되는 것도 아니다. 푸념은 오히려 생각을 길게 끌고 간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빨리 그 사고를 끊어야 한다.

그래도 말하고 싶다면 심각하게 토해 내기보다 가벼운 상담이나 농담의 형식으로 바꾸면 좋다. 진지하게 반복할수록 생각에 더 붙잡힌다. 웃으며 농담을 섞으면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리고 듣는 사람의 스트레스도 줄어든다.

푸념해야 한다면 농담과 가벼운 상담의 형태로 말하라. 그것이 내가 권하는 방법이다.


■ 제멋대로인 사람은 훌륭한 반면교사다

자기 생각만 밀어붙이고 주변을 고려하지 않으며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어느 집단에나 한 명쯤 있다.

무시하고 거리를 둘 수 있다면 괜찮지만 같은 회사나 조직이라면 피할 수 없다. 결국 그 사람에게 계속 휘둘린다.

내가 회사원이고 같은 부서에 지나치게 이기적인 사람이 있다면 “네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추한지 모르겠느냐”고 정면에서 부딪힐 것이다. 회사의 일은 혼자 할 수 없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므로 한 사람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조직 전체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작귀회에도 자기중심적이고 남을 내려다보는 수련생이 있다. 나는 그때마다 “그건 아니지”라는 공을 반복해서 던진다. 네 행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계속 보낸다.

사람마다 여러 방식으로 공을 되돌려 보내지만 나는 “그런 답은 받지 않겠다”고 다시 튕겨 낸다. 그러면 그는 “회사에서는 통했는데”, “집에서는 괜찮았는데”라며 조금씩 깨닫는다.

다른 곳에서 허용되던 행동이 작귀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제멋대로인 면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그러나 완전히 고치기는 쉽지 않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은 다르며, 후자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행동을 다른 수련생도 확인하고 모두가 거기서 배우게 한다. 그 한 사람을 억지로 바꾸기보다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부모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뿌리 깊은 이기심에도 이 방법은 효과가 있다. 남의 행동을 보며 자기 행동을 고친다는 말을 실제로 실천하는 셈이다.


■ 변명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불안에서 달아난다

무엇이든 남의 탓으로 돌리고 늘 변명하는 사람이 있다. 입에서 나오는 말 대부분이 핑계일 만큼 버릇이 된 경우도 있다.

변명하는 사람의 말은 그 사람에게는 진실이다. 사람 수만큼 각자의 진실이 있다. 거짓말도 그 사람에게는 진실일 수 있고, 변명도 마찬가지다. 성실히 사는 것도, 거짓말하지 않는 것도 각자의 진실이다.

그에게는 변명이 자기 진실이므로 그것을 끝까지 수행할 뿐이다. 그래서 언제 무엇을 물어도 같은 핑계를 반복한다.

인간에게는 싫은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싫은 일에는 불안이 따라오고 불안은 공포를 부른다. 이는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있는 본능일 것이다.

불안한 일에서 정직하게 떠나면 되는데 변명하는 사람은 얼버무리며 빠져나가려 하기 때문에 핑계가 생긴다. 변명은 말로 달아나는 기술이며, 불쾌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몸에 익힌 방식이다.

나는 그런 사람을 몰아붙이지 않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달아나지 않아도 괜찮아. 안전해”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한다.

다만 계속되는 변명 때문에 주변 사람이 불만을 쌓을 수 있다. 도장에서 그런 일이 생겨도 내가 위에서 직접 가르치려고 하지는 않는다.

대신 수련생끼리 서로 지적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다. 윗사람이 지적하면 다시 변명으로 빠질 가능성이 크지만 같은 위치의 사람이 말하면 마음에 울리는 것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변명하는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조금씩 가라앉히고 정리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다. 신뢰가 없으면 아무리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라고 해도 “말뿐이잖아”라는 반응이 나온다. 평소 관계 속에서 신뢰를 쌓아야 변명과 말로 도망치는 습관도 줄일 수 있다.


■ ‘존재감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배우나 연예인을 두고 “존재감이 있다”고 평가한다. 주변에도 존재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존재감은 누구나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

그 폭을 넓히려면 일상에서 무엇이든 ‘당연히 일어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감각이 필요하다. “말도 안 된다”가 아니라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다”는 자세다.

그 감각을 유지하며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폭을 넓히고 대응할 마음을 준비하면 존재감은 자연히 안에서 배어 나온다.

존재감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모두 있다. 비율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누구나 양쪽을 지닌다. 강한 존재감, 약한 존재감, 좋지 않은 존재감 등 여러 성질이 섞여 한 사람의 존재감을 만든다.

이렇게 말하면 “사쿠라이 씨에게 약한 존재감은 없겠지요”라는 말을 듣지만 나에게도 약한 면은 있다.

사람 사이의 차이는 각 성질의 분량 차이다. 자신이 바라는 존재감이 있다면 그 부분의 비율을 늘려 가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만의 좋은 존재감이 안쪽에서 조각되듯 모습을 드러낸다.


[편집 협력]
다카기 마사아키 / 하기와라 세이이치로

[출판 정보]
이 작품은 2009년 1월 고단샤 플러스알파 신서로 출간된 책을 전자책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전자책판 발행: 2011년 7월 1일
발행처: 주식회사 고단샤

※ 원문의 저작권 및 이용 안내 문구는 번역 본문에서 간략히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