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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9 posture, 사쿠라이 쇼이치

페페 더 엔지니어 2026. 7. 9. 22:42

『몸을 정돈하다 - 운을 부르는 몸의 사용법』
사쿠라이 쇼이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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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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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체력과 기력을 갖추고 무언가를 이룬다. 그러나 인간이 오랜 세월 익숙하게 지내온 것은 체력 쪽이다.

‘인간 사회’라는 틀이 생기기 전까지 이어진 실로 장대한 인류의 역사는 줄곧 본능의 지침에 의해 정해져 왔다. 인류는 몸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며 자연의 생명체로서 생명의 연속성을 지켜왔다.

인류가 발생한 뒤 지금까지의 역사를 가령 하루라는 시간으로 나타낸다면, 오늘날과 같은 사회의 틀이 만들어진 뒤의 시간은 겨우 몇 분, 어쩌면 몇 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인류는 ‘기력’이라는 것을 급격하게 증대시키고 정신을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몸보다 사고를 앞세워 세상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몸을 쓰는 일을 낮게 보고 지식을 위에 두는 인간 세계의 틀을 만들어냈다.

지식은 문명의 풍요를 낳았지만, 그 이면에 막대한 비극이 있었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인간의 정신도 다양하고 복잡해졌고, 마음과 생각과 감정은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그렇다고 현대인의 생활에서 지식이 만들어낸 편리함과 이익을 빼앗을 수는 없다. 인간에게서 사고를 제거한다면 사회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지식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에는 거짓과 속임수가 어쩔 수 없이 섞인다. 그에 비하면 몸에는 아직 조금이나마 정직함이 남아 있다.

목적이나 목표를 이루려 할 때 지식은 ‘단단히 붙잡아라’, ‘잡았으면 놓지 마라’라고 속삭인다. 사람들은 그것을 노력이라고 부르는 듯하지만, 그 결과 오감 속에 있는 ‘닿는다’는 감각을 짓누르거나 잃어버리고 있다.

힘이 들어가면 모든 일이 거칠고 둔해진다. 힘을 빼고 살며시 닿는 감각. 힘을 주는 삶에서 벗어나 살며시 닿는 감각을 되찾으면, 어떤 일이든 부드럽게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몸이 솔직하게 가르쳐준다. 행복도 붙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며시 닿는 감각을 가졌을 때 비로소 진짜 행복을 느끼는 것인지 모른다.

변화에 맞추어 모습을 바꾸는 자연계 생물의 유연성이야말로, 인류가 지금 나아가려는 방향의 잘못을 정확히 가르쳐준다.

세상이 계속 변화하고 흐르는 이상, 그 안에 사는 우리도 몸을 흐르듯이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가능성을 직접 느껴야 한다.

산속 강에 가면 수없이 큰 바위가 굴러다닌다. 사람의 힘으로는 지렛대를 써도 움직이기 어려운 바위가 물의 흐름을 따라 계속 이동한다. 몸도 ‘흐르는 감각’으로 움직이면 상식으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발견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지식과 사고보다 몸의 정직함과 재미를 삶의 흐름 속에서 찾아내고, 인간이 한때 살았던 ‘감각의 세계’를 되찾는 일은 지식과 사고로 혼란에 빠진 인간이 궤도를 수정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사쿠라이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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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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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기술을 넘어선 몸의 사용법
- 몸으로 노는 일은 끝없이 재미있다
- 몸은 흐르듯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 몸이 정직해지면 마음도 정직해진다
- 시선을 바꾸기만 해도 움직임이 흐르기 시작한다
- 변화에 맞추어 살면 움직임이 부드러워진다
- 동작은 흐르듯 이어라
- 좋은 몸짓은 ‘유체의 몸’에서 나온다
- 몸은 핵분열 반응과 같은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 몸이라는 자원의 낭비를 멈추면 상식을 뛰어넘는 힘이 나온다
- 감각은 붙잡을 수 없다
- ‘한입 먹는’ 감각으로 힘을 뺀다
- 고정관념을 벗으면 몸은 상식을 뛰어넘어 움직인다
- 몸의 일부만 단련하면 부상의 원인이 된다
- 스모 선수는 왜 손가락을 테이프로 고정하는가
- ‘연습한 만큼 성과가 나온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 위화감을 단서로 자연스러운 감각을 찾는다

제2장 잠재력을 끌어내는 몸 정리법
- 몸의 형태를 만드는 ‘세로 움직임’과 ‘가로 움직임’
- 순환하지 않는 몸은 병든다
- 몸의 이상을 바로잡는다
- 마음의 피로는 머리의 뭉침으로 나타난다
- 몸을 열면 자세가 좋아진다
- 다이어트 효과가 있는 체조
- 어깨 결림을 풀어주는 간단한 체조
- 허리 통증을 없애는 뒹굴기 체조
- 계단을 편하게 오르는 흔들흔들 체조
- 몸의 움직임을 순식간에 가볍게 만드는 방법
- 괴한에게 습격당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 무거운 물건을 편하게 들어 올리는 법

제3장 진정으로 강한 몸이란 무엇인가
- 진짜 강함을 지닌 몸이란 무엇인가
- 강한 사람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 ‘몸의 은혜’를 살린 몸의 사용이 가능한가
- 빨리 움직이려고 하면 오히려 느려진다
- 승기는 붙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며시 닿는 것이다
- 귀로 보라
- 새끼손가락이 몸 움직임의 열쇠를 쥐고 있다

제4장 가혹함이 진짜 움직임을 낳는다
- 위기에 놓인 몸에서 진짜 움직임이 나온다
- 몸은 궁지에 몰리면 엄청난 힘을 낸다
- 목숨을 건 놀이로 잠든 본능을 자극한다
- 행실이 나쁠 때 오히려 몸의 본질이 드러난다
- 축을 빼앗는 쪽이 이긴다
- 기술만으로는 일류가 될 수 없다
- 진짜 존재감은 몸에 나타난다

제5장 자연스러운 몸의 비밀
- 현대인은 마음과 몸을 부자연스럽게 움직인다
- 몸을 부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칭찬받는다
- 인간은 문명의 도구로 자연의 변화에 대응하고, 동물은 몸으로 대응한다
- 인간의 몸은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움직이지 못한다
- 몸의 버릇이 말해주는 것
- 다리 떨기 같은 몸의 흔들림은 왜 일어나는가
- 버릇은 초심으로 돌아가면 사라진다
- 몸이 지우개가 되어 좋은 움직임을 지워버린다
- ‘침착하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인가
- 나약했기 때문에 인간은 두 발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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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기술을 넘어선 몸의 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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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으로 노는 일은 끝없이 재미있다

몸은 재미있다. 몸을 써서 놀거나 움직이는 데에는 아무리 해도 다하지 않는 재미가 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는 몸을 사용하는 기술이나 정해진 형식 같은 것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기술이나 형식 안에서 몸을 쓰고 연습하는 운동은 공부와 같다. 나는 공부하듯 몸을 쓰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일은 스포츠 선수나 무도가에게 맡기면 된다.

몸의 재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어린이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해가 지는 줄도 잊고 매일 몸을 마음껏 쓰며 놀았다. 그렇게 끝없이 놀 수 있었던 까닭은 몸을 쓰는 놀이가 단순하게, 더할 나위 없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끝이 없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몸의 즐거움과 재미를 버려간다. 지적인 것의 가치가 가장 높은 자리에 놓인 사회에서 육체적인 것은 낮게 평가되기 때문이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프로 운동선수가 되도록 길러지는 아이들의 운동은 공부와 비슷하므로, 단순히 육체적인 것을 낮게 보는 가치관 안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몸을 쓰는 놀이의 재미는 사람이 성장하고 말이 늘어나며 지식의 방향으로 나아갈수록 보이지 않게 된다. 하지만 본래 그것은 본능에 뿌리내린, 조건 없는 기쁨을 동반하는 것이다.

■ 몸은 흐르듯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몸은 환경이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몸의 움직임도 그 흐름처럼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현대인은 대부분 몸을 흐르듯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 않는다’기보다 ‘할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움직임이 흐를 때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라고 목적의식을 품는 순간 몸에 힘이 들어가고 움직임의 흐름이 끊긴다. 사고하는 습관이 몸에 밴 현대인은 몸보다 의식이 앞서기 때문에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어렵다.

몸에 흐름을 만들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한 실험을 해보면 된다.

선 상태에서 눈앞의 바닥에 물건 하나를 놓는다. 먼저 그 물건을 목표물로 삼아 눈으로 똑바로 보면서 몸을 숙이고 팔을 뻗어 잡아본다. 다음에는 같은 자세에서 바닥의 물건을 잠깐 본 뒤 시선을 떼고, 물건이 있는 부근을 감각 속에 담은 채 몸을 숙여 집어본다.

직접 해보면 두 움직임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안다. 앞의 움직임은 딱딱하고 무겁지만 뒤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가볍다. 앞의 움직임에는 흐름이 없고 뒤의 움직임에는 흐름이 있다.

이처럼 ‘잡아야지’라는 식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의식을 품으면 몸의 흐름이 갑자기 멈춘다. 두 번째 경우에는 목표물에서 시선을 거두면서 그 자리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든 것이다.

‘잡으러 간다’가 아니라 ‘닿으러 간다’는 감각으로 바꾸어도 좋다.

가령 프로 야구선수는 수비할 때 날아오는 공을 ‘잡으러 간다’는 의식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공에 닿으러 간다’는 감각에 가깝다. 잡으려고 의식하면 공을 제대로 잡기 어렵다. 닿으러 간다는 감각을 가지면 몸이 흐르는 움직임이 되어 공의 흐름과 정확히 겹친다.

전체가 흐르는 가운데 움직이는 몸도 역시 흐르고 있어야 한다.

일은 흐름 속에서 힘을 빼고 처리해야 한다. 힘이 빠지고 몸이 흐르듯 움직이면 딱딱하게 움직일 때 하지 못하던 일도 할 수 있다.

‘힘을 뺀다’는 것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사고의 버릇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렵다. 그러므로 억지로 힘을 빼려고 하기보다 몸의 움직임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든다는 감각을 갖는 편이 몸을 더 솔직하게 만들 수 있다. 몸이 순수하고 정직해지는 상태가 몸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다.

■ 몸이 정직해지면 마음도 정직해진다

몸을 정직하게 만들면 마음도 정직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에서 출발해 ‘마음을 정직하게 해야지’라고 하기 때문에 일이 억지스러워진다. 마음을 아무리 정직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도 몸은 정직해지지 않는다. 몸 어딘가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다.

몸이 정직해지면 힘을 쓰지 않고도 여러 일을 편하게 할 수 있다. 바닥에 앉은 사람의 등을 손으로 위쪽으로 가볍게 쓸어 올리는 것만으로 쉽게 일으켜 세울 수 있고, 거북이처럼 바닥에 웅크린 사람에게 팔을 살짝 걸기만 해도 굴릴 수 있다.

나는 종종 춤을 추듯 몸을 움직인다. 그때 뱀이 되기도 하고, 학이 되기도 하고, 상어가 되기도 한다. 자연의 생물은 모두 ‘흐르는 몸’을 가지고 있다. 그들과 하나가 된다는 기분으로 움직이면 몸이 좋은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태극권과 같은 움직임을 하다 보면 몸속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솟아올라 스스로도 억누르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 상태로 누군가에게 닿으면 상어가 공격한 것처럼 상대가 날아가기도 한다.

흐름 속에서 힘을 뺀 몸에는 상식으로 측정할 수 없는 힘이 숨어 있다. 그것은 자연에서 빌려온 힘이기 때문이다.

■ 시선을 바꾸기만 해도 움직임이 흐르기 시작한다

당신은 평소 어떤 시선을 하고 있는가. 밖을 걷거나 멈춰 서 있을 때, 또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 어디를 보고 있는가. 시선 하나만으로도 몸의 흐름과 마음의 상태는 미묘하게 달라진다.

요즘은 시선이 아래로 향한 사람이 늘었다. 휴대전화나 컴퓨터 화면을 보는 시간이 길어진 탓도 있다. 시선이 늘 아래로 향한 사람은 마음이 닫혀 있고 몸의 흐름도 멈춰 있다.

시선은 지면과 평행하게 두기보다 조금 위쪽을 향해 먼 곳을 보는 편이 좋다. 서 있는 상태에서 아래를 볼 때와 조금 위를 볼 때를 비교해보라. 시선을 약간 위로 향하면 마음이 넓어지는 감각이 생길 것이다. 몸도 흐르기 시작하고 움직임도 가벼워진다.

흥미로운 것은 늘 아래를 보는 사람과 천진할 정도로 밝고 시선이 조금 위를 향한 사람을 각각 안아보면 느껴지는 무게가 다르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실제 체중이 비슷해도 아래를 보는 사람은 무겁고, 명랑한 사람은 가볍다. 물론 이것은 물리적인 무게와는 다른 차원의 감각이다.

시선이 아래로 향한 사람은 정신적인 문제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말 그대로 추처럼 몸 안에 가라앉아 있다.

시선 하나로 여러 가지가 달라질 만큼 몸은 섬세하고 절묘하다.

■ 변화에 맞추어 살면 움직임이 부드러워진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요가 같은 것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들을 만큼 몸이 부드럽다. 다리를 들어 목 뒤에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요가나 유연체조를 매일 하지는 않는다.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놀이하듯 일상생활 속에서 몸을 이리저리 굽히고 비틀 뿐이다.

몸을 부드럽게 만들겠다는 목적을 세우고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일은 내 성격에도 맞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산다는 것은 잇달아 일어나는 변화의 흐름에 응하는 일이다.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동작을 부드럽게 하며 대응하면 몸도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진다.

사람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생활하고 일하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흐름에 몸을 솔직하게 맞추어 움직이면 몸은 저절로 부드러워진다.

■ 동작은 흐르듯 이어라

몸의 움직임은 하나하나의 동작이 흐르듯 이어지는 것이 이상적이다.

마작에서 패를 잡을 때 손가락을 벌리면 패가 손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오지 않는다. 패를 집었다면 손 안에 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손에 받아들이지 못하면 다음 변화에 즉시 대응할 수 없다. 마작은 계속 일어나는 변화에 순간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게임이다.

손가락을 벌리면 왜 동작의 흐름이 끊어질까. 손가락을 펼치는 순간 패를 잡고 버리는 동작이 팔꿈치 아래만 굳힌 움직임이 되기 때문이다.

변화에 대응하려면 무엇보다 움직임이 부드러워야 한다. 움직임이 부드러우려면 몸도 부드러워야 한다. 몸이 굳어 있으면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흐르는 움직임도 나오지 않는다.

가까운 예로, 전철 안에 서 있을 때 몸이 굳어 있으면 작은 흔들림에도 비틀거린다. 반대로 몸이 부드러우면 흔들림에 맞추어 몸이 휘고 힘이 분산되므로 웬만한 흔들림에는 비틀거리지 않는다.

이는 초고층 건물의 내진설계와 같은 원리다. 초고층 건물은 지진의 흔들림에 맞추어 부드럽게 휘면서 파괴적인 힘을 흘려보내도록 설계된다.

전철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듯 서 있어서는 안 된다. 버티면 몸에 힘이 들어가 딱딱해진다. 버티는 자세는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하다. 손잡이나 난간을 꽉 움켜쥐는 것도 좋지 않다. 그런 상태는 몸의 균형이 나빠 강하게 흔들리면 몸이 크게 기울고 다음 동작으로 매끄럽게 옮겨가지 못한다.

나는 전철을 탈 때 손잡이에 가볍게 손을 댄 상태로 서 있다. 그 편이 몸의 균형이 잘 잡히고, 일이 생겼을 때 다음 동작으로 순간적으로 옮겨갈 수 있다.

몸의 움직임은 하나의 동작으로 완결되어서는 안 된다. 각각의 동작이 이어지지 않고 토막 나면 다음 동작으로 옮길 때 움직임이 커진다. 작은 움직임이면 제때 대응할 수 있지만, 큰 움직임은 그만큼 쓸데없는 동작이 많아 늦어진다.

변화가 백 가지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변화 하나하나에 매번 크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 변화에 제때 맞추려면 큰 동작을 하지 않아야 한다. 승부의 자리에서는 그것이 치명적인 차이가 된다.

■ 좋은 몸짓은 ‘유체의 몸’에서 나온다

앞에서 말했듯 좋은 몸의 움직임은 순간순간의 동작이 부드럽게 흐르며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특정 스포츠를 할 때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동작에도 해당한다.

몸은 가만히 있으면 겉보기에는 고정된 물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 흔들림은 자동차 핸들의 유격과 같은 것이다.

미세한 흔들림이 있기 때문에 현재 상태에서 다음 순간의 동작으로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다. 이런 흔들림이 없다면 몸의 움직임은 로봇처럼 될 것이다.

즉 몸은 ‘고체’가 아니라 ‘유체’다. 하나의 움직임이 매번 끊겨 완결되는 사람은 몸이 그리는 선이 울퉁불퉁하여 아름답지 않다. 그런 사람은 몸을 고체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본래 유체로서의 모습을 잃는다.

하나하나가 이어져 흐르는 몸은 유체가 그리는 곡선처럼 매끄럽고 아름답다. 몸짓이 아름다운 사람은 몸이 본래 지닌 유체의 움직임을 하고 있다.

따라서 ‘에도 시대의 몸짓’ 같은 정형화된 형식부터 외우려 하는 것은 순서가 거꾸로다. 액자 속에 넣은 듯한 고정된 동작부터 흉내 내서는 좀처럼 진짜 몸짓이 몸에 배지 않는다.

■ 몸은 핵분열 반응과 같은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보통 몸의 힘은 뼈의 힘과 근육의 힘이 결합하여 생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몸에는 그 차원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언제 그런 힘이 나오는가. ‘힘을 넣을 때’가 아니라 ‘힘을 뺄 때’다.

우리는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는 수많은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다. 고정관념을 잠시 걷어내면 보이지 않던 것이 갑자기 보이고 시야가 크게 넓어지는 일이 생긴다.

몸에서 진정으로 힘을 빼려면 ‘힘을 넣는 것이 좋다’는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힘을 뺀다’는 것은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 단순히 힘의 양을 줄인다는 뜻이 아니다. ‘밀어서 안 되면 당겨보라’고 할 때의 반대 동작과도 다르다. 힘을 빼면 힘이 0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에서 핵분열 반응과 같은 에너지가 솟아난다.

진정으로 힘이 빠진 상태는 몸을 축 늘어뜨리는 단순한 탈력이 아니다. 어디에도 긴장을 만들지 않은 채 몸을 편안히 놓아두는 것이 힘을 빼는 일이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 힘을 빼려고 생각하는 순간 어디엔가 힘이 들어간다. 그러므로 힘을 빼겠다고 애쓰기보다 앞에서 말한 ‘흐름’의 감각을 갖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가령 무언가를 치는 동작을 할 때 어디에도 힘이 없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타격을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해도 우연히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일이다.

본인은 힘이 들어가지 않은 부드러운 움직임이라 생각해도 반드시 어딘가에 작은 긴장이 들어가 있다. 몸의 표면은 부드러워 보여도 안쪽이 굳어 있는 경우가 많다. 몸 전체를 완전히 힘이 없는 부드러운 상태로 만드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몸의 힘을 뺀다는 것은 긴장을 조금씩 더하거나 빼며 조절하는 방향과 전혀 다르다. 몸의 여러 부분을 부드럽게 움직이면 잠재된 힘이 전신으로 퍼지며 한꺼번에 활성화되는 감각이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셋이 넷이 되듯 전신에서 힘들이 순간적으로 이어져 핵분열 반응과 같은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힘을 뺌으로써 나오는 힘에는 일반적인 힘을 내기 위해 필요한 거리나 속도 같은 조건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거리도 속도도 확보되지 않은 자리에서 근력을 넘어서는 에너지가 태어난다.

■ 몸이라는 자원의 낭비를 멈추면 상식을 뛰어넘는 힘이 나온다

나는 격투기의 전문가도 아니고 선수 경험도 없지만 프로 격투가들에게 실전적인 조언을 자주 부탁받는다.

격투기의 문외한이 프로 선수에게 통하는 몸의 사용법을 보여주는 광경은 옆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어릴 때부터 놀이와 싸움을 통해 자연스럽게 익힌 것이므로 신기할 것이 없다.

내 마작도장에 체중이 백수십 킬로그램인 스모 선수가 왔을 때 그를 밀어 날려버린 적이 있다. 몸집이 작은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힘을 뺀 ‘흐르는 동작’을 사용하면 가능하다.

예전에 한 종합격투기 선수가 실전적인 조언을 받고 싶다고 하여 훈련장에 간 적이 있다. 처음에는 링 밖에서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며 말을 해주었지만, 어느새 링에 올라가 손발의 움직임을 직접 지도하고 있었다. 그러다 체중 100킬로그램이 넘는 선수 위에 그보다 훨씬 가벼운 내가 몸을 얹었는데, 그는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물론 근력으로 억누른 것이 아니다. 몸의 긴장을 없애고 전신을 빠짐없이 부드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이야기를 듣던 취재 기자가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한쪽 팔을 팔꿈치 부근에서 교차하여 밀었다. 힘이 맞서 앞뒤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 내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문득 힘을 빼자, 기자는 뒤로 크게 튕겨 나갔다.

그는 “이상하다”며 몇 번이나 다시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 큰 파도가 갑자기 밀려와 몸이 통째로 끌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파도처럼 느껴진 것은 내 움직임이 흐름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평소 습관적으로 몸의 일부분만 사용한다. 몸을 쓰는 것이 직업인 프로 운동선수조차 몸 전체 중 몇 부분만 사용한다.

가령 몸이 열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보통 사람은 그중 두 개쯤, 프로 선수는 다섯 개쯤 사용하는 느낌이다. 두 개를 쓰면 2의 힘, 다섯 개를 쓰면 5의 힘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열 개를 모두 사용할 수 있다면 힘은 단순히 10이 아니라 30이나 90으로 불어날 수도 있다.

체중 100킬로그램인 격투가의 관점에서 보면 내 힘은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부족한’ 몸을 전부 활용하면 반대로 그 100킬로그램의 격투가를 부족한 상태로 만들 만큼 내 몸은 충족된 상태가 된다.

우리는 평소 자기 몸을 너무 아깝게 사용한다. 몸이라는 한정된 자원이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현대인은 더 생각해야 한다.

■ 감각은 붙잡을 수 없다

스포츠나 몸을 사용하는 장인의 세계에서는 ‘감각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감각은 애초에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공기는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닿는 느낌은 받을 수 있다. 감각도 마찬가지다. 붙잡을 수는 없지만 닿을 수는 있다.

‘이 감각을 잡은 것 같다’고 생각해도 다음 순간에는 달아난다. 야구선수가 방망이를 수천 번, 수만 번 휘두르다가 ‘바로 이 느낌이구나’라고 생각해도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는 어렵다.

감각을 정말 붙잡을 수 있다면 그 느낌은 언제든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좋은 컨디션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뒤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이것만 보아도 감각을 붙잡는다는 일은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무리 일류 선수라도 기복과 슬럼프가 있다. 감각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닿는 것이다. 붙잡으려고 힘을 주는 것보다 살며시 닿는다는 감각으로 있을 때 좋은 상태가 더 오래 이어진다.

■ ‘한입 먹는’ 감각으로 힘을 뺀다

앞에서 말했듯 격투기의 문외한인 내게 프로 격투가들이 몸을 쓰는 법을 가르쳐달라며 찾아온다. 내 마작도장에 언론을 불러 공개훈련을 했던 프로레슬러 나카무라 신스케 선수도 그중 한 사람이다.

나카무라 선수는 홍콩의 쿵후 고수에게 기술을 배우러 가고 브라질에서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익히는 등, 프로레슬링 밖의 여러 격투기 요소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몸이 부드럽고 감각이 좋아 새로운 것을 접하면 빠르게 흡수한다.

프로레슬링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이런 훈련을 거듭하면 경기 중 일어나는 수백, 수천 가지 움직임에서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전에 나는 그가 태클할 때 프로레슬링에서 익힌 움직임에 낭비가 많고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태클할 때까지는 빠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전력질주했다. 하지만 전력으로 달리면 몸에서 쿵쾅거리는 움직임이 나와 상대에게 ‘이제 태클이 들어오겠구나’ 하고 들킨다.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면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발바닥을 바닥에서 거의 떼지 않는 스리아시, 즉 미끄러지듯 내딛는 걸음으로 태클을 시작해야 한다.

나는 그를 무술 연구가 고노 요시노리 선생에게 보내 스리아시를 배우게 했다. 그렇게 고친 태클은 전력질주하던 예전 태클과 속도의 차원이 달랐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눈 깜짝할 사이에 품 안으로 들어와 자세를 갖출 틈조차 없는 빠르기였다.

프로레슬러는 기본적으로 싸움에서 근육질의 화려한 스타일을 지니기 쉽다. 그러나 나카무라 선수는 마구 몰아붙이는 공격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너지를 아끼며 유연하게 싸우는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삼는다. 몸을 쓰는 기본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프로레슬러로서는 독특한 지향과 감각이다.

그 공개훈련 때 나는 ‘한입 먹는다’라는 말로 몸을 쓰는 감각을 설명했다. 여기서 한입 먹는다는 것은 ‘아주 조금만’이라는 뉘앙스다.

발차기를 할 때 상대를 걷어차겠다고 생각하며 차는 것과 ‘한입 먹는다’는 미세한 감각을 넣어 차는 것은 충격이 전혀 다르다. 상대를 차겠다는 목적의식이 생기면 몸에 힘이 들어간다. 차기 전에 미세한 예비동작도 생겨 상대에게 들킨다.

하지만 ‘한입 먹는다’는 감각을 안에 품으면 몸에서 쓸데없는 힘이 빠지고, 차올리는 다리는 부드러운 채찍처럼 된다. 차기 전의 예비동작도 없어지므로 빠르고 상대가 막기 어렵다.

이상적인 움직임은 거듭 말했듯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은 부드러운 움직임이다. 나뭇잎이 나무에서 둥실둥실 떨어지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그러나 사람은 좀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못한다. ‘힘을 빼라’고 가르쳐도 실제로 힘을 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힘을 빼야 한다는 생각 자체에 사로잡혀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입 먹듯이’라는 감각을 가지면 왠지 모르게 가볍고 둥실한 움직임이 나온다. 감각에 맞는 말을 궁리하는 일도 부드럽게 움직이는 데 중요하다.

■ 고정관념을 벗으면 몸은 상식을 뛰어넘어 움직인다

뇌에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소비를 줄이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그대로 뇌에 집어넣으면 처리 능력에 한계가 있는 뇌는 터져버릴 것이다. 그래서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시간을 들여 기억의 창고에 정리해 넣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뇌가 새로운 것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칫 고정관념에 얽매이는 것도 이런 절약 원리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의 몸 움직임도 대부분 고정관념 안에 갇혀 있다. 사소한 일상 동작도 그렇고 스포츠 동작도 정해진 형태와 자세라는 고정관념에 의존한다.

걷기만 해도 현대인의 걸음은 문화 속에서 학습된 것이다. 에도 시대 사람들은 내딛는 발과 같은 쪽 손을 앞으로 내미는 ‘난바 걸음’을 했다고 한다.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걸음조차 하나의 고정관념 속에 있는 셈이다.

스포츠에도 야구 타격은 이렇게 스윙해야 하고, 유도에서는 이렇게 공격해야 하며, 장대높이뛰기는 이런 식으로 뛰어야 한다는 정해진 형태와 상식이 있다. 그것들은 많은 사람에게 효율적으로 통하는 최대공약수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한 번 형태가 정해지고 널리 퍼지면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람은 상식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힌다.

그래서 굳어진 형식을 깨는 몸의 사용을 보면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거나 ‘저렇게 하면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라는 반응부터 보인다.

상식에 묶이면 생각과 행동도 굳는다. 나는 그런 것을 모두 내던지고 가능한 한 아무것도 덧씌우지 않은 눈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면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긴 일이 문득 가능해진다.

앞에서 말한, 내 체중의 두 배가 넘는 스모 선수를 밀어 날린 일도 그렇다. 예전에 프로 유도가와 맞잡은 적이 있다. 숙련된 유도가가 옷깃을 잡으면 그 손을 떼어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가볍게 떼어내고 상대를 무너뜨렸다.

내가 유도를 배웠다면 유도의 상식 안에서만 움직였을 것이고, 그런 일은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전문가라면 ‘여기를 이렇게 잡히면 불리하다’고 인식하는 장면에서도 내게는 그런 선입견이 없었기 때문에 프로를 상대로 유리하게 몸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고정관념의 무서움을 강하게 느끼게 한 높이뛰기 선수가 있었다. 바하마 출신인 그는 원래 농구선수였고 뛰어난 도약력을 지녔다.

그 모습을 본 친구의 권유로 높이뛰기를 해보았더니 본인도 놀랄 만큼 높이 뛰었다. 그는 흥미가 생겨 독학으로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고, 불과 1년 반도 되지 않아 세계육상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완전히 독학이었으므로 높이뛰기의 기본도 상식도 없었다. 공중에서 다리를 세 번 휘젓는 자세는 전문가가 보기에는 비효율적이었다. 종목 전용 신발은 딱딱해서 싫다며 농구화를 신고 큰 대회에서 2미터 35센티미터의 기록을 낸 적도 있다.

만화 같은 일을 현실에서 해낸 것은 그에게 높이뛰기에 관한 고정관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딴 뒤에는 뚜렷한 성적을 남기지 못한 듯하다. 아마 메달을 딴 뒤 주변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제대로 배우면 더 대단한 기록을 낼 수 있어.”

그 뒤 전문 코치를 두고 높이뛰기의 상식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발휘하던 본래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 몸의 일부만 단련하면 부상의 원인이 된다

프로 야구선수들을 보면 몸을 자주 다친다. 근육이 파열되고 팔꿈치나 어깨를 다치며, ‘선수 생활은 부상과의 싸움이 계속된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선수도 적지 않다. 이런 고장은 몸의 일부를 집중적으로 혹사하거나 단련하는 데서 생긴다.

웨이트트레이닝을 좋아하여 근육을 크게 만드는 데 열중했던 한 스타 선수가 자주 근육 파열을 일으킨 것이 좋은 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는 오른쪽 팔꿈치를 심하게 다쳐 수술을 받았다. 그 전에도 목과 팔의 뻐근함 때문에 자주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그는 미국에 간 뒤 그곳의 파워 야구에 대응하려고 근력을 키우는 훈련에 열중했다. 그것이 끊임없는 부상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근육이 지나치게 커지면 몸은 굳는다. 몸이 굳으면 균형이 무너지고, 그것이 부상으로 이어진다.

몸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생각해야 한다.

한 부분에만 사로잡혀 이곳저곳을 강화할 것이 아니라, 전체의 균형 안에서 그 부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어딘가 잘못된다.

■ 스모 선수는 왜 손가락을 테이프로 고정하는가

예전에 스포츠신문에서 한 스모 선수가 씨름판 밖으로 밀려 패한 순간의 사진을 보았다. 그는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을 한데 모아 테이프로 감아 고정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손가락을 다친 줄 알았다. 그런데 다른 날 요코즈나 하쿠호도 똑같이 테이핑한 사진을 보고, 부상 때문이 아니라 강한 스모를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스모는 순간적인 충돌이 매우 중요한 경기다. 현대인은 생활습관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벌리는 경향이 있다. 맞부딪치는 순간 손가락이 벌어지면 방향이 흔들리거나 힘이 흩어진다. 그래서 선수들은 이를 막으려고 손가락을 고정하는 것일 것이다. 힘을 내야 할 때 손가락을 벌려서는 안 된다.

손가락을 펴지 않으면 부자유스러워 보이지만, 가볍게 모은 편이 힘을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다. 생활습관으로 손가락을 벌리는 버릇이 생기면 시합 중에도 미세하게 손가락이 벌어질 것이다. 손가락이 벌어지면 앞서 말했듯 몸도 굳는다.

작귀회의 도장생들도 마작패를 집을 때 손가락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젊은 사람일수록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손가락을 벌리느냐 모으느냐, 그 작은 차이만으로도 힘이 들어가는 방식과 몸의 부드러움이 달라진다.

■ ‘연습한 만큼 성과가 나온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현재 활약하는 프로 운동선수들은 모두 보통 사람이 질릴 만큼 긴 시간을 연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습 방식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때때로 착각을 낳는다. ‘이만큼 연습했으니 이만큼 성과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것이다.

조언을 받으러 내게 찾아온 일본 여자 탁구의 에이스 히라노 사야카 선수도 그런 마음이 매우 강한 유형이었다. 그녀는 ‘연습량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러니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훈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만큼 연습했으니 그만큼의 성과를 돌려받고 싶다는 바람은 상당히 일방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히라노 선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하면 스토커와 다를 게 없어. 탁구공에게도 사랑받아야 해.”

연습은 목표를 정해 하는 것이므로 목표에 도달한다는 보상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마음이 지나치면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가고 연습은 오직 괴로운 일이 된다.

목적주의에 빠지면 과정이 소홀해진다. 결과만 내면 된다는 자세로 하는 사람은 곳곳에서 어느 정도 결과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래 이어가지 못한다.

스포츠 연습뿐 아니라 공부도 마찬가지다. 즐거움을 느끼며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성장할까. 답은 뻔하다. 과정을 가볍게 보는 목적주의자는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즐기며 성장할 기회를 스스로 잃는다. 그런 사람은 혹독하게 연습하기만 하면 결과가 저절로 나온다고 믿는다. 그러나 혹독한 연습을 그저 혹독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내가 마작에게 사랑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작으로부터 인생의 중요한 것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대리 승부사로 진검승부를 하던 시절, 사실 나는 마작을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이기는 마작을 치려 하기보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마작을 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여기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이렇게 하면 재미있겠는데’라고 생각하며 노력보다는 여러 궁리를 했다.

‘기술을 갈고닦아 더 잘해야지’, ‘이런 기록을 내야지’, 프로라면 ‘돈을 더 벌어야지’, ‘유명해져야지’처럼 결과만을 향해 마음이 달리는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바란 만큼의 보상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히라노 선수도 나중에 “기술과 형태를 지나치게 추구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것을 성급하게 구한 나머지 당시에는 몸 곳곳이 굳어 미묘하게 균형이 무너져 있었다.

예를 들어 라켓 손잡이가 찌그러질 것처럼 꽉 쥐고 있었다. 나는 평소 마작패를 가볍게 집는 감각을 힌트로 삼아 라켓을 부드럽게 잡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는 마침내 ‘기술이나 형태보다 감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로 수준이 되면 기술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감각은 붙잡을 수 없다. 발견하려고 하거나 찾아내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감각의 세계에는 목적도 결과도 없다.

내가 말한 ‘짝사랑’이나 ‘서로 사랑하는 관계’는 결코 추상적인 비유에 불과한 이야기가 아니다.

■ 위화감을 단서로 자연스러운 감각을 찾는다

“연습에는 아무리 많이 해도 상대에게 통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감각을 탐색하기 시작하면 연습할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불안이 생깁니다.”

히라노 선수는 이런 말을 했다.

‘오늘은 라켓이 무겁게 느껴진다’, ‘오늘은 손가락의 느낌이 어딘가 다르다’는 식으로 감각은 늘 달라진다.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감각을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불안하게 느끼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감각을 배우고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라켓을 잡는 감각은 언제나 똑같다’는 사람보다 낫다. ‘언제나 같은 감각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순히 감각이 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몸이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 상태에서 생기는 감각이다. 감각을 살피려 할 때는 생각을 멈추고 몸을 가능한 한 자연스러운 상태에 두어야 한다.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사는 인간에게 이런 감각을 배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렵다는 사실을 역으로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자연스러운 감각을 바로 찾기는 어렵지만 위화감을 느끼는 부분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위화감을 느낀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위화감이 없는 부분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즉 위화감을 실마리로 삼으면 자연스러운 감각을 더 쉽게 탐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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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잠재력을 끌어내는 몸 정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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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의 형태를 만드는 ‘세로 움직임’과 ‘가로 움직임’

사람의 움직임에는 가로 움직임과 세로 움직임이 있다. 세로로 얼마나 움직이고 가로로 얼마나 움직이는지에 따라 몸의 형태도 달라진다.

현대인이 비만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세로 움직임보다 가로 움직임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걷기는 몸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세로 동작이다. 그러나 잘 걷지 않는 현대인은 실내에서 책상 일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며, 컴퓨터 앞에 앉는 등 가로 움직임만 반복한다.

식물을 비롯한 생명체는 태양을 향해 위로 자라고 뻗는다. 세로 움직임도 적절히 있어야 하는데 가로 움직임만 계속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가로로만 움직이면 몸도 가로로 넓어진다. 즉 살이 찐다.

비만을 줄이려면 일상에 세로 움직임을 가능한 한 많이 넣어야 한다. 뒤에서 소개하는 몸을 세로로 움직이는 체조도 효과가 있다.

나이가 들어 생명력이 쇠하면 위로 향하는 힘도 약해지고 몸은 아래로 내려앉는다. 눈꼬리가 처지고, 턱의 살이 늘어 입꼬리가 내려가며, 가슴과 배가 처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무릎과 허리가 아픈 것도 몸이 아래로 내려앉으면서 하중이 무릎과 허리에 강하게 실리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평소 세로 움직임을 자주 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몸 전체가 아래로 처지는 속도가 느리다.

■ 순환하지 않는 몸은 병든다

사람은 부드럽게 태어나 딱딱해지며 죽어간다.

아기 때는 누구나 부드럽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몸은 유연함을 잃고, 노인이 되면 곳곳이 딱딱하게 굳는다. 몸이 굳으면 사고도 굳는다.

몸은 부드러울수록 좋다. 몸이 부드러우면 혈액과 림프액처럼 체내를 순환하는 여러 가지가 막힘없이 흐른다. 몸이 굳으면 그 흐름이 여기저기에서 막히고 몸에 이상이 생긴다.

정신의 병도 저자의 관점에서는 마음의 순환이 나빠져 생기는 것이다. 한 가지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마음의 흐름이 금세 막힌다.

우울한 상태는 머리가 어떤 것에 사로잡혀 마음의 순환이 나빠지고 정신의 시야가 극단적으로 좁아진 상태라고 그는 설명한다.

자연계는 거대한 순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물, 흙, 공기, 바람, 햇빛, 생물의 연쇄가 모두 순환이라는 흐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사람도 그 일부다. 바깥의 순환과 조화를 이루도록 몸과 마음을 순환시키는 것이 생명체로서 인간의 본래 모습이다.

■ 몸의 이상을 바로잡는다

사람은 평소 몸의 여러 곳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거의 정해진 부분만 사용한다.

등산이나 테니스처럼 평소 잘 하지 않던 운동을 하면 나중에 관절과 근육이 아프다. 이는 단지 근육을 지나치게 써서 젖산 수치가 높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쓰는 부위가 몸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생각보다 훨씬 제한된 곳만 쓰고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용하지 않는 부위는 늘어난다. 쓰지 않는 부위는 당연히 굳고, 굳으면 체내의 흐름이 막힌다. 거기서 몸의 이상이 생긴다. 어깨, 등, 목처럼 자주 뭉치는 곳은 그 부근의 흐름이 정체되어 있다는 뜻이다.

몸의 이상은 그 사람의 약한 곳에 나타난다. 겉으로 증상이 나타난 곳이 반드시 원인이 있는 곳은 아니다. 불편함이 나타나는 부위와 원인이 되는 부위는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두통이나 무릎 통증을 고치려고 아픈 곳만 만져서는 안 된다. 몸의 기가 흐르는 길을 하나의 경락으로 보고 문제 부위에서 떨어진 곳에 침을 놓는 침 치료와 같은 생각이다.

나는 아는 사람이 몸의 이상을 호소하면 놀이하듯 그곳을 좋아지게 해주는 경우가 있다. 흐름이 막힌 듯한 곳에 손을 대거나 몸의 여러 부분을 움직이게 하여 전체 균형을 정돈한다.

한번은 심한 추간판 탈출증을 앓던 출판사 편집자의 몸을 약 10분간 손으로 돌보고 자세를 바로잡아 통증을 없앤 적이 있다. 그는 약과 침, 정체요법 등 여러 방법을 시도했던 터라 몹시 신기해했다. 솔직히 나 자신도 왜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잘 모른다.

또 내가 자주 가는 미용실의 60세쯤 된 원장이 통풍으로 인한 무릎 통증에 오래 시달리고 있었다. 몸을 돌봐주자 본인도 놀랄 만큼 통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무릎 자체가 아니라 허리 부근을 중심으로 5분가량 손을 댔을 뿐이었다.

그는 일본정체협회에 3년간 다니며 기공을 하는 등 몸을 세심하게 관리했다. 하지만 거의 쉬지 않는 고된 업무 탓인지 무릎에 물이 차고 심한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통풍 증상이 악화되었다.

몸에 자신이 있어 ‘언젠가는 낫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2년이 지나자 좋아하던 골프조차 견디기 어려울 만큼 아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몸을 돌본 것은 며칠 뒤 영국으로 디 오픈 골프대회를 보러 가고, 가능하면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골프도 치고 싶어 하던 때였다. 그 뒤 1년 반이 넘었지만 아직 재발 기미는 없다고 한다.

■ 마음의 피로는 머리의 뭉침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말한 미용실 원장은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는 50세부터 약 7년 동안 마라톤 대회에 나가기 위해 일을 마친 뒤 새벽 2시 무렵부터 조깅하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무리한 노력 방식이 몸에 이상을 만들고 통풍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정작 본인은 그렇게 단련하면 몸의 나쁜 곳이 좋아질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지금은 ‘평범한 생활만으로도 필요한 근육과 체력은 붙는다’고 깨닫고 조깅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아스팔트 위에서 달리면 기능이 뛰어난 신발을 신어도 무릎에 상당한 부담이 걸린다. 원래 사람의 몸은 부드러운 흙 위를 걷도록 만들어졌다. 건강 열풍으로 조깅이 유행하지만 나이 들어 무릎 통증으로 고생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그 원장은 손님의 머리를 만지다가 뭉쳐 있다고 느끼면 두피를 마사지하여 부드럽게 푼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커트를 잘해도 머리카락이 생기 있게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머리가 뭉친 사람은 슬프고 괴로운 감정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하려면 먼저 그런 감정을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음의 상태는 몸에 그대로 나타난다. 감각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심신일체의 세계다.

■ 몸을 열면 자세가 좋아진다

자세가 나쁜 사람은 몸이 닫혀 있고, 자세가 좋은 사람은 몸이 열려 있다. 마음이 닫히면 마음의 병이 생기듯 몸도 열려 있어야 한다.

몸을 여는 체조는 아주 간단하다.

1. 양쪽 발뒤꿈치를 붙이고 발끝을 바깥쪽으로 최대한 벌린 상태에서 10초간 선다. 이것을 세 번 반복한다.

2. 양발을 바깥쪽으로 비틀면서 앞뒤로 겹쳐, 한쪽 발등의 안쪽과 다른 쪽 발등의 바깥쪽이 맞닿게 선다. 이 상태를 약 15초 유지하고 세 번 반복한다.

이 동작을 하면 등과 엉덩이가 위로 단단히 올라가면서 자세가 펴진다.

‘자세를 바르게 하라’고 하면 어깨나 등 윗부분만 의식하고 허리를 소홀히 하기 쉽다. 이 동작은 몸의 중심인 허리와 배에서부터 자세를 곧게 만든다.

■ 다이어트 효과가 있는 체조

일본 여성에게 ‘다이어트’라는 말은 일종의 주문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사람의 체형에는 각자의 체질에 맞는 적정 범위가 있을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마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이어트는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소개하는 체조는 앞에서 말한 ‘세로 움직임’과 ‘가로 움직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가로로만 지나치게 움직이는 현대인의 치우친 몸에 세로 움직임을 더한다. 횡격막이 위로 올라가며 배가 조여지고 허벅지가 올라간다. 그 결과로 다이어트 효과도 생긴다.

1. 선 상태에서 두 팔을 지면과 수평이 되도록 좌우로 펼친다. 그 상태에서 어깨를 조금 들어 올리는 동시에 양팔을 약간 뒤로 젖힌다. 몇 초간 유지한 뒤 내린다. 여러 번 반복한다.

2. 다른 방법으로, 편안히 서서 양팔을 지면과 수평으로 펼친다. 그 상태에서 어깨를 위쪽으로 힘껏 2초간 올렸다가 내린다. 어깨를 올릴 때는 자기 몸에 작용하는 중력 자체가 위로 올라간다는 느낌으로 한다. 여러 번 반복한다.

■ 어깨 결림을 풀어주는 간단한 체조

현대인이 몸에서 가장 많이 뭉치는 곳은 어깨일 것이다.

특히 컴퓨터나 휴대전화 화면을 보는 시간이 길어져 눈이 피로한 사람이 많다. 눈의 피로는 어깨로 이어진다. 화면을 보기 위해 앞으로 숙인 자세를 오래 유지하면서 어깨와 등에 불필요한 부담을 주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깨 뭉침을 푸는 체조는 매우 간단하다.

1. 발을 어깨너비보다 조금 넓게 벌리고 서서 몸의 힘을 뺀다.
2. 양팔을 앞쪽 아래로 가볍게 늘어뜨리고 손등끼리 맞댄다.
3. 그 상태에서 양손을 가슴 위까지 들어 올린다. 이때 어깨와 등도 함께 위로 올라간다.
4. 들어 올린 양손을 대각선 위쪽으로 풀어 던지듯 펼친다.

이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한다.

■ 허리 통증을 없애는 뒹굴기 체조

어깨와 등의 결림 다음으로 문제가 생기기 쉬운 곳이 허리다. 특히 나이가 들면 몸의 부담을 가장 많이 받는 허리는 쉽게 손상된다.

나이를 먹으면서 허리를 부드럽게 움직이게 해주는 윤활 작용이 약해진다. 다리와 몸통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중심 역할을 하는 허리에는 젊을 때 아무렇지 않던 작은 비틀림도 큰 부담이 된다. 한번 허리를 다치면 나은 뒤에도 다시 다치기 쉽다. 여기서 소개하는 체조는 허리 통증을 완화하고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1. 반듯하게 눕는다.
2. 양팔을 좌우로 편하게 펼쳐 힘을 뺀다.
3. 양쪽 발바닥을 맞대고 다리를 마름모 모양으로 굽힌다. 개구리 다리와 같은 자세다. 가능하면 다리 전체가 바닥에 닿게 한다.
4. 그 상태로 15~30분 정도 편안히 있는다.

■ 계단을 편하게 오르는 흔들흔들 체조

걸을 때 ‘다리가 무겁다’고 느끼는 날이 있다. 혈액순환이 나빠 다리 끝까지 피가 충분히 흐르지 않거나, 무릎이 굳어 다리를 앞뒤로 충분히 흔들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다. 이럴 때 좋은 것이 다리를 흔들흔들 움직이는 체조다.

1.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서서 무릎을 살짝 굽힌다. 다리를 전철의 팬터그래프처럼 벌린다. 양손은 어깨높이로 들되 힘을 뺀다.
2. 그 상태에서 바닥을 중심으로 다리 전체를 가볍게 흔든다. 3초간 흔들고 2초 멈춘 뒤 다시 3초간 흔든다. 이를 4~5회 반복한다.

이 체조 뒤에 걸으면 전보다 다리가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걸음이 부드럽고 매끄러워지며 계단도 가볍게 오를 수 있다. 저자는 이를 ‘뜬발’이라고 부른다. 몸이 가벼워져 수면 위를 걷는 듯한 감각이다.

■ 몸의 움직임을 순식간에 가볍게 만드는 방법

누운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몸이 무겁고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의식을 먼저 앞으로 날려 보낸 뒤 일어난다.

무슨 뜻인가 하면, 실제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일어난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먼저 그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미지에 끌려가듯 실제 동작이 부드러워진다.

이 방법은 다른 일에도 응용할 수 있다. 무거운 물건을 들 때는 동작에 들어가는 순간 이미 그것을 들어 올린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가파른 비탈길을 계속 걸을 때는 실제 발보다 한 걸음 먼저 이미지 속 발을 앞으로 내민다. 그렇게 하면 무거운 물건이 가볍게 들리고 비탈길을 걷는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일어나야지’, ‘들어야지’, ‘올라가야지’라는 목적의식을 가지면 몸이 굳고 부자연스럽고 서툰 움직임이 된다. 하지만 동작보다 한발 앞서 의식을 보냄으로써 몸이 목적의식에서 풀려나면 흐르듯 매끄럽게 움직일 수 있다.

■ 괴한에게 습격당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에는 움직임을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 늘었다. 밖을 걸을 때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길에서 갑자기 폭행을 당하거나 성폭력의 위험에 놓일 수도 있다. 일이 생겼을 때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어느 정도 익혀두고 싶을 것이다. 저자는 힘이 약한 사람도 순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뒤에서 껴안겼을 때 몸을 좌우로 흔들어 팔을 풀려고 하면 어렵다. 이때는 재빨리 상체를 앞으로 숙이면서 반쯤 쪼그려 앉고, 그 기세로 상대를 등에 실어 앞으로 넘긴다.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한 번의 움직임으로 해야 한다.

상대가 양손을 붙잡았을 때는 손을 떼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잡힌 그대로 자기 체중을 수직으로 떨어뜨린다. 빠르게 앞쪽으로 쪼그려 앉듯 몸을 미끄러뜨리며 양손을 바로 아래로 강하게 내리면, 상대는 뜻밖의 움직임에 손을 놓게 된다.

※ 이 대목은 원문의 번역이다. 실제 위기에서는 가능하면 즉시 거리를 확보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며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우선이다. 신체 대응법은 전문가의 안전한 지도 아래 연습해야 한다.

■ 무거운 물건을 편하게 들어 올리는 법

전문 이사업자는 큰 세탁기를 혼자 들어 운반하기도 한다. 그렇게 무거운 물건은 단순히 힘이 세다고 잘 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반하는 요령이 있다. 몸 전체를 빠짐없이 사용하는 것인데, 전문가는 많은 경험을 통해 그런 몸의 사용을 익힌다.

여러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동안 몸에 걸리는 부담을 줄이는 요령을 무의식적으로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에서도 가구를 옮기고, 큰 택배 상자를 집 안으로 들이며, 간병할 때 사람을 안거나 아이를 들어 올리는 등 무거운 물건과 사람을 들어야 할 일이 많다.

다음은 여러 사람이 무거운 것을 함께 들 때 조금 더 가볍게 느끼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세 사람이 함께 드는 경우]

1. 세 사람이 원을 이루어 서로 마주 보고 선다.
2. 첫 번째 사람이 오른손바닥을 아래로 향해 한 손을 내민다.
3. 두 번째 사람이 그 위에 같은 방식으로 오른손을 겹친다. 손끼리는 붙지 않도록 조금 띄운다.
4. 세 번째 사람도 그 위에 같은 방식으로 오른손을 겹친다.
5. 오른손을 모두 겹친 뒤, 이번에는 남은 왼손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사람의 순서로 같은 방식으로 겹친다.
6. 여섯 손을 모두 겹친 상태를 약 3초 유지한다. 위에서 아래까지 따뜻한 기운이 부드럽게 전해지는 느낌이 들면 잠재력이 깨어난 신호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7. 세 사람이 호흡을 맞추어 물건을 들어 올린다.

이 동작을 하고 나서 무거운 것을 들면 아무 준비 없이 들 때보다 분명히 가볍게 느껴진다고 한다. 서로의 에너지 흐름이 섞여 세 사람이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기 때문이다. 단순히 세 사람의 힘을 더한 것과 다른 일체감이 생겨 더 큰 에너지가 나온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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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진정으로 강한 몸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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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강함을 지닌 몸이란 무엇인가

강함이란 무엇일까. 공포에 휩싸였을 때에도 움츠러들지 않는 심신을 지니는 것 역시 강함의 하나일 것이다.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명치가 단단히 긴장하고 중심이 위로 뜬다. 반대로 배짱이 단단한 사람은 그런 순간에도 명치가 굳지 않고 느슨하게 풀려 있다. 공포 속에서도 명치가 풀린 상태를 유지하려면 명치뿐 아니라 몸 전체가 이완되어 있어야 한다.

풀린 몸은 몸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머리와 정신의 유연함으로도 이어진다.

머리가 유연하면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부드럽다는 것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강한 몸은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 있는 몸이다. 생각하기 전에 몸 전체가 즉시 반응할 수 있는 몸이야말로 강하다.

자연계의 생물을 보면 외적과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속도에 감탄한다. 바다에서 문어를 만나면 문어는 순식간에 바위와 같은 색으로 변한다. 이런 변화 능력이 자연 속 생명체가 지닌 본질적인 부드러움이며 강함이다.

■ 강한 사람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내 마작은 ‘왜 모두 이상하게 움직이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패를 버릴 때 몸이 지나치게 굳거나 반대로 너무 풀어지고, 팔꿈치가 무겁거나 몸 어딘가가 흔들린다. 그 결과 동작이 부산하고 요란해진다.

가령 옆으로 쓰러져 있는 패를 한 손으로 일으킨다고 하자. 보통은 손가락이나 손목을 움직여 패를 세울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동작이다. 하지만 손가락과 손목을 움직이는 티를 내지 않고, 살며시 쓰다듬듯 패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 움직임에는 ‘동작다운 동작’이 없어서 부산함이 없다. 조용하면서도 빠르므로 보는 사람은 무엇이 어떻게 움직여 그렇게 되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예전에 실력 있는 상대가 내 타법을 보고 ‘아지랑이 타법이군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내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내 눈에는 그 상대도 아지랑이처럼 움직여 서로 마주 보는 거울 같았다.

야생동물은 먹이를 잡을 때 발소리를 죽이고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접근한다. 요란하게 움직이면 기척이 금세 전달된다.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 조용하고 빠르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 ‘몸의 은혜’를 살린 몸의 사용이 가능한가

예전에는 여러 무모한 짓을 하다가 자주 다쳤다. 그때 느낀 것은 한 군데라도 상처가 나거나 신경 쓰이는 곳이 있으면 몸의 균형감각이 크게 무너진다는 사실이다.

나는 특히 주먹을 자주 다쳤다. 뼈가 부러지면 그곳을 보호하려는 동작이 생겨 몸 전체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진다. 일상의 사소한 동작도 평소보다 열 배쯤 피곤해진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는 데조차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조그만 부상을 입고 나면 우리 몸이 평소 얼마나 절묘한 균형 위에 서 있는지 깨닫는다. 한 부분이 나빠지면 전체가 무너진다는 것은, 반대로 몸의 한 부분만 훈련으로 강화하려 해도 같은 의미에서 좋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무 데도 다치지 않은 상태라면 자연스러운 균형이 잡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머리로 생각한 뒤 행동하는 습관이 몸에 깊이 박혀 있다. 머리 쪽으로 치우친 몸을 균형 잡힌 몸이라고 할 수 없다.

지식과 머리에 지나치게 가치를 두면 몸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다. 그 결과 현대인은 머리와 머리, 지식과 지식이 힘겨루기하는 방식으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지식에 의지하지 않고 몸의 감각으로 움직이면 머리의 힘은 한순간에 빛을 잃는다.

몸으로 일하는 장인은 몸에 대한 강한 신뢰를 지녔을 것이고, 문명의 영향을 적게 받은 아마존 원주민은 몸 전체가 받은 은혜를 살려 생활한다.

몸의 은혜를 활용해 사는 사람은 머리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몸 쓰는 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상식으로 측정할 수 없는 힘을 보이기도 한다.

몽골 출신 스모 선수가 강한 것도 몸 전체를 쓰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기 때문이다. 전 요코즈나 아사쇼류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일을 도우며 20킬로그램이나 되는 돌을 날랐다고 한다.

20킬로그램짜리 돌을 옮기려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운반하는 방법을 스스로 궁리한다. 손이나 허리 한 부분만 쓰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촘촘히 연결해 힘의 부담을 전신에 잘게 흩뜨리는 움직임이 생긴다. 몽골 출신 선수들은 그런 식으로 몸의 은혜를 최대한 살리는 사용법을 자연스럽게 익혔기 때문에 강하다는 것이다.

나는 무도를 거의 모르지만, 무도에 밝은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합기도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키가 156센티미터에 불과했지만 신들린 듯한 강함을 지녔다고 한다. 키가 190센티미터 가까운 스모 선수를 한 팔로 던지고, 길을 막던 어린 소나무를 성인 일곱 명이 달라붙어도 뽑지 못했는데 혼자 뽑았으며, 약 서른 명에게 갑자기 습격받았을 때도 차례로 모두 던져버렸다는 일화가 많다.

그런 천하무적의 무도가가 평생 단 한 번 이기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도호쿠 지방의 한 어촌에서 어부와 힘을 겨루었는데 아무리 해도 상대를 던질 수 없어 패했다는 것이다.

자연을 상대하며 살아온 어부는 몸의 은혜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강함은 자연 그 자체의 강함이었을지 모른다. 천재 무도가조차 이길 수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 빨리 움직이려고 하면 오히려 느려진다

몸에 생각이 끼어들면 힘이 들어가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사람은 생각하는 일이 습관이자 버릇이 되어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한다.

가령 바다에서 잠수하려 할 때 ‘가라앉아야지’라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이면 잘 가라앉지 않는다. 전신의 힘을 빼고 머리를 아래로 향해 중력에 솔직하게 따르면 자연스럽게 내려간다.

수면에 누워 뜰 때는 몸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 이때 몸의 일부를 의식하여 조금이라도 힘을 넣으면 순간적으로 균형이 무너져 가라앉는다.

힘이 들어간 몸과 들어가지 않은 몸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차이가 있다. 목적의식을 품고 몸을 움직이면 쓸데없는 힘이 여기저기 들어가 움직임이 서툴고 끊긴다.

부드럽고 매끄럽게 움직이려면 ‘이 동작을 해야 한다’는 의식을 멈추면 된다. ‘무엇을 하자’가 아니라 ‘멈춘다’다. 의식을 통제해 무언가를 하려는 움직임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움직이려고 하는 마음을 멈추면 몸에서 힘이 빠지고 움직임이 매끄러워져 속도가 난다. 빠르게 움직이려는 의식으로 재빠르게 몸을 놀려도 진짜 빨라지지는 않는다. 빨리 움직이려는 의식을 멈출 때 예상할 수 없는 속도가 결과로 나타난다.

■ 승기는 붙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며시 닿는 것이다

예전에 장기기사 하부 요시하루 씨와 오랜 시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하부 씨는 내가 보아도 당대 최고의 진짜 승부사다. 승부를 좋아하는 내게 그런 승부사와 만난 일은 더없는 기쁨이었다.

당시 마흔 살이 된 하부 씨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한 전환기에 있는 듯했다. 장기는 머리를 극도로 집중해서 쓰는 경기다. 그래서 기사들은 대체로 하체보다 상체가 무겁다.

몸의 굳음은 나이를 먹으면서 심해진다. 그 굳음은 삶의 방식에도 미묘한 영향을 준다. 마흔이 된 하부 씨도 그런 균형을 조절해야 한다고 느끼는 듯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승부에서 승기를 ‘붙잡으러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로의 장기를 바깥에서 보면 승기가 몇 번밖에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차례 나타날 것이다.

승기에도 크기와 강도가 있다. 가장 강한 승기,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승기가 있다. 그 가운데 어떤 승기에 닿고 어떤 승기를 흘려보낼지 정교한 밀고 당기기가 벌어진다. 그것은 대국하는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세계다.

가장 강한 승기를 잡으면 상대에게도 강한 승기를 줄 수 있다. 그래서 세 번째로 강한 승기를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을 쓰면 상대가 사용할 수 있는 승기는 다섯 번째 정도로 약해진다고 판단하는 식이다.

그러나 하부 씨를 비롯한 최정상 기사들은 사실 승기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승기에 닿는’ 감각을 자연스럽게 지녔다고 생각한다.

나도 마작을 칠 때 승기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승기에 닿는 감각으로 해왔다.

마작은 변화가 심해 승기가 나타나도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그러므로 붙잡지 않고 닿는 것이다.

이것은 머리로 생각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동안에는 승기에 닿는 감각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몸으로 마작을 치기 때문에 가능한 감각이다.

마작뿐 아니라 기회와 찬스라는 것은 붙잡으려는 의지를 작동시키지 않는 편이 좋다. 일과 공부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붙잡으려 하면 몸에 힘이 들어가 결국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어렵다.

■ 귀로 보라

영화 속 자토이치는 앞을 볼 수 없지만 사람의 미세한 기척과 움직임을 마치 눈으로 똑똑히 보는 것처럼 귀로 포착한다. 그의 귀는 눈과 같을 뿐 아니라 눈을 넘어서는 기능을 한다.

실제로 귀는 눈보다 움직이는 존재의 기척을 민감하게 알아챈다. 벽 너머는 볼 수 없지만 그곳에 있는 생물의 기척과 움직임은 느낄 수 있다.

나는 마작을 칠 때 패를 버리는 소리로 상대의 상태를 알았다. ‘욕심을 내어 큰 패를 노리고 있구나’와 같은 미묘한 심리가 소리의 울림으로 느껴졌다.

나는 자기 패만 집중해서 바라보지 않는다. 내 패는 보는 듯 보지 않고, 판 전체를 흐릿하고 넓게 바라보는 감각이다. 귀로 본다는 감각과 비슷하다. 귀를 열면 전신의 감각이 단숨에 깨어나 여러 가지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진짜 승부사들은 모두 눈빛이 날카롭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이 부드럽고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구기 종목의 코치는 ‘눈을 크게 뜨고 공을 똑바로 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눈에 힘을 주면 몸이 굳어 공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한다. 눈이라는 기관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핵심을 잡지 못한다.

■ 새끼손가락이 몸 움직임의 열쇠를 쥐고 있다

새끼손가락은 다섯 손가락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없는 손가락으로 여겨지기 쉽다.

무언가를 들거나 옮길 때도 보조 역할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손가락 옆에 붙은 작고 약한 부속물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새끼손가락의 역할은 매우 크다.

예를 들어 책상 위의 컵을 들어 가능한 한 조용히 내려놓는다고 하자. 새끼손가락을 떼고 나머지 네 손가락만으로 놓을 때와 네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보태어 놓을 때를 비교하면, 후자가 훨씬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마작패를 집을 때도 새끼손가락으로 가볍게 호를 그리듯 움직이면 소리 없이 둥실하게 패를 집을 수 있다. 반대로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만 사용하면 동작이 직선적이고 거칠어진다.

새끼손가락을 의식해서 쓰면 몸의 동작도 부드러워진다. 손가락을 사용하는 직업, 가령 장인이나 다도인, 무용가 중 일류라 불리는 사람은 예외 없이 새끼손가락을 아름답게 사용할 것이다.

오키나와 가라테는 엄지를 잘려 칼을 제대로 쥐지 못하게 된 무사가 오키나와로 건너가 시작했다는 이설이 있다. 잘린 손가락이 새끼손가락이었다면 어땠을까. 새끼손가락을 빼고 주먹을 쥐어보면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야쿠자는 쓸모없는 손가락이라는 의미로 새끼손가락을 자르지만, 처음 그 풍습을 생각한 사람은 어쩌면 더 깊은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끼손가락은 이미지와 달리 결코 작은 존재가 아니다. 손가락 가운데 가장 약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새끼손가락과 반대로 강한 존재감을 가진 엄지는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

엄지는 힘센 손가락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엄지의 힘에 의존한 몸 움직임은 딱딱하고 서툴러진다.

주먹을 쥐고 펀치를 낼 때 엄지에 힘을 꽉 주면 몸에서 팔만 떨어져 나온 듯해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 스모에서도 엄지에 힘을 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가슴 아래의 움직임이 죽는다.

엄지는 힘이 잘 나오는 손가락이라고 해서 그 힘을 그대로 세게 써서는 안 된다. 스포츠든 손가락 작업이든 엄지는 오히려 부드럽게 사용해야 한다.

새끼손가락과 엄지는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 실제 역할이 다르다. 그 역할에 맞추어 사용하는 법도 새롭게 궁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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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가혹함이 진짜 움직임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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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에 놓인 몸에서 진짜 움직임이 나온다

사람의 본성은 평상시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본성이 드러나는 것은 생존이 걸린 위기의 순간이다. 사고를 당하거나 문제에 휘말려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을 때다.

몸의 움직임에도 마음의 본성에 해당하는 ‘진짜 움직임’이 있다. 평소 사람은 문화와 습관 속에서 익힌 인공적인 움직임을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사람의 본성이 나타나듯, 몸의 진짜 움직임 역시 위기에 처했을 때 모습을 드러낸다.

자동차 사고에 휘말렸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가. 웅덩이에 빠졌거나 강에서 놀다가 거센 물살에 휩쓸렸을 때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 자리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는가, 아니면 공황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평소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 왔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특히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여러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가 결정적 순간의 행동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문제를 마주해도 움츠러들지 않고 빠르고 정확하게 대응해 온 사람은 큰 위기에서도 비교적 침착하게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위기에 익숙하지 않으면 실제로 위험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몸은 일상에서 만들어진 움직임 이상의 것을 해내지 못한다. 위기 때 진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은 평소의 문제와 위험에도 나름대로 대응해 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닥친 상황을 순간적으로 침착하게 파악할 수 있다.

위기와 문제가 진짜 움직임을 끌어내는 가장 큰 이유는 평소 잠들어 있는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된 자연의 생물은 본능 자체로 움직인다. 갑자기 위험에 처해도 즉시 대응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당황하여 ‘어떻게 하지?’라고 할 만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최선의 움직임을 보인다.

물론 때로는 대응이 늦을 수도 있지만, 위험을 피하는 행동의 질은 인간과 비교하기 어렵다. 우리는 그들의 진짜 움직임에서 배울 것이 적지 않다.

■ 몸은 궁지에 몰리면 상상하지 못한 힘을 낸다

몸은 혹독한 환경에 놓이면 예상하지 못한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이른바 ‘화재 현장의 괴력’이 대표적인 예다. 몸은 불리한 조건에 놓였을 때 그것을 깨뜨리고 빠져나갈 힘을 발휘한다.

나는 마작 승부에서 상대에게 9의 유리함이 있고 내게는 1밖에 없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야말로 진짜 승부처라고 생각하며 현역 시절을 보냈다. 오십 대 오십의 팽팽한 국면은 특별한 승부처가 아니다. 이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할 때 버텨내면 엄청난 힘이 솟아나고, 단숨에 형세가 역전될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승부처라고 생각한다.

막다른 곳에서 엄청난 힘이 나온다면, 몰리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나는 큰 승부를 앞두면 약 일주일 전부터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먹고 싶은데 목적의식을 가지고 참거나, 자고 싶은데 억지로 견딘 것은 아니다. 정말로 먹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았다.

몸을 눕히더라도 밤새 집의 빨랫줄을 널어두는 바깥 공간에서 옷을 입은 채 뒹굴었다.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밤하늘 아래에서도 그렇게 지냈다. 동물처럼 계속 바깥 공기에 닿아 있고 싶어졌다.

몸을 그런 상태에 두면 ‘이대로는 위험하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여 잠들어 있던 본능이 흔들려 깨어나는 듯했다. 인간으로 살면서 몸에 밴 사고가 벗겨지고 본능 같은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감각이 있었다. 야생동물이 본능을 날카롭게 다듬어 싸움에 나서는 것과 비슷한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며칠 동안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 의식이 극도로 각성되어 작은 소리조차 귀를 찢는 큰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카레라이스를 조금 먹으려고 숟가락이 접시에 닿으면, 평범한 달그락 소리가 커다란 종을 친 듯 울려 귀를 덮쳤다. 그래서 큰 승부 전 며칠 동안은 숟가락이나 포크 같은 금속 식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처럼 비정상적이라고 할 만한 상태로 승부에 들어가면 생각이 전혀 끼어들지 않고 순수한 감각만으로 패를 다루게 된다. 보이지 않아야 할 상대의 패 상황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히에이산 엔랴쿠지에는 ‘천일회봉행’이라는 수행이 있다. 그 수행 가운데 하나인 ‘당입(堂入り)’에서는 수행자가 법당에 들어가 9일 동안 단식, 단수, 불면, 불와, 즉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자지 않고 눕지도 않은 채 지낸다고 한다. 인간의 생리적 한계가 사흘 정도라고 여겨지는 조건에서 행하는 목숨을 건 위험한 수행이다. 수행자는 향의 재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내가 먹지 않고 자지 않았을 때 경험한 감각이 극한에 이른 세계와 비슷하다. 인간의 감각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영역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몸은 이처럼 극도로 혹독한 환경과 조건에 놓이면 오히려 세포가 활성화되고 ‘살아야 한다’는 힘이 끌려 나온다고 저자는 말한다.

해외에는 가난 때문에 먹을 것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로 사는 나라와 지역이 있다. 그런데 그런 곳의 부모에게 자녀가 많은 경우가 있다.

저자는 불리한 환경이 오히려 생명력을 강하게 만든 결과라고 해석한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일본에서 남성의 정자 수가 줄고 불임 여성이 늘어나는 현상도 몸이 지나치게 풍요로운 환경에서 응석받이가 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현대인은 본능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몸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옮긴이 주: 이 절의 장기간 단식·단수·수면 박탈은 저자의 개인적 체험과 견해를 옮긴 것이다. 실제로 따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생식력과 생활환경에 관한 설명 역시 의학적 인과관계로 확정된 내용이 아니다.]

■ 목숨을 건 놀이로 잠든 본능을 자극한다

나는 위기나 문제를 나 자신을 시험할 기회로 받아들이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면이 있다. 특히 맨몸을 위험에 노출하는 것은 내게 궁극적인 놀이의 감각을 주었고,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좋아했다.

돌이켜보면 상당히 위험한 일을 많이 했다.

이노카시라선 전철이 오가는 철교 아래에 매달려 보기도 했고, 빠른 물살이 흐르는 다마가와 상수도 위의 가느다란 수도관을 건너기도 했다.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목숨을 잃을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마작 승부에서도 야쿠자가 ‘이기면 목숨은 없다’며 진검을 들이대는 가운데 싸운 적이 있었고, 목숨을 걸고 여러 수라장을 지나왔다.

그래도 승부의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았던 것은 목숨이 저릿저릿해지는 긴장감을 본능이 원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에게 이런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내 안에는 야생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늘 있었던 것 같다. 몸을 위험에 노출하는 것은 그 본능을 무엇보다 강하게 자극했다.

[옮긴이 주: 이 절은 저자의 과거 경험을 서술한 것으로, 위험한 행동을 권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 행실이 나쁠 때 오히려 몸의 본질이 드러난다

몸의 균형이 좋다고 하면, 많은 사람은 몸의 한가운데에 축이 있고 좌우의 균형이 맞는 야지로베에 인형 같은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축은 반드시 몸의 한가운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축은 본래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항상 360도로 회전하는 것과 같다. 그런 축이 있으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떤 움직임을 해도 몸의 중심이 잡힌다.

여기서 말하는 중심은 고정된 물리적 중심과 다르다. 중심은 움직임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변한다. 계속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몸이 다양성으로 가득하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는 중심이 정해진 한곳에 있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예절이 좋다거나 행실이 바르다는 기준으로 보면 중심이 고정된 사람이 바른 사람이 된다.

그러나 중심이 고정된 상태는 중심에 사로잡힌 상태이기도 하다. 중심에 얽매인 사람은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고 속마음을 내보이지 못한다. 따라서 행실이 바르다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만큼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약간 행실이 나쁜 데에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

‘행실이 좀 나빠도 괜찮다’고 들으면 마음과 몸의 본심이 나오기 쉬워진다. 그래서 오히려 자연스럽고 좋은 변화가 생길 수 있다.

■ 축을 빼앗는 쪽이 이긴다

앞에서 몸의 축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고 말했다. 스포츠 승부는 달리 말하면 서로의 축을 빼앗는 싸움이다.

강한 사람일수록 축이 단단하고 수가 많다. 축이 자유롭게 움직이므로 상대가 쉽게 빼앗지 못한다.

약한 사람은 축이 안정되어 있지 않아 쉽게 빼앗긴다. 자기 축이 단단한 사람은 상대의 축도 빠르게 알아차리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상대의 축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쉽게 찾지 못한다.

축을 빼앗기면 몸의 균형이 크게 무너진다. 균형이 무너지면 움직임이 이상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몸이 멈춰버린다.

이렇게 설명하면 ‘축이 급소라는 뜻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축과 급소는 다르다. 급소는 몸의 약한 부분이며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급소를 공격하는 일은 큰 점수를 얻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것만으로 승부가 단숨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축을 빼앗으면 그 자리에서 승부가 결정된다.

■ 기술만으로는 일류가 될 수 없다

기술은 일류인데도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는 스포츠 선수가 있다. 그런 사람은 잘할 때와 못할 때의 차이가 크고 안정감이 없다. 이대로 흐름을 타면 뛰어난 성적을 낼 것 같다가도 도중에 컨디션을 무너뜨려 주변의 기대를 충분히 채우지 못한다.

‘심기체’라는 말이 있다. 기술이 뛰어난데도 뜻대로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마음가짐에 부족한 점이 있다.

하지만 마음가짐이 제대로 서지 않은 사람은 사실 몸가짐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좋은 몸가짐은 어느 곳에도 치우친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부드럽고, 축이 제대로 통하는 상태다.

반대로 몸가짐이 잡힌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음가짐도 단단해진다.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모두 좋을 때, 즉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기술은 기술을 넘어선 힘을 발휘한다.

프로 선수들의 경쟁은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참가자라면 누구나 높은 기술을 갖고 있다. 결국 그들의 승부는 기술을 넘어선 곳에서 결정된다.

기술을 넘어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의 세계이며, 올바른 몸가짐을 갖추지 않고서는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다.

■ 진짜 존재감은 몸에 나타난다

사람을 두고 ‘저 사람은 진짜다’ 혹은 ‘가짜다’라고 평가할 때가 있다.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그 이유는 감각적인 것이어서 정의하기 어렵다. 다만 가짜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에게 ‘어딘가 속임수 같은 느낌이 든다’는 인상을 준다.

반대로 진짜인 사람은 그 이유를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다.

내가 ‘이 사람은 진짜다’라고 느끼는 기준은 어느 의미에서는 분명하다. 그것은 속일 수 없이 몸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107세에 세상을 떠난 목조각가 히라쿠시 덴추는 백 살 때 앞으로 30년 동안 사용할 재료를 사들였다고 한다. 죽음마저 잊을 만큼 창작에 대한 열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훗날 인간국보가 된 도검 장인 미야이리 유키히라에게 끌과 작은 칼을 주문했는데, 마음에 드는 것이 나오지 않자 원하는 절삭력이 나올 때까지 미야이리를 자기 문하에 들여 단련시켰다고 한다.

나는 히라쿠시 덴추를 전해 들은 이야기로만 알지만, 이처럼 철저한 장인에게는 진짜의 존재감이 배어 있었을 것이다.

전에 주문을 받은 뒤 석 달이나 걸려 만년필 한 자루를 만드는 장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명 작가들도 의뢰할 정도로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주문자의 손 크기와 손가락 모양, 펜을 잡는 법까지 정확히 살펴 정성껏 만들었다.

한 자루에 약 10만 엔이 들었다고 한다. 몇 달에 한 자루만 만들면 생활은 당연히 힘들다. 그래도 그는 자기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만년필의 시대가 아닐지 몰라도 이런 수제 만년필은 기계로 대량 생산하는 제품과 비교하면 진짜다. 그런 물건을 만드는 장인에게는 진짜의 존재감이 있다.

물론 이런 존재감을 지닌 사람이 장인 유형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온천 근처의 산길을 걷다가 소변이 마려워 적당한 곳을 찾고 있었다. 그때 커다란 짐을 등에 진 농부로 보이는 할머니와 스쳐 지나갔다.

그 할머니의 움직임이 놀라울 만큼 훌륭했다.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다 소변을 보려던 것마저 잊었다. 노인인데도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매우 자연스러운 몸놀림이었다.

인사를 건네자 돌아오는 말도 참 좋았다. ‘목마르지 않아? 우리 집이 바로 저기니까 괜찮으면 차를 가져다줄게.’ 삶의 방식은 그대로 움직임에 드러난다.

이러한 진짜의 감각을 지닌 사람은 안타깝게도 요즘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텔레비전을 켜면 인기 있는 미소녀만 모아 놓은 아이돌 그룹을 비롯하여 눈에 들어오는 것 대부분이 가짜다.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가짜의 세계에는 필연적으로 가짜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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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자연스러운 몸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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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은 마음과 몸을 부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문명의 폐해가 여러 모습으로 드러나는 현대에는 ‘자연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산다’는 말에는 자연이 있는 곳에서 생활한다는 정도의 의미부터 마음과 몸을 자연체로 두고 산다는 의미까지 폭넓은 뉘앙스가 담겨 있다.

그 어느 의미에서든 사람이 진정으로 자연스럽게 살 수 있을까.

도심을 떠나 녹지가 많은 교외에 살기만 하면 자연 속에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자연은 인간에게 길들여진, 인간에게 편리한 자연일 뿐이다. 본래의 자연은 인간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을 만큼 혹독하다. 그러므로 자연과 함께 산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렇다면 마음과 몸을 자연체로 두고 사는 것은 어떨까.

자연체로 산다는 것은 마음과 몸 어디에도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다. 의지만 있으면 가능할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늘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떨어져 나오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연계의 생물에게는 부자연스러운 긴장이 없다. 만약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에도 불필요한 힘이 전혀 없을 것이다.

자연에서 멀어진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생각한다. 예측하고 계산하고 사색하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살면서 몸을 아무 힘 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문명적이고 영리하게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인공적인 환경을 만들어 왔다. 인류의 역사는 부자연스러운 생활환경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계속 쌓아 올린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부자연스러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몸짓 역시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 몸을 부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칭찬받는다

인간의 심신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움으로 덮여 있다.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조금뿐이다.

사람의 몸은 기계 같은 인공물이 아니라 자연의 재료로 이루어졌으니 원리상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론할 수 있다. 인간에게도 본능이 있으니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언어를 얻는 대신 본능의 일부가 망가진 생물이다. 본능이 일그러진 데다 문명 속 습관이 일상의 동작 하나하나에 스며들었다. 그래서 사소한 몸 사용과 움직임조차 자연스럽지 않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몸 사용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내가 대리 승부사로 활동할 때 큰 승부가 끝나고 나면 옷 주머니에 작은 돌이나 나뭇가지 조각이 여러 개 들어 있는 일이 자주 있었다. 승부가 끝난 뒤에야 ‘이렇게 많이 주웠구나’ 하고 깨달았다.

승부를 앞둔 나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조금이라도 자연과 접촉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자연물에 닿음으로써 본능에 맡긴 마작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을 것이다.

몸을 부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것은 계속 무리한 부하를 몸에 거는 일이다. 그런 무리를 수년 동안 이어가면 몸 곳곳이 고장 나고 컨디션이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

현대인의 몸 사용은 네 명 정원의 자동차에 열 명, 스무 명을 태우고 달리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백 명쯤 태우고 달린다. 말도 안 되는 무리인데도 세상은 오히려 ‘저 사람은 에너지가 넘쳐. 대단하다’며 칭찬한다.

현대인이 과거보다 오래 사는 것은 생활환경의 위생이 크게 좋아지고 의학이 발전한 영향이 크다.

나는 오래 사는 것 자체에 특별한 가치를 두지 않는다. 다만 현대인의 몸 사용이 조금 더 자연스럽다면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도 시대 사람이 현대 의학과 위생적인 환경을 누렸다면 상당히 장수했을지도 모른다.

자연의 생물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게 몸을 사용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네 명 정원인 차에 열 명이나 스무 명을 태우듯 몸을 쓰지 않는다. 사자가 신발을 신고 얼룩말을 쫓거나, 원숭이가 컴퓨터 앞에서 하루 여섯 시간씩 일하지도 않는다.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 하늘을 나는 새, 초원을 달리는 동물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조차 인간을 기준으로 한 표현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아름답다거나 볼품없다는 평가를 넘어선다. 본능에 100퍼센트 충실하기 때문이다.

수천, 수만 마리가 무리를 이루어 어지럽게 헤엄치는 물고기는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서로의 거리가 정확히 잰 것처럼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본능이며,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다.

그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고 낭비가 없는 이유는 인간처럼 이것저것 생각하거나 문명적 습관을 몸에 익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는 부자연스러운 요소가 섞이지 않는다. 그것은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본능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다.

■ 인간은 문명의 도구로 자연의 변화에 대응하고, 동물은 몸으로 대응한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은 변화에 대응하며 사는 것이다.

추울 때 털이 늘고 더울 때 털이 줄듯 동물의 몸에는 자연의 미묘한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는 감지 장치와 구조가 갖추어져 있다.

동물은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몸을 조절하고 변화시킬 뿐 아니라, 몸의 허용 범위를 넘어서는 변화가 오면 자신이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찾는 능력도 지녔다.

추위를 피해 대륙을 넘나드는 새나 산란을 위해 수천 킬로미터의 바다를 이동하는 물고기가 오직 자기 힘만으로 먼 거리를 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기류와 해류를 이용하여 멀리 날고 헤엄친다.

자연의 동물은 어떤 상황에서도 몸으로 자연의 변화에 대응한다.

반면 인간은 문명의 도구를 사용하여 자연의 변화에 대응해 왔다. 도구를 다듬고 발전시키면 생명을 위협하는 자연의 변화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온 것이다.

그러는 동안 가장 중요한 몸은 뒤에 남겨졌다. 방치된 몸은 자연에 대응하는 힘을 필연적으로 잃게 되었다.

■ 인간의 몸은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움직이지 못한다

지진과 쓰나미는 인간에게 엄청난 사건이지만 대자연에겐 재채기나 방귀 같은 현상일 뿐이다.

자연의 동물은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간다. 그래서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대자연의 재채기와 방귀를 미리 감지하거나, 휘말리지 않도록 제때 움직일 수 있다.

반면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변화에 맞추려 하지 않고, 자연을 문명의 형식에 맞게 바꾸는 일을 계속해 왔다.

그래서 자연의 변화가 예상 범위를 넘어 일어나면 거기에 맞춰 즉시 움직이지 못한다. 인간은 자연을 ‘예상 범위 안’에 넣으려 하지만 자연은 애초에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다. 지진과 쓰나미 같은 큰 변화를 정면으로 맞는 것도 자연과 인간 중심적으로 관계 맺어 온 결과다.

자연의 큰 변화를 몸속 흐름에 짜 넣고 살아가는 생물은 변화의 폭에 맞추어 몸을 준비하고 움직일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복종시키려 해도 자연은 얌전히 따를 만큼 만만하지 않다. 몸을 자연에 감응시키며 살지 못하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끊임없이 간극이 생긴다.

■ 몸의 버릇이 말해주는 것

버릇은 누구에게나 있다. 버릇은 자연에서 멀어진 문명적 생활환경 속에서 살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부자연스러운 환경과 방식으로 사는 사람일수록 버릇이 많다. 자연과 가까운 사람은 비교적 버릇이 적다.

아마존 깊숙한 곳에서 문명과 단절되어 사는 소수 부족과 도쿄 한복판의 사람을 비교하면 몸에 나타나는 버릇의 수가 크게 다를 것이다.

말하면서 머리를 긁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며 턱에 손을 대는 사람, 상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사람,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흔드는 사람, 팔짱을 끼고 상대를 마주하는 사람, 언제나 몸을 앞으로 기울여 바쁘게 걷는 사람 등이 있다.

아마존 오지의 부족 가운데 이런 버릇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생물이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과 같은 이유다.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눈에 띄는 뚜렷한 버릇을 보이기도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신경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머리카락을 만지거나 턱을 쓰다듬고, 윗입술에 손을 대는 빈도가 높다. 입을 오므리고 웃거나 자주 혀를 차고, 상대가 신경 쓰이는 행동을 반복하기도 한다.

인간이 만든 문명이라는 부자연스러운 환경에는 마음의 균형을 흔드는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크고 작은 버릇이 되어 말과 행동에 나타난다.

그런 버릇을 없앨 수 있을까.

몸에 밴 버릇은 의식의 깊은 곳에 새겨진 것이다. 생각의 버릇, 감정의 버릇, 성격의 버릇이 몸의 표면으로 솟아난다. 몸의 버릇은 마음의 버릇이므로 없애기 어렵다.

버릇을 없애려면 성격과 사고방식까지 바꾸어야 한다. 한 번 몸에 밴 버릇을 지우는 일은 쉽지 않다.

삶의 환경이 자연에서 멀어지고 인공적이 될수록 버릇은 늘어난다. 버릇은 개성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개성에는 인공적인 문명생활의 압력이 어딘가에 작용하고 있다. 그런 환경에 사는 한 인간은 버릇과 계속 함께 살아가야 한다.

■ 다리 떨기 같은 몸의 흔들림은 왜 일어나는가

사람의 버릇 가운데 흔한 것이 다리 떨기다. 본인은 무의식중에 하지만 주변 사람에게는 매우 부자연스럽고 위화감을 주는 움직임이다.

다리 떨기는 눈에 잘 띄지만 다른 버릇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어깨를 문지르거나 머리를 기울이고, 손가락 마디를 꺾거나 팔을 부산하게 움직이는 등 몸의 여러 부분을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버릇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있다.

왜 이런 무의식적인 움직임과 흔들림이 생기는가. 이유는 하나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마음속에 ‘곤란하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느끼는 일이 많을수록 그런 움직임이 나타나기 쉽다.

인간관계가 곤란하고, 일이 잘못되고, 돈 문제가 생기는 등 일상에서는 ‘이건 좋지 않다’고 느끼는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그 마음이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다리 떨기를 비롯한 부자연스러운 버릇을 줄이려면 좋지 않다고 느끼는 사건을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는 맛있는 것도 있고 맛없는 것도 있다. ‘침착하지 못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은 맛있는 것만 얻으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더 많다. 그렇게 생각하면 좋지 않은 상황을 만나도 허둥대거나 초조해할 이유가 없다.

그런 태도를 유지하면 몸의 불필요한 움직임도 분명 줄어들 것이다.

■ 버릇은 초심으로 돌아가면 사라진다

신경 쓰이는 버릇이 있다면 그것을 완전히 지울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 버릇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다.

다만 버릇이 단 한 번이라도 사라질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버릇이 생기기 전 어린 시절의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갔을 때, 진정한 의미의 초심으로 돌아갔을 때다.

그 시절에는 능력도 지식도 거의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아기에게는 버릇다운 버릇도 없다.

나는 의식 속에서 인공적인 것을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던 상태로 돌아가는 연습을 자주 한다. 그래도 실감이 나지 않을 때는 어린 손자에게 나 자신을 겹쳐 보기도 한다.

솔직한 사람은 버릇이 적다.

여기서 솔직하다는 것은 꾸밈없는 ‘본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허세도 장식도 없는 자기 기본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사람이 계속 본바탕의 상태로 살 수 있다면 버릇은 생기지 않는다.

문명사회에서 여러 가지를 배워 몸에 익힌 어른이 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솔직함이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 기분에 솔직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몸에 솔직해진다는 뜻이다.

■ 몸이 지우개가 되어 좋은 움직임을 지워버린다

패를 버리는 동작은 마작의 기본 중 기본이면서도 매우 깊다. 한 번 패를 내려놓는 동작에 그 사람의 역량이 응축되고 모든 것이 드러난다.

마작 프로 가운데도 이 기본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작귀회에서 십수 년을 수련한 사람조차 올바르게 패를 놓기 어렵다. 오랫동안 마작을 해 온 나도 아직 이 기본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작귀회에는 패를 1초 안에 버린다는 규칙이 있다. 짧은 1초 안에 판단하고 바로 패를 내려놓으려면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패를 버릴 때는 나뭇잎이 떨어지듯 스윽 내려놓으면 된다. 그런데 팔을 크게 휘두르거나 팔꿈치로 호를 그리듯 놓는 등 자연스럽지 않은 움직임을 하기 쉽다.

도장 수련생에게 한 시간쯤 패를 놓는 연습을 시키면 ‘그래, 바로 그거야’라고 할 만한 움직임이 나타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뿐이다. 다음 패를 놓을 때는 원래 몸에 밴 버릇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여러 버릇이 스며든 몸은 강력한 지우개처럼 작동한다. 그래서 한 번 나온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몸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

■ ‘침착하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인가

아이란 원래 가만히 있지 못한다. 부모는 ‘조용히 있어’라고 타이르지만, 아이는 이쪽저쪽 돌아다니다가 하던 일을 갑자기 그만두고 다른 일을 시작한다. 타이른다고 그 태도가 쉽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애초에 ‘침착하지 못함’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아이도 부모와 교사에게 ‘집중해라’는 말을 계속 듣고 한 가지에 집중하는 데 익숙해지면서 점차 얌전하고 침착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 가만히 머물러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은 몸의 본능에서 보면 부자연스러운 행위다.

인간은 동물이다. 동물은 움직이기 때문에 동물이다. 일본어의 ‘일하다(働く)’라는 글자도 ‘사람이 움직인다’는 요소를 품고 있다. 계속 움직이는 것이 곧 살아 있다는 뜻이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산다면 당연한 일이다. 살아 있는 몸을 가진 한 인간의 몸속에는 언제나 어딘가로 움직이려는 본능적 의지가 있다.

그렇게 보면 지나치게 얌전한 아이는 이상하며, 지나치게 침착한 어른도 꽤 부자연스럽다. 침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몸 깊은 곳의 ‘움직이고 싶다’는 본능의 충동에도 조금 더 귀를 기울여도 좋다.

■ 나약했기 때문에 인간은 두 발로 섰다

우주에 오래 머문 우주비행사는 지구로 돌아왔을 때 무중력 상태에서 근육이 약해져 제대로 걷지 못한다고 한다. 걸으면 무거운 머리가 크게 흔들리고 그 힘에 끌려 몸이 기울거나 쓰러지기도 한다.

인간은 포유류 가운데 유일하게 이렇게 무거운 머리를 맨 위에 올리고 두 발로 지면에 서 있다.

무게중심이 높고 균형 잡기 어려운 자세로 서는 것은 생물로서 매우 부자연스럽다. 어떤 위기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섰던 것일까. 우연히 일어나 보니 네 발로 걷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일까. 약했기 때문에 선 것일까.

아마 뇌가 발달하면서 도구 사용을 익혔고, 그것으로 자연계에서 존재가 약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도구를 쓰려면 일어나 두 손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그런 까닭으로 인간이 두 발로 걷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생물로서의 나약함을 뿌리에 품고 있다.

머리가 좋아진 것도 육체적 약함 때문일 수 있다. 운동을 못하거나 몸이 약한 아이가 공부를 통해 그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처럼, 인간 존재의 뿌리에도 그러한 약함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몸은 이러한 나약함의 관점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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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및 판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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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사쿠라이 쇼이치(桜井章一)
작귀회 주재

도쿄 출생. 대학 시절 마작을 접한 뒤 깊이 빠졌다. 쇼와 30년대 후반, 비공식 프로 승부 세계에서 승부사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20년 동안 대리 승부사로 압도적인 강함을 보이며 ‘작귀(雀鬼)’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기간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무패 전설을 남겼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그를 모델로 한 소설, 극화, 영화 등이 만들어지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현재는 마작을 통해 인간력을 단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귀회를 이끌며 전국에서 모인 젊은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 베스트셀러가 된 《사람을 꿰뚫어 보는 기술》, 《지지 않는 기술》, 《‘키우지 않기’ 때문에 잘된다》 등이 있다.

■ 전자책 안내

이 작품은 2012년 5월 고단샤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을 전자책으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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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 사항

제목: 몸을 정돈하다 - 운을 부르는 몸 사용법
저자: 사쿠라이 쇼이치
발행처: 주식회사 고단샤
초판 단행본 발행: 2012년 5월
전자책 발행: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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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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