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을 부르는 말』
사쿠라이 쇼이치
가도카와 문고
[머리말]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어렵다고 한다.
올라갈 때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한 걸음 한 걸음 발판을 다지며 오른다. 하지만 내려갈 때는 긴장이 조금 풀리는 데다 체중의 부담까지 더해져 발밑이 불안정해진다. 그래서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사고가 더 많이 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등산에 빗댄다면, 그야말로뺴 내리막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령화 사회의 도래, 인구 감소, 저성장 경제, 국가의 막대한 부채, 연금제도의 붕괴…. 일본 사회를 둘러싼 상황은 어디를 둘러봐도 ‘내리막’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뿐이다.
거리를 걸어도 목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상승세’의 사람보다 목표를 잃은 ‘하락세’의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아 보인다.
“일이 너무 힘듭니다. 게다가 급여까지 줄어서 앞날이 정말 불안해요.”
요즘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젊은이도 많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등산에서는 오르는 일만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가. 내려가는 일도 올라가는 일과 마찬가지로 산을 즐기는 과정이다. 내리막이라고 해서 나약해지거나 기분이 가라앉을 이유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대의 분위기가 내리막길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비관하거나 풀이 죽을 필요는 본래 없다.
오르막이 있으면 자연히 내리막도 있다. 계단도 마찬가지다. 오르고 내려가는 데 ‘플러스’나 ‘마이너스’ 같은 특별한 의미는 없다.
내리막이라고 해서 의식적으로 몸을 굳힐 필요는 없다.
등산이든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든, 올라갈 때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주로 발밑을 본다. 하지만 내려갈 때도 똑같이 몸을 숙인 채 발밑만 바라보면 순식간에 균형을 잃는다.
내려갈 때는 체중을 약간 뒤로 두고 가슴을 세운 채, 발밑에서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봐야 균형 있게 내려갈 수 있다.
그런데 내리막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몸을 웅크리고 발밑만 보려 한다. 반대로 경기가 좋고 사회에 기세가 있을 때에는 가슴을 펴고 올라가려 한다.
하지만 살아가는 자세로는 오르막일 때야말로 몸을 낮추고, 내리막일 때야말로 가슴을 펴는 편이 좋다. 가슴을 펴면 주변의 풍경도 더 잘 보인다.
내리막에는 내리막만의 맛이 있다.
내리막에는 내리막만의 즐거움이 있다.
내려갈 때는 그저 마음을 가볍게 하고 내려가면 된다.
이 책에 담긴 말들이 그런 내리막 시대를 살아가는 데 조그마한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
사쿠라이 쇼이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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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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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장 : 놓아버리기
힘이 잔뜩 들어간 ‘노력’을 의심하라
• 이미 ‘충분히 갖추어져 있음’을 깨달아라
•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 벽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 ‘다음번’은 없다
• 땅에 발을 붙이지 마라
• 사람은 단세포여도 좋다
• 생각이 섞이면 감각이 흐려진다
• 무의식에 몸을 맡겨라
• 의식은 무의식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한다
• 이 세상에 정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정해진 것을 추구하는 것이 지식이며, 정해지지 않은 것을 붙잡는 것이 지혜다
• 무언가를 얻으면 그 이면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잃는다
• 두 번째로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다
• 기본적인 한 걸음조차 끝까지 익히기는 어렵다
•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낳는 것’
•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 괴로움의 밑바닥에는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
• ‘잘 포기하는 사람’은 인생의 가능성을 연다
• 각오할 가치가 있는 각오와 각오할 가치가 없는 각오가 있다
• 등뼈로 말하라
• ‘사랑’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남쪽 장: 돌려보내기
• ‘대략’이라는 감각이야말로 대상을 분명하게 붙잡는다
• 선보다 악이 인간의 본질을 더 잘 가르쳐 준다
• 하루에 낮의 얼굴과 밤의 얼굴이 있듯, 사람에게도 밝은 얼굴과 어두운 얼굴이 있다
• 불안할 때는 불안의 품속으로 뛰어들어라
• 인생에는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 나쁜 것도 일단 받아들인 뒤 흘려보내라
• ‘잘 잊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다
• 완전히 자립한 인간은 없다
•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솔직함’이라 한다
• 단순한 매듭일수록 강하다
• 결정하지 않는다
• 텅 빈 사람이 되고 싶다
• 사람은 모두 가짜다
• 두 마리가 아니라 백 마리 토끼를 쫓아라
• 일 자체가 ‘휴식’이 된다
• 인사치레를 듣고 좋아하는 돼지가 되지 마라
• 가벼운 거짓말이 습관이 되면 큰 거짓말도 하게 된다
• 자신을 마이너의 감각으로 바라보라
• 지조가 없는 편이 낫다
• 자신에게 ‘따옴표’를 붙이면 볼품없다
• 돌아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라
서쪽 장: 빼내기
• 운은 사람이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운이 사람을 고른다
• ‘우연한 운’에 의존하면 ‘필연적인 운’을 부르는 힘을 잃는다
•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변화하는 흐름을 찾아라
• 누구의 등에도 기회가 붙어 있다
• ‘때’를 붙잡는 사람이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 마음을 ‘맑은 상태’로 만들면 운이 들어온다
• 평생 주어지는 운의 양은 정해져 있지 않다
• 돌다리를 두드리는 사람은 결국 다리를 건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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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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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호 감각’, ‘전체 감각’, ‘때의 감각’, 운을 붙잡는 세 요소는 서로 이어져 있다
• 불리할 때에는 흐름이 바뀌는 순간을 기다려라
• ‘절체절명’이라는 상황은 없다
• 역경을 원 안에 넣고 빙 돌려라
• 부진에서 벗어나는 급소는 부진 바깥에 있다
•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을 운은 싫어한다
• 올바른 선택을 거듭하라
• 이면이 없는 인간은 없다
• 목표는 옆에 두어야 거리감이 맞는다
• 360도 회전하는 축을 가져라
• 긴장은 머리 뒤로 보내라
• 긍지는 언제든 털어낼 수 있는 먼지다
• 일에서 재미를 찾으려 하면 괴로워진다. 상호 감각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똑똑해지지 마라
북쪽 장: 쏘기
• 패배의 90퍼센트는 자멸이다
•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는 것’에 진짜 강함이 있다
• 진짜 ‘승부처’는 압도적으로 불리할 때 찾아온다
• ‘악수’로 이기려는 유혹을 끊어라
• 승리를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 강하다
• 정보가 너무 많으면 족쇄가 된다
• 속도에 강해지는 비결이 있다
• 실전도 평소의 범위 안에 넣어라
• 계산하지 않는 쪽이 이긴다
• 공격하는 마음으로 지켜라
•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이 더 깊다
• 혹독함은 부적이다
• 부드러움은 큰 가능성을 품는다
• 형식에 집착하면 쉽게 무너진다
• ‘거리 감각’이 좋으면 일도 인간관계도 잘 풀린다
• 지식이 많으면 자유를 잃는다
• 부진이야말로 나의 실력이다
• 신념을 끝까지 관철하지 마라
• 따뜻한 마음은 만능이다
• 선과 악은 사람 안에서 마블링 고기처럼 뒤섞여 있다
• 큰 것이 정말 좋은 것인가
• 자연에는 낭비가 없다
• 인생에 ‘끝’은 없다
맺음말
동쪽 장 : 놓아버리기
힘이 잔뜩 들어간 ‘노력’을 의심하라
“노력하면 보답받는다. 그러니 열심히 능력을 갈고닦자.”
이런 주장을 내세운 자기계발서가 요즘 크게 유행한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반드시 보답받는지는 알 수 없다. 노력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보답받지 못할 것이고, 그 사람에게 맞지 않는 능력 개발이라면 해 봐야 괴로울 뿐이다.
나는 이렇게 힘이 잔뜩 들어간 노력이 어딘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힘을 주어 노력하는 사람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쓸데없는 일을 했다”고 느낀다. 쓸데없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 노력이 거짓이었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일이 순조롭게 풀릴 때에는 대개 힘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고, 어딘가 즐거움이 있다. 운동도 즐기면서 하면 실력이 빨리 는다. 그런 때에는 자신이 ‘노력하고 있다’는 의식이 희박하다. 취미에 몰두할 때도 사람은 그것을 노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마작을 하며 노력해 왔다는 감각은 조금도 없다. 내게 있었던 것은 궁리뿐이었다. 궁리가 있으면 어떤 일이든 즐겁게 할 수 있다. 결국 노력은 궁리로 바꾸면 된다. 궁리가 있으면 좋은 결과도 낳을 것이고 오래 계속할 수도 있다.
괜히 잔뜩 긴장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힘이 들어간 노력은 어디에선가 반드시 무너진다.
“지금 내게 힘이 너무 들어가 있구나”라고 느낀 순간에는 자기 자신을 의심해 보는 편이 좋다.
이미 ‘충분히 갖추어져 있음’을 깨달아라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 부족하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 돈이 부족하다는 사람, 사랑이 부족하다는 사람, 일이 부족하다는 사람, 건강이 부족하다는 사람.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 남이 보기에는 “이미 충분하잖아”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정작 본인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기며 이것저것을 계속 더한다.
무언가를 더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으면 부족하다는 감정이 강해져 불행을 느끼게 된다. 이런 덧셈식 삶은 틀림없이 아까운 삶이다.
‘부족한 부분’에만 매달리다 보니 이미 ‘충분히 있는 부분’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열 가운데 여섯은 갖추었고 넷은 부족하다고 하자. 그때 사람은 이미 있는 여섯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 여섯의 가치를 깨닫고 온전히 살릴 수 있다면, 부족한 넷을 넘어 지금의 상태로도 모든 것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좌선 모임에 참가한 한 사람이 단식 뒤에 나온 죽이 평생 먹어 본 음식 가운데 가장 깊은 맛이었다고 말했다. 평소 식생활에 비하면 죽과 단무지뿐인 너무도 소박한 식사였지만, 그것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했던 것이다.
‘부족하다’고 단정하고 있는 상태도 사실은 이미 충분한 상태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삶의 방식은 크게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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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되겠지”라고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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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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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곤경에 처했을 때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스스로를 달래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만 해서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할게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언젠가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사람은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 바람이 절실하다면 남에게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어떤 행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언젠가 아프리카에 가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
“언젠가 제과를 배워 과자 장인이 되고 싶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결국 죽을 때까지 아프리카에 가지도 않고, 과자 만드는 법을 배우지도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든 되겠지”와 “언젠가는 할게요”는 모두 기약 없는 미래에 자기 마음을 툭 던져 놓는 것에 불과하다. 스스로 무엇인가 하려는 의지가 없으니 현실에서도 아무것도 열리지 않는다. 절반은 남의 힘에 기대더라도 나머지 절반에는 스스로 해 보려는 마음이 있어야 현실이 정말로 ‘어떻게든 되는’ 상태로 움직인다.
다만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조금 구원받을 때도 있다. 그것으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현실의 세상에는 결국 어떻게 되지 않아도 그 상태로 계속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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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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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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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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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수많은 벽이 있다. 도저히 넘을 수 없어 보이는 거대한 벽부터 조금만 힘을 내면 넘어설 수 있는 작은 벽까지 다양하다.
나는 눈앞에 벽이라는 어려움이 나타나면 오히려 “재미있군. 한번 해 보자”라는 마음이 드는 성격이다.
실제로 벽을 느꼈을 때 “어쩌지…”라며 겁먹는 것보다 “내 가능성을 시험할 좋은 기회다”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북돋우는 쪽이 벽을 넘기 쉽다.
애초에 벽은 어떻게 생기는가. 자세히 보면 대부분의 벽은 외부에서 부당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회사를 망하게 해 수십억 엔의 빚을 지고, 친구와 지인뿐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은 경영자가 있다고 하자. 본인에게는 분명 처참한 수라장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 수라장은 자신의 경영이 잘못되어 불러온 것이다. 스스로 벽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한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벽이라면 자신이 다시 없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눈앞에 우뚝 솟아 보이던 벽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 같다. 일부러 애써 넘어설 필요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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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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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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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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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어를 좋아해서 자연 속 상어를 만나러 남쪽 바다에 자주 간다. 최근에도 팔라우에 가서 수많은 상어를 만났고, 매부리바다거북을 맨손으로 붙잡았다가 물론 나중에 놓아주는 등 무척 유쾌한 경험을 많이 했다.
그 이야기를 한 편집자에게 했더니 “다음에 가실 때에는 저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아니, ‘다음’이라는 것은 없어”라고 답했다.
편집자는 ‘다음은 없다’라는 표현이 마음 깊이 와닿았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의미가 ‘다음은 없다’라는 말로 단번에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을 살아라’라는 말은 여러 사람이 하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들어도 지금이라는 순간은 생각하는 찰나부터 사라져 버리니 잘 와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은 없다’라는 말을 들으니 반대로 ‘그래, 지금이구나’라는 사실이 절실하게 울려 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다음’이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내가 아무리 다시 팔라우에 가고 싶어도 어떤 사정으로 두 번 다시 가지 못할 수도 있다. 미래에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떤 일이든 우선 ‘다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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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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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발을 붙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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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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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불경기 탓도 있어 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하지 않은 채 목적 없이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젊은이가 적지 않다. 그런 젊은이에게 부모는 “언제까지 그렇게 떠돌 거니? 이제 정신 차리고 땅에 발을 붙인 채 살아라!”라고 꾸짖는다.
그런 부모의 눈으로 보면 나 역시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한 삶을 살았다. 대학을 나온 뒤 마작 대리 승부사를 했고, 뜻이 있는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8년간 무급으로 일했으며, 마작을 통해 인간의 힘을 기르는 모임인 ‘작귀회’를 만들었다. 그때그때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정처 없이 살아왔다.
하지만 땅에 발을 붙이는 것보다 감각적으로 둥실둥실 떠 있는 편이 내 성질에 맞고, 생명과 본능에 더 가까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초봄에 하코네로 갔을 때의 일이다. 산골짜기에 있는 여관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니 셀 수 없이 많은 벚꽃잎이 산에서 바람을 타고 새처럼 날아왔다. 그중에는 무려 1킬로미터나 날아가는 꽃잎도 있었다. 어디에 내려앉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역시 바람을 따라 사는 것은 좋구나”라고 생각했다.
땅에 발을 단단히 붙인 상태는 의외로 쉽게 부러진다. 어느 순간 뚝 하고 꺾여 버릴 수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본래 바람에 맡기는 편이 좋다. ‘마음은 바람에 맡긴다.’ 그런 기분을 어딘가에 품고 있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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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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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단세포여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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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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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단세포야”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외 없이 욕이다. 하지만 누군가 “사쿠라이 회장님은 단세포 같네요”라고 말한다면 내게는 칭찬에 가깝다.
세상은 복잡한 것일수록 고상하다고 여긴다. 인류가 단순한 문명에서 복잡한 문명으로 진화했다고 본다면, 복잡한 것이 더 고상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머리를 짜낸다’는 말이 있다. 머리를 비틀면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이 생긴다. 그렇게 나온 아이디어를 비즈니스와 학문은 다시 몇 번이고 비틀고 꼬아 간다.
거기서 생겨난 무수한 아이디어는 장사가 되고 교양이 되고 과학기술이 되어, 세상을 한없이 복잡한 것으로 만든다.
복잡해지는 일은 결국 돈을 낳으므로 누구도 그것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여러 폐해도 나타난다.
경제의 복잡화는 불안정성을 키워 공황을 일으키기 쉽게 만들고, 과학기술의 복잡화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복잡하게 해 수많은 분쟁과 마음의 병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폐해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복잡한 지식에 부여된 가치를 의심해야 한다. 그러려면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자신이 단세포인 채로 남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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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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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섞이면 감각이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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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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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작이 장기나 바둑과 다른 점은 머리를 이성적으로 쓰는 부분보다 감 같은 감각을 사용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지식과 정보에 매우 큰 가치가 놓여 있다. 그래서 직감 같은 감각적인 것은 쉽게 무시된다.
그러나 일상에서 여러 일을 판단할 때에는 사실 감각적인 판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이성적으로 분석해 판단하는 것보다 직감으로 툭 결정하는 쪽이 핵심을 맞힐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다만 조건이 있다. 그 감각이 맑아야 한다. 현대인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머리와 이성에 의존해 행동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감각을 쓰려고 해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 생각이 섞여 감각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사고의 잠금장치를 어떻게 풀 것인가. 그것이 감각을 살릴 수 있느냐를 가르는 지점이다.
흔히 ‘감각을 붙잡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애초에 감각은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기는 붙잡을 수 없지만 닿는 느낌은 받을 수 있다. 감각도 마찬가지다. 닿는 듯한 느낌은 얻을 수 있어도 붙잡을 수는 없다. 붙잡을 수 없으므로 완전히 똑같은 감각을 다시 재현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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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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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 몸을 맡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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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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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을 조절할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무의식은 의식이 닿지 않는 영역에 있으므로 원리적으로 의식으로 건드리거나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완전히 조절하지는 못해도 자신이 어떤 무의식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그것을 통해 무의식에 영향을 주는 일은 가능하다. 무의식은 동작이나 표정에 신호처럼 나타난다. 그 신호를 알아차리면 그것을 실마리 삼아 어떤 무의식이 겉으로 나오려 하는지 알 수 있다.
마작 승부 중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패를 다뤘다.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공기를 들이마시듯 자연스러운 감각으로 마작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 호흡이 불규칙해져 괴로워진다. 이것만 봐도 의식적인 행위란 무의식중에 어딘가에서 자기 몸을 옥죄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마작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무의식적으로 할 때 가장 잘된다. 특히 운동이 그렇다. 날아오는 공이나 상대의 공격에 자유자재로 반응하려면 무의식에 몸을 맡겨야 한다.
‘생명’의 자연스러운 흐름은 무의식에 있다. 자기라는 생명을 능숙하게 흘려보내는 요령은 결국 자신을 무의식에 얼마나 맡길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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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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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무의식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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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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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무언가를 집요하게 요구하지만, 무의식은 최소한으로 요구한다. 의식은 많은 것을 바라므로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에는 쓸데없는 힘이 잔뜩 들어간다. 힘이 들어가면 좋은 결과가 나오기 어렵다.
일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은 일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하지 않는다. 의식한다는 행위에 어딘가 불순하고 얄미운 기색이 섞인다는 느낌이 들어 거부감이 있다.
책도 기본적으로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쓴다. 취재를 받을 때 질문 목록을 미리 받기도 하지만, 거기에 대비해 준비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대답하려 하면 미묘하게 꾸며 낸 듯한 거짓 기운이 섞일 것 같기 때문이다. 질문자가 그 자리에서 던지는 공에 순간적으로 느낀 것을 솔직하게 되돌려 주고 싶다.
그렇게 완성된 원고에 다소 부족한 점이 보여도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원고의 이 부분이 부족하다”며 핏대를 세워 출판사를 탓한다면 자신의 잘못은 선반 위에 올려 둔 채 남만 나무라는 것 같아 볼품없다.
물론 모든 일을 무의식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다만 의식이 무의식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한다는 사실은 알아 두는 편이 좋다. 모든 것을 강한 의식으로 해내려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무의식은 ‘무(無)’다. 무 속에야말로 진짜 모습이 있으니 그것을 서투르게 헤집지 않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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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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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정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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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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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이 회장님의 말에는 진리를 확신하는 듯한 울림이 있네요.”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치도 않은 이야기다. 애초에 나는 삶이나 이 세계에 대해 확신이라는 것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난 뒤부터 확실한 것을 끊임없이 찾는다. 이 세계는 정해지지 않은 것투성이이고, 정해지지 않은 것은 불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확신을 얻지 못하면 정해지지 않은 세계 한복판에 곧장 내던져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사람은 그 불안을 메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확신을 손에 넣는다.
확신을 주는 가장 큰 것은 부모와 교사가 행하는 교육이다. 공식·정의·법칙 같은 개념을 가진 학문은 확신을 얻는 가장 큰 버팀목이다.
요즘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후가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하지만 ‘기후란 이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고 멋대로 정해 놓았기 때문에 그 범위에서 벗어나면 큰 소동이 벌어지는 것이다. 기후는 본래 전혀 정해져 있지 않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이른바 리먼 쇼크가 있었지만 경제 역시 전혀 정해져 있지 않다. 근거 없이 정해져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막상 일이 벌어지면 공황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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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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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것을 추구하는 것이 지식이며,
정해지지 않은 것을 붙잡는 것이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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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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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식이 없는 남자다. 취재 중 기자가 어려운 말을 던지면 뜻을 몰라 당황하기도 하고, 심리학이나 종교 전문가와 대담하다가 상대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선생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식은 앞에서 말했듯 확신을 얻기에 알맞은 도구다. 그래서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도 한다.
내가 지식에 그다지 매달리지 않는 데에는 그런 초라한 확신을 갖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다. 그보다 지혜만 있다면 지식은 최소한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지식은 정해진 것을 추구하지만 지혜는 반대로 정해지지 않은 것을 붙잡는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쉼 없이 변한다. 그 안에는 한 조각도 고정된 것이 없다. 정해지지 않은 채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빠르고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지혜다.
지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작귀회 도장에도 편차치가 높은 대학을 나와 지식을 잔뜩 쌓은 젊은이가 많다. 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식만으로 그들에게 말한다면 아무것도 울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지식이 아닌 무언가로 무엇을 전하려 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알아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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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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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얻으면 그 이면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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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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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기다, 불경기다”라며 비관하고 기운을 잃은 사람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고 느낄 기회가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얻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생물이다. 돈, 물건, 지위, 명예, 인맥, 행복…. 온갖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얻는 것이 없다면 삶이 앞으로 나아갈 의미도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얻는 일의 이면에는 반드시 잃는 것이 있다. 얻는 데 마음을 빼앗기면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알아차려도 그다지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 중독자는 가정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 열심히 일해 많은 돈을 벌고 가족에게 좋은 생활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그 반대편에서 가족과의 좋은 관계를 잃는다. 아이가 성장한 뒤 부모와 자식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하고서야 처음 깨닫기도 한다.
반대로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해도 그 이면에서는 다른 것을 얻고 있다. 직업을 잃은 덕분에 자신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보일 수 있다. 그것을 새로운 일로 삼아 다시 출발할 수도 있다.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마지막에는 생명 자체를 잃는다. 사물이 변하고 무언가를 잃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릴 때부터 사람은 ‘얻는 연습’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잃는 일에 둔감해진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잃는 연습’도 해 두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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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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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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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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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느 잡지 기자가 그렇게 물었다.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나야”라고 답했다. 그 기자는 같은 질문을 여러 취재 상대에게 던져 왔던 모양이다.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처음입니다.”
기자는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저 솔직하게 떠오른 대로 답했을 뿐이다. 웃기려고 한 말도 아니다. 보통이라면 “나라는 존재”나 “내 생명” 같은 답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세상에 여럿 있다고 나는 느낀다. 손주의 생명일 수도 있고, 위기에 처한 이름 모를 누군가의 생명일 수도 있다. 혹은 내 생명을 지탱해 주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첫 번째 자리에는 나 이외의 무언가가 반드시 온다는 감각이 있다. 내가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하다.
반대로 자신을 두 번째 자리에 두면 엄청난 압박이나 실패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감각이 그대로 내 삶의 방식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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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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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한 걸음조차 끝까지 익히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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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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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작은 패를 버리며 진행하는 게임이다. 패를 버리는 일은 마작의 가장 기본적인 동작이다.
하지만 그 기본 동작을 제대로 한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지금껏 거의 만나지 못했다. 수년 동안 수련해 온 작귀회 도장생 가운데에도 드물다.
보통은 “패 하나 버리는 일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 어떻게 버리든 마작의 강약과는 관계없잖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패를 제대로 버린다는 것은 그 한 번의 타패 안에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다. 패 하나를 버릴 때마다 하나의 깨달음이 있다. 그만큼 패를 버리는 동작은 깊다.
패를 버리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곧바로 알 수 있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마음에 흐림이 없네. 큰일 하나를 끝냈나 보군.”
나는 매일 도장생들이 패를 버리는 모습을 보며 이런 것을 느낀다. 패 하나를 버리는 극히 단순한 동작에 그 사람의 마작 전부가 나타난다. 나 역시 “아, 지금 제대로 버리지 못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패를 버린다는 기본 동작은 그만큼 어렵다.
이것은 마작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서 기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이를 지닌다. 기본적인 한 걸음조차 끝까지 익히는 일은 어떤 분야에서도 지극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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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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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것’이 아니라 ‘낳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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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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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에는 ‘무사(無事)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있다. 불필요한 의장이나 장식이 없는 소박한 그릇이 가장 아름답고 깊은 맛을 지닌다는 뜻이다. 동시에 계산적으로 꾸민 장식과 억지로 부린 궁리는 촌스럽다는 생각도 담겨 있다.
그 안에는 흙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난 그릇의 질감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이 있다. 흙에 인공적인 것을 많이 섞으면 맛과 깊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마작도 마찬가지다. ‘좋은 패’를 만들려고 애쓰면 그 마작은 반드시 무너진다. 아름다운 마작은 억지로 만들지 않는 ‘무사’가 있을 때 비로소 성립한다. 그런 마작은 두말할 것 없이 강하다.
나는 어떤 일에서든 ‘만든다’는 감각이 희박하다. 무언가를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좋은 것으로 만들어야지”,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야지”라는 마음이 생겨 힘이 들어간다. 그런 마음이 지나치게 강하면 결과적으로 좋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경제가 강한 힘을 쥔 오늘날 사회에서는 효율적으로 수익을 올리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만들어 낸 것은 쉽게 망가지고, 그런 것들에 둘러싸인 생활은 풍요로워 보여도 실은 메마르다.
그래서 인간다운 깊은 호흡을 되찾으려면 그 안에 ‘낳는다’는 감각을 끼워 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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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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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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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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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시대이기 때문일까. 사람이라는 존재도 불투명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불안은 상대의 속마음을 알고 싶다는 욕구를 더욱 부추긴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는 즐거움과 모르는 즐거움이 모두 있다. 몰라도 되는 일도 많다.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속마음을 캐는 일은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알아 버린 탓에 불행해지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사람의 마음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먼지가 묻어 있다. 굳이 마음을 파헤쳐 분석할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 느끼면 된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꾸밈없이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면 충분하다.
불투명한 시대는 사람의 거리 감각을 빼앗는다. 먼 곳이 보이지 않으면 자연히 가까운 곳에만 시선이 몰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욕망도 그 현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현대에는 이런 정신적인 근시를 가진 사람이 가득하다. 먼 옛날의 인간은 지나치게 먼 곳도, 눈앞의 가까운 곳도 아닌 그 중간쯤에 시선을 맞추었을 것이다. 중간을 보고 있으면 가까운 곳과 먼 곳이 함께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온다.
정신적 근시에는 교정이 필요하다. 그 교정 안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지금 시대의 큰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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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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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의 밑바닥에는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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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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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이 전혀 없는 인생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이라도 살아가는 동안 괴롭다고 느끼는 순간을 수없이 만난다.
괴로움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괴로움을 낳는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기대하는 마음’이다. 여기서 괴로움을 가능한 한 만들지 않는 하나의 법칙을 끌어낼 수 있다.
사람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워하고 고민한다. 따라서 괴로움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기대하지 않거나, 현실성이 없는 높은 목표와 꿈을 품지 않는 편이 낫다.
물론 인간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꿈이 되는 목표를 품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기대는 흔히 기대한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꿈꾸던 목표 역시 바라던 수준까지 도달하는 경우보다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런 의미에서 기대란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숙명적인 병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물이다. 그 앞에 기대하는 것이 있고 꿈과 목표가 있기 때문에 움직인다.
그러므로 작은 기대나 꿈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다만 주의할 점은 기대를 지나치게 부풀리지 않는 것이다. 기대의 감정이 잠시 싹텄다면 그 뒤에는 얼른 잊어버리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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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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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포기하는 사람’은 인생의 가능성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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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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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말도 상식적인 시선을 조금 비틀어 보면 오히려 가능성 있는 뜻이 떠오를 때가 있다. ‘포기한다’는 말도 그 가운데 하나다. 포기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사실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나는 도장생들에게 “승부에서도 인생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마라”라고 자주 말한다. 하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서는 끈질기게 매달리는 일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에게 전혀 인기가 없는 청년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인생까지 비관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의 노력만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인기를 얻으려고 애쓸 것인가. 아니면 그런 일은 깨끗하게 포기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거기에 힘을 쏟을 것인가.
어느 쪽이 인생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지는 분명하다. 후자다. 좋아하는 일을 파고들면 큰 기쁨을 얻을 것이고, 때로는 그것이 직업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원망을 자기 안에서 부풀려 성격까지 거칠게 만들 수 있다. 반면 깨끗하게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은 나아갈 방향이 선명해지고 결과적으로 더 행복하게 살아간다.
‘포기하는 데 능숙한 사람’은 살아가는 큰 힘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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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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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할 가치가 있는 각오와,
각오할 가치가 없는 각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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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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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를 굳힌다.’
이 말에는 결연하고 산뜻한 울림이 있다. 그러나 모든 각오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부정적인 빛깔을 띤 각오도 많다.
내게 살아가기 위한 각오란 작지만 계속 이어져 온 어떤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삶의 태도다.
각오를 굳힌다고 하면 어느 한 지점에서 큰 결단을 내리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런 각오에는 불순한 계산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회사를 골라 취직할 때, 큰 거래에 계약할 때, 결혼을 결정할 때 우리는 어떤 각오를 하는가.
“출세해서 높은 급여를 받겠다.”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겠다.”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겠다.”
이런 각오에는 무언가를 얻으려는 계산이 들어 있지 않은가.
이처럼 얻기 위한 각오는 그것을 했다고 특별히 칭찬받을 행동도 아니다.
진정으로 산뜻한 각오란 잃는 일을 받아들인 각오라고 생각한다. 잃는 것의 궁극적인 모습은 생명을 잃는 것이다. 따라서 정말로 ‘각오를 굳힌다’는 말은 목숨이 걸린 순간에나 쓸 수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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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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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뼈로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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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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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등에 자신이 지닌 것이 드러난다. ‘기개’라는 말은 거의 사어가 되어 가지만 남자에게는 역시 뼈가 중요하다.
실제 모습이 어디까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개가 넘치는 멋진 남자로 시라스 지로가 한동안 인기를 얻은 것도 지금 주변을 둘러보면 뼈대 있는 사람이 좀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뼈대가 있는 남자는 남성의 곧은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여성은 뼈라기보다 느긋하게 순환하는 흐름을 느끼게 하는 데 여성다움이 있다.
뼈대는 등뼈에 가장 잘 나타난다. 그래서 남자는 등이다. 앞보다 뒤가 더 많은 말을 한다. 앞에서는 이런저런 말을 해도 등을 보면 실제 마음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를 취재한 사람이 “그럼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돌아갈 때, 뒷모습이 차갑다면 취재하는 동안 입에 발린 말을 했고 마음을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인다.
검은 속마음은 자신에게 보이기 때문에 속일 수 있지만, 등은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조금도 속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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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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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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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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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를 주제로 한 드라마와 영화가 유행한다고 한다. 사랑으로 상처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늘었기 때문일까.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는 것을 드라마와 영화가 대신 채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애란 무엇인가. 애초에 사랑 자체가 순수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굳이 ‘순수하다’는 말을 덧붙인다는 것은 보통의 사랑에는 계산이 들어 있고 더럽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 눈에는 순애 자체도 불순하다. 사랑이란 소유욕을 아름다운 말로 바꾸어 부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질투와 배신감, 미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사랑하는 상대를 향해 생기는 것도 사랑이 소유욕이라는 증거다. 상대를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 같을 때 그런 감정이 솟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는 강한 집착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굳이 ‘사랑’이라는 말을 꺼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때때로 ‘알을 따뜻하게 품는다’는 의미의 ‘온란(温卵)’이라는 말을 쓴다. 아이의 마음은 사랑한다며 붙잡을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해 주면 된다. 그러면 언젠가 스스로 껍질을 깨고 홀로 선다.
“사랑이 전부다”라고 외치며 ‘사랑’이라는 관념 자체를 사랑할 필요는 없다.
남쪽 장 : 돌려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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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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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이라는 감각이야말로 대상을 분명하게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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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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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이라는 어림짐작의 감각과 ‘절대’라는 흔들리지 않는 감각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좋은 감각일까.
‘대략’이나 ‘왠지 모르게’ 같은 말은 경계가 흐릿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감각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마작을 할 때 상대의 패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상대가 패를 버리는 방식과 전체 흐름을 보고 있으면 어렴풋이 상대 패의 상태를 알 수 있다. 물론 눈으로 직접 본다는 뜻이 아니라 아마 이런 상태일 것이라고 느끼는 감각이다.
이 ‘안다’는 감각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대’라는 감각으로 달려들면 ‘안다’는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략’이나 ‘왠지 모르게’라는 감각을 지녔을 때 비로소 의식이 “아, 알겠다”는 자리에 툭 내려앉는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절대 감각’은 오히려 핵심을 빗나가기 쉬워 발밑을 잡힐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의 감각은 매우 위험하다.
눈을 크게 뜨고 한 점을 응시하지 말고, 전체를 멍하니 바라보며 ‘대략적인 곳’을 붙잡는다. 그러면 중심에 있는 중요한 것이 문득 떠오른다. 그것이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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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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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보다 악이 인간의 본질을 더 잘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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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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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선인과 악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사람의 마음에도 선이 있고 동시에 악이 있다. 극악무도한 악인에게조차 선한 마음이 단 1밀리미터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반대로 세상에서 인격자로 존경받는 사람도 어딘가에는 악한 마음을 품고 있다.
‘필요악’이라는 말이 있다. 악은 완전히 제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안고 억제해야 한다. 선보다 악이 인간의 본질을 더 잘 보여 준다. 자기 안의 악을 자각할 때 그 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학교의 도덕 수업에서도 선만 가르치기보다 악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마음속에서 악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으므로 선과 악을 적절히 섞어 악은 둘이나 셋, 선은 여덟이나 일곱 정도의 비율로 유지하면 된다.
선과 악뿐 아니라 마음의 배합은 중요하다. 여러 요소를 알맞은 비율로 섞으면 삶의 방식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과거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은 과거가 여덟이고 현재와 미래가 하나씩일 뿐이다. 균형이 좋은 것은 과거와 미래를 하나씩, 현재를 여덟로 두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언제나 좋은 의미의 ‘적당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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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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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낮의 얼굴과 밤의 얼굴이 있듯,
사람에게도 밝은 얼굴과 어두운 얼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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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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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딘가 가라앉아 있는 데 대한 반동일까. 텔레비전을 켜면 개그맨들이 요란하게 떠드는 장면을 자주 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조건 밝게 행동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풍조가 세상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밝은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아이도 주변에서 “밝고 씩씩하게 자라라”라는 말을 자주 들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밝아야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하루 안에 반드시 낮과 밤이 있듯 어느 사람에게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있다.
밝지 않으면 안 되고, 이른바 ‘근본적으로 어두운 사람’은 절대 좋지 않다는 분위기에 떠밀려 사람들 앞에서 끊임없이 밝게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억지로 밝은 척하면 마음은 뒤틀린다.
내 지인 중에도 사람들 앞에서는 지나치게 밝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지독하게 어두울 것이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뿌리는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부분이다. 뿌리에 어둠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에게나 본래 어두운 면이 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반드시 밝은 면도 있고, 밝음과 어둠의 정도는 낮과 밤이 번갈아 오고 사계절이 바뀌듯 끊임없이 변한다.
낮은 움직이고 밤은 쉬는 시간이다. 마음이 활발할 때가 밝음이고, 지쳐 쉬고 싶을 때가 어둠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그런 조절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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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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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할 때는 불안의 품속으로 뛰어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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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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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이 회장님도 불안할 때가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 물론 있다. 애초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태어나는 아기는 자궁 밖으로 나오는 공포와 불안에 떨며 세차게 운다. 인간은 출발점부터 불안을 품고 태어나는 셈이고, 그 불안은 인간 존재의 뿌리를 이룬다.
인류가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대에는 언제 동물에게 습격당할지 몰라 끊임없이 불안한 상태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안이 있었기 때문에 동물의 공격을 경계하고 몸을 지킬 수 있었다. 불안이 조금도 없었다면 인간은 짐승이나 적에게 금세 공격당해 오래전에 멸종했을 것이다.
불안은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감정이다. 따라서 마음에서 불안을 뿌리째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한 불안을 느끼는 것을 무조건 마음의 병으로 취급하는 풍조는 오히려 불안에 더 단단히 얽매이는 상황을 만든다.
불안은 한 번 사라져도 살아 있는 한 얼마든지 다시 생긴다. 도망가면 불안은 더욱 커지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풀어 오른다.
불안은 작을 때 재빨리 다뤄야 한다. 절대로 도망치지 말고 오히려 불안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마음으로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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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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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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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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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편리한 가치관의 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자는 특정 조건과 환경에서는 편리하게 기능해도 다른 조건과 환경에서는 몹시 불편한 것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상태가 좋을 때의 자신을 기준으로 삼으면, 상태가 나빠졌을 때 필요 이상으로 당황해 리듬을 잃는다. 사람들이 경기가 나쁘다고 아우성치는 것도 고도경제성장이 정점에 이른 1980년대 후반의 거품경제 시기를 기준으로 현재를 보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다. 좋은 일에 느끼는 기쁨과 나쁜 일에 느끼는 분노를 비교하면 후자의 감정 에너지가 훨씬 크지 않은가.
그것은 인생의 자가 ‘좋은 일’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생은 좋아야 한다고 어딘가에서 믿고 있으므로 좋은 일이 생겨도 당연하게 여기고, 조금만 나쁜 일이 생기면 큰 소동을 벌인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악을 품은 존재이므로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도 이치에 맞다. ‘인생에는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일에 대한 감동과 감사는 오히려 새로워지고, 나쁜 일이 생겨도 지나치게 충격받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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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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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것도 일단 받아들인 뒤 흘려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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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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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들은 무시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을 ‘스루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스루’는 그와 전혀 다르다.
내가 겪는 모든 것을 일단 내 안으로 통과시킨 뒤 뒤쪽으로 흘려보내는 감각이다. 나를 향해 오는 누군가의 행동과 말, 또는 내게 닥치는 운명이 부정적인 것이라도 우선 한 번은 내 안으로 지나가게 한다.
반대로 좋은 것은 내 안에 붙잡아 두고 싶어지지만, 그것도 영원히 가지고 있지는 않는다. 필요 이상으로 붙들면 고정관념을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동물이 먹이를 일단 몸 안으로 받아들인 뒤 필요한 것은 흡수하고 나머지는 밖으로 내보내듯, 나 역시 ‘스루’를 통해 그런 일을 한다.
머리로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실제로 정말 나쁜지는 알 수 없다. 싫은 것을 감정적으로 거부하기만 하면 왜 싫은지, 왜 안 되는지 그 진실을 끝내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선 받아들여 보자”는 마음으로 내 안을 지나가게 한다. 그렇게 흘려보내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실제 크기 그대로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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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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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잊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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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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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는 것은 좋지 않은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기억하는 일이 하나의 재능이라면 잊는 일도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절반씩 있다고 할 때 모든 것을 기억하고 아무것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살아가는 일이 상당한 고통이 될 것이다.
최근 ‘트라우마’라는 말이 널리 쓰이는 것은 좋은 일보다 나쁜 일만 기억하는, 잊는 데 서툰 사람이 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자기애가 강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받은 일을 지나치게 크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한 가해자가 되었을 수 있는데도, 자신이 당했다는 피해의식만 강하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평소 어떤 일이든 “대단한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슨 일이 생겨도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인간관계는 원래 ‘설마 했던 일’투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녀 관계는 특히 그렇다. 무엇이든 “설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
잘 잊으려면 또 하나, 변화를 즐겨야 한다. 여러 장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즐긴다는 것은 기억을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으로 흘려보내는 일이다.
잘 잊는 사람이 곧 잘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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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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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자립한 인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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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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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꽤 나이를 먹었지만 자립한 인간은 아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당당하게 거리를 걷는 커리어 우먼도 완전히 자립하지 않았고, 깨달음을 얻은 듯한 승려도 조금도 자립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기대는 것은 자립의 반대편에 있는 의존하는 마음을 지녔다는 뜻이다.
커리어 우먼은 일과 출세에 기대고 직장의 상사와 부하에게도 기대고 있을 것이다. 승려는 종파와 경전에 기대고 사찰의 운영에도 기대고 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부모에게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인간에게는 무언가에 기대려는 마음이 어릴 때부터 새겨져 있다. 기대는 대상은 나이를 먹으며 계속 달라지지만 그 어디에서도 완벽한 자립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자립을 소리 높여 말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그러나 자립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뒤틀린 개인주의나 사회적 고립이 생기기 쉽다.
자립을 너무 강하게 의식하지 않는 편이 좋다. 인간은 완전히 자립할 수 없으며 부모와 친구, 일과 돈, 취미에 기대며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 위에서 어떻게 균형 있게 기대며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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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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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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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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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폐만 안 끼치면 뭘 해도 괜찮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젊은이가 있다.
“남에게 폐 끼치면 안 돼.”
부모도 아이에게 자주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사람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누군가에게 폐를 끼친다.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관계를 맺는 일은 끊임없이 폐를 주고받는 것과 같다.
아이에게 “남에게 폐 끼치지 마”라고 말하는 부모조차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 그 사실을 자각한 뒤에야 그런 말을 해야 한다.
살아 있는 한 폐를 끼칠 수밖에 없으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능한 한 크게 만들지 않는 일이다. 폐를 크게 끼쳤다면 “미안해”라는 말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절대로 폐를 끼치면 안 된다”라며 지나치게 신경질적이 되지 않는 편이 좋다. 신경질적이 되면 다른 사람이 끼치는 폐를 용서하지 못한다. 마침내 용서할 수 없는 일만 가득해져 살아가기 어려워진다.
사는 것은 폐를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조금 폐를 끼쳐도 크게 마음 쓰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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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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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솔직함’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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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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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귀회에서 만든 셔츠에는 ‘솔직함과 용기’라는 말이 인쇄되어 있다. 솔직함이나 용기라는 말을 새삼 꺼내는 것이 조금 쑥스럽기도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사람은 좋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
매우 단순한 울림을 지녔지만 사실 이 말은 살아가며 중요한 수많은 것을 품을 만큼 크다.
솔직하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이 곧다는 뜻만은 아니다. 꾸미지 않은 본모습이 되는 것이다. 허세도 장식도 없는 자신의 기본으로 돌아가고, 지금까지 쌓아 온 것을 잊고 근원으로 돌아간다. 겹겹이 붙은 역사를 벗겨 내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며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뜻까지 담고 있다.
일이 복잡해져 마음이 흐트러졌다면 곧바로 기본으로, 근원으로 돌아가면 된다. 꾸밈없는 자신으로 돌아가면 남에게 비겁한 짓을 하지 않고, 위화감을 느꼈을 때도 재빨리 알아차려 피할 수 있다.
용기가 있으면 불안에 떨지 않고 어려움에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지키겠다는 마음은 마지막에 쉽게 부서지지만, 용기가 있으면 어떤 때에도 공격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 용기가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버릴 수도 있다.
솔직함과 용기. 단순한 말이지만 훌륭하게 실천하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그래도 이 두 가지가 이끄는 삶이라면 결코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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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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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매듭일수록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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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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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는 시대와 함께 더 복잡한 쪽으로 움직일 운명에 있다. 인구가 늘고 사회가 커지며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엄청난 양의 물건과 돈과 정보가 지구를 오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가지가 복잡해지면서 사람이 안는 문제도 갈수록 커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사물과 일은 가능한 한 단순하게 만드는 궁리가 필요하다.
현대인은 복잡함이 높은 지성과 문명의 증거이며 따라서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일이 복잡하다고 처리 방식까지 복잡하게 만들면 그 일에 관련된 다른 사람의 업무도 복잡해져 마침내 손댈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면 여러 문제가 필연적으로 생긴다. 가정이 복잡하면 마음도 복잡해져 상처를 입는다. 사고가 복잡해지면 현실에서 떠나 핵심을 빗나가는 삶을 살게 된다.
복잡하게 얽힌 것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자신의 손으로 풀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한 ‘매듭 감각’을 지녀야 한다.
단순한 상태는 이치에 맞는 상태다. 그래서 낭비가 없고 아름다우며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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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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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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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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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하는 남자’라고 하면 곧 일을 잘하는 남자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결정한다’는 말에는 멋진 울림이 있다.
무언가를 단번에 결정하거나 일이 명확히 정해지면 상쾌함이 있다. 결정하지 않으면 일도 인생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척척 결정하고 빠르게 진행한다.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뒤처진다.
‘결정한다’에는 이런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으므로 반대편의 ‘결정하지 않는다’, ‘결정되지 않는다’는 당연히 부정적인 말로 쓰인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분명히 결정할 수 있는 것보다 결정할 수 없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옳고 그름, 흑과 백으로 단순하게 잘라 말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적다.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생명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해도 무엇이 정답인지 누구도 결정할 수 없다.
나 역시 인생의 여러 일을 ‘결정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는 느낌이 강하다. 마작과의 관계도 “나는 이 길로 가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다. 어쩌다 관계가 생겼고, 거기서 자연스럽게 여러 흐름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결정하지 않는다’, ‘결정할 수 없다’는 상태에도 그 나름의 여러 가능성이 숨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풍부하고 재미있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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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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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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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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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정말 속이 텅 비었어….”
‘텅 비었다’는 표현은 대체로 부정적인 뜻으로만 쓰인다.
그런데 무엇이 비어 있다는 뜻일까.
지식인가, 신념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지식이 없어도 신념이 굳건하면 텅 비었다는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신념은 허술해도 지식이 많은 사람에게 역시 텅 비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구분은 다소 모호하지만 세상은 지식도 신념도 없는 듯한 사람을 ‘텅 빈 사람’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는 텅 빈 사람이 되고 싶다. 결코 빈틈없이 가득 찬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지식이 넘칠 만큼 많고 신념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단단한 사람은 텅 빈 사람의 반대편에 있다. 하지만 온갖 것을 안에 집어넣어 빈틈없이 꽉 차면 답답하고 괴로워질 것이다. 본인은 충실하다고 느낄지 몰라도 어딘가 힘겨울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가득 채우지 말고 적어도 절반쯤은 비워 두고 싶다. 공간이 충분하면 바람도 잘 통하고 여러 가지가 자유롭게 드나들어 마음도 시원하다.
나는 그런 ‘비어 있음의 감각’을 소중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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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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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두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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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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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식품 위장 사건이 계속 화제가 되었다. 중국 같은 나라는 그런 위조의 정점에 이른 가짜 상품의 대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와 음악의 해적판이 넘쳐나고, 전자제품과 공업제품도 특허를 침해해 제멋대로 복제한 것이 산더미처럼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연의 눈으로 보면 인간 자체가 이미 위장된 가짜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스승은 자연이며 자연에게 배우는 것은 매우 많다.
바다에 잠수하면 여러 종류의 해양생물이 움직이는데 그들의 움직임은 진짜다. 단 1밀리미터의 낭비도 없다. 인간처럼 말이라는 불필요한 것이 없으므로 오직 본능으로 움직인다. 그 안에는 계산된 위장 행동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다.
생물뿐 아니라 날씨 같은 자연의 움직임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 인간이 얼마나 가짜인지 절실히 느끼곤 한다.
얼마 전 산속 온천에 갔을 때 나는 여관 창가에 앉아 오랫동안 눈만 바라보았다.
눈은 바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따라 변한다. 위에서 아래로 사르르 내리다가 갑자기 옆으로 휙 흘러가고, 바람과 바람이 부딪히는 곳에서는 용처럼 꿈틀거린다. 아무 소리도 없는 세계에서 눈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문득 “인간은 진짜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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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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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가 아니라 백 마리 토끼를 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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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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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가라족’, 즉 무언가를 하면서 동시에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공부는 집중해서 진지하게 해야 한다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당시 많은 젊은이는 라디오나 음악을 들으며 콧노래라도 부르듯 가볍게 공부했다. 언론과 지식인은 그것을 비판적인 어조로 다뤘다.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사람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일본인은 한 가지에 한눈팔지 않고 집중해 끝까지 밀고 나가야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감각이 강하다. 그래서 ‘나가라족’이 비판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행위가 큰 집착을 낳을 수 있는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분에 사로잡히면 전체를 잃는다.
학생 시절 공부에만 매달린 사람은 운동으로 몸의 감각을 기르거나 중요한 인간성을 형성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된다.
나는 작귀회 도장에서 늘 “집중을 하나의 점으로 만들지 말고 크게 넓혀라”라고 말한다. 집중의 원을 크게 넓히면 그 안에 한 가지뿐 아니라 수많은 것을 넣을 수 있다.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면서 두 마리를 모두 잡을 수도 있다.
두 마리가 아니라 백 마리쯤 쫓는 감각을 가져도 좋다. 평소 그렇게 움직이면 능력을 담는 그릇은 분명히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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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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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체가 ‘휴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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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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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과 ‘휴식’을 나누어 본 적이 없다.
일주일에 닷새나 엿새를 일하고 주말에 “아, 피곤하다…”라며 몰아서 쉬지도 않는다. 평소에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텔레비전을 보며 누워 있거나 목욕을 오래 하며 피로를 푸는 일은 거의 없다.
일부러 휴식 모드로 들어가지 않는 것은 언제나 일 안에 놀이와 재미를 넣기 때문이다.
최근 어느 강연에서는 처음에 손주를 데리고 단상에 올라 아이를 안은 채 이야기를 했다. 강연 전에 손주들과 놀고 있었는데 단상에 오를 때 굳이 작별하지 말고 그대로 놀이를 계속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중 가운데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지만, 근엄하고 진지한 선생인 척하며 이야기하는 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취재를 받을 때도 집에서 편히 쉬는 듯한 분위기다. 그렇다고 일을 불성실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놀이와 재미의 감각을 조금씩 넣으면 일이 부드럽게 흘러가고 결과도 좋아진다.
이런 감각으로 일하면 실제로 거의 지치지 않으며 일부러 휴식을 따로 마련할 필요도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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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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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치레를 듣고 좋아하는 돼지가 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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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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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도 추켜세우면 나무에 오른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인사치레를 듣고 기뻐하는 돼지가 되고 싶지 않다.
인사치레라는 사교술은 원래 서양에서는 귀족, 일본에서는 공가와 무사 같은 특권계층 사이에서 발달했다. 정치적인 흥정이 많은 세계일수록 인간관계의 윤활유인 인사치레가 더 필요했을 것이다.
시대가 흘러 비즈니스 사회가 전성기를 맞은 현대에는 업무 현장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인사치레가 오간다. 나도 자주 듣는다. 상대의 목소리와 표정을 보면 “이 말은 진심이군”, “이건 그냥 인사치레군”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 수 있다. 인사치레라면 “아, 그래요” 하고 흘려보낼 뿐이다.
얼마 전 누군가 내게 “사쿠라이 회장님은 인사치레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사람이 가능한 한 속마음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인사치레라는 겉치레를 기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물론 나도 사용할 때가 있다.
다만 상대가 그것을 바랄 때뿐이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먼저 있고, 그 사람이 칭찬받고 싶어 하는 분위기이며 그 말로 기뻐할 것 같다면 인사치레를 건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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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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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거짓말이 습관이 되면 큰 거짓말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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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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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면 안 돼.”
아이는 부모와 교사에게 그렇게 배우며 자란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거짓말하는 어른이 된다.
애초에 아이에게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가르친 어른들은 정말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들인가. 그 어른들이 실제로 거짓말하지 않는다면 아이도 거짓말하는 어른으로 자라지 않을 것이다.
“거짓말하면 안 돼”라고 말하는 본인이 사실은 거짓말의 본보기가 되므로 아이가 거짓말을 배우는 것은 당연하다. 어른의 행동을 보고 ‘거짓말은 안 된다’는 말이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이해해 버린다.
세상은 거짓말을 좋은 거짓말, 해가 없는 거짓말, 나쁜 거짓말 정도로 나눈다. 남을 배려해 하는 것은 좋은 거짓말,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해가 없는 거짓말, 사람을 속이는 것은 나쁜 거짓말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사실 어떤 거짓말도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실이든 속이지 말고 그대로 말하면 된다. 사실을 말했을 때 상대가 크게 상처받을 것 같다면 “괜찮아”, “문제없어”처럼 간단한 말을 건네면 된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가벼운 거짓말도 계속하면 습관이 되어 점차 큰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된다. 그것이 무섭다. 가벼운 거짓말이라고 해서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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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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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마이너의 감각으로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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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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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것을 메이저와 마이너로 나눈다면 나는 철저히 마이너 지향이다. 무엇보다 내가 관계해 온 마작 자체가 마이너이고, 삶의 방식도 메이저한 것과 선을 그어 왔다.
메이저란 간단히 말해 권력이 있고 영향력이 강하며 거대한 것이다. 국가와 대기업부터 돈, 상식, 인기까지 포함된다. 마이너는 그 반대로 꾸밈없는 개인이나 힘이 없는 작은 존재다.
대리 승부사로 살 때에는 메이저한 인간을 자주 만났다. 정치인과 재계의 거물 같은 권력자, 100만 엔 정도는 푼돈으로 여기는 부자를 대신해 마작을 친 일도 많다.
하지만 메이저의 힘에 기대거나 아첨해서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목숨을 건다는 마음으로 그저 승부에 임했을 뿐이다.
그것은 마이너의 감각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 메이저 지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승부에 삼켜져 승부사로서의 생명은 진작 끝났을 것이다.
마이너의 감각은 결국 꾸밈없는 자신을 실제 크기 그대로 바라보는 감각과 이어진다. 메이저를 지향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사람은 자신을 잃는다.
메이저의 영향력이 아무리 강해도 마이너의 감각만은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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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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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가 없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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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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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정말 지조가 없어.”
누군가를 이렇게 비판할 때 그 말의 뒤편에서 “저 사람은 자유로워서 좋겠다”라는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지조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치관을 믿고 끝까지 지키는 자세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가치관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 계속 머무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틀 안에 들어가면 그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틀을 깨고 싶은 욕구’를 품게 되지 않는가.
그래서 지조 없는 사람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다고 느끼는 마음이 희미하게 섞여 있을 수 있다.
가치관의 틀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는 이유는 그 편이 안심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생활을 이어가야 하므로 어떤 틀이 없으면 제대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틀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 지조가 없다고 비판받는 사람이 그러면서도 가볍게 세상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조도 틀도 없이 사는 것은 꾸미지 않은 본모습으로 산다는 뜻이다. 반대로 지조를 내세우는 삶은 치장된 부자연스러운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조는 삶을 딱딱하게 만든다.
굳이 지조 같은 것이 없어도 전혀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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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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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따옴표’를 붙이면 볼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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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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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을 과시하거나 지위에 매달리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존재 전체가 「 」라는 따옴표에 둘러싸여 있는 듯하다. 실체가 없는 따옴표에 집착하는 모습은 볼품없다. 행동 하나하나에도 따옴표가 달려 있어 어딘가 공허하고 과장되어 보인다.
그런 따옴표에 둘러싸인 사람은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 “나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자랑할 만한 훌륭한 일을 합니다”라며 말이 많아질수록 주변에 자신의 따옴표를 휘두른다.
정치인, 대학 교수, 회사 사장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따옴표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서 멋지다고 여기는 지위나 직업을 가진 사람은 수많은 따옴표를 두르고 있지만 내 눈에는 전혀 멋지지 않다.
내가 진짜 멋을 느끼는 사람은 자기 기술 하나로 살아가는 장인이나 몸을 던져 일하는 육체노동자다. 그들은 따옴표라는 군더더기를 몸에 두르지 않는다. 꾸밈없는 자신으로 승부하는 깨끗함이 멋있다.
따옴표를 붙이고 우쭐하는 사람은 그것이 떨어지는 일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따옴표 없이 승부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 따옴표의 허망함을 알아차려도 이미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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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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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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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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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를 향하는 사람이다. 성격이 비뚤어진 것인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소중한 보물은 앞에 있다”며 오직 전진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나는 홀로 뒤를 향해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뒤로 걸어가면 그 앞에 10만 년 전의 인류가 있고 더 뒤에는 100만 년 전의 인류가 있다. 그보다 멀리에는 공룡과 삼엽충, 미토콘드리아가 있다.
말에서 멀어지고 자연과 본능에 가까워지는 일이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앞만 향하지 않고 자꾸 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는 지나치게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불행한 사건의 상당수는 너무 멀리 전진한 결과다.
‘나아간다’고 하면 반사적으로 앞을 떠올리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뒤로 나아가는 일도 중요하다. 앞에만 사로잡히는 것은 생물로서도 위험하다.
짐승은 자연의 정글에서 앞뿐 아니라 뒤와 옆, 아래까지 모든 방향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앞에만 정신을 빼앗기는 것은 전두엽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인간뿐이다.
뒤에 있는 것을 소홀히 한 대가는 작지 않다. 외면당한 존재들의 혹독한 반격을 받아야 할 운명을 인류는 이제 짊어졌다.
서쪽 장 : 빼내기
• 운은 사람이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운이 사람을 고른다
• ‘우연한 운’에 의존하면 ‘필연적인 운’을 부르는 힘을 잃는다
•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변화하는 흐름을 찾아라
• 누구의 등에도 기회가 붙어 있다
• ‘때’를 붙잡는 사람이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 마음을 ‘맑은 상태’로 만들면 운이 들어온다
• 평생 주어지는 운의 양은 정해져 있지 않다
• 돌다리를 두드리는 사람은 결국 다리를 건너지 않는다
• ‘상호 감각’, ‘전체 감각’, ‘때의 감각’, 운을 붙잡는 세 요소는 서로 이어져 있다
• 불리할 때에는 흐름이 바뀌는 순간을 기다려라
• ‘절체절명’이라는 상황은 없다
• 역경을 원 안에 넣고 빙 돌려라
• 부진에서 벗어나는 급소는 부진 바깥에 있다
•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을 운은 싫어한다
• 올바른 선택을 거듭하라
• 이면이 없는 인간은 없다
• 목표는 옆에 두어야 거리감이 맞는다
• 360도 회전하는 축을 가져라
• 긴장은 머리 뒤로 보내라
• 긍지는 언제든 털어낼 수 있는 먼지다
• 일에서 재미를 찾으려 하면 괴로워진다. 상호 감각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똑똑해지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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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은 사람이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운이 사람을 고른다
운은 의식적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운을 탐내는 사람에게는 결국 운이 오지 않는다. 운이 오히려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고른다. 따라서 일이나 승부에서 운과 행운을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운에게 선택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모든 일에는 흐름이 있다. 운이 좋은 사람은 그 흐름을 날카롭게 감지한다. 흐름을 잡으면 그 안에서 기회의 싹을 재빨리 붙잡을 수 있다.
운이 있는 사람은 작은 것을 잘 알아차린다. 큰 것은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만 작은 것은 감각을 맑게 갈고닦아야 보인다. 작은 것에서 새로운 흐름과 변화가 생겨나고 그것이 머지않아 큰 흐름이 되기도 한다. 작은 것에야말로 현재 상황을 깨뜨릴 실마리가 숨어 있다.
좋지 않은 것에는 위화감이 있다. 그러나 감각이 무뎌지면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한다. 작은 위화감도 하나씩 제거하며 나아가는 사람에게 불운은 내려앉지 않는다.
운이 오면 즐겁다. 뒤집어 말하면 늘 밝고 즐거운 마음으로 있는 사람에게 운이 찾아온다.
이것들은 운에게 선택받는 사람의 행동과 사고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의 일부다. 이런 감각으로 하루하루 행동하면 운은 자연히 그 사람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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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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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운’에 의존하면 ‘필연적인 운’을 부르는 힘을 잃는다
복권의 고액 당첨금을 한 번뿐 아니라 두 번, 세 번이나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텔레비전이나 잡지에서 당첨 비결과 요령을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비결도 요령도 아니다. 실제로 그런 방법이 있다면 모두가 같은 것을 실천해 똑같이 고액 당첨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액 당첨은 극소수에 불과하므로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복권 당첨은 우연한 운이다. 우연한 운에는 일정한 행동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한 운과 달리 필연적인 운이 있다. 필연적인 운은 평소의 행동 방식과 마음가짐에 따라 누구나 불러들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든 ‘준비·실행·마무리’를 제대로 하고, 일의 흐름을 잡기 위해 느끼는 힘을 갈고닦으며, 일이나 다른 활동에서 즐거움을 찾는 행동과 자세가 필연적인 운을 부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필연적인 운이 없는 사람일수록 우연한 운을 신에게 빌 듯 원한다. 매주 값싼 로또를 사고 빚까지 내어 경마에 돈을 쏟는다.
그런 행동을 계속하는 동안 필연적인 운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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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변화하는 흐름을 찾아라
‘운명’이라는 말에는 인생의 진로가 미리 결정되어 있는 듯한 울림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물론 얼굴과 몸, 유전자처럼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이 아니라 숙명이다. 정해진 것을 품고 있더라도 사람이 앞으로 걸어갈 길은 거의 정해져 있지 않다.
운명은 그 사람의 의식과 행동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운명은 한자로 생명을 운반한다고 쓴다.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는 근원에서는 생명이 계속 운반되고 있다.
그 생명은 여러 흐름을 따라 이동한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흐름, 이런 회사에 들어갔다는 흐름, 이런 사람과 결혼했다는 흐름. 큰 흐름 안에서 다시 작은 흐름들이 가지를 치듯 끊임없이 생겨난다.
그렇게 생각하면 운명은 이런 흐름들의 조합으로 정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운명을 바꾸려면 지금까지의 흐름을 바꾸거나 변화하는 새로운 흐름을 찾아 재빨리 올라타면 된다.
신념을 끈기 있게 지키거나 성실하게 꾸준히 노력한다고 운명이 저절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자기 생명이 어떤 흐름에 실려 가는지 알아차리고, 거기서 어떤 흐름을 일으킬지 또는 어떤 변화를 찾아낼지를 보는 데 운명을 바꾸는 요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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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등에도 기회가 붙어 있다
“저 녀석 등에 지금 기회가 붙어 있는데….”
작귀회 도장생의 대국을 보며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기회가 내려와 실제로 그의 등 근처에 붙어 있는 듯이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도장생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변덕스러운 기회는 순식간에 사라져 다른 사람에게 가 버린다.
기회는 승부의 장에서 눈이 돌 만큼 빠르게 움직인다. 선수의 움직임과 생각이 시시각각 변해 복잡한 흐름을 만들고, 그에 맞춰 기회도 여기저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기회가 강한 사람에게만 가는 것은 아니다. 약한 사람의 등에도 기회는 이미 다가와 있다.
굳이 쫓아가 붙잡지 않아도 기회가 먼저 다가와 붙어 준다.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의 차이는 다가온 기회를 알아차리느냐에 있다.
기회를 알아차리려면 평소 생활에서 다양한 것을 발견하는 감각을 갈고닦아야 한다. 큰 것뿐 아니라 작은 것도 문득 알아차린다. 그런 감각을 기르는 것이 등에 붙은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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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붙잡는 사람이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생선과 채소, 과일 같은 음식에는 ‘제철’이 있다. 제철은 그 식재료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때다.
달리 말하면 제철은 그 생명의 에너지가 정점에 올라 가장 힘으로 가득 찬 상태다. 제철은 매우 짧은 기간뿐이다. 그때를 놓치면 맛은 빠르게 떨어진다.
요즘은 생선과 채소, 과일까지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는 시대라 제철의 감각이 희미해졌다. 그러나 제철을 맛보는 감각은 매우 중요하다.
그 감각은 먹는 것뿐 아니라 일과 인간관계, 놀이 등 인간의 모든 행동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에는 상황상 ‘바로 이때’라고 할 수 있는 제철의 순간이 있다. 장인에게는 기술과 마음이 최고의 상태에 오른 시기가 장인으로서의 제철이다.
인간관계에서 제철을 가장 이해하기 쉬운 사례는 남녀 관계일지도 모른다. 놀이에서도 “이것을 꼭 해 보고 싶다”고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 가장 좋은 때다.
결국 제철은 기회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하며 살면 사물과 일의 제철을 자연스럽게 붙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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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맑은 상태’로 만들면 운이 들어온다
일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일을 못하는 사람을 보면 거래처나 고객에게 늘 “그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라는 독촉을 받는 방식으로 일한다. 언제나 “아, 잊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하겠습니다”라는 식이다.
반대로 일을 잘하는 사람은 거래처나 고객이 재촉하기 전에 부탁받은 일을 끝낸다.
나는 일을 할 때 무엇이든 ‘준비·실행·마무리’가 중요하다고 자주 말한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상에서 이 세 단계를 확실하게 지킨다.
실행을 위해 빠짐없이 준비하고 실행이 끝났다고 마무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마무리는 다시 다음 실행의 준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순환을 막힘없이 이어 가므로 실수하지 않고 언제나 제때 맞추는 사람이 된다.
제때 일을 마치는 사람이 되려면 사소한 잡무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려보내듯 빠르게 끝내는 감각이 중요하다. 뒤로 미루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처리한다.
일을 하나씩 끝내면 마음은 군더더기가 없는 맑은 상태가 된다.
마음이 맑으면 감각은 자연히 날카로워진다. 그렇게 갈고닦인 감각은 사물의 흐름을 붙잡고 운과 기회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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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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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주어지는 운의 양은 정해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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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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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재능이 없어 보이는 연예인이 한 가지 유행어로 일본 전체에 붐을 일으켰다가 순식간에 텔레비전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행운의 여신은 변덕스럽다. 저 연예인은 그때 평생 쓸 운을 다 써 버렸어”라고 말한다.
복권 1등이나 경마의 큰 배당처럼 수십만 분의 일, 수백만 분의 일에 해당하는 행운을 만난 사람을 두고도 비슷한 말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평생의 운을 모두 써 버린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운은 매장량이 한정된 석유나 광물과 다르다. 숙명처럼 운의 양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운은 무한하다.
‘평생의 운을 다 썼다’고 생각하는 배경에는 “이렇게 엄청난 행운이 왔으니 다음에는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심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운에 들떠 버리면 그 뒤에는 행운이 사라진다. 뜻밖의 계기로 노력하지 않고 큰돈을 손에 넣은 사람이 나중에 여러 불행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모처럼 온 운을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운에 들떠 자신을 잃지 말고, 자기 실제 크기에 맞는 감각을 계속 지니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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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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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를 두드리는 사람은 결국 다리를 건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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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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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건은 검토해 보겠습니다.”
업무에서 나름 좋은 기획을 제안했는데 상대가 이렇게 대답한다면 에둘러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검토에 시간을 쓰는 동안 기회는 계속 줄어든다.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하므로 A사가 제안을 질질 검토하는 사이 B사가 같은 아이디어를 상품화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이제 우리 회사에서 하겠습니다”라고 결정했을 때에는 이미 늦다.
이런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돌다리를 지나치게 두드리는 사람은 신중함 때문에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돌다리를 두드린 뒤 천천히 건너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기회의 꼬리 정도는 붙잡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돌다리를 계속 두드리는 사람은 대부분 끝내 건너지 않는다.
그들은 다리를 건넌 뒤에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도, 건너야 할 다리를 뜯어 재질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검사하는 데 정신이 팔린다.
돌다리를 건널 때에는 먼저 마음만이라도 저편으로 보내야 한다. 그런 뒤 세심하게 주의하며 실제로 건너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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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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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감각’, ‘전체 감각’, ‘때의 감각’
운을 붙잡는 세 요소는 서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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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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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과 행운을 감지하는 열쇠가 되는 세 가지 감각이 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는 운을 느끼려면 이 세 감각이 제대로 연동해야 한다.
첫 번째 열쇠는 ‘상호 감각’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언제나 여러 형태로 다른 사람과 이어져 살아간다. 내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있다. 이런 상호 감각이 없으면 자기만 옳다는 식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상호 감각이 있어야 전체 흐름을 바라보는 눈을 가질 수 있다.
두 번째 열쇠는 ‘전체 감각’이다. 사람의 시야는 내버려 두면 좁아진다. 마음은 언제나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집착하면 시야가 부분에만 고정되어 전체를 볼 수 없다. 전체 감각을 잃으면 변화의 흐름에도 둔감해진다. 변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회는 오지 않는다.
세 번째 열쇠는 ‘때의 감각’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늘 움직이고 변한다. 그 흐름의 급소를 붙잡는 것이 때의 감각이다. 때의 감각이 있으면 사물과 일에 제때 맞출 수 있다. 업무 기한이나 약속 등 일상의 일을 늘 제시간에 맞추는 사람은 때의 감각이 뛰어나다.
이 세 감각은 서로 이어져 있다. 하나만 따로 월등하게 뛰어날 수는 없다. 이것들은 지식처럼 따로 떨어진 조각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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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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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할 때에는 흐름이 바뀌는 순간을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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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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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작 승부를 하던 시절 나는 자신이 불리한 상황일수록 재미있어했다. 흐름이 내 편에 있고 그 흐름만 끊기지 않으면 편하게 계속 이기는 승부는 오히려 따분했다. 반대로 압도적인 열세에 놓였을 때에는 정말 즐거웠다.
그럴 때에는 운량, 즉 운의 양이 변하는 모습이 격렬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승부에서 운량은 시시각각 변한다. 열세일 때에는 운량이 적고 우세할 때에는 많다.
하지만 불리한 상황이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는다. 승부에는 흐름이 있고 언젠가 조류가 바뀌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 전환점이 기회다.
흐름의 경계에서는 상대와 내 운량이 순식간에 뒤바뀐다. 상대의 운량이 너무 많으면 승부를 포기하고 싶어지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상대의 운량이 여덟이나 일곱이고 내 것이 둘이나 셋일 때야말로 나는 버텨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싸웠다. 그 시간을 견디면 조류가 갑자기 바뀐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붙잡으면 상대와 나의 운량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역전된다.
다만 버티는 동안 힘을 주어서는 안 된다. 힘이 들어가면 소모되어 모처럼 조류가 바뀌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버티는 상황에서도 어디까지나 냉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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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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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이라는 상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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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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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상당히 큰 문제에 휘말리고도 태연한 사람이 있다.
큰 문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목숨이 붙어 있으면 된 것 아닌가. 목숨을 잃는 일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생각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에 약한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결과를 두려워하고 복잡하게 생각해 사태를 키운다. 하지만 문제에 강한 사람은 그것을 실제 크기 그대로 바라보고 침착하게 대응하므로 문제가 점점 작아진다.
문제를 키우는 것도 줄이는 것도 결국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달려 있다.
문제가 닥치면 순간적으로 시야가 그것 하나로 가득 차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조금씩 다른 것들이 다시 보이면 괜찮지만, 계속 문제에 붙잡힌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 문제를 마치 ‘절체절명’의 상황인 것처럼 절대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숨을 빼앗기는 일 말고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 무언가를 절대시하면 스스로를 가두는 틀을 만든다. 그 틀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빠져나갈 길은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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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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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을 원 안에 넣고 빙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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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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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작에는 동·남·서·북이 있고 그것이 빙글빙글 순환한다. 거기에 마작의 본질이 있다. 나만 화료하면 된다는 일방통행의 마음이 아니라, 운과 흐름은 원을 그리며 돌아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감각이 승부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남·서·북이 빙글빙글 돈다는 것은 자연이라는 우주가 마작의 공간에 투영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는 자연계의 흐름과 움직임이 그대로 일어난다. 그것을 매 순간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이 마작이다.
마작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움직임이 점이나 선에 머문다. 전체를 보지 않고 자기 패만 들여다보거나 승리를 서두른다. 강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순환하는 흐름에 노를 부드럽게 꽂아 넣는 듯한 매끄러움이 있다.
내가 승부하던 시절에는 흐름이 불리하거나 운이 따르지 않을 때일수록 그것을 반기며 즐겼다. 운이 없을 때에도 원의 감각을 지니면 다시 운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그 확신에서 여유가 생기고 전체를 보는 감각도 유지된다.
인생의 역경도 마찬가지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 생명의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일이다. 역경을 그런 원 안에 넣으면 원이 자연스럽게 회전하는 동안 그것도 언젠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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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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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에서 벗어나는 급소는 부진 바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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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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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가 긴 슬럼프에 빠져 오랫동안 부진할 때가 있다. 슬럼프가 길어지는 계기는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분석하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찾으려는 데 있을 수 있다. 빨리 빠져나오려고 애쓰다가 슬럼프 자체에 붙잡히는 것이다.
일이나 일상생활에서 정신적인 부진에 빠졌을 때도 같다. 무작정 원인을 찾고 분석해 없애려고 힘을 쓰면 오히려 혼란이 깊어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부진할 때에는 그것을 슬럼프가 아니라 ‘변화’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간도 자연의 생물이므로 컨디션의 파도가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 새로운 일을 적극적으로 해 보거나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생각하면 좋다.
침이나 뜸의 급소가 증상이 나타난 자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듯, 부진에서 빠져나오는 급소는 부진의 바깥에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과감하게 며칠 쉬고 온천이라도 다녀와 보라. 돌아와 다시 일할 때 긍정적인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부진할수록 그 바깥에서 밝은 재료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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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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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을 운은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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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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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열받아서 폭발해 버렸어.”
이런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자주 듣는다. 예전보다 감정의 도화선이 짧아진 것인지 쉽게 폭발하는 사람이 늘었다. ‘폭발하다’라는 표현이 유행한 뒤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관계는 감정을 주고받는 캐치볼 위에 성립한다. 상대가 내민 글러브 안으로 공이 들어가도록 던지는 것이 좋은 관계를 만드는 요령이다.
분노라는 감정은 말하자면 폭투다. 그렇다고 해도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므로 화를 내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이다.
쉽게 화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화가 난 뒤 어떻게 하느냐다.
분노한 상태에서는 냉정함을 잃어 올바르게 행동할 수 없고, 그 때문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분노와 운은 서로 궁합이 나쁘다.
특히 승부에서는 화를 내는 순간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다. 분노를 공격적인 에너지로 바꾸어 승리로 연결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화가 났을 때에는 유머나 즐거움 같은 다른 감정의 향신료를 가능한 한 섞어라. 그렇게 분노를 능숙하게 묽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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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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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선택을 거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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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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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인간관계가 원만한 것은 그 사람이 일과 사람을 대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선택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거나 행운을 불러들였다는 현상도 그 지점에 이르는 동안 올바른 선택을 해 왔기에 가능하다.
올바른 선택이라고 해도 그 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제때 맞추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때에 맞으면 업무도 순조롭고 사람에게 신뢰도 얻는다.
‘솔직해지는 것’도 중요하다. 마음을 솔직하게 하고 사물을 바라보면 위화감이 있는 것을 피할 수 있고, 상대의 거짓이나 속임수도 알아차릴 수 있다.
‘준비·실행·마무리’의 감각을 늘 지녀야 한다. 준비를 제대로 하면 실패 없는 실행으로 이어지고, 마무리를 깔끔하게 하면 다음 준비로 다시 연결된다.
‘전체 감각’과 ‘상대적 감각’도 필요하다. 이 두 감각이 있으면 부분에 사로잡히지 않고 균형 잡힌 생각과 행동이 가능해진다.
‘흐름’을 붙잡아야 한다. 흐름을 알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올바른 선택이란 잘못 선택했을 때 바로잡는 힘까지 포함해 이런 행동을 막힘없이 이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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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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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이 없는 인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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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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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속에 다른 면이 있어”라는 말은 흔히 험담으로 쓰인다. 하지만 이면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건축 도면으로 치면 평면도만 보는 것과 같다. 입면도나 투시도를 보면 앞면 말고도 여러 면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한데, 유독 인간만은 서로를 앞면 하나로만 보고 싶어 한다.
나뭇잎은 앞과 뒤를 번갈아 보이며 가지에서 빙글빙글 떨어진다. 앞면만 있는 잎도 없고 뒷면만 있는 잎도 없다. 그런 잎은 종이에 그린 그림 속에만 존재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앞면밖에 없는 잎이 이상하듯, 앞면만 드러내고 살겠다는 사람도 이상하다. 앞과 뒤가 모두 있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다.
“사람은 이면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른 사람에게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실제로 앞면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이면을 자각하지 못할 뿐, 그 안에 많은 것을 감춰 두고 있을 수 있다. 과거에 속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어 피해의식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이면이 있다. 더 나아가 사람은 수많은 면을 가진 다면체다. 면이 많을수록 경험은 풍부해지고 삶의 폭도 자연스럽게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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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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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옆에 두어야 거리감이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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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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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사람을 앞으로 이끄는 안내자와 같다. 다만 그 안내자는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까지 친절하게 알려 주지는 않는 특이한 안내자다.
목표를 세울 때에는 목표와의 원근감을 알맞게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정을 잘못하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목표가 너무 크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면 그 목표에 대한 거리감도 크게 어긋난다. 남이 보기에도 공상에 가까운 목표를 쫓으면 도중에 좌절하고 헛된 에너지만 쓰기 쉽다. 문제는 단지 목표가 크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다지 크지 않은 목표라도 현실감이 부족하면 역시 좌절의 원인이 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목표를 앞이 아니라 옆에 두는 감각을 가져야 한다. 목표를 앞에 놓으면 원근감이 흐트러져 먼 목표가 가까워 보이거나, 반대로 가까운 목표가 아주 멀리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목표는 앞에 세워 놓고 노려보지 말고 몸 옆에 두어라. 문득 옆을 바라보면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곳에 목표가 함께 있는 듯한 감각이면 좋다.
목표를 옆에 두면 앞에 놓고 쫓을 때 생기는 압박이 사라진다. 그 결과 여유를 지닌 채 목표와 나란히 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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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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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도 회전하는 축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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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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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 종목이든 육상이든 격투기든 운동에서는 축이 중요하다고 나는 선수들에게 가르친다. 삶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마음의 축을 가져라’라는 말을 한다.
축이라고 하면 대개 몸과 마음 한가운데에 한 줄의 축이 곧게 뻗은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축은 사실 쉽게 부러진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축은 부드럽게 변화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팽이처럼 360도로 빙글빙글 회전하는 축이다.
축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면 몸의 움직임과 사고의 확장이 제한된다. 격투기에서는 상대의 축을 붙잡으면 제압할 수 있다. 축이 하나라면 그것을 눌리는 순간 끝이다. 반대로 축이 회전하며 수없이 생겨난다면 붙잡기가 어려워진다.
신념을 고집하는 삶도 마음에 한 방향의 축만 둔 것과 같다. 신념은 어떤 것에 붙잡힌 상태이며 대체로 삶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삶의 축이 하나뿐이면 변화를 거부하고 변화에서 뒤처진다.
생각에도 한 방향의 축만 있으면 사물을 한쪽 면으로밖에 보지 못한다. 그러나 360도로 도는 축이 있다면 다면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상식 뒤에 숨어 있던 것까지 발견할 수 있다.
축을 한 방향으로 고정하지 마라. 언제든 360도로 회전할 수 있게 해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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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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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은 머리 뒤로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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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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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긴장을 잘하는 성격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런 질문을 가끔 받는다. 긴장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늘 이완된 상태에만 있으면 생명력이 약해진다. 가끔 긴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살아갈 기력을 완전히 잃은 사람에게는 긴장도 없을 것이다. 긴장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긴장할 때에는 “나는 긴장할 수 있을 만큼 살아 있구나”라며 반길 정도의 마음을 가져도 좋다.
긴장했을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없애려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든 없애려고 하면 긴장에 사로잡혀 오히려 더 커진다.
긴장을 부드럽게 품는 감각이 좋다. 딱딱한 긴장은 사람의 행동을 꼼짝 못 하게 묶지만 부드럽게 품은 긴장은 마음을 자유롭게 퍼뜨린다.
긴장은 머리 앞쪽, 이마 근처에 나타난다.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게 된다. 긴장을 머리 뒤로 보내면 부드럽게 품을 수 있다.
이를 몸의 물리적인 작용으로 만들어 내는 방법이 있다. 두 손으로 얼굴을 힘껏 가렸다가 갑자기 손을 떼는 것이다. 얼굴을 가리고 있을 때가 긴장 상태이고, 손을 탁 놓았을 때가 긴장이 뒤로 이동한 상태다. 그 감촉을 실마리로 삼아 긴장과 마주해 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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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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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는 언제든 털어낼 수 있는 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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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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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감정 가운데 가장 다루기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 나는 자존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존심은 사람을 앞으로 움직이는 엔진과 같지만, 그것이 손상되면 갑자기 옆이나 뒤로 향해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는 위험한 것이 된다.
일본은 선진국 가운데 자살률이 유난히 높다. 사람을 마지막으로 자살까지 몰아붙이는 것 역시 자존심일 수 있다.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이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돼”, “밥만 먹고살면 체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라고 마음을 툭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목숨보다 견디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좀처럼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자존심이 지나치게 크면 꾸밈없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인간관계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도장에도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 있다. 나는 “기초에도 못 쓰는 그런 것을 왜 가지고 있느냐”고 말하며 다른 도장생들과 함께 일부러 그의 자존심을 휘저어 놓곤 했다.
높은 자존심은 그 사람의 세계를 확실히 좁힌다. 일본어에서 ‘긍지’와 ‘먼지’는 모두 ‘호코리’라고 읽는다. 긍지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툭툭 털어낼 수 있는 먼지와 같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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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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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서 재미를 찾으려 하면 괴로워진다
상호 감각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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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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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재미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 상담을 자주 받는다. 일이란 원래 무엇일까. 생활비를 얻는 수단이라고 할 수도 있고, 삶과 한 쌍을 이루는 의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을 취미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일이 재미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취미처럼 일하거나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을 보며 자기 일이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 안에서 놀이의 감각을 찾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다. 앞의 질문을 받은 세상의 전문가들은 흔히 재미있게 만들 방법을 궁리하라고 조언하며 나도 그런 의견을 자주 말한다.
그러나 재미를 찾는 일이 실제로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재미있게 만들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비관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재미를 억지로 찾지 않는 편이 낫다.
일은 동료와 거래처와 고객이 맺는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상호 감각이 좋을 때 사람은 그 안에서 편안한 자기 자리를 찾는다. 특히 동료와의 상호 감각이 중요하다. 좋은 상호 감각에는 납득감과 충실감이 따른다. 일은 그것만 있어도 충분히 잘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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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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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해지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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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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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사람과 바보 같은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누구나 똑똑한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나는 반대다. 세상이 말하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정말로 지혜를 추구한다면 사회의 여러 문제와 마음의 고민은 점점 줄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그런 모습을 보면 세상이 말하는 ‘똑똑함’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바보 캐릭터 연예인’이 유행했는데, 그것은 똑똑함을 지나치게 부추기는 사회 풍조를 역으로 이용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똑똑하다거나 바보 같다는 구분은 어디까지나 인간사회 안에서만 통한다. 동물과 곤충의 세계에는 그런 구분이 없다. 동물과 곤충은 자연의 이치에 맞는 삶을 본능으로 살아가지만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서 크게 벗어난 방식으로 산다.
자연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느 쪽이 진정으로 똑똑한 것인가. 스스로 영리하다고 우쭐대는 인간은 언젠가 자연으로부터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결국 세상이 말하는 영리함은 남보다 지식이 조금 많거나 돈을 능숙하게 버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느낄 때일수록 오히려 어리석고 볼품없는 생물이 되어 있을 가능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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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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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장 : 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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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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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의 90퍼센트는 자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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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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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작을 처음 접했을 무렵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있었다.
“왜 모두 일부러 지려고 애쓰는 것일까?”
내 눈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어떤 결점이나 약점을 품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스스로 무너져 결과적으로 상대에게 승리를 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대국 중에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상대가 제멋대로 실수하고 눈앞에서 소리 없이 가라앉는 장면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세상을 둘러보면 똑같은 광경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일과 인생에서 적절한 순간에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아 실패하거나 인간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사람들은 날마다 수많은 자멸극을 연기하고 있다.
자멸을 부르는 큰 계기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을 이기려는 동기에 있다. 일에서도 인생에서도 현대인은 승리에 강하게 집착한다. 사회가 이기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왜 이기려는 마음에서 자멸의 길이 시작되는가. 승리에 붙잡히면 전체를 보는 감각과 조화를 잃는다. 흐름을 놓치고 부드러움도 잃는다. 환경 파괴를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자멸의 습성’은 이제 인류 전체의 규모로 부풀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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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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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는 것’에 진짜 강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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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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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를 대하는 자세에서 ‘이긴다’와 ‘지지 않는다’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결과는 같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지지 않겠다’는 마음은 생물로서 꾸밈없는 부분, 즉 본능에 가까운 곳에서 나온다. 자연의 동물은 본능으로 싸우지만 필요 이상으로 먹이를 잡지는 않는다. 이런 감각이 ‘지지 않는’ 자세로 이어진다.
반대로 ‘이기겠다’는 자세는 본능에서 분리된 욕망이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끝이 없다. 현대사회는 끝없이 이기고 싶어 하는 욕망에 붙잡혀 있다. ‘지지 않는 것’과 달리 ‘이기는 것’에는 큰 부작용이 따른다.
환경문제가 그 예다. 인류가 오직 ‘이기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다. 이기려는 자세에는 절도와 적당함이 없으므로 그렇게 되고 만다.
승리를 위해 필요 이상의 힘과 기술을 익히는 것은 두꺼운 화장으로 본질적인 약함을 감추는 것과 같다. 그런 힘으로 치르는 승부는 얕고, 이내 가면이 벗겨진다.
그러나 ‘지지 않는’ 자세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이기는 데 집착하는 사람과 지지 않는 승부를 하는 사람 가운데 누가 진짜 강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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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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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승부처’는
압도적으로 불리할 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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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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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 승부의 세계에서 자주 쓰는 말이며 실제로 승부의 흐름 속에서는 위기와 기회가 반복해서 찾아온다.
순경보다 역경을 좋아하는 나는 마작 승부에서도 당연히 위기를 좋아했다. 작은 위기는 잘못 없는 수를 잠시 계속 두면 금방 빠져나갈 수 있다.
승부의 흐름에는 이른바 ‘승부처’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평범한 기회나 위기의 순간이 곧 승부처인 것은 아니다.
진짜 승부처는 그런 것을 넘어선 곳에 있다.
그렇다고 엄청난 기회가 찾아온 순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진짜 승부처가 찾아온다.
마작으로 말하면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이 모두 리치를 선언한 상태다. 내게는 승산이 20~30퍼센트밖에 없고 상대에게는 70~80퍼센트가 있다. 가장 큰 궁지에서 여기서 꺾이면 완전히 패배하는 바로 그 국면에 승부처가 나타난다.
이처럼 불리함과 위험이 가득한 순간에는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맞서면 화재 현장에서 솟는 괴력 같은 힘이 나온다. 그 자리를 끝까지 견디면 형세는 순식간에 바뀐다. 승부처에서의 싸움이야말로 숨어 있는 승부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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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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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로 이기려는 유혹을 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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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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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에는 ‘악수’, 즉 나쁜 수가 있다. 올바르지 않은 수이므로 기본적으로 실수를 부른다. 그런데 승부의 세계에는 그 악수가 오히려 통하는 상황도 존재한다.
승부에는 흐름이 있고 올바른 흐름도, 잘못된 흐름도 있다. 마작에서 올바른 흐름이라면 올바른 수를 두는 한 그 흐름에 탈 수 있다. 그러나 흐름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면 올바른 수를 두어도 흐름을 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잘못된 흐름에서는 잘못된 방식으로 쳐야 이기는 일도 있다. 악수가 살아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그러나 나쁜 흐름에 맞춰 나쁜 수를 두면 당장은 잘될지 몰라도 다음에 올바른 흐름이 왔을 때 그 흐름에 맞추지 못하게 된다.
잘못된 흐름은 야구공이 불규칙하게 튀는 것과 같다. 불규칙한 바운드는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한 경기에서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도다. 그 드문 바운드만 예상해 글러브를 높은 곳에 들고 있으면 평범한 땅볼을 잡지 못한다.
잘못된 흐름은 예외적인 것이므로 거기에 조준할 필요가 없다. 그런 흐름을 만나더라도 올바른 수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올바른 자세를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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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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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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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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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에는 좋은 승리와 나쁜 승리가 있다. 내가 마작을 칠 때 상대가 가슴이 탁 트이는 깨끗한 승부를 보여 주면 “좋습니다, 당신이 이기세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승리를 양보하는 마음을 가지면 결국 내가 이기곤 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 긴장이 풀리고 부드러운 마작을 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예전 사람보다 양보를 덜한다. 도로에서는 조금이라도 먼저 가려고 달리는 운전자가 많고, 전철이나 버스에 노인이나 임산부가 타도 모른 척하는 사람도 많다.
일과 가정의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도 서로 양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작은 양보 하나로 사람의 마음은 달라진다. 전 세계 사람이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양보하려고 노력한다면 세상은 분명 조금 더 좋아질 것이다.
양보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이기고 싶다는 옹졸한 마음 때문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먼저 하세요”라고 말하려면 인간적인 강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양보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는 사람은 결국 약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얻은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어딘가에서 결정적으로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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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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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가 너무 많으면 족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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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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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에는 정보가 어느 정도 필요할까. 정보화 사회에서는 상대의 정보를 분석해 공략법을 세우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나는 정보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진짜 강함을 지닌 사람은 실전의 매 순간 날카롭게 알아차릴 수 있으므로 정보가 없어도 이긴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세 원숭이상이 있다. 강한 사람이 승부에 나설 때의 마음은 그것에 가깝다. 작귀회의 시합에는 “보지 마라, 듣지 마라, 말하지 마라”라는 암묵적인 철칙이 있다. 보면 잘못 판단하고, 들으면 흔들리며, 말하면 집중이 끊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도장생들에게 “상대를 굳이 보지 마라. 현혹될 뿐이다”라고 자주 조언한다.
승부 전에 상대의 온갖 정보를 모으고 머릿속으로 가상의 경기를 해 보아도 현실은 전혀 다르게 펼쳐진다. 상대가 이런 식으로 움직이고 이렇게 공격할 것이라 준비해도 실제로 그대로 되지는 않는다. 준비한 범위를 넘어 상대가 공격하면 마음이 흔들리고 그 틈에서 실수가 나온다.
물론 최소한의 정보는 있어도 좋다. 다만 “대략 이런 느낌이구나”라고 거칠게 파악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정보는 필요 이상으로 끌어안으면 실전의 족쇄가 되어 좋은 승부에서 멀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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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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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에 강해지는 비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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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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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귀회 도장에는 ‘1초 규칙’이 있어 패를 1초 안에 버려야 한다. 생각하면 망설임과 낭비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보다 순간을 느끼는 힘으로 대응하는 편이 과녁을 정확히 맞힌다.
강해지는 비결은 바로 이 속도에 있다.
진짜 강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작귀회의 1초 규칙은 보이지 않는 속도와 리듬을 붙잡는 연습을 통해 진짜 강함을 목표로 한다.
이런 강함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당연히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구체화해 “이것이 강함입니다”라고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화할 수 있는 것에는 끝이 있다. 하지만 진짜 강함에는 여기서 끝이라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없으므로 형태도 정해지지 않는다. 붙잡을 수도,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 몸으로 느끼는 수밖에 없다.
누군가 책에서 내가 과거 마작에서 강했다고 쓴 뒤 “그 강함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세요”라고 요구해도 나 자신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강함은 오직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눈에 보일 만큼 “강하구나”라고 느껴지는 강함이라면 아직 진짜 강함이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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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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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도 평소의 범위 안에 넣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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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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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들은 큰 대회를 앞두고 인터뷰에서 “평소에 하던 것을 그대로 보여 드릴 뿐입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이 말은 시합이라고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평상심으로 임하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평상심은 실전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평소에도 중요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만을 평상심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이라는 ‘평소’를 소중히 하는 마음이 진정한 평상심이다.
늘 평소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 막상 실전이 찾아와도 일상과 실전 사이에 거리가 생기지 않는다. 실전도 평소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되면 ‘실전’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실제 실전에서 사라진다.
평소를 소중히 한다는 것은 일상의 사소한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준비·실행·마무리’를 날마다 막힘없이 순환시키는 것이다. 그런 축적이 평소의 마음을 만든다.
따라서 평상심은 실전에서 새삼 “평상심, 평상심”이라고 주문처럼 외운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평상심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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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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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하지 않는 쪽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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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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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귀류’를 시작한 것은 마작에서 정치와 경제라는 요소를 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서 정치와 경제란 흥정과 계산을 비유한 말이다.
흥정과 계산은 본래 깨끗한 것이 아니다. 그런 요소를 없앤 마작은 세상의 계산적인 마작과 전혀 다른 놀이가 될 것이다. 그런 기대와 확신에서 작귀류가 시작되었다.
작귀류에서 패를 1초 안에 버리는 규칙은 승부에 계산과 사고를 끼워 넣지 않고 감각만으로 하기 위한 것이다. 흐름을 느끼며 번뜩이는 순간에 패를 내는 것이 작귀류다. 보통은 이것저것 생각하고 계산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여기겠지만, 프로들과 대결하면 오히려 작귀류가 더 강할 때가 있다.
과거 프로들이 출전하는 큰 대회에 도장생이 두 차례 참가했는데 두 번 모두 쟁쟁한 프로들을 제치고 아마추어인 도장생이 우승했다. 계산으로 치는 세상의 마작보다 계산하지 않는 작귀류가 강하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수많은 계산이 헛되거나 때로는 마이너스일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일과 생활에는 물론 필요한 계산이 많다. 그러나 욕심이 얽힌 계산만큼은 가능한 한 빼 보라. 계산하지 않음으로써 인생의 전개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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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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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하는 마음으로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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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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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에는 일반적으로 ‘공격’과 ‘수비’라는 역할이 있다. 하지만 승부에서는 언제나 공격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며, 수비한다는 의식은 없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수비에도 ‘도망’의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수비라도 어딘가에는 도망치려는 마음이 숨어 있다.
야구나 축구에서는 점수가 앞선 팀이 경기 후반에 수비에 전념하며 ‘도망쳐서 이기려고’ 할 때가 있다.
‘도망쳐서 이긴다’는 표현 자체가 수비 안에 도망의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뜻밖에 드러낸다. 그런데 도망쳐서 이기겠다고 수비 자세로 바꾸는 순간, 그 마음에서 흔히 빈틈이 생긴다.
특히 점수 차가 크지 않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 쉽다. 근소한 차이의 승부에서는 체력보다 기력이 서로 부딪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지키려는 도망의 자세와 강하게 공격하려는 자세 가운데 어느 쪽이 유리하겠는가.
지키고 있을 때도 공격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수비는 단지 상대의 공격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격적인 마음으로 임하면 된다. 공격하려는 마음으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들이는 한 그곳에는 수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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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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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이 더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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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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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는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운동선수들이 인터뷰에서 자주 하는 말이지만, 애초에 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운동선수가 있을까.
운동선수가 아니더라도 패배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나 살면서 수없이 지지만, 졌을 때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크게 달라진다.
그저 분해하기만 해서는 아무런 성장도 없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분함을 발판으로 더 긍정적인 마음을 갖거나 패인을 살펴 다음 승부에 살릴 수 있다면 그 패배는 좋은 양식이 된다. 같은 패배라도 ‘좋은 패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승리만을 추구하고 패배를 단순한 마이너스로 바라보면 좋은 패배를 만들 수 없다. 자기 기쁨만을 위해 승부할 바에는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졌더라도 상대가 “좋은 승부였다”고 느낀다면 멋진 패배다. 나 역시 상대 덕분에 좋은 승부를 했다고 생각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성장한다.
져도 멋있게 져라. 졌더라도 어딘가에서 재미를 발견하라. 이기는 것보다 지는 쪽이 훨씬 더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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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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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함은 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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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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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기에 정치적 혼란까지 겹쳐서인지 세상 전체가 역경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정말 살기 힘들다….”
거리를 걸으면 이런 푸념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하지만 전쟁 중 먹을 것조차 없던 가난을 생각하면 경제적으로 세계 최상위권인 지금의 일본이 정말 역경에 놓였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힘들다고 해도 대부분 하루 세 끼를 제대로 먹고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사용하며 문명생활을 누린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편안하고 쉬운 생활에 익숙해지면 정신과 육체가 점점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작은 역풍만 불어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댄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세상을 살아내려면 어느 정도의 혹독함도 필요하다.
편안함만 찾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정말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 견뎌 낼 수 없다. 본래 살아간다는 일은 혹독한 것이다.
나는 ‘편한 길’과 ‘험한 길’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뒤쪽을 고르는 성격이다. 힘든 상황을 오히려 고맙게 여긴다. 혹독함에서 도망치지 않으면 그것은 세상을 살아내도록 지켜 주는 부적 같은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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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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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은 큰 가능성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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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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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부드럽게 태어나 단단해지며 죽어 간다. 갓 태어난 아기는 폭신한 인형처럼 부드럽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 유연성을 차츰 잃는다.
아기는 태어난 뒤 몇 년 동안 눈부실 만큼 변한다. 누워 있기만 하던 아이가 기어 다니고, 마침내 일어나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다. 말하지 못하던 아이도 어느새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부드럽다는 것은 그만큼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젊은 사람도 단단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몸도 마음도 그렇다. 거리를 걷다 보면 앞에서 그대로 부딪쳐 올 듯 직선으로 돌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움직임이 딱딱하다. 딱딱하기 때문에 로봇처럼 직선적인 움직임밖에 하지 못한다.
자연의 생물은 모두 부드럽다. 딱딱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연에서 멀어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몸이 굳은 사람은 머리도 굳은 경우가 많다. 굳은 머리에는 고정관념이 빽빽하게 들어 있다. 고정관념이 강하면 스스로 틀을 만들어 변화할 수도, 주변의 변화에 따라갈 수도 없다.
반면 유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틀을 만들지 않으므로 계속 변화할 수 있다. 부드러움은 그 자체로 큰 가능성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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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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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에 집착하면 쉽게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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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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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의 세계에는 ‘형’이라는 것이 있다. 흔히 ‘○○류’라고 부르는 이름은 일정한 형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암시한다.
물론 형은 무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육상이나 구기 종목에서도 자기 힘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특유의 형을 가진 선수가 많다.
예를 들어 축구팀마다 득점하기 쉬운 공격 대형이 있다. 그 대형을 유지하면 득점 기회가 자연히 늘지만 상대가 그 대형을 무너뜨리는 순간 열세에 놓인다.
이처럼 형은 그 안에서 싸울 때에는 강하지만 형 밖으로 밀려나면 쉽게 무너진다. 형은 가능성을 좁히는 하나의 고정관념과 같다.
형에 집착하면 유연성을 잃고 예상하지 못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
작귀회의 마작은 ‘작귀류’라고 불리지만 정해진 형이 있는 것은 아니다. 패를 1초 안에 버리는 규칙도 전술이나 전략의 스타일을 만들지 않기 위한 방법이다. 작귀류에 굳이 스타일이 있다면 ‘순간적으로 변화를 느끼고 부드럽게 대응한다’는 자세일 것이다.
형을 정할 필요는 없다. 형이 없는 자유로운 자리에서 진짜 강함이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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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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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감각’이 좋으면
일도 인간관계도 잘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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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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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와 가라테 같은 격투기에서는 ‘마아이’, 즉 상대와의 거리 감각이 중요하다고 한다. 좋은 거리를 잡으면 상대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지 않는다. 거리가 무너져 상대가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 공격의 기회가 된다.
그래서 힘 있는 사람끼리 마주 서면 그 사이의 거리가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 찬다. 곁에서 보면 두 사람이 거리를 축으로 삼아 끊임없이 앞뒤와 좌우로 움직이는 듯하다.
거리 감각은 일상의 사소한 일, 업무,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거리를 잘 잡는 사람은 균형 감각이 뛰어나다.
일이라면 어느 정도의 강도로 할지, 얼마의 시간 안에 끝낼지를 즉시 그리면서 흔들리지 않고 실행한다. 그 일에 얽힌 인간관계도 적절한 거리로 풀어 간다.
가장 훌륭한 거리 감각의 본보기는 자연이다. 자연 속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절묘한 거리와 균형 위에 성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다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와 조개가 보이지 않는 균형 속에서 생명을 빛내고, 산에서는 나무들이 가지런히 하늘을 향해 자라며 새들의 노랫소리가 시원하게 울린다.
자연에서 거리 감각을 배우지 않게 된 인간은 자연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도 잊었다. 그것이 사람과 사회의 균형에도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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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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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많으면 자유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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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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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찾지는 않지만 이른바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책을 가끔 선물받아 읽을 때가 있다.
대부분 읽다가 도중에 내려놓는다. 많은 지식이 적혀 있으니 받는 정보도 많아야 할 텐데 이상하게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본다. 한 가지 이유는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표현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독자를 무시한 채 자기 머릿속에서 지식이라는 팽이만 빙글빙글 돌리고 있다. 지식이 지나치게 많으면 자기 머릿속을 절대시해 다른 사람과 현실에서 멀어진 ‘바보’가 되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이 본래 살아가는 본능적인 감각의 세계를 지식이 방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과 정보에 의지하지 마라. 느껴라.”
나는 이 말을 자주 한다. 감각으로 붙잡는 것은 지식보다 훨씬 정확하게 과녁을 맞힌다.
마작에서는 머리로 정보를 모으고 분석해 앞을 읽으려 하면 승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 판의 빠른 움직임과 흐름을 매 순간 온몸으로 느껴야 비로소 승부를 제압할 수 있다.
지식과 정보가 통하지 않는 세계를 일단 지나간 뒤에야 지식은 진정으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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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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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이야말로 나의 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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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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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은 실제보다 자신을 높게 평가한다. 사람은 자기 모습을 보기 좋게 비추는 왜곡된 거울만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 증거로 컨디션이 나쁠 때에는 “이것은 내 실력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일이 잘 풀리면 “이것이 진짜 내 실력이다”라고 여기기 쉽다.
불리한 것은 인정하지 않고 좋은 것만 인정한다. 이런 자기 정당화의 심리는 인간의 근본적인 약함에서 나온다.
부진한 모습도 자신의 실력이라고 솔직히 인정하면 자신이 형편없는 인간처럼 느껴져 견디기 어렵다. 인정하는 순간 자기를 지탱하던 자존심이 무너질 것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부진 역시 틀림없는 자신의 실력이다. 나는 “부진이야말로 나의 실력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컨디션이 나쁠 때에도 여유가 생기고, 다시 일어설 실마리를 빨리 붙잡을 수 있다. 갑작스러운 위험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날아라 메뚜기여, 들판이나 다름없는 우리 집.”
자기 집을 들판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면 경기가 나빠져 급료가 줄어도 크게 당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기의 부풀려진 모습만 보여 주는 거울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행복하다. 그러나 그 행복은 쉽게 깨진다. 언젠가는 누구나 꾸밈없는 자기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가져야 할 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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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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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을 끝까지 관철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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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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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는 성공한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은 신념을 관철했다. 훌륭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념을 끝까지 밀어붙여 이상과 꿈을 이룬 사람은 실제로 매우 적다. 오히려 신념에 집착하다 좌절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거나 언론에 소개되는 것은 신념을 관철해 성공한 사람들뿐이다. 그래서 신념을 고집하다 좌절한 사람들은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신념을 밀어붙여 잘된 사람만 눈에 띄므로 세상은 더욱 ‘신념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와 학교도 그렇게 가르치며 대부분은 신념이 나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을 떠받치는 것 역시 신념이다. 명백히 좋지 않은 신념도 썩을 만큼 많은데 사람들은 좀처럼 그것을 보려 하지 않는다.
신념은 하나의 생각에 집착해 굽히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가 찾아왔을 때 대응하지 못한다. 대개의 경우 신념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의 발을 붙잡는 원인이 된다.
오늘 가진 신념이 내일 다른 신념으로 변해도 괜찮다. 신념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사계절이 있는데도 매일 봄이어야 한다거나 매일 여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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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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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마음은 만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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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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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에는 적당한 온도가 중요하다. 너무 높아도, 너무 낮아도 안 된다.
목욕물도 너무 뜨거우면 오래 들어가 있지 못하고 너무 미지근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 “따뜻해서 좋다”라고 느끼며 편안히 몸을 담글 수 있는 정도가 가장 좋다. 마음의 온도도 같다.
마음이 따뜻하면 그 사람을 만나는 이에게도 따뜻함이 전해진다. 꾸며 낸 다정한 말이나 격려의 말은 필요하지 않다. 얼음처럼 차가운 마음을 가진 사람도 따뜻한 마음을 계속 만나면 언젠가 녹기 시작한다. 반대로 지나치게 뜨거운 마음은 적당한 온도로 가라앉는다.
요즘은 마음의 온도가 낮은 냉혈한이 늘고 있다. 마음이 차가워지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범죄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다. 사회 전체의 마음 온도가 내려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런 사회이기 때문인지 열혈한은 주목받는다. 말 그대로 마음의 온도가 지나치게 높은 사람이다.
열혈한은 언뜻 믿음직해 보인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열혈한만큼 믿기 어려운 사람도 없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라고 큰소리치고는 어느새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사람을 사귈 때 자기나 상대의 마음이 너무 뜨겁다고 느껴진다면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다. ‘마음은 언제나 알맞은 온도로’라는 말을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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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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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은 사람 안에서
마블링 고기처럼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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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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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과 본래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악설을 둘러싼 논쟁은 예부터 끊이지 않았다.
나는 둘 다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막 태어났을 때에는 선한 부분이 압도적으로 크지만 말을 배우기 시작한 뒤에는 사람 안에서 악이 점차 커진다. 결국 누구나 선과 악을 함께 품은 존재가 된다. 열 가운데 일곱, 여덟 정도가 악으로 이루어진 사람도 적지 않다.
선과 악은 사람 안에서 마블링 고기의 살과 지방처럼 뒤섞여 있다. 선의 뒷면에는 악이 바짝 붙어 있고 악의 뒷면에는 선이 붙어 있다.
어떤 작가는 “인간은 선과 악의 저편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언가를 아는 듯한 관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선과 악을 넘어선 존재는 자연의 생물뿐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선과 악을 완전히 넘어설 수 없다.
벌레잡이식물이 파리나 나비를 교묘히 속여 먹는 것은 아니다. 사자가 치밀하게 계산해서 얼룩말을 덮치는 것도 아니다.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으로 하는 일이므로 선이나 악으로 판단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악을 품고 있다. 그것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안의 악을 자각하고 그 양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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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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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것이 정말 좋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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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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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드라마의 영향도 있어 사카모토 료마가 다시 유행한다고 한다. 막부 말기의 지사들은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일본의 쇄국을 풀고 나라를 크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크게 살아 보자”라는 삶을 몸소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일본은 정말 커져야 했을까. 일본 같은 작은 나라는 작은 크기를 유지하면서도 서양에 당당하게 자부심을 보일 수 있는 탄탄한 나라를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서양의 합리적인 가치관은 숫자가 지배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숫자가 클수록 힘이 세고 뛰어나다고 여긴다. 메이지 시대에 빠르게 서구화한 일본은 전통과 문화를 계속 버리면서 자본과 군대의 숫자를 늘리는 데 힘썼다.
그 흐름을 타고 세계 두 번째 규모의 경제대국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분수에 넘칠 만큼 커진 지금의 일본은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인간관계나 조직도 너무 커지면 그 크기 때문에 여러 장애와 폐해가 생긴다.
나는 옛사람의 ‘사방 네 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감각이야말로 인간이 자연과 함께 찾아낸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일에는 알맞은 정도가 있다. 세계화된 관점의 반대편에 있는 ‘사방 네 리’의 감각에는 그 적당함이 있다. 그 감각만큼은 잃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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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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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는 낭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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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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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홋카이도의 리시리를 방문했을 때 산란을 위해 연어 떼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온 힘을 다해 다음 생명으로 이어 가려는 연어의 필사적인 움직임은 마음을 울렸다.
산란을 마치고 강에서 죽은 연어 가운데 일부는 강가로 떠밀려 곰과 새의 먹이가 되고, 일부는 물속에서 분해되어 미생물의 먹이가 된다. 그곳에는 조금의 낭비도 없는 생명의 순환이 있다.
죽은 연어의 몸에서 버려도 되는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자연에는 낭비라는 것이 없다.
반대로 인간은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하고 불필요한 물건을 계속 만든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으로 나누면 세상에는 불필요한 것이 엄청나게 흩어져 있다.
음악과 그림처럼 실용적인 생활에는 꼭 필요하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필요한 것이 많다. 그런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낭비이며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너무 많다. 대량으로 버려지는 쓰레기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많은 낭비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편의점 도시락은 충분히 먹을 수 있는데도 시간이 조금 지났다는 이유로 바로 폐기된다. 일본 전역에서 날마다 버려지는 도시락의 수는 엄청나다고 한다.
버릴 것은 없다. 그런 생활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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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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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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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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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마음을 쏟았던 것에 ‘끝’이 찾아오면 쓸쓸함을 느낀다.
아이가 부모 곁을 떠날 때, 부모나 친구가 세상을 떠날 때, 실연했을 때, 학교를 졸업할 때, 익숙한 가게가 문을 닫을 때, 회사를 퇴직할 때처럼 사람은 여러 끝을 지나며 살아간다.
그러나 쓸쓸함과 상실의 슬픔이 너무 크면 다음 한 걸음을 좀처럼 내딛지 못한다.
나는 언제나 모든 일을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끝 역시 하나의 시작이라고 여겨 왔다.
끝을 정말 ‘끝’으로 만들어 버리면 쓸쓸함과 슬픔만 남는다. 반대로 그것을 다른 ‘시작’으로 바라보면 “이제 무엇이 시작될까” 하는 설렘이 싹튼다. 쓸쓸함과 슬픔을 계속 끌고 갈 필요도 없다.
시작은 언제나 신선하다. 싫은 일이 있어도 다음 날이 온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룻밤을 보내면 반드시 아침이 온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며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므로 싫은 일을 겪었더라도 마음속에서 아침을 기다리면 된다.
모든 것을 시작으로 바꾸면 끝난 일은 깨끗이 정리된다. 인생에 ‘끝’은 없다. 새로운 한 걸음은 그런 마음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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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쪽 |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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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편리한 도구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얼마든지 화상을 입힌다. 누구나 일상에서 그런 일을 셀 수 없이 경험했을 것이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자꾸 이상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말에 데어 생긴 상처는 끊이지 않는다.
책에 인쇄된 말도 마찬가지다.
책에 적혔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곧이곧대로 믿으면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지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느끼는 쪽이 훨씬 중요하다”라고 자주 말한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고, 아무것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은 채 행동하면 곧바로 사회에서 밀려날 것이다.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까닭은 지식에 지나치게 치우친 사회와 교육의 모습에 강한 위화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식과 사고가 균형 잡힌 형태로 사회에 존재한다면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작귀회의 도장생들에게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라. 도망치지 마라”라고 늘 말한다.
이 말 역시 절대적인 진리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절대로 받아들이면 이 책에서도 다룬 ‘포기하는 것’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핵심은 말이 살아나는 데에는 그 말에 어울리는 조건과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조건에서는 맞는 말이 다른 조건에서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사진을 찍을 때에는 빛의 세기와 방향, 온도와 습도에 따라 같은 대상도 전혀 다른 색과 표정으로 찍힌다.
좋은 사진을 만드는 조건은 하나가 아니다.
색을 선명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도 있고, 그림자를 살려 깊은 표정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대상의 매력을 살리는 방식은 무수히 많다.
말도 같다. 어떤 말이 살아나지 못하는 조건과 장소가 있는가 하면, 그 말을 충분히 살려 낼 수 있는 조건과 장소도 많다.
이 책에 실린 89개의 말을 읽을 때에도 그런 점을 함께 상상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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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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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이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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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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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다카기 마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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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쪽 |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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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이 쇼이치
도쿄도 시모키타자와 출생. 대학 시절 마작을 시작해 뒷세계의 프로로 데뷔했다. 이후 은퇴할 때까지 20년 동안 무패를 기록하며 ‘작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은퇴 후 ‘작귀류 마작도장 패의 소리’를 열고, 마작을 통해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길을 후배들에게 가르치는 ‘작귀회’를 시작했다.
그를 모델로 한 영화와 만화가 수없이 제작되었고 저서도 많다. 강연 등을 통해 ‘작귀류 철학’을 이야기하는 기회도 많으며 마작계에 그치지 않고 여러 분야에 공감자와 팬을 두고 있다. 작귀회 선수들은 그를 ‘회장’이라고 친근하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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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쪽 |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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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을 부르는 말』
사쿠라이 쇼이치
가도카와 e문고
2013년 6월 30일 발행
발행인: 이노우에 신이치로
발행처: 주식회사 가도카와쇼텐
주소: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후지미 2-13-3, 우편번호 102-8078
저작권: © Shoichi Sakurai 2011
이 전자책은 다음 단행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가도카와쇼텐 단행본 『남자를 연마하는 말』, 2011년 1월 10일 초판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