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의 정체 - ‘직감력’으로 역경에 강해진다》
사쿠라이 쇼이치 지음
목차
머리말 ‘직감력’을 되찾으면 어떤 상황도 타개할 수 있다
제1장 ‘승패’를 버리면 감이 날카로워진다
제2장 ‘자연의 본능’으로 돌아가면 감이 날카로워진다
제3장 ‘아이의 감각’으로 돌아가면 감이 날카로워진다
제4장 ‘양보하는 힘’을 가지면 감이 날카로워진다
맺음말 ‘비열한 인생관’을 다음 세대에 남기지 않기 위해
머리말
‘직감력’을 되찾으면 어떤 상황도 타개할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의 ‘감’이 무뎌져 있다.
세상이 편리해질수록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던 본능이 희미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편리해져 모두가 행복해졌다면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과거보다 늘었을까? 어쩌면 오히려 줄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해마다 3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은둔형 외톨이나 자폐증 같은 정신적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도 해마다 늘고 있다. 내가 이끄는 ‘작귀회’에도 최근 몇 년 동안 마음의 고민을 품은 젊은이들이 일본 각지에서 많이 찾아온다. 이 역시 행복한 사람이 줄었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평범한 회사원들 사이에도 불안이 번지고 있는 듯하다. 미국의 거대 기업 리먼 브러더스마저 파산했다는 사실은 수많은 직장인을 불안하게 했다. 언제 회사에서 해고될지 알 수 없는 사회이니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대기업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미래를 절대 안심할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오히려 비정규직이 늘고 기업 사정에 따라 사람을 자르는 것이 당연한 사회로 변해 버렸다.
일본의 미래를 보아도 밝은 이야기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저출산·고령화, 부모의 아동 학대, 젊은이가 갑자기 폭발해 저지르는 무차별 살인, 디플레이션에 따른 경기 악화, 에너지 문제와 식량 문제……. 최근에는 물에 관한 권리까지 서로 빼앗으려 한다고 한다.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지식이나 학력이 아니다. 더구나 정보 같은 것도 아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힘보다 몸으로 느끼는 힘이 중요하다.
그 까닭은 이 책에서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몸으로 느끼는 힘을 ‘직감력(直勘力)’이라고 부르고 싶다.
‘직감력’은 오감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것을 순간적으로 알아채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오감을 온전히 활용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감지하는 힘이라고 해도 좋다.
현대인은 특히 시각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착각한다.
그런 표면적인 것에 기대서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다. 더구나 이처럼 답답함이 감도는 사회를 힘차게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흔히 ‘감’이라 부르는 ‘직감력’의 정체를 이제부터 이야기해 보려 한다.
뒷세계에서 ‘20년 무패’를 떠받친 직감력
나는 한때 마작 ‘대타 기사’로 살았다.
대타 기사란 거대 조직이나 기업이 막대한 돈과 권리를 걸고 다투는 승부에 그들을 대신해 마작을 두는 뒷세계의 프로를 말한다.
하룻밤에 수억 엔이 오가는 큰 승부도 있었다.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일이었지만, 그만큼 언제나 목숨을 건 승부였다.
말 그대로 패하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팔이 잘리거나 어느 산속에 파묻혔다는 이야기도 흔히 들었다. 대타 기사 가운데 열 손가락이 온전히 붙어 있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 정도였다.
반대로 이기면 상대 조직의 원한을 샀다.
실제로 나는 남자들에게 납치되어 구덩이에 묻히기 직전에 구조된 적이 있다. 도쿄만에 수장될 뻔한 적도 있다. “살고 싶으면 져라”라는 협박을 받으며 일본도를 눈앞에 둔 채 마작을 친 적도 있다.
이겨도 져도 목숨은 보장되지 않았다.
그런 뒷세계에서 내가 20년 동안 한 번도 지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운이나 행운도 따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운과 행운의 흐름은 스스로 다룰 수 있다.
운과 행운이라는 흐름을 느끼는 힘, 감성, 다시 말해 ‘직감력’이 있으면 그런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이는 마작이라는 승부의 세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승패를 겨루는 일뿐 아니라 느닷없이 자신에게 닥친 뜻밖의 사태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폭포수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하자. 거센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수면으로 떠오르려 하면 도중에 힘이 다해 결국 물에 빠져 죽는다.
하지만 흐름에 맞서기보다 급류에 몸을 맡겨 폭포 아래까지 흘러 내려가는 편이 도리어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 폭포 아래쪽은 물살이 그리 세지 않고 전체적인 물의 흐름도 파악할 수 있다. 흐름을 알게 되면 수평으로 움직여 폭포 중심부에서 벗어난 다음 수면으로 올라오면 된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도 몸이 느끼는 대로 침착하게 행동하면 살아남을 길이 선명하게 보인다.
어떤 역경에서도 늘 침착함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침착해지면 문제의 본질과 해결에 이르는 길이 ‘감’으로 떠오른다.
나는 언제나 내 감을 믿고 행동해 왔다.
마작의 뒷세계에서 20년 동안 무패로 지낸 것, 그리고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 사지가 온전한 채 살아 있는 것은 오로지 ‘직감력’ 덕분이라고 믿는다.
직감력이 날카로운 사람의 네 가지 조건
이 책에서는 직감력을 단련하는 방법을 전하고자 한다. 그것은 지칠 대로 지친 이 사회를 힘차게 살아가는 방법인 동시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 방법은 크게 다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상식과 지식을 버린다.
2. 자연에서 배운다.
3. 어린 사람, 특히 아이에게 배운다.
4. ‘양보하는 힘’을 안다.
각각에 관해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겠다.
요즘 많은 젊은이가 고민을 안고 나를 찾아와 상담한다. 잡지 인터뷰도 많고, 이 책처럼 집필을 부탁하러 오는 편집자도 끊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는 대단한 경영자도, 훌륭한 학자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평범한 아저씨다. 그런 내게 이야기를 들으러 오거나 책을 써 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아마 지금의 세상이 나와 같은 삶의 방식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과 정보, 아이디어처럼 머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처럼 몸으로 느끼는 일의 중요성을 사람들 스스로 피부로 감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특별한 인간인 것은 아니다. 직감력은 옛사람이라면 누구나 평범하게 지녔던 능력이다. 다만 세상이 편리해지면서 현대인이 잊어버린 능력이다. 나는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그 능력을 소중히 다뤄 왔을 뿐이다.
그러므로 직감력이라는 본능은 누구에게나 갖춰져 있을 것이다. 그것을 깨우는 순간, 지금 놓인 최악의 상황이나 품고 있는 고민에서 벗어날 실마리가 단숨에 보일 것이다.
사쿠라이 쇼이치
제1장
‘승패’를 버리면 감이 날카로워진다
애초에 ‘이기고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에는 세상의 풍조가 반영된다.
예를 들어 ‘승자 그룹·패자 그룹’이라는 말이 있다. 몇 년 전 유행한 말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완전히 정착했다.
그런 말이 생겨난 까닭은 세상에서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의 차이가 눈에 띄게 분명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부터 빈부 격차는 있었겠지만, 비슷한 가정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도 우열이 갈리게 되었다. 같은 회사에 입사하고도 이후의 승진에서 커다란 차이가 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승자 쪽에 들어가려고 애쓴다. 패자가 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한다. 상대를 끌어내려서라도 자신만 승자가 되려 한다.
그렇게 해서 정말 행복한가?
이때 말하는 승자와 패자는 대부분 소득으로 구분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돈이라는 가치 기준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먼저 그런 승패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돈이라는 악마에 사로잡혀 있다.
애초에 승자 그룹과 패자 그룹이라는 말이 생기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자본주의에서는 이기는 회사와 지는 회사, 더 나아가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필연일지 모르지만, 그런 일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나는 자본주의나 돈과 인연을 두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내가 마작 대타 기사를 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뒷세계에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더 강한 상대, 그 세계의 고수를 찾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대타 기사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래서 큰 승부에서 이기고도 보수를 받지 않은 적이 있었다. 승부가 끝나면 라멘 한 그릇을 먹으며 승리의 여운을 맛보았을 뿐이다.
아마 내 본능이 ‘돈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이긴다는 것은 그만큼 패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내가 사지가 온전한 채 살아 있는 삶은 패한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성립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 잔혹함 때문에 나는 마작 대타 일을 그만두었다. 우리는 수많은 피해자 위에 존재하는 가해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에서 성과를 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 낸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내가 돈을 버는 동안 누군가는 돈을 빼앗긴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다’는 정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담력이 되어 살아가는 힘을 줄 것이다.
돈이 없어도 사람은 진지해질 수 있다
나는 젊은 시절 9년 동안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한 적이 있다.
마작을 통해 알게 된 어느 회사 사장이 나를 좋게 보고 “우리 회사에서 일하지 않겠나?”라고 제안했다. 나는 그 사장의 삶의 방식에 공감하고 있었으므로 두말없이 입사했다.
다만 급여는 받지 않았다.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보통은 일하면 돈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존경하는 사장이 인생을 배울 기회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 회사에서 돈까지 받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급여라는 돈으로 내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싫었다.
무급이었지만 아마 회사에서 누구보다 많이 일했다. 실적도 가장 많이 올렸다고 생각한다. 월급이 30만 엔으로 정해져 있었다면 ‘그 돈만큼만 일하면 돼’, ‘이렇게 많이 일했으니 더 받아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돈을 받지 않았기에 돈을 받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돈만을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사장과 함께 일하는 동료를 위해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우리 도장에서는 돈을 걸지 않고 마작을 친다. 돈을 걸지 않으면 진지해지지 않아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도장의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게 마작을 친다. 진검승부에서 돈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진검승부도 있다. 자신을 위해 애쓰는 승부가 아니라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내가 힘쓰는 것이다. 나는 그런 승부도 있다는 사실을 배우기를 바란다.
젊었을 때 나는 돈을 얻는 일이 더럽다고 여겼다. 사람들은 일하고 돈을 받지만, 그것이 어쩐지 더럽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일종의 위화감이나 거부감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돈을 원하고, 그것을 하나의 목표로 삼아 노력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은 많다. 반대로 돈이 아주 많은데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도 많다. 돈을 얻을수록 이번에는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덮쳐 오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돈은 필요할지 모르지만 행복을 판단하는 가치 기준은 아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사실 나는 돈 자체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먹을 것은 어떻게 마련하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바다에 들어가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산에 가면 먹을 수 있는 산나물이 얼마든지 있다.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돈 없이도 살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완전히 잊은 것이 아닐까.
적어도 돈은 편리하지만 소중한 것은 아니라는 점만큼은 잊지 않기를 바란다.
‘손익 계산’이 감을 무디게 한다
‘승자 그룹·패자 그룹’만이 아니다. 세상에는 정말 불쾌한 말이 넘쳐난다. 격차 사회, 편차치, 조기 입시, 입시 전쟁, 교육열에 사로잡힌 엄마, 결혼 활동, 기업 전사……. 이런 말의 이면에는 모두 손익 계산이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세계 역사를 보면 전쟁이 없던 시대는 없다.
그 대부분은 종교 전쟁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원유 이권을 빼앗으려는 손익 계산이 작용한다는 사실도 틀림없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전쟁을 일으켜도 된다는 논리가 잘못임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모두가 전쟁은 악이라고 알면서도 거리낌 없이 ‘입시 전쟁’, ‘기업 전쟁’ 또는 ‘경제 전쟁’이라는 말을 쓴다. 그 모순을 알아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쟁 반대!”를 외치고 “모두 사이좋게 지내자!”라고 말하면서 왜 전쟁을 하는가. 그 무신경함에는 그저 놀랄 뿐이다.
그 배경에도 역시 손익 계산이 있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 좋은 중·고등학교와 좋은 대학, 좋은 회사에 들어가면 앞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손익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 틀림없다.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입시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다.
언론이 함부로 떠들어 대서인지 ‘오주켄(お受験, 유아·초등 입시)’이라는 말은 이미 보통명사처럼 되어 버렸다. 왜 ‘수험’ 앞에 높임말 ‘오’를 붙여야 하는가. 입시가 그렇게나 귀한 일인가.
학문은 정말 흥미가 있을 때 하는 것이지, 미래에 이득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손익 계산 없이 학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든다.
나는 결코 학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며 열등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학문을 넘어서는 무언가, 학문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내 안에 지니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지금까지 제법 잘 살아왔다.
즉 학문이라는 지식보다 더 소중한 것을 안다는 뜻이다.
그것은 본능이다. 인간이 아득한 옛날부터 지녀 온 야성의 본능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성이 그 반대편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보통 학교를 나왔고 대학에도 다녔다. 나름대로 지성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지성은 모두 버렸다. 지금은 되도록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 하지 않고 지성을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휴대전화도 갖고 있지 않고 컴퓨터도 전혀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자격이라 부르는 것도 하나도 없다. 운전면허증조차 없다.
그 대신 사회에 나온 뒤 실제 경험으로 얻은 것, 자연계에서 얻은 것을 한데 섞은 감각을 중요하게 여긴다.
‘기업 전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급여나 승진을 위한 손익 계산이다.
거기에는 자기 회사만 잘되면 다른 회사는 망해도 좋다는 논리가 작용한다. 자신이 손해 보기 싫어 이익을 선택하는 것인가? 남을 끌어내려서라도 나만 성공하고 싶은 것인가?
애초에 올곧은 일만 하면서 성공할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편리함’과 ‘쓸모’로 사람을 보지 마라
돈은 편리하다. 세상을 둘러보면 실제로 그러니 그 사실 자체는 어쩔 수 없다.
진보란 편리한 것을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갈수록 편리한 물건이 넘쳐난다.
돈은 그런 편리를 이용하게 해 주고 손익을 가장 간단히 계산하게 해 주는 수단이다. 그래서 모두 열심히 일해 돈을 손에 넣으려 한다. 우리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감각에 익숙해져 있다.
이 감각은 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번 자기 가슴에 물어보기 바란다.
사귀는 사람을 편리한지, 이용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고르고 있지는 않은가.
“회사에서 인간관계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상담하러 오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서로를 편의와 이용 가치에 따라 고르고 있으니 잘될 리가 없다.
일하는 능력도 이용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아는 대기업 사장에게 “요즘 어때? 괜찮은 부하 직원은 있어?”라고 물었더니 “눈여겨보는 녀석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무엇이 눈에 들어왔다는 말인가. 아마 능력일 것이다.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만 보는 것이다. 결국 사람도 편리함과 쓸모로 판단한다. 회사에 편리한 사람인지, 사장이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따져 고르는 것이다.
내 삶을 돌아보면 나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곁에 있는 도장 식구들이 한없이 귀엽고, 집에 돌아가면 자녀와 손주들이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운 존재와 이해관계를 따질 수는 없다.
도장 직원을 이용하겠다거나 자녀와 손주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세상이 편의와 이용을 좇게 된 것은 틀림없다. 옛날에는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걸어가야 했지만 지금은 자동차가 있고, 신칸센을 타면 두 시간 반 만에 도착한다. 인터넷 역시 원하는 정보를 순식간에 얻을 수 있으니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두기 바란다.
당신이 편리하고 이용하기 좋은 것을 좇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당신을 편리하고 이용하기 좋은 존재로 여긴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편리하고 쓸모 있는 것만 찾는 감각이 몸에 배면 당연히 당신도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 그러면 화가 나지 않겠는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주변 사람이 “너는 참 편리해”라고 말한다면 역시 슬플 것이다.
‘사랑’과 ‘꿈’―아름다운 말일수록 의심하라
이용할 수 있을 때는 ‘사랑’이라 하고, 이용할 수 없게 되면 ‘사랑이 식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만 결국 사랑조차 손익 계산일 뿐이다.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고귀하다고 착각하는 것도 인간뿐이다. 거북이가 사랑이라는 말을 쓰는가? 식물이 사랑이라는 말을 원하는가?
사랑은 대단히 무섭다. 사랑을 강하게 품을수록 그것이 무너졌을 때 증오로 변한다.
즉 아름다운 말에도 불필요한 것이 섞여 있다.
‘꿈’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자”고 자주 말한다. 꿈을 소중히 여기는 교육이 좋다고 하며, 어른에게도 같은 말을 쓴다.
꿈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이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안타깝지만 모든 사람이 그리는 꿈과 희망을 이룰 수는 없다.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애초에 꿈과 희망조차 품기 어려운 사회를 만든 사람은 우리 어른들이다. 그런 어른이 아이들에게 “꿈을 가져라!”라고 말할 자격은 없다. 나는 ‘이런 사회를 만들어 미안하다’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고 아름다운 물고기에는 독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말에는 가시와 독이 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말일수록 의심해야 진실을 붙잡을 수 있다.
나는 ‘반신반의’라는 말을 자주 쓴다.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한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옳다고 여기는 일이라도 절반은 의심해 보는 태도를 몸에 익히는 편이 좋다.
많은 사람이 성공하고 싶다고 말한다. 무엇에 성공하고 무엇을 성공이라고 부르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부분 금전적 수입을 뜻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남보다 많은 돈을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남을 착취한다는 뜻이다.
흔히 “성공하려면 감사하는 마음을 소중히 하라”고 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이념을 내걸라”고도 한다.
말 자체는 올바를지 모르지만 실제 행동은 착취에 불과하다. 정말 세상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원가에 팔면 된다. 그러면 직원의 급여가 사라진다고 한다면 그 몫만 남기고 가능한 한 사회에 돌려주면 된다.
그런데 성공자라 불리는 사람은 대개 좋은 시계를 차고 좋은 자동차를 탄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좋은 집에 살고, 자기 재산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다.
그들이 하는 말과 실제 행동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결국 얼핏 옳아 보이는 말의 이면에도 손익 계산이 작용한다. 남에게 감사하면 자신도 감사를 받는다. 세상을 위해 장사한다고 말하면 신용을 얻는다. 그런 계산이 숨어 있다. 영악한 속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성공 법칙이라 불리는 일종의 사상 뒤편에 있는 것은 단순한 ‘속셈’일 뿐이다.
사상과 종교는 ‘누군가의 의견’일 뿐이다
사상은 무섭다.
사상이나 종교가 생긴 것은 기껏해야 수천 년 전이다.
종교는 왜 생겼을까.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불교든 아득한 옛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인간의 심리, 곧 마음의 이치를 잘 관찰한 사람이 만들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남과 공명하고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른 사람과 일체감을 맛보고 싶어 하는 생물이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종교가 생기기 수만 년 전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열 명, 스무 명 혹은 백 명가량이 무리를 지어 움직였다. 각자의 자유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의 무리로 뭉치려는 본능이 있는 것이다.
사상이나 사고방식, 가르침이 있으면 인간은 무리를 짓기 쉽다. 그것이 옳은지는 상관없다. 아마 인간이 무리 짓고 싶어 하는 성질을 잘 관찰한 사람이 있었고, 그가 종교라는 간판을 내걸었을 뿐이다.
사상과 가르침이 정말 옳다면 종교 전쟁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종교가 생긴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전쟁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자신의 사상과 다른 사람이라면 죽여도 되는가. 어떻게 그렇게 잔혹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요컨대 하나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면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고정관념의 무서움이다. 고정관념에 얽매인 사고는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애초에 세상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백 명이 좋다고 말해도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다르게 행동하면 된다. 남이 내린 좋고 나쁨의 판단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된다.
“저 사람은 좋은 말을 하니 강연을 들으러 가자”, “어느 대학 교수이니 틀림없이 좋은 말을 하겠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것을 ‘좋은 말 병’이라고 부른다.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 사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스스로 찾아 스스로 판단하면 된다.
학문은 단지 매뉴얼일 뿐이다
세상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학문일 것이다.
학문은 단지 매뉴얼에 불과하다. 정해진 것을 배울 뿐인데 “나는 누구보다 학문을 잘한다”고 자랑하는 편이 이상하다.
애초에 학문이 생긴 것은 아주 최근이다. 옛사람은 학문 없이도 살아왔다.
에도 시대에 어느 훌륭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한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학문만 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훌륭했을 텐데.”
나는 그 할머니의 말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 할머니는 학문의 의미조차 몰랐을 것이다. 다만 ‘학문’이라는 말은 알고 있었다. 불과 몇 세대 전은 그런 시대였다.
누구나 학문을 익힐 수 있지만 일정한 단계까지는 매뉴얼일 뿐이다. 그 학문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사람이 사회에 나가면 미래를 보장받았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도쿄대를 나오면 관료나 일류 기업 사원이 되고, 삼류 대학을 나오면 삼류 회사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고졸이나 중졸이면 선택지는 더 좁아졌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며 중졸로도 성공한 사람이 있었겠지만 대체적인 위치는 정해졌다. 학문을 잘하는지에 따라 미래의 방향이 어느 정도 결정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문은 매뉴얼이다. 이미 답을 아는 것을 공부할 뿐이다. 답이 먼저 있으니 시간을 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을 많이 하면 성적이 좋아지고 사람들은 이를 ‘머리가 좋다’고 한다.
그건 거짓이다. 진정한 학문은 답이 정해지지 않은 것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정해진 것을 배우는 것은 학문이 아니다. 정해지지 않은 것을 느끼고 알아보러 가는 것이 진정한 학문의 세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이미 정해진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하지 않다. 앞서 말한 좋고 나쁨도 누군가가 정한 것이다.
매뉴얼에 불과한 학문으로 익힌 좋고 나쁨의 기준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너무나 아깝다.
학력과 경력이라는 간판을 내려라
감각으로는 ‘이렇게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라고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머리로 따진 끝에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하자. 몸은 회사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른 공기를 원하지만, 머리는 ‘회사를 그만두면 앞으로가 불안해’라고 생각해 그 마음을 억누른다.
한번 회사를 나가면 좀처럼 다시 취업하기 어렵다는 지식을 익혀 버렸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다. 극단적인 예일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이익인지 손해인지 머리로 계산해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얻은 지식, 학문까지 포함한 지식이 새로운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학문과 상식과 사회라는 간판을 짊어진 탓에 그것이 짐이 되어 꼼짝하지 못한다.
그런 간판은 내려놓으면 된다. 아이로 돌아가면 된다. 어른인 척 어려운 말을 하고 영리한 체하니 도리어 살기 어려워진다.
어릴 때처럼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으면 자연스럽게 간판을 내릴 수 있다. 누구 앞에서든 바보가 되어 보라. 사장 앞이어도 상관없다. 친구 앞에서는 바보처럼 굴면서 사장 앞에서는 그러지 못하는 것은 상식이라는 간판 때문이다.
‘상식’을 요구하지 않으면 짜증도 나지 않는다
어떤 사회에든 제도가 있다. 폭군이 만든 제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히틀러는 히틀러의 제도를, 마오쩌둥은 마오쩌둥의 제도를 만들고 북한에는 ‘장군님’의 제도가 만들어진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제도가 있다. 당시에는 민주당이 자기 제도를 만들려 했다. 그런 사회 제도의 틀 안에 있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고 모두가 짜증을 낸다.
사회의 상식과 사회가 말하는 ‘올바름’을 따르려다가 스스로 짜증 내는 것은 아닐까. 상식적인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짜증 난 사람이 늘어난다.
그래서 더 엄격한 상식을 요구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범죄가 많다. 교사, 경찰관, 공무원, 은행원처럼 딱딱한 직업의 사람이 치한 같은 성범죄로 달려가기 쉬운지도 모른다.
료칸을 운영하는 지인은 싫은 손님은 대부분 그런 딱딱한 직업의 사람이라고 했다. 유카타나 료칸 비품을 태연히 가져간다는 것이다. 막노동하는 젊은이들은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데 어느 학교 교사 단체는 아무렇지도 않게 훔쳐 간다고 한다.
교사나 공무원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억압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다. 제도와 형식에 묶인 나머지 나쁜 쪽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데 그쪽으로 가 버린다.
인간 안에는 일종의 ‘자유로움’이 있다. 누구에게나 있는 인간의 자유가 틀과 부딪힐 때, 틀 안의 사람은 선을 넘어 죄를 짓는지도 모른다.
만들어진 틀에서 조금씩 벗어나 놀 수 있었다면 죄까지 저지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틀 안에서 답답하게 억눌렸기 때문에 어느 순간 크게 선을 넘어 버린다.
사회 제도라는 상식을 만드는 위치의 사람이 그 제도를 어기는 측면도 크다. 제도를 잘 아는 만큼 빠져나갈 길도 잘 알며 자신들만 아는 빠져나갈 길에 머물고 싶어 한다.
이를 ‘범죄 직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범죄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경계에서 출세하고 돈을 버는 사람이 많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도 그랬을지 모른다. 국회의원이나 대기업 경영자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죄 깊은 일을 한 위에서 모두 성공한다. 성공은 죄 깊은 일 위에 성립하며, 정도가 지나쳐 범죄가 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토록 나쁜 사회에서 올바른 일만 하며 성공할 리 없다. 사회가 좋다면 제대로 된 사람이 성공하겠지만, 지금 세상을 보며 누구나 나쁜 사회라고 생각할 것이다. 날마다 “지금 사회는 정말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짜증을 내거나 스트레스를 쌓을 리 없기 때문이다.
명확히 의식하지 않아도 왠지 짜증이 난다는 것은 몸이 사회가 나쁘다고 느낀다는 증거다.
그런 나쁜 사회의 성공자가 되어서 무엇 하겠는가.
“나는 악인이 되려 합니다”라고 공언하는 것과 같다. 《악인》이라는 영화가 유행하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여겨야 한다.
‘재미있는가, 재미없는가’를 기준으로 고른다
사회의 상식이라는 간판을 내렸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까.
그것은 ‘재미있는가’이다.
‘재미있다’, ‘즐겁다’, ‘웃긴다’를 기준으로 고르면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온다. 그런 것을 기준 삼아 좋고 나쁨을 스스로 느끼면 된다.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이는 무척 단순하다. 싫은 일을 하면 누구나 재미없는 표정이 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환하게 웃는다.
이성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무척 기쁘고 차 한 잔만 있어도 몇 시간이고 즐겁게 보낼 수 있다. 반대로 싫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받아도 고통스러운 시간일 뿐이다.
동성도 마찬가지다. 상대에게 즐거운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이 있음으로써 모두의 표정이 밝아지고 다 함께 웃을 수 있다면 누구나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하며 살고 싶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못하면 내가 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에서 앞장서 장난을 치다 선생님께 자주 혼났다. 그래도 친구들은 좋아했다. 나중에는 선생님도 ‘이 녀석 참 재미있네’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지금도 변함없다. 도장에서도 내가 앞장서 바보 같은 일을 한다. 도장 식구들 앞에서 일부러 바보 같고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마작 대회에 나갈 도장생이 잔뜩 긴장하면 화장을 시켜 주기도 한다. 내가 늘 다니는 미용실에 도장생이 오면 역시 화장을 시켜 모두를 즐겁게 한다.
나는 페트병 뚜껑을 여는 것도 서툴다. 비트는 동작이 잘 안 되는데 그런 못난 부분을 감추지 않고 “페트병 하나 못 열다니 나도 참 못났지”라고 말한다.
“회장도 이런 바보 같은 일을 하는구나”, “회장도 이런 못난 점이 있구나”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진짜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이는 내가 벌거벗는 일이기도 하지만 도장생들도 바보가 되고 못난 점이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바보 같은 일’과 ‘못난 점’은 머리로 멋대로 규정한 경우가 많다. 조금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못난 점이 있어도 괜찮다. 사회의 상식으로 생각하니 “바보 같은 짓을 하면 안 된다”가 된다.
상대가 기뻐하는 얼굴을 떠올리며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를 생각한다면 정말 어리석고 못된 일을 할 리 없다. 그것이 벌거벗는 것이고 솔직해지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
2011년 새해에 도장생들이 신년 휘호를 썼다. 그중 1등을 한 작품을 소개한다.
도장에는
‘돈’은 없지만 ‘마음’이 있다
‘법률’은 없지만 ‘길’이 있다
‘교육’은 없지만 ‘배움’이 있다
‘수입’은 없지만 ‘기쁨’이 있다
‘효율’은 없지만 ‘감정’이 있다
‘과거’도 ‘미래’도 없지만 ‘지금’이 있다
‘신’은 없지만 ‘귀신’이 있다
아무것도 없지만 전부 있다
이 시를 쓴 아이는 도장에서도 배운 것이 적은 아이다. ‘효율’이라는 한자를 틀리게 썼을 정도다. 그래도 이렇게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이런 멋진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우리 도장에는 일류 대학 출신도 있지만 이 시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했다. 배움이 오히려 방해가 될 때도 있다. 이틀가량 생각해 낸 도장생도 있었지만 전혀 좋지 않았다.
깊이 생각하고 머리를 쓰는 것보다 마음에 떠오른 것을 가볍게 적는 편이 나을 때가 많다. 이 시를 쓴 아이도 순간적으로 떠올라 썼다고 했다.
결국 꾸미지 않은 본모습으로 돌아가 솔직해지는 편이 좋다는 뜻이다.
우리 도장에는 도쿄대나 히토쓰바시대 같은 일류 대학 출신부터 이 시를 쓴 막노동꾼, “도둑질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아이까지 여러 사람이 있다.
나는 학력 같은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보통은 ‘도쿄대 출신이 더 좋은 아이’라는 고정관념과 기준을 만들지만 나는 모두를 대등하게 본다. 유연성을 의식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이나 기준에 묶이지 않고 판단할 수 있다. 누구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될 수 있는 곳이 우리 도장이다.
더 나아가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 거짓말도 꾸미지 않은 인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얼버무리는 모습도 인간의 본모습이라는 말이다. 약하고 못난 부분을 모두 아울러 ‘있는 그대로의 나’다.
조금이라도 좋아 보이려 하니 오히려 본모습이 사라진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지 않을까.
있는 그대로 지낸다는 것은 몸에서 힘이 빠졌다는 뜻이다. 필요 이상으로 애쓰는 모습을 보이려 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면 일이 결코 잘 풀리지 않는다.
늘 힘을 빼고 편안히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을 그르치지 않는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만 보아서는 해결 방법을 감지할 수 없다.
마작으로 말하면 자기 패만 바라보는 것과 같다. 상대가 버린 패, 표정과 몸짓을 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이 역시 긴장을 풀지 않으면 꿰뚫어 볼 수 없다. 사물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것보다 편한 일도 없다.
프로도 못 하지만 아마추어라서 할 수 있는 일
일본어로 ‘꾸밈없는 사람(素の人)’이라고 쓰면 ‘초보자(素人)’가 된다.
나는 아마추어, 즉 초보자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한 가지를 끝까지 파고드는 편이 좋다”고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전문가는 그 분야의 지식을 대량으로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나는 지식보다 몸으로 느끼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문가는 한 분야의 오타쿠나 마니아이기도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긍정한 채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전문가가 되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든 초보자로 있는 편이 좋다.
나는 그림도, 바다에서 잠수하는 것도, 마작도, 아이와 노는 것도 초보다.
얼마 전 다섯 살 손주가 목을 다쳤다. 병원에서는 일주일쯤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한밤중에 손주의 집으로 곧장 갔더니 목에 깁스를 해서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감으로 ‘병원에 입원시킬 수는 없겠구나’라고 느꼈다. 부모도 힘들고 손주도 가엾었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며 직접 돌봐 주었다. 내게는 자격도 치료 도구도 기술도 없었다. 지식은 하나도 없었지만 감각만으로 손을 댔다.
손주가 아파하는 본능이 내게 전해진다. 그러면 어디를 만져야 할지 감이 응답한다. 감각끼리 주고받는다고 해야 할까. 그곳을 만져 주면 ‘이제 괜찮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예상대로 손주는 입원하지 않았고 이틀 뒤 완전히 나았다.
이런 일은 자주 있다. 몸의 어디가 나쁜지 어렴풋이 느낄 때가 있다. 오랫동안 허리가 아팠던 사람을 낫게 한 적도 있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된 적도 있다.
나는 정체술을 익힌 사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초보다. 그 지식과 기술을 배우면 배울수록 오히려 지식이 방해한다는 사실을 안다. 불필요한 지식은 ‘병원에서 이런 치료를 해야겠군’이라는 선입견을 만들 것이다.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비로소 ‘아는’ 것도 있다.
전문가가 되면 돈을 받게 될 것이다. 내 기술을 이용하면 큰돈을 벌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돈을 받는 순간 제대로 해야 하므로 정식 지식과 기술을 익혀야 할 것이다. 의료 면허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불필요한 공부를 해야 한다.
돈을 받으면 이 감각이 흐려질 것 같아 나는 무료로 한다. 대가를 받지 않는 초보자이기에 여러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재능은 돈에 팔지 않을 때 가치가 있고 본능으로 남는다. 개나 거북이도 다치면 스스로 낫는다. 애완견은 주인이 병원에 데려가므로 이 힘을 잊지만 들개는 스스로 나아야 한다. 야생동물은 타고난 본능을 따를 뿐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도 ‘초보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바보’보다 ‘열 가지 바보’가 되어라
무언가를 끝까지 파고들고 싶다면 한 가지가 아니라 열 가지를 파고들어라. 나는 “한 가지 바보가 되지 말고 열 가지 바보가 되어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보란 외곬 전문가가 아니다. 지식·기술·학력·자존심·체면·약점의 콤플렉스처럼 자신에게 붙은 것을 모두 벗어 던져 본모습으로 돌아간 사람이다.
한 가지 바보는 그저 바보지만 열 가지 바보는 있는 그대로, 자유자재로 바보가 된다. 그런 사람은 늘 긴장을 풀고 살며 영리한 사람과 외곬 전문가가 못 보는 것을 본다.
내가 앞장서 바보짓을 하고 도장생에게도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일에 유연하고 어려움에 대응하려면 본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언가를 극한까지 닦고 싶다면 바보를 닦아라. 앞으로 일본을 구할 사람도 ‘바보 중의 왕’일 것이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을 바라본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는 데만 집착해 왔다. 전쟁 직후에는 도시락과 장난감도 없고 야구 글러브를 가진 아이도 드물었지만 해 질 때까지 놀았다. 고도성장기에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들어오며 물건을 얻는 일이 사치의 상징이 됐다. 지금도 명품과 좋은 차를 사고 신상품을 줄 서서 구한다.
그토록 얻는 데 집착하는 것은 잃을까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잃는 것’을 진지하게 마주해야 한다. 사람은 죽으면 재산과 토지를 포함해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남기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얻기보다 잃기가 자연스럽다. 가진 것을 잃어도 살 수 있음을 알면 불안에서 해방된다.
마작은 한 장을 뽑고 한 장을 버려 완성을 향하는 게임이다. 무엇을 버리는지에 성격이 나타난다. 결과만 좇는 사람은 남의 기색을 무시하고 필요 없는 패를 버리고, 패배가 두려운 사람은 안전한 패만 쌓으며,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은 확률로 고른다. 마작은 버리는 게임이다.
작귀회는 올바르고 아름답게 버리는 일을 중시한다. 처음에 자패를 버리지 않는 규칙도 있다.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것을 맨 먼저 버리는 행위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을 잘라 내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1초 규칙’도 있다. 패를 1초 안에 버리며 결단력과 선견력을 기른다. 뽑은 뒤 생각해서는 늦다. 앞을 읽고 여러 선택지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보통 한 시간인 반장이 우리 도장에서는 15분이면 끝난다.
버리는 동작이 아름다우면 생각도 단순해진다. 몸과 사고는 이어져 있어 생각이 붙잡히면 몸도 매끄럽지 않다. 결단은 하나뿐이니 단순한 순간으로 나타내면 된다.
마음은 거짓말해도 몸은 못 한다. 거짓은 반드시 움직임에 나타난다. 사람들은 몸이 자유롭지 않은데 마음의 자유를 구하지만 순서가 반대다. 몸이 자유로우면 마음과 생각도 자유로워진다.
패를 놓는 소리에서도 겁, 망설임, 흥분을 읽을 수 있다. 상대의 생각이 손에 잡히듯 보인다. 이런 규칙은 버리고 잃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기 위한 것이다.
‘매달림’의 무서움
초기 문명은 물건을 되도록 쌓지 않았다. 마야인도 한곳이 오염되거나 물이 마르면 옮겨 새 도시를 만들었다. 이동하려면 짐이 적어야 한다. 한곳에 고정되면 물건을 쌓는다.
인간은 20만 년 동안 걸으며 살아왔다. 몽골 유목민은 최소한의 도구만 가지고 게르를 옮기며 가축과 산다. 그런데 울란바토르가 근대화해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늘자 집 안이 물건과 쓰레기로 가득한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이것이 고정됨의 무서움이다.
고정된 것은 반드시 무너진다. 1844년 창업한 리먼 브러더스도 파산했다. 역사상 무너지지 않은 것은 없다. 야마타이국, 에도 막부, 대일본제국도 사라졌다.
지금 일본도 위기에 있다. 그동안 너무 많이 빼앗은 만큼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런 일본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아무리 쌓아도 언젠가 사라지거나 사회가 무너져 소유의 의미가 없어진다. 이를 알면 한곳에 고정돼 축적하는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올바름’은 시시각각 변한다
무엇이 옳고 틀렸다고 단정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흑인이었지만 얼마 전까지 상상할 수 없었다.
미국은 19세기 전반까지 아프리카인을 노예선으로 끌고 와 중노동을 시켰다. 사람을 편리한 도구로 다뤘다. 지금은 가엾다고 말하지만 당시에는 옳거나 적어도 틀리지 않은, ‘필요한’ 일로 여겼다.
이제는 오바마가 미국에 필요해 대통령으로 뽑혔다. 불과 200년에도 올바름의 기준은 변한다. 그러므로 지금 옳다고 하는 것에 붙잡혀서는 안 된다.
누군가 멋대로 만든 ‘올바름’을 신경 쓰지 마라
지식, 권력, 성장, 사랑은 지금 세상이 옳다고 하는 것들이다. 인간의 머리가 만든 것에 매달리는 사람이 얼마나 약한지 사람들은 모른다. 옳음에 붙잡혀 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옳다고 배워 모두 노력에 매달린다. 그러나 누군가가 몸에 매달리면 답답한 것처럼 집착은 보기 흉하다. 살짝 닿는 정도가 알맞다. 마사지도 세게 누르기보다 가볍게 닿을 때 좋다. 사랑과 권력도 같다.
“매달리면 무언가가 된다”는 거짓말이다. 성공한 사례는 복권 당첨과 같다.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해 매달리지만 고통만 겪고 아무것도 못 얻는다.
두 사람이 서로 팔을 힘껏 잡고 빼려 하면 힘과 힘이 맞부딪쳐 움직이지 못한다. 한쪽이 자유를 얻으려 할수록 다른 쪽은 더 버틴다. 헛된 ‘인력(人努力)’이다.
반대로 가볍게 닿을 정도로 잡으면 상대의 움직임에 온몸으로 유연하게 맞출 수 있다. 잡으려 들면 못 잡고, 매달리면 얻지 못한다. 나는 합기도가 아니라 내 몸에서 이를 배웠다. 힘이 없을수록 미세한 변화에 대응하기 쉽다.
세상이 옳다고 하는 것에 매달리지 마라. 매달림은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든 상태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가치에 붙들리면 변화했을 때 대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신이다.
자신감은 자아를 ‘지우는 것’에서 생긴다
세상이 옳다고 하는 것에 붙잡히지 않는 것은 ‘지우는’ 행위다. 지식, 학문, 상식, 권력, 돈, 사랑과 ‘노력해야 한다’, ‘성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관념을 지워라.
모든 것을 벗고 본모습으로 살며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상태에 서면 살아갈 자신감이 솟는다. 두려울 것이 없는 최강의 상태가 된다.
그러려면 자아도 지워야 한다. 사람들은 남에게 없는 자기 가치, ‘넘버원이 아닌 온리원’을 좇는다. 여기서 자아는 멋지고 예뻐 보이고 싶다는 욕망을 숨긴 에고다.
에고는 겉모습일 뿐이다. 아무리 고급 옷으로 꾸며도 비뚤어진 심성은 몸에 드러난다. 겉만 꾸며 진짜 자신을 숨기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든 것을 지웠을 때 추한 나가 나타나도 받아들여라. 싫은 모습을 못 본 척하지 말고 그런 내가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한번 거짓말하면 다음 거짓말로 덮어 결국 거짓으로 굳힌 자신이 된다.
에고를 지우고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는 것이 본래 모습이다. 이를 드러내고 쌓아 온 지식과 재산을 버리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운 순간 ‘그래도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반드시 싹튼다. 그것을 몸으로 느끼기 바란다.
제2장
‘자연의 본능’으로 돌아가면 감이 날카로워진다
사는 데 필요한 것은 모두 자연에서 배웠다
내게는 스승이 없다.
대학생 때 친구를 따라 신주쿠의 마작장에 처음 갔을 때 나는 마작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이해했다. 사실 아버지가 마작에 빠져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았기에 마작을 미워했다.
친구가 버릴 패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왜 고민하지?’라고 의아해했다. 규칙과 점수는 몰랐지만 게임의 움직임은 알았다. 탁자에 앉자 쉽게 이겼다. 입문서나 스승 없이 관찰하고 발견해 내 방식을 세웠다.
그 본질을 본 것은 사물을 꿰뚫는 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자연과 함께 자랐고 타잔과 로빈 후드를 꿈꿨다. 강에서 자주 놀아 수영을 잘하며, 몸의 유연함과 균형 감각도 강놀이로 단련됐다. 자연에서 놀면 몸이 자연에 맞게 적응해 움직이는 법을 익힌다.
몸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자연스러운 몸이 감각과 본능을 깨운다. 지구 생물 중 인간만 자연을 거슬러 풍요를 추구한다. 100엔만큼 풍요로워지며 1,000엔만큼 마음의 병과 뒤틀림을 얻지는 않았는가.
자연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본능을 되살린다. 그러니 내게 스승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다. 내 스승은 자연과 제3장에서 말할 아이다.
인간보다 동물이 더 올바르다
올바른 인간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나는 물고기, 새, 식물에서 올바름을 찾는다. 그들은 선악과 관계없이 살기 때문이다.
자연의 생명이 사는 방식을 보면 인간이 이상해 보인다. 나 역시 올바르지 않기에 올바른 것에서 배운다. 물고기와 나뭇잎 한 장도 올바르다.
인간은 좋고 나쁨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유명한 사람이 낫토가 좋다고 하면 낫토를 사고 블루베리가 눈에 좋다고 하면 마트에서 사라진다. 자연계에는 이런 유행이 없다.
생명을 지키는 일은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원하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이 야성의 본능이며 야성에는 정의조차 없다.
생명을 받을 때 원래 있던 것은 나중에 배운 지성이 아니라 야성의 본능이다. 자연에서 배운 본능, 자신이 가진 본능을 소중히 하라. 이를 가르치는 자연이야말로 올바르다.
‘야성의 감’은 누구에게나 있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난 동물이므로 누구나 야성의 감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가 도박에서 크게 이기는 ‘초심자의 행운’은 왜 생길까. 욕심이 없어서라지만 초보자도 큰돈을 원하는 욕망은 있다.
나는 무의식의 감으로 승부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초보자는 정보와 정석, 즉 상식과 지식이 없어 본래의 감에 의지한다. 쓸데없는 생각 없이 감에 몸을 맡기므로 이긴다.
누구나 가진 야성의 감에 몸을 맡기려면 상식과 지식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의 감은 무뎌졌으므로 갑자기 버린다고 잘되지는 않는다. 감을 되살리고 닦아야 한다.
대자연 속에서 자연의 본능을 불러내 야성의 감을 닦아라. 그러면 감이 날카로워져 본질을 볼 수 있다. 나는 진보를 더 밀기보다 되돌아가기를 권한다.
자연의 변화를 관찰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첫걸음은 자연의 변화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늘 같은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옮겨 가고 변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변화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호주 대륙을 계속 달리는 새가 있다. 비구름을 찾기 위해서다. 건조한 호주에서 물은 매우 귀하므로 새는 비가 올 기미와 공기의 변화를 감지하며 달린다. 기다려도 비가 오지 않으니 스스로 비구름을 찾아 나서는 것이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반대로 농경은 변화를 기다리는 방식이다. 어느 쪽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기다리는 일도, 움직이는 일도 필요하다. 두 방식의 공통점은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면 대응할 수도 없다.
마작을 하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한 번 패를 낼 때마다 시시각각 변화가 일어난다. 나뿐 아니라 상대 세 사람까지 네 사람의 변화가 동시에 진행된다. 우리는 그 변화에 대응해 다음 수를 둔다.
따라서 내 변화와 내 패만 보아서는 안 된다. 상대의 변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변화까지 느끼고 대응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연의 변화를 바라보라. 다행히 일본에는 사계절이 있다. 봄의 벚꽃과 새싹, 신록과 장마 같은 계절의 흐름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
더 가까운 변화를 보아도 좋다. 늘 걷는 길에서 오늘 핀 화려한 꽃보다 남들이 놓치는 잡초를 발견하는 감성이 중요하다.
석양과 바다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기는 쉽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태풍을 보며 “태풍의 힘은 대단하구나”, 거친 파도를 보며 “바다가 제법이군”이라고 느끼기는 어렵다.
태풍은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만 바다를 씻어 주기도 한다. 육지의 나무가 산소를 공급하듯 바다에서는 산호초가 그 역할을 하는데, 태풍이 오지 않으면 산호초가 죽는다.
자연 현상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 인간의 편의와는 다른 의미다. 자연이 일으키는 일의 의미를 헤아리면 인간이 하는 일의 잔혹함과 잘못을 깊이 느끼게 된다.
자연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데 그치지 말고 자기 안에 받아들여 보라. 자연과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자연의 방식을 이해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마주하면서 자연의 본능과 솔직함을 배우는 것이다.
상어와 헤엄치며 감성을 닦는다
나는 바다에 잠수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바다 생물을 보고 있으면 즐겁고 자연 속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어디에 물고기가 있는지 보인다. 하지만 내가 “저기에 가자미가 있어”라고 말해도 젊은이들은 바위밖에 안 보인다고 한다. 바위 위의 문어는 바위와 같은 색과 모양으로 변해 살아남는다.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보는 능력’을 시력이라는 숫자로 재지만 멀리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면의 움직임에서 해저의 조류를 보고, 물의 흐름에서 물고기의 움직임까지 읽어야 한다.
대자연에 들어가면 내 안에도 그런 감각이 남아 있음을 안다. 억지로 감각을 날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들어가면 저절로 그 감각을 사용한다. 그런 감각을 가진 나 자신을 실감하는 일이 나는 좋다.
대자연에 몸을 두고 본능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놀면 몸이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하다.
바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생물은 상어다. 상어를 만나려고 팔라우 바다에 자주 잠수한다.
인간이 대자연에서 공포를 느끼는 것은 방어 본능이므로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그 공포를 넘고 싶다. 공포를 넘으려면 안전한 방향으로 도망칠 것이 아니라 더 무서운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망은 극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물고기가 상어이므로 나는 상어를 찾아 맨몸으로 바다에 든다.
‘위험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감각은 가장 날카로워지고 무언가를 배울 기회가 생긴다. 갑자기 상어가 나타나는 순간이 내게는 참을 수 없는 쾌감인 이유다.
안전한 상태에서 다루는 문제는 책상 위 학문과 같아 실전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험 속에서야 공포심, 순간적인 신체 능력과 사고력, 자기 감각에 몸을 맡기는 용기의 문제를 볼 수 있다.
위험한 순간은 기억에도 오래 남고 나중에는 웃을 이야기가 된다. 상어가 무서웠어도 다시 만나고 싶다면 벽 하나를 넘은 셈이다. 위험한 상황을 즐기는 감각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바다에 잠수하는 일이 너무나 즐겁다. 파티에서 훌륭하다는 사람을 만나도 전혀 즐겁지 않다. 성공한 사람보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놀며 ‘본모습’을 되찾는다
작귀회는 20년 넘게 해마다 여름이면 바다 합숙을 한다. 마작 합숙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노는 합숙이다. 마작패도 가져가지 않고 모두 큰방에서 함께 잔다.
첫 합숙은 하치조섬에서 했다. 당시 멤버는 전직 불량배가 많았고 바다 놀이를 몰랐다. 잠수는커녕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 호텔 수영장에서 연습한 뒤 바다에 나갔다.
내가 그들을 바다로 데려간 것은 자연 속에서 어린 시절의 놀이를 경험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시 어른의 유흥이 아니라 자연에서 노는 법을 전하고 싶었다.
나는 술을 못 마시며 옆에 아름다운 여성이 있어도 도시의 유흥을 재미있어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놀이는 자연 속의 놀이였다.
자연에서 아이처럼 노는 일이라면 진짜 아이에게는 질지 몰라도 어른 가운데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래서 몸으로 자연과 노는 기쁨과 모험의 재미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 놀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아이도 있었다. 부모에게 배우지 못했거나 가까이에 자연이 없었을 것이다. 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 형제들과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도 있었다.
나는 부모를 대신하려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 놀이를 전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들의 눈이 생생해지는 모습이 기뻤다.
초기 합숙에서는 잠수하지 않고 해변에서 비치발리볼과 비치 플래그를 하며 놀았다. 사회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 공간을 주고 싶었다.
이제는 모두 바다에 잠수해 물고기를 잡는다. 그날 저녁은 함께 잡은 쏨뱅이, 쥐치, 가자미 같은 물고기로 만든다. 필요한 만큼만 잡아도 신선한 생선은 충분히 맛있다.
참가자의 모습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사회에 반항하던 전직 불량배가 많았지만 지금은 마음이 꺾이기 직전인 젊은이가 중심이다. 학교와 직장이 있어도 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외로움과 환멸을 느끼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대자연과 마주하는 일은 처음에는 공포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자연은 자신이 솔직해지는 곳이며 도시에서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거짓으로 굳힌 인공 도시에서 본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자연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거나 자신을 꾸밀 필요가 없다. 물고기가 칭찬하지도, 바다가 인정해 주지도 않는다.
한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다. 바닷속에서 물고기의 움직임에 감각을 집중하면 지금까지 쌓은 지식과 상식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전체를 바라보는 힘을 기른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눈에 힘이 없는 사람이 많다. 눈빛이 매서운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눈빛이 날카로운 사람은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마작에서도 눈빛이 매서운 사람은 대단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정말 강한 사람은 부드럽고 눈을 뜬 듯 만 듯했다.
그렇다고 멍한 것이 아니다. 시각을 되도록 적게 쓰고 다른 감각을 온전히 활용한다. 자기 패와 상대의 버림패를 눈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리의 흐름과 공기를 읽는다. 그것이 마작에 강한 사람의 특징이었다.
나는 이를 전체를 한눈에 바라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힘이 없는 사람은 모든 일에서 한 점밖에 못 보는 사람이다. 한 가지를 계속 응시하니 눈이 피로하다. 게임, 인터넷, 휴대전화가 원인일 수도 있고 한 가지만 끝까지 파라고 배우며 자란 탓일 수도 있다.
현대 사회가 시각과 사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틀림없다. 한 점만 응시하지 말고 여러 각도에서 전체를 파악해야 한다.
옛날에는 눈이 피로하면 먼 산을 바라보며 쉬었다. 하지만 도시는 어디를 보아도 빌딩뿐이고 사람이 사는 곳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눈을 쉴 곳이 없다는 것은 정신을 쉴 곳도 없다는 뜻이다.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당연하다.
시각에만 매달리지 않고 오감으로 느끼면 오히려 눈에 힘이 생긴다.
나는 전체를 하나의 피사체로 멀리서 바라보고 그 안에 위화감이 있는지 느끼려 한다. 바다에서 문어나 가자미를 찾을 때도 넓은 시야로 바닷속 전체를 본 다음 어색한 지점을 찾는다.
위화감은 상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쪽이 부자연스러우면 물고기가 먼저 달아난다. 자연의 생물은 각자의 감각과 기관으로 위화감을 필사적으로 알아채 자신을 지킨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이 이 감각을 잃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그러므로 눈에 힘이 없는 젊은이를 탓할 수 없다. 자연을 파괴한 사회와 우리 어른이 잘못했다. 어른이 젊은이를 꾸짖을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왜 인간만 우울해지는가
정신적으로 지친 끝에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이 많다. 우울증에 걸리면 사회로 돌아오기 어렵다. 이제는 정식 질병으로 인정하지만 애초에 우울증이라는 현상 자체가 이상하다.
자연의 생물은 이삼 일, 때로 일주일 동안 먹이를 얻지 못하기도 한다. 굶어 죽을 수는 있어도 우울증에 걸리지는 않는다. 먹느냐 죽느냐의 문제에 놓여도 마음의 병에는 걸리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나는 인간이 멋대로 만든 것 때문에 마음이 병든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가 학력·매출·성과처럼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고다.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사회 풍조가 결과를 내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해친다.
능력만 좇으면 일종의 산소 부족 상태가 된다. 산소가 희박한 산 정상에서 걸리는 고산병과 비슷하다. 결과만 추구하면 긴장 탓에 호흡이 얕아지고 뇌에 산소가 충분히 가지 않는다. 머리가 하얘지고 갑자기 회사에 가기 싫어지기도 한다.
우울증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든 병이라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인간이 자기 목을 조르는 셈이다.
따라서 우울증을 없애려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의 세계에는 우울증 자체가 없으니 당연하다.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거나 바다거북과 어울리며 우울해지는 사람이 있겠는가.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런 뜻이다.
‘먹느냐 먹히느냐’를 의식한다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은 사회가 아니라 자연의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으로 결정된다. 사회 제도는 언젠가 무너진다. 조금 망가졌다고 큰 소동을 벌이는 것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히스테리 상태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늘 일어나며 사회는 짧은 주기로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면 소란을 피우지 않고 상황을 침착하게 볼 수 있다.
바퀴벌레가 나왔다고 소리치는 것도 ‘더럽고 징그러운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공포는 고정관념으로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공포 자체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 자연의 본능이다. 자연의 생물은 약육강식 속에서 언제 자기가 먹힐지 모르는 채 살아간다. 식물과 물고기까지 다른 생명을 먹으며 사니 자신도 언제 먹힐지 안다. 그래서 감각이 날카롭다.
인간만은 자기가 먹히지 않는다고 여긴다. 잡기만 하므로 감각이 무뎌지고 지식으로 얻은 고정관념에 따라 제멋대로 공포를 만든다.
들고양이가 바퀴벌레를 무서워하겠는가. 바퀴벌레에게 잡아먹힐 것도 아닌데 인간은 두려워한다. 참으로 부자연스럽다.
바닷속에서는 늘 목숨을 건다. 상어에게 먹히거나 큰 파도에 휩쓸려 바위에 부딪힐 수도 있다. 목숨을 걸기 때문에 감성을 날카롭게 해야 한다. 내가 바다에 들어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인간 사회에는 목숨을 건 생존 경쟁이 없다. 성적과 승진, 스포츠 경쟁에서 져도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만 생명의 위험을 느낄 수 있다.
‘공복감’을 지닌다
대타 기사 시절에는 승부가 클수록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충분히 잠들지도 못했다. 몸이 달아오르고 비틀거리는 상태가 승부 일주일 전부터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감이 날카로워지고 내 안의 야성 본능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생명이 위험할수록 야성이 깨어나는 것일 테다.
단식은 오늘날 건강법으로 쓰이지만 본래는 자기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기 위한 수행이 아니었을까. 단식하면 음식의 고마움을 알고 수많은 생명을 받아 내가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다른 생명에게 노려질 일이 없으므로 많은 생명을 받아 산다는 사실도 잊는다. 자연의 본능을 되살리려고 단식이라는 방법이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내가 ‘작귀’라 불리던 때에는 상대 패가 비쳐 보이는 듯한 순간이 있었다. 실제로 투시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표정·몸짓·긴장에서 패의 종류를 알았다는 뜻이다.
그런 감각을 만들려고 몸이 자연스럽게 음식과 물을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내 안의 야성이 그것을 원했을 것이다.
복서가 경기 전 감량하는 것도 체중 제한과 싸울 몸을 만드는 일뿐 아니라 야성을 깨우는 의미가 클 것이다. 혹독하게 감량한 복서의 눈은 짐승처럼 날카롭다. 상대 주먹을 순간적으로 피하려면 그만큼 감각을 닦아야 한다.
복싱은 스포츠지만 옛날로 치면 결투이며 생사의 세계다. 그런 곳에서 계속 이기려면 야성, 곧 헝그리 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갑자기 단식하고 감량한다고 곧장 야성이 깨어나는 것은 아니다.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
나는 어린 시절 놀이 속에서 감각을 단련했다. 바위에 숨은 물고기를 잡으려면 거기에 물고기가 있다는 느낌을 먼저 받아야 한다. 시각만으로 찾아서는 발견할 수 없다.
오감을 온전히 쓰고 물고기의 기척을 느껴야 하며 인간의 본능도 활용해야 한다. 그 본능이 바로 공복감이다. 인간도 야생동물이므로 배가 고프면 먹이를 구하려는 본능이 깨어난다. 배고플수록 사냥감을 더 잘 찾는다. 바로 생사의 세계다.
잡초의 삶이 가장 멋지다
나는 잡초야말로 이상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잡초는 자기 가치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꽃집의 아름다운 꽃은 인간이 멋대로 정한 가치일지라도 자기에게 가치가 있음을 아는 듯하다. 치장해 이성에게 잘 보이려 하고 노력의 결과를 칭찬받고 싶은 인간과 닮았다.
잡초에는 그런 면이 없다. 돋보이려 하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질투하거나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본모습으로 산다.
사람들이 길가 잡초를 보지 않는 것도 잡초가 자기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몰래 피고 남몰래 시들며 남몰래 자손을 남긴다. 이 얼마나 이상적인 삶인가.
세상은 자기주장을 하는 편이 좋다고 말하지만 옆에서 보면 보기 흉하다.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은 스스로 선전하지 않는다. 자신 없는 사람일수록 큰 소리로 짖는다. 잡초는 자기 자리를 알기에 나서지 않는다.
잡초의 매력은 그뿐이 아니다. 밟히고 뽑혀도 뿌리를 내리고 버틴다. 어떤 역경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강함이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힘이다.
실패와 실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거기서 도망치는 것이 나쁘다. 힘들다고 곧장 회사를 그만두거나 학교를 거부하고 방에 틀어박히려는 사람은 길가의 잡초를 보라.
잡초처럼 강인하고 멋지게 살기 바란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에서 달아나지 말기 바란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일한다
오늘날 사회에는 머리를 쓰는 일이 많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이란 몸을 써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렵 시대에는 먹이를 잡으려고 몸을 썼다. 먹이가 있을 곳을 생각하고 덫을 놓는 등 머리도 썼겠지만 몸도 함께 사용했다. 옛날부터 몸으로 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만으로 먹고사는 시대가 됐다. 몸을 거의 쓰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느껴야 한다.
머리만 써서 일한 뒤 돈을 내고 헬스장에 가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다. 일할 때 몸을 더 쓴다면 그런 부자연스러운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저는 매주 달립니다”라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게는 무엇을 자랑하는지 모르겠다. 일부러 달려야만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함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머리와 몸을 모두 써야 한다. 균형이 중요하다. 평소 몸을 안 쓰는 회사 사장 가운데 마라톤과 헬스장을 즐기는 사람이 많은 것도 당연한 결과다. 본능이 몸을 움직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자랑이 아니라 “내 몸은 건강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육체노동자와 장인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어느 날 여든 살쯤 된 할머니가 고장 난 우산을 들고 장인을 찾아와 “오래전에 산 우산인데 고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50년 전에 산 우산이었지만 장인은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고, 자신이 언제 만든 우산인지도 기억했다.
몸과 마음과 혼으로 우산을 만들었기 때문에 50년이 지나도 기억한 것이다. 나는 그런 혼을 가진 장인을 좋아한다. 우산 하나를 50년 동안 아껴 쓴 할머니도 대단하다.
지금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대다. 달리 말하면 쓰레기를 많이 내는 것이 좋은 시대다. 특히 비닐우산이 나온 뒤 우산도 일회용품처럼 됐다. 일본에서 같은 우산을 50년 쓰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다.
그처럼 혼이 담긴 교류를 나누는 것이 일의 참맛 아닐까.
돌멩이 하나로 몇 가지 놀이를 만들 수 있는가
거리를 걸으면 대부분 재미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퇴근하는 직장인의 얼굴은 떫은 감처럼 일그러져 있다.
“웃는 집에 복이 온다”는 말이 있다. 다들 복이 없어 그런 얼굴을 하는 것 아닐까.
술을 마시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웃으라는 뜻이 아니다. 나는 돌 하나만 있어도 두세 시간 몰두해 놀 수 있고, 나뭇잎 한 장으로도 몇 시간 즐긴다. 무언가가 없으면 놀거나 즐길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본래 함께 즐기는 데 돈은 들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깡통 하나로 몇 시간씩 놀고 자연이라는 놀이터를 뛰어다니지 않았는가.
하지만 어른이 되면 돈이 있어야 즐긴다고 생각한다. 돈 드는 놀이를 ‘도락’이라 하고 돈이 있으면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돈이 없어도 놀 수 있으며 오히려 공짜로 노는 편이 좋다.
우리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본래 모두 공짜이기 때문이다. 물고기와 채소도 원래는 공짜다. 유통비와 인건비가 붙어 돈을 내지만 바다에 잠수하면 물고기가 있고 산에 들어가면 산나물이 있다.
바람, 공기, 태양, 물도 공짜다. 이것들이 없으면 죽지만 우리에게 돈을 받으러 온 적은 없다.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모두 공짜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그러므로 공짜인 자연과 접촉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과 만나면 생존 본능이 자극된다. 인간은 돈을 쥐고 인공적인 것을 얻으려 하는데, 그런 것들이 인간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우울증의 원인은 ‘감의 고장’이다
왜 오늘날 정신병이 급증할까. 오랜 불황 탓도 있겠지만 “불황”이라고 떠드는 것에 비해 실제로 생존을 걱정하는 사람은 적다. 홈리스도 당뇨병에 걸릴 수 있는 사회이니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다는 뜻이다.
아마 미래가 너무 불안해 어딘가에서 구원의 손길을 찾는 것일 테다. 종교에 빠지는 사람이 대표적일 수 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의존하려는 마음이 있다.
세상이 이토록 편리해졌는데도 미래가 불안하다는 기묘한 현상의 원인 중 하나는 정보라고 생각한다.
텔레비전 정보 프로그램은 경기 후퇴, 정치인의 비리, 무차별 살인처럼 어두운 뉴스만 내보내 시청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인터넷으로 온갖 정보를 얻게 되자 이번에는 인터넷에 의존한다. 남들만큼 정보를 모으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휴대전화를 놓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얼마 전까지 아무도 휴대전화를 갖지 않았고 더 옛날에는 전화조차 없었지만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자연의 동물과 식물이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가.
우리는 휴대전화와 정보를 지나치게 의존한다. 정보라는 지식으로 머리만 커지면 인간의 본능이 망가진다.
본능은 살기 위해 본래 가진 능력이지만 쓰지 않으면 점점 무뎌진다. 몸으로 느끼지 않고 머리로만 생각할수록 본능은 둔해진다.
본능이 사라지면 인간이라는 동물의 균형이 무너지고 어딘가 이상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이 급증하고 선진국에 환자가 더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대지를 뛰어다니는 아이가 우울증에 걸릴 리 없다.
일본에서는 아이도 은둔형 외톨이가 되고, 미국에서는 초등학생이 교실에서 총을 난사한다. 이 역시 정신이 고장 난 한 모습일 것이다.
편리한 시대일수록 인간의 본능을 더 소중히 해야 한다. 본래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일부러 해야 하는 참으로 슬픈 시대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의존과 관련된다. 애초에 불안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공격성으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은 공격해 먹이를 얻는다. 반대로 언제든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산다. 인간 안의 공격과 불안은 한 쌍이므로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을 얻을수록 잃을 불안이 커진다. 화폐 가치가 떨어지지 않게 투자하고 금고에 맡긴다. 잃을 불안 때문에 더 벌어야 한다며 탐욕스러워진다.
이는 음식과 돈뿐 아니라 사랑과 배려도 같다. 사랑과 배려도 얻는 것이며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따른다.
사랑을 얻으려고 “나는 이만큼 돈이 많고 이만큼 출세했다”라고 힘을 과시하며 상대를 공격한다. 여성은 남성의 그런 공격성을 보고 상대를 고른다.
동물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자손을 남길 때 수컷끼리 힘을 겨루고 때로 목숨을 걸며, 암컷은 강한 수컷에게 간다.
생명의 세계에서는 당연하다. 그 공격성이 있기에 식물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이어진다. 간단히 말하면 남의 것을 받아 사는 것이다.
나도 생명을 지녔으니 언젠가 누군가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무언의 불안을 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것은 생명의 잔혹함이며, 인간이 그 감정을 불안이라고 부를 뿐 동물은 당연히 받아들인다.
먼저 불안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고 인정해야 한다.
‘불안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상태가 되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정신에서 벗어난다. 불안을 없애려고 헛되이 노력하지도 않는다.
불안해할수록 불안은 커진다. 스스로 무섭다고 되풀이하니 더 무서워진다. 조금의 불안을 안고도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데 불필요한 정보를 얻어 자기가 불안을 부추길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과거’와 ‘미래’도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앞에서 소개한 도장생의 시 가운데 “과거도 미래도 없지만 지금이 있다”는 구절을 떠올려 보라.
정말 그렇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돌아보면 과거가 되고 지금을 살면 언젠가 미래가 올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결과에 불과하다.
과거가 결과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미래도 결과다. 지금 하는 일의 결과로 미래가 존재한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먼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결과만 걱정하는 일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장래가 불안하다”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사람들이 미래만 생각하는 까닭은 세상이 결과주의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가 좋으면 모두 좋다”는 말은 참 불쾌하다. 결과만 좋다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프로의 세계는 결과를 요구한다. 야구를 비롯해 모두가 결과를 말하며 결과를 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까지 한다.
회사원도 매출이라는 결과를 내지 못하면 평가받지 못하고 어떤 회사는 결과에 따라 급여까지 정한다.
모두 결과만 좇으니 결과에 불과한 미래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결과가 불안하다는 것은 미래가 불안하다는 뜻이다.
그런 어른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 입시를 시키자”, “여러 경험을 하게 하자”고 교육하면 불안으로 가득한 인간을 키우게 된다.
‘본능적 욕구’와 ‘인공적 욕망’을 구별한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남의 평가가 아닌 자신의 평가로 납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납득하면 만족하며 더는 구하지 않는다.
식욕·수면욕·성욕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다. 아이와 동물도 지닌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반면 인정욕·출세욕·자아실현욕·금전욕·물욕은 나중에 덧붙은 인공적 욕망이다.
본능적 욕구에는 한도가 있다. 배부르게 먹으면 더 먹고 싶지 않고 오히려 괴롭다. 백 시간 계속 자려는 사람도 없으며 몇 시간이고 계속 성관계를 하면 고통스러울 것이다. 만족했다는 납득이 있으면 더 필요하지 않다.
본능적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고 사라지지 않지만 납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살면 된다.
인공적 욕망에는 만족의 한도가 없다. 한번 인정받아도 더 인정받고 싶다. 옷과 자동차를 얻어 물욕을 채워도 반드시 또 다른 것이 탐난다.
내가 마작의 뒷세계에 들어간 것은 더 강한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강하다고 소문난 이를 이겨도 다시 더 강한 사람을 찾았다. 만족과 납득은 없고 공허함만 있었다.
인공적 욕망에는 끝이 없다. 그것을 완전히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히틀러도 록펠러도 만족하지 못했다. 히틀러가 만족했다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록펠러도 세계의 돈과 권력을 장악하려 약한 틈을 파고들었다.
인공적 욕망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졌기에 자연스럽지 않다. 그것으로 계속 이길수록 자연에서 멀어지고 자연을 파괴한다. 자연을 부수는 것은 자기 목을 조르는 일임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채워질수록 불안은 커진다
식욕·수면욕·성욕을 채우면 누구나 만족한다. 자연의 동물도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으며 필요한 양보다 더 잡지 않는다.
인간은 영화와 불필요한 지식 때문에 ‘상어는 무섭다’고 믿지만 상어 주변에는 작은 물고기가 많이 헤엄친다. 가까이 가면 반드시 먹힌다는 생각은 인간의 고정관념이다.
상어도 배고플 때와 아닐 때가 있다. 배고프지 않으면 그저 헤엄친다. 이를 알면 상어와 함께 태연히 헤엄칠 수 있다.
나는 직접 잠수해 상어와 작은 물고기를 보며 언제 배고프고 언제 헤엄칠 뿐인지 몸으로 느낀다. 상어는 먹을 때도 닥치는 대로 먹지 않으며 인간처럼 온종일 맛있는 것을 찾지도 않는다.
인간은 저장하는 법과 기술을 배웠고 그 때문에 식량을 빼앗는 일이 생겼다.
본래 식욕은 그 자리에서 만족하면 끝나는 욕구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부분이 파괴되어 쌓아 두지 않으면 불안하다.
수렵민에서 농경민으로 바뀔 때가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수렵 시대에는 그날이나 며칠 먹을 만큼만 사냥했고 저장할 수 없으므로 필요 이상 잡아도 의미 없음을 알았다.
지나치게 잡으면 먹잇감이 사라져 먼 곳까지 가야 하고, 운반 중 썩거나 마을 전체를 옮겨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주민 스무 명이면 사치스럽지 않은 스무 명분만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과 저장의 정보가 인간의 피와 유전자에 섞이면서 가까이 있는 것을 모조리 잡고, 다음에는 먼 곳까지 가서 가능한 것을 전부 가져오게 됐다. 지금은 그것을 ‘세계화’라는 좋은 말로 부른다.
남에게 빼앗길 불안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쌓으려 한다. 선진국이 식량을 비축하는 동안 먹지 못하는 사람이 넘쳐난다. 우리는 지금까지 욕심을 부려 너무 많이 잡았다.
세 가지 본능적 욕구를 채우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세계적인 행복이란 바로 이를 모두에게 가능하게 하는 일이다.
일본의 식량 자급률은 41퍼센트라고 한다. 마트에는 수입 생선·고기·채소와 냉동식품이 넘치고, 유통기한이 지나면 많은 식량을 버린다.
심지어 식량을 연료로 쓰려 한다. 돈이 더 된다는 이유로 그 식량이면 살 수 있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어도 되는가.
세계 평화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식량 전쟁으로 개발도상국 사람들을 괴롭힌다. 모든 것에는 한도가 있음을 몸으로 알아야 한다. ‘적당히’라는 감각이 중요하다.
제3장
‘아이의 감각’으로 돌아가면 감이 날카로워진다
기회와 위기는 순식간에 바뀐다
누구나 기회가 많으면 기쁘고 위기가 계속되면 괴롭다. “왜 나만 이렇게 위기가 이어질까”라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위기인가.
기회와 위기는 시곗바늘처럼 시시각각 바뀐다. 자기가 계속 위기라고 생각하면 위기는 그 사람 곁에 계속 머문다. 반대로 둘은 늘 변한다는 감각을 가지면 어느새 스르르 달라진다.
위기일 때 조금만 기다리면 곧 기회로 바뀐다. 스스로 변화를 만들 필요도 없다. 흐름이 알아서 만들어 준다.
3시 5분에는 위기였다가 3시 7분에는 기회가 될 만큼 짧은 사이에도 달라진다. 2분 동안 숨을 참기는 어렵더라도 가만히 기다리는 일은 가능하다.
다섯 시간이나 일주일 내내 위기가 계속될 수는 없다. 그렇게 느낀다면 위기가 아니라 단지 실력이 부족한 것이다.
실력 부족은 제쳐 두고 “위기다”라고 소리치기만 한다면 평생이 위기일지 모른다.
애초에 위기가 더 재미있다. 위기에는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기회에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되어 의외로 할 일이 적다.
위기에는 해야 할 일이 가득하니 재미없을 리 없다. 바로 그때 ‘여기가 승부처다’라는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을 하라.
위기에도 몸이 움직이면 충분하다
위기라고 무턱대고 움직일 것이 아니라 먼저 침착하게 현재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에 들어갔다고 하자.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조금 지나면 희미하게, 더 기다리면 제법 잘 보인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불안해하며 움직이면 어딘가에 부딪치거나 절벽에서 떨어질 수 있다. 쓸데없이 체력을 잃고 더 큰 공황에 빠져 상황을 악화시킨다.
희미한 빛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의지해 움직일 수 있지만 완전히 어두우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어둠이 위기다. 그래도 눈을 집중하면 차츰 상황이 보인다. 인간의 생명력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위기에는 허둥대지 말고 주위를 찬찬히 살펴라. 그러면 탈출구가 불쑥 보인다. 살고 싶다는 인간의 본능이 그렇게 해 줄지도 모른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함
위기일수록 침착하게 주변을 보는 일과 함께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무언가를 하면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려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실수하더라도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다. 실수하면 다시 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고치면 된다.
실수는 나쁜 것이 아니라 매우 훌륭한 일이다. 실수 없이 해내는 것보다 실수한 뒤 수정해 이루는 편이 낫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며 누구나 실수한다. 완벽한 인간이 있다면 오히려 병든 상태와 같다.
요즘 실수를 두려워하는 젊은이가 늘었다. 회사에서 혼날까 봐, 어릴 때부터 꾸중에 익숙하지 않아 가능한 한 꾸중을 피하려 한다. 그래서 잘하는 것보다 혼나지 않는 일만 신경 쓰는 듯하다.
정치인이 한자를 잘못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고, 회사에서는 컴플라이언스와 개인정보 보호를 강조한다. 모두 실수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니 누가 실수하고 싶겠는가.
실수해도 ‘용서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 실수하면 “재미있네”라고 생각하며 함께 웃을 정도가 알맞다. 남의 실수도 다음에는 내가 할 수 있다. 반면교사라는 말처럼 남의 실수에서 ‘나는 다른 방식으로 해 보자’고 자기 일처럼 고치면 용서하는 마음도 생긴다.
그렇다고 실수를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 지적하되 비난할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 동료다.
요즘은 상대가 싫어할 일을 피하느라 친구도 실수를 지적해 주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친구일 수 있어도 동료는 아니다.
돌이켜 보면 내게 친구는 한 명도 없지만 동료는 많다.
친구는 ‘마음이 맞는다’, ‘함께 있으면 즐겁다’, ‘가치관이 비슷하다’처럼 내게 편리한 상대를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편리하지 않기에 따돌림이 생긴다.
동료는 공유하는 축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이다. 친구가 일대일 관계라면 동료는 일대십, 일대백도 가능하다.
작귀회에는 마작이라는 축으로 모인 동료가 20여 년 동안 5만 명을 넘었다. 그들과 꾸밈없이 부딪쳤기에 실수를 재미있어하면서도 지적할 수 있었다. 그런 동료를 늘리기 바란다.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에게 더 많이 배운다
세상은 성공자에게 배우려 한다. 서점에는 성공자가 가르치는 책이 쌓여 있고 사람들은 비결을 들으러 강연회에 간다.
하지만 성공자에게 배울 것은 거의 없다. 그가 성공한 배경과 내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연히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말을 들어도 얻을 것이 없다.
성공자는 고생과 잘된 이야기만 한다. 경쟁사를 끌어내려 파산시킨 일, 하청업체를 버린 일, 회사를 떠난 직원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성공 법칙이 모두에게 통하는 법칙이라면 그것을 배운 사람은 모두 성공했어야 한다. 현실은 성공도 방법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래서 나는 실패한 사람에게 배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잘못하는 사람의 문제는 옆에서 보면 손에 잡히듯 보인다. “저래서 일이 잘 안 되는구나”를 느낄 수 있다.
마작도 늘 지는 사람을 보면 왜 약한지 분명히 안다. 반대로 강한 사람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고 느낄 뿐 왜 강한지는 모른다. 그대로 따라 해도 이기지 못한다.
내게 왜 강한지 물어도 상대가 납득할 답을 자신 있게 내놓기 어렵다. 강함은 그만큼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약함은 어느 장면에서 어떤 패를 버렸기에 졌다는 이유가 분명하다.
사업·투자·연애에 실패한 사람, 사기를 당한 사람, 경찰에 붙잡힌 사람에게 들으면 ‘이렇게 하면 실패한다’를 배울 수 있다.
지각이 잦은 사람, 상사에게 늘 혼나는 사람, 발표를 못하는 사람, 기획이 늘 거절되는 사람,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 남을 불쾌하게 하는 사람 등 가까이에도 배울 상대가 많다.
성공하는 법보다 실패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편이 낫다.
아이와 놀며 어른이 배울 수 있는 것
실수하고 실패한 사람보다 더 훌륭하게 배울 상대가 있다. 바로 아이다.
아이는 인간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다. 제1장에서 말한 지식과 상식이라는 짐을 아직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와 놀려면 어른도 그 짐을 버려야 한다. 돈의 가치 같은 어른의 상식을 휘두르며 놀아서는 안 된다.
아이와 진지하게 마주하고 놀아라. 나도 두 살 손주와 놀면 30분 만에 녹초가 된다. 인터뷰는 네댓 시간도 괜찮지만 아이의 움직임과 감각은 그만큼 대단하다.
어른이 잊은 움직임과 감각이라 함께 놀면 지치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배운다. 아이는 내가 얼마나 망가진 인간이 되었는지 깨닫게 한다.
솔직히 어른과는 굳이 어울릴 필요가 없다. 어른의 관계는 겉으로 좋은 얼굴만 하는 무성의한 관계가 많다.
옳고 그름은 모두 어른이 멋대로 만들었다. 아이의 세계에 있으면 어른의 옳음이 잘못임을 안다.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보면 무엇이 올바른지도 보인다.
어른은 학교와 성공자의 말을 지식이라며 좇는다. 나는 배우러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다. 그러면 내 감각과 본능이 죽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배운다. 아이는 본능을 지니고 있고, 아이와 어울리면 내 본능도 움직인다. 본능대로 함께 놀며 내 본능이 닦이는 것을 느낀다.
솔직히 사랑하기 때문에 놀아 주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어서 함께 노는 것이다.
나는 네 아이를 키우며 많은 것을 배웠고 이제 손주에게 다시 배운다. 어른에게 아이가 생기는 것은 잊은 것을 떠올리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아이의 가치관이 곧 자연의 가치관이다
아이가 밥그릇을 깨뜨렸다고 하자.
10만 엔짜리라면 꾸짖거나 얼굴이 파랗게 질 것이다. 어른끼리라면 배상하라고 한다. 하지만 100엔짜리라면 “괜찮아”라고 할 것이다.
돈이라는 가치에 따라 대응이 이토록 달라진다. 좋고 나쁨, 싸고 비쌈은 어른이 만든 기준이므로 그것으로 아이를 꾸짖어서는 안 된다.
아이에게는 10만 엔짜리 그릇과 100엔짜리 그릇이 같다. 깨질 물건이 그 자리에 있었고 움직이다가 깨졌을 뿐 아이는 잘못이 없다.
내 손주가 10만 엔짜리 그릇을 깨도 나는 웃을 수 있다. 아이는 장난하고 싶은 존재이고 놀다 깨뜨렸다면 어쩔 수 없다. 오히려 그 일에서 내가 배우니 고맙다.
그런데 어른은 가치에 따라 태도가 돌변한다. 자연의 가치로 사는 것이 본래 모습이다. 어른과 아이 가운데 어느 쪽이 자연에 가까운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본모습’으로 대화하는 일의 중요성
아이와 놀 때는 진정한 본모습으로 돌아간다.
손주가 말을 전혀 모르던 때 나는 툇마루에서 안고 이야기를 했다. 딸은 “아직 말도 모르고 할 줄도 모르잖아요”라고 했다.
나는 “말을 모를 때의 사이가 중요하다. 우리는 영혼으로 대화한다”고 답했다.
우리는 일본어·영어·중국어·프랑스어 같은 언어를 안다. 말을 익히면 말의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겉말과 속마음이 달라도 알아채지 못하고 입으로 좋은 말을 해도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른다.
말 못 하는 아기는 언어는 몰라도 진심의 말은 안다. 영혼을 담으면 본능으로 통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어른의 대화에는 영혼이 빠졌다. 영혼이 있어도 상대가 알아채지 못한다. 말이라는 도구를 얻는 대신 어린 시절의 감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대화에서 영혼이 사라진다. 일흔에 가까운 내 또래는 어디가 아프고 혈압이 어떻다는 이야기, 몸과 정신이 못 하게 된 이야기만 한다.
젊은이는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많음을 고마워해야 한다. 언젠가 아무것도 못 하게 되므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하면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죽음이다. 모두 죽음을 향해 사니 살아 있고 무언가 할 수 있을 때 즐거운 일을 찾으면 된다.
“재능이 없어 못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재능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못 한다는 말은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남에게 인정받거나 상을 받으려 하니 재능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자기가 즐거운 일을 하라. 자신이 즐기는 데 재능 따위는 필요 없다.
누구에게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나는 재능·능력·지위로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 유명 기업 사장이 와도 누구와 똑같이 대한다.
오히려 세상이 낮다고 하는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는지도 모른다. 우리 도장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라멘 배달원이다.
배달원이 오면 도장생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운반을 돕는다. 돈을 냈으니 배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돈과 상관없이 바쁜 사람이 있으면 돕는 것이 당연하다. 힘들어 보이면 도우면 된다.
돈을 냈다는 이유로 “나는 손님”이라며 거만하게 구는 사람은 부자와 권력자 앞에서는 비굴해질 것이다. 돈과 능력을 가치 기준으로 삼아 돈을 낸 사람과 권력자가 더 훌륭하다고 여기며 태도와 말을 바꾼다.
그 기준은 인간이 지배하기 쉽게 멋대로 만든 것이다.
자기 아이에 대한 사랑이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가. 공부·피아노·그림·운동을 잘하기 때문에 아이를 사랑한다면 그런 부모는 큰 바보다.
자기 아이는 어떤 아이든 사랑스럽다. 사람마다 색깔이 달라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이상함을 깨닫기 바란다.
아이의 감각에 귀를 기울이면 육아로 고민하지 않는다
요즘 육아 노이로제에 걸리는 어머니가 많고, 심한 경우 자기 아이를 죽이는 사건도 일어난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자기 시간이 없다며 남편에게 육아에 더 참여하라고 호소한다.
저자는 이를 야성의 본능이 희미해진 결과로 보고, 어머니는 자기 시간을 아이에게 온전히 내어 주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남녀 차별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이 남녀의 결합으로 태어나는 만큼 서로 타고난 역할과 분야가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여성의 본능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며 남성의 본능은 먹이를 구해 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여자아이는 눈으로 사물을 좇고 남자아이는 소리로 위치를 파악하는 경향을 예로 든다. 수십만 년 전 동굴 근처에서 식물과 계절을 살피던 여성, 멀리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찾아 돌아오던 남성의 감각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우월하다는 뜻도, 인권상의 차별을 옹호한다는 뜻도 아니다. 동물의 본능이라는 관점에서 서로 다른 역할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를 기르는 것이며 나머지는 뒤로 미루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여러 요구를 한다. 어른처럼 자동차·집·큰돈·여행 같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들어줄 수 있는 요구만 하므로 가능한 한 모두 들어주면 된다.
그것을 할 수 없고 자기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의 요구를 외면한다면 차라리 부모 역할을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까지 말한다.
거리에서 아이에게 불만을 쏟는 어머니를 보면 아이가 가엾다. 자기 불만과 남의 시선을 아이에게 떠넘기는 일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그런 부모는 아이를 통해 자신이 배우고 있음을 모른다. 배움을 주는 존재에게 그런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매뉴얼 교육’은 어른의 감까지 무디게 한다
‘교육 엄마’라는 말에 이어 이제는 ‘몬스터 페어런트’라는 말까지 생겼다.
무슨 일만 있으면 학교에 항의하고, 부모가 항의하면 교사는 아무것도 못 한다. 결국 매뉴얼에 따른 교육밖에 할 수 없게 된다.
지금 부모 세대가 ‘자기주장을 하라’고 배웠지만 그 뜻과 사용법을 잘못 익힌 탓일지 모른다.
자기주장은 필요할 때 정확히 주장하는 것이다. 표적을 벗어나 소리치는 것은 자기주장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이다. 부엌칼을 요리에 써야지 사람을 찌르는 데 쓰면 안 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자기주장이라는 무기로 남을 해치는 사람이 많다. 말도 사용법에 따라 좋거나 나쁜 것이 된다. 그만큼 가르치고 사용하는 일은 어렵다.
몬스터 페어런트는 잘못된 자기주장의 상징이다. 사소한 항의가 생길 때마다 새 규칙이 만들어지고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는 답답함이 교사를 묶는다. 그래서 매뉴얼대로밖에 가르치지 못한다.
아이들은 제각각이므로 매뉴얼 교육이 가능할 리 없다. 아이가 가진 감성을 닦아 주고 자유롭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 본래 교육이다.
손주가 한 살쯤 되었을 때 내가 쓰던 원고지를 달라고 했다. 주자 연필로 형태 없는 구불구불한 선을 그었다.
나는 “이건 하마구나”, “이건 꽃일까?”라고 하며 그 선에 눈과 꽃잎을 더해 함께 그림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형태가 없지만 모든 새로운 것은 형태 없는 곳에서 태어난다.
손주의 선을 보면 내 상상력도 솟는다. 나는 그림 재능이 없지만 선 하나에서 여러 모습을 발견하며 몇 시간이고 논다.
예술을 가르치거나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 즐기는 놀이다. 놀다 보면 손주는 내가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그림을 구성하게 된다.
가르치는 일은 어렵고 무섭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 아이의 삶을 내가 빼앗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은 본인이 고르는 것이므로 일부러 의자에 앉혀 가르칠 필요가 없다. 자유로운 생각을 기르려면 함께 놀면 된다. 그것은 매뉴얼 교육으로 얻을 수 없다.
아이와 놀면 어른도 자유로운 발상을 배운다. 의미 없는 선에서 의미가 태어나는 것을 보며 어른이 되어 잊은 감각을 아이에게 다시 배운다.
부모와 아이의 신체 접촉이 감을 날카롭게 한다
아이는 말이 능숙하지 않은 만큼 촉각을 소중히 여긴다.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머리를 쓰다듬고 안아 주기를 원한다. 피부 접촉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착하다”, “귀엽다”, “사랑한다”는 부드러운 접촉만으로 충분할까. 아주 어릴 때는 괜찮아도 학교에 갈 만큼 자라면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아프고 힘들고 싫은 감각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교사가 뺨이나 엉덩이를 때리는 일이 흔했고, 아이들은 그런 경험을 통해 여러 촉감을 배웠다고 그는 말한다.
부모 역시 부드럽게 안거나 때로 엄격하게 대하며 여러 감각을 가르치되 무엇보다 피부와 피부가 닿는 일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저자는 때때로 작귀회 도장생의 뺨을 가볍게 친다. 밖에서 보면 괴롭힘 같지만 도장생이 기뻐하므로 그것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현대인은 오감 가운데 시각에 너무 의존하고 촉각, 특히 아픔을 거의 경험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맞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몸이 오히려 그 접촉에 반응하고 기뻐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교육자가 되어 도장생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동료끼리 서로의 좋고 나쁜 점을 지적하며 즐겁게 나아갈 뿐이라고 말한다.
즐겁고 부드러운 접촉만이 아니라 때로 진지하게 접촉하는 것도 중요하다. 도장생들은 칭찬만 하는 것이 거짓스럽다는 사실을 안다. 아픔과 괴로움까지 포함해 자신을 만지고 진지하게 보아 주는 데 기쁨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안다.
본래 학교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하지만 체벌이 전부 쫓겨났다. 모든 체벌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좋은 체벌도 있었는데 일부 나쁜 사례 때문에 모두 부정되었다고 저자는 본다. 다양한 촉각을 배울 기회를 잃은 아이가 가엾다는 것이다.
아이가 밖에서 놀 수 없는 사회가 우울증을 낳았다
손주가 전철을 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보러 간 적이 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는 좁은 길을 걷는데 뒤에서 자동차가 경적을 울렸다.
나는 화가 났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걸었고 자동차는 나중에 생겼는데 왜 사람이 피해야 하는가. 자동차가 그렇게 훌륭한가.
부딪치면 다치는 쪽은 인간이라 위험한 차를 피하라고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는 매일 사람을 죽게 하는 흉기다. 흉기를 가진 쪽이 조심하고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가 피해야 한다. 자동차가 사람을 배려하면 사고도 줄 것이다.
그런데 길은 자동차가 점령했고 밖에서 노는 아이가 사라졌다. 이제는 공원 같은 안전한 곳에서만 아이를 볼 수 있다. 아이가 밖에서 놀지 못하는 상태는 비정상이다.
에도 시대에는 사람이 끄는 짐수레조차 에도 시내에 들어오려면 허가가 필요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도시는 왜 자동차가 위세를 부리는가. 인간이 만든 문화와 문명보다 생명이 더 소중해야 한다.
자연을 지키려 나가노현 가미코치에는 자동차가 중간까지만 들어가고 단체 버스로 이동한다. 미국 그랜드캐니언도 자동차 진입을 제한한다. 문명이 들어오는 만큼 자연은 파괴되고, 자연이 무너지면 인간도 무너진다.
아이를 보면 이를 실감한다. 본래 아이는 밖에서 놀아야 한다. 집에서만 노니 은둔하게 된다. 어린 시절 밖에서 놀지 못한 사람에게 어른이 된 뒤 밖으로 나가라고 해도 어렵다. 이미 그런 감성이 몸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어른은 아이가 밖에서 놀 수 없는 환경을 만든 뒤 밖에 못 나가면 우울증과 은둔형 외톨이라고 부른다. “요즘 우울한 사람이 늘어 걱정”이라고 말하는 사람 자체가 문제다.
아이들이 밖에서 놀 수 있는 환경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공원을 더 짓는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집을 한 걸음 나서면 바깥 전부가 공원이자 아이의 놀이터가 되어야 한다. 아이가 안심하고 놀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도 사라질 것이다.
쇼와 시대 아이들의 생생한 눈에서 배운다
옛날에는 바깥 어디나 놀이터였고 그네와 정글짐, 장난감도 없었다. 전쟁 직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이들의 눈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생했다.
나는 도몬 겐의 사진집 《쇼와의 아이들》을 도장생과 자주 본다. 전쟁 직후 아이들을 찍은 사진 가운데 나는 특히 눈을 바라본다.
구멍 난 낡은 우산으로 노는 아이는 표정과 움직임이 좋고 발놀림에 군더더기가 없다. 몸 쓰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운 것이다. 허름한 집에 살아 넉넉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웃고 있다.
오늘날 메이드 카페 직원의 만들어진 미소와 다르다. 진짜 웃음이 옛날에는 당연히 있었지만 오늘날 유치원생도 좀처럼 그렇게 웃지 못한다.
수업을 듣는 사진에서도 모두 진지하며 교사를 업신여기는 모습이 없다. 우리가 잊은 것을 사진에서 배울 수 있다.
나도 아무것도 없는 시대에 자라 잘 안다. 점심 도시락을 가져오는 아이가 적었지만 없는 아이도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조르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먹는 아이와 못 먹는 아이가 함께 있음을 알았고, 오늘 먹는 아이도 다음에는 못 먹을 수 있음을 알았다.
배부르게 먹지 못하던 때가 불과 수십 년 전 일본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가 더 인간다웠다는 사실을 아이들의 눈에서 볼 수 있다.
칼을 들고 노는 아이의 사진도 있다. 남을 겨눈 것이 아니라 주운 나무를 깎는다. 오늘날 부모라면 위험하다며 빼앗겠지만 아이의 눈은 진지하다.
그토록 진지하면 조금 다칠 수는 있어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 큰 사고는 대개 장난스럽고 무성의하게 다룰 때 생긴다. 당시에는 놀이 속에서 칼날 다루는 법을 익혔을 것이다.
골목대장 소년과 꽃 파는 소녀의 눈에는 “나는 살아 있다”는 투지와 생명감이 넘친다.
오늘날에는 그런 눈을 한 아이가 크게 줄었다. 생명에 무감각해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는 일에 진지하면 멍한 눈을 할 수 없다.
어른은 그 눈에서 많은 것을 민감하게 느껴야 한다. “옛날은 가난했구나”, “그런 시대도 있었지”로 끝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생생한 눈에서 무엇을 감지하는가. 그것이 바로 직감력을 익히는 데 빠질 수 없는 예민한 감성이다.
제4장
‘양보하는 힘’을 가지면 감이 날카로워진다
인생의 목적은 다음 세대에 생명을 넘기는 것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누구나 한 번은 생각했을 주제다.
성공하기 위해서인가?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생명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밖의 것은 나중에 덧붙은 것에 불과하다.
생명은 이어지고 연속되어야 한다. 그 중요성을 자기 뿌리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덧붙은 것만으로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당신은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류가 생긴 수십만 년 전부터 끊임없이 이어진 생명이다. 당신은 그 연속 속에 존재하는 생명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책임은 받은 생명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생명의 연속성을 마음에 새기면 여러 판단에서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본래의 마음을 더 의식하고 올바른 삶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감으로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생명을 넘긴다’는 일의 중요성을 더 의식해야 한다. 이 ‘넘겨줌’이 참으로 중요하다.
감이 날카로운 사람은 왜 ‘양보하는 힘’이 강한가
인간관계에서 양보하는 정신은 매우 중요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그 중요성을 잊었다.
인간관계로 고민하는 사람은 양보하는 마음이 없어 스스로 자기 목을 조르는 경우가 많다.
양보하지 못하게 된 것은 오랫동안 얻는 것만 좇았기 때문이다. 전후의 빈곤, 고도성장기와 버블 시대를 거치며 얻는 일이 행복의 모습이 됐다. 무엇이든 가지려 하니 버리고 양보하지 못한다.
인간관계를 상담하러 오는 사람은 상대보다 자기만 생각한다. “상사가 내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직원만 편애한다”고 말한다.
인정받고 싶다는 것은 남의 평가를 축으로 산다는 증거다. 자기 평가를 기준으로 산다면 그런 불만은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그 상사를 인정하고 있는가.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은 이상하다.
무언가를 받은 뒤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주어야 한다. 받는 일만 생각하니 불만으로 가득해진다.
인간관계의 다툼은 양쪽 모두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생긴다. 서로의 피해 의식과 버리지 못한 자존심이 문제를 부른다.
각자가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서로 양보하면 다툴 까닭이 없다. 문제가 생기려 할 때 “내가 가해자일지도 몰라”라고 조금만 생각해도 피할 수 있다.
아무리 자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도 “다음에는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기면 상대를 기꺼이 용서할 수 있다.
늘 인간관계 문제에 휘말리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당신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양보하는 정신, 곧 양보하는 힘이 부족하다.
손익으로 따지니 양보하지 못한다. 모든 생명은 서로 양보하며 산다는 자연의 원리를 마음에 새기기 바란다.
연어의 일생에서 배우는 ‘양보하는 힘’
홋카이도 끝자락의 섬에서 연어가 고향 하천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다.
연어는 태어난 강만 찾아온다. 바다에서 자라 4년 뒤 자손을 남기려고 돌아온다. 다른 물고기에게 먹혀 못 오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때문에 못 돌아오는 연어도 있다. 어부에게 잡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강 하류를 콘크리트로 막아 버린 것이다.
연어는 다른 강을 오르지 않는다. 수만 마리가 콘크리트 벽을 넘으려고 필사적으로 뛰어오르지만 결국 넘지 못하고 죽는다.
고향 강이 사라졌다면 다른 강에서 알을 낳으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다. 연어는 태어난 곳에 돌아와야 생명을 남길 수 있다.
알을 낳은 뒤에는 자기 생명과 맞바꾸어 새 생명을 낳고 상처투성이로 죽는다. 인간의 행위가 잘못임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자손을 남기려는 연어의 본능에는 고개가 숙여진다.
게다가 연어는 자기 자손만 위해 움직이는 것도 아닌 듯하다. 강을 오르다 인간이나 곰에게 잡히며 돌아온 모두가 산란하지는 못한다.
그저 연어가 불쌍하다는 뜻이 아니다. 연어가 자기 생명을 다른 동물에게 내어 준다고 보는 것이다.
산란한 연어도 힘이 다해 죽으면 새가 먹고, 분해되어 동물성 플랑크톤과 다른 물고기, 자기 치어의 먹이가 된다.
새와 곰이 먹고 남긴 부분도 작은 동물과 플랑크톤의 먹이가 된다. 자연의 생명에는 전혀 낭비가 없다.
연어뿐 아니라 상어·고래·식물도 같다. 자연계는 서로 생명을 내어 주며 순환한다. 이것이 자연의 본래 모습이며 눈물이 날 만큼 대단하다. 그들은 법률과 지식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산다.
그런데 인간은 남은 음식을 태워 버린다. 자연이 아닌 인간의 편의에 따라 살며 쓰레기는 냄새난다는 이유로 불태운다.
미국 원주민은 모든 것을 활용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토템폴도 나무로 되어 있어 끝내 부서져 흙으로 돌아간다. 흙과 미생물에게는 오히려 기쁜 일이다.
일본에서도 예전에는 쓰레기와 분뇨를 모두 이용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분뇨를 사 농부에게 파는 상인이 있었다. 불과 수십 년 전에는 배설물조차 낭비가 아니었다.
이제는 쓰고 나면 태우거나 산에 불법 투기한다. 투기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물건을 만드는 일 자체다.
자연의 처지에서 순환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서로 양보하는 정신은 인간관계뿐 아니라 순환하는 사회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양보하는 힘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양보하는 힘’은 일상에서 기를 수 있다
가끔 전철을 탔을 때 나보다 조금 나이 많은 할머니가 타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나 자리를 내준다. 나도 앉아 있어도 될 나이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양보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책을 보며 못 본 척하거나 자는 척하고 “오늘은 피곤하니까”라고 자기 편한 변명을 한다.
그런 사람이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하니 우습다. 사랑을 주지도 않은 사람은 사랑을 원한다고 말할 자격도 없다. 얻는 일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자리를 내주는 것은 정해진 예절이 아니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노인이 힘들어하니 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자연이다.
나는 속으로 “할머니가 탔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바보가 있군!”이라고 외친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아이를 기르고 회사에서 일하느냐!”라고 소리칠 때도 있다.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볼지 모르지만 내게는 노인에게 자리 하나 못 내주는 사람이 더 이상하다.
일상에서 늘 양보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본래 누구나 지닌 힘이라 단련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상식·지식·자존심·허영·돈 때문에 약해졌다.
표 사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고, 무거운 짐을 든 노인이 있으면 계단에서 거들어라. 주위를 보면 곤란한 사람이 제법 많다.
그 존재를 알아채고 생각보다 먼저 행동해 몸이 저절로 반응할 때까지 양보하는 힘을 기른다. 깨달음과 행동이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감이 날카롭다는 뜻 아닐까.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양보가 일이다
얻는 힘보다 양보하는 힘이 더 크고 강하다. 스스로 강하지 않으면 양보할 수 없다. 사는 것만으로 벅찬 사람은 남에게 내줄 수 없다.
밤샘으로 지친 상태에서도 전철 자리를 선뜻 내주는 사람이 정말 강하다.
그러므로 회사와 집단에서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더 양보해야 한다. 세상이 승자라 부르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내주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지위·명예·재산을 얻을수록 잃기 싫어 내주지 않고 더 가지려 한다.
출세 경쟁에서 빼앗고 끌어내리는 일만 해 왔으니 갑자기 양보할 수 없고 그 힘도 남지 않았다. 강자에게 양보하는 힘이 있었다면 격차 사회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높은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와 부하를 생각해야 한다. 자기 출세를 위해 ‘이 사람은 이용할 만하다’, ‘친해지면 이익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다.
“저 사람이 더 즐겁게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가 얻은 것을 내주어야 한다. 업무 지식과 사고방식뿐 아니라 경험으로 얻은 감각도 넘겨준다.
성과도 내준다. 성과가 나면 부하와 협력한 모든 사람 덕분이고, 성과가 없으면 책임은 자신이 진다. 그런 관계라면 회사의 인간관계로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작장 ‘패의 소리(牌の音)’의 경영자이자 작귀회 회장으로 일반적으로는 윗사람이다. 나는 “좋은 일은 부하 덕분, 나쁜 일은 내 탓”이라는 자세로 도장생과 직원을 대한다.
세상에는 그런 상사가 적은 모양이다. 직장인의 고민 가운데 상사와의 관계가 많은 것도 이를 보여 준다. 문제가 생기면 비서와 부하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정치가는 보기 흉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가족, 동료, 회사의 상품과 서비스를 사 주는 사람, 곧 모든 사람 덕분이라고 생각해 보라.
내게 가족과 도장생이 없었다면 참으로 빈곤한 삶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즐겁고 마음 풍요롭게 지내고 사랑스러운 손주와 노는 것도 모두 그들 덕분이다.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사는데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거나 무언가를 빼앗을 수는 없다. 자연스럽게 감사가 생긴다.
가정의 문제는 ‘양보하는 힘’으로 해결한다
부부 관계로 고민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섹스리스가 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이가 나쁜 부부가 늘었다는 뜻일지 모른다.
가족은 가장 자연스러운 자기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잘 보이려고 꾸밀 필요도 없고 밖에서는 하지 않을 말도 한다.
그런 가족 안에서 다툰다면 당사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결함은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서로 양보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양보라는 말이 어렵다면 감사로 바꾸어도 된다. 가족에게 감사하면 배우자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사라진다.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며 “이 아이가 있어 힘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내를 보며 “이 사람이 있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 아이도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그 감사, 곧 양보하는 정신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다투면 부모는 “서로 양보하며 놀아”라고 한다. 누구나 양보가 좋다는 것을 알면서 정작 자신은 하지 않는다.
본능으로 그것이 좋음을 안다면 자기 손익을 버리고 어떤 일이든 서로 양보하면 된다.
‘운을 양보한다’는 것
나는 운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운은 그 장소에 떠도는 공기 같은 것이다. 자연의 본능이 깨어나면 누구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운을 조절할 수 있다. 허황되게 들리고 믿지 못할 수도 있다. 말로 전할 수 없는 감각이라 어쩔 수 없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의 머리 위에도 운이 떠돌며 그것을 잡는가가 승패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대타 기사 때에는 운을 나만 위해 썼고 얻는 데 집착했다. 하지만 이제는 얻을 뿐 아니라 넘겨줄 수도 있음을 안다.
예전보다 운을 조절하는 힘은 약해졌을지 몰라도 지고 있는 사람에게 넘길 힘은 남아 있다.
마작에서 “이 아이를 이기게 하자”고 생각하며 운을 보내면 그 아이가 크게 역전한다. 나는 운을 양보하는 재미를 알게 됐다.
어느 대회 결승에 도장에서 가장 어수룩한 아이가 있었다. 처음 왔을 때 마작도 약하고 내가 가볍게 뺨을 쳐도 얼굴이 부어 울며 “다시는 안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도, 그 뒤로도 계속 왔다.
나는 그런 모습이 좋았다. 이 아이가 이기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스무 명 가운데 우승했다. 모두가 ‘설마!’ 하는 방식으로 이기니 현장의 사람도 즐거웠을 것이다.
나는 즐거운 방향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결과가 생긴다.
운은 자신만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넘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운이 된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남에게 이기고 싶어 하며 자기만을 위해 운 쓰는 법을 묻는다. 하지만 운에서는 양보가 중요하다.
대타 기사 시절에는 이를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그저 바보였다. 도장을 열고 동료들과 놀면서 배운 것이다.
왜 ‘맞혀 잡는 투수’가 더 많이 이기는가
얼마 전 스포츠신문에서 흥미로운 인터뷰를 읽었다. 이름은 잊었지만 메이저리그의 유명 투수가 한 말이 내 감성과 같았다.
“내가 일류 투수가 된 것은 모두에게 공을 치게 해 주자는 마음으로 던졌기 때문이다.”
보통 투수는 맞지 않으려고 던지고 감독도 그렇게 힘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너머에 양보가 있다. ‘치게 해 주자’고 내주었더니 좋은 일이 생긴 것이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이야기다. 양보하는 정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위대한 투수가 되었을 것이다.
야구는 아홉 명이 하는 경기다. 삼진을 잡으려고 무리해 던지면 팔꿈치와 어깨를 다친다. 공을 치게 하고 나머지 야수 여덟 명의 힘으로 아웃을 잡겠다는 정신이 있으면 몸을 혹사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선수로 뛸 수 있었던 것도 양보 덕분일 것이다.
세상의 성공자 중에는 남에게 내주지 않고 빼앗은 결과로 성공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진정한 성공자가 아니다.
진짜 성공자는 양보함으로써 성공한 사람이다. 수는 적겠지만 그런 사람이 있음을 그 투수가 가르쳐 주었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그저 남에게 내주어 온 결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공자가 되기 바란다. 처음부터 성공만 바라보며 눈에 불을 켜고 달리면 도리어 성공하기 어렵다.
마작도 같다. ‘이기고 싶다’고 안달하는 사람일수록 이기지 못하고, ‘쏘여도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긴다.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시간을 쓴다
현대인은 “시간이 없다”고 자주 말한다. “일이 바빠 사생활을 위한 시간이 없다”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은 시간을 잘못 이해한다.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이다.
나는 나만을 위한 시간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남을 위해 시간을 쓰면 된다. 일하는 시간이 많다면 회사와 그 상품·서비스를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쓰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라.
그것이 시간을 양보하는 일이다.
직장인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여덟 시간을 팔아 월급을 받는 계약 속에서 사니 자기 시간을 잘라 파는 감각이 몸에 뱄을 것이다. 그래서 야근 수당을 요구하고 휴일 근무를 싫어한다.
하지만 오히려 자기 시간이 없는 편이 낫다고 저자는 말한다. 남을 위해 쓰는 시간이 더 소중하고 거기에 삶의 보람이 있다.
에도 사람의 기질을 나타내는 ‘아사메시마에(朝飯前, 식은 죽 먹기)’라는 말이 있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곤란한 사람이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어제 몸이 안 좋다던 할머니를 보러 갈까” 하며 찾아갔을 때 “이른 아침부터 미안하네”라는 말을 들으면 “별것 아닙니다. 아침밥 먹기 전 일인걸요”라고 가볍게 답한다.
옛 에도 사람에게는 아침밥 전에 남을 돕는 기질이 있었다. 그런 정신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기 시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기 취미 시간이 없다고 하던 사람일수록 정년 뒤 시간이 넘쳐도 할 일을 찾지 못한다. 이것이 현실의 직장인 사회다.
남을 위해 시간을 써 온 사람은 은퇴 뒤에도 다른 사람이 의지한다. 사람은 남에게 의지가 되어야 가치가 있다. 그것이 책임이라는 말로 이어진다.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책임질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책임감이 강하고 약한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가진 능력이다. 누구에게나 양보하는 힘이 있다면 책임질 능력도 누구에게나 있으며, 양보하는 힘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능력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을 소중히 산다
시간에서는 ‘지금’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한 생을 온전히 마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연어가 생명을 다해 고향 강으로 돌아가 다음 생명으로 잇는 일은 인간 세계처럼 안이하지 않다.
연어는 4년밖에 살지 못하므로 생명의 고마움을 잘 안다. 반면 인간은 80년이나 살아 그 고마움을 잊는다. 태어난 뒤 10년 만에 죽는다면 하루를 더 소중히 여길 것이다.
전쟁 직후 아이들의 눈이 생생했던 것은 죽음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시대에는 하루의 무게가 달랐다.
수명이 늘어 80세까지 살게 되자 하루의 소중함을 잊고 느슨하게 살며 지금을 아끼지 않게 됐다.
노후를 걱정하는 것도 수명이 늘어 은퇴 뒤 수십 년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과 같은 노인은 오래 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직 남을 위해 무언가 하고 넘겨줄 것이 있는 동안은 괜찮지만 그것이 없어지면 생명이 끝나는 것이 자연의 모습이라는 주장이다.
연어는 산란 뒤 자연스레 죽지만 인간은 그동안 저지른 일이 너무 심해 벌을 받듯 더 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수명 연장만 기뻐한다.
수명이 짧다면 하루를 진심으로 소중히 살 것이다. 시한부 1년이나 한 달을 선고받은 사람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공감을 얻는 이유다.
그런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며 “오늘도 아침을 맞아 고맙다”고 생명의 가치를 실감할 것이다. 이는 종교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놓인 상황에서 생기는 감각이다.
누구나 내일 사고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실감하지 못해 하루를 느슨하게 보낸다.
수명이 길면 과거와 미래도 길어진다. 과거의 얽매임과 미래의 불안이 많아질수록 현재, 곧 지금의 개념은 희미해진다.
지금을 더 소중히 하기 바란다. 우울증과 인간관계로 고민하고 시간이 없다고 불평할 틈이 없다.
지금의 시간을 유용하게 써라. 남을 위해 시간을 쓸 때 비로소 시간을 제대로 썼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비열한 인생관’을 다음 세대에 남기지 않기 위해
이 책에서 말했듯 지금 세상은 전쟁의 시대다.
실제로 사람이 죽는 전쟁도 끊이지 않지만 겉보기에 평화로운 일본에서도 입시 전쟁과 기업 전쟁으로 늘 누군가와 경쟁한다. 이것 역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승패에 사로잡혀 패한 사람은 정신이 상하고 무너진다. 정신을 파괴하는 전쟁이다.
앞으로 틀림없이 일어날 것은 식량 전쟁이다. 일본뿐 아니라 세계 전체의 미래다. 지금은 돈을 더 많이 차지하려 싸우지만 끝내는 먹느냐 못 먹느냐를 두고 다툴 것이다.
일본인은 식량 자급률을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당시 자급률은 41퍼센트였다. 식량을 수입하지 못하면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이 먹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처럼 사치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일본인 1억 3천만 명 모두에게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은 식량이 없으면 해외에서 가져오지만 세계에는 이미 먹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 부자만 식량을 빼앗는 것은 부당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그곳에는 반드시 다툼이 일어난다.
우리는 스스로 먹을 수 있는 나라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먹는 것은 생존에 가장 중요하다.
전쟁 직후에는 돈이 있어도 살 것이 없었고 배급으로 먹는 양을 정했다. 그런 시대가 다시 올지 모른다.
그동안 너무 많이 잡아 왔으므로 앞으로 식량은 분명 줄고 그 대가가 돌아올 것이다.
예전에는 조금만 바다로 나가도 물고기를 잡았지만 이제는 먼바다까지 가거나 수입해야 한다. 고등어와 연어를 노르웨이에서 들여와 중국에서 통조림으로 만든 뒤 다시 일본에 가져오고, 칠레에 양식장을 만들어 수입하기도 한다. 이런 사례는 끝이 없다.
일본 근해에서 얻는 식량은 극히 적어졌다. 그런 나라가 미래에 계속 먹고살 수는 없다.
모두 먹고살려고 일하지만 정작 먹을 것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에는 비열하거나 나쁜 일을 해야 돈을 얻는 시대라면 다음 시대에는 비열해야 식량을 얻는 시대가 될지 모른다. 식량은 생사의 문제이므로 더 비열해질 것이다.
지금의 비열함이 60퍼센트라면 다음 시대에는 100퍼센트 비열해야 살 수 있는 끔찍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가 외롭고 슬프다고 말할 자격도 우리에게는 없다. 그것을 만든 것이 우리 세대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우리는 비열한 사람과 악인을 낳으려고 애써 온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와 손주, 그다음 세대에게 아무리 고개 숙여도 부족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작다. 도장생과 자연에서 놀고 함께 바보 같은 일을 하며 인간 본래의 본능을 깨우고, 조금이라도 많은 젊은이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 정도다.
그리고 이런 책으로 독자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 중요성이 조금이라도 전해진다면 내가 살아 있는 역할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산다고 해도 좋다.
그야말로 ‘아침밥 먹기 전의 일’이다.
사쿠라이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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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사쿠라이 쇼이치(桜井章一)
도쿄 시모키타자와 출생. 대학 시절 마작을 시작해 뒷세계 프로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대타 기사로 20년 동안 무패의 압도적인 강함을 보이며 ‘작귀(雀鬼)’라는 별명을 얻었다.
은퇴 후 마작장 ‘패의 소리(牌の音)’를 열고, 마작을 통해 인간의 힘을 단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귀회를 시작했다.
그를 모델로 한 영화·소설·만화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마작계를 넘어 여러 분야에 공감하는 사람과 팬이 많다. 작귀회 선수들은 그를 ‘회장’이라 부르며 따른다.
저서로 《사람을 꿰뚫어 보는 기술》, 《지지 않는 기술》, 《내려놓는 기술》, 《노력하지 않는 삶의 방식》, 《그런 것, 신경 쓰지 마라》, 《수라장이 사람을 단련한다》 등이 있다.
[서지 정보]
도서명: 감의 정체 - ‘직감력’으로 역경에 강해진다
저자: 사쿠라이 쇼이치
초판 발행: 2011년 5월
전자판 발행: 2011년
발행처: 주식회사 이스트 프레스
들리지 않는다. 저출산과 고령화, 부모가 아이를 학대하는 사건, 젊은이가 갑자기 폭발해 일으키는 무차별 살인, 디플레이션에 따른 경제 악화, 에너지 문제, 식량 문제…. 최근에는 물에 관한 권리를 서로 빼앗는 일까지 벌어진다고 한다. 세상이 정말 이상해졌다고 절실히 느낀다.
이런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식이나 학력이 아니다. 정보 같은 것도 아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힘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힘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차차 설명하겠지만, 나는 몸으로 느끼는 힘을 ‘직감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직감력이란 오감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것을 순간적으로 감지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오감을 온전히 활용해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는 힘이라고 해도 좋다.
현대인은 특히 시각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전체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인데도 대부분의 사람은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착각한다.
그처럼 표면적인 것에 의존하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다. 더구나 이 막막한 사회를 힘차게 살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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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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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앞으로는 우리가 흔히 ‘감’이라고 부르는 힘, 즉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직감력’의 정체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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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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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세계에서의 “20년간 무패”를 지탱한 직감력
나는 한때 마작의 ‘대리 승부사’로 살았다.
대리 승부사란 큰 조직이나 기업이 막대한 돈과 권리를 걸고 벌이는 승부에 그들을 대신해 참가하는 마작의 비공식 프로를 말한다.
하룻밤 사이 수억 엔이 오가는 큰 승부도 있었다. 상식을 벗어났다고밖에는 할 수 없지만, 그만큼 늘 목숨을 건 승부였다.
말 그대로 지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팔이 잘리거나 산속 깊은 곳에 묻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대리 승부사를 하면서 손가락 열 개가 온전히 붙어 있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 정도였다.
반대로 승부에서 이기면 상대 조직의 원한을 샀다.
실제로 나는 남자들에게 납치되어 구덩이에 묻히기 직전에 구조된 적이 있다. 도쿄만에 가라앉을 뻔한 적도 있다. “살고 싶다면 져라”라는 협박을 받으며 일본도를 겨눈 상대 앞에서 마작을 친 적도 있다.
이겨도 져도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런 뒷세계에서 내가 20년 동안 무패로 지낼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운이나 행운도 따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운과 행운은 스스로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운과 흐름을 감지하는 힘, 즉 감성과 ‘직감력’이 있다면 그러한 역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은 마작 같은 승부의 세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승패가 걸린 상황뿐 아니라 자기 앞에 갑자기 닥친 뜻밖의 사태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폭포 아래의 깊은 웅덩이에 떨어졌다고 하자. 거센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수면으로 올라가려 하면, 도중에 힘이 빠져 결국 익사할 수 있다.
하지만 물살에 거스르지 않고 급류에 몸을 맡겨 폭포 웅덩이의 바닥까지 흘러가는 편이 오히려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 바닥은 물살이 그다지 거세지 않고 전체 흐름도 파악할 수 있다. 흐름을 알게 되면 수평으로 이동해 폭포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뒤 수면으로 올라오면 된다.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몸이 느끼는 대로 침착하게 행동하면 살아남을 길이 선명하게 보인다.
어떤 역경에 놓이더라도 늘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냉정해지면 문제의 본질과 해결로 향하는 길이 감으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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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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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내 감을 믿고 행동해 왔다.
마작의 뒷세계에서 20년 동안 무패로 지낸 것, 그리고 환갑을 넘긴 지금까지도 사지가 멀쩡한 채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직감력’ 덕분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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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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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력”이 날카로운 사람의 네 가지 조건
이 책에서는 직감력을 단련하는 방법을 전하려 한다. 그것은 지친 사회를 힘차게 살아가는 방법이며,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 방법을 크게 나누면 다음 네 가지다.
1. 상식과 지식을 버린다.
2. 자연에서 배운다.
3. 약한 존재, 특히 아이에게서 배운다.
4. “양보하는 힘”을 안다.
각각의 내용은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
그런데 요즘 내게는 고민을 품은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와 상담한다. 잡지 인터뷰도 많고, 이 책처럼 원고를 써 달라고 찾아오는 편집자도 끊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는 위대한 경영자도 위대한 학자도 아니다. 그저 마작장을 하는 아저씨일 뿐이다. 그런 내게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으러 오고 책을 써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예전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지금의 세상이 나와 같은 삶의 방식을 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 아이디어처럼 머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의 소중함을 피부로 깨닫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나는 특별한 인간이 아니다. 직감력은 옛사람이라면 누구나 평범하게 가지고 있던 능력이다. 다만 세상이 편리해지는 동안 현대인이 잊어버린 능력일 뿐이다. 나는 인간이 본래 지닌 그 능력을 소중하게 다뤄 왔을 뿐이다.
따라서 직감력이라는 본능은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그것을 깨우는 순간, 지금 놓인 최악의 상황이나 품고 있는 고민에서도 해결의 실마리가 순식간에 보일 것이다.
사쿠라이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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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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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승패”를 버리면 감은 날카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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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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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승패”란 무엇인가
말은 그 시대의 세태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승자 그룹·패자 그룹’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유행한 것은 몇 년 전인지 모르지만, 이제는 완전히 정착해 버렸다.
‘승자 그룹·패자 그룹’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세상에서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이 눈에 보일 만큼 명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에도 빈부 격차는 있었겠지만, 비슷한 가정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았는데도 우열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같은 회사에 입사했어도 이후의 승진에서 큰 차이가 벌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승자 그룹에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패자 그룹이 되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한다. 상대를 끌어내려서라도 자신만은 승자가 되려 한다.
그렇게 해서 정말 행복한가.
여기서 말하는 승자와 패자는 대부분 수입의 문제일 것이다. 즉 우리는 돈이라는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먼저 그런 승패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돈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모두 돈이라는 악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애초에 ‘승자 그룹·패자 그룹’이라는 말이 생긴 것 자체가 이상하다. 자본주의에서는 이기는 회사와 지는 회사, 나아가 이기는 자와 지는 자가 생기는 것이 필연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나는 자본주의나 돈과는 인연 없이 살아온 사람이다.
마작 대리 승부사를 한 것도 돈 때문이 아니었다. 뒷세계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더 강한 상대와 그 길의 고수를 찾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대리 승부사의 세계에 도착했을 뿐이다.
그래서 큰 승부에서 이겨도 보수를 받지 않은 적이 있었다. 승부 뒤에는 라면 한 그릇을 먹으며 승리의 여운을 느꼈을 뿐이다.
내 본능이 ‘돈에 중독되어서는 안 된다’고 감지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이겼다는 것은 그만큼 패배한 사람이 있다는 뜻임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내가 사지가 멀쩡한 채 살아가는 것은 패한 사람들의 시체 위에 세워진 삶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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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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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허무함 때문에 나는 마작 대리 승부사의 삶에서 손을 씻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수많은 피해자 위에 존재하는 가해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에서 성과를 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돈을 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 돈을 빼앗는 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다”라는 마음가짐은 결정적인 순간에 담력을 주어 살아남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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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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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도 사람은 진지해질 수 있다
나는 젊었을 때 9년 동안 무급으로 일한 적이 있다.
마작을 통해 알게 된 어느 회사 사장이 나를 눈여겨보고 “우리 회사에서 일하지 않겠나?”라고 권했다. 나는 그 사장의 삶에 공감하고 있었기에 두말없이 입사했다.
다만 급료는 받지 않았다.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보통은 일을 하면 돈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존경하는 사장에게 인생을 배울 장소를 제공받았으니 그 회사에서 돈까지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급료라는 돈으로 내 가치를 정해지는 것도 싫었다.
무급이었지만 아마 회사 안의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고, 실적도 가장 많이 올렸다고 생각한다. 만약 월급이 30만 엔으로 정해져 있었다면 “그만큼만 일하면 된다”, “이만큼 일했으니 더 받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생겼을 것이다.
돈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돈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돈만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사장과 함께 일하는 동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래서 내 도장에서는 돈을 걸지 않고 마작을 친다. “마작은 돈을 걸어야 진지해져서 재미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도장의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게 마작을 친다. 진검승부가 반드시 돈에 달린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라는 진검승부도 있다. 자신을 위해 애쓰는 승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노력하는 승부다. 그런 승부도 있다는 것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젊었을 때 나는 돈을 얻는 일을 더럽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일해서 돈을 받지만, 어쩐지 그것이 더러운 일처럼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일종의 위화감이나 저항감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돈을 원하고, 그것을 하나의 목표로 삼아 노력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은 많다. 반대로 돈을 많이 가지고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도 많다. 돈을 얻으면 얻을수록 이번에는 그것을 잃을 불안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돈은 필요할 수는 있어도 행복을 판단하는 가치 기준은 아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그러나 나는 돈 자체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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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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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먹을 것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다에 잠수하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산에 가면 먹을 수 있는 산나물이 얼마든지 있다. 먼 옛날 사람들은 돈 없이도 살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완전히 잊은 것이 아닐까.
적어도 돈은 편리할 뿐 소중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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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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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익 계산이 감을 무디게 한다
‘승자 그룹·패자 그룹’만이 아니다. 세상에는 정말 불쾌한 말이 넘친다. 격차 사회, 편차치, 명문학교 입시, 입시 전쟁, 교육 열성 엄마, 결혼 활동, 기업 전사…. 이런 말의 뒤에는 모두 손익 계산이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의 역사를 보면 전쟁이 없었던 시대는 없다.
그 대부분은 종교 전쟁이지만, 그 이면에 석유 이권을 차지하려는 손익 계산이 작용한다는 사실도 틀림없다. 자기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전쟁을 일으켜도 된다는 논리가 잘못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모두가 전쟁은 악이라고 알면서도 ‘입시 전쟁’, ‘기업 전쟁’ 또는 ‘경제 전쟁’이라는 말을 태연하게 사용하는 모순을 깨닫는 사람은 적다.
“전쟁 반대!”라고 외치고 “모두 사이좋게 지내자!”라고 말하면서 왜 전쟁을 하는가. 그 무신경함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그 배경에도 역시 손익 계산이 있다.
열심히 공부해 좋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대학과 회사에 들어가면 장래에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손익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입시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다.
언론이 자꾸 사용해서인지 ‘오주켄’, 즉 특별한 조기 입시라는 말은 이제 일반 명칭이 되었다. 왜 ‘입시’에 높임말을 붙여야 하는가. 입시가 그렇게까지 귀한 일인가.
학문은 정말 흥미가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장래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손익을 따지지 않고 학문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나는 결코 학문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며 열등감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학문을 넘어서는 무언가, 학문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며, 그 힘으로 지금까지 제법 잘 살아왔다.
즉 학문이라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본능이다. 인간이 아주 먼 옛날부터 지녀 온 야성의 본능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성과 정반대일지도 모른다. 나도 평범하게 학교를 나왔고 대학에도 갔다. 나름의 지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지성은 모두 버렸다. 지금은 가능한 한 스스로 지식을 쌓으려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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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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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을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휴대전화도 가지지 않고 컴퓨터도 전혀 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자격증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도 없으며, 운전면허증조차 없다.
그 대신 사회에 나온 뒤 직접 경험한 것과 자연에서 얻은 것을 섞어 만든 감각을 소중히 여긴다.
‘기업 전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결국 자기 급료나 출세를 위한 손익 계산이다.
그 안에는 자기 회사만 괜찮다면 다른 회사는 망해도 된다는 논리가 작용한다. 자신이 손해 보기 싫어서 이익을 고르는 것인가.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서라도 자신만 성공하고 싶은 것인가.
애초에 올바른 일만 하면서 성공할 수는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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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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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함”과 “이용 가치”로 다른 사람을 보지 마라
돈은 편리한 것이다. 세상을 보면 실제로 그러하니 그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진보란 편리한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한 물건으로 넘쳐난다.
돈은 편리함을 이용하게 해 주는 수단이며, 가장 손쉽게 손익 계산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물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 돈을 손에 넣으려 한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느끼는 감각에 익숙해져 있다.
이 감각은 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 번 자기 가슴에 물어보길 바란다.
사귈 사람을 편리한지, 이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 고르고 있지는 않은가.
“회사 안에서 인간관계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상담하러 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서로를 편리함과 이용 가치로 고르고 있으니 관계가 잘될 리 없다.
업무 능력도 그 사람을 이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아는 대기업 사장에게 “요즘 어때? 괜찮은 부하 직원은 있어?”라고 물었더니 “신경 쓰이는 녀석들은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무엇이 신경 쓰이느냐고 하면 결국 능력이다.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만 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볼 때에도 결국 편리함과 이용 가치로 판단한다. 회사에 편리한 존재인지, 사장이 이용할 수 있는 존재인지에 따라 사람을 고른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곁에 있는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집에 돌아가면 자녀와 손주도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운 존재와는 이해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도장의 직원이나 자녀, 손주를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세상이 편리함과 이용을 중심으로 변한 것은 사실이다. 옛날에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가려면 걸어가야 했지만 지금은 자동차가 있고, 신칸센을 타면 두 시간 반 만에 도착한다. 인터넷도 편리할 것이다. 원하는 정보를 순식간에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이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해된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한다.
당신이 편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찾아다니듯이, 다른 사람이 당신 자신을 편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편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만을 추구하는 감각이 몸에 배면, 당연히 당신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취급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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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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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취급을 받는다면 당신은 화가 나지 않겠는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당신은 참 편리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는다면 역시 슬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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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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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꿈”, 아름다운 말일수록 의심하라
이용할 수 있을 때에는 ‘사랑’이라고 말하다가 이용할 수 없게 되면 “사랑이 식었다”고 말한다. 모두가 “사랑이 전부다”라고 말하지만 결국 사랑도 손익 계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것을 원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고귀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도 인간뿐이다. 거북이가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할까. 식물이 사랑이라는 말을 원할까.
사랑은 매우 무섭다. 사랑을 강하게 품을수록 그것이 무너졌을 때 증오로 바뀐다.
아름다운 말에도 불필요한 것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꿈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자”고 자주 말한다. 꿈을 소중히 하는 교육이 좋다고 여긴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그런 말을 한다.
꿈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묶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자신이 그린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애초에 꿈과 희망을 갖기 어려운 사회를 만들어 온 것은 우리 어른들이다. 그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꿈을 가져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 리 없다. 나는 “이런 사회를 만들어서 미안하다”라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고, 아름다운 물고기에는 독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말에도 가시와 독이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말일수록 의심하지 않으면 진실을 붙잡을 수 없다.
나는 ‘반신반의’라는 말을 자주 쓴다. 절반은 믿고 절반은 의심한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옳다고 여겨지는 일이라도 절반은 의심해 보는 자세를 익히는 것이 좋다.
많은 사람이 성공하고 싶다고 말한다. 무엇에 성공하고 싶은지, 무엇을 성공이라고 부르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부분은 금전적 수입을 뜻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다른 사람보다 많은 돈을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고 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흔히 “성공하려면 감사하는 마음을 소중히 하자”고 말한다. 또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훌륭한 이념을 내걸자”고 한다.
말만 보면 옳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착취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세상 사람을 위한 일이라면 원가에 팔면 된다.
원가에 팔면 자기들의 급료가 사라진다고 한다면, 필요한 몫만 남기고 가능한 한 사회에 환원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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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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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공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많은 이들은 좋은 시계를 차고, 좋은 차를 타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 좋은 집에 살고 자기 자산을 지키는 일에도 열심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일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겉으로는 옳아 보이는 말의 뒤에도 손익 계산이 숨어 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보이면 자신도 감사받을 수 있고, 세상을 위해 장사한다고 말하면 자신도 신뢰받을 수 있다. 그런 손익 계산이 존재한다. 교묘한 속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른바 성공 법칙이나 어떤 사상의 이면에 있는 것은 결국 단순한 ‘속셈’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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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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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종교는 “누군가의 의견”일 뿐이다
사상은 무섭다.
사상이나 종교가 생긴 것은 겨우 수천 년 전의 일이다.
왜 종교라는 것이 생겼을까.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불교든 아주 먼 옛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인간의 심리와 마음을 잘 관찰한 누군가가 만든 것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과 공명하고 공감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다른 사람과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생물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종교가 생기기 수만 년 전의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열 명이나 스무 명, 또는 백 명 정도가 무리를 지어 행동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리를 이루려는 본능을 가진다.
사상이나 사고방식, 가르침이 있으면 인간은 쉽게 무리를 이룬다. 그 사상과 가르침이 옳은지는 관계없다. 인간이 무리 짓고 싶어 하는 성질을 잘 관찰한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종교라는 간판을 내걸었을 뿐이다.
정말 사상이나 가르침이 옳다면 종교 전쟁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종교가 생긴 지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전쟁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자기들과 사상이 다른 사람이라면 죽여도 되는가. 왜 그런 잔혹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이런 뜻이다.
하나의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고정관념의 무서움이다. 고정관념에 묶인 사고는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애초에 세상에는 절대적인 좋고 나쁨이 없다. 백 명이 좋다고 말해도 자신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다른 행동을 하면 된다. 다른 사람의 ‘좋다·나쁘다’라는 판단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 된다.
흔히 “그 사람은 좋은 말을 하니까 강연회에 가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대학 교수이니 틀림없이 좋은 말을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것을 ‘좋은 말 병’이라고 부른다.
세상에서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큰 잘못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자신이 찾아내고 자신이 판단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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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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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하나의 매뉴얼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서 ‘좋은 것’이라고 불리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학문일 것이다.
학문은 하나의 매뉴얼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정해진 것을 배우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누구보다 공부를 잘한다”고 자랑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애초에 학문이 생긴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옛사람들은 학문을 하지 않고도 살아왔다.
에도 시대에 어느 훌륭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한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학문만 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훌륭했을 텐데.”
나는 그 할머니의 말이 참 옳다고 늘 생각한다. 웃긴 이야기지만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 할머니는 학문이라는 말의 의미조차 몰랐을지 모른다. 그래도 ‘학문’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었다. 불과 몇 세대 전에는 그런 시대였다.
학문은 누구나 익힐 수 있지만 일정한 단계까지는 매뉴얼에 불과하다. 그 학문에서 좋은 성적을 얻은 사람이 사회에 나가면 미래를 보장받았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게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도쿄대를 나오면 관료가 되거나 일류 기업에 들어갔다. 삼류 대학을 나오면 삼류 회사에만 들어갈 수 있었고, 고졸이나 중졸이면 들어갈 수 있는 회사가 더 좁아졌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중졸이어도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어느 정도의 위치는 미리 정해졌다.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미래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학문은 매뉴얼이다. 답이 정해진 것을 공부할 뿐이다. 답이 먼저 존재하므로 시간을 들여 공부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을 많이 하면 성적이 좋아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머리가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말은 거짓이다. 진정한 학문은 답이 정해지지 않은 것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이미 정해진 것을 배우는 것은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 정해지지 않은 것을 느끼고 알려고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학문의 세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꾸로 말하면 정해져 있는 것은 그 자체로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다. 앞서 말한 ‘좋은 것과 나쁜 것’도 누군가가 정해 둔 것이다.
매뉴얼에 불과한 학문을 통해 익힌 ‘좋고 나쁨’의 판단 기준 때문에 좀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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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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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정말 아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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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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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과 경력이라는 간판을 내려놓아라
감각적으로 “이렇게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머리로 생각한 뒤 “그만두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하자. 몸은 회사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른 공기를 원하지만, 머리는 “회사를 그만두면 앞으로가 불안하다”고 생각하며 그 마음을 억누른다.
그것은 한번 회사를 그만두면 좀처럼 새로운 직장을 구할 수 없다는 지식을 익혀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무조건 회사를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인 예일 수 있지만, 자신에게 이익인지 손해인지 머리로 계산해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얻은 지식, 학문을 포함한 지식이 새로운 행동으로 옮기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
학문이라는 간판, 상식이라는 간판, 사회라는 간판을 짊어진 탓에 그것들이 짐이 되어 움직이지 못한다.
그런 간판은 내려놓으면 된다. 아이로 돌아가면 된다. 어른인 척 어려운 말을 하고 똑똑한 척하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가기 어려워진다.
어릴 때처럼 바보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간판을 내려놓을 수 있다. 누구 앞에서든 바보가 되어 보라. 사장 앞에서도 상관없다. 친구 앞에서는 바보가 될 수 있지만 사장 앞에서는 그럴 수 없다면, 그것은 상식이라는 간판 때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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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요구하지 않으면 짜증도 나지 않는다
어떤 사회에나 제도라는 것이 있다. 폭군의 제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히틀러는 히틀러의 제도를 만들고, 마오쩌둥은 마오쩌둥의 제도를 만든다. 북한에는 장군님의 제도가 만들어져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제도가 있다. 당시에는 민주당의 제도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회 제도라는 틀 안에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그래서 모두가 짜증을 내는 것이다.
사회의 상식에 따르는 것, 사회가 좋다고 부르는 것에 맞추느라 자신이 짜증을 내고 있지는 않은가. 상식적인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짜증이 난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엄격한 상식을 요구받는 직업의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교사, 경찰관, 관공서 공무원, 은행원처럼 딱딱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치한 같은 성범죄에 빠지기 쉬운지도 모른다.
여관을 운영하는 지인이 있는데, 가장 불쾌한 손님은 대개 그런 딱딱한 직업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유카타나 여관에 비치된 물건을 태연하게 가져간다고 한다. 현장 노동자들은 아무도 가져가지 않지만 어느 학교 교사 단체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훔쳐 간다는 것이다.
나는 교사나 공무원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적인 사회를 비난하는 것이다. 제도와 형식에 지나치게 억눌려 있기 때문에 나쁜 방향까지 갈 필요가 없는데도 그 선을 넘어 버린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유로움’ 같은 것이 있다. 누구에게나 있는 ‘인간의 자유’가 억압과 충돌하면 틀 안에 갇힌 사람은 한 발을 잘못 내디뎌 죄를 저지를 수 있다.
만들어진 틀 밖으로 나가 마음껏 놀 수 있다면 사실 죄를 짓지 않고도 끝낼 수 있다. 틀 안에서 답답하게 억눌리기 때문에 어느 순간 크게 선을 뛰어넘는다.
사회 제도라는 상식을 만드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그 제도를 침범하는 측면도 크다. 그들은 제도를 잘 알기 때문에 빠져나갈 길도 잘 안다. 자기들만 아는 빠져나갈 길 안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것을 ‘범죄가 될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한 선’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범죄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경계에서 출세하거나 돈을 버는 사람이 많이 있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도 그랬을지 모른다. 국회의원도, 대기업 경영자도 그럴 수 있다. 죄 많은 일을 바탕으로 성공하는 것이다. 성공은 죄 많은 일 위에 서 있다. 그 정도가 지나쳐 중대한 범죄가 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런 나쁜 사회에서 올바른 일만 하면서 성공할 리 없다. 사회가 좋은 곳이라면 제대로 된 사람이 성공하겠지만, 지금의 세상을 보고 누구나 나쁜 사회라고 느낄 것이다. “지금 사회는 정말 좋습니다”라고 매일 말하는 사람이라면 짜증을 내거나 스트레스를 쌓을 리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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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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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하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어쩐지 짜증이 난다는 것은 몸이 사회가 나쁘다고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나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나는 악인이 되려고 합니다”라고 공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악인』이라는 영화가 유행하는 현상 자체도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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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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